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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8 금요예배

<금요예배>


일시:  2014년 7월 18일

제목 :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말씀 : 시편 26 : 1-12

설교 : 오승주 목사



2014-07-18 금요예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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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다시보기  http://vimeo.com/101096517


가스펠교회 금요예배 20140719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자립

 

오늘 본문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흔들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영적인 자립을 못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은혜를 못 받았기 때문은 아닌 듯합니다. 어떤 교회는 송구영신예배를 밤 10시부터 새벽 3시까지 진행하기도 합니다. 말씀 없이 찬송으로만 5시간 동안을 계속했습니다. 성도님들이 은혜를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훈련이 부족하기 때문도 아닌 듯합니다. 다윗은 어떻게 영적으로 자립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반드시 확인하고 우리 삶에서 그런 도전을 멈추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자립을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자립을 몇 가지 나누고자 합니다. 사실 자립자체가 삶의 형태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본질의 문제이기에 크게 3가지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1. 경제적 자립

영적인 자립을 위해 첫 번째로 경제적 자립이 필요합니다. 경제적 자립이라 하면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경제적 자립이 없다면 평생 누군가에게 얹혀 기생자로 살아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경제적 자립을 하기 위해 공부도 하고, 기술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성경이 말하는 경제적 자립은 단순히 경제적 욕구를 스스로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일깨워주는 경제적 자립이란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맞추어 넣는 능력을 기르고 갖추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돈에 대한 자기 욕구를 스스로 채울 수 있는 능력을 절대시하면 반드시 돈의 노예가 됩니다. 돈이 내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돈을 벌기 시작하면 그것의 노예가 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욕구의 충족은 항상 더 큰 욕구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돈을 위한 신일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경제적 상황에 우리 자신을 맞출 줄 아는 경제적 자립인이 되길 원하십니다. 그 경우에만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을 삶의 절대 목적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 자립이란 돈을 모아 자립한다는 것보다 경제의 개념이 달라서 어떤 상황에서든지 스스로 그 상황을 이겨낼 힘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글을 보니 한 청년의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서울의 명문대학을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학에 다닐 때 큰 인식의 변화가 생겼습니다. 가난에 절어온 삶이 자신이나 부모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의 문제라 인식하면서 운동권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감옥에 가게 되었고 겨우겨우 졸업을 하였는데 취직이 되지 않았습니다. 운동권출신에 감옥까지 다녀왔으니 취직이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친구의 도움으로 불안정한 세일즈맨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너무 괜찮은 여자 친구가 생겼는데 이 여자 친구가 그 친구의 모든 것이었습니다. 결혼을 하려고 하니 모아둔 돈도 없고, 막막하였습니다. 그러면 수준에 맞게 결혼을 하면 될 것을 여자 친구를 위해 격식을 갖추려 하니 결국 돈을 빌리게 되었습니다. 그 돈에 이자 불어 결국 빚더미에 앉게 되었습니다. 결혼생활은 불행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 사람이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구제해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 곳에서 만난 목사님은 구제해 줄 수도 있지만 당신은 지금 구제를 해주면 평생 그 잘못된 생각과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전부 빼고 가진 것 전부 팔아서 빚을 갚고 교회에 방을 줄 테니 그곳에서 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모든 것을 팔고 서울 근교 농가의 토방을 구해 새로운 보금자리를 삼았습니다. 그 청년은 그 토방에서 서울을 오가며 자동차 정체구간에서 뻥튀기나 오징어를 파는 등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습니다. 그러기를 몇 년 하고 부채를 깨끗이 정리하셨습니다. 단순히 돈을 갚아서 좋은 것이 아니고 그 청년은 자립정신이 심어져서 너무 행복하였을 것입니다. 단순히 돈을 잘 버는 자립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돈이 아닌 하나님이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 행위의 자립

 

가장 중요한 자립 중 하나가 행위의 자립입니다. 얼마 전에 한강공원에 운동을 하러갔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른 때 같으면 저도 그냥 스쳐지나갔을 텐데 그날따라 그 공원 구석구석에 얼마나 많은 쓰레기들이 쌓여있는지 보기가 불편할 정도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실상이고, 젊은이들의 실상입니다. 제가 교회에서 여러 모임들을 하게 됩니다. 서밋스텝 모임도 하고 또 다른 모임도 했습니다. 모임별로 다른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행위의 자립이 되었다면 자신들의 모임을 하고 뒷정리를 하고 원위치를 하고 가는 것이 당연할 것입니다. 렘넌트 스텝들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모임을 하고 나서는 제가 한 시간이상을 뒷정리를 하였습니다.

행위의 자립이 없다는 것은 일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랫사람을 도구이상으로 보지 않게 되고 상사 역시 돈을 벌기위한 도구이상으로 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기성세대를 비판하며 미래는 자신들에게 있다고 큰 소리 치지만 막상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마저도 부모가 대신해주는 과잉보호 속에서 성장한 청년들이 행위의 자립이 하나도 이루어져있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행위의 자립이 없이는 주님과 함께, 말씀과 함께, 성령과 함께 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은 분명 행함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행위의 자립이 있어야 올바른 공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의식의 자립

 

마지막으로 중요한 자립중 하나가 의식의 자립입니다. 이것은 매우 생각을 많이 해야 할 것입니다. 저도 본래는 화를 많이 내고 욱하는 성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위해 사는 그릇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바꿨습니다. 그릇된 세상을 본받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실천하는 것은 의식의 자립이 없으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사람들의 말, 세상의 유혹에 금세 휩쓸려 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맞는지 틀린지 계산하고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안타깝지만 그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윗도 허망한 사람들과 같이 앉지도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사람을 멀리하라는 것이 아닌 깨어있는 의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항상 말씀을 가까이 하여 말씀으로 의식을 깨우며 살았던 것입니다. 진짜 의식 있는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말씀 속에서 깨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릇된 세상의 풍조에 자신의 의식이 종속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의식의 자립입니다. 가스펠 가족들은 잘못된 세상의 풍조에 흔들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삼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기준은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입니다. 이 의식의 자립이 없어 자꾸만 흔들리게 됩니다.

