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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1-05-02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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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5월 2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2부예배)

제 목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본 문

이사야 34:1-17

 

 오승주 목사

 

Ⅰ. 하나님은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을 원하십니다_마가복음10:15

 

여러분 성경을 읽고 계시면 단어가 무슨 뜻인지 그리고 아무래도 구약 같은 경우는 특히 이스라엘의 역사가 많이 담겨 있기 때문에 지명이라든지 문맥의 뜻이나 의미를 모르고 읽을 때가 많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고 성경을 그냥 쭉쭉 읽을 때가 많습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신학을 전문적으로 공부해서 성경의 배경사도 공부하고 성경지리도 공부하고 성경의 의미도 공부하는 것이 목회자들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읽으면서 어렵다고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여러분 그것을 다 읽으면서 완벽하게 깨닫고 이해하면 여러분 다 목회자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저도 공부를 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그런 데에 낙심하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시 읽다가 단어들이 너무 궁금하고 이게 이해가 안 되서 전체 문맥이 이해가 안 되었을 때는 항상 성경을 읽으면서 노트나 패드에 메모하셨다가 교역자들이나 가까운 장로님들에게 여쭤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에게도 물어봐도 좋습니다. 그러면 이제 교역자들도 그 순간에는 답을 못해도 공부해서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나중에 성경이 전체적으로 흐름, 맥이 뚫리게 됩니다. 그러면 아~이런 거였구나 이렇게 이해가 되면 주일 날 공 예배 때 드리는 설교를 듣는 데도 훨씬 수월할 것입니다. 아마 설교를 한 편 들을 때 지금은 은혜 받는 것이 10%정도라면 성경을 일, 이, 삼독해서 설교를 들을 때 은혜 받는 것은 90%, 100% 이렇게까지 될 수 있습니다. 이해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 읽는 것에서 그런 것을 참고해주시면 좋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남유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마찬가지셨고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요구하시는 것이 있는데 우리의 신앙이 어린아이와 같은 신앙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_마가복음10:15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처럼 받들지 않는 자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게 어떤 사건이냐면 예수님이 이제 그리스도의 일, 공생애 사역을 하시면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또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치유가 되던 때 부모님들이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 예수님 만지게 해주고 싶어서 예수님 앞에 자녀들을 보내고 싶은데 제자들이 뭐라고 한 것입니다. 애들은 가 이렇게 된 것입니다. 애들을 못 오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노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에게 노하셔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들의 것이니라 이렇게 이야기하시면서 너희들도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섬기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품에 안고 안수하고 축복해주셨습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은 우리보고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라고 했습니다. 우리보고 어린아이의 신앙에서 벗어나서 장성한 분량, 어른의 신앙, 성숙한 신앙을 가지라고 했는데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가려면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말도 맞고 이 말도 맞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어른이 되어도 미성숙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철이 들지 않은 사람들. 철이 안든 사람들보다 더 심한 것은 미성숙한 사람들이 더 심한 것입니다. 자기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사람들. 어떤 자기 삶들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들. 옛날에도 사건사고가 많았지만 요즘 일어나는 살인 사건은 충격입니다. 동생이 친누나를 칼로 스물 몇 번을 찔렀습니다. 그냥 우발적으로 화가 나서 누나가 잔소리 하니까 한 번 찔러서 죽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저는 사실 한강에서 죽은 그 아이보다 더 안타까운 사건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친동생이. 엄마 아빠를 떠나서 둘이 같이 살았으면 얼마나 많이 보살폈을 텐데. 살인하고도 뒤에 뒤처리하는 것을 보면 참 악하다 생각이 됩니다.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여러 번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죄에 대해서, 아동성범죄, 아동학대, 살인사건은 진짜 법이 강력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이 그런 면에서는 굉장히 좋습니다. 아동 성범죄, 아동 살인사건 이런 것은 제가 본 것은 구백 몇 년을 선고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구백 몇 년을 감옥에서 다 살지 못하잖아요? 아무리 감옥에서 착하게 모범수를 해도 나오지 못한다는 의미도 있고 제가 물어보니까 이런 의미도 있다고 합니다. 이 죄가 그렇게 큰 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구백 몇 년을 선고합니다. 감옥에서 90년도 못 사는데. 죄의 크기만큼 형량을 몇 백 년씩 선고하는 판사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살인사건 하고도 5년 감옥에서 살기도 하고, 모범수로 있다가 나오기도 하고. 물론 영적으로는 감옥이 갱생하는 곳이니까 새사람이 될 기회를 주어야겠지만 살인죄에 관해서는 굉장히 엄격한 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경시여기는 풍토를 만들기 때문에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살인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밖에 나오면 안 되고 그냥 감옥에서 평생 있는 것이 났습니다. 그게 미성숙한 사람들입니다.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말씀은 조금 다른 의미입니다. 