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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06-07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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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07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죽어야 삽니다

본 문 :

레위기24:10-23

오승주 목사

 

. 의지하는 신앙, 선택하는 신앙, 희생하는 신앙

 

등잔불과 떡(진설병)에 대해서 설교가 끝나고 나서 한 사건이 벌어지는 장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공동체에 법을 주시는 장면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설교를 패스하는 경우가 있는데 레위기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데 중요한 본문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이 중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3가지 과정은 거치는 것 같습니다. 3단계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단계면 1단계 다음에 2단계, 그 다음 3단계 그러면 1,2단계가 마치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은 아니고 과정인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마주하게 되는 과정인데 3가지 과정 정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가 의지하는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기에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예수님만 의지하는 것이 아닌 공동체도 의지하고 목회자를 의지하기도 하고 성경을 의지하기도 하고 기도를 통해서 성령을 의지하기도 하는. 의지하는 신앙은 1단계 개념이 아니라 우리가 평생 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의지하는 신앙을 반드시 마주하게 됩니다. 특히 새 가족들이나 신앙생활을 처음하신 분들이 의지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또 하나의 마주하게 되는 신앙의 과정은 선택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마주하는데 선택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선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세상을 선택할 것인지, 믿음을 선택할 것인지, 하나님의 뜻을 선택할 것인지, 세상의 뜻을 선택할 것인지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반드시 선택해야 할 때가 옵니다. 그 때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도 내 의지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선택에 따라서 인생의 결말, 결론이 달라지게 됩니다. 또 하나의 신앙의 과정은 우리말로 표현하면 고수들, 신앙이 굉장히 깊으신 분들이 할 수 있는 과정인데 그것이 희생하는 신앙입니다. risk를 안고 가는 신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희생하는 신앙의 때가 옵니다. 주로 대표적으로 risk를 안고 신앙 생활하는 분들이 선교사님들입니다. 자기 인생을 포기하고, 어떤 분들은 가족도 포기하고, 영화로운 삶을 포기하고 아프리카나 오지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살기도 합니다. 우리의 사회에서 risk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기업 회장의 아들인데 이것을 물려받지 않고 복음전하는 선교사로 가겠다. 이런 risk인 것입니다. 그런 분들 때문에 복음이 확산되고 그런 분들 때문에 진리가 전파가 됩니다. 여러분도 risk를 감당하는, 희생하는 신앙의 과정을 겪게 될 것입니다. 내가 엄청난 이익이 있는데 이것을 포기하고 믿음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천국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급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다면 누가 risk를 감당하고, 누가 희생을 할 수 있을까요? 누가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겠어요. 누가 이 땅의 자기 인생을 헌신하며 복음전하는 일을 할 수 있겠어요. 성경의 인물들도 그렇고 믿음의 위대한 인물들은 전부 이런 신앙을 가졌습니다. risk를 감당하는 신앙. 이런 3가지 과정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해서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렸습니다. 교회를 개척할 때 이 교회가 성장할 수 있을까. 부흥 할 수 있을까. 