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1월 03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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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삶으로 전한 메시지 |
본 문 |
이사야 20:1-6 |
오승주 목사
Ⅰ. 깨진 유리창 이론
오늘은 애굽과 구스에 관한 연장선의 말씀입니다.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직책)을 아스돗에 보냅니다. 아스돗은 블레셋의 한 성인데 거기를 쳐서 취하던 멸망시켰던 해에 하나님이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나타나셔서 어떤 말씀을 주셨는지, 그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오늘 좀 살펴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라는 책도 있고 유명한 이론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차량의 유리창 일부가 깨지면 사람들은 주차되어 있는 차의 유리창이 깨져 있으면 그 차는 버려진 차인가 보다 타지 않는 차인가 보다 하고 차 안의 물건들을 훔쳐가기도 하고 차를 더 함부로 돌을 던지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 심리이론을 이야기합니다. 저 집이 유리창이 깨져있어, 집이 지저분하고 더럽고 가꾸지 않았고 유리창이 깨져있으면 사람들은 그 집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쓰레기도 버리고 돌도 집어 던지고 해서 금방 더 환경이 안 좋아진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심리가 깨진 유리창 하나만 봐도 심리적으로 사람들이 저 집은 사람도 안 살고 완전히 부서진 집이라고 생각하고 더 부시고 완전히 나머지도 파괴한다는 심리이론이 바로 깨진 유리창 이론입니다. 책도 있고 논문도 있습니다. 깨진 유리창의 법칙은 미국의 범죄학자인 제임스 윌슨과 조지 켈링이 1982년 3월에 발표해서 이 이론이 생겨났습니다. 그들의 주장의 핵심이 저는 충분히 일리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그들이 이야기했습니다. 만일 한 건물에 유리창이 깨어진 채로 방치되어 있다면 다른 유리창들도 곧 깨어질 것이라는 데 사회심리학자들과 경찰관들은 동의하곤 한다. 이런 경향은 잘 사는 동네에서건 못 사는 동네에서건 마찬가지이다. 한 장의 방치된 깨진 유리창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신호이며 따라서 유리창을 더 깨는데 아무런 부담이 없다. 이런 이론을 발표했습니다. 이런 이론을 발표하고 이 이론을 적용한 것이 1980년대 뉴욕입니다. 뉴욕이라는 도시는 연간 60만 건의 중범죄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미국의 뉴욕이라는 곳을 저는 가봤는데 제가 봤을 때도 범죄가 심상치 않았고 도시가 굉장히 시끄러웠습니다. 서울보다 훨씬 더 지저분한 도시였습니다. 1980년대 뉴욕의 사진들을 보니까 뉴욕의 할렘가들도 있고 범죄가 연간 60건도 아니고 600건도 아니고 6000건도 아니고 6만 건도 아니고 60만 건의 중범죄가 일어난다고 합니다. 살인도 허다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가장 큰 범죄의 원상이 되었던 것이 뉴욕의 지하철이었다고 합니다. (사진) 80년대 뉴욕의 지하철이 이랬습니다. 사람들이 낙서를 하고 다닙니다. 낙서가 되어 있으니까 더 낙서를 했습니다. 여기서 돈을 뺏고 해서 지하철을 사람들이 탈 수가 없을 정도로 뉴욕의 지하철, 할렘가 이런 데는 지저분하고 범죄가 많고 마약을 하고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여기서 사람에게 총을 들이밀고 돈을 뺏어도 누구하나 말리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래서 그 당시에 경찰들이나 국가에서는 손을 댈 수 없는 곳이 바로 뉴욕의 지하철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너무 골치가 많았는데 이 깨진 유리창의 법칙을 경찰서에서 경찰관들이 그것을 받아들여서 심리학자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국가에서 뉴욕의 범죄를 줄이기 위해서 대대적으로 투자를 해서 범죄와의 전쟁을 일으켰지만 범죄를 잡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심리학자들의 사소한 작은 이론인 깨진 유리창의 법칙을 적용해서 경찰들이 뭘 했냐면 지하철의 낙서부터 지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별거 아닙니다. 그전에는 범죄자들과 전쟁을 하고 소탕 작전을 벌였는데도 범죄가 더 많이 늘고 더 심각해졌는데 경찰들이 뭐하기 시작했냐면 페인트, 지우개를 들고 지하철 벽이나 지하철 안에 있는 벽들의 낙서를 지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비난하고 난리였다고 합니다. 경찰들이 총 들고 범죄들과 마피아들과 싸워야지 지금 페인트 지우고 다니냐고 비난이 난리였다고 합니다. 실제로 여론이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찰들이 갑자기 왜그러냐 하고 페인트 들고 다니고 뭐하냐 이랬다고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 매스컴들이 경찰국을 조롱하고 경찰이 할 일이 없어서 지하철 낙서나 지우고 다닌다 이런식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때 데이비드 건이라는 경찰국장이 정말 우직하게 지하철 낙서 지우기 운동에 직접 동참했다고 합니다. 연일 투자해서 6000대나 되는 지하철의 모든 낙서를 하나하나 다 지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주 작은 일입니다. 낙서 하나 지우는 것. 낙서로 인해서 범죄자들이 지하철로 몰려들었고 할렘가로 몰려들었는데 낙서를 지우기 시작하면서 어떤 일이 일어났냐면 놀라운 게 처음에는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고 범죄율이 줄어들지 않은 것 같지만 다음 해인 2년째 되던 해에 범죄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범죄가 아예 없어지지는 않았지만 100프로인 범죄가 75프로가 사라지고 25프로의 범죄만 남았다고 합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 총과 칼로 수많은 공권력으로 범죄자들을 차단했을 때는 범죄가 더 늘었는데 60만 건에서 약 20만 건까지 범죄가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겨우 낙서 하나 지웠는데. 그게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 아주 유명한 사건 중의 하나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의 신앙,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유리창 하나 깨진 것 보고 그냥 우리는 무심결에 무관심하고 그것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데 그게 나중에는 거기에 더러운 오물도 모이고 그렇죠? 죄도 거기에 모이고 사람도 그렇습니다. 교회 성도들 중에 누가 연약하고 아프고 또 불신앙을 하고 그러면 다들 모른척하고 지나가지만 나중에 그게 번지고 퍼지고 늘어납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작은 법칙이지만 이사야서 20장 말씀을 준비하면서 많이 와 닿은 내용입니다.
