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01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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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검임이니라 |
본 문 |
이사야 11:1-9 |
오승주 목사
Ⅰ. 이새의 줄기에서 나실 예수 그리스도_이사야11:1
이사야서 말씀은 이사야서 자체는 구약에서도 굉장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신구약을 연결하는 브릿지 역할을 한다고 이사야서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푸는 키도 이사야고 신약을 푸는 키도 이사야라고 신학자들이 이사야의 위치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은 엄청난 율법에 대한 내용인 것 같고 갑자기 신약으로 넘어와서 전혀 다른 은혜라든지, 복음이라든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사야를 통해서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것이 이사야서의 위치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말씀들이 왜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지 우리를 이해시켜 주는 성경이고 신약의 말씀들이 왜 구약이 없이는 신약이 풀리지 않는 것인데 이사야서를 통해서 조금 더 확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에 가장 많이 인용된 구약이 이사야서이고 그래서 이사야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이사야서 공부를 다 하고 나면 신구약을 보는 눈들이 조금씩 열려 있을 것이라고 확신이 되고 이사야 설교가 끝날 때쯤 되면 구약을 보는 눈 뿐 만 아니라 신약을 보는 눈도 같이 열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사야서를 같이 나누는 동안에 많은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신실하심을 느낄 수 있도록 그런 바람으로 설교를 준비하고 은혜를 나눕니다.
지난 장에 앗수르 침략에 관한 이야기를 하시다가 갑자기 11장에 메시야, 다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끊임없이 이사야는 그런 반복이 될 것입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이 나오지만 본문에 대해서는 중요한 몇 가지들을 찾아볼 것입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_이사야11:1’
이새는 누구인지 다 아시죠? 다윗의 아버지. 이새의 아버지는 오벳이고 오벳의 아버지는 보아스입니다. 다윗의 혈통을 우리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이새의 줄기, 이새라는 단어를 썼을까요? 이새라는 인물에 대해서 성경에 설명이 거의 없습니다. 추측만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이 믿음이 좋다. 이런 어려움에서 기도해서 이런 응답을 받았다. 이런 내용도 전혀 없습니다. 이새라는 인물은 다윗의 아버지라는 정도밖에 나오지 않는데. 우리가 추측해서 이새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새가 그렇게 영적인 지혜가 있어서 하나님과 신실하게 사귀고 교제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울 왕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어떤 범죄를 하였죠? 블레셋 앞에서 블레셋이 두려워서 이스라엘 군대들이 다 도망갔을 때 사울왕은 사무엘 제사장이 오기 전에 자기가 하나님 앞에 먼저 제사를 드려버렸습니다. 그래서 사울왕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고 사무엘 선지자도 그를 버렸고 그리고 새로운 왕, 하나님이 왕을 세우시겠다고 해서 이새의 동네에 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새의 가족들을 다 초대를 합니다. 이새가 아들들을 다 데리고 가는데 막내 다윗은 데리고 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요? 다윗을 기름 부음 받는 것에서 배제를 시켰다는 말입니다. 이새를 이런 것으로 추측해보면 영적이거나 언약을 기대하고 자신의 아이들을 공평하게 본 것 같지 않습니다. 이새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고 이새의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한다. 여기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난다는 것인데 사실 예수 그리스도까지 가기 전에 이런 이새가 배경이 좋거나 집안이 부자거나 신앙이 좋거나 이런 게 전혀 없는 상태에서 여기에서 누가 나왔냐면 이 사람이 인정하지 않는 막내아들 다윗이 이스라엘의 가장 강력한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이스라엘에게는 중요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의 국기에는 별이 있는데 이 별은 다윗을 상징하는 별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훌륭한 왕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비천하고 연약했던 이새, 별 볼일 없던 이새에서 한 싹이 나고 한 가지가 나서 다윗이라는 인물이 나왔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암시하냐면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렇게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어떻게 오셨죠? 궁궐에 오셨나요? 산부인과에서 나셨나요? 우리가 늘 너무 잘 아는 것처럼 말구유에 오셨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헛간 같은 곳, 소가 있는 냄새나는 곳에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아주 비천하고 연약한 환경에서 이 땅에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새의 줄기라는 단어 하나를 기억하고 본문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은 너무너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낮고 미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와, 그리스도가 오셨다. 와, 만왕의 왕이 우리에게 오셨다. 와,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 라며 오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짚고 가야 할 것은 우리의 신앙. 우리의 신앙도 그렇지 않나요? 제가 성경을 보고 하나님 앞에 귀하게 신앙 생활했던 사람들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공통적으로 한 가지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귀히 쓰려고 믿음이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다 빼앗아 가십니다. 우리가 미천하고 비참함. 미천하고 비참함이라는 단어를 우리가 굉장히 싫을 수 있지만 예수님이라는 분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 안에 있는 것들을 다 빼내십니다. 신앙생활의 과정 중에 이 과정이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만왕의 왕이 우리에게 오셔야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우리 속에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정리하는 과정들이 신앙생활에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왜 만나지 못할까? 하나님이 여러 가지 단어로 신학적인 표현을 합니다. 예정론,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 하나님이 구원주시기로 작정된 사람.