뭐냐면 예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은 순수하고 깨끗하고 거짓이 없는 계산이 없는 그런 신앙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많은 무리들이 가까이 와서 예수님의 손을 잡고 예수님을 만나고 했던 많은 무리들은 대다수, 거의 대부분이 다 병을 치료받기 위한 어떤 동기, 예수님을 만나면 무언가 얻을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여 무리들이 예수님의 주변을 둘러쌓습니다. 아이들은 그런 마음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가까이 할 때 예수님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오는 어린아이들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예수님에게 찾아왔을 때 예수님을 만나려고 했을 때 아주 깨끗하게 옵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계산이 없는 신앙, 깨끗한 신앙 이것을 이야기하는데 여러분 이게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는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동기가 없고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녀 관계가 그렇습니다. 한빈이나 윤빈이 얘네 들은 동기가 없습니다. 엄마 아빠에게 아무런 동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은 있는 것 같습니다. 한빈이가 6살인데 유치원을 다니고 있습니다. 저도 초등학교에 있는 병설유치원을 나왔는데 기억이 없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2,3학년 때 구구단 외운 기억이 조금 있고 중학교를 갔는데 중학교에서 알파벳이 적혀있는 용지를 준 기억이 납니다. 그거 외우고 써오라는 것입니다. 수준이 그랬습니다. 지금 한빈이는 알파벳은 4살 때 다 했고 한글 다 했고 책도 지금 혼자 읽고 있고 수학공부도 하고 있고 영어공부도 하고 있습니다. 저보다 영어단어도 많이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교육이라는 것이 그렇게 발전이 된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했습니다. 아이들이 그렇게 빡빡하게 사니까 문제가 있는 거야.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아이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옛날에 널널하게 살았을 때는 문제가 없었나요? 그러니까 그것이 본질은 아닌 것입니다. 저는 아이들이 건강하게 큰다는 것은 건강한 관계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관계가 그것을 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지금 아주 힘 있고 행복하게 사역하고 피곤하고 어렵지만 즐거운 이유는 자녀들과 관계가 좋고 와이프와 관계가 친밀하고 좋으니까 그런 부분들이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도 그것들을 극복해낼 수 있는 힘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실 관계에서 행복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가장 가치 있는 행복. 학자들이 이야기합니다. 가장 고퀄리티의 행복이 뭐냐? 관계에서 다 얻습니다. 직장도 그렇습니다.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시는 분들 보면 사장님, 회장님과 관계가 좋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관계가 좋으면 또 회사에 위기가 올 때, 회사가 어려울 때 더 열심히 일합니다. 왜? 관계가 좋으니까, 신뢰관계가 있으니까. 그런데 관계가 좋지 않으면 절대 그런 에너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관계에서 진짜 좋은 에너지들이 나옵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살다보면 경제가 어려울 수 있고 살다보면 위기도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부가 서로 신뢰하고 의지하고 믿고 사랑하고 그러면 그 좋은 관계는 힘내서 이겨내야지 이렇게 가는 것입니다. 관계가 무너지고 깨졌을 때 엄청난 안 좋은 에너지들이 나옵니다. 분노가 나오고, 화가 나오고. 그래서 자녀교육은 정답이 없습니다. 서울에서는 이렇게 키워야 되는 거고 시골에서는 이렇게 키워야 되는 것입니다. 환경이 그렇게 키웁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건강하게 축복되게 자라는 것은 전부 관계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항상 아침에 일어나면 아들들에게 한빈아 사랑해라고 이야기를 하고 같이 잘 때는 자기 전에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아빠 진짜 힘들었는데 한빈이가 손 한 번 잡아주면 아빠 위로가 될 것 같아. 저는 반대로 위로를 받습니다. 한빈이가 손을 꼭 잡아줍니다. 그런 짧은 관계들이 에너지를 주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관계는, 좋은 관계는 엄청난 행복, 힘 있는 삶을 가져다준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는요? 여러분 신앙의 본질은 주일날 교회가고, 성경 읽고 이게 아닙니다. 성경 읽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원래 우리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관계가 죄 때문에 깨져버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독생자 아들을 보내셔서 그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려고 하셨습니다. 죄인인 우리를 다시 양자 삼으셨고 우리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자리로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보고 형제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관계에 있습니다. 이 관계를 이해해야 남들이 볼 때는 열심히 잘하고 남들이 안 보고 혼자 있을 때는 열심히 하지 않고 이런 것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신앙이 왜 종교화가 되냐면 신앙의 본질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관계는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하다못해 교회 전도사님들과 관계만 해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거기서 나오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서로 힘들 때 도와주고 또 마음 아파할 때 위로해 줄 줄 알고 그러나 그 관계가 진실하지 않고 솔직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뒤에서 이상한 소리하고 욕합니다. 에너지는 그런 리더십, 그런 팀워크에서 다 나옵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시느냐? 어린아이와 같은. 어린아이와 같이 깨끗하고 순수하게 나와야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여러분도 그러시죠? 뒤에서 무슨 동기가 있거나 계산이 있으면 관계하기 힘듭니다. 딴 생각이 있거나 앞에서는 입바른 소리를 하는데 뒤에서는 우상을 섬기거나. 지금 남유다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거짓 없는 관계가 되기 위해서 뭐가 되라고요? 어린아이가 되라는 것입니다. 솔직하고 내 부족한 모습 그래도, 내 연약한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포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Ⅱ.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 귀를 기울일지어다, 들을지어다_이사야34:1

 

열국이여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민족들이여 귀를 기울일지어다 땅과 땅에 충만한 것, 세계와 세계에서 나는 모든 것이여 들을지어다_이사야34:1

