Gospel Letter. '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
교회는 다니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훈련을 받는 분들도 많습니다. 아침마다 설교를 틀어놓고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스스로 신앙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헌금도 많이 하고 또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딜 가나 자기는 신앙이 매우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예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절대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자기를 부정하고 성령을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세상과 싸우고, 영적인 싸움을 싸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당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행여 그런 일이 벌어지면 원망하고 불평부터 합니다. 말씀도 내 성공을 위해 듣지 하나님과의 관계로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 순종이 없습니다. 교회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주었나 생각하지 그리스도 안에서 한 지체로 살며 활동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즉, 변화가 없는 삶을 삽니다. 자기는 보이는데 그 사람에게서 하나님이 보이지 않습니다.
청년들과 성경 좀 읽자고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해보니 참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알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만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삶을 생각해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 감사함으로, 정말 행복하게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십자가로 거듭나지 않았는데 어찌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겠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_왕상18:21’
꽃만 꺾으려고 합니다. 열매만 따려고 합니다. 꽃만 꺾어다 놓고 열매가 맺혔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뿌리도 없고, 그 과정도 없습니다. 그저 결과에만 목을 맵니다. 과정이 고달프다고 생략해야겠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걸 모르면 자꾸 어떤 현상이나 상황, 환경에 목을 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여전히 어디로 갈까? 고민하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바알이든지 하나님이든지 결정을 해야 합니다. 물론 그 결정이 오래 걸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사이에서 머뭇머뭇거리는 것이 신앙생활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참 많습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경험했다는 증거는 한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영혼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의 모습이 감사입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이 잘 풀려서 감사하다가 아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서 감사하다가 아닙니다. 그런 감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에 모든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내 환경도, 내 상황도, 내 모습도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십자가에서 오는 감사는 우리 삶에 엄청난 변화를 줍니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죄의 흐름을 바꾸기 위해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영적인 싸움입니다. 내 힘으로 싸울 수 없기 때문에 성령께 의지합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되고 믿음도 성숙해집니다. 그런 과정이 없이 주일에 교회 한번 갔다고 성경 좀 읽었다고 헌금 좀 했다고 믿음이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 생각해보십시오. 정말 예수님을 믿고 계십니까?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생명의 기운입니다. 생명으로 가기 위해서 입니다.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저에게 가까이 오매 저가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되_열왕기상18:30’
_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하길 간절히 원하며, 오승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