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예배

2024-09-22 주일예배

9월 22일 주일설교
본문: 창세기37:1-11
제목: [요셉1] 꿈으로 시작되는 인생


1. 성경에는 위대한 인물이 없다. 

우리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더욱 그것을 느낍니다. 더 잘되고, 더 잘풀리는 것보다 더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지고 더 문제들이 많아집니다. 그래서 가끔은 위축이 될 때가 있고 꿈을 포기하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또한 해야 할일을 제대로 못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런데 고난을 어떻게 딱 한 가지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것 때문에, 저 것 때문에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난은 그래서 해석이 어렵고 쉽게 다룰 수없는 복잡하게 얽힌 다면체나 수학문제과도 같습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고난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고난에 대한 관점을 넓히는 작업은 가능합니다. 고난에 대한 시각이 좁으면 고난에 휘둘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 이야기는 참 많은 고난에 대한 관점을 넓힐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났기에 인간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셉이야기도 소설같은 느낌이지만, 이는 요셉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이 이야기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요셉 이야기를 통해 사물과 사건을 보는 눈, 관점을 넓히는 눈을 갖게 될 것이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위대한 인물이 한명도 없습니다. 연약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루어가시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시려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요셉을 알려면 요셉의 가정 안에 흐르는 사건, 교육방식, 분위기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의 가정은 역기능적 가정이었습니다. 네명의 안내와 12명의 아들들이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역기능적 가정은 그때에도 참 많은 문제를 만들어냈습니다. 아이들이 문제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셉은 노년에 얻은 아들이므로 이스라엘이 여러 아들들보다 그를 더 사랑하므로 그를 위하여 채색옷을 지었더니_창세기37:3”

왜 이렇게 야곱은 요셉을 다른 아들들보다 더 사랑했을까요? 그가 라반의 집에서 겪은 일 때문이겠죠. 야곱도 라헬을 너무 사랑했지만 그것으로 속임을 당하고 또 상처를 받았습니다. 상처는 상처를 낳습니다. 

창세기33:1-2 야곱이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자 야곱은 자식들을 나누었습니다. 여종들과 그들의 자녀들을 앞에 두고, 다음은 레아와 그의 자식을 앞에 두고 그 다음은 라헬과 요셉을 둡니다. 자녀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을까요? 자녀들에 대한 편애로 인한 열매입니다. 무심결에 과거의 상처가 나타나지만, 당사자는 그것이 상처의 산물임을 모를때가 많습니다. 야곱의 왜곡된 사랑을 접한 다른 아들들에게는 깊은 상처였을 것입니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_창세기37:4”

요셉의 형들은 철저하게 소외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에게 편하게 말을 할 수도 없을 정도였습니다. 당시에 채색옷은 왕족들이나 입는 옷이며 심지어 일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옷입니다. 여기에는 미래의 암시가 담기기도 했는데, 요셉이 마침내 채색옷을 입는 자리에 앉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편애는 야곱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잘못된 방식이었습니다. 건강하게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면 다른 사랑을 건강하게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요셉의 미성숙한 태도를 보십시요. 아무리 하나님께 특별한 꿈을 주었더라도 때론 분위기를 보고 감추기도 해야 하는데, 요셉은 지혜가 없었던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미화해서 대단한 인물로 설교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어떤 인물도 미화하려고 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보여줍니다. 요셉 이야기는 영웅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과정을 보여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요셉은 그의 꿈을 가지고 형들에게 말합니다. 그 내용이 모두가 자기에게 절한다는 것이고 심지어 아버지도 자기에게 절한다는 것입니다. 안그래도 미워하던 요셉에게 화가 났습니다. 네가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말로 네가 하는 말이 진실이냐? 