 

남유다에게 메시지를 전하시는 것 같지만 오늘 성경은 열국, 열방, 전 세계에 메시지를 던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이사야는 그 당시의 남유다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이기도 하지만 오늘 본문 자체가 종말론적인 해석이 가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남유다가 망하고 회복하고 이런 메시지여야지, 자기들이 경험하지도 못하는 먼 미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종말론에 관해서 인류가 끝나고 지구가 끝나고 세계가 끝나는 그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 우리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도 그렇습니다. 조금 신기한 것은 있습니다. 사회가 어려우면 종말론적 메시지가 많이 나옵니다. 사회가 조금 잘 나가면 종말론적인 메시지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사회가 흉흉하고 어려울 때 사이비들이 이런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많이 들고 일어납니다. 그런데 건강한 교회, 건강한 크리스천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종말론적 메시지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알고 신앙생활 하는 것과 이것을 알지 못하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바이블스쿨 때 요한계시록의 종말론에 관한 공부들을 성도님들이 다 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우리 개인의 인생의 종말론도 멋지게 준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태어나면 죽기 위해서 살아갑니다. 태어남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 개인은 다 종말이라는 것이 옵니다. 종말이 끝나면 모든 인간은 심판대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죽느냐? 그 심판대를 어떻게 모면할 수 있느냐?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너희는 나아와 들을지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귀를 기울이라는 것이며 들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엄마, 아빠가 이야기하면 잘 듣나요? 저희 한빈이는 바로 옆에서 오한빈 불러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언제요? 뭐하고 있을 때? 티비보고 있을 때, 장난감 가지고 놀고 있을 때, 딴 짓 하고 있을 때. 아무리 불러도 듣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했을 때 저는 남자들의 착함 중에 90%는 되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하루에도 소리를 몇 번씩 지르는지 모릅니다. 오한빈!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가서 고개 돌려놓고 지금 밖에 나가야 된다고, 옷 입어야 된다고 이렇게 해서 겨우겨우 합니다. 남자아이들이 주로 그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빈이에게 좋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한빈아 옷 입어 밖에 나가자. 대답도 안합니다. 무언가를 보고 있을 때는. 장난감으로 놀고 있을 때는. 들은 척도 안합니다. 들리지 않아서 그럴까요? 다른 것과 관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남유다에게 하나님께서 들으라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안 들었나요? 이사야 선지자가 외치는 것을 안 들었나요? 들립니다. 듣는데 귀로는 들리는데 마음으로는 안 들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왜요? 우상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과 관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뭐라고 이야기를 해요? 진짜 중요한 단어입니다. 열국이여 너희는 나와서 들어라. 나아와 들어라.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원어에서도 이것은 굉장히 의미 있는 단어입니다. 왜냐하면 나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기 위해서 바른 자세로 들을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나와서 들어. 이 말입니다. 환경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듣는 법은 없습니다. 그냥 들리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 분들이 있습니다. 이 집이 계속 어려워지네, 계속 우환질고가 멈추지 않고 가정의 어려움들이 계속 돼. 그래서 같이 교회를 다니니까 분명히 저분이 목사님 설교도 듣고 말씀도 들을 텐데 왜 저런 선택들을 하지? 하는 그런 의문점이 있습니다. 제가 부교역자로 있을 때 그런 것을 너무 많이 겪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너무 안타까워서 제가 섬기는 파트가 아닌데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양해를 구하고 그 집에서 만나봤습니다. 목사님 말씀을 하나도 듣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주옥같은 설교를. 지금 상황이 이런데. 그러니까 이 상황에 빠져서 주일에 교회를 가도 멍하니 앉아있다 가는 것입니다. 그냥 들리는 법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예를 들어 내가 어둠에 살고 있다, 어떤 죄악 속에 살고 있다 그러면 빛으로 가려고 노력이라는 것을 해야 합니다. 빛으로 가려고 애를 써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가만히 있으면 계속 어둠 속에 있으면 빛이라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가난요? 우리 집이 찢어지게 가난해, 너무 어려워. 그러면 내가 이 가난에서 벗어나고 조금 윤택하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나요? 윤택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이라는 것을 해야 합니다. 아끼고 저축하고 계획도 세우고 라이프스타일도 바꾸고. 그런데 다들 그냥 나 부자 되고 싶은데, 나 부자 될 거야. 마음은 먹고 생각은 하는데 삶은 그대로 가난한 자의 삶을 계속 삽니다. 그러면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냥 되는 법은 세상에 없습니다. 매일 아프다고 합니다. 병원가면 의사 선생님이 건강해지는 방법을 이야기를 해주지만 절대 하지 않습니다. 안하면 계속 아프게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되는 법은 없습니다. 여러분 인간관계도 좋은 친구를 만나기만 해도, 좋은 친구들과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기만 해도 삶은 조금씩 영향을 받아서 좋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은 살고 싶은데 좋은 사람을 만나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교회를 오면 신앙이 좋은 장로님, 권사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있습니다. 내가 신앙생활 잘 해야지 생각하면 그런 분들을 만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저는 그런 노력들을 진짜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저 사람 되게 축복 받고 사네, 저 분 되게 능력 있네? 되게 궁금했습니다. 워렌 버핏이라고 세계적인 투자자가 있습니다. 지금도 살아계시는 세계적인 투자자입니다. 정말 옛날이야기인데 저는 깜짝 놀라고 제 귀를 의심하고 눈을 의심했습니다. 그분과 점심 식사 한 끼 하는 것을 경매에 붙였는데 54억? 그 정도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승주 목사와 밥 한 끼 먹기 위해서 50만원 내놓으라고 한다면 미쳤냐고 내가 왜 50만원이나 내고 밥을 먹냐고 생각하실 텐데. 워렌 버핏하고 밥을 먹는데 54억을 내고 먹었습니다. 그것도 경매로 치열하게.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그 사람과 만나서 밥 먹는다고 이득 되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아마 비슷한 일을 하시는 분들이 원포인트 레슨을 받기 위해서 아마 54억 이상의 지혜를 얻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좋은 사람 만나서 내 삶도 저렇게 살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다면 그런 관계를 맺기 위해서 조금만 노력해도 삶은 바뀝니다. 어둠에 계속 있으려고 그냥 이렇게 살아야 되나, 이렇게 계속 살면 되나 이렇게 되면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좋은 관계를 만나야 거기서 에너지가 나오고 좋은 관계 속에서 내 마음에 꿈이라는 것도 생기고 비전이라는 것도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책 한 권을 읽어도 가슴 뛰는 책을 한 권 만나면 사람이 달라집니다.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와라, 나와라. 너 그 자리에 앉아서 듣는 척하지 말고 예배드리는 척 하지 말고 나와. 나와서 집중해서 제대로 들어.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나와서 들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도대체 뭘 들으라고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 2절부터 15절까지의 내용입니다. 2절부터 15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멸망시키겠다는 내용입니다. 세상을 없애버리겠다는 내용입니다. 

