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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06-21 주일예배

 

2020-06-21 주일예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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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21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희년 공동체

본 문 :

레위기25:8-55

오승주 목사

 

. 땅의 주인은 하나님

- 인간이 가장 행복할 때는 언제일까요?

 

저는 희년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영적인 의미들을 찾으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깨닫게 되는 한 주였습니다. 제가 개척하기 전에 목사안수를 받고 공허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가시지 않겠지만 공허하고 허전하고 허무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승주 그러면 사람들이 열심이다. 성실이다. 실력 있다. 이런 소리를 주로 들었습니다. 열심히 성실히 살았는데 저는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불안함이 동반된 공허감이었습니다. 불안했고 자존감이 바닥을 치던 때였습니다. 아내와 다투고 나면 내가 필요 없는 사람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불안함이 엄습해 오던 때, 사역을 하고 나서 찾아오는 허전함들이 크던 때였습니다. 제가 모든 것을 열심히 하고 교회생활이나 목회생활을 열심히 했던 때인데 성실과 열심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인데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사명인데 저는 오랫동안 복음을 전하고 많은 분들을 전도하는 삶을 살았는데 제가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공허함을 느끼면서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전도도 엄청 하고 영접메세지도 전하고 많은 사람들을 양육하고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돕는 목회자의 삶을 살았지만 제 신앙생활은 공허하고 허전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알지 못하는 이중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행동은 사람들 앞에서 목사로 살아야 하니까 그렇겠지만 제 마음은 무언가 허전하고 허무하고 공허한 이중생활을 했습니다. 신앙은 성숙해져가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제 마음이 제자리걸음 같았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메시지를 너무 많이 들어서 들은 메시지를 정리하고 요약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사역을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전해 듣고 그것에 대해서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삶을 살았는데 정작 내가 예수님을 잘 모르고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저의 상태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대학생들, 청년들, 전문인들, 많이 배우신 분들 엄청 똑똑하신데 예수님을 잘 모르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목회자인 저도 예수님의 실체가 제 삶에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왜 죽으셨는지, 왜 부활하셨는지. 다들 대충은 들어서 압니다. 그 예수님의 실체가 내 삶에는 없는 저는 공허한 신앙생활을 했었습니다. 주일에 설교들을 때에는 마치 다 아는 것 같습니다. 마치 학생들이 학원에 가서 선생님이 칠판에 풀어줄 때에는 다 아는 것 같지만 집에 와서 풀어보면 모르죠. 저도 성민간사님이 제가 방송할 때 방송장비 켜는 법을 수도 없이 가르쳐 주는데 혼자 틀 때마다 헤맵니다. 메모 해 놓고 익숙하게 제가 해보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 실체로는 없는 신앙생활.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래서 예수님이 나의 기쁨이다. 예수님으로 인해서 환희하고 행복하다. 라는 말이 정작 와 닿지는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데 목사님이 너와 함께 하셔.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사람이 주님이 너와 함께 하셔. 라고 말해주는 것이지 내가 경험해보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전도를 잘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전도를 잘하는 분들도 예수님이 좋아서 전도를 하기 보다는 종교적인 열심,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생기는 불안함들로 전도를 합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높아지고 예수님으로 인해 자기가 어떠하든지 상관없어야 하는데 그것을 종교적으로 전도하는 사람들은 환경이 바뀌니까 변질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행위를 멈춰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척할 때 결단한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 가스펠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 된 교회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교회의 주인이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인 된다는 것은 목사가 결코 주인이 되어서도 안 되고 그 누구도 교회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제가 몇 가지 결정한 것이 있습니다. 제가 교회의 재정을 들어다 보지 않겠다. 법적으로 제지를 해놓았습니다. 제가 정관을 통해서 하나님이 교회의 주인이라고 고백하기 위한 저의 실천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또 하나는 성도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을 읽도록 해야겠다. 제가 개척하면서 다짐한 결단입니다. 남이 만난 예수님을 전해 들어서 요약본처럼 외워서 사는 신앙생활이 아니라. 예수님을 실체를 알지 못하고 요약본에 의지해서 살면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신앙이 성숙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이야기라고 전해주신 성경 66권을 가르치고 읽게 만들고 성경 속에서 예수님이라는 구원의 진리를 직접 조우할 수 있도록 섬기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새신자가 와도 성경으로 안내하고 어른들이 인생을 마감할 때 천국가기 직전에도 성경책을 읽고 자녀들과 교회의 후대들에게 전해줄 수 있는 문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신앙은 어떤 직분이라든지 사회적인 위치로 신앙생활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가까이 할 때 신앙은 성숙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성경과 가까워지고 친해질 수 있을까. 그래서 만든 것이 바이블스쿨, 말씀 사경회 이런 것들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여름성경학교를 통해서 성경과 친숙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고 끊임없이 성경을 읽는 방법에 대해서 설명해주세고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하는지 가르쳐주는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이지 교회자체를 위한 프로그램은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사랑하는 나의 책이 되도록 사랑하는 나의 주님이 되도록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이 되도록 행함을 외면하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믿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영혼 없는 육신과 같습니다. 성경에서 행함은 성경을 펼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배드리러 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큰 문제 중 하나가 말만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 행함이 없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들은 기부 안 하면서 스타보고 왜 기부하지 안 하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으면서 부자들은 왜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교회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비판을 하는데 한 번도 교회를 사랑해보지 않는 사람들이 비판을 합니다. 헌신해보지 않고 섬겨보지 않고 연약한 영혼들을 돌보아 보지 않으면서 이야기만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정말 사랑한다고 정말 예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면 예수님을 알려고 하는 행동들, 알고 싶은 마음들, 의지들, 그런 행위들 그것이 신앙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싶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저에게 있는 공허함, 허전함 그 어떤 것으로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역을 하면서 많은 사례도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아보았고 조직에서 어떤 자리에서 일도 해보았는데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놀랍게도 아침에 읽었던 시편의 한 장, 저녁에 읽은 잠언 한 장이 저의 공허함이 채워지고 허전함이 채워지고 교만함을 낮춰주고 위기와 어려운 순간을 지나가도록 이끌어주는 하나님의 손이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마주하면서 예수님을 마주하게 되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제 마음이 채워지고 성경 속 천국이 제 삶에 투영이 되고. 그래서 성경 속 구원의 기쁨과 감사로 채워질 때 저는 자유하게 됩니다. 돈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하게 되고 죄의 유혹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구나. 깨달아지고 믿어지니까 행복했습니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레위기는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땅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밟고 있는 땅이 흙입니다. 성경은 신약에 와서 땅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 땅이 바로 저희입니다. 그 땅은 바로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 밭. 이 땅의 주인, 육신의 주인, 우리 마음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깨달아지고 이해가 됩니다. 그것이 고백이 되지 않으면 신앙은 제자리걸음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열심히 해도 공허하고 신앙은 성숙되지 않고. 그래서 예수님 안에 행복하다는데 예수님이 동행할 때 좋다는데 환희가 있다는데 기쁨이 있다는데 평생 그것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그저 교회만 왔다 갔다 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안식년은 안식이신 예수님에 대해서 설명했다면 희년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래서 자유하게 되는 것을 설명합니다. 놀라운 법입니다. 희년은 한 번 더 다뤄야 할 정도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 희년 공동체를 명령하신 하나님

