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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spel Letter. ‘하나님의 긍휼’ 이 내 삶에도

긍휼이란 ‘구체적인 행동’을 뜻하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니 예수님도 죄인된 인간을 긍휼히 여기셔서 몸소 이 땅에 오셔서 온갖 고난을 당하시고 우릴 대신하여 십자가 지시는 행동을 하셨지요. 수많은 순교자들 역시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하였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긍휼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인데 우리는 그 긍휼하심으로 구원받았음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가지지 않으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알려주시려고 했는 지 공생애 사역 기간 내내 과부들과 병든 자들, 소외된 자들을 찾아다니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런 사역만 해야 한다가 아니라, 최소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이익이 될 때는 모두가 긍휼한 마음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손해가 된다거나 자신에게 피해가 된다하면 어느 새 돌변해버립니다. 그때는 주님의 사랑이고, 십자가의 은혜고 무용지물이 되어버리는 것이 꼭 성경에 이야기하는 바리새인과 같지 않나요?

 

저는 지난주에 ‘긍휼’에 관한 묵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 열심히 나누었지요. 그러나 그 말씀이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저였습니다. 얼마 전에 양화진 선교사님들의 묘역에 다녀왔습니다. 제 모습 점검하면서 한숨, 한숨, 또 한숨만 내리 쉬고 왔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의 목적이 세상적인 것들로 향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목회자로써 세상적인 목적이 무엇일까요? 교회의 크기? 사람들 앞에 유명한 강사? 누가 알아주는 명예? 아니면 무엇일까요? 부끄럽게도 그것이 무엇이든지 긍휼과는 멀어진 삶이었습니다.

 

양화진에 묻힌 수많은 선교사님들(전문인, 사업가 선교사님)을 보면서 회개하였습니다. 어떤 선교사님은 이 미지의 땅에 하나님의 마음만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와서 보니 의료시설이 전혀 없고, 또 많은 사람들이 사소한 질병으로 죽어가는 것을 보고 다시금 고국으로 돌아가 의사가 되어 온 가족이 함께 들어와 죽을 때까지 진료를 하면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것이 긍휼히 여기는 것이 아닐까요?

 

그럼 평생 그렇게 손해(?)보면서 살아야 되나요? 아니지요. 그렇게 살 때 하나님이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매일, 매시간 나를 뒤덮고 있는 삶은 더없이 행복합니다. 그 맛을 보았으니 세상의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거지요. 그런 거지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_마태복음5:7’

 

 

 

 

 

 

 

  

_ 긍휼이 사라진 내 조국, 교회, 성도, 그리고 오승주에게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길 바라며, 오승주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