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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9-10-0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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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06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야곱의 족보 : 요셉은 누구인가?

본 문

창세기 37:1-24

오승주 목사

 

.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_창세기37:1-11

 

오늘 창세기 37장은 야곱의 자녀들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창세기는 50장까지 있습니다. 창세기 50장은 요셉이 죽음으로써 끝이 납니다. 그런데 49장에서 야곱이 죽고 모든 창세기의 여정이 끝이 납니다. 오늘 37장부터 13장 동안 야곱의 아들들을 다루는 내용이고 제일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요셉이라는 인물입니다. 요셉 이야기에 대한 자세한 설교를 못 들었을 것이라 창세기를 마무리하는 설교는 중요하기에 말씀을 하나하나 살펴보려고 합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 곧 그의 아버지가 거류하던 땅에 거주하였으니 야곱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요셉이 십칠 세의 소년으로서 그의 형들과 함께 양을 칠 때에 그의 아버지의 아내들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과 더불어 함께 있었더니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하더라_창세기37:1-2’

 

오늘 371절에 보니 야곱이 가나안땅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벧엘에 거주하게 됩니다. 야곱의 족보에 대해서 2절에 나옵니다. 의아합니다. 보통 족보를 설명하면 야곱이 드디어 벧엘에 거하고 야곱의 족보를 설명하는데 요셉이 튀어나옵니다. 원래는 큰 아들부터 나와야 하는데 요셉의 이야기로 야곱의 족보가 시작이 됩니다. 독특한 장면입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_창세기37:3’

 

그리고 중요한 것은 오늘 3절에 보니 드디어 성경이 야곱이라고 하지 않고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너무 잘 알다시피 야곱은 창세기 32장에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의 뜻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강력한 뜻은 승리자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을 야곱이 32장에 받았지만 37장에 이르러서야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살게 됩니다. 그동안은 구원도 받았지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는 살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벧엘에 와서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야곱의 족보를 설명하는데 첫 번째 나오는 인물이 요셉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요셉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중요하길래 37장부터 50장까지 요셉의 이야기로 야곱의 가문을 풉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를 하면 요셉은 하나님께 사랑을 받고 선택받은 언약의 백성,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함과 동시에 황폐한 우리의 인생에 찾아와주셔서 이스라엘로, 승리자의 삶을 살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기도 합니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하는 사건들이 많습니다. 이삭이나 노아의 방주나. 제가 볼 때에는 요셉이라는 인물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강력하게 보여주는 인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말씀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오늘 족보를 설명하면서 요셉이라는 인물이 드러나고 야곱이 이스라엘로써 삶이 어떠한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 채색 옷을 입은 요셉_창세기37:12-17,30:14-16

 

요셉이 등장하는데 2절에 그가 그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말하더라. 라고 시작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같이 놀면서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자질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늘 요셉을 그런 인물로 설교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물이 아닙니다.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발하는 것으로 시작하는데 그냥 요셉이 왜 이런 삶을 왜 살게 되었을까.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을 누구보다 사랑해서 채색 옷을 입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색동옷이 아닙니다. 형형색색 무지개색이 들어간 한복 같은 것을 생각하는데 채색 옷은 긴팔외투를 이야기합니다. 그 당시 중동에는 외투를 입는데 짧은 외투를 입습니다. 긴팔외투를 입히는 것은 신분을 상징하는데 장자 그리고 축복권을 가진 사람에게만 긴팔외투를 입힙니다. 장자가 있는데 둘째도 있고 셋째도 있는데 야곱이 요셉에게 장자권을 주고 특권을 주고 옷을 입혔습니다. 좀 이상합니다. 이것은 요셉의 태생부터 살펴보아야 합니다.

