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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19-10-20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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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는 나보다 옳도다
본문 창세기38:1-30


Ⅰ. 짧은 유다의 이야기_창세기38:1-11
 - 은혜의 공동체와 멀어지면 잠시 편안하고 안정하겠지요?
 - 공동체를 떠나서 너무 잘 살고 있는 것 같은 유다 
  : 씨가 있게 하라(복수:이스라엘) 그러나 타락한 아들들.
 - 듣기 싫고 견디기 싫은 교회 공동체 
  :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시니
 
요셉 이야기가 진행이 되는데 갑자기 38장에 유다 이야기를 한 장만 나옵니다. 37장하고 연결이 안 되고 39장하고도 연결이 안 되고 스토리를 풀어 가는데 작가 모세가 유다 이야기를 마치 그냥 끼어 넣은 것 같이 한 장이 들어가 있는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불륜관계다라고 제목을 정하고 설교를 하기도 하는데 불륜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요셉과 야곱 하나님의 언약계보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키가 되는 것이 오늘의 본문 내용입니다. 그래서 본문 내용을 자세히 설명 해 드릴 것인데 귀담아 설명을 잘 들으시면 그럴 만큼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니라_창세기 38:1’

유다의 이야기가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요셉을 팔아먹고 유다가 가족공동체 형제들, 부모님들을 두고 유다도 떠나온 상태입니다. 요셉은 강제로지만 유다는 자기 발로 언약의 공동체에서 떠납니다. 떠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추측해보았을 때 떠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유다가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때 요셉을 팔자. 라고 해서 형제들보다 자기를 차이를 두었습니다. 돌아갔을 때에 아버지가 요셉을 팔았다고하면 난리가 나니까 요셉이 짐승에 먹혀서 죽었습니다. 라고 했을 때 아버지가 나머지 자식들로부터 위로를 받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통곡하고 우니까 여러 가지 추측을 할 수 있겠지만 유다는 약간의 의로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기 형제들은 동생을 죽이려고 하고 자기는 무마해서 팔아넘겨서 목숨은 해하지 않는. 남들이 보기엔 똑같지만 약간의 의로움이 있었습니다. 형제들에게서 환멸감을 느끼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또 하나는 아버지로부터 장자권을 물려 받을 요셉이 없어졌으니까 물려 줄 장자권 다른 사람이 받았어야 하는데 아버지는 물러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여기에서는 내가 아무리 잘해도 인정을 받을 수 없겠구나 하는 복합적인 마음들이 유다로 하여금 언약공동체를 떠나게 하였습니다. 야곱의 가문은 언약공동체이고 예배공동체가 아닙니까. 공동체에서 떠나면서 유다가 보통 마음을 먹었겠습니까. 요셉만 인정해준 아버지보다 잘 살고 잘 보여야지 하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떠나면서 히라와 가까이 하였습니다. 히라의 뜻은 반석입니다. 세상에서도 반석과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교회를 떠나게 되었는데 세상에 갔더니 정직하고 실력 있고 불신자들 중에서 얼마나 많습니까. 자세히 살펴보니 반석 같은 사람인줄 알았는데 히라를 만나면서 유다가 어떤 삶을 살게 되었는지 38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라를 통해서 수아 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수아의 뜻은 ‘부유하다’라는 뜻입니다. 부유한 집안의 딸을 만났는데 결혼을 한 것이 아니라 동침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히라를 만나면서 유다가 세속화되는 과정을 기록해놓았는데 그 부유한 집 딸과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3명 낳았습니다. 첫째는 엘, 둘째는 오난, 셋째는 셀라를 낳았습니다. 이름의 뜻이 엘은 파수꾼 이라는 뜻입니다. 오난은 부유하고 왕성하다. 정욕적인 뜻이 강합니다. 에서와 같은 이름입니다. 셀라는 평화와 기도라는 뜻이 있습니다. 부유한 집안에 딸하고 결혼을 하고 아기들을 낳았는데 좋은 이름들을 가져다가 지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얼마나 좋을까요? 복잡한 집을 떠나서 세상 좋다. 부유한 집안의 딸을 만나서 아들들을 낳고 얼마나 성공했다고 생각을 했겠습니까. 이것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실 유다는 어떤 사람인가요? 성경에서 영적인 후사가 요셉 같지만 실제 영적인 후사는 유다입니다. 요셉은 그리스도의 표상이지만 유다는 직계조상입니다. 유다는 반드시 변화되어야 합니다. 유다의 후손에서 예수그리스도가 나와야 하니까. 유다가 어떤 사람이냐면 형제들과 같이 있으면서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역사가 유다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요셉과 너무 비교되게 악한 유다. 그 유다가 어떻게 예수님의 조상이 되었을까. 이 유다는 늘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나는 형제와 달라. 나는 저 형제와 달리 깨끗해. 그래서 그 공동체에 있으면 더러워지는 것 같고. 그래서 헤어지면 편안할 것 같고. 그래서 가까이 한 사람이 히라라는 사람입니다. 히라를 통해서 여자를 만났는데 성적인 매력이 있고 부유해서 아들을 세 명을 낳았습니다. 견디기 싫은 예배공동체에서 떠나 형제와 부모와 단절되었지만 자기의 소식을 듣게 되는 형제들, 부모에게 잘 보이려고. 어떤 마음으로는 복수심도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나를 인정해주지 않은. 그래서 그가 셋째아들 셀라를 낳을 때 이사를 했는데 거십이라는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5절) 거십은 거짓의 도시의 뜻입니다. 거짓의 도시에 유다가 거해서 부유한 집안. 예쁜 아내. 첫째 아들을 위해서 며느리를 들었는데 예쁘고 총명한 며느리 다말을 들였습니다. 엄청 잘 살 것 같죠. 여기서 끝나면 다행인데 본격적인 하나님의 개입이 시작됩니다. 일을 터졌는데 여태 하나님이 사람을 죽인 적이 없었습니다. 설명도 없이 그냥 죽이십니다. 