이런 것에 대한 두려움, 갈등이 있었고 스트레스가 심했고, 사람들이 보는 시선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목회 철학을 비전을 펼칠 수 있을까하는 수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을 의지하기도 하고 선택해야 할 때 선택을 하기도 하고 희생이나 risk를 감수하고 발걸음을 내딛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생각했던 저의 목회 철학중 하나가 저와 함께 신앙 생활하는 성도님들이 어떤 성도가 되게 할 것인지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어떤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게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저는 개척 시작 전부터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목회 방향이 성도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나누고 그 성경을 실천하면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저의 한 가지 목회 철학입니다. 그런 자립되어있는 독립되어있는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게 하는 것이 목회 비전 중 하나입니다. 그렇게 성경을 가지고 실천하면서 사는 삶을 살아야 자기의 삶이라든지 직장이나 가정, 지역에 말씀교회가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결코 말씀공동체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객관적인 진리와 조우하면서 살지 않으면 말씀 공동체가 세워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것이 꿈이고 비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누고 자랑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 수도권 전역에 말씀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꿈인데 쉽지가 않습니다. 이런 일들이 소그룹에서도 일어나야 하고 그 일을 하기 위해서는 리더쉽이 리더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변을 살피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제가 상담을 많이 받습니다. 성도님들 말고 많은 분들에게 연락이 옵니다. 상담오신 모든 분들의 공통점은 이런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교회하고 이런 갈등 있어요. 부모님과 이런 갈등이 있어요. 이런 문제가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하고 엄청난 상담들이 들어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자매와 상담을 2달 정도 했는데 제가 상담을 멈췄습니다.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이야기도 들어주고 공감도 해주고 제가 제시한 답변은 성경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시는 뜻을 발견하지 않으면 그런 문제는 반복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성경을 읽으라는 권면하는 순간 상담이 어렵습니다. 피해버립니다. 성경 읽으라는 말 말고 제가 무언가 해주길 원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관심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 하나님 만나는 것, 아니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 아니냐고 하면서 그럼 성경을 읽으라고 합니다. 그러면 피하고 숨어버립니다. 성경을 가까이하고 성경을 읽으면 빛이 비춰지니 속이 드러납니다. 속이 드러나는 순간 피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환경을 바꾸면 해결된다고 생각하니 새로운 환경을 찾아서 계속해서 환경을 바뀝니다. 그렇게 하다가 해외로 이민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민가면 해결되나요? 환경이 바뀌면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 있는 자기의 속사람을 하나님 앞에 오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 속 진리를 마주하면 드러나야 하는데 속이 드러나야 하는데 창피하고 두렵고 그 과정이 싫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에 관심이 없고 게으르고 그 과정을 찾지 않기 때문에 그런 분들은 인생 끝자락에서 후회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선택하고 희생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가 이런 신앙을 추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신앙을 가가고자 하는데 가로막는 것이 끔찍한 죄입니다. 죄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계십니까. 이 죄는 우리가 이런 신앙의 길을 가는 것을 가로 막습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 속의 진리를 만나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과정을 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죄입니다. 오늘 레위기 본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 하나님의 깊고 높은 가르침

