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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01-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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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26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지어다

본 문 :

레위기11:1-47

오승주 목사

 

. 성별되어야 할 인생

 

나는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이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몸을 구별하여 거룩하게 하고 당에 기는 길짐승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_레위기11:44-45’

 

레위기 11-13장에서는 먹을 것, 아이를 낳는 것, 피부병을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별하게 하시는 시작이 되는 장면이다. 히브리어로 거룩이라는 단어는 카도쉬라는 단어이다. 영어로는 CUT과 같은 의미의 단어이다. 카도쉬는 구별하다는 뜻도 있지만 성별하다는 것이 정확한 뜻이다. 거룩하게 구별하다가 성별하다는 것이다. 단지 구별이 아니고 그냥 분리가 아니라 거룩하게 분리하는 것이 카도쉬의 뜻이다. 거룩하다는 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동적인 의미이다. 거룩하다는 것은 독야청정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거룩하다는 의미는 타락한 우상이 가득한 가나안땅에 왕 같은 제사장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입성해야 하는데 다르게 살기를 원하시는 마음, 그 마음을 레위기를 통해서 가르쳐주고 계신다. 홍해를 건너 가나안땅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출12:38의 모습이었다.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_출애굽기12:38’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수많은 잡족과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거룩하고 성별되기 전에는 수많은 잡족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느헤미야를 통해서 살펴봤듯이 하나님께서는 성벽 안에서 살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을 분리하는 작업을 하셨다. 수 많은 잡족들과 구별된 삶을 드러내는 것이 거룩이다. 구분이 되지 않는 삶은 거룩이 아니다. 구별된 삶이 드러나는 것이 거룩이다. 구약의 삼손을 하나님께서 나실인으로 사용하셨다. 나실인의 상징이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것이었다. 삼손은 머리카락만을 지켜면 된다는 것에 집착하며 지켰는데 사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타락한 사사기 시대에 구별된 나실인을 요구하셨다. 삼손은 머리카락을 지키는데 급급했다. 거룩은 동적이어야한다. 우리는 지금도 정적으로 살아간다. 헌금하기 급급하고 교회가기 급급하지 않나. 정작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살아야 하는 사명은 놓치고 살지 않는가? 신학적 단어로 점진적 계시라는 단어가 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시는데 한 번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조금씩 주시며 깨닫도록 하시는 것이다. 운동을 배워도 운동을 처음부터 다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아주 작은 부분부터 가르친다. 점차 레슨을 받아가다보면 눈이 열리게 된다. 조금씩 배워 나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점진적으로 가르치신다. 예를 들어 구약의 축복은 분명 육신적인 축복이 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꼐 헌물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겠다고 했다. 그것은 전부 육신적인 축복이었다. 신약에 와서는 육신적인 축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축복, 내면의 축복을 말씀하셨다. 산상수훈을 통해서 말씀하셨다. 할례도 구약에서는 표피를 자르는 구별을 말씀하셨지만 신약에서는 육신의 할례가 아닌 마음의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동물을 통해서 거룩에 대해서 가르쳐주시는 점진적인 계시의 시작을 가르쳐주시고 계신다. 이것은 단지 이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 먹어야 한다의 의미가 아니라 너희는 다르다, 성별되어야 한다는 것을 메시지로 주시는 것이다. 구별된 삶을 동물들을 통해서 주시는 것이다.

 

. 동물들을 통한 하나님의 가르침

위생적 의미인가? 상징적 의미인가?

 

11장을 두고 많은 신학자들이 예전에는 위생적 의미로 접근을 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죽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규율이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이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무시할 수는 없는 말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는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 소고기는 먹어도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도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렇게 계속 접근을 했을 때 해석이 복잡하고 어려움이 있다. 이에 신학자들이 위생적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의미가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육지의 모든 짐승 중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 새김질하는 것이나 굽이 갈라진 짐승 중에도 너희가 먹지 못할 것은 이러하니_레위기11:2-8’

 

동물의 습성을 통해서 우리의 모습을 깨닫길 원하시는 하나님

 

둘 중에 하나라도 아니면 먹으면 안된다. 새김질은 우리에게 묵상을 상징한다. 그리고 아무거나 먹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곱씹는 묵상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평생 노예로 살며 말씀을 듣고 그냥 끝나버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못된 습관을 동물들을 통해서 묵상을 가르쳐주신다. 굽이 갈라졌다는 것은 균형을 갖췄다고 설명을 하고 있다. 우리는 세상에 살아가면서 균형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말씀을 곱씹는 습관이 없다. 묵상하는 습관이 없다. 그냥 환경이나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내 감정대로 내 습관대로 살아버린다. 말씀을 받았지만 버려버린다. 우리는 말씀을 곱씹어야하고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악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물고기도 지느러미와 비닐이 있는 것만 먹으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주로 깨끗한 곳에서 사는 것을 살펴볼 수 있다. 지금도 중동에는 오징어가 없다. 하늘에 나는 새는 먹지 말라고 하신다. 하늘에 나는 새의 공통점은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는다고 한다. 무엇이나 닥치는 대로 먹는 새는 먹지 말라고 한다. 아무거나 취하고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곤충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계신다. 날개가 있는데 기어다니는 것은 먹지 말라고 하신다. 날개가 있는데 뛰어다니는 것은 먹어도 된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부정하다고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순간 날개를 달았다. 기도의 능력을 받고 말씀의 능력을 받았다. 기어다니지 말고 승리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도 이 땅에서 기어다니고 승리하지 못하는 삶을 살지 않는가?