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작정된 사람은 구원을 주시려고 하시는 사람에게는 이 과정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이 어부였습니다. 당시 어부에게 가장 큰 재산은 그물이었습니다. 그물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에게 신실한 청년부자가 왔습니다. 저도 영생을 얻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네가 가진 재산 다 팔고 와라. 근심하며 갔습니다. 우리의 재산을 팔라는 말이 아닌데 사이비들이 이런 본문을 가지고 재산팔고 오라고 하는데 사이비들이 하는 짓이고 이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 십자가를 통과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작업이 우리 속에 있는 것들, 우리 속에 세상의 것들로 더러워진 마음의 상태들, 가득 채워진 더럽고 추악한 죄들을 끄집어내시는 작업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상징적으로 오신 것입니다. 말구유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도대체 그 예수님이 누구시길래 하나님이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도록 예수님을 모시고 살도록 예수님을 따르도록 하시는 것인가. 성경의 모든 내용이 이렇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가도록, 도대체 예수님이 누구시길래.
Ⅱ.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_이사야11:2-3
‘그의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_이사야11:2’
우리가 ‘성령이 충만하다’라는 단어로 인지하고 있지만 구체적으로 이사야서에 예수 그리스도로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공생애를 사역하면서 하나님이 영을 부어주셨는데 세 종류의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첫째, 지혜와 총명의 영을 부어주셨습니다. 우리가 굉장히 참고하고 가야 합니다. 지혜와 총명의 영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그리스도로 사역하시기 위해서 리더십을 위해서 지혜와 총명의 영을 먼저 받으셨습니다. 지혜와 총명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혜와 총명은 사실 같은 것입니다. 지혜는 내적인 것이라면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겉으로 외적으로 총명이 드러나게 됩니다. 지혜와 총명의 영을 받았다는 것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혜와 총명이 있는 사람들은 주변의 환경이나 상황이나 사건에 휘말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를 가진 사람은 앞의 것을 보는, 전체를 보는 비전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적인 감정이나 사람의 관계나 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뚜렷하게 보고 확인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은 위기를 벗어날 수 있고 어떤 사건 속에서 여유가 있고 중요한 일들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 지혜를 가진 사람을 총명하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해야 할지 자기의 목적을 잃어 본적이 없습니다. 목적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말이나 환경에 흔들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지혜가 필요합니다. 천국을 봤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 와서 이 백성들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해야만 이 이 백성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분명한 목적이 예수님에게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의 영이 무엇이냐면 모략과 재능의 영입니다. 모략과 재능도 같은 말입니다. 모략과 재능은 무엇입니까? 이 지혜, 다시 말해 지혜로운 계획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지혜만 가지고 있는데 실행하지 않으면 지혜가 아니겠죠.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시는 사복음서를 읽어보니, 제가 시편, 잠언 다음으로 많이 읽는 것이 사복음서인데 사복음서를 쉬지 않고 읽고 있습니다.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지혜와 총명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는데 그 것을 실행할 능력이 예수님에게는 있었습니다. 모략.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공생에 사역이 전략적이셨습니다. 단 하나 허투루 그냥 되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땅에 가는 것도 전략이 있으셨고 세리와 같이 밥 먹고 창녀와 고아들을 찾아가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고 그 어느 것 하나 예수님이 생각 없이 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시려고 하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고 예수님이 그렇게 가서 사람들에게 침 뱉음 당하고 모욕당하는 것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재능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여러분, 지혜가 있는데 지혜를 실천하려면 재능이 있어야 합니다. 실력입니다. 달란트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모략과 재능의 영을 받으셨습니다. 믿음이 있는데 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반쪽 믿음입니다. 모략과 재능은 행함입니다. 예수님은 최고의 모략가였습니다. 지혜와 총명을 어떻게 발휘하셨는지 사복음서를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자신을 내어줌으로 죽음으로.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예수님 바보 같다. 왜 손해를 보고 살지. 실패한 거 아니야? 예수님은 완전 전략가였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서 삼십 배, 육십 배, 백배의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사단이 발 앞에 무릎 꿇는 비결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과 어울리고 종교지도자들과 어울리면 훨씬 편하게 살 것이지만 그것으로는 세상에 구원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 고 있었습니다. 그것으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세상에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으로는 사단을 이길 수 없고 어둠의 세력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지셨습니다. 완전 모략가이십니다. 판을 뒤집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받는 영이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은 3절초기에 한 번 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_이사야11:3’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은 예수 그리스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 이 영이 중요하냐. 지식.