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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9-09-29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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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9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파수꾼의 정체성

본 문 :

에스겔33:7-9

박경도 목사

 

. 파수꾼의 소명_에스겔1:1-3,2:1-4,3:1-3

 

파수꾼이라고 했을 때 여러 가지를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만 구약성경에서, 하나님 말씀에서 나오는 파수꾼이라고 했을 때에는 크게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키는 자입니다. 요충지를 제대로 지키고 그 속에서 어떤 현장 속에서 일들이 일어나는지 버티고 서서 지키는 자이고 또 한 가지는 현장에서 단순히 자리만 차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목하여 보는 자입니다. 어떤 현상이 일어나고 무엇이 어떻게 변화되어지는지 버티고 서서 중요한 것을 주목하여서 볼 수 있는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중요한 자리에서 중요한 것을 보고 내 개인의 유익, 가정의 유익을 위해만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받은 사명, 그가 지켜야 할 전체를 위해서 마지막 때에는 강력하게 외치는 자입니다. 전달하는 자입니다. 적군이 쳐들어 왔다. 이런 저런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것을 외치다 죽는 사람이 파수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현장에 서 있어서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입술을 벌려 담대하게 선포하는 자가 파수꾼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인물은 에스겔입니다. 에스겔은 실제로 선지자이기 보다는 가문과 가정의 배경은 제사장 계열입니다. 제사장의 지파에 있는 유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쉽지가 않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제사장이 일을 하고 사역이 감당하는 곳은 일반적인 가정이 아닙니다. 제사장은 이런 저런 사건과 사고가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가 있어야할 현장은 주의 성소입니다. 성전에서 맡은 임무가 있는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그 성소가 망하게 되었습니다. 또 내가 그 성소에서 일을 감당해야하는데 그것도 11절에 보면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제사장의 후손으로는 그가 제사장의 역할을 제일 감당해야할 때가 만 30세부터 50세까지의 역할입니다. 나이 30살에 되어서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할 순간에 성전은 없는 것입니다. 없다기보다는 환경과 조건을 그것을 충족하지 않는 것입니다. 역할을 해야 할 가장 중요한 현장과 시기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때가 열려진 것입니다. 그 때가 어느 때이냐면 바로 지금인 것입니다. 에스겔이 30살이 되어졌지만 30년이 지났다는 말은 이스라엘의 착한 왕이라고 마지막 부흥의 불꽃을 피운 사람이 요시야 왕입니다. 요시야 왕이 어렸을 때부터 왕이 되어져서 어떤 사건과 사고를 거치고 마지막 부흥의 가도를 갈 때가 2차 부흥의 날이었습니다. 요시야 왕이 2차 예루살렘의 부흥의 운동을 일으켰을 그 때에 옛날에 잃어버렸던 하나님 앞에 겸비하며 나가겠다고 했을 때에 그 때 그것을 기념하여 날짜도 바뀌었습니다. 그 날이 그렇게 30년이, 한 세대가 흐르기 전에 바벨론에게 망하게 됩니다. 요시야 왕의 2차 부흥운동의 30, 내가 출사표를 던지고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해야 될 나이 30살이 되었던 에스겔에 있어서 성전은 없습니다. 성전이 왜 없냐면 5년 전에 이미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거기서 포로를 끌고 나갔습니다. 아직 예루살렘은 있습니다. 성전도 있고 왕도 있지만 참 왕은 아닙니다. 왕이 바뀌고 18살이 된 왕이 석 달도 되지 않고 바벨론이 지켜보고 있다가 왕과 귀족들과 사람들을 데리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옮겨가서 이제 그로부터 5년이 흐른 그 때에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에게 임합니다. 나의 지파, 나의 천명이라고 할 수 있는 제사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왕과 함께 포로로 끌려와 갈대아 그발 강가에서 예루살렘을 향해 바라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과 걱정하는 수많은 유대인들과 함께 있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직분을 보면 왕이 있습니다. 왕은 통치자입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도 왕을 주십시오. 할 때마다 사무엘선지자도 하나님께서도 왕을 아느냐 내가 너희의 왕이지 않느냐 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부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주변을 보면 강력한 통치자가 없었기에 아무래도 왕이 있어야 구심점이 생겨 통치를 잘해서 힘 있게 가보겠다고 하겠지만 전 이스라엘의 역대기를 확인해보면 괜찮은 왕은 단 한명도 없었습니다. 늘 왕의 통치 때문에 어려움과 고통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힘 있는 권력을 가진 통치자이고 그 나라를 안위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백성들의 삶에 있어서 왕은 늘 좋은 적은 많지 않습니다. 선지자는 어떤 역할이 있냐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전달해야 하는데 말을 받아서 전달할 때 좋은 말도 들으면 식상해지는데 주로 선지자가 하는 말이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망한다. 우상숭배에서 돌이켜야 한다. 맞는 말이지만 계속 말하지만 받는 사람입장에서는 늘 찔림이 됩니다. 그가 깨우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임무라는 것은 인정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대속제일에 대제사장이 민족의 죄를 위해서 한 번 들어갈 때에도 제 자신을 위해서 번제를 드리고 들어갑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범죄 하였고 항상 하나님의 앞에 나가야 한다. 사실상 제사장은 위로자의 역할입니다. 그래서 왕은 두려워하는 존재이고 성경 전체를 봤을 때에 인기 있는 선지자는 몇 되지 않습니다. 제사장의 지파는 늘 주위에 있고 드러나지 않으면서 항상 잘못들을 가려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도와주니까 위로자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선 에스겔인데 제사장의 역할도 할 수 없고 포로로 끌려왔고 예루살렘도 넘어가고 있을 때 그 때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 때에 하나님이 에스겔을 부르십니다.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_에스겔 1:1-3’