Ⅱ. 누가 우리의 피난처인가?
- 아스돗의 멸망_이사야20:1
‘앗수르의 사르곤 왕이 다르단을 아스돗으로 보내매 그가 와서 아스돗을 쳐서 취하던 해니라_이사야20:1’
그때가 어떤 때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아주 특별한 명령을 내리시는데 그 해가 어떤 해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해에 벌어졌던 일. 아주 중요합니다. 아스돗은 블레셋의 도시입니다. 블레셋은 앗수르에게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문에 앗수르가 장군을 보내서 아스돗의 왕을 폐위시킵니다. 그리고 그 블레셋의 도시 아스돗에는 야만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야만이라는 사람이 애굽과 에디오피아에 가서 동맹을 맺어 옵니다. 그러니까 이 아스돗은 블레셋에 소속된 도시지만 블레셋은 이미 쇄락 길을 걷고 있고 앗수르에게 대항을 할 수 없는 나라인데 도시인데 이들이 애굽과 구스(에디오피아)를 힘입어서 투쟁을 계속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아스돗은 유다의 동맹까지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애굽은 전쟁에서 앗수르에게 패했고 구스(에디오피아)도 앗수르에게 이길 수 없었습니다. 결국 블레셋의 아스돗은 그 해에 다르단에 의해서 완전히 정복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구스(에디오피아)로 피난했던 야만인은 앗수르에게 끌려가서 처분을 당했습니다. 그때가 주전711년경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어떤 말씀을 지금 명령하시냐면 그것이 2절부터 나오는 말씀입니다.
- 이사야에게 벌거벗으라고 명령하신 하나님_이사야20:2-4
‘그 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 이와 같이 애굽의 포로와 구스의 사로잡힌 자가 앗수르 왕에게 끌려갈 때에 젊은 자나 늙은 자가 다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볼기까지 드러내어 애굽의 수치를 보이리니_이사야20:2-4’
2절. 그 당시의 이사야는 베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왜냐면 나라가 곧 멸망하게 생겼으니까 상복이죠, 지금으로 말하면 회개의 의미로 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것도 벗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상복도 벗어라, 신발도 벗어라. 이사야를 보십시오. 3절. 무려 이사야라는 선지자가 3년 동안 겉옷을 입지 않고 속옷만 입고 신발도 신지 않고 다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작은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이사야라는 선지자의 위치를 봤을 때 지금으로 말하면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대선지자였습니다. 존경 받고 신망이 두텁고 나라의 왕이 선지자를 만날 정도였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의 총회장이라는 것과는 다릅니다. 아주 신망이 두텁고 존경 받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예언하는 선지자 중에서는 아주 높으신 실력 있는 선지자였습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거룩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달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위치는 굉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이사야 선지자가 옷을 다 벗고 신발을 벗고 다닌다. 아무리 이사야 선지자라고 할지라도 쉬운 일인가요?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옷을 벗고 다닌다는 것은 좀 낫습니다. 개성이 있다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패러독스가 완전히 달라진 시대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 당시 이스라엘은 율법과 전통, 어떤 관습. 그 당시 유대사회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율법 사회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옷을 벗고 다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게 단순히 체면이나 사회적 지위와 다른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만약 제가 주일날 설교하는데 양복을 입지 않고 청바지 입고 티셔츠 입고 설교하면 우리 어른들은 오목사 왜 저래, 양복 안 입고 설교해? 이러실 것입니다. 지금 그런 것과 또 다릅니다. 이때 당시의 상황은 선지자가 격식에 맞춰서 레위기의 말씀, 관습, 율법에 맞춰서 옷을 입어야 되고 신발을 신어야 되는 사람이 다 벗어버렸습니다. 왜 3년일까요? 예수님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옷을 다 벗고 신분,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신발은 신분을 상징한다고 했습니다. 겉옷도 신분을 상징합니다. 다 벗어버리고 내 땅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 신을 벗어라.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다 벗고 벌거벗은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이사야가 하나님이 다 벗고 3년 동안 다니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학식과 덕망이 있던 선지자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이었지만 이사야는 단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고 묵묵히 벌거벗은 채로 3년을 지냈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 유대사회에서 이사야를 조롱했을까요, 조롱하지 않았을까요? 아마 제 생각에는 저거 이제 미친 거 아니야, 이제 정신이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을 너무 가까이 하더니 이제 완전히 사람이 이상해졌네 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조롱했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왜냐면 유다는 그만큼 위태로웠습니다. 유다는 애굽과 구스를 의지했고 블레셋을 의지했고 유다는 어떻게 하면 자기에게 지금 들이닥치는 상황들을 모면하기 위해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수많은 전략들을 펴고 있는 그때 이사야가 분명히 말로 메시지를 전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던 때입니다. 