2. 하나님의 꿈으로 시작된 요셉의 이야기

요셉은 꿈을 이루기에는 아직 부족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완벽합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 꿈을 이룰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사람을 다듬어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불완전한 사람을 하나님의 훈련 프로그램 안으로 불러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이 가장 위험한 사람입니다.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사는 요셉은 아직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를 더욱 미워하니_창세기37:7-9”

요셉은 형들에게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 철없는 동생, 그것을 넘어서서 너무 죽이고 싶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오랜 상처로 인해 말입니다. 결국 가정에서 일어난 일은 세상의 일이 되기도 합니다. 요셉의 꿈이 엄청난 하나님의 계시였지만, 그 꿈을 축하해줄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요셉의 인생에 하나님이 개입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으시지만, 꿈을 주시므로 나타나십니다. 그래서 이 꿈의 주도권은 요셉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우리가 계획한 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어떤 가정에는 이런 문제, 저런 사건들이 있는데 그 사건, 문제를 보는 관점에 따라 어떤 가정은 믿음의 가정으로 우뚝 서게 되고, 어떤 가정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무너지는 가정들을 보게 됩니다. 이 가정에서 가장 위기의 순간에 시한폭탄 같은 존재에게 하나님은 꿈을 넣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우리가 예상치 못한 길로 가게 합니다. 요셉은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합니다. 고난이 시작되는데, 세상적으로 망한 것입니다. 거의 포기 상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요셉을 보고 형통한 자라고 말합니다. 아니 길이 다 막혔는데, 그래서 앞이 깜깜한 정도가 아니라 곧 죽을 것 같은 상황인데 형통이라니요. 우리의 모든 길을 막으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다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이 막혀 고통을 만날 때 이것이 나의 꿈인지 하나님이 주신 꿈인지 기도해야 합니다. 

꿈을 꾼 시점과 이루어지는 지점까지 공백을 메우는 일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매일 벌어지는 삶을 살아내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몫 아닌가요. 이를 건너 뛸 수는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요.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일, 이삭에게 하셨던 일, 야곱에게 하셨던 일을 말입니다. 그것을 건너뛸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꿈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철이 없으면 없는대로, 문제가 많으면 많은 대로 하나님의 꿈이 우리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요셉의 꿈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꿈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도 삶이 있는데 우리가 겪는 고난과 문제, 애환은 다 다릅니다. 그 삶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지켜가시도록 이끌어가십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니 요셉 이야기는 영웅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야기를 이 속에서 들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태도로 인해 고난의 수혜자가 되는 힘을 만들어 낼 것이다.

요셉의 꿈이 성취되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성공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의 꿈 이야기가 아니라 이에 대한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꿈을 가진 자의 삶은 어떤 것도 우연이 없습니다. 
미국에 갔을 때 그레이스 커뮤니티 처치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존맥아더 목사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성공과 실패의 때는 언제였나요? 목회적으로 말입니다. ‘내가 한 것은 다 실패였고,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다 성공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말씀을 듣는 태도를 삶에 갖추도록 평생 기도했다고 합니다. 말씀을 듣는 태도로 인해 고난의 수혜자가 되는 힘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그의 형들은 시기하되 그의 아버지는 그 말을 간직해 두었더라_창세기37:11”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뜻을 듣는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고 싶었지만, 야곱은 간직하게 된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이처럼 함부로 사건이나 문제를 자기 마음대로 자기 상처와 감정대로 해석하지 않습니다. 비록 편애로 자녀들에게 어려움을 주었지만, 결국 기도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도 우리의 상처를 방치 하지 말고 늘 기도의 자리로, 늘 말씀을 듣는 자리로 가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그런 시간을 확보하도록 애쓰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 감정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언어가 바뀌지 않습니다. 고난을 바라보는 관점도 시야도 좁아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라면 하나님이 책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태도는 조금 하나님께 성숙해야 합니다. 내 뜻대로 내 상황대로 내 해석으로 말씀을 듣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저 또한 우리 신앙생활을 위해 그런 자세들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말씀사경회와 청년헌신예배를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다면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삶이 우리에게 당장 필요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꿈을 무시하지 않고 우리 삶에 담아낸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지켜 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주일예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4-10-06 주일예배  (1) 2024.10.06
2024-09-29 주일예배  (4) 2024.09.29
2024-09-15 주일예배  (1) 2024.09.15
2024-09-08 청년헌신 특별찬양예배  (0) 2024.09.08
2024-09-08 청년헌신예배  (0) 2024.0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