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기 때문에 여호와를 경외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총명,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모략과 재능으로 실천하신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거룩함과 연결이 되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경외함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독립적 일 수도 있으셨습니다. 하나님이신데 독생자 아들로 이 땅에 오셔서 굳이 아버지 하나님께 경배하거나 기도하거나 하지 않아도 다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삼위의 하나님이시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는 동안 늘 아버지를 경외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원대로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피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영을 심지어 즐거워하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사역, 우리의 모든 인생이 사역을 잘하거나 그것을 해낼 수 있는 모략과 재능이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상관이 없다면 하나님의 거룩함과 상관이 없다면 다 물거품이 됩니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셨다.’ 라고 기록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세 영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많은 신자들이 성령충만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제가 그럼 물어봅니다. 성령충만을 위해서 왜 기도하는지 물어보면 잘 모릅니다. 성령 충만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성령이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두루뭉술한지. 대충인지. 습관적인지. 오늘 이 말씀은 우리 많은 크리스천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어떤 영이 필요한지. 그 말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부족한 모습, 우리의 단점, 우리의 연약함을 사람들이 잘 공개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영적으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이 부분을 매우 잘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예수님이 우리 속에 함께 계시거나 예수님을 닮아가거나 예수님을 따라 사는 신실한 믿음의 삶이 되지 않냐면 사실 우리가 그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시고 따라가고 닮아가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사역을 하시고 실제 십자가에 지시는 과정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럴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라. 우리가 왜 십자가를 안 지냐면 예수님을 따라갈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어떤 단점들, 약점들을 객관적으로 펼쳐서 살펴보고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간구하는 신앙이 구체적으로 없는 것입니다. 맨날 성령 충만 달라고 하면서 성령충만과 아무 상관없는 행동을 한단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혜가 필요한지 모략이 필요한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필요한지 매우 주위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왜 오셨는지 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 공의로 심판하실 주님_이사야11:4-5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_이사야11:4-5’
이것은 앞부분과 뒷부분이 조금 다릅니다. 4절 앞부분은 공의로 가난한 자들을 심판하며 정직으로 겸손한 자들을 판단하신다고 했는데 이것은 가난하고 겸손한 자를 나무란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을 평가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심판과 판단은 좋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가난은 경제적인 가난이 아니라 내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인데 그리고 여기에서 겸손은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인데 이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판단이 되는 것입니다. 너희가 잘했구나. 인 것입니다. 그러나 뒤에는 다른 말입니다. 이 판단도 하나님이 그냥 3절 하반절에 보니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않고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속지 않으십니다. 바리새인들을 보고 속지 않으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을 판단하거나 심판 할 것 같으면 최고의 상금, 최고의 면류관을 받아야 할 정도로 출중했지만 결국은 하나님은 속 중심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를 보니까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여기에서 세상을 친다고 합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악인들에게는 이미 죽음입니다. 겸손한 자와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은, 예수님이 오셨을 때에는 위로가 되지만 악인들에게 세상은, 이 악한 세상은 막대기로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우리를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것으로만 온다고 생각이 되지만 사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심판 주로 오신 것입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가난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내 영혼이 매우 가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혼을 세상의 것들로 채우지 마세요. 우리의 마음을 세상의 것들로 더럽히지 마세요. 그래서 주님이 왔을 때, 주님이 다시 이 땅에 재림하실 때 우리는 이 앞부분이냐 뒷부분이냐 갈라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교만과 오만을 멀리해야 합니다. 시편 1편에도 나와 있고 모든 성경에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최고의 적이 교만과 오만이었습니다. 바로 겸손의 반대말입니다. 하나님이 악인들은 입술의 기운으로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만과 오만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멸망하게 되어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겸손한 자에게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구원자가 되시는 것이고 은혜의 십자가가 되지만 교만하고 오만한 자들에게는, 세상의 것들로 가득찬 자들에게는 예수님은 심판주가 되십니다. 실제로 악인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바리새인이나 악인들은 예수님이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자기의 체제를 방해하는 것은 사라지고 예수님은 하찮은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는데 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어떤 상태가 되는지 6절부터 기록되어 있습니다.