하나님이 블레셋의 강력한 성이었던 아스돗을 멸망하던 그때에.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에. 애굽과 구스가 강력한 동맹이 되어 앗수르를 같이 싸워줄 줄 알았는데 아무런 힘없이 무너지는 그때에. 이사야를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게 하셨습니다. 그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서든지 유다 백성을 깨우치시고 유다 백성이 다시 하나님께,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이사야의 몸을 통해서 이사야의 삶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집트와 구스(에디오피아)에 심판의 예언을 통하여 이사야로 하여금 옷을 벗고 신을 벗은 채 3년 동안 살게 하신 이유. 그 말은 유다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고 강대국인 이집트와 에디오피아를 더 의지하는 것에 대한 경고로 그들이 아스돗처럼 너희도 곧 포로로 잡혀갈 거야. 블레셋처럼 곧 앗수르의 포로가 될 거야. 너희가 지금은 애굽과 에디오피아를 의지해서 안전할거라 생각하고 풍요로움을 즐기고 누리고 있는데 곧 너희도 아스돗처럼 끌려 갈 거야. 제발 내 말 좀 들어. 다시 여호와 앞으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야 돼. 그것을 말로 해서 듣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옷을 다 벗겨서 3년 동안 다니게 하시면서 그 수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너희가 이런 수치를 당할 거야. 그런데 사실 사람들은 몰랐을 것입니다. 이사야가 수치를 당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게 곧 자기들의 수치라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겉옷, 우리가 신고 다니는 신발. 그 당시로 말하면 신분과 권세, 삶의 풍요로움들. 다 겉옷으로 신분을 확인하던 때입니다. 외투로. 포로로 끌려가면 그런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노예가 되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고 내 나라와 내 집이 쑥대밭이 되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대한민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좋은 교육으로 잘 가르치고 좋은 대학을 보내고 좋은 집을 사주고 아이들이 풍요롭게 사는 것을 우리가 꿈꾸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재앙이 들이닥치면 작은 바이러스 코로나 하나 들이닥치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영적으로는 아이들이 영적으로 타락해버려서 범죄를 만나고 어둠을 만나서 아이들이 완전히 타락해버리면 어른들이 자녀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삶을 아이들이 감당해낼 수 없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어제 그것이 알고 싶다를 보셨습니까. 제가 앞전에 사진으로 보여드렸던 어린 아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1살짜리가 학대당하는 거 보셨죠. 사실 하나님은 18-19장에 애굽과 구스에 대한 말씀을 주시면서 회복하도록 다시 구원을 회복하도록 다시 경배와 예배를 회복하도록 다시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시온 성의 위치로 회복하도록. 심지어 하나님은 애굽과 구스까지 축복하시면서 너희가 회복하면 애굽과 구스도 돌아올 거야, 애굽과 구스도 하나님을 경배할거야, 예물을 가지고 올 거야라고 축복하셨는데 유다는 듣지 않았습니다. 블레셋의 대단한 도시 중에 하나였던 아스돗이 함락되는 것을 보면서도 여전히 애굽과 구스는 또 유다는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괜찮겠지, 우리는 괜찮겠지. 블레셋은 멸망했지만 아직 애굽과 구스가 우리에게 있잖아. 유다는 그렇게 애굽과 구스를 철저하게 의지했습니다. 아직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때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벌거벗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이것은 무슨 말이냐면 말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주라고 하십니다. 말로 듣지 않으니까 깨닫지 않으니까 몸으로, 삶으로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고 말씀을 주셔도 이스라엘 백성이 깨닫지 않았지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과 같습니다. 3년 이라는 시간. 그리고 그가 완전히 벌거벗고 선지자 노릇을 했다는 것은 다 예수님을 징표 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이사야는 그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했습니다. 저는 이런 해괴망측한 명령을 저에게 지금 현재 그대로 내리신다면 오목사 옷을 다 벗어, 네가 속옷만 입고 3년을 살아 이러면 저는 못 할 것 같습니다. 여러분 하실 수 있겠어요? 우리는 막 의미를 해석할 것입니다. 옷을 벗는다는 게 진짜 옷을 벗으라는 것이 아니고 다른 해석들을 할 것입니다. 알레고리적, 풍유적인 해석을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 난도질하고 하나님의 뜻은 그게 아닐 거야, 설마 우리에게 그러실까 다 이렇게 각자의 해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할 것입니다. 이사야는 단 한마디 거절도 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마디 다른 의미가 있는지 물어보지도 않고 즉석에서 옷을 벗고 벗은 발로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역사 자료에 보니까 이사야가 시장을 지나갈 때 길거리를 지나갈 때 수많은 아이들이 뒤 따라 다니면서 조롱했다고 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타락의 모습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그런 선지자를 보고 뒤에서 손가질하고 조롱하고 따라다녔다는 자체가 유다 사회의 영적인 황폐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 어린 자녀들이 예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우리 어린 자녀들이 부모님이 자녀를 위해서 하는 기도를 얼마나 귀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니죠. 