 

. 왜 다윗이었을까?

 

하나님은 왜 다윗이라는 인물을 가장 많이 조명하였을까요? 왜 하나님은 다윗을 사용하셨을까요? 다윗은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홀로선 상태였습니다. 다시 말해 자립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세우기 위해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이새의 집에 방문한 사무엘은 그의 아들들을 차례대로 만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모두 아니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집에는 다른 아들이 더 이상 없었습니다. 물어보니 한명이 더 남았는데 지금 들판에서 양을 지키는 중이라고 대답하였고, 그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장자나 차자가 아닌 막내, 그것도 8형제 중의 막내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막내는 집안일에 대해 책임감이 덜한 경향이 있는데 다윗은 달랐습니다. 일곱 명의 형들이 모두 집에서 편하게 있는 동안 자신은 홀로 들판에서 양을 지킨 것입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홀로 한 것입니다. 그런 그를 데리고 와서 보니 사무엘이 외적으로 볼 때 용모가 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기름을 부으라 하셨습니다.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 지라_사무엘상16:12’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용모와 키를 보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가 어렸지만 이미 하나님 앞에 올바른 신앙의 자립을 한 것입니다. 신앙의 자립을 하였다는 것은 경제적 자립, 행위의 자립, 의식의 자립까지 다 되어진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_사무엘상16:7’

그것을 어디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까? 그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장에 나가 있는 형들을 찾아갔을 때 골리앗이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자신이 그 골리앗을 물리치도록 간청했습니다. 이미 그는 의식의 자립도 분명하였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_사무엘상17:34-36’

 

다윗이 들판에서 홀로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 대충대충 시간만 때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홀로 맹수들과 싸워 이겼습니다. 그리고 이제 골리앗과 맞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거인 골리앗과 싸우기를 간청한 것은 자신을 위한 영웅심으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골리앗이 모욕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자립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골리앗 앞에 자신을 내던진 것입니다. 확고한 신앙의 자립인이 아니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그는 골리앗을 이기고도 사람들의 칭송에 별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립인이 되지 못했던 사울왕은 세상적인 계산의 이익으로 그를 사위로 맞이하였고 또 그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10년을 도망쳐 다니면서 불평과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다윗이 자립이 되지 않은 미성숙한 신앙인이었다면 골리앗을 물리치고 왕의 사위가 되었던 것에 얽매여 자살하거나 아니면 정신이상자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에 오히려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졌습니다. 자립이 되지 않으니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포기해버립니다.

 

. 영적인 자립 _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며

 

우리에게 예배가 중요한 것은 한 주간 동안 나아가야 할 방향이나 추구해야 할 큰 틀, 이를 테면 삶의 총론을 얻는 시간인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 매일의 삶속에서 필요한 각론은 총론의 바탕위에서 각자가 찾아야만 합니다. 이와 같은 영적인 자립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일평생 특정인에게 예속되는 영적인 노예로 살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목회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도 자기 고유의 목회철학을 지니지 못한 채 성장목회, 치유목회, 셀목회 등 수도 없는 목회유행을 쫓아다니기 바쁘고 성도들은 성도들대로 자기 인생의 모든 결정을 스스로 하지 못해 일일이 목회자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사실 목회자가 성도들의 삶의 자리를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회사를 다녀본 적도 장사를 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반대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에 입각하여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가야 하는 방향과 함께 총론을 제시하는 것은 목회자가 해야 하지만 성도들이 각자 자신의 일터 혹은 인생에 맞는 각론을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해 가는 지 성도들에게 묻고 해답을 구해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인 자립을 하는 신앙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각론을 찾고 스스로 서기 바랍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왜 영적으로 자립을 하지 못하는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만의 신앙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가 되지 않는 다는 것, 즉 신앙고백이 없다는 것은 교회를 다니기때문입니다. 그러니 늘 갈등 속에 살고, 늘 세상 유혹 앞에 흔들리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일터나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미성숙한 미자립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인 자립인이 되어야합니다. 다윗은 한결같이 예배를 사모하였습니다. 그가 사모한 예배는 단순히 힘을 얻고자 함이 아닌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삶의 증표였습니다. 그러니 그의 소원은 성전을 짓는 것이고, 그의 소원은 그곳에서 주님을 예배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풍부에 처할줄도 알고, 비천에 처할줄도 알며...’ 그런 인생의 기준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모든 삶속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어떻든지 간에 그의 발은 평탄한 곳에 서 있게 될 것이며, 무리가운데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증인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내 영혼이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_시편26:8-12’

 

주님 우리가 영적인 자립인이 되어 세상에서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흔들리지 아니하며, 오히려 세상에 영향을 주고, 생명을 주어 그들로 함께 주님을 예배하는 응답을 받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