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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10-25 주일예배

2020-10-25 주일예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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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5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본 문

이사야 10:20-34

 

Ⅰ. 앗수르의 침략

 

저희가 예배를 분리해서 드리다 보니까 점심시간에 특별한 활동들을 잘 못하고 제직회, 당회 이런 모임들을 제대로 잘 못해서 이제 교회가 제 기능을 하면서 가는 부분을 두고 여러분이 많이 기도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저희가 오전에 제직회를 했는데 내용에 관해서는 주보에 올리고 성도님들과 기도제목을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오늘 지난주에 이어서 앗수르가 침략하는 장면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성경읽기를 저와 여러분이 같이 하고 있는데 어떤 분들은 성경을 굳이 중요한 성경구절만 알면 되지 중요하지 않은 성경을 꼭 읽어야 되냐 이렇게 말하시는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발언을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필요한 구절이나 아주 중요한 성경구절만 알면 되지 신자들이 굳이 힘들게 성경일독, 이독, 삼독을 평생 할 필요가 있냐고 질문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그런 질문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참 무서운 시대가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성경구절을 내가 필요한 것만, 유명한 성경구절만 끄집어서 보는 이런 교회들도 있습니다. 연초에 헌금함 같은데 성경구절을 적어 넣어서 올해의 말씀을 뽑기 하는 교회가 있기도 합니다. 물론 이제 진노, 하나님의 책망이 있는 성경구절은 넣지 않을 것입니다. 다 축복된 것만 넣어서 뽑을 것입니다. 그거 가지고 1년 동안 점쟁이처럼 사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굉장히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이비 단체에서 그렇게 하면 이해라도 되는데 건강한 교회에서 그런 것을 하더라고요. 심지어 돌잔치 가서도 말씀 뽑기를 하고 있더라고요. 아이의 인생을 거기에 거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것에 적어 넣어야 합니다. 뭘 적어 넣냐면 3-4대가 멸망한다는 말씀을 넣어놔야 합니다. 말도 안 됩니다. 우리가 얼마나 번영신학, 잘못된 신학이 교회 안에 들어왔으며 목사님들이 얼마나 성경에 대해서 무지한지, 하나님에 대해서 무지한지를 단면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물론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어떤 구절들이 내 마음에 부딪혀서 그것을 묵상하고 암송하는 것은 너무 좋은 것입니다. 주제 설교를 신학교 다닐 때 악마의 설교라고 했습니다. 주제 설교는 주제를 딱 정해서 성도들에게 전달하기 때문에 성도들이 듣기가 너무 좋고 원 포인트 메시지여서 듣기가 좋고 클리어하고 목사들도 설교하기가 너무 좋습니다. 그러나 왜 악마의 설교라고 하냐면 그 설교를 전달하는 목사가 타락했을 때 주제 설교는 최악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헌금이 부족하네? 바로 헌금설교 해버리고 우리 교회 중직자들이 내 말을 안 듣네? 바로 내 말을 잘 들을 수 있는 공포에 관한 설교를 하게 됩니다. 주제 설교가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저도 주제설교를 할 때가 있습니다. 특강을 한다든지, 새벽집회를 한다든지, 말씀사경회를 한다든지 그것마저도 사실은 특별한 주제를 가지고 설교하는데 많이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이 성경을 같이 읽어간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욥기 읽으면서 너무 어렵잖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고. 저도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그래서 목사들이 공부하고 배경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성경을 한 번 읽었지 살면서 계속 읽다보면 나중에 설교를 들을 때 너무 좋을 것입니다. 묵상 하는 것이 너무 좋고 그래서 성경읽기를 힘내서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본문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사야서 전체의 흐름 속에서 오늘 본문은 이제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침략에 대한 또 하나의 메시지를 주시는 것입니다. 앗수르가 이스라엘 백성을 침략한다는 것이 이사야 10장의 큰 메시지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도 앗수르의 침략이 다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 아픔, 시련 이런 것 다 있습니다. 우리가 이 땅이라는 곳에서 지구라는 땅 위에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픔, 고통 없이 산 적이 있을까요? 살 수 있을까요? 과연 살 수 있을까요? 