-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여 저주하면 죽는다_레위기24:10-16

- 사람을 죽이면 반드시 죽는다_레위기24:17-23

- 죽음으로만 갚을 수 있는 죄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_레위기24:20’

 

오늘 무슨 내용이냐면 등잔불과 떡 이야기 하다가 하나의 사건을 이야기하는데 슬로밋이라는 여인의 아들이 싸운 것입니다. 다투다가 하나님을 모독했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을 저주했습니다. 오늘 성경이 이것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외부사람과 싸운 적이 없습니다. 주로 와이프와 싸웁니다. 결혼을 하면 부부끼리 기 싸움을 합니다. 싸우면 옛날 것 다 나오고 기분이 나쁘면 주로 상대방의 자존심을 건드립니다. 인격적인 자극을 하면 감정이 폭발해서 싸웁니다. 사실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도 합니다. 부부싸움이 그래서 커지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했습니다. 이 싸움은 끝이 없구나. 결론이 없구나. 한 사람이 포기를 해야 합니다. 져야 합니다. 한사람이 먼저 사과하고 무릎을 꿇어야 끝나는 싸움입니다. 슬로밋의 아들은 왜 싸웠는지 기록되어있지는 않지만 싸우다가 사람들이 몰리고 이 친구를 사람들이 가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해버렸습니다. 하나님 어딨어! 하나님 나와 보라고 그래. 하나님이 신이야? 그것을 듣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방금 진설병 이야기하고 성막에서 하나님께 제사하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 때 벌어진 사건입니다. 이 때 하나님이 이것에 대한 해답만 주신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새로운 법을 주셨습니다. 그 법이 하나님을 모독하면 돌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주변 사람이 돌로 쳐 죽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끔찍한 최악의 벌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모독하면 제 와이프나, 제 가족이나, 성도님들이 저를 돌로 쳐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로 쳐 죽인 사람은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 뿐 아니라 추가적으로 법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남을 죽인 자, 즉 살인한 자는 똑같이 죽여라. 그리고 남의 짐승을 죽인 자는 똑같은 짐승으로 변상을 해라. 남에게 상해를 입히면 똑같이 다치게 해라. 그러면서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주셨습니다. 신약에 와서 이 것을 뒤집습니다. 원수를 사랑해라.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도 대라.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줘라. 똑같은 하나님이 두 가지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면 이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뺨을 맞으면 여러분도 뺨을 때려야 합니다. 또 때리면 또 때려야 하고 죽을 때까지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싸움은 한 사람이 포기하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갑니다. 한 사람이 넓은 마음으로 품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가는 것이 싸움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복수에 대한 말씀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제 아들 한빈이가 유치원에 갔다 오면 놀이터를 갑니다. 주로 할머니가 데리고 가는데 초등학생 형들이 한빈이 못 놀게 하나 봅니다. 제가 한빈이를 데리고 놀이터를 갔습니다. 제가 양복입고 목사라고 생각하니까 인자하게 보이지만 동네 사람들은 저를 피하십니다. 저의 평상시 복장은 올 블랙에 모자를 쓰고 나가서 서 있으니까 한빈이 아빠인 줄 알고 다들 피해주었습니다. 제 생각에, 제 마음에 누가 한빈이는 건드려? 사람이라는 것이 잡히기만 해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람 심리가 그렇습니다. 그런 마음들이 우리들에게 다 있습니다. 오늘 이것이 왜 중요하냐면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면 돌로 쳐 죽이라고 했습니다. 죄인인 인간의 가장 큰 죄는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입을 열어서 모독하고 저주하는 것도 있지만 성경은 우리의 마음을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제외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것. 다시 말해 이것이 무슨 죄인가요? 원죄입니다. 하나님을 무시한 죄. 창조주이시고 만왕의 왕이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이신데 하나님을 모독하고 저주한 죄. 이것은 엄청난 죄입니다. 성경에서 이 죄를 어떻게 다루셨나요? 사사시대를 보면 복음을 알고 그 다음 세대에 여호와의 이름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재앙, 저주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엄청난 죄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는 것, 즉 하나님을 외면하고 사는 것에서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 다른 사람에게 상해를 입히고, 다른 사람의 물건을 빼앗고 괴롭히는 자범죄가 나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죽일 수 있나요? 왜 죽이나요?