- 희년은 무엇인가?_레위기25:13-55

: 신앙회복의 기회, 공동체 안 불평등 관계 회복

: 히브리어는 요벨(수양의 뿔, 나팔), 영어로는 쥬빌리

: 가난 때문에 팔려온 형제에게 자유를 주는 제도(레위기25:10,13)

: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제도(레위기25:28)

: 무르기제도(고엘제도, 레위기25:29-30)

: 가난한 자를 위한 제도(레위기25:35-38)

: 종을 회복시키는 제도(레위기25:39-43)

- 왜 희년은 이스라엘 역사에 단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 인간의 노력으로 결코 불가능한 희년제도

- 희년 공동체는 구원 공동체_레위기25:9-10,이사야61:1-11

:큰 나팔을 불고 자유를 공포하는 날, 각각 자기 소유지, 자기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날

: 너희가 파종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희년은 성경 25장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제가 25장을 간략히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희년은 히브리어로 요벨이라고 합니다. 요벨은 수양의 뿔입니다. 뿔로 만든 나팔을 요벨이라고 합니다. 희년 자체가 한문으로는 기쁨의 해라는 뜻이지만 원래 원어로는 뿔 나팔입니다. 하나님이 희년제도를 만드시면서 이름을 붙이기를 요벨이라고 붙이셨습니다. 왜 뿔 나팔이라고 지으셨을까. 오늘 중요한 포인트로 찾으셔야 합니다. 이 요벨이 원어가 되어서 영어단어가 나온 것이 쥬빌리입니다. 축제. 축전. 희년은 안식년의 7. 7X7=49 그 다음 50년째 되는 해를 하나님께서 희년이라고 공포하셨습니다. 희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25장에 자세히 기록을 해놓았는데 대표적으로 가난 때문에 팔려온 형제에게 자유를 주는 제도입니다. 가난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 구걸을 하다가 내 몸을 파는 것입니다. 그런 노예들, 종들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는 제도가 희년제도입니다. 종은 50년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토지를 원래의 주인,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제도입니다. 그 말은 원주인이 가난 때문에 토지를 팔기도 하고 토지를 어떤 사유에 있어서도 내 토지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토지가 없는 사람들은 엄청 기쁘겠죠. 왜 원주인이 다 있을까요. 가나안 땅에 가서 하나님이 12지파에게 정확하게 분배 주셨습니다. 스타트를 땅을 가지고 시작합니다. 그런데 50년을 살면서 가난 때문에 땅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열심히 일해서 땅을 산 땅 부자들은 희년이 너무 싫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싫게 만들어 놓았을까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또 하나의 제도는 고엘 제도. 땅을 다시 무르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사들었다가 무르기 제도가 있었습니다. 희년 제도는 철저하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제도입니다.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빈 손으로 네 곁에 있거든 너는 그를 도와 거류민이나 동거인처럼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하되 너는 그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여 네 형제로 너와 함께 생활하게 할 것인즉 너는 그에게 이자를 위하여 돈을 꾸어 주지 말고 이익을 위하여 네 양식을 꾸어 주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며 또 가나안 땅을 너희에게 주려고 애굽 땅에서 너희를 인도하여 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_레위기25:35-38’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자를 받지 말고 유익을 위해서 빌려 주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도움을 주라는 것입니다. 원액만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을 회복시키는 제도. 제가 읽었던 처음 본문에 무엇이라고 표현하고 있죠? 너희에게 자유를 공포하는 제도가 희년제도이다. 그래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고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게 하는 제도가 희년제도입니다. 종을 회복시키는 제도입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디테일하시냐면 평생 종으로 살았던 사람에게 희년에 너의 집으로 가라고 했는데 갈 곳이 없는 종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종은 그 집에 계속 머물 수 있도록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다음 희년 때까지 더 머물러 있을 수 있도록. 이 희년제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라고 하면 공동체 안의 불평등한 관계를 평등하게 만들어주는 제도이다라고 설명을 할 수 있습니다. 배경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12지파에게 균등하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50년 동안 살면서 누구는 부지런하고 누구는 게으르고 그럴 수 있습니다. 누구는 죄를 지어서 실수 할 수 있고 큰 사건이 일어나서 큰돈이 필요할 수도 있고. 그래서 50년 만에 흐트러진 것입니다. 