 

밀 거둘 때 르우벤이 나가서 들에서 합환채를 얻어 그의 어머니 레아에게 드렸더니 라헬이 레아에게 이르되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를 청구하노라 레아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내 남편을 빼앗은 것이 작은 일이냐 그런데 네가 내 아들의 합환채도 빼앗고자 하느냐 라헬이 이르되 그러면 언니의 아들의 합환채 대신에 오늘 밤에 내 남편이 언니와 동침하리라 하니라 저물 때에 야곱이 들에서 돌아오매 레아가 나와서 그를 영접하며 이르되 내게로 들어오라 내가 내 아들의 합환채로 당신을 샀노라 그 밤에 야곱이 그와 동침하였더라_창세기30:14-16’

 

여기에서 합환채는 무엇이냐면 쉽게 설명하자면 임신 촉매제 같은 것입니다 임신을 쉽게 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합환채를 구하면 임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미 레아는 아들을 4명이나 낳았습니다. 레아의 첫째아들인 르우벤이 들에서 합환채를 구해왔습니다. 야곱이 라헬을 사랑해도 아기를 낳지 못합니다. 그러면 부족국가에서 야곱은 계속 레아에게 들어갑니다. 레아는 아이를 낳고 라헬은 낳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태를 닫으셨습니다. 그런데 합환채는 임신촉매제입니다. 그래서 라헬은 언니에게 합환채를 요구했습니다. 그랬더니 레아는 너는 내 남편의 사랑을 받지 않느냐. 라고 해서 라헬은 오늘 밤에 남편과 동침하게 해주겠다.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합환채를 얻어 올 때의 시기를 성경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밀을 거둘 때밀을 거둘 때가 추수할 때인데 성경에서는 맥추절을 이야기합니다. 맥추절은 오순절을 상징합니다. 오순절이 성령께서 강림하신 날입니다. 왜 밀을 거둘 때라고 시기를 정확히 기록해놓았느냐.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오순절을 상징합니다. 태가 닫혀서 아기를 못 낳는 라헬이 합환채로 아이를 낳습니다. 언제인가요? 밀을 거둘 때. 성령께서 강림하실 때. 이것은 굉장히 상징적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성령 강림을 통해서 합환채를 통해서 아이가 생기는데 30장 하반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편과 동침해서 아기를 낳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강조를 하고 있냐면 하나님께서 라헬의 태를 여셨으므로 요셉이 태어난지라.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요셉은 생명의 씨를 가진 남편의 야곱을 통해서 태어난 자식이 아니라 합환채 즉, 상징적으로 성경은 하나님이 직접 태를 여셨다고 표현한, 성령께서 강림하신 그 때에 요셉이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합환채를 얻는 시기도 미를 거둘 때. 성령이 강림하는 오순절에 요셉이 잉태했다고 알리는 것입니다. 영적인 의미로 성령께서 요셉을 잉태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 요셉에게 야곱이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이유는 노년에 아들을 얻어서 다른 아들보다 사랑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실제 채색옷을 입혀서 특권과 상속권을 요셉에게 있다는 것을 상징했는데 이것은 어떤 상징인가요? 맏아들에게 입혀준 옷을 왜 요셉이 입고 있을까요? 하늘의 영원한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구유에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집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공생애 사역은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종교지도자들이 정죄했던 죄인들과 함께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예수님. 그런데 예수님에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장자라고 영적인 권위를 성령을 통해서 인정해주십니다. 예수님 스스로도 내가 맏아들이다. 내가 하늘의 장자와 같다고 영적인 권위를 표현하셨습니다. 이 요셉이 형들의 그런 잘못된 삶을 아버지에게 고발하는 장면. 예수님과 같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렸던 민족들, 언약의 백성들 이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 바리새인과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신앙을 하나님께 고발해서 미움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고 엄청난 미움과 고통을 당합니다. 형들을 고발하므로 요셉은 형들에게 엄청난 미움을 당합니다. 요셉을 죽여서 없애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여서 없애려고 한 것과 같지 않습니까. 야곱과 같은 우리의 인생에 가장 필요한 자가 누구일까요? 야곱의 가문에 어떤 인물이 필요할까요? 요셉과 같은 인물이 필요합니다. 그 말은 저와 여러분의 인생에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_창세기37:18-35,이사야53:1-6,요엘2:28

 