 

- 시온의 송사를 신원하시는 해라_이사야34:2-15

 

(2) 대저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진노하시며 그들의 만군을 향하여 분내사 그들을 진멸하시며 살륙 당하게 하셨은즉 (3) 그 살륙 당한 자는 내던진 바 되며 그 사체의 악취가 솟아오르고 그 피에 산들이 녹을 것이며 (4)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 (5) 여호와의 칼이 하늘에서 족하게 마셨은즉 보라 이것이 에돔 위에 내리며 진멸하시기로 한 백성 위에 내려 그를 심판할 것이라 (6) 여호와의 칼이 피 곧 어린 양과 염소의 피에 만족하고 기름 곧 숫양의 콩팥 기름으로 윤택하니 이는 여호와를 위한 희생이 보스라에 있고 큰 살륙이 에돔 땅에 있음이라 (7) 들소와 송아지와 수소가 함께 도살장에 내려가니 그들의 땅이 피에 취하며 흙이 기름으로 윤택하리라 (8) 이것은 여호와께서 보복하시는 날이요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시는 해라 (9) 에돔의 시내들은 변하여 역청이 되고 그 티끌은 유황이 되고 그 땅은 불 붙는 역청이 되며 (10) 낮에나 밤에나 꺼지지 아니하고 그 연기가 끊임없이 떠오를 것이며 세세에 황무하여 그리로 지날 자가 영영히 없겠고 (11) 당아새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에 살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실 것인즉 (12) 그들이 국가를 이으려 하여 귀인들을 부르되 아무도 없겠고 그 모든 방백도 없게 될 것이요 (13) 그 궁궐에는 가시나무가 나며 그 견고한 성에는 엉겅퀴와 새품이 자라서 승냥이의 굴과 타조의 처소가 될 것이니 (14) 들짐승이 이리와 만나며 숫염소가 그 동류를 부르며 올빼미가 거기에 살면서 쉬는 처소로 삼으며 (15) 부엉이가 거기에 깃들이고 알을 낳아 까서 그 그늘에 모으며 솔개들도 각각 제 짝과 함께 거기에 모이리라_이사야 34:2~15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하늘들이 두루마리 같이 말리되 그 만상의 쇠잔함이 포도나무 잎이 마름 같고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으리라_이사야34:4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환경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종말을 이야기합니다. 이 땅이 끝나는 완전한 종말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종말을 이야기하면서 한 민족을 하나님이 예로 드는데 그게 에돔이라는 민족입니다. 이 에돔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돔의 죄를 기억하고 심판하는데 에돔이라는 민족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온 인류의 죄악 된 세력들을 심판하시는데 그 죄악 된 인류를 에돔이라는 단어를 쓰신 것입니다. 그런데 에돔이 실제로 민수기 20장에 보면 자기 형제, 유다의 길을 가로막았습니다. 그리고 유다가 곤경에 처할 때 그를 공격했고 약탈했습니다. 심지어 그들을 바벨론의 손에 팔아넘겼습니다. 그러니까 바벨론도 나쁘고 앗수르도 나쁘고 더 나쁜 애굽도 있는데 이 에돔이 왜 멸망의 상징이고 왜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이냐면 우리말로 말하면 얍삽한 것입니다. 이 에돔의 악행은 굉장히 얍삽합니다. 마치 뭐하고 똑같냐면 창세기 3장의 마귀가 뱀을 통해서 아담과 하와에게 너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어.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버리는 그 사단, 마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돔이 그런 비열한 뒤에서 권모술수를 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기 위해서 계산하고 남을 속이고 이런 민족이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이런 것을 상징하는 단어로 에돔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땅의 모든 폭력을 일삼고 학대하고 남을 괴롭히고 이게 아니라 단지 남을 괴롭히는 나쁜 세력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갈라놓는 모든 악한 무리들, 사단에게 쓰임 받는 무리들을 성경은 에돔이라고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 에돔처럼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의한 그런 권세들이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서 주로 잘 먹고 잘 삽니다.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의 행위를 낱낱이 기억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 구원 받은 자녀들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시지만 악행 하는 자들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보신다는 사실을 여러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우리가 조급할 이유가 없습니다. 물론 가끔 우리가 거룩한 분노도 내야 되고 싸우기도 해야 되지만 우리가 그들 때문에 조급하거나 속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묵묵히 하나님 백성의 길, 거룩한 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에돔을 어떻게 멸망시키게 했냐면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시키겠다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완전히 유황불로 다 태워버리고 에돔이 다시 나라를 건설하려고 유력한 사람들을 데리고 오려하는데 오는 사람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는 삶의 터전은 부정한 짐승들의 거처가 되는 것입니다. 승냥이라든지 오늘 나온 짐승들이 다 성경에서 부정한 짐승들입니다. 부정한 짐승들이 거기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에 진짜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오늘 성경의 핵심 키라고 볼 수 있습니다. 11절 하반 절에 보면