그것을 희년 때에 다시 원상복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희년을 설명하시는 말끝마다 너희가 애굽에서 종 되었던 것을 기억해라 라고 이야기합니다. 부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아무것도 없이 노예가 되었던 너희를 건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배경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 한 것입니다. 원래 받았던 것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더 많이 소유하고 있던 것을 50년 해에 원래의 자리로 보내고 나니 처음 받았던 축복 그대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무엇을 떠올리겠죠? 내 안의 끊임없는 욕심을 다시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 은혜가 부자들에게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고 다시 주님을 의지하며 살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겸손하게 주님을 따라가는 마음이 믿음이 회복이 될 것입니다. 제가 안식년을 설교하면서 실수한 것이 있습니다. 안식년 해에 6년 동안 소출을 거두고 안식년의 해에 먹을 것은 그 해에 밭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6년째에 2배의 소출을 하나님이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희년은 안식년 포함해서 희년을 지켜야하니 2년을 일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 소출일 때에는 3년 치 소출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하셨습니다. 희년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25장을 읽으면 욕심도 없고 서로 도와가면서 완벽한 나라, 완벽한 공동체라고 하나님이 주신 희년제도입니다. 많은 국가나 많은 나라에서 희년제도가 완벽한 제도라고 모든 학자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땅에 들어가서 잊어버렸습니다. 희년제도의 부분적으로 지킨 것은 있습니다. 희년제도는 인간의 노력으로 결코 지킬 수 없는 제도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주셨을 때에 불가능한 제도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알고 주신 것입니다. 죄 때문에 욕심 때문에 절대 희년을 지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안 될 것을 아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한명이라고 지키지 않으면 깨지는 제도입니다. 11지파가 지켰는데 1지파가 지키지 않았다면 깨지는 제도입니다. 모든 공동체가 동시에 해야 지킬 수 있는 제도입니다. 불평등이 생기는 순간 깨져 버리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우리의 재산 한 통장에 모두 모아놓고 똑같이 분배해서 쓰자면 누가 할까요? 완벽한 제도라고 주셨습니다. 지키고 살면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욕심 때문입니다. 국가에서도 끊임없는 제도를 만들어냅니다. 국민 행복하기 위해서 정치인들이 노력을 합니다. 그런데 왜 늘 무용지물 되는지 아세요? 욕심 때문에. 자유는 책임과 의무가 따라야 합니다. 음주운전으로 이유 없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이 따르는지 아십니까. 국가에서 좋은 제도를 만들지만 지킬 때에는 자유가 있지만 그것을 지켜지지 않을 때에는 적절한 제한이 있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희년 제도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불과 안식년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불과 6년 만에 이 땅의 주인은 내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가나안 땅을 주셨는데 정확하게 분배해서 기업을 주셨는데 몇 년 만에 안식년이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이 땅의 주인은 나라고 끝나버렸습니다. 땅의 주인이 인간이 되어서 살게 되면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 병든 자를 도우라는 메시지가 들리겠습니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살라고 선택받은 민족의 사명을 잊어버렸습니다. 더 모으고 더 채우고 끝도 없이 욕심을 부리고 살다가 결국 죽는 어리석은 인간의 세계를 하나님이 아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희년의 제도를 왜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 왜 주셨을까요? 희년제도를 시작하는데 요벨이라는 단어. 큰 나팔을 다 불어라. 희년제도를 시작하면서 이스라엘 전체에서 동시에 큰 나팔을 불어라. 첫 시작이 대속죄일로 시작합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짐승의 피로 우리의 죄를 회개하면서 희년제도가 시작이 됩니다. 희년제도를 시작하는데 대속죄일로 시작한다는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을 알고서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큰 나팔을 붑니다. 