요셉의 형들을 살펴볼 것인데 야곱이 가족들을 이끌고 벧엘에 정착했습니다. 벧엘은 언약의 땅입니다. 쉽게 말하면 교회입니다. 그의 형들은 교회 안에 들어왔음에도 어떤 삶을 살았나요? 어린 요셉이 보았을 때 불법적이고 음란하고 정상적이지 않고 하나님과 섬기고 예배하는 삶이 아니라 그와 반대되는 삶을 살았기에 아버지께 고발하지 않았을까요? 요셉의 형들의 삶은 여전히 세속적이고 영적으로 무기력했습니다. 그 증거가 아버지의 장자권을 요셉이 받을 만큼 영적으로 선명하고 눈이 총명한 형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영적 무기력. 영적으로 이 땅은 무기력합니다. 영적 무기력을 많은 목사님들이 게으름이라고 설명해버립니다. 그런데 그것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영적 무기력은 세상 적으로 부지런한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영적 무기력하다는 것은 어떤 말인가요? 제가 이번에 존비비어의 영적 무기력 깨기 책을 읽었는데 그 책에 보면 영적으로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좋은 영적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 말은 영적으로 무기력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깨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세요? 이것이 우리가 무기력한가, 그렇지 않는가의 척도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 공동체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가 로 무기력한지 안한지 점검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기력은 영적으로 굉장히 고독하고 외롭게 만듭니다. 고독과 외로움이 드러내서 깨달아서 치유 받고 고침 받으면 좋은데 그런지 영적으로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자기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서 세력을 만듭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입니다. 이것이 종교지도자입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합니다. 그래서 포로가 되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질병이 도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온갖 저주와 재앙이 왔는데도 영적으로 무기력해서 자기들끼리 세력을 만들어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관심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종교지도자와 같은 모습. 그것이 형들의 모습입니다. 자기들끼리 뭉쳐서 요셉을 괴롭힙니다. 그런 요셉을 형들이 꿈꾸는 자가 오는 도다. 비아냥거렸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고 비웃었습니다. 너와 유대인의 왕이라며. 십자가에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비아냥 거렸습니다. 그리고 왕이니까 가시나무로 면류관을 만들어서 씌웠습니다. 오늘 형들이 요셉에게도 비아냥거렸습니다. 그 꿈이 무슨 꿈인지 모릅니다. 어떤 꿈인지 어떤 비전인지 어떤 하나님의 소원인지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비아냥거립니다. 무기력합니다. 영적으로. 요셉이 꿈꾼 꿈은 어떤 꿈인가요?

 

그 후에 내가 내 영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_요엘2:28’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_요엘2:32’

 

요셉이 어떤 꿈을 꾸었냐면 구원의 소식, 우리 가정과 가문이 구원을 받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소망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십자가사건을 묵상하면서 제일 많이 묵상한 것이 무엇이냐면 내가 예수님이라면 내 얼굴에 누가 침을 뱉고 채찍으로 때리는데 내가 흙으로 창조한 피조물들을 구원하려고 왔는데 나에게 침을 뱉었으면 완전 열 받을 것입니다. 화가 났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셨습니다. 꿈이 있었습니다. 무슨 꿈인가요? 내가 내 백성을 죄에서 건져내야겠다. 내가 죄악 가운데 빠져 사단의 종노릇하고 있고 지옥의 권세에 사로잡힌 백성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은 내가 십자가에서 죽는 것밖에 없구나. 예수님은 분명히 이것을 비전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_이사야53:1-6’

 