 

이것이 에스겔의 첫 번째 소명입니다. 에스겔의 이름 자체가 여호와께서 하나님이 강하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어느 때보다 그 나라는 약합니다. 그 개인은 힘겹습니다. 그리고 소망도 희망도 없습니다. 그때 낙심하고 다 버려두고 싶을 때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그의 영혼, 심령, 온 육신을 사로잡아 가는 것입니다. 제사장의 역할을 감당하고 이들을 섬기고 싶고 주의 성전에서 내 역할을 감당하고 싶은데 모든 기회와 배경과 환경은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에게 선지자적인 역할을 감당하라고 말씀해주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소명을 받는다고 할 때 내가 원해서 다른 사람들이 해보라고 해서 우리에게 있어서 소명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 발로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그가 내게 말씀하실 때에 그 영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내 발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그들과 그 조상들이 내게 범죄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나니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굳은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_에스겔2:1-4’

 

파수꾼의 특징을 아까 말한 것처럼 지키는 자입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지키는 자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하여 보고 주목하여 듣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어디에 있고 하나님이 어디에 주목하고 있는지 제대로 본 자이고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을 외치는 자입니다. 그 사명을 감당하라고 에스겔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에스겔은 거부할 수 없고 평생에 있어서 그 사명을 감당하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에스겔의 첫 번째 소명이 에스겔 3:1-4 입니다. 에스겔의 33장에 똑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에스겔의 첫 번째 소명이 있었고 똑같은 말로 하나님이 에스겔을 부르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또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발견한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를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_에스겔3:1-3’

 