왜? 우리 자녀들은 풍요롭고 믿을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옷을 다 벗고 양말을 벗고 신발을 벗고 맨발과 벗은 몸으로 다녔다는 것은 꽤나 충격적인 사건 중 하나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 수치스러움을 당하셨습니다. 보좌의 왕이신 하나님의 보좌의 옷을 다 벗으시고 이 땅에 오셨는데 3년 동안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얼마나 사람들이 예수님을 조롱했습니까. 네가 우리의 구원자야? 네가 우리의 왕이야? 왕이면 왕처럼 행동해봐 이러면서 조롱했습니다. 심지어 마귀도 사단도 와서 예수님을 조롱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다 조롱했습니다. 그런 조롱은 그런 사람들의 수치스럽게 하는 것들은 그런 것들이 아무리 있어도 예수님은 꼼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셨고 그 순종이 그들을 살렸습니다. 이사야의 순종이 그들을 경고하고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게 되는 메시지가 됐고 유다 사회 안에 숨겨져 있던 잠잠해 있던 신앙을 깨우고 기도를 깨우는 촉매제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내 주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게 타락한 시대의 모습입니다. 당장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겪은 일이 아니면 그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시대를 저와 여러분은 지금 살고 있습니다. 언론에서 나오는 수많은 사건사고들이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되고 나만 안전하면 되고 나만 평화로우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나라 사람들의 모습이고 우리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선교지가 어떻게 굶어 죽어가고 있는지 영적으로 얼마나 황폐해져 가고 있는지 한국교회가 관심을 끊은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자기 교회 잘 먹고 잘 사는 것에 신경을 쓰느라고 우리 병들고 가난한 이웃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육신적인 일도 그렇지만 영적인 일은 더 무감각합니다. 나를 위해서 기도하고 내 가족과 내 안위와 평화를 위해서는 기도하지만 우리가 이웃과 병든 자들과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 선교지를 위해 기도하던 한국교회 선배들과 부모님들의 믿음의 기도가 지금 다 실종되었습니다. 지금은 전부 내 기도밖에 없습니다.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기도밖에 하지 않습니다. 남을 위해서, 이 땅을 위해서 병든 선교지를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도가 다 끊겨버렸습니다. 그런 기도를 하면 마치 어색합니다. 나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데 꼭 시간 내서 꼭 기도해야 돼? 하나님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순종을 요구하시지만 대부분은 그 수치스러움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런 사역들은 대부분 힘들고 어렵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워서 안 하는 것도 있지만 다들 마음속에 그게 될까? 그게 가능해? 아무도 그런 생각 때문에 깨진 유리창을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하철의 낙서를 지우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갔는데 예수님을 믿은 지 2년 반 만에 신학교를 갔습니다. 제가 성경을 읽어본 적이 있어요, 신학교의 구조나 목회자가 된다는 과정 이런 거 다 이해도 못한 채 그냥 고등학교 때 2년 반 그 뜨거웠던 열정으로 신학교를 갔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초토화 되었습니다. 초토화 되었다는 표현이 이상하지만 제가 완전 무너졌습니다. 저는 그때 이제 제 모습을 보고 내가 할 수 있을까? 목회를 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을까? 나에게는 이렇게 부족한 것들 투성인데.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지 몰랐습니다. 그때 진짜 좋은 선배를 만났습니다. 저는 그 선배를 잊지 못합니다. 이름도 기억합니다. 커피 한 잔을 하면서 학교 운동장에 앉아서 대화를 했는데 그 선배가 하는 이야기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저에게 작은 것부터 시작하라고 했습니다. 네가 그렇게 갈등하고 고민하고 무너져서 원망하고 비참하게 인생을 포기하고 있는 시간에 무엇을 하나라도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성경도 읽기 시작하고 기도도 시작하고 네 인생이 앞으로 이제 20년밖에 안 산 인생이 앞으로 살 날이 얼마나 많은데 벌써 네가 비관적인 생각을 하냐면서 누가 이 신학교에 오면서 완벽하게 갖춰서 온 사람이 누가 있냐면서. 한 달에 한 권씩 책도 읽고 성경도 읽기 시작하고 이제 시작하라면서. 그게 10-20년 뒤에 어떤 열매가 맺힐지. 저는 그 선배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진짜 놀랍습니다. 우리는 다들 그게 될까? 그게 가능해?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그런 것을 너무 많이 경험했습니다. 제가 한 달에 한 권씩 책을 읽기 시작하는데 물론 나중에는 한 달에 20-30권을 읽을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읽지 못하지만. 한 달에 한 권만 책을 읽어도 일 년이면 12권입니다. 12권 읽은 사람과 그 한 권 읽어서 내 인생이 변화되겠어 하는 사람과 1년이면 12권 차이가 납니다. 10년이면 120권이 차이가 납니다. 30년이면 360권의 지식 차이가 나버립니다. 우리는 근데 이거 한 권 읽는다고 내 인생이 변화되겠어? 단순히 책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도 똑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정스럽게 부정하고 불신앙하고 아무 것도 안 된다고 원망하고 있는 동안에 누구는 하나님 말씀을 읽고 기도합니다. 하나님 응답해주세요, 하나님 역사해주세요 하나님 우리 가정 저는 포기할지라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하루에 5분씩만 기도해도 그게 10년이면 그 기도가 쌓여서 우리 가정에 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안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게 될까? 