 

육신의 먹을 것이 아닌 마음의 먹을 것이 훨씬 더 중요함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_마가복음7:18-19’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구약의 모든 율법을 깨뜨리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계시의 시작으로 동물들의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구분하셨지만 신약에서 뒤집어 주셨다.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_마태복음15:11’

 

입에서 음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마음이 나오고 내면이 나온다.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고 예수님께서 정하셨다.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죄의 모습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표면성에 집착하며 아직도 살아가고 있다. 수천가지의 율법을 가지고 살아간다. 마치 삼손처럼 머리카락 자르면 안된다는 것만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님께서 삼손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만 섬기겠다는 마음이고 중심이었다. 정말 거룩해야 할 내면, 중심을 놓치고 살아가버렸다.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예수님을 받아드리지 못하는 삶을 계속해서 살아갔다. 예수님께서 자기 땅에 오셨는데 받아들이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우리는 그동안 외적인 사역에 많이 집착해왔다. 특히 한국교회는 겉모양에 집착했다. 장로, 권사, 집사, 사역자, 제자, 목사, 선교사라는 것에 집착했다. 진짜 선교지를 나가보면 선교를 제대로 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 보고 잘하기 위해 사진 찍는 선교를 하고 있다. 우리는 겉모양에 집착해왔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내면을 보지 못하고 우상에 물들어 가버렸다. 우리의 은밀한 죄를 보지 못하고 숨기기에 급급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내면에 있는 죄는 반드시 열매를 맺는다. 우리 인생의 열매는 겉모양으로 맺는 것이 아니다.

 

.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 내면에 있는 은밀한 죄는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우리 인생의 열매를 겉모양으로 맺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담겨진 것들이 우리의 열매를 맺는다. 우리의 내면에 담겨져있는 것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기적도 쓸모 있는 것이 아니었다. 수많은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남들의 눈에 보이는 삶이 아닌 보이지 않는 내면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내면에 신경을 쓰는 삶이 어렵게 느껴진다. 당장 변화되거나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우리의 내면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상 주시겠다고 하신다. 내면의 주인이 누구인가요? 하나님인가요? 겉으로 교회는 다니지만 여전히 내면의 주인이 나거나 우상이나 귀신을 섬기고 있다면 아직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것 이다.아직 내면의 주인이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면의 주인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말씀의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내면을 오픈하지 않는다. 내면에 죄가 있다면 하나님이 임하지 않으신다. 결코 하나님은 죄와 함께 있지 않으신다. 신앙은 우리의 내면에 우리의 마음에 모셔드리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네팔 사역을 3년 동안 했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집회를 했다. 네팔에 돈도 필요하고 먹을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결코 네팔이 변화될 수 없다. 네팔에 얼마나 우상이 많은 줄 아십니까? 네팔에는 길거리마다 한집건너 한집마다 우상이 가득하다. 우상들이 네팔에 가득하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의 마음속에 말씀이 담기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삶으로 가서는 이러한 우상들이 가득하다. 따루 선교사님께서 네팔 사람들 주일날 교회에 오지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우상을 섬긴다고 말했다. 집집마다 우상이 있다. 이번에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회개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도 똑같습니다. 우리의 모습이 다짐으로 변화가 됩니까? 우리의 우상과 재앙이 다짐으로 떠나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임하셔야지 우상이 떠나갈 수 있다. 우리나라도 똑같이 어려웠고 더 어려웠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마음에 받고 죄를 회개하고 우상을 없앴다. 비록 우리의 모습, 외모는 남루하고 가난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정직하고 깨끗하게 살았다. 그래서 세상에 소망을 줄 수 있었고 빛이 되었고 소금이 되었다. 지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구별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전도하면 저들이 맞다고 받아들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구별이 사랑이 없고 싸우고 속이 좁은 존재들로 구별되어 있기는 한다. 시대마다 기독교가 세상을 변화 시켰을 때는 내면의 변화가 있을 때 내면이 구별 되어 있을 때였다.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 닥치는 대로 먹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거나 먹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구분해놓으셨다. 너희 마음에 정한 것을 먹어야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성령이고, 말씀이다. 우리의 마음은 다른 것으로 정화되지 않고 거룩해질 수 없다. 신앙생활은 언제부터 시작할 수 있는가?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임할 때 신앙생활을 시작할 수 있다. 교회를 30년을 다녀도 말씀이 마음에 임하지 않으면 그것은 신앙이 아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임하면 보이기 시작한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됩니다. 말씀이 임하는 것을 계시라고 합니다. 천국이 믿어지고 하나님이 믿어지고 내 인생을 책임지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믿어지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똑같이 자고 똑같이 먹고 살지만 우리는 다른 것을 보고 살아간다. 구별된 삶이어야지만 우리가 저들을 살릴 수 있다. 똑같은 모습으로는 저들을 살릴 수 없다. 구별되어야지 우리가 저들을 살릴 수 있다.