그 때 자유가 공포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가족에게 돌아가도록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잃어버렸던 것을 회복하고 종에서 풀려나고 이런 엄청난 자유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본인 스스로 의지적으로 한 번도 지키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앗수르의 포로가 되고 이방의 강력한 군대에 포로가 되었을 때에 어떤 노력을 해도 그 포로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에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 긍휼을 구해서 고국으로 돌아간 경험을 통해서 희년을 간접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설명을 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느혜미야 때입니다. 이것이 희년인 것입니다. 노예가 되고 포로가 되었을 때에 우리의 힘으로는 포로에서 벗어날 수 없었는데 완전히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욕심 부리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이름까지도 빼앗겨 버렸습니다. 마치 일제 시대에 우리의 이름이 개명되듯이. 그 때 안식을 찾고 회복했을 때에 하나님이 희년이라는 것을 다시 주셨습니다.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라.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다시 성전을 지어라.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해라. 이것이 느혜미야입니다. 이것이 희년을 잠깐 설명하신 것입니다. 진짜 희년을 초대교회 때에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께서 마가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에게 임하셨을 때에 그들에게 진짜 기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고 기뻐서 모든 재산을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교회에 헌금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서로 먹고 마시는 것으로 욕심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희년을 방해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이 죽이셨습니다. 성령으로 한 공동체를 이루고 은혜의 공동체를 이루는데 방해하는 것을 하나님이 제거하셨습니다. 그런 공동체가 되어야만 교회가 강력한 사단의 나라를, 흑암의 나라를 이길 수 있기 때문에 잠깐 희년을 영적으로 설명하셨습니다. 희년은 하나님을 떠난 죄인으로 쫓겨난 저와 여러분들을 그리고 죄에 종노릇, 세상에 종노릇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을 건지시고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은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희년은 우리말로 구속입니다. 구속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의 자녀에 속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완전한 구속함을 얻을 때에. 어떤 신학자는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입성하던 그 때를 희년이라고 설명하기도 하지만 맞는 말이지만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그리스도로 완전한 자유함을 얻는 희년, 기쁨의 해가 더 맞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장례예배 가면 천국에 갔는지 안 갔는지 불분명할 때가 많습니다. 목사님, 저의 아버지가 영접을 하시긴 하셨는데. 저의 어머니가 교회를 2번 정도 가시긴 하셨는데. 확신이, 기쁨이 없습니다. 진짜 천국에 입성했는지 천국 환송예배가 되는 경우가 많지가 않습니다. 고쳐야할 문화입니다. 그만큼 신앙생활을 하나님 앞에서 희년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예수님을 만나 내 인생이 구속함을 받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천국 입성에 대한 기쁨이 없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희년을 보고 뭐라고 하냐면 너희에게 희년은 거룩함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희년이 우리에게 거룩함이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49년 동안 세상에서 농사를 짓고 사업을 하면서 어그러졌던 삶. 종이 되기도 하고 부자가 되어 하나님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불균형하고 엉망진창이 된 삶을 희년에 회복시켜 주시기 때문에. 희년은 무엇으로 회복할 수 있느냐. 이 땅의 주인 하나님이십니다. 더 이상 그런 행위들을 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것을 먹겠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그릇된 것을 원상 복귀시키겠습니다. 무엇으로만 가능한가요? 그 때가 우리가 거룩함이 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희년을 경험한 사람이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로 완전 자유함을 얻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희년이 되십니까. 예수님으로 우리가 완전히 구속함을 얻어서 우리의 인생이 희년이 되었습니까. 희년을 경험한 적이 있으십니까. 거룩함은 교회를 잘 다니는 것인가요.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인가요. 전도를 많이 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예수님을 내 마음에, 이 땅에, 내 인생의 땅에 주인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신가요?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_레위기25:10-11’