예수님이 꿈이 있고 비전이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과해서 갈수 있었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도 불평이 없습니다. 근심, 걱정이 없습니다. 늘 해맑았습니다. 노예로 갔을 때에도 구더기에 빠졌을 때에도 늘 찬송하고 임마누엘을 누렸습니다. 요셉에게 확실한 꿈이 있었습니다. 꿈을 아버지께 말했는데 아버지가 무시하였고 형들에게 말했는데 형들이 건방지다고 때려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사건을 말할 때 유대인들이 화가 났습니다. 감히 네가 우리의 메시야란 말이야? 요셉도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때가 정말 중요한 때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의 축복을 받아야할 때인데 기근이 닥칩니다. 엄청난 기근이 옵니다. 요셉이 아니었으면 이스라엘 민족은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면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셉 이라는 인물을 이 가문이 등장시킨 것입니다. 요셉은 알았습니다.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감옥에 갔을 때에도 알았습니다.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곧 죽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의 포로가 될 것이고 영적으로 황폐해져서 끝날 지경입니다. 구약의 마지막 때입니다. 언약이 사라질, 영적으로 흑암이 가득할 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악을 지시고 아픔을 지시려고 죄와 저주와 사망에서 건지시려고. 하나님은 요셉이 당할 고통과 고난을 아시고 몇 번이나 그를 사랑한다고 표현했습니다. 야곱이 요셉을 사랑한다고 편애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노예로 팔려가고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간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그런 상황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께 얼마나 사랑을 많이 표현하셨습니까. 너는 내 아들이다. 그러니까 지금 야곱의 가문에 야곱이 이스라엘로 살기 시작할 때에 요셉이 등장하는데 야곱 가문을 위한 구원의 섭리로 요셉이 등장합니다. 그래서 요셉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야곱과 같은 저와 여러분의 가문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도 하고 예수님을 만난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작은 예수가 되어 한 가문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는데 구원의 섭리로 쓰임받자는 2가지 메시지가 오늘 본문에 담겨 있습니다.

 

. 믿음을 위해 인생을 내던지세요_이사야54:1-7,55:7-13

 

오늘 말씀의 결론을 맺자면 우리는 이 구원, 하나님의 구원을 믿는 믿음을 위해서 우리의 인생을 내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인생의 중요한 시간표에 인생을 내던져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라에 위기가 왔을 때에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괴롭혔을 때에 자기 인생을 내던지는 사람이 없었다면 우리나라는 지금도 식민지로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인생을 내던지는 사람 때문에 시대는 바뀔 수 있습니다. 독립운동한 사람들의 희생이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위기가 왔을 때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인생을 내던지는 사람 때문에 교회를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을 내던지지 못합니다.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라 자신의 인생을 내 던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위해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군대를 육군본부의 의장대로 갔습니다. 교회를 가는 사람들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무려 6개월 동안 교회를 가지 못했습니다. 교회를 왜 못가냐면 토요일, 일요일에 행사가 있습니다. 부대 대장이 바뀌었는데 종교 활동 갈 사람을 방송했습니다. 다들 일하고 행사정비하고 있는데 종교 활동 갈 사람이 저 혼자였습니다. 교회 갈 수 있는 찬스다. 이 때 인생을 내 던지는 거다. 하나님이 책임 지키겠지. 하면서 서있었습니다. 교회 갔다고 3개월은 고난의 세월이었습니다. 인생을 한번 내던져서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부대가 120명 정도 되는데 나중에 교회 가는 인원이 80명 정도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인생을 내던지는 인생의 중요한 기회들이 있습니다. 믿음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내 믿음의 지경은 넓어지고 신앙은 더 성숙해집니다. 우리는 믿음을 위해서 인생을 내던져야 하는데 종교적으로 교회 다닌다는 의미가 아니고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소식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살기에 믿음을 선택해서 살기 위해서 인생을 내던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 다니는 것이 아니고 종교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원의 소식을 간직하고 소유하고 지키고 이것을 남들에게 전하기 위해서 기도하면서 신앙을, 믿음을 확장해가는 삶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구원의 소식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렇게 살면 사회적으로 격리될 수 있습니다.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요셉처럼. 예수님처럼.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을 살리는 삶이 될 것입니다.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지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을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라_이사야54:2-3’

 