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하나님이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신앙의 개념이 없기 때문에 내가 주인노릇으로 하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연약한데 남보다 강해지려고 하고 내 교만과 오만을 증명하기 위해서 남을 깔아뭉갭니다. 이것이 인간의 습성입니다. 실제로 죽이지 않을 뿐이지 인류 역사상의 수많은 전쟁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죽인 것들은 전부 하나님 없는 상태의 삶에서 오는 범죄들입니다. 그래서 살인한 것은 너도 똑같이 죽어야한다고 하나님이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 주에 한 사건을 보고 경악했습니다. 지난 5년간 서울에 와서 뉴스를 통해서 본 범죄 중에 가장 악질이라고 생각하는 범죄입니다. 9살 아이를 계모가 캐리어에서 죽인 것입니다. 칼로 찔러 죽이던지, 목 졸라 죽이던지 이것이 비교를 하자면 더 낫습니다. 계모가 아이를 캐리어에 넣고 2시간 가까이를 아이가 오줌을 쌀 때까지 있었습니다. 이 것은 말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한빈이도 벌서다가 오줌 마려우면 싸고 와서 다시 손들고 벌을 받습니다. 그것은 아빠도 안 계시고 평상시에 아이에게 폭행과 폭언을 했다는 것입니다. 무서우니까 저항도 못하고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오줌을 쌌습니다. 그래서 엄마가 더 화가 나 더 작은 캐리어에 가두고 3시간동안 외출을 했습니다.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 아이가 어떤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을까요? 얼마나 겁에 질렸을까요? 얼마나 친엄마가 보고 싶었을까요? 얼마나 두려움 속에서 심장 마비 같은 것으로 죽은 것입니다. 제가 기사 본 순간, 저 여자는 캐리어에 똑같이 가둬서 바다에 띄어놓아야 한다고 순간 생각했습니다. 병원에 갔으니까 그 아이가 살아있으면 좋겠다. 살면 도와주고 싶다 연락처라도 알아서 케어해주고 싶다. 생각이 있었는데 끝내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고 저주하면 이런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여자를 나쁘다고 손가락질하지만 사실 우리도 비슷합니다. 크기만 다를 뿐이지 우리의 마음은 그렇지 않나요? 영적인 눈이 어두워지고 교만해서 내가 살아있다는 증명을 그런 식으로 하는 것입니다. 작게는 그런 것이지만 크게는 전쟁 같은 것입니다. 내 이름을 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짓밟고 억압하고 죽이고 빼앗고. 이것이 살인입니다. 미국에 있는 선교사 친구와 전화통화를 자주 하는데 미국에 인종차별문제가 심각합니다. 우리는 제대로 잘 보아야 합니다. 제 친구가 하는 말이 그 사람이 위조지폐를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위조지폐 사용은 가장 큰 범죄 중 하나입니다. 엄청나게 악질의 범죄입니다. 경찰은 살인죄를 저질렀으니까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한 것은 무엇인지 아시나요? 흑인들이 인종차별을 평생 당해왔습니다. 그 흑인들이 가장 심한 인종차별을 합니다. 바로 동양인에게 인종차별을 합니다. 그 정의를 이용해서 남을 또 괴롭힙니다. 한국 상점들 다 부서지고 약탈해가고 빼앗고 죽이고 강도짓을 합니다. 한인들 총기 사망사건이 100% 흑인이 죽인 것이라고 합니다. 진리라는 것은 없습니다. 정의를 이용해서 남을 괴롭히는 것. 진리를 이용해서 이익을 쟁취하는 것.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의 도덕법은 계속해서 악용하기 때문에. 성경이 이 죄에 대해서 한 가지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죽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끝낼 수 있는 방법이 죽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법을 만드셨습니다. 네가 얘를 죽였어? 너도 똑같이 죽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해?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을 그대로 두면 사사시대가 됩니다. 어둠의 시대가 됩니다. 어둠의 시대 때에는 심각한 범죄들이 일어납니다. 실제로 공동체의 법이 민수기에도 레위기에도 출애굽기에도 신명기에도 그 전에는 이런 법이 없었습니다. 살인을 했을 때에 대한 법이 없었습니다. 그럼 어떻게 되나요? 우리나라에 살인죄에 대한 법이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나라에 남의 물건을 훔친 것에 대한 법이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우리나라에 음주운전에 대한 법이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사람들이 다 술 먹고 음주 운전할 것입니다. 법이 있기에 죄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하나님의 방법은. 어둠이 가득한 곳에 어둠끼리만 두면 어둠끼리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어둠에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둠이 빛을 보고 우리는 어둠이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으로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악이 가득한 곳에 선을 보내십니다. 선과 악을 구분하십니다. 그래서 악이 선 앞에 가면 한없이 작아집니다. 선이 없으면 악은 결코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엄청난 죄에 대한 벌을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죽음이 아니면 해결할 수 없어. 죽음이 아니면 끝낼 수 없는 문제야. 죽지 않으면 이런 문제가 계속 반복이 된다고 하시면서 강력한 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모세5경입니다. 죽음으로만 갚을 수 있는 죄입니다.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니라. 하나님이 여기에서 끝내셨으면 기독교의 신앙을 받아드리며 안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공의를 만들어 놓아야 당신의 사랑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시편 149편에 성도의 손에 양날의 검을 쥐어주셨습니다. 