 

너희가 예수님을 만나는데 불순물들, 세상의 것들을 첨가시키면 안 된다. 희년은 온전히 거룩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입니다. 잘 믿기지 않겠지만, 그래도 집은 있어야 하고 그래도 직업은 변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49년 동안 그것을 갖추도록 기간을 허락하셨지만 왜 6년에 한번씩 안식년을 우리에게 주셨고 49년에 한 번씩 희년을 우리에게 주셨냐. 희년이 아니면 영원한 구원은, 천국에 입성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 땅의 어떤 것으로도 공허함 허무함을 채워주지 않습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에,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_이사야61:1-11

 

누가복음에 예수님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자들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리라. 그래서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 된 자를 자유하게 하고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희년은 육신적인 해석으로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죄의 포로가 되고 마귀의 종노릇하고 지옥의 권세 속에서 억눌러 살고 있는 영원을 자유하게 하십니다. 무너지고 어그러진 인생을 하나님 앞에 다시 세워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우리의 인생은 희년이 되는 것입니다.

 

. 우리가 꿈꾸는 희년공동체_요한복음13:14,베드로전서4:8-11,야고보서5:13-20

작은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작지만 결코 헛되지 않은 일이어야 합니다.

문제와 환경, 상황에지지 않도록 결단해야 합니다.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며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희년 공동체를 꿈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육신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를 보면서 소망을 가졌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충만해져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해졌을 때에 하나가 될 수 있구나. 가스펠 공동체. 거기에 갔더니 서로 간에 비꼬는 말도 없고 위 아래 훑어보는 것도 없고 서로 겸손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 앞에서 신앙을 가르쳐주고. 그것이 우리가 진짜 예수님을 만날 때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교회 공동체 안에 리더가 되고 지도자가 되었을 때에 성령이 충만한 상태 일 때 교회는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씻어 줄 수 있고 발을 씻어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면서 모범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가서 같이 식사를 하고 병든 자의 보호자가 되어주시고 단지 사랑해라 라는 말이 아닙니다. 봉사자로 살아라가 아니라 영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 영적으로 고아가 되었고 하나님이 주신 기업들을, 12지파에게 주신 기업처럼 원래 인간에 준 권세와 축복들을 사단에게 빼앗기고 가난하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공허하고 허무하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천국을 바라보면서 기쁨으로 살아야 하는데 기쁨이 재가 되어서 슬픔으로 살고 있는 우리의 인생. 예수님이 오셔서 다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회복된 자들이 이 교회는 희년 공동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_요한복음13:34-35’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_베드로전서4:8-11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그는 찬송할지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할 것이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임이라_야고보서5:13-20