‘유다가 장자 엘을 위하여 아내를 데려오니 그의 이름은 다말이더라 유다의 장자 엘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죽이신지라_창세기38:6-7’ 

그냥 악해서 죽이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악하다고 죽이신가요? 얼마나 악했으면 하나님이 죽이셨습니다. 얼마나 악했는지 성경이 밝히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에 부족국가를 설명하면서 씨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번성하고 반드시 자녀를 낳아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구약에 법으로 정하셨습니다. 첫째가 결혼을 했는데 사고로 죽으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으면 둘째가 형수에게 들어가서 첫째 아이의 씨를 낳아주는 것으로 법적으로 하나님이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둘째가 형의 아내에게 들어가기 싫으면 어떻게 거절할 수 있냐면 형수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거절하겠다고 하면 형수가 동생 뺨을 때리고 침을 뱉으면. 그만큼 치욕을 당하고 거절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만큼 족보에 씨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씨라는 단어는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씨가 복수일 때는 이스라엘입니다. 언약의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 씨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런 제도를 만드셨습니다. 지금 영적인 구원에 관한 해석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둘째 오난에게 아버지가 이야기를 합니다. 형수에게 들어가서 형의 씨를. 그러나 오난이 얼마나 타락했냐면 오난이 생각했을 때 형의 씨를 낳으면 아버지의 재산을 형의 씨가 가져가겠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과부를 보호하기 위한 정책으로 과부가 가문의 씨를 낳아야 어느 정도 재산을 받기에 오난의 입장에서는 형수에게 들어가 아기를 낳으면 내가 손해를 보겠네 라는. 언약적인, 씨에 대한 생각이 없이 계산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다가 오난에게 이르되 네 형수에게로 들어가서 남편의 아우 된 본분을 행하여 네 형을 위하여 씨가 있게 하라 오난이 그 씨가 자기 것이 되지 않을 줄 알므로 형수에게 들어갔을 때에 그의 형에게 씨를 주지 아니하려고 땅에 설정하매_창세기38:8-9’ 

형수에게 오난이 들어가서 잠자리는 했는데 쾌락은 쟁취했는데 그의 정액을 땅에 뿌렸습니다. 형수가 임신하지 못하도록 계획적으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오난의 악함을 드러나서 보여줍니다. 그렇게 했더니 하나님이 오난을 죽이셨습니다. 