공의와 사랑의 검. 이것이 성도의 영광이라고 합니다. 왜 공의와 사랑이 하나인가요? 하나인데 양날입니다. 공의가 있어야 사랑이 필요합니다. 율법이 없으면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됩니다. 율법이 없으면 선택할 때 절대 믿음을 선택하지 않게 됩니다. 율법이 없으면 절대 은혜를 사모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죄인인 것을 확인하기 때문에 예수그리스도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법을 주시고 죽음으로 끝내야 함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그래놓고 당신이 인간의 육신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독생자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법대로 죽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만약에 율법이 없이 사랑만 베푸셨다면 인간은 아무도 예수님을 안 믿을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시고 법을 주시고 공의를 주시고 그것을 확인하셨습니다. 이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자녀를 키울 때도 좋은 것만 주면 다 배립니다. 질서와 법을 가르쳐주고 그러나 나는 너를 사랑한단다. 이것이 진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 방법을 살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악이 가득한데 그 곳에 선을 던져놓으시고. 어둠이 가득한 현장에 빛을 던져놓으셨습니다. 고등학교를 처음 입학하는데 이미 예수님을 믿고 고등학교를 갔을 때였습니다. 중학교 때까지 운동을 했습니다. 고등학교를 갔는데 저의 키가 지금의 키이고 얼굴도 변함이 없습니다. 가난해서 매형들이 입던 옷. 모직바지, 위에는 가죽잠바나 같은 것을 입고 다녔습니다. 학교를 처음 가서 성경을 읽고 있는데 누가 뒤통수를 쳤습니다. 봤더니 불량서클이었습니다. 그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닐 때에는 아이들이 센척하고 담배피고 뺏어 먹는 아이들인데 학교에서 성경공부하고 그 친구들을 1:1로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는 엄마 아빠가 이혼해서 집에 가도 아무도 없고 그러다보니 저런 아이들과 어울려서 자기도 모르게 요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런 아이들이 자기도 모르게 그런 문화가 형성이 되어버렸는데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어떤 아이들은 예수님 전해서 교회에 오기도 하고 학교에서 하는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도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이런 요람에 빠져버립니다. 죄에 빠져버립니다.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죽입니다. 실제로 사람을 죽이면 세상의 법이 우리를 다루지만 우리의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입니까? 미워하고 정죄하고. 한국교회가 타락했다는 증거는 한국교회가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미워하고 정죄하고 비교하고 하찮게 여깁니다. 그 배후에는 내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저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살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입니다. 강력한 법을 주셨습니다. 왜 법이 강력하나요? 죄가 그만큼 강력합니다. 죄는 죽음으로밖에 끝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법도 죽음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해! 그럼 돌로 쳐 죽여. 사람을 죽였으면 똑같이 죽어야합니다. 하나님은 그 법대로 죽으시고 은혜의 복음을 살길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약에 와서 다른 이야기를 하세요. 죄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죄인인 내가 죽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나를 죽여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 생활입니다. 나를 비우고 나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종교입니다.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옵니다. 종교는 나는 의롭게 살 거야. 나는 말씀대로 말씀 잘 지켜서 살 거야. 이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죽는 것은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나는 죽게 되어 있습니다. 학교에서 그 불량서클들이 저와 친구가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 세계에서 멀어지고 교회와 가까워지고 성경과 가까워지고. 저와 친해지면 자연스럽게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면 우리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빛과 동행하면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빛 앞으로 나아가면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죄는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어야 끝나는 것 죄입니다. 그래서 성경 속 구원의 진리는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죄에 대해서 우리가 죽어야 하고 그래야 사실은 내가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향해서 하고 있는 행위들이 끝나야 내가 살 수 있는 역설을 성경에서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 수 있나요?