이 말씀은 에스겔에서 말씀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모순적인 것이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때 몇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너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너를 싫어하기 때문에,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너를 미워하고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패역한 백성이 나를 싫어하고 나를 거부하는 것이다. 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가서 전하라고 합니다. 돌이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언약을 말하라고. 그러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너가 말해도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너가 잘못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나를 떠났기 때문에 너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이다. 귀를 가린 것이다. 그래도 너는 가서 말해라. 라는 겁니다.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와서 갈대아 땅 그 발 강가에 유대인의 공동체가 일부 형성되어있고 약 15-20년이 지날 때 예루살렘은 함락됩니다. 함락되기 전에 그 유대인들에게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와 에스겔은 동시대 사람입니다. 예레미야도 계속 말합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된다. 망할 것이다. 하나님께 무릎 꿇고 포로로 가는 것이 맞다고 하니까 시위대에 가두어 놓는 것입니다. 나는 친바벨론파이고 너는 이스라엘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고 선지자로써의 역할을 못하고 있지 않느냐. 계속 비난하게 됩니다. 그런데 실상은 무엇입니까? 지금 예민한 이 때에 나는 친일파가 좋아요. 유니클로만 입어요. 일본브랜드만 좋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나라가 힘들고 망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서 마음을 합치고 함께 싸워보자. 이렇게 해야 될 때에 예레미야도 에스겔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너희에게 돌이키라고 말씀하고 너희에게 다시금 회복하라고 말씀하지만 예루살렘은 망해야 한다고 할 때 누가 인기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결국은 에스겔에게 말씀이 임하고 난 다음 11년 이후에는 예루살렘의 성전까지 망하게 됩니다. 그렇게 나누어져 있는 현장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말씀이 이들은 절대로 안 들을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가서 전해라.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다는 소명에 대해서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3:1-4의 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임하여서. 환상입니다. 상징입니다 그 말씀을 어떻게 먹습니까? 하는데 먹여집니다. 목구멍으로 삼켰습니다. 내 뱃속에 들어오고 창자에서 소화가 되니까 그 말씀이 다른 사람들이 몰라주고 내 가족이 인정하지 않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환경도 조건도 없는데 그 말씀이 내게 임하니 이것이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고 감사가 되고 축복이 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단 것이 와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 번, 천 번, 만 번을 말해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가 너무나도 커서 모든 부분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명입니다. 그것이 소명입니다. 그것이 사명입니다 그렇게 에스겔은 파수꾼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기 싫을 때에는 안해야 합니다. 그건 소명이 아닙니다. 좋아보면서 다른 사람이 원해서 지지해서 한다면 여론이 바뀌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소명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떤 현장과 조건에도 그것도 상관없이 나 스스로가 거부하고 싶을 때에도 되어 질 수밖에 없는 그 것.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한 체험이 한번이지만 앞으로 살아가는 모든 만남과 사건 속에서 답이 되고 힘이 되고 비교 할 수 없는 지극히 큰 기쁨이 되어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되어 진다면 살아가지는 것입니다. 거부할 수 없는 은혜가 내게 있기에 다른 모든 것들은 잠잠해지는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이것도 생각나고 저것도 생각나고 이것도 눈에 밟히고 저 소리도 들리고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나서는 간단한 것입니다 잠잠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에게 허락하신 소명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 파수꾼의 사명_에스겔3:16-21

 

1. 나를 지키는 파수꾼_에스겔3:16-21,빌립보서4:6-7

 

에스겔이 파수꾼으로써의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나요?

 

칠 일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의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또 의인이 그의 공의에서 돌이켜 악을 행할 때에는 이미 행한 그의 공의는 기억할 바 아니라 내가 그 앞에 거치는 것을 두면 그가 죽을지니 이는 네가 그를 깨우치지 않음이니라 그는 그의 죄 중에서 죽으려니와 그의 피 값은 내가 네 손에서 찾으리라 그러나 네가 그 의인을 깨우쳐 범죄하지 아니하게 함으로 그가 범죄하지 아니하면 정녕 살리니 이는 깨우침을 받음이며 너도 네 영혼을 보존하리라_에스겔3:16-21‘

 