- 그 때에 이루어질 평화의 나라_이사야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_이사야11:6-9‘
말도 안 되는 것입니다. 말이 됩니까. 어린 양과 표범이 어떻게 같이 있고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어떻게 같이 있을 수 있나요?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었는데 괜찮다고 합니다.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라. 이것을 많은 신학자들이 천국이라고 해석을 하였습니다. 천국은 이런 곳이야. 눈물도 없고 슬픔도 없고 상함도 없고. 독사도 없고 독 있는 짐승도 없다는 것입니다. 맞지만 우리가 장차 죽어서 가야 할 내세도 이런 곳이지만 저는 이 본문이 단지 내세에 가야 될 천국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곳.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난 결실을 맺는 그 결실이 이 것인데 이 본문인데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정말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기독교의 신앙의 아주 독특한 부분인데 세상의 논리적으로 세상의 경제 이념으로 세상의 어떤 흐름으로 문화적으로 어떤 사람이라도 이해할 수 없는 기독교의 독특한 신앙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 얻는 열매의 결실이 오늘 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신앙인들 진짜 이상하다. 왜 손해 보는데 그 길을 가? 왜 힘들게 그 길을 가? 왜 십자가의 길을 가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왜 좋은 것을 다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느냔 말이야. 예수님만 믿으면 적당히 살면 되지 맨 날 교회 가서 기도하고 어느 날은 완전 딴 사람이 되었네. 바보가 되고 멍청이가 되고. 밖에 보았을 때에는. 대표적인 인물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사역하는 모습을 봐보십시오. 그 당시 세상과 전혀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누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갑니까. 누가 세리와 같이 밥을 먹고 죄인들과 같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누가 창녀를 보호하고 고아와 과부들을 찾아가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하셨습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지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겼는데 충격적인 사건이라고 합니다. 그 당시에는 중동입니다. 발에 기능성 신발을 신고 다는 것이 아니라 샌들을 신고 다니던 시절이니까 발에 흙이 붙어있는데 그래서 집에 가면 항상 집이 발을 씻고 들어가는 구조가 되어 있는데 그 발을 씻겨주는 하인은 집에 있는 하인 중에서 제일 미천한 하인이 하는 것이 발을 씻어준다고 합니다. 제자들보고 발을 씻겨 줄게. 했을 때 제자들이 거부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그러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섬기는 것처럼 너희도 세상을 섬겨라 너희 영혼들을 섬겨라. 완전 역설적이지만 거기서 끝났으면 좋은데 예수님이 심지어 침 뱉음 당하고 강도나 악질 죄수가 달려서 죽는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득이 있습니까?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으로 세상을 뒤집으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따르게 되었고 수많은 죄인들이 살 길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그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로 우리가 지신다는 의미는 부부사이에도 해당이 되는 것이고 부모자녀사이에도 해당이 되는 것이고 교회 공동체 안에도 해당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은 논리적으로 따박따박 남을 굴복시키면 굴복되는 줄 알지만 무기와 재산과 지식으로 굴복시킨다고 그것이 굴복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이 굴복이 안 되는데 내 앞에 그냥 고개를 숙이는 것이지 내가 논리를 가지고 누르는 것이지. 마치 바람과 태양이 저 외투를 누가 빨리 벗게 할까 처럼 굴복시킨다고 해서 굴복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기독교가 마치 굴복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논리 정연한 메시지들, 프로그램들, 교회가 얼마나 최첨단인데. 세상은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내 남편은 그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우리의 자녀들이 부모의 신앙을 보면서 그걸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메시지 잘하고 따박따박 논리적으로 잔소리 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주님을 사랑한다면. 저는 개척초기에 뚜렷한 교회를 설립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개척멤버들은 다 아실 것입니다. 제가 개척할 때 저희 개척합니다. 기도해 주세요 하면서 카드를 하나 만들었는데 그 카드에 글을 하나 썼습니다. 