‘그 일이 여호와가 보시기에 악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도 죽이시니_창세기38:10’

여러분, 아들 둘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유다가 깨달을 법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인인가. 아버지 야곱에게 돌아가서 물어볼까. 

‘유다가 그의 며느리 다말에게 이르되 수절하고 네 아버지 집에 있어 내 아들 셀라가 장성하기를 기다리라 하니 셀라도 그 형들 같이 죽을까 염려함이라 다말이 가서 그의 아버지 집에 있으니라 창세기38:11’

셋째가 당연히 법대로 씨를 낳아야 하는데 셋째가 너무 어리다고 다말에게 핑계를 대고 수절해. 더 이상 관계를 갖지 마. 친정집에 보내버렸습니다. 그리고 막내 셀라가 장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다말 입장에서는 치욕스러운 것입니다. 씨를 못 낳았습니다. 다말이 이 집안에 갔을 때에는 언약의 가문인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소문을 들었기에 야곱의 후손인지도 알았을 것입니다. 다말이 씨에 대해서 집착을 한다는 것은 다말이 언약을 계보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오난이라는 둘째 아들은 그 쾌락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유다의 계보를 이를 씨를 낳아야 하는데 그를 거부하니 하나님께서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앞으로 가지 않고 예배 앞으로 가지 않고 공동체로 복귀하지 않고 그냥 다말이 부정한 것을 가져왔다고 생각하고 모든 책임을 전가하여 쫒아냅니다. 막내아들과 부인과 함께 행복하게 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모든 책임전가를 했습니다. 

Ⅱ. 은혜의 공동체를 떠난 유다의 영적인 상태_창세기38:12-19
 - 유다의 책임전가
 - 인간에게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 그리고 다말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

책임전가. 이것이 죄의 모습입니다. 선악과를 먹은 죄의 모습이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입니다. 여전히 유다는 옳은 것입니다. 나는 법대로 했다. 그런데 여기서 사건이 터집니다. 자기의 아내가 죽습니다. 수아의 딸이 죽었는데 12절에 유다가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뒷 절에 보니 이것이 세상의 위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히라를 또 만납니다. 히라와 딤나로 올라가서 자기 양털 깎는 자에게 이르렀더니. 이것은 부자라는 말입니다. 히라가 재산이 있지 않나 하고 사업처로 데리고 갑니다. 이 때 다말이 시아버지가 딤나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운 일을 합니다.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으로 말미암음이라_창세기38:14’ 