 

당아새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에 살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 위에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드리우실 것인즉_이사야34:11

 

드리우다는 것은 들이 미신다는 것입니다.  뭐에요? 혼란의 줄, 공허의 추. 혼란과 공허가 어디서 나오죠? 창세기에 나타나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의 상태입니다. 혼동과 공허. 혼돈과 공허의 상태로 다시 돌려버리신다고 하십니다. 혼돈과 공허의 상태로 돌려버리신다고 합니다. 창조 전 상태로.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 혼돈의 줄과 공허의 추. 우리 인생이 죄와 가까워지고 불의하고 악행을 하면 혼돈이 찾아오고 공허가 찾아옵니다. 여러분 아무리 겉으로는 괜찮다라고 이야기를 해도 죄를 짓는 사람들은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것이 안 느껴지면 양심에 화인 맞은 것입니다. 그의 인생은 혼돈이 찾아옵니다. 여러분 이 혼돈의 줄과 공허의 추의 반대되는 게 성경에 진짜 많이 나옵니다. 정의의 줄, 공평의 추. 하나님이 많이 쓰시는 단어입니다. 이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이 복음, 십자가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질서를 회복하십니다. 그래서 정의의 줄과 공평의 추가 우리 삶에 제대로 작동하는지 늘 확인하고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서 혼돈의 줄과 공허의 추가 우리 인생에 드리웁니다. 다시 말해서 쉬운 말로 이야기해서 어둠과 죄가 우리 삶을 드리우면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에돔과 같은, 소돔과 고모라 같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 개인의 종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 많은 사람들이 천국을 준비하지 않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을 준비하지 않고 삽니다. 가장 신앙생활을 잘하려면 죽음을 멋있게 죽고 아름답게 죽고 우리 자손들에게 진짜 아름다운 신앙인으로 멋지게 천국으로 부름 받아 가는 그 죽음을 준비하는 삶은 결코 허투루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나이가 젊든, 나이가 많든. 왜냐하면 이 땅이 끝이 아니니까. 천국이 끝이니까. 하나님 품에,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는 것이 인생의 끝이니까. 이 땅에 살아가는 것이 그냥 과정인 것입니다. 하늘의 만상이 사라지고 산들이 다 녹아버린다고 합니다. 다 종말론적인 내용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죽고 났는데 하늘이 있습니까? 죽고 났는데 바다, 산들이 있습니까?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심판을 모면하기 위해서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뭘 해야 되냐면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관계를 맺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서.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셨죠. 우리 죄 때문에 하나님이 떠나신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창조주 하나님이시지만 우리는 죄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영원히 하나님과 같이 할 수 없는 존재.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의 형상을 회복시켰습니다. 예수님을 마음속에 모시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다시 자녀로 회복시키신 거예요. 예수님이 그것에 대해서 탕자의 비유를 드셨습니다. 탕자의 비유의 주인공은 탕자가 아니라 탕자의 아버지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 저 재산 상속할 거 미리 주세요. 그거 가지고 사업도 하고 흥청망청 먹고 살다가 다 돈이 떨어지니깐 남의 집 돼지 농장에서 돼지 치우다가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 아버지 집에 가서 일이라도 하면 이렇게는 안 살 거야 하고 아버지에게 찾아갔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길 어귀에 매일 나와서 그 아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변함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십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아들이 왔으면 뭐라고 하나요? 야 너 그동안 몇 년 동안 살았던 것 회개하고 일해. 한 달 정도 일해. 이렇게 시켰나요? 너 우리 집에 종으로 살아 이렇게 이야기하나요? 아닙니다. 오자마자 바로 아들입니다. 아들 당연히 옷 입히고 당연히 밥 먹입니다. 혼내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오자마자 바로 아들입니다. 아들은 그런 관계입니다. 부모자식은 그런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떤 관계냐? 우리가 죄악 속에 있는데 하나님이 십자가로 건져주셨어요. 그래서 목적은 뭐냐면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진짜 많이 합니다. 다윗도 많이 합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이 항상 하는 이야기가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옵니다. 그 관계가 어때요? 죄와 가까워지면 그 관계는 멀어집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가까워지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죄와 멀어집니다. 우리가 은혜라는 것을 받고 하나님하고 관계가 친밀해지면 그토록 해결하려고 했던 은밀한 죄들이 재가 되어서 날아가는 것처럼 금세 사라진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죄는 우리 힘으로 못 이깁니다. 그런데 빛이신 하나님과 가까이 하면 어둠은 사라집니다. 두 개가 공존할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고 하나님과 죄가 같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다음 주에 부모학교를 할 건데 1년에 한 번씩 부모학교를 합니다. 그때 제가 조절기능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제가 명지대에서 상담 공부 할 때 배웠던 단어입니다. 조절기능. 하나님이 짐승과 인간에게 다른 점, 다른 기능을 주신 것이 조절기능이라고 합니다.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조절기능을 발전시킵니다. 그런데 그게 발전이 안 되면 짐승처럼 사는 것입니다. 감정 조절 못하면 짐승처럼 사는 것이고, 욕구 조절 못하면 짐승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조절이 안 되니깐 사람 죽이고 이상한 짓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 조절기능을 아주 좋은 조절 기능을 가지면 가질수록 우리 삶은 굉장히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 조절기능이 신학적인 용어로 자유의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고 더 좋은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합니다. 나는 마음을 건강한 것에 내 인생을 쏟아야지. 그러면 그 사람은 마음이 건강해질 것입니다. 겉모양이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굉장히 삶이 그런 쪽으로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조절기능이 주는 힘입니다. 거기서 힘이 다 나옵니다. 신앙은 마찬가지입니다. 이 조절기능을 사용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워지려고 하는 것,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 이것은 엄청 중요할 것입니다. 정말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되는가?