그 카드에 쓴 글의 제목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저는 이것이 지금도 해당이 되고 젊은 목사인데 왜 야망이 없겠습니까? 왜 욕심이 없겠습니까? 잘하고 싶고 명예롭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그런데 그 길로 가면 망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이 아닙니다. 그래서 제 신앙의 밑바닥에 흐르는 것은 우리의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사랑하고 내일 더 사랑하고. 실수하면 그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 때문에 다시 회복이 되고 정신이 차려지고. 그 주님을 내 구주 예수로 사랑하는 것 속에 영혼도 바라봐지고 지혜도 모략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그 속에서 얻게 되었습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하는 것이. 놀라운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게 사람을 살렸습니다. 교회는 그래야 합니다. 신앙인은 세상에서 그런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서 바리새인과 어울려서 줄 잘 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가 중요합니다. 은혜는 이상하게 사람들을 변화시킵니다. 은혜는 이상하게 실력이나 능력이나 논리로 세상을 굴복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1960년대 간증인 것 같은데 어떤 목사님이 가난한 동네에 목사가 되어서 천막을 치고 개척을 하셨습니다. 교인이 한 명도 없어 전도를 해야겠는데 그 동네에 가장 소문난 가난한 집, 문제 많은 집을 찾아갔는데. 그 집이 어떤 집이냐면 찾아 남편이 술주정뱅이인데 술만 먹고 오면 생활하수 오수를 모아놓은 곳에 빠진다고 합니다. 하는 일이라고는 똥물에 빠진 것 시켜가지고 데려다 놓고 이런 것인데 그래서 동네 사람들 창피하지, 그리고 아이는 7-8명이나 낳아서 하루에 한 끼 먹는다고 합니다. 이 목사님이 이 집을 전도하러 간 것입니다. 가서 예수님 믿으면 지옥안가고 천국갈 수 있습니다. 라고 하니 아주머니가 하는 말이 지금 내가 사는 것이 지옥이다 고 했다고 합니다. 복음이 안 먹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돌아와 생각해보니 지옥 같은 삶을 살 수 있겠구나. 그리고 기도하다가 찾아갔다고 합니다. 이번에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옥 같은 삶을 살고계시죠? 그런데 내가 한 분을 소개 할 것인데 그 분을 따라가면 이 삶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저를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처음 데리고 갔습니다. 천막 교회를 보고 그 아주머니의 첫마디가 네 팔자나 내 팔자나. 이렇게 이야기를 하셨다고 합니다. 거기서 아주머니가 마음이 녹아서 네가 나나 똑같네. 나도 네 힘이 되어줄게 해서 첫 성도가 된 것인데 그 분과 밤낮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있으면 남편이 꼭 술 먹고 와서 깽판치고 그런 세월을 보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그렇게 기도하다가 성도들이 한명 두 명 돌아오고 그 술주정뱅이가 술 먹고 어찌됐든 교회 와서 예배를 듣는데 드러누워 자고 깽판치고 자고. 남편이 예수님 믿고 장로가 되고. 지금 현재 장로님, 권사님이 되셨고. 자녀들은 4명이나 목사가 되었고 제가 그 간증을 듣는데 그렇지, 우리가 사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세속적인 목적이 아닌 뚜렷한 지혜, 총명, 이 땅에서 영혼을 구원한다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예수님을 겸손과 가난한 심령으로 우리 안에 오시는데 우리 속에 있는 부패한 것들이 더러운 것들이 빠져나가고 예수님으로 충만해 질 때 우리가 어떻게 되나요? 이 때에는 어린 양과 표범이 같이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아서 용서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그랬습니다. 우리는 그럼 어린아이가 되고 순한 양이 되고 하는데 독사 구멍에 손 넣으면 그 사람들은 안 변했잖아요. 우리 물면 어떡해요. 물면 죽어야 합니다. 그것이 핍박입니다. 그러니까 계속해서 그런 논리로만 신앙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Ⅲ.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 물이 바다 덮음 같이_이사야11:9
우리는 9절 마지막 결론이 무엇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냐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_이사야11:9’
물이 바다를 덮는 다는 것은 바다를 보면 압니다. 물이 다 덮었습니다. 밑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공로로 천국에 갈 수도, 근처도 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것이 조금이라도 드러나면 우린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충만해져야 하는데 마치 물이 바다 덮음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가 십자가의 은혜가 우리를 뒤덮는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말처럼 내가 죽고 예수가 사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되는데 내가 물이 바다 덮음같이 은혜가 덮음을 받아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크리스천이 다시 크리스천다워지려면 전도를 센스 있게 프로그램을 통해서 잘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물이 바다 덮음 같은 은혜를 받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변화되어서 신실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면 은혜의 사람이 되면 우리의 자녀들은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인생을 살았지만 우리 엄마 아빠가 정말 예수님을 사랑했구나. 