 

우리의 희년 공동체는 이런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병을 우리의 질병을 엘리야처럼 연약한 자이기에 서로 기도를 부탁하고 서로 도움을 구하고 서로 사랑할 때 우리의 죄가 덮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실제입니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실제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말뿐입니다. 사랑을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를 경험해보지 못했습니다. 희년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꽤나 실천적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첫 번째가 성경읽기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에 희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경 속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경 속에 계십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으신가요? 예수님과 동행하고 싶으세요? 그러면 성경으로 가십시오.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 희년입니다. 성경으로 돌아가서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우리가 모았던 것들 억압하고 붙잡고 있던 것들을 다 놓아주는 것. 반대로 잃어버린 것들, 빼앗겼던 것들, 실수로 종이 되고 노예가 되었던 삶들. 성경으로 돌아가면 다 회복 될 수 있습니다. 확신합니다.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팁을 드리겠습니다. 작은 일부터 시작하세요. 얽매이지 마세요. 올해 성경 일독해야지. 어제까지 성경 한 장도 안 읽던 분들이 성경 일독하겠다고 덤비면 성경 일독 하지 못합니다. 작은 일부터 시작하세요. 성경 일독에 얽매이지 마세요. 하루에 한 장 읽고, 못 읽었다고 포기하지 말고 또 한 장을 읽고.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가까이 두세요. 침대에 두고 화장실에 두고 차에다가 두십시오. 저는 그래서 성경이 여러 권입니다. 늘 가까이 책과 성경이 있습니다. 작은 일이라도 헛되지 않는 일이어야 합니다. 성경 읽는 것을 헛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절대 지속해서 성경을 읽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읽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희년이 된다는 믿음으로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런 결단과 다짐으로 성경 읽기를 시작하셔야 합니다. 작은 일이라고 해서 헛되거나 별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로 작지만 가치가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을 읽고 지키고 행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을 읽어 가는데 반드시 문제를 만나고 수많은 상황과 상황이 여러분이 못하도록 방해 할 것입니다. 성경 읽었더니 회사에서 잘리기도 하고 부부싸움을 하기도하고 안 좋은 일이 벌어집니다. 지지 않도록 결단하세요. 그 상황과 환경에 내 의지와 결단이 잃어버리지 않도록 미리 장치들을 다 하십시오. 없다면 이 고난의 길을 뚫고 지나갈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며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관해서 관심 없습니다. 늘 학원에 만들어준 요약본을 들고 다니면서 공부를 합니다. 암기력이 좋아서 잠깐 시험성적이 좋을 수 있지만 훌륭한 삶을 살 수 없듯이 성경을 읽는 것은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인생에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성경 읽기뿐만 아니라 우리의 인생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탕주의, 허무한 꿈은 꾸면서 자기의 삶은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일부터 시작을 해야 하고 그 일에서 기쁨을 얻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희년 제도는 너무 중요한 메시지이지만 이 희년은 예수님을 만나는 해입니다. 그래서 자유함을 얻는 해이고 하나님께 구속되고 이 땅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다시 깨닫는 해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해이고 마귀의 종노릇했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해입니다. 이 희년이 여러분의 인생에도 있기를 원하고 우리 공동체가 그 구원의 은혜, 그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의 사랑과 용서, 기도로 말미암아 희년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에 자유를 말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얽매였던 사람들을 건져주고 가난한 자들 건져주고 병에 걸린 사람들을 끄집어 주고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NGO 사역도 해야겠지만 영적으로 그런 메신저의 삶을 살아야 하고 제사장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규칙적으로 우리에게 희년과 안식년의 제도를 주신 것처럼 주일마다 시간표마다 예수님 앞에 설 수 있는 축복들이 있기를 원합니다.

 

문의 / 윤덕현 전도사 010.9899.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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