여태 과부의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때가 자기 막내 셀라가 다 컸을 때입니다. 다말이 그 동안에 과부를 상징하는 옷을 벗은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획을 했습니다. 창녀로 위장해서 딤나의 길에 서 있었습니다. 유다가 얼마나 타락했냐면 유다가 위로로 받으려고 창녀에게 들어간 것입니다. 공동체에서 떨어지면 주변에 믿음의 사람이 없으면 사람은 끝도 없이 타락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나 스스로 의로울 수 있어. 나는 정의로울 수 있어. 나는 반듯하게 살 수 있어. 여러분, 인간은 이렇게 못 삽니다. 믿음의 부모님이, 믿음의 남편이, 믿음의 아내가 있는 것을 축복으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보란 듯이 형제에서 아버지에게서 떠나서 부자 집에 장가를 가서 아들들의 이름을 멋지게 잘 짓고 성공할 수 알았는데 어디까지 갔나요? 인간의 악의 끝인 자기의 몸을 창녀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제가 톰 데이비스라는 사람의 책을 잃었는데 신실한 남자의 들키고 싶지 않는 비밀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을 구지 추천하고 싶지는 않는데 이 사람은 칠드런스 호프라는 아이들을 돕는 복음주의 NGO의 대표입니다. 이 사람이 여기에서 직업으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사업을 잘합니다. 돈을 벌어서 아이들을 돕기 위해 NGO를 설립했습니다. 돈도 잘 벌고 교회에서는 얼마나 봉사를 하는지. 자기는 매일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교회를 다니면서 정죄를 많이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다 수긍했다고 합니다. 반듯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불륜을 저질렀습니다. 아이들을 돕고 섬길 때  부터. 그리고 코카인 마약을 하고 감옥에 간 결정적인 것은 남의 물건을 훔쳤다고 합니다. 도벽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감옥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난리가 나겠죠. 이 사람이 감옥에 가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이 책을 썼습니다. 세상에 이런 남자가 많지 않겠나. 이 책 내용에서 남에게 우리는 책임전가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성실하게 살고 성경을 매일 읽고 남을 돕고 살았을 때 저 수준 낮은 인간들 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환경 때문이고 남 탓하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 때문이야. 환경 때문이야. 요셉 때문이야. 이러면 우리는 신앙적으로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합니다. 유다가 그런 꼴입니다. 의로운 것처럼 공동체에서 나와서 자기 생각대로 잘 사는 것 같았는데 오늘 창녀를 만나게 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다말은 기업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습니다. 셀라가 장성해서 약속대로 자기를 부를 줄 알았는데 안 부르는 것입니다. 유다는 이미 씨에 대해서 기업무름에 대해서 까마득히 까먹었습니다. 유다는 자기의 첫째아들 둘째아들이 살았던 삶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자기 아내가 죽어서 위로를 받기 위해서 창녀에게 들어간 장면입니다. 그 때 며느리 다말이 위장을 해서 있는데 무엇을 줄거냐 하니 염소새끼를 주겠다고 합니다. 다말이 얼마나 지혜로운지 염소새끼를 받을 때까지 담보물을 요구합니다. 담보물로 지팡이, 끈, 도장. 지금으로 말하면 인감도장, 등본 이런 것들입니다. 쾌락에 빠져 다 주었습니다. 지금 다말이 염소새끼를 받고 몸을 주었으면 나중에 염소새끼로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염소새끼가 많으니까. 인감도장을 받고 등본을 갖고 있다면. 그런 순간의 쾌락을 못 이기고 잠자리를 하여 다말이 임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돌아오자마자 염소새끼를 보내고 담보물을 찾으려 하였습니다. 동네사람들에게 물어봤을 때 원래 창녀가 없다고 했습니다. 원래 창녀가 없다는 말에 깜짝 놀랐겠죠. 그리고 겁나니 부끄럼을 당할지 모르니까 염소새끼 그냥 주고 덮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네가 창녀를 못 찾아와서 그런다며 책임전가를 그 사람에게 합니다. 그러고 나서 성경은 석 달 후쯤이라고 바뀝니다. 

Ⅲ. 그는 나보다 옳도다_창세기38:20-30,시편22:8-22
 - 그리스도의 표상인 요셉과 영적 후사인 유다의 관계
 - 유다의 깨달음 : 그는 나보다 옳도다

‘석 달쯤 후에 어떤 사람이 유다에게 일러 말하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느니라 유다가 이르되 그를 끌어내어 불사르라_창세기38:24’