그게 가능해? 라고 합니다. 사실 그것은 핑계이고 힘들고 어려운 사역이라고 우리도 즐겨야 한다고, 우리는 특별하게 하나님의 백성이고 유다 백성이고 구원 받은 백성이라는 생각, 정체성 다 잃어버리고 우리도 앗수르처럼 살고 싶다는 것이 본심 아닙니까? 우리도 애굽처럼 축복 받고 싶어, 우리도 구스처럼 물질적인 축복 받고 지혜롭고 싶어. 그게 유다의 본심 아닙니까? 그래서 이사야가 와서 하나님의 말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할 때마다 비웃었습니다. 에이 지금 우리가 이렇게 평화로운데 무슨 심판이 온다고, 무슨 포로 같은 소리하고 있냐고 우리가 지금 얼마나 강력한 연대를 하고 있는데. 애굽, 구스를 의지하고 있는데. 앗수르 괜찮다고 먼 나라,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마다 비웃고 그의 말씀을 어기고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다 벌거벗게 만드신 것은 오늘 날 우리에게 주신 메시지가 굉장히 크다는 것을 여러분 아셔야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_이사야20:5-6
‘그들이 바라던 구스와 자랑하던 애굽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놀라고 부끄러워할 것이라 그 날에 이 해변 주민이 말하기를 우리가 믿던 나라 곧 우리가 앗수르 왕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달려가서 도움을 구하던 나라가 이같이 되었은즉 우리가 어찌 능히 피하리요 하리라_이사야20:5-6’
놀랐습니다. 구스가 무너질 줄 몰랐습니다. 애굽이 포로가 될 줄 몰랐습니다. 부끄러워했습니다. 해변은 아스돗이 해변에 있는 나라였습니다. 아스돗은 애굽과 구스가 자기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애굽과 구스도 같이 망해버렸습니다. 아스돗도 망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는 유다. 유다가 애굽과 구스를 의지하고 아스돗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깨진 유리창을 고치고 치유하고 그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주의 복음을 전달하는 사역을 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앗수르에게 벗어나기 위해 도움을 구하던 나라 애굽과 구스가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가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약한지, 얼마나 별게 아닌지. 결국 유다도 옷을 다 벌거벗은 채로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도 이사야와 마찬가지로 일반 상식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행위를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러면 우리가 절대 할 수 없는 행위가 무엇입니까? 옷을 벗는 건데, 신발을 벗는 건데. 그게 크리스찬들에게 무엇입니까? 교회에게? 지금 한국교회가 수많은 세상과 접촉하고 세상의 문화들이 들어와서 교회에 운영, 교회가 세워져 가는 모든 과정들이 다 세속화 되었는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 옷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내 생각, 내 주장, 내 학식 다 벗으라고 하십니다. 뭐라고 이야기하십니까?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세상에 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감하지 말고 재해석하지 말고 주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제가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가 90년대입니다. 신학교를 갔습니다. 제 신학교가 우리나라에서는 경건주의, 율법주의로 탑 되는 부산에 있는 신학교입니다. 학교에 가면 반바지도 못 입게 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반바지 입었다고 선배들에게 불려갔습니다. 알만하실 것입니다. 어떻게 반바지를 여름에 더운데 못 입게 했습니다. 보니깐 신학교 가서 제가 왜 낙심이 되었냐면 도서관에 전부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교 안에 작은 기도실이 있습니다. 기도실 안에 웅성웅성 했습니다. 다들 성경책을 보석 들고 다니듯이 들고 다녔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메시지 듣고 은혜만 받고 신학교를 갔는데 그게 적응이 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제가 그분들을 얼마나 비꼬고 정죄했는지 모릅니다. 복음도 모르는 사람들이 저렇게 기도하고 성경 읽는다고 비꼬고 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그것이 율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경건주의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월이 많이 지나서 지금 그때를 되돌아보니까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가 이야기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보세요.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논리적이거나 학식이 뛰어나거나 굉장히 클리어하게 깔끔하게 정리된 복음 메시지가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선배들 우리 부모님들은 정리된 복음 메시지가 아니었지만 그 예수님으로 인해서 구원받고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을 만난 것 천국 갈 수 있다는 것으로 너무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몸된 교회를 사랑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헌신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 사랑의 표현이 성경에서 말씀을 읽으라고 하니깐 그들에게는 말씀을 읽는 것이었고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조롱했습니다. 껍데기라면서 말입니다. 지금은 한국교회 유튜브만 가보아도 얼마나 화려한 메시지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얼마나 다양한 설교들이 많은지 몰라요. 얼마나 정리 정돈된 설교와 해석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금 기독교인의 삶에 경건이 있습니까? 주님 사랑하는 행함이 있습니까?