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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메세지

2024년 송구영신예배 1강

2024 송구영신 1강
 
사도행전9:1-18 / 선교적 교회_홀로 앉고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방향]

사도행전 9장은 사울이 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동안 자신이 맞다고 생각한 신앙생활이 완전하게 틀렸음을 인정하고 주앞에 거꾸러지는 장면이다.
저는 이 본문 말씀을 두고두고 묵상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혹시 우리는 이 과정이 있나?
회개라는 그러니까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만남이 있나?
혹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데?  어떤 감정이나 혹은 분위기에 취해서 만났다고 하는데 진짜 만난 것이 맞나?

미국에 고든콘웰신학교 교수이신 리처드 린츠는 신학적 비전이 개개인에게 필요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이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가장 큰 위험은
모든 일을 우리가 다 하려는 우리의 열망(욕심)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무엇을 말씀하실 수 있고 말씀하셨는지에 대하여 
외부적인(전통이나 그 시대의 결과물들) 개념의 경계선을 그음으로써 매우 이러한 유혹에 굴복하게 된다. 
우리는 구속의 메시지를 문화의 이야기에 담으려고 하는데, 문화의 이야기들은 복음의 실제 의도를 왜곡하기도 한다. 또는 우리는 복음을 순전한 전통의 관점에서 보려는 시도들을 하는데 문제는 그 전통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소적 사역과는 현실적인 관계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누구와 대화하시는지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하나님은 진공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역사속에서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고 계신다. 즉, 우리와 말씀을 하신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역사적, 문화적, 이성적 필터들을 이해하는 것은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야만 문화의 필터들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복음이 중심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 
그런데 오해가 있는데, 우리가 매우 쉽게 복음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충성되게 설교하고 믿으면 우리의 삶이 자동적으로 복음에 의해 형성될 것이라고 간주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많은 교회들이 복음에 대해 엄청난 숙고를 하여 단체를 만들기도 하고 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사역이 복음에 의해 형성되거나, 복음 중심적이거나, 복음을 통해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소흘히 하게 되는 조직이나 다른 필터들이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직분을 맡고,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교회 안에 이런 저런 사역들도 하면서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을 언제부터인가 소홀하게 여긴다. 그때가 가장 위험할 때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이다.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