정말 주님을 사랑했구나. 그럼 끝난 것 아닙니까. 그것이 최고의 유산이 아닙니까. 부부사이에 전도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믿지 않는 남편을 전도하려고 하는데 저한테 와서 하는 말이 우리 남편은 맨날 술만 먹고요. 담배만 피구요. 교회 가자고 해도 가지도 않구요. 그런데 말하는 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예수님 믿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집사인데요. 결혼을 잘못 해가지고요. 뭐 이런 식입니다. 결혼을 잘못 했을까요? 남자가 결혼을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왜 들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진짜로 천국을 아는 사람은, 십자가로 죄 문제가 해결된 사람은, 은혜를 받는 사람은 감사하고 감격합니다. 그러면 남편을 볼 때 어떻게 볼까요? 불쌍히 여기죠. 남편이 예수님 믿으면 좋겠는데 이것이 진심이라면 남편을 볼 때 말, 행동 바뀌겠죠. 모략이 생기고 재능이 생기겠죠. 여호와를 경외하면.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물이 바다 덮음같이’가 가장 잘 나와 있는 신약성경이 골로새서입니다. 은혜가 우리의 삶을 뒤덮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를 신약에서 살펴보면 골로새서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 여호와를 아는 지식_골로새서1:6,9-12,23,2:2-3,6-7,3:1-4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_골로새서1:6’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은혜를 깨닫지 않으면 절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_골로새서1:9-12’
예수님께 임했던 영을 말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축복을 주실지 골로새서에 나와 있습니다.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_골로새서1:23’
복음의 소망이 흔들리지 않으면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됩니다. 우리가 흔들리지 않으면 복음은 전파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고 있으면 복음은 전파된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파해서 전파되는 것이 아닙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는 그들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확실한 이해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니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_골로새서2:2-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_골로새서2:6-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_골로새서3:1-4’
예수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실 재림 하실 주님이라는 것을 여러분은 믿으십니까? 주 예수여 어서 오십시오 하고 신앙고백을 하며 살고 있나요? 그렇게 잘 안 살아지죠. 우리 아들 이제 장가갔는데 손주는 보고 예수님이 오셔야지. 공부 한 것이 아까워서 어떤 결과를 내고 천국이 와야지. 우리는 이렇습니다. 구약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세상의 것으로 더러운 것으로 속에 가득 차서 예수님이 자기 땅에 왔는데 외면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마라나타. 재림주로 이 땅에 오실 때 우리가 계속 땅의 것을 찾고 살면 그 분이 주님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악인은 악인을 죽일 것입니다. 심판은 바로 죽는 것입니다. 평가하지도 않으십니다. 평가는 잘하는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라_골로새서2:20-23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_골로새서2:20-22’
세상이 영원한가요? 세상의 흐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문화의 흐름. 어떤 전략. 세상이 말하는 것들. 맞습니다. 세상에 살기 때문에 필요합니다. 우리 아이들도 영어도 배워야하고 중국어도 배워야하고 세상에서 실력 있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것은 한때 쓰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포함해서 지혜와 총명을 가져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_골로새서2:22-23’