이 말은 이런 것입니다. 논리가 무엇이냐면 악인이 자기의 죄 때문에 죽고 멸망할 것이다. 그런데 파수꾼은 그를 깨우치는 사람이다. 그래서 악인이 죽음의 위기에 있는데 네가 그를 깨우치면 그가 산다. 그리고 너도 산다. 그런데 악인이 자기의 죄악 가운데에서 당연히 죽을 것인데 네가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다 한다면 그도 죗값으로 멸망하고 죽음에 이르겠지만 그 피 값을 너에게도 원한다. 말이 안 되는 것은 그들에게 말씀이 안 듣는다고 했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전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다. 그래도 전해야한다. 전하지 않으면 그 피 값을 너에게 구하겠다. 또 의인이 타락하면 이스라엘은 언약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상이 있냐면 내가 조금 부족해도 우리의 조상 때문에 그 영적인 영향력이 있어서 자손들도 괜찮다. 이런 부분이 있는데 지금 이 때에는 분명히 말합니다. 의인이 자기의 길에서 돌이켜 악을 행한다면 그 전에 있었던 의인은 상관없어질 것이다. 그에게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말하지 아니하면 그가 죄악 때문에 죽은 피 값도 너에게 할 것이고 그 의인이 타락하여 죽음의 위기에 처했는데 네가 그를 깨우치게 한다면 그는 살 것이고 너의 영혼도 보존될 것이다. 아주 방어적인 것입니다. 마치 야구를 할 때 투수 같은 것입니다. 투수는 승리를 하게 하는 역할은 아닙니다. 100으로 이기든 109로 이기든 승리를 하려고 하려면 점수를 내야 합니다. 내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방어를 해야 합니다. 놀라운 것은 에스겔 선지자도 예레미야 선지자도 마찬가지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를 떠나서 패역한데 네가 저 이방인들에게 가서 말이 통하지 않는 백성들에게 가서 통역 없이 말해도 그들은 돌이킬 것이다 그런데 내 백성 이스라엘은 나를 떠나서 정확하게 말해도 귀를 가리고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너는 가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그 일을 평생 하라는 것입니다. 계속 거부당하고 좌절 할 수밖에 없는 그 일을 계속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파수꾼입니다. 이것이 사명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일을 무엇으로 계속 해야 하느냐.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께서 그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다고 하는 소명에 대한 분명한 이유가 있을 때만 그 사명이 감당이 되어집니다. 어떻게 그 사명을 감당합니까. 나를 지키는 영적 파수꾼이 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두려워 할 일들과 염려해야 할 일들, 근심해야할 일들은 너무나 많습니다. 빌립보서 4:6-7 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했는데 모든 것이 염려할 것들입니다. 내 생각, 내 마음, 내 뜻 주위 환경, 조건, 일들. 두려워 할 수밖에 없고 염려, 근심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들어차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 말합니다. 그래서 염려하지 말라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 스스로도 다 파악할 수 없는 모든 일들 속에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지키시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장을 지키시지 않으신다면 그 어떤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습니다. 이 의인, 이 악인, 이 모든 이스라엘의 백성들 결국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지 않으신다면 나 스스로도 개인들로도 결단코 지킬 수 없구나. 그래서 내가 사는 길은 누가 사는 길입니까. 에스겔이 사는 길은 다른 길이 아닙니다. 그가 깨우쳐 돌이킬 의인이든 그가 깨우치지 못할 악인이든 어떤 사람이든 깨우쳐 돌이키든 돌이키지 않든 파수꾼의 사명으로써 계속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사는 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자녀와 우리의 현장과 우리의 몸된 교회에서 내가 사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한 몸만 잘 먹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는 길은 주위가 사는 것입니다 그가 의인이든 악인이든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계속적인 언약의 말씀 흘러가서 그에게 전달되어져 나도 살고 그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신을 지키는 길입니다.