1. 좋은 충고가 아니라 기쁜 소식이다. 복음은 일차적으로 어떤 삶의 방식이 아니라, 우리가 행하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 행해진 무엇이며 우리가 반응해야 하는 어떤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고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려고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을 받으려고가 아니다. 
2. 복음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것을 선포하는 기쁜소식이다. 그러니까 선포해야 하는 마땅한 소식이다. 복음의 메시지가 윤리 규범도 아니고 감동 받고 성찰하는 지혜의 어록도 아니고 정리되고 도식화된 조직 신학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물론 복음의 토대위에서 윤리가 구축되고 지혜가 결집되고 신학이 조직화될 수는 있지만, 이 3가지 자체가 복음인 것은 아니다. 복음은 소식이되, 기쁜 소식이다. 내가 널 사랑하고, 내가 널 구원했어 라는 하나님의 음성이다. 
3.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것인가? 어떤 위험으로부터 구조를 받는 것인가? 신약성경에 보면 역사의 마지막에 다가올 노하심(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이 노하심은 비인격적인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깨졌고, 우리는 그분과의 우정에서 벗어났고, 그분의 사랑을 배신했다. 
4. 그래서 창세기 3:17-19에 보면 하나님의 진노가 인간의 죄 때문에 모든 피조세계에 임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심리적인 단절이나 냉소를 갖게 된다. 그리고 수치심과 두려움을 경험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과 단절되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도 단절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자연과도 단절되었다. 그것이 바로 슬픔, 수고, 노화 그리고 죽음이다. 땅 자체도 고통 질병 가난 차별 자연재해 전쟁 노화 죽음으로 가득차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진노에서 파생된 것들이다. 
5. 인간의 모든 증상은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이 진짜 원인이다. 로마서5:8, 고린도후서5:20 같은 구절이 이를 잘 말해준다. 
6. 그러므로 인류의 진정한 구원에 있어서 제일 중요하고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바로 잡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무엇을 이루셨는가? 에 대한 소식이다. 존 오웬의 책인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죽음의 종식’에서 하나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신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 거 같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모두가 죄인이다. 그리고 구원하신다는 것도 모든 것을 다 하신다는 것 계획하시고 성취하시고 구속하시고 부르시고 지키시고 의롭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7.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복음은 우리가 무엇을 행하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행해진 무엇이다. 그러나 복음은 완전히 새로운 삶의 길을 만들어낸다. 은혜와 은혜의 결과인 선생은 은혜와 구분되면서 동시에 연결되듯이 말이다. 마틴 루터는 이것에 대해 우리가 믿음으로만(by faith alone) 구원받지만, 우리가 단지 믿음만 남는 믿음으로(by a faith that remains alone)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즉, 루터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참된 믿음이 있다면 언제나 필연적으로 선행에 이른다고 말했따. 이처럼 믿음과 선행은 결코 혼동되어서는 안되고, 또 서로 분리되어서도 안된다. 단언컨대 복음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주님이 열매를 통해 알게 될 것이라 하신 것처럼 말이다. 
8. 복음은 종교적 재활 프로그램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완성된 대안사역이다. 우리는 복음을 어떤 것에 참여하는 것으로 그려서는 안된다. 오히려 복음은 무엇(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임스 패커목사님은 복음에 대해 ‘고통과 불의의 문제들에 대한 해법이 창조주와의 관계 해결에 달려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지 않는다면 복음 메시지를 왜곡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거짓 증인이 되는 것이다’ 라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해하지 않아야 할 것은 복음은 소식이다. 사랑의 삶을 창조하는 소식이지, 사랑의 삶 그 자체로 복음인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언제나 복음을 소식으로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부분이다. 
9. 복음의 능력을 빼앗는 두가지 적이 있다. 하나는 종교이고 하나는 비종교이다. 다시 말해 율법주의와 율법폐기주의이다. 혹은 도덕주의와 상대주의(실용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언제나 복음의 능력을 앗아가고 오염시킨다. 율법주의자들은 우리가 구원받으려면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반대는 우리가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복음이라는 창(칼)의 끝이 위치한 곳이다. 만일 우리가 양극단에 머물러 있다면 우리의 복음 전도는 사람의 정체성을 바꾸거나 마음을 변화시키는 사역을 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이기 때문이다. 그 소식으로 우리는 늘 새롭게 되고 늘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늘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이다. 
10. 그래서 복음의 능력은 두 가지 움직임으로 다가오는데 첫째는 ‘나는 내가 감히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한 죄인이고 허물 많은 존재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둘째는 ‘나는 내가 감히 바랐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용납되었습니다.’라는 것이다. 
11. 많은 사역자들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선택하는 것 같지만 이내 그들이 어떤 환경과 상황 속에서 열정이 상실되는 이유는 생애에 걸쳐 체화된 공동체의 경험이 아니라 단지 교회다니는 정도의 짧은 프로그램들만 제공받기 때문이다. 즉, 진정한 회개가 없기 때문이다. 회개는 마음을 변화시킨다. 어떤 사람이 신앙을 배웠는지, 세례를 받았는지, 교회를 다니는지 묻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만일 그가 회개하지 않았다면 그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12. 우리 마음이 항상 진리에 따라 작동하며, 생명을 주는 복음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자연스럽거나 가능하기라도 한다면, 복음을 계속 머리에 주입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항상 복음앞에, 하나님앞에 서야 한다.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변화된 것이 있다면 과거에는 전통과 관습에 따라 신앙생활이라고 믿고 했지만 이제는 교회 공동체속에서 복음의 말씀, 하나님의 음성,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사는 삶의 양식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가 이제는 하나님의 말씀앞에 홀로앉아 살수 있는 시작이 된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래서 예배이다. 그러니까 종교적인 관습으로 매주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앞에 홀로설수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 가스펠교회가 예배가 있는데, 그 예배에 참석하면 무조건 은혜받고 응답받는 것이 아니라, 그 예배에 참석하는 내가 은혜를 받아야 한다.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늘 새롭게 확인되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확인하는 시간들은 우리의 삶의 방향이 분명하고 정확한 목적을 두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예배가 온전한 기쁜 소식이 되기 위해 몇가지 준비할 것이 있다. 
첫째, 성경이다. 당연하지만 우리가 끊임없이 성경을 가까이함으로 예배때 ‘사울아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너는 나를 위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도 깨달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음성을 역사 속에서 들려주신 것이 바로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지 성경을 읽냐 안읽냐가 아니라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리도록 최소한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둘째, 훈련이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곧장 아나니아에게로 갔다. 거긴 교회다. 교회에서 사도들과 함께 지내며 몇년을 훈련받았다. 우리는 그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교회는 그래서 말씀을 가르치고 말씀으로 양육받는 공동체이다. 말씀의 공동체이다. 
마지막으로 묵상이다. 성경을 읽고 말씀을 배우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직장, 가정, 삶에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기 위한 하나님과의 관계 친밀한 관계이다. 우리교회가 생명의 삶으로 묵상을 돕고 있는데 다들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 작은 시간을 허투루 생각하지 않으시면 좋겠다. 말씀을 사랑하는 반복 속에서 목적은 순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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