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의 모양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습니까? 그때는 기독교가 교회가 세상의 빛이고 희망이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 불신자들이 뭐라고 이야기 하나요. 너희들 말뿐이지 않았냐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면서 가난하고 병든 자를 사랑하라면서 너희들이 가난하고 병든 자를 사랑한 적이 있냐? 롬16장의 말씀처럼 너희 배를 채우기 급급하지 않았냐고 합니다. 교회들이 아첨하기 급하지, 권력에 줄 서기 바쁘지, 사람들 비유 맞추기 바쁘지. 목사인 저는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엄청 회개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 깨진 유리창을 그냥 보고 그것이 내 것이 아니야 그것이 나와 상관없어. 그런데 점차 그것들은 내 교회, 내 가정, 내 나라까지 악한 영향력을 끼친다는 것을 우리는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사야가 옷을 벗었습니다. 순종이기도 하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상태의 그들에게 삶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이라는 삶으로 보여주기 위한 메시지인 것입니다. 옷을 벗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벗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우리는 이해를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명령하셨는데 그게 옷 벗고 다닌다고 해서 그들이 회개하겠습니까? 옷 벗고 다닌다고 해서 그들의 삶에 대역사가 일어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 메시지가 아닙니다. 그 이사야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그 자체가 엄청난 힘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저와 여러분은 저를 비롯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변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 말로만 떠듭니다. 말로만 다 떠들고 목사들도 끝입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말로만 떠들면 아멘하고 끝입니다. 거룩과 전혀 상관이 없는 삶. 하나님 앞에 옷을 벗고 신발을 벗어야 할 거룩과 전혀 상관없는 삶. 그러는 동안에 세상은 뉴욕의 지하철처럼 흥청망청 되어버렸습니다.
Ⅲ. 삶으로 전한 메시지_로마서16:17-27, 고린도후서4:13-18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너희의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로 말미암아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에서 상하게 하시리라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나와 온 교회를 돌보아 주는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관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_로마서16:17-27‘
‘기록된 바 내가 믿었으므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었으므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는 모든 것이 너희를 위함이니 많은 사람의 감사로 말미암아 은혜가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_고린도후서4:13-18’
우리가 이 시대에 다시 회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한 해를 시작하면 수많은 다짐들을 합니다. 실제로 그 다짐들을 한해에 돌아오면서 했는지 다행히 우리 교회는 작년 한해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많은 성도들과 함께 기도를 시작했다 라는데 큰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보통 믿음이라는 것이 마음이고 중심에서 나오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 중심에서 나오는 믿음이 행함으로 연결이 되지 않으면 그 중심에 있는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의구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맞지 않나요? 내가 무엇을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을 얻으려고 표현이 되듯이 내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내가 주의 말씀을 믿는다 라는 것은 행함으로 따라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으로 복음이 드러나지 않으면 우리가 정말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을 지키려고 하는가 우리가 의심해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솔직히 제가 신학교 다닐 때 그 사람들을 비난하고 비웃었지만 제가 성경을 읽고 하루에 한 시간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던지. 주님 사랑한다고 복음을 깨달았다고 이야기를 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반의 반의 반도 따라지 못하는 저를 보며 진짜 많이 낙심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 문화는 하루 종일 핸드폰을 들고 있습니다. 저도 하루 종일 핸드폰 들고 있습니다. 핸드폰이 없으면 불안할 정도입니다. 이 핸드폰으로 나쁜 것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메시지도 듣고 사람들과 소통도 하고 많은 것을 합니다. 밥 먹을 때도 핸드폰을 들고 있습니다. 커피 마실 때도 핸드폰을 들고 있어요. 중요한 사람들과 대화를 해도 핸드폰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핸드폰 하고 혹은 문화생활을 하면서도 성경 읽을 10분의 시간이 아깝다고 느껴지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또 이런 것도 있습니다. 내 돈 벌어서 내가 막 쓰는데, 사람들은 돈을 벌어서 막 씁니다. 차도 사고 집도 사고 옷도 사고 하고 싶은 것을 막 합니다. 커피도 마시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갑니다. 저도 한 달에 식비가 수십만 원씩 나옵니다. 코로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배달음식을 시켜 먹는지. 