 

2. 교회를 세우는 파수꾼_에스겔47:1-12,디모데전서3:15

 

두 번째 영적 파수꾼의 사명은 개개인들이 지켜지고 응답을 받다보면 교회를 세우는 파수꾼이 됩니다. 에스겔서에 50번 나오는 두 구절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라는 말씀이 50번이 나옵니다. 동일하게 이와 대칭적으로 50번 나오는 구절은 그들이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그 선포되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이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이것이 계속적으로 전파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교회가 세워집니다. 우리가 읽었던 본문은 서론적인 부분에게 두 번째 소명의 장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동일한 것을 두 번 말하냐면 첫 번째 소명은 이스라엘의 심판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망한다는 소명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겔 11절부터 24장까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철저히 망한다는 말을 예루살렘에는 예레미야가 말했고 포로로 끌려가서 그발 강가에서는 에스겔이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망했습니다. 그것이 20년이나 지속적으로 말했습니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나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냐면 에스겔에게 두 번째 소명을 하기 전에 25장부터 32장까지는 주변 나라들에 대한 멸망을 말합니다. 어떻게 말하냐면 이스라엘이 나를 떠나서 흔들렸다. 그러다가 애굽을, 모압을, 앗수르를 일으켜 세워서 너희들을 정신 차리게 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이 정신 차리려고 한다. 너 애굽은 왜 이스라엘을 건드렸냐. 너도 멸망당해라. 이방나라까지 멸망을 선포하고 33장 이후에 이스라엘의 완전한 구원과 완전한 회복을 선포하는 것이 에스겔의 두 번째 소명입니다. 그 첫 번째 영적인 파수꾼이 소명을 회피하고 직면하지 못하면 두 번째 소명은 나타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이것입니다. 완전히 멸망합니다. 이것으로 끝이냐.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한다면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향한 완전한 멸망과 완전한 새로운 축복을, 구원을 예비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저와 여러분이 개인을 지키고 하나님의 언약을 감당하는 그것이 교회를 세워가는 길입니다.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_디모데전서3:15’

 

교회가, 이 집은 그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와 터와 기둥의 역할을 하면서 든든히 세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허물기도 하시고 세우시고 하시는 분이기에 사명을 이렇게 감당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멸망의 심판의 예언과 완벽한 구원과 회복의 심판의 예언이 우리에게 허락되어져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디에서 볼 수 있습니까? 에스겔 47:1-12 성전 문에서 나오는 서언 문지방에서 세밀하게 흘러져 나왔던 문지방 물의 비유가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는데 문지방에서 세밀하게 흘러나오던 물이 동쪽으로 남쪽으로 흘려 넘쳐서 도랑이 되어지고 나중에는 강이 되어지고 그 강을 측량해보라고 합니다. 나중에는 그 물이 내 발목까지 옵니다. 나중에는 허리가 되어지고 나중에는 사람이 건너질 못할 강이 됩니다. 그 강이 흘려서 바다를 살렸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미약해보이고 대수롭지 않게 보인다 할지 몰라도 그 말씀이 세밀하게도 끝까지 흘려 넘쳐서 그 말씀의 역사가 흐름을 가지고 가서 가정과 현장과 만남과 사건과 인생의 모든 것에 흘려 넘쳐서 내가 스스로 나의 현장에 내 의지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없는 큰 은혜의 물결로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모든 것을 뛰어 넘어졌을 때 그 주위의 모든 것들이 살아납니다. 주위에 있던 나무들이 과실을 맺고 물고기가 자라게 되고 어부들이 풍요롭게 되어집니다. 나중에는 그 물이 흘러가는 바다까지 회보되게 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요. 이것이 교회를 세우는 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너무나도 예민하고 세밀하여서 너무나도 능력이 없어보여서 그 물이 끊어버렸다면 강이 될 수 없고 바다로 흘러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악인이든 의인이든 듣든지 안 듣든지 깨우치던지 안 깨우치던지 그 말씀의 전달 통로로써 저와 여러분이 파수꾼의 사명을 감당했을 때에 다 살아나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가 사는 길이 내가 사는 길이고 우리가 사는 길이고 불신자와 현장 다 살아나는 길입니다. 이것이 파수꾼의 사명입니다. 나를 지켜야합니다. 우리 교회를 세워가야 합니다. 결국은 모든 현장을 살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 삼마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이 현장은 영적으로 바짝 마른 아무 소망도 없는 에스겔 37장의 마른 뼈와 같은 목숨이 왔다 갔다 할 때 구상일생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이 메말린 어떤 희망도 소망도 없는 곳에서 여호와의 지극히 큰 군대로 변화되어지는 역사가 우리 현장에 예비 되어져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 합니까?