예수님을 따라간다. 그것은 완전 다른 것입니다. 세상의 논리, 세상의 학문, 이해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교회가 언제 부패하고 타락하는지 아시나요? 예수님을 따르지 않을 때. 언제 회복하는지 아시나요? 예수님을 따를 때. 이것이 교회사입니다. 이곳에 가장 큰 걸림돌은 교만과 오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에 초등학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것으로 하나님의 것을, 땅의 것들로 위의 것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물에 바다 덮음같이 우리가 은혜를 왜 못 받나요? 논리적인 것 같고 세상의 흐름에도 맞아야 하고. 이런 것들 때문에. 새벽에 눈물로 기도하는 것. 논리적인가요? 이 바쁜 시대에.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이 논리적인건가요? 하루라도 더 좋은 가서 놀고먹고 해야 하는데. 우리가 하루에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 세상의 흐름에 맞는 거냐는 것입니다. 아니잖아요. 그들이 보았을 때에는 바보 같은 것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바리새인과 어울려야 이 땅에 왕의 노릇을 할 수 있고 줄도 잘 서야 하고.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어울리고 이 땅에 아부하고 로마 군인들과 잘 지내고. 그런 마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목적이 거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임금이 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기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모략이 달랐습니다. 전략이 달랐습니다. 우리의 교회가 저는 목사이니 교회를 섬기는 목사니 고민이 많겠죠? 저도 세상에 노출되어서 살아가니 얼마나 갈등이 많겠습니까. 그래서 저를 위해서 많이 기도해주셔야 합니다. 장로님들을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해주셔야 합니다. 교회가 순간순간 선택하는 것들이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지 정말 주님을 사랑해서 교회가 이 땅에서 존재하는 목적과 그 비전을 잃지 않고 위의 것을 찾으며 가지 않으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둠을 이길 수 없고 재앙과 저주를 이길 수 없습니다. 판을 뒤집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왜 가난한 자를 찾아가지고 골방에 산에서 기도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나중에는 십자가까지 지셨습니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렇게 능력 있는 분이 죽은 사람도 살리실 수 있는 분이 왜 저 길로 갈까? 우리가 정말 신앙에 실력을 가졌다면, 신앙에 실력이 없으면 그 길로 가지도 못하겠죠. 우리가 정말 신앙에 실력을 가졌다면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는데 그것이 이 땅의 어둠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물의 바다 덮음 같은 충만하게 되는 것. 영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물이 바다 덮음 같이 덮을 때 그래서 교회는 은혜가 멈춰지면 안 됩니다. 은혜 받는 것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제가 부탁하는 것은 이 주일의 설교가 우리의 삶의 방향이 될 수 있겠지만 목사는 타락하고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 따라가시라고 성경 읽으라고 예수님 따라 가시라고 제도적으로 시스템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왜 성경을 읽어야 합니까? 성경을 읽으면서 체크하는 것이 쉽지 않으시죠? 하다가 바쁜 일이 있어서 안 하고 다시 하려니 부끄러우시죠. 그래도 또 하세요. 부끄러운 것 아닙니다. 바쁘면 못 읽을 수도 있습니다. 또 도전받아 하셔서 성경이 여러분의 벗이 되어야 합니다. 단짝이 되어야 합니다. 내 영혼의 단짝. 주님을 따라가야 하니까.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가야 우리가 살 길이 갈 수 있습니다. 멸망의 길로 가면 안 되잖아요. 그러기 위해서 물이 바다 덮음 같은 은혜. 우리가 주님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이 바다 덮음 같은 은혜가 충만해지도록 주님을 더욱 사랑하는 것. 이것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은혜가 충만해야 원수를 사랑할 수 있고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은혜가 충만해야 내 감정, 내 논리적인 개념으로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충만해야 저들이 우리를 보고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 집안의 모든 어둠들, 어떻게 판을 뒤집을 수 있느냐. 논리적으로 싸우고 경쟁하고 따박따박 옳은 말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변화되어서 헌신하고 섬기고 사랑하고 겸손할 때에 우리의 가정에 신앙의 판이 바뀝니다.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준 이 신앙의 신비는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오늘의 설교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교일 수 있고 힘든 설교일 수 있지만 이 본문은 모든 성도들이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세상에서 승리할 있는 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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