 

내면의 거룩이 진짜 힘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_요한복음1:14’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_요한복음3:3’

내면의 거듭, 마음의 거듭을 이야기하고 있다.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_요한복음7:18-1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라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_요한복음6:26-27’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따라가나요? 말씀의 떡, 영생하는 양식을 먹었기 때문에 우리가 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인내하고 죄와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우리 마음에 말씀이 임하면 우리는 살 수 있다. 교회는 이것을 회복해야 한다. 교회를 어떻게 하느냐? 프로그램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겉모습도 필요하고 수준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들이 어둠을 물러가게 하지 못한다. 거룩, 내면의 힘이 어둠을 물러가게 하는 힘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시간에 집중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시간에 예배드릴 수 있어야 하고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말씀을 묵상할 수 있어야 한다. 남들 보지 않는다고 아무거나 먹어서는 안 된다. 동물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먹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우리가 성별되어 구별되어 승리하길 원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늘 말뿐이며 겉으로만 하고 진짜 거룩을 사모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내면의 거룩함 뿐 이다. 세상이 빠르게 죄로 물들어 갈 것이다. 곳곳에 기근과 난리가 있을 것이다. 호주의 산불은 아직도 멈추지 않고 있다. 호주가 어떤 나라입니까? 동성애의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나라입니다. 얼마나 에이즈가 많고 병이 많은지 아십니까? 곳곳에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청소년들이 인권운동을 한다. 인권운동의 주제가 무엇이냐? 우리의 성은 우리의 마음대로 하겠다. 왜 어른들이 간섭하냐? 이것이 청소년들이 말하는 인권운동이다. 어떻게 이것이 인권운동인가? 이제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이것에 대해서 가르치지 못하는 법이 조례가 될 것이다. 이것이 차별금지법이다. 지금 국가를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반성경적인 내용들이 자꾸만 나타날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나라의 잘못이 아니라 반성경적인 것이다. 이것을 누가 조종하고 있는가?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한다. 아무거나 먹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점진적으로 우리에게 계시하고 계신다. 구별하고 계신다. 교회가 구별되지 않으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구별되지 않으면 세상을 살릴 수 없다. 우리의 속사람이 강건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승리할 수 없다. 다윗이 이야기를 한다. 내 영혼아 하나님을 바라라, 내 영혼아 하나님을 의지해라, 내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하다. 마음을 빼앗기면 육신을 빼앗기는 것도 금방이다. 무엇으로 마음을 지켜야할까?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한다. 말씀으로. 썩을 양식으로 일하지 말고 영생할 양식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혼자 있는 시간에 말씀묵상하기 바랍니다. 우리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너무 하기 싫고, 귀찮은 마음이 있는가? 그렇다면 마음의 상태가 좋지 않은 것입니다. 이 마음을 누가 주는 건지 잘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내면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내면을 보시고 평가하실 것이다. 매일 말씀을 먹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불신자 가정에서 신앙생활하며 가난하며 상황과 환경이 어려운 분들이 많은 줄 안다. 성령의 생명의 말씀을 먹고 성별되기를 애쓰길 바랍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함께하는 길이고 살아나는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존재가 회복될 때 우리의 인생이 정상화가 될 것이다. 왜 우리의 마음이 병들어 있는지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깨닫게 될 것이고 보게 될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복, 신약의 복을 다 주실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구별되지 않았는데 복음을 전달할 수 있겠나? 하나님께서는 동적인 구원을 설명하신다. 신앙은 동적이다.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으면 세상에 주님을 만나지 않는 그들을 위해 어떻게 우리가 쓰임 받을 수 있겠나?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볼 때 우리의 죄악들이 보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삶에 내면에 말씀이 담기는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우리의 가족에 전도해야 한다? 전도하지 않아도 된다. 가족들은 다 알고 있다. 진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우리의 내면에 말씀이 담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

 

 

 

 

 

 

 

 

 

 

 

 

 

 

 

 

 

 

 

 

 

 

 

 

 

 

 

 

문의 / 윤덕현 전도사 010.9899.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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