그런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일에 가난하고 병든 선교지에 돈 만원 후원하는 것은 너무 너무 벌벌 떨며 아깝다고 생각합니다. 한 달에 만 원 후원하는 것이 아깝다고 합니다. 그것을 취소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지 만원이 없어서 진짜 힘들어서 취소할 수도 있겠지만 제가 보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저부터 회개입니다. 저 주일에 헌금할 때 만 원짜리 헌금할 때 많은 생각을 합니다. 나는 이번 주에 커피 10만원어치 먹었는데. 피자에 통닭에. 내 삶은 수많은 계획들을 세웁니다. 놀러갈 계획도 세우고 사람들과 만나서 놀 계획도 세우고 그러나 일주일에 단 1시간, 30분도 무릎 꿇지 못하는 영성을 가졌다면 그것은 우리 시대가 그 당시 유다시대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차라리 8-90년대 유튜브도 없는 시대, 목사님 설교가 듣기 너무너무 지루한 시대에 주님 사랑하고 구원에 감사해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고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후대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던 그 권사님, 장로님들의 그 기도가 있던 시대, 그리고 성경을 늘 가방에 넣어 다니면서 틈만 나면 성경을 읽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교회를 소개하고 말씀을 전하던 그 시대가 훨씬 더 힘 있고 능력 있던 시대가 아니었습니까. 삶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살고 있을까요. 말뿐인 메시지, 교회, 복음, 경배. 저는 어제 밤에 설교준비를 다 끝내놓고 새벽 한시쯤 되었습니다. 이번 주에 정신이 없었습니다. 집에 가면 아이들하고 있어야 되고 교회에 행정하고 어제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설교준비를 다 끝내놓고 한시에 드디어 제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21년도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드릴 수 있을까. 이 부족하고 연약한 삶이지만 어떻게 하면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래서 메모를 했습니다. 내가 일주일에 몇 분 기도하고 있지. 나는 일주일에 어떻게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지. 나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내가 어떻게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는 표현을 어떻게 하고 있지. 그래 2021년도에는 이런 부분 갱신해야겠구나. 책은 이렇게 읽어야 되겠고, 성도들 심방은 이렇게 해야 되겠고, 성경은 이렇게 읽어야겠고, 이러한 부분은 고쳐야겠구나. 내가 조금 짜증내는 것, 내 마음이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들 다 기록했습니다. 새벽 3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정리해도 다 지켜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2021년도를 어둠에게 악한 영들에게 제 삶을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세상에 제 마음과 생각을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온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싶은 마음으로 어제 다 정리를 했습니다. 내 작은 삶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내 삶에 걸리고 내 삶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우리는 온전한 복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번 송구영신예배 메시지입니다. 온전한 복음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냐? 어떻게 회복할 수 있습니까.
- 온전한 복음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주일 말씀, 설교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한마디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혼자 듣고 혼자 깨달으면 절대 올바르게 깨달을 수 없습니다. 피드백 하셔야 합니다. 지체들과 나누고 가족들과 나누고 그것이 어렵다면 교역자들과 나누면서 내가 말씀을 바르게 깨달았는지 확인하십시오. 우리는 듣고 마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내 것인지 내게 소화된 음식인지 아닌지를 확인도 안 되는 시대입니다. 확인하세요. 그리고 그 확인하는 방법 중 최고의 방법이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하루에 3장 전 성도가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읽어보니 긴 구절이면 10분이면 읽습니다. 짧은 구절이면 5분이면 읽습니다. 그것도 힘들면 드라마 바이블 같은 것 틀어놓고 듣기라도 하십시오. 그것도 힘들면 하루에 한 절이라도 읽으십시오. 하루에 한 절 읽는 것은 30초면 읽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없습니까? 믿음이 없습니까? 그럼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럼 1년에 하루에 3장씩 읽는다고 내 삶이 변화될까요? 아닙니다. 1년 만에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쌓이고 20년이 되고 30년이 되면 완전 말씀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성경을 수십 독 한 인생이라고 생각해보세요. 그런 우리가 그 복음이 죄에서 나를 살렸고 나를 지옥에서 건졌고 나를 치유하는 복음이라는 것을 말씀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온전한 경배