 

. 죽어야 삽니다.

- 죄는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죄인인)내가 죽고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숙제로 내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오늘 아침에도 읽었는데 20분에서 30분이면 다 읽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정독해보세요. 갈라디아서 2장에 율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_갈라디아서2:19’

 

율법으로 말미암아. 내가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 율법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너 죄 지었니? 그럼 죽어. 이것이 율법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그 율법에 대해서 죽으면 하나님에 대해서 살 수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우리의 죄를 다 드러냅니다. 그것이 받아드리기 힘듭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 자아가 죽게 됩니다. 이것이 싫은 것입니다. 이것을 받아드리는 것을 성경은 죽는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내 속의 가득한 죄가 인정이 되면, 이 인정이 죽는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갈라디아서 저자인 바울이 누구를 거론 하냐면 게바인 베드로를 거론합니다. 베드로를 책망하는 장면이 2장에 나옵니다. 무엇을 책망하냐면 그나마 이 유대인 중에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 베드로인데 이 베드로가 이방인과 식사를 한 것입니다. 복음 전하려고 식사를 했겠죠. 그런데 유대인들이 와서 감시하다가 그것을 목격하고 잡은 것입니다. 그 때 베드로 가 했던 행위가 도망쳤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책망했습니다. 베드로, 네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하나님이 너에게 주신 은혜이고 축복인데 왜 창피해 해? 왜 도망쳐? 율법이 뭐가 두렵다고 도망쳐? 라고 엄청나게 갈라디아서 2장에 베드로에 대해서 책망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요? 아직도 베드로는 율법에 대해서 자기가 창피하고 부끄러운 것에서 해방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3-4장에 그런 내용들이 나오는데 7절에서 보니 우리는 더 이상 종이 아니다.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자인데 너희가 왜 종으로 사냐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죄를 계속 짓고 있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을 모르니까 죄를 계속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결단코 9살 아들들에게 그런 행위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자는 결단코 남을 죽이거나 남을 괴롭히거나 살인을 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마귀의 종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는 것입니다. 레위기 말씀이 그런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풀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는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자인데 너희가 다시 그 길로 돌아가느냐. 왜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노릇을 하려고 하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_갈라디아서5:1’

 

하나님에게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

해서 주셨습니다. 자유를 주셨는데 사람들이 다시 종의 멍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사람을 죽이고 다시 율법을 찾아 돌아가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원래의 목적을 상실하고 율법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_갈라디아서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바리새인들을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 십일조 잘했어. 나 헌금 잘했어.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주로 그런 사람들이 은혜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지난 30년간 얼마나 열심히 교회 봉사를 했는데 교회에서 어떻게 나에게 이렇게 대우해?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주로 목사님들이. 내가 이렇게 교회를 키워놓았는데 은퇴할 때에 나한테 이 것밖에 안 해줘? 이 것이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을 사람들이 모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_갈라디아서5:9’

 

죄가 삽시간으로 퍼지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_갈라디아서5:13-15‘

 

율법은 내가 너를 죽이는 것입니다. 서로 율법으로 산다고 생각해보세요. 내 속에 하나님이 없고 은혜가 없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떨리는 것이 없으면 남을 정죄하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정죄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은 매일 예배를 지각하네. 예배시간에 매일 자네. 그럼 자기는요? 서로 비난하고 헐뜯고 비교하고. 피차 멸망할까. 반대로 이야기해서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 율법을 통해서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 십자가가 내 마음속에 절절한 사람은 남을 비난을 함부로 하지 못합니다. 십자가가 내 속에 은혜가 있으면 내 이웃들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게 되나요? 십자가가 내 영혼 속에 충만한 상태면 겉모양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없으니까 서로 물고 뜯으며 사는 것입니다. 다 같이 멸망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17) 그러면서 뭐라고 이야기하시냐면 육체가 죽는다는 의미는 성령이 내 안에 사신다는 의미입니다. 마귀는 우리가 육체에 빠져 살도록 누룩처럼 퍼지게 하는 것입니다. 서로 물고 헐뜯게 하는 것입니다. 다 같이 멸망하는 것입니다. 어떤 공동체라도 어떤 조직이라도 그런 마음이 들어오면 끝나는 것입니다. 율법은 서로 멸망하게 하는 것이 맞습니다. 원래 율법의 목적은 은혜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내가 죄인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면 은혜를 찾습니다. 십자가를 찾습니다. 그런 사람은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가족도 살릴 수 있고, 내 이웃도 살릴 수 있습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_갈라디아서6:1-2‘