 

-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_이사야34:16-17

 

(16) 너희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 이것들 가운데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고 제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령하셨고 그의 영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17) 여호와께서 그것들을 위하여 제비를 뽑으시며 그의 손으로 줄을 띠어 그 땅을 그것들에게 나누어 주셨으니 그들이 영원히 차지하며 대대로 거기에 살리라_이사야34:16~17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 읽어보라고 합니다. 이 책에 다 들어있다고 합니다. 완벽하게 다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진짜 중요한 것입니다. 남유다에게도 하신 이야기입니다. 모세오경에 대해서 구원에 대해서 다 설명해놨어. 애굽에 종노릇하고 있는 너희를 끄집어서 홍해도 가르고, 홍해를 가를 때 모세가 이야기했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서 봐라, 우리가 뒤에 군대가 오는데 앞에는 홍해가 있는데 우리가 다 죽게 생겼다고 불평할 때 이야기했습니다. 너희 가만히 있어라,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나. 홍해가 갈라지고 이스라엘 백성 이백만 무리가 건너가고 뒤에 병거들이 물이 갈라져있으니 건너왔다가 다 수장되었습니다. 한 명도 남지 않고 다 죽었습니다. 능력의 하나님. 하나님과 관계가 좋았을 때 우리 인생이 답답한 것 같고 길이 없는 것 같은데 길을 다 열립니다. 그러나 저 적들은 우리가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그 두려움의 대상들은 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질수록 두려움이라는 것이 사라집니다. 무서운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찾아서 읽어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남유다가 신앙생활을 아는 것 같아,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 같은데 제대로 하고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책을 읽어보라는 것입니다.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 이런 것 겉모양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인데 이 관계를 위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책, 여호와의 책을 찾아서 읽어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볼까요? 솔직히 말하면 저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이 영적인 존재로 바람과 같은 존재로 계시나? 내 마음에 계시나? 저도 신학적으로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찾아보아도 그게 이해되는 개념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 뭐라고 하고 다니냐면, 하나님 나와 함께 하시니까. 24시간 나와 함께 하시지, 하나님 오늘도 나와 동행하셔. 언제요? 어떻게요? 하나님이 진짜 함께하시나? 어디 계시지? 그러니깐 성경은 정확하게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을 무엇으로 하라고 기록되어 있냐면 성경으로 하라고 합니다. 제가 유대인들을 이야기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신앙을 배우자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고 있는 방식을 배우자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이 하나님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시는 특별은총으로 말씀이라는 것 우리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볼 수 있어요. 성경을 읽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을 느끼래요. 어떻게 느끼나요? 성경을 읽으래요. 여호와의 책에서 찾아서 읽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신 것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 우리에게 어떤 축복을 주실지, 어떤 기업을 주실지, 하나님이 어떻게 악한 영들을 물리치실지 성경에 다 기록해놓으셨습니다. 곧 성경이 하나님입니다. 이 성경책은 거룩하다고 우상 섬기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 책은 책입니다. 낡으면 버려야 합니다. 이 성경책 속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Ⅲ. 신앙생활은 사실(fact, truth)이어야 합니다_마가복음12:1-11