온전한 경배를 하나님께 드려야 됩니다. 경배는 순종의 열매입니다. 결단입니다. 나는 하나님만 경배할 거야, 예배할 거야. 그게 아니라면 사단은 우리의 빈틈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이번 주는 예배드리지 않아도 돼. 이번 주는 오랜만에 휴가인데 예배 좀 쉬고 다음에 드리면 되지. 여러분 우리는 괜찮습니다. 사단은 다 알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절대 승리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무너지더라도 주저앉더라도 마음은 굳게 먹고 결단이라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주인이야. 여러분 가정, 직장에서 선포하고 믿음의 고백을 하십시오. 속으로 말입니다.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라는 것입니다. 낙심이 찾아오거나 불안이 찾아오거나 근심 걱정이 찾아오면 선포하십시오. 죄에 대해서 선포하십시오. 나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야, 나는 더 이상 너희에게 휘둘리지 않을 거야, 나는 하나님의 백성,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야. 여러분 믿음을 결단하십시오. 입술로 고백하는 경배와 예배가 찬송하고 감사함을 표현하는 그것들이 여러분의 삶을 엄청난 힘 있는 삶으로 변화시킬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시면 찬송부터 부르시고, 아침에 일어나시면 오늘 하루 믿음으로 살겠다고 무릎을 꿇고 결단부터 하십시오. 우리 다시, 우리의 삶이 능력 있는 삶으로 힘 있는 삶으로 다시 회복되어야 하지 않겠습니다. 다 눌려서 삶에 눌리고 경제에 눌리고 세상 문화에 눌리고 나는 그리스도인인데 그리스도인이라고 표현도 하지 못하고 사는 우리의 삶. 옷을 벗으십시다. 수치를 당할지라도 신발을 벗으십시다. 그래서 우리는 온전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들 욕을 많이 먹습니다. 무엇으로 욕을 먹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모일 때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음의 사람들이 모일 때 일하십니다.
- 온전한 교회
그 온전한 교회가 세상을 향한 메시지입니다. 그 교회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교회 공동체 자체가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삶이 교회가 되고 교회는 저들에게 메시지가 됩니다. 건강한 교회는 건강한 메시지가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깨진 가정, 젊은이들, 이 땅을 두고 그냥 봐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건강하고 온전하다는 것은 그들을 사랑으로 품고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교회가 수치스러울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요? 번영을 좋아하는 사람들, 율법을 좋아하는 사람들, 외모나 외적인 세상 풍속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입니다. 오목사 지금 기도한다고 돼? 지금 성경 읽는다고 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아닙니다. 진짜 신앙의 고수는 엎드리는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두고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고 일하시나. 우리가 지금 무엇을 잃어버렸습니까? 무엇을 놓쳐버렸습니까? 교회가 돈이 없습니까? 교회가 시스템이 없습니까? 넘칩니다. 넘칩니다. 교회가 자원이 없습니까? 엘리트가 없습니까? 교회 안에 넘칩니다. 뭐가 없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경건, 경배를 다 잃어버렸습니다. 기도하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수치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늘 고린도후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합니다. 구원을 위해서 우리 자녀들이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이 땅이 다시 신앙생활하기 위해서 우리는 힘입게 복음을 회복해야 하고 경배를 회복해야 하고 이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교회는 헌신하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무너진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내 자식들, 후대들이 갈 교회가 없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교회가 무너지면 이 땅에 누가 복음을 전하고 누가 이 땅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겠습니까. 다들 외면하고 그냥 지나치면 그냥 나몰라라 하면 그게 점차 커져서 우리 집까지 내 자녀들까지 영적인 것이 온다는 것을 왜 생각을 못하시나요. 누가 대신 해줄 수 있습니까?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분이 오셨습니다. 옷을 벗고 신을 벗었습니다. 이사야가 아닙니다. 예수님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머리로 한 지체들의 모임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님을 따라서 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기 위해,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치를 무릅쓰고 우리의 신분을 벗고, 세상 권세를 내려놓고. 여러분 교회 안에 신분과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교회 오시면 다 벗으시길 바랍니다. 가스펠교회에 와서는 예수 믿는 사람이지, 주님 사랑하는 사람이지. 우리의 신분, 명예 다 벗으시길 바랍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감사로 은혜가 넘치게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속사람을 새롭게 하라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새로워져야 우리의 삶이 변화됩니다. 속사람이 새로워져야. 올 한해 우리가 다시 우리의 삶으로 전하는 메시지가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주변에 깨진 유리창이 있는지, 뉴욕 지하철처럼 이미 포기 상태입니까? 포기하지 마십시오. 다시 낙서도 지우고, 깨진 유리창을 갈아 끼우고. 여러분 집에 깨진 유리창이 있습니까? 여러분 삶에 깨진 유리창이 있습니까? 포기하고 낙심하고 될 대로 되라고 신앙생활 포기하고 살고 있지 않으십니까?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다시 성경 읽고 다시 예배하고 다시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고 그래서 우리의 삶이 다시 하나님의 능력으로 힘 있는 삶으로. 세상에 메시지가 될 만큼 우리의 삶이 믿음의 삶으로 변화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변화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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