 

3. 현장을 살리는 파수꾼_에스겔48:30-35,마태복음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_마태복음 28:18-20’

 

어떻게 가능합니까. 어떻게 아무런 힘도 없고 소망도 없는 그들이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 북쪽의 너비가 사천오백 척이라 그 성읍의 문들은 이스라엘 지파들의 이름을 따를 것인데 북쪽으로 문이 셋이라 하나는 르우벤 문이요 하나는 유다 문이요 하나는 레위 문이며 동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요셉 문이요 하나는 베냐민 문이요 하나는 단 문이며 남쪽의 너비는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시므온 문이요 하나는 잇사갈 문이요 하나는 스불론 문이며 서쪽도 사천오백 척이니 또한 문이 셋이라 하나는 갓 문이요 하나는 아셀 문이요 하나는 납달리 문이며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_에스겔 48:30-35’

 

그날 이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고 하니라. 여호와 삼마라는 뜻은 여호와께서 거기도 계신다는 것입니다. 동서남북 각각에 이스라엘의 12지파가 3지파씩 흩어져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로만 우리 가족으로만 우리 개인으로만 축소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방팔방으로 동서남북으로 과거 현재 미래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여호와삼마로 흩으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거기에도 있을 것이다. 왜 거기는 없다고 하고 왜 이 곳은 안된다고 하고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다고 하고 저것은 할 수 없다고 하느냐. 결단코 그렇지 않다. 북쪽으로도 문이 있고 남쪽으로도 문이 있고 동쪽으로도 문이 있고 서쪽으로도 문이 있다. 이스라엘 지파들이 다 흩어져 있다. 우리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들은 영적으로 흩어진 영적인 지파요 당신의 백성이요. 너희의 형제 자매이다. 그래서 그 현장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만방을 향해서 열방을 항해서 만민을 향해서 땅 끝까지 갈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호와삼마의 하나님. 하나님께서 거기도 계심이라. 우리가 현장을 정복하고 현장을 살려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관심이 없으시거나 하나님께서 버리시거나 하나님께서 거기에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 또한 그곳에 관심과 생각을 둘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서남북 모든 것에 당신의 나라와 당신의 백성과 당신의 자녀들을 흩으셨고 그들을 살리고 그들을 깨우치는 역할이 영적인 파수꾼으로 저희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나를 지키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이 땅에 헌신하면서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습니까? 온 땅이, 전 사방이 우리의 가정은 안 된다고 하는 그곳에, 우리의 직장과 현장은 소망이 없다는 그곳에서 내가 거기에 있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너를 파수꾼으로 보냈다. 그 은혜를 놓고 에스겔이 영적파수꾼으로써의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 파수꾼의 사명_에스겔24:24-27

 

쉽지 않는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파수꾼으로서의 천명입니다 소명과 사명을 지속적으로 일평생 감당함에 있어서 이것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하신 소명과 사명이, 천명이 맞느냐 했을 때에 저와 여러분이 고백해야 할 것이 에스겔 24장입니다.