 

그래서 신앙생활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다 Fact, Truth입니다. 사실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우리는 사실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나와 함께하셔, 아멘하고 그냥 삽니다. 언제 함께하셔? 하나님이 진짜 함께하시나요? 우리 생각 아닌가요? 우리 망상 아닌가요? 이런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우리 집이 진짜 가난한데 티비에 부자들 나오는 드라마 보고 나도 티비를 보는 순간에 부자 주인공과 같은 대리만족? 현실은 계속 가난합니다. 우리 신앙이 마치 그런 망상 속에서 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요?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사실을 해야 됩니다. 팩트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아끼고 열심히 일하고 내 삶을 컨설팅을 받고.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사실이라는 것을 해야 합니다. 남들에게 가난한지 않은 척, 남들에게 보이기는 가난하지 않는 척 보이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몸이 시름시름 아픕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병원에 가서 선생님이 말한대로 사실대로 해야 합니다. 남들에게 안 아픈 척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여호와의 책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아요. 신앙생활이 너무 팩트가 아니고 진실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저는 건강한 지식으로 건강한 교육을 받으면 건강한 삶을 산다고 생각합니다. 배워야 합니다. 특히 기독교인은 배워야 합니다. 저는 진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어떻게 살면 하나님께 축복받는. 물론 제가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이 있겠지만 그래도 궁금했습니다. 우리 집 같은데서 영원히 멸망하나보다. 우리 아빠처럼 살아야 되나보다. 이런 어렸을 때 낙심 속에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빛이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 갔는데 더 낙심되었습니다. 교회 갔더니 친구들이 더 부럽기만 합니다. 우리 집을 보면 그것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도 하시겠다고, 나에게도 능력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방법을 모릅니다. 그래서 신앙서적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위인전을 읽히는 것은 그런 의도가 있습니다. 신앙에 믿음의 사람들에 관한 책들을 다 읽었습니다. 아 이렇게 사는구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니깐 하나님이 복되다고 하는구나. 여러분 신앙이 삐뚤어지고 혹은 신앙이 정체되어 있다는 것은 성경을 가까이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좋은 지식으로 좋은 교육을 받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고 계세요. 내 말을 들어라. 심판에 관한 내용을 책에 다 기록해놨으니 이 징조들을 말씀을 통해서 확인해라.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에서 책 한 권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번에 책을 두 권 소개합니다. 그 중에 한 권이 어린이주일이라서 이 책을 여러분에게 추천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책 추천입니다. 이 땅의 비밀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기독교 책은 아닙니다. 일반 사람인 서정아라는 사람이 쓰고 서울대 지구물리학 교수님이 설명을 달아 놓은 책입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아 하나님이 지구를 창조하신 게 분명하구나. 이런 느낌이 딱 드는 아주 그림이 많고 글이 작은 5-6살이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전국의 초, 중, 고, 현직교사들이 다 추천했습니다. 지금 학교에 너무 이상한 이념들, 진화론이 난리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교사들이 사서 아이들을 읽힌다고 합니다. 아주 좋은 책입니다. 저도 사서 읽어 보았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한빈이 어린이날 선물로 이것을 샀습니다. 이것을 주면 한빈이는 어린아이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했는데 분명히 노할 것입니다. 그래서 장난감과 함께 1+1으로 주어야 노엽게 안 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날에 한빈이가 책 선물을 받으면 얼마나 기분 나쁘겠어요. 사실 책 선물이 메인인데 큰 장난감과 함께 선물을 하시면 좋을 것 같아서. 사실 제가 우리 아이들에게 선물로 주고 싶은데 책값도 비싸고 우리 아이들도 특송 하는 것 보셨죠. 제가 사줄 수 있는 능력도 되지 않습니다. 개척 초기에나 애들 선물을 사줬죠. 그래서 부모님들이 이 책을 다 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주들 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좋은 책을 읽고 건강하게 교육을 받으면 반드시 건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관계를 그렇게 맺어야 합니다. 좋은 것들과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렇죠? 예수님이 마가복음 12장에 이런 비유를 하셨습니다.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 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던졌느니라 (9)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10)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11)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_마가복음12:1~11

 

(1) 예수께서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산울타리로 두르고 즙 짜는 틀을 만들고 망대를 지어서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_마가복음12:1

 

1절. 뭐라고 기록되어 있나요? 내가 다 만들었어. 이 포도원 주인이 망대도 만들고 틀도 만들고 모든 것을 다 세팅해놓고 농부에게 세로 주었다고 합니다. 너 농사지어서 다 먹어. 그리고 나에게 10분의 1만 줘. 이런 식으로 세를 주고 타국에 갔다고 합니다. 

 

(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 그들이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그들이 그를 죽이고 또 그 외 많은 종들도 더러는 때리고 더러는 죽인지라_마가복음12:2-5

 

2-5절. 헐입니다. 사실 우리가 그랬습니다. 이 죽은 종들이 선지자들입니다. 예수님 앞서 보낸 선지자들. 