황폐한 성읍 같은 가정과 교회와 이 땅이 사람 살만한 곳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장막터를 넓히라는 것입니다. 장막터는 교회입니다.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퍼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휘장을 아낍니다. 말뚝을 견고하게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해서 인생을 내 던져야 합니다. 믿음을 위해서 내 던져야 합니다. 장막터를 넓히고 휘장을 아끼지 말고 펴시고 말뚝을 견고하게 하는 인생을 내 던져야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고 감옥에 가야 내 가정, 내 부모, 형제를 기근에서 구원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인생을 내 던져야 이 땅의 영혼들이 죄와 저주, 사망에서 건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의 소원이 무엇인가요? 우리의 꿈은 무엇인가요? 요셉이 꾸었던 꿈을 우리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가정, 부모, 형제, 자녀들을 위해서 우리가 인생을 내 던지는 믿음. 우리가 지금 돈을 많이 모아서 물러 주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습니까? 사회적으로 지위를 얻는 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나요? 구원을 진짜 안다면 영생이 무슨 말인지 안다면 우리가 죽어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이 안다면 우리는 인생을 내 던지는 것입니다. 요셉이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형들이 늘 놀리고 괴롭히고 죽이려고 하는데. 그러나 요셉은 인생을 내 던진 것입니다. 형들을 살리기 위해서. 형들이 상상을 했겠습니까. 자신이 놀리고 죽이려고 했던 요셉이 나중에 엄청난 기근에서 자기 살리는 사람이 될 줄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채찍질하고 침을 뱉고 조롱했던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원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입니다. 우리 가정에 어려움이 올 수 있습니다. 질병이 올 수 있고 말 못할 사정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문제, 어려움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 일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 집이 부끄러웠지만 구원을 알고 나서 우리 집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제 단점들이 장점이 되기를 기도하지만 이것이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알고 나서는 전혀 다른 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꿈꿔야 합니다. 구원의 소식을 간직하고 사는 신앙생활을 인생을 내 던져야 합니다. 여러분의 사업, 비즈니스, 자녀 교육, 부모님을 향한 효도. 모든 것이 이 속에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구원으로 인해서 예배하는 가정,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구원을 위해서 쓰임 받는 가정이 되기를 꿈꾸고 있나요? 교회가 위기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런가 살펴보았습니다. 인간의 잘못, 목사의 잘못, 성도들의 잘못과 더불어 사단의 영적인 공격으로 인해 교회들이 실제로 문을 닫고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지 않으면 구원과 전도, 선교를 할 곳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교회이기에 교회가 문을 닫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말뚝을 견고하게하고 휘장을 아끼지 말고 장막터를 넓어야 되는 교회. 이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_이사야55:7-9’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고 목동 일 열심히 하고 살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근이 올지 생각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요셉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길은 요셉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문제를 통해서 만나든 축복을 통해서 만나든 상관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복입니다.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계획입니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 잣나무는 가시나무를 대신하여 나며 화석류는 찔레를 대신하여 날 것이라 이것이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아니하리라_이사야55:12-13’

 

무엇이 끊어지지 않는 말인가요? 가시나무 같은 우리의 인생에, 찔레 같은 야곱의 인생에 잣나무가 대신하고 화석류가 대신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가시나무 같은 인생을 대신 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대신하는 것입니다. 야곱과 야곱의 아들들이 기근이 왔을 때 자기들의 노력으로 기근에서 벗어났습니까? 요셉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영영한 표징이 되어 끊어지지 않는데요. 끊을 수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가 얼마나 우리의 신앙에 중요한 존재인지. 믿음이 생기도록 인생을 내 던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믿음을 선택하면 손해 볼 것 같고 주일 날 예배드리려면 사업에 지장 있을 것 같고. 그때 내던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손해 보게 하실까요? 살아계신 하나님 당신의 자녀들이 복음을 선택해서 사는데. 그럴리가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 전혀 다릅니다. 잣나무가 가시나무를 대신하게 하실 것입니다. 화석류가 찔레를 대신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찾아오신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모든 것을 대신하게 하실 것입니다. 야곱의 인생을 이스라엘로 바꾸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야곱의 아들들, 부패한 형들을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님밖에 할 수 없습니다. 기근에서 보호하고 언약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하나님이 보내신 요셉. 예수님이 싫으신가요? 예배가 싫으신가요? 교회가 싫으신가요? 믿음을 위해서 인생을 내 던져야합니다. 그래야 가정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우리의 부모, 형제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한 세대를 구원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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