유다의 태도를 보세요.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자기가 더 나쁜 짓을 했으면서 임신해서 배가 나오니 그를 끌어내어 불을 사르라고 합니다. 우리가, 교회가 이럴 수 있습니다. 유다가 교회라고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속사람을 다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 서지 않으면 죄인들을 정죄할 수 있습니다. 유다가 며느리를 죽이라고 합니다. 자기는 거룩하다고 깨끗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 다말이 끄집어냅니다. 인감도장, 등본. 그것을 본 순간 유다가 어땠을까요? 기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의 모든 과거가 모든 실수가 머리에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아들들이 왜 죽었는지 왜 이런 문제가 왔는지 머리에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유다가 다말을 통해서 변화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말에게 한 마디 합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영어로 말하면, 악과 선의 옮도다가 아닙니다. 그는 나보다 의롭도다. 다말에게. 매일 남에게 책임 전가하던 사람이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고 ‘의롭다.’라고.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그리스도 그는 나보다 옳도다. 여기에서 구원이 시작이 됩니다. 저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 최고의 고백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놀라운 일입니다. 구속사를 모르면 오늘 본문을 불륜의 관계로 볼 수 있습니다. 씨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유다의 삶이 실패가 되었습니다. 이 가문에 하실 일을 다말만 알아 본 것입니다. 다말이 얼마나 대단하냐면 과부의 옷을 벗고 아버지를 계획적으로 만나고 다시 과부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 말은 철저하게 계획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과 같지 않습니까. 철저히 인간의 옷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우리가 알아보지 못하는 형체로 오셨습니다. 우리와 연합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다말이 그러나 인간적으로는 수치심을 느꼈을 것입니다. 시아버지와 몸을 섞는다는 것이 다말같이 정결한 여자가 과부의 옷을 그때까지 입은 정결한 여자가 자기의 시동생 둘째 아들이 정액을 땅에 뿌리는 것 자체가 수치심인데 그런 다말이 죽어준 것입니다. 자기 인생을 죽어서 한 가문을 살릴 것입니다. 다말이 죽어짐으로써 유다를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이고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는 이 고백을 해야 유다도 사는 것이고 유다가 다말이 의롭다고 높여주었습니다. 다말이 높여진 것은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다말의 이름이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말 같은 사람이 한 사람이 있어도 가문은 살아나게 됩니다. 그 가정이 살게 됩니다. 우리 주변에 믿음의 공동체가 없다면 신앙에서 유다는 멀어지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후사가 없었던 가문에 다말을 통해서 영적인 후사를.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 유다는 다말로 인해서 유대하게 됩니다. 다말이 나중에 창세기 45장에 보면 야곱이 모든 기근이 와서 요셉 앞으로 가게 됩니다. 그때 유다가 같이 갑니다. 만약에 유다가 다말이 아니었으면 기근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형제와 떨어져 있었으니까 요셉 앞으로 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으로 유다는 형제 공동체로 합류하게 되고 요셉 앞으로 가게 됩니다. 요셉을 만나서 야곱이 축복을 할 때에 요셉이 아닌 유다를 축복합니다. 당신은 나보다 옳다.라고 한 것은 그 말 한 마디로 인생이 언약의 백성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우리는 문제가 많습니다. 어떤 가정이든 문제가 있고 사연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 오신 분들은 사연 없는 분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늘 남 탓을 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부모 탓 환경 탓 나는 왜 배경이 없을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믿음의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가 교회이기도 하지만 더 성경적으로 이야기하면 성자, 성령, 성부 하나님이세요. 예수 그리스도세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면서 살도록 우리를 이끌어 가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확인하는 신앙생활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십니다. 이것을 하지 않아서 하나님이 진노하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다말이 아이를 낳습니다. 