 

(6) 이제 한 사람이 남았으니 곧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이르되 내 아들은 존대하리라 하였더니 (7) 그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자 그러면 그 유산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_마가복음12:6-7

 

6-7절. 멍청합니다. 농부들이 멍청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_마가복음12:9

 

9절에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비유를 드시는 겁니다.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놀랍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니라_마가복음12:11

 

예수님의 사건을 읽어보지 못했냐?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 34장의 내용을 마가복음 12장에 예수님의 비유로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남유다에게 하나님이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뭐하시려고요? 관계를 맺으려고 회복하려고.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면 앗수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바벨론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남유다는 그 관계를 거부한 상황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주신 것은 교회를 다니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하고 관계를 위해서 예수님을 우리에게 복음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복음을 늘 붙잡고 살아야 된다 이럴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관계가 회복이 되면 스며들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면 끝나는 것입니다. 좋은 관계.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 크신 하나님이 되고, 나에게 은혜 주시는 분. 하나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됩니다. 자녀니깐 유업으로 받습니다. 우리는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청지기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들 하나님이 우리에게 다 주신다고 합니다. 내 것, 내 땅이니깐. 소출 얼마만 주면 되는데. 이 포도원의 농부들은 원래 주인과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편지도 쓰고 전화도 드리고. 올해 포도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주인님. 올해 포도농사가 안 되었네요. 주인이 보낸 종들을 다 죽였습니다. 아들까지 죽였습니다. 착각한 것입니다. 포도원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 이 땅에 우리 것인가요? 지구가 우리 것인가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우리 것인가요? 잠언에는 어리석다고 이야기 합니다. 전도서에도 이야기합니다. 죽으면 우리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 이 땅에 살기로 원하시는 것입니다. 진짜 우리 것은 다 천국에 있습니다. 진짜 받아야 될 유업, 기업 다 천국에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어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삶이 바뀌어 지는 겁니다. 시야도 달라지고 보는 것도 달라지고 비전도 달라집니다. 사람들을 의식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면 사람들에게 보여 졌을 때도 잘하겠지만 혼자 있을 때 훨씬 더 달라집니다. 그래서 신앙은 내가 혼자 있을 때 그 모습이 진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내가 홀로 있을 때. 신앙생활은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팩트를 사실이라는 단어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건강도 그렇고 우리 모든 삶이 그렇습니다. 나 진짜 공부 잘 하고 싶어. 나 진짜 좋은 대학 진짜 가고 싶은데 맨날 놀고 술 먹고 돌아다니면 공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게 사실입니다. 아무리 공부 잘하는 척 선생님께 예쁜 척하고 바르게 적어도 성적이 나오지 않는 것은 보이지 않을 때 공부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신앙도 똑같습니다. 무섭도록 똑같습니다. 인스타를 보면 그렇습니다. 저도 인스타 마니아입니다. 거의 하루에 한번 씩 글을 올립니다. 저의 묵상 글을 인스타에 올립니다. 인스타를 보면 이 사람이 진짜 괜찮은 사람인지 아닌지 헷갈립니다. 그것이 인스타에는 올리고 실제 삶은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 것이 너무 많습니다. 신앙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포장이라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 무엇에 있어서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데 있어서. 이해가 되시죠? 하나님의 성경을 찾아서 읽어보는 일에 있어서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에 있어서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삶을 쉽게 포기하고 비교하고 우리 인생은 어쩌면 절망, 좌절, 어려움 이런 환경들이 우리를 억누릅니다. 우리가 인생을 평생 살면서 그런 경험들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힘듭니다. 어렵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으면 엄청난 에너지, 힘이 나옵니다. 엄청난 충만한 행복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하물며 목회도 힘듭니다. 그런데 제가 성도님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으면 목사로서 위기나 위험들 다 밀어내고 갈 수 있습니다. 우리 장로님들이 오 목사 힘내. 한마디만 해주셔도 저는 힘 있게 용기 있게 이 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관계라는 것은 그렇습니다. 우리 집이 기울어서 어렵습니다. 집이 너무 힘듭니다. 그런데 부부사이가 너무 사이가 좋아. 그러면 힘내서 가는 것입니다. 내 아들을 위해서, 내 아내를 위해서라도 바른 길 가는 것입니다. 신앙은요? 하나님과의 관계는 엄청난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짜 행복은 다 관계에서 나옵니다. 관계가 다 우리를 위로해주고 좋은 사람들 만나시고 좋은 책도 만나고 좋은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하면서 사는 것은 축복된 일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관계는 엄청난 힘이 있고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무엇으로 하라고요? 말씀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나요? 성경을 찾아 읽어보래요. 들어보지 못했냐? 나와서 들어라.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하겠죠. 정말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고 친밀해지기 위해서 우리가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가기 위해서 우리는 이 관계를 소홀히 여기면 안 됩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다윗이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내 입에서 놓치지 않겠다 하신 것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로마서 8장에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누가 우리를 끊을 수 있겠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냐? 그것은 바울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너무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야가 확 열려서 하늘 상급이 보이는 것입니다. 하늘 상급이 보이니까 이 땅에 감옥에 있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내가 감옥에 있지만 너희들이 나를 감옥에 가두었지만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라고 합니다. 너무 충만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친밀한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친밀해지려면 하나님이 어떤 분 인줄 알아야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애써야 합니다. 책을 찾아서 읽어보라고 합니다. 성경 읽는 것이 형식적으로 프로그램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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