 

갈라디아서 6장에 범죄한 자를 봐도 온유한 심령으로 서로 짐을 지라. 그리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이 무엇인가요? 은혜가 아닙니까. 그리스도의 법은 은혜입니다. 자기가 구약의 법, 죄의 삯인 사망을 감당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법은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그것으로 서로 짐을 지라고 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교회로 세워져야 하는데 이것을 아는 사람은 risk를 감당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미쳐서 엄청난 이익을 포기하고 조선 땅에 와서 복음을 전했을까요? 자기의 전 재산을 헌금해서 조선 땅에 학교를 짓고 병원을 짓고. 이유가 없습니다. 왜 그렇게 할까요? 왜 그런 risk를 감당하는 신앙생활을 할까요? 십자가를 만났기 때문에. 그들 마음에 말로 다할 수 없는 구원의 은혜가 넘쳤기 때문에. 천국이라는 것을, 하늘 보좌에서 주실 상금을 확실하게 믿었기 때문에. risk를 감당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4)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르침으로 받으라고 합니다.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고 합니다.(6) 이것은 발전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배우는데 우리는 듣기만 합니다. 한국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듣기만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듣기만 합니다. 피드백이 없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이 심방을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방을 거부합니다. 들키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말씀을 제대로 깨달았는지 내가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 내 속에 어둠이 있는지 목사님에게 들키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저 그냥 교회 잘 다닐게요. 헌금 잘 할게요. 터치하지 마세요. 속은 깜깜하고 어두운데 그대로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우리가 교회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 천 명, 수 만 명씩 모이는데 이 과정이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을 쫒아 다닙니다. 이 교회에서 이것을 들킬 만 하면 저 교회가고 저 교회에서 이것을 들킬 만 하면 또 다른 교회에 가고 큰 교회에 가니 터치를 안 하네? 그래서 큰 교회에 가는 것입니다. 내 속에 예수님과 동행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 그것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입니다. 말씀 앞에 우리를 조명하고 성경 속의 진리와 조우해서 내 속의 어둠을 봐야 합니다. 죽여야 합니다. 우리가 죽일 수 있나요? 율법적으로 종교적으로 죽일 수 있나요? 못 죽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 속에 들어와야 합니다. 마귀가 그것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가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_갈라디아서6:8-10’

 

우리가 죽는 것은 그리스도의 법대로 산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은혜입니다. 바울은 은혜에 대해서 항상 살아있었습니다. 죄에 대해서는 항상 죽어있었고 무관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감각이 감정이 은혜에 대해서 살아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세상에서 살다가 기분 나쁜 일이 생기거나 내 마음 속에 악한 마음이 생기거나 누군가를 미운 마음이 생기면 그때 우리의 감각이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에 대해서 살아 있어야 합니다. 삶에 큰 위기가 왔을 때에, 큰 충격이 왔을 때 죄에 대해서 감각이 살아있으면 죄로 가버립니다. 그러나 평소에 은혜에 대해서 감각이 살아있으면 우리는 은혜를 찾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가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경건의 힘입니다. 그래서 은혜 앞으로 가야 우리는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문제를 주었을 때에는 이것은 사인입니다. 그 문제가 왔을 때 우리가 살아있으면 육체의 썩어질 것을 위해서 살면 우리는 그 사인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에 대해서 살아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속사람이 항상 은혜에 대해서 살아있어야 합니다. 의지해야 되고 선택해야 할 때 믿음을 선택해야 하고 risk를 감당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멋진 크리스천이 되길 바랍니다. 교회는 그래야 하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커야 합니다.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내가 죽고 예수님으로 사는 것입니다. 육체가 죽고 성령이 살아계시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 죽고 은혜에 대해서 살아있는 것입니다. 내 감정과 내 감각들이. 그래야 영생의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문의 / 윤덕현 전도사 010.9899.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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