 

이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인자야 내가 그 힘과 그 즐거워하는 영광과 그 눈이 기뻐하는 것과 그 마음이 간절하게 생각하는 자녀를 데려가는 날 곧 그 날에 도피한 자가 네게 나와서 네 귀에 그 일을 들려 주지 아니하겠느냐 그 날에 네 입이 열려서 도피한 자에게 말하고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너는 그들에게 표징이 되고 그들은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_에스겔24:24-27’

 

에스겔24:1-14를 보면 녹슨 가마에 대한 비유가 나옵니다. 양고기를 삶아서 먹으려고 하는데 가마가 녹이 슬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때가 있으면 고기를 먹고자 할 때 안 좋으니까 계속 불을 지펴서 가마를 녹일 정도까지 불을 땠지만 그 녹슨 가마에서 찌꺼기가, 오염된 물질이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버림을 당했습니다. 그러면서 에스겔에게 말씀을 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죽은 자들을 위하여 슬퍼하지 말고 조용히 탄식하며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 발에 신을 신고 입술을 가리지 말고 사람이 초상집에서 먹는 음식물을 먹지 말라 하신지라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 내가 아침에 백성에게 말하였더니 저녁에 내 아내가 죽었으므로 아침에 내가 받은 명령대로 행하매_에스겔24:15-18’

 

천명이라는 것이 분리되는 것은 아닙니다. 천명이라고 했을 때 원하는 것을 취하고 원치 않는 것을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같이 에스겔이 너희에게 표징이 되리니 그가 행한 대로 너희가 다 행할지라 이 일이 이루어지면 내가 주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라 하셨느니라_에스겔24:24’

 

에스겔의 인생자체가 표징입니다 이스라엘은 망하고 나는 살고 가정은 살고.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망하는 날이 되었을 때 에스겔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아내를 취하십니다. 너는 울지 말고 잠잠하라. 아무 말하지 말고 백성들에게 말하라. 이 백성들도 될 수 있으면 이스라엘을 회복해야지 할 수만 있으면 열심히 해서 희망과 소망을 가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명이 동일합니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살지 못하면 내가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현장에서 우리의 직장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적당한 수준에서 타협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결단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것이 천명입니다. 분리되지 않는 삶입니다. 내 삶이, 우리의 현장에서의 삶이, 우리의 가정과 가문이, 우리의 후대들이, 인생전체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말씀과 몸된 교회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천명과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과 나를 부르신 소명과 분리되느냐.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단 하나라도 가능한 것이 없기 때문에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절대 가능한 하나님 앞에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도 가정에서 이 삶을 영위하는 것도 이 몸된 교회에서 예배할 수 있는 것도 이 하루의 삶과 하나님께서 강한 손으로 붙들지 않으신다면 살 수 없구나. 이것이 나를 부르신 이유구나. 이것이 나에게 허락하신 천명이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저와 여러분을 영적인 파수꾼으로 부르셔서 나를 지키고 교회를 세우고 현장을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지속가능한 이유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소명이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모님들 믿지 마십시오. 자녀들 의지하지 마세요. 사람을 의지 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언제나 과거를 돌아오면 의지했던 사람이 나를 배신을 합니다. 의지했던 그것이 나에게 걸림돌이 됩니다. 그도 나도 그 어떤 현장도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구나. 하나님의 앞에 서야 하구나. 라고 하는 그 소명에서 그 어떤 것도 비교할 수 없는 말씀의 은혜가 가장 달구나. 소명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합니다. 지속해 나가면서 만남과 사건 속에 담대하게 이 사명을 감당해가세요. 혹 이해가 되지 않거나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 때 고백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내가 그들의 수효를 양 떼 같이 많아지게 하되_에스겔36:37’

 

자기들이 내게 구하여 할지니라. 하나님께서는 이루실 것이 분명합니다. 이렇게 이루어 주옵소서. 사명과 소명과 천명을 가지고 간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영적인 파수꾼으로 부르신 여호와 하나님 주님께 우리의 인생을, 우리의 몸된 교회의 앞으로의 모든 사역의 걸음들을 하나님께서 주장하여 주시고 그것을 전적으로 의탁할 때 주께서 새로운 문들을, 새로운 은혜들을 주실 줄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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