‘해산할 때에 보니 쌍태라 해산할 때에 손이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이는 먼저 나온 자라 하고 홍색 실을 가져다가 그 손에 매었더니 그 손을 도로 들이며 그의 아우가 나오는지라 산파가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터뜨리고 나오느냐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베레스라 불렀고 그의 형 곧 손에 홍색 실 있는 자가 뒤에 나오니 그의 이름을 세라라 불렀더라_창세기38:27-30’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아이들 태어나는 것도 섭리가 있습니다. 베레스가 나중에 나와야 하는데 먼저 나왔습니다. 베레스가 언약의 계보입니다. 룻기 설교할 때 보아스가 가문을 물러 받습니다. 그 때 성문 앞에 장로님들이 섭니다. 그리고 축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보아스가 언약의 계보로 들어올 때 성문의 장로님이 오늘 본문을 인용합니다. 베레스의 가문처럼 하나님께서 축복하기를 원하노라 라고 말합니다. 베레스가 축복의 가문이 된 것입니다. 이 장로님들이 언약의 가정들을 축복 할 때 베레스의 가문을 인용합니다. 다말의 첫째 아들의 베레스를 언약의 가문으로 하나님이 축복을 하셨습니다. 다말에게 이런 위로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약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것으로 보여주지만 이것은 영적인 것입니다. 영적인 후사를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어떻게 우리의 삶에 적용할 수 있나요? 예수 믿는 것으로 적용을 해야 합니다. 자녀를 낳았는데 손주를 낳았는데 예수를 안 믿고 지옥에 간다고 생각해보십니오. 이것을 다말을 통해서 하나님이 막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우리에게 유다 같은 상처들이 있습니다.  유다 같은 교만함. 이런 것들이 공동체에서 멀어지게 합니다. 그의 자녀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지 보셨죠. 이름을 좋게 지어도 이름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악하니라. 우리는 늘 내가 옳다고 생각하면 악을 범하게 됩니다. 인간은 옮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내가 죄인이구나 예수님만 의로우시구나. 여기에서 구원이, 신앙생활이 시작이 됩니다. 이것은 중요합니다. 우리의 가문과 우리들의 후대를 두고 묵상하시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살려고 예수님 믿으시면 안 됩니다. 다말이 죽었을 때 유다를 살렸고 유다가 다말을 통해서 죽어줌의 깨달음을 통해서 다말을 살렸습니다. 예수님을 의롭다고 인정하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주어야 합니다. 한국교회가 왜 문제가 있나요? 전부 살려고 합니다. 전부 높아지려 하고 성공하려고 하고 예수님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저 바닥에 있다고 비웃고. 여러분, 예수님을 자랑하는 크리스천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전부 자기가 잘나고 의롭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겉은 멀쩡하고 부유한 집에 시집가고 자식들은 잘 낳았을지 몰라도. 우리의 삶은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는 것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믿는 여러분의 아내, 여러분의 남편, 여러분의 부모님을 무시하시면 안 됩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이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단지 사람에게 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여러 가지 깨달음을 여기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저는 말씀을 마치면서 여러분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다른 것은 기도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구원을 향한 기도는 멈추면 안 됩니다. 부모님이 예수님을 믿지 않아요. 부모님이 예수님 믿도록,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임하도록 멈추면 안 됩니다. 내 자식이 예수님 믿게 하는 기도는 멈추면 안 됩니다. 우리가 이 땅을 위해서 병들고 부패하고 답답하고 공격하려고 하는지요. 그러나 쉽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아무튼, 이번에 보니까 군대 안에서 동성애를 허락하는 것을 국회에서 발의했습니다. 자신의 자식들이 군대에 가서 그런 일을 당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것이 인권인가요? 우리가 구원을 놓치고 영적인 세계를 놓치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에 수많은 사건 같지만 유다에게 고난 같지만 이런 고난이 없었으면 영적인 세계와 조우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구원을 향한 기도를 멈추시면 안 됩니다. 그 안에서 회개도 사랑과 용서도 나옵니다. 아버지를 이해하고 아내를 이해하는 것이 부모님을 이해하는 것이 구원을 향한 기도 속에서 나옵니다. 구원을 향한 기도 안에 은혜가 있고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고 구원을 향한 기도를 하다 보니 구원을 향한 삶도 살게 됩니다. 구원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다른 기도는 안 해도 되지만 구원을 향한 기도는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 사람을 살리는 힘도 있고 죄를 향해 맞서 싸우는 용기도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다말이 과부의 옷을 입고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을까. 구원을 향해서 기도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사인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기도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이 역사하여도 그것을 그냥 문제로 봅니다. 그러나 기도 하는 사람은 이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찾습니다. 그래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구원을 향한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자녀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들이 잘 키워도 교회를 떠나고 예수님을 떠나고 불신자로 산다고 생각 해 보세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인생을 산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씨가 말라버리면 안 됩니다. 그러면 기도해야 합니다. 이 고백이 없으면 기도를 못합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다말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려고 자신이 희생하고 죽여주었습니다. 자신이 죽어주었지만 그도 살리고 나도 살게 되었습니다. 신앙은 내가 죽는 것입니다. 그래야 상대를 살리고 내가 죽어야 나를 하나님께서 높이시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왜 기도가 안 되나요? 죽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살려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내가 기도하려면 무릎을 꿇어야 하는데 이것이 안 되는 것입니다. 기도 할 시간이 어디 있어.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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