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6-23 금요찬양예배 from gospelchurch2014 on Vim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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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6월 23일 가스펠교회 금요찬양예배 | |
제 목 : | (소요리문답강해21) 구속의 중보자 |
본 문 : | 디모데전서2:4-5 |
임대영 목사
제21문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의 구속주가 누구신가?
답: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의 유일한 구속주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며 성육신하시어 하나님시오 사람이신 신인의 구별된 두 가지 성품과 한 인격을 영원히 가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성경에서는 오직이라는 단어를 300회 정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오직, 유일하다. 오직이라는 단어는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에서 오직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하는 사실에 강조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별히 구원과 관련되어 가장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라, 유일하신 참 하나님, 독생자라는 표현이 대표적입니다. 오직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_사도행전4:12’
그중에서도 오직은 예수님과 함께 가장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왜냐면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_요한복음14:6’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유일한 하나님 만나는 길임을 설교하셨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수 없습니다.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_요한일서2:23’
하지만 현대에 들어 WCC(세계교회협의회)는 오직 예수를 말하기보다 단지 교회 다니는 사람을 늘리려는 다양한 변화와 시도를 보게 됩니다. 보편화된 교회를 만들려는 시도들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가 다양한 정치 활동을 하면서 사실 가장 중요한 오직 예수 그리스도보다 다른 사실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의 방향은 결코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은 죄인의 유일한 희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타협점이 존재 할 수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복음과 삶의 선택에서 타협을 해서는 안됩니다. 때로는 복음이외의 것들에 집중하면서 실상 복음과 상관없는 방향에 서있게 되는 기독교인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번 소요리 문답을 시작하면서 서론을 분명히 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 인생의 유일한 주인되심을 고백해야합니다. 지금 내 인생의 모든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해결될수 있음도 고백해야합니다. 복음 이외의 것들은 잠시 내려두고 소요리문답을 통해서 유일한 복음, 오직 복음을 다시 묵상해보려 합니다.
Ⅰ. 이유들
창세기에 약속된 구세주가 왜 예수님이실까요? 실제 유대인들은 아직도 구속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구장창 구약성경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수많은 이단들이 자신이 구세주라 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인성과 신성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 구속주가 되십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자신임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성부, 성령 하나님과 본질을 공유하고 계십니다. 달리 말하면 존재, 지혜, 능력, 거룩, 정의, 인자, 진실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십니다.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_요한복음20:28’
예수님은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계십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_요한복음2:24-25’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하신 일들을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_요한복음5:21’
하나님께만 드려지는 예배가 예수님께도 드려집니다.
‘큰 음성으로 이르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 하더라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네 생물이 이르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_요한계시록5:12-14’
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님을 단순한 신적 존재로만 믿습니다. 그들은 성부께서 예수님을 창조하셨고, 성부에는 미치지 못하는 신적 존재라고 이야기합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역사적 예수로써 역사 속에 예수님만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성부나 성령에 대한 이미지, 형상을 만드는 것은 우상숭배라 하지만, 예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에는 아무 두려움 없이 행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능력과 영광이 성부, 성령과 동등하시며 동일본질을 공유한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적인 위격이 정하신 때에 완전한 인성을 취하여 인간이 되셨습니다. 사도 요한이 묘사한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_요한복음1:14’
Ⅱ. 결과들
성자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시기를 중단하지 않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변함이나, 혼합, 혼동됨 없이 인성과 연합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는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취하여 성육신하실 때, 두 본성 가운데 하나가 필연적으로 변화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성을 취하셨기에, 신성이 축소되어 본질상 성부 하나님께 동등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성이 신성에 연합되어 우리 죄인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앙고백서는 성경에서는 예수님의 신성은 참되고 완전하게 유지하면서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가지셨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육신이 두 본성을 혼합 시켜, 예수님을 결과적으로 신도 인간도 아닌, 중간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여호와 증인과 비슷한 사상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에게서 두 인격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와 인간이신 예수로 구분 짓는 사상입니다. 하지만 정통신학에서는 그리스도는 한 인격이시고 완전한 통일성을 가지신 두 본성의 구별을 가지셨다고 정리합니다. 신앙고백서는 신인이신 한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두 본성은 “인성과 신성”으로 명확히 구분되지만, 동시에 한 인격에 완전하게 결합되신 분이십니다.
Ⅲ. 그의 이름들
금번 소요리문답에서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 라는 단어는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한 단어입니다. 자존적이시고 자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스스로 계시는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_출에굽기3:14’
“예수” 라는 단어는 성경의 여호수아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이 이름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우리 주님의 인성을 실재하는 이름입니다. 다른 말로 인간의 역사가운데 실존하신 예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라는 단어는 ‘기름부음 받은 자’ 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에 세 가지 직분이 기름 부음을 받아 직분을 임명받았습니다. 왕, 제사장, 선지자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름부음 받아 임명되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세 가지 직분을 모두 감당하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 세 가지 단어에서 유일한 구속주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시며, 성육신하시어 신인의 구별된 본성과 한 인격을 영원히 가지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라는 사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한 신앙의 구호가 아닙니다. 교회안에 신앙생활을 감정으로만 하는 기독교인들이 많습니다. 그런 감정적 신앙은 단순한 신앙 구호, 단어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의 기복도 심하게 가지게 됩니다. 사실 잘 살펴보면 교회를 떠나거나,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오늘 소요리 문답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잘 모르고 대충, 주일날 예배드리는 감정적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_에베소서4:13-14’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이 동반되어 성장을 하게 됩니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신앙이 자라나게 됩니다. 신앙이 성숙되지 않는 다면, 분명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신앙을 어린아이와 어른에 비유하여 하나님 자녀라고 해서 전부 똑같은 신앙의 수준이 아님을 이야기 합니다. 어린 아이의 신앙생활은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지고 세상의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며 삽니다. 하지만, 어른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과 믿는 일에 풍성하여 세상에 속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묵상일기가 중요합니다. 묵상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요? 하나님 말씀을 보아야 하나님을 찾고, 신앙생활을 점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생각하고, 내 삶을 말씀에 비춰 점검하는 시간을 갖고 기록하는 것이 묵상 일기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감정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말씀으로 기준삼아 이성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물론 감정 또한 신앙에서 중요합니다. 반대로 이성으로만 신앙을 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보편적으로 신앙생활을 감정적으로만 하는 점을 볼 때, 분명 묵상일기는 신앙생활의 균형과 성장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우리의 감정이 소용돌이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임을 고백합니다. 올바른 하나님의 은혜는 감정의 변화에 그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가 왜 모든 문제 해결자 이심을 알게 하고 세상 보는 눈을 바꾸게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생의 지혜를 깨닫게 하고,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원동력, 힘을 가지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만 살 수 있는 힘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올바른 신앙생활의 방향을 찾을 수 없습니다. 목사, 신학자, 신학교수들도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그분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은 안갯길과 같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내일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만 따라가면 우리 인생의 종착지에 잘 도착할 수 있습니다. 지금, 현실의 문제는 당연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구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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