우리는 남들은 다들 그렇게 산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성공한 사람들은 아픔이 없을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많이 배운 분들은 아픔이 없을거야. 그렇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사는 누구라도 고통과 아픔이 다 있습니다. 제가 상담을 하면 그럼 상담을 많이 하니까 너무 아프고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프고 고통스러우면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가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안다면, 크리스천이 아프고 고통스러우면 더 주님께 가까이 가야하는데 멈춰버렸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어봅니다. 왜 신앙생활을 안 하세요? 왜 주일에 예배를 안 드리세요? 하면 내가 옛날에는 기도를 이렇게 잘 했는데, 교회를 얼마나 열심히 다녔는데, 내가 얼마나 충성하고 봉사했는데. 대다수의 대답이 이렇습니다. 그런 대답을 하면 저는 상담을 하면서 저희 교회 성도 분들에게는 그렇게 말을 못하지만 모르는 분들이 상담을 하면 딱 잘라놓고 이야기합니다. 교회 열심히 다니셨는데 얼마큼 구체적으로 열심히 다녔는지 설명해보라고 합니다. 주님을 진짜 사랑했대요, 주님을 사랑한 것이 얼마큼  정확히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했는지 말해보세요, 교회를 너무 사랑했대요, 도대체 얼마큼 사랑했는지 말해보세요 라고 하면 열  중에 아홉은 말을 못합니다. 왜냐면 인간은 자기 과거를 기억하고 떠올릴 때 내가 잘한 것만 기억하게 되어 있습니다. 조금 했을 것입니다. 성경도 1년 읽어보셨을까? 조금 읽었는데 내 과거는 늘 성경만 읽은 과거만 머릿 속에 남아 있고 기억납니다. 내가 잘 못한 것은 기억 하지 않고 내가 조금 잘한 것은 크게 부풀려서 이야기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자기가 어쩌다 한 두번 잘한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왜 나만 고통이 있냐고 합니다. 왜 나만 아픔이 있냐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과거에 만약에 하나님을 사랑했다, 뜨겁게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것이 축복인데 그 사람은 그것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멈춰버리고 자기가 변화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버렸습니다. 그럼 하나님도 그 사람에게는 변하시는 것입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이시지만 그 사람에게는 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겪고 있는 아픔, 고난, 고통은 사실 다 내가 만들어낸 것이고 우리 인간들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흔히 아픔이라고 하는 이 지구의 아픔들 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 아닙니까? 환경 문제, 전쟁,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삶의 수많은 아픔들은 전부다 인간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도시와 세대를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아픔들 전부 사실은 남이긴 하지만 인간이 만든 것입니다. 어설픈 기독교인들, 목사들이 그것을 마귀, 사단 탓을 합니다. 마귀도 참 억울합니다. 무슨 일만 있으면 다 마귀가 잘못했다고 합니다. 맞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뚜렷하게 경배하고 온전케 섬겼다면 걔네들의 유혹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어떤 이들은 아픔을 벗어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봐도 안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통을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저는 정말 묻고 싶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는가? 제 이야기를 해봤자 별 도움은 안 되지만 제가 저희 집을 봤을 때 진짜 가난했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냐고 물어보는데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저희 부모님 돌아가시고 나니까 빚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 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남의 집에서 일하시고 품 팔아서 팔남매를 키우셨습니다. 배우지 못하셨고 아버지는 힘드시니까 아버지는 늘 그렇게 사셨습니다. 저도 어머님이 마흔 여섯에 저를 낳으셨는데 병원에서 낳으신 것이 아닙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산부인과를 가보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그것도 기적입니다. 저희는 첫째, 둘째 낳을 때 산부인과를 얼마나 많이 갔는지 모르는데 저를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다가 나셨다고 합니다. 제가 태어난 것도 기적이고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사실은 기적입니다. 어린 시절은 늘 어떤 마음으로 제가 살았던 거 같냐면 남들이 늘 부러웠던 그런 아련한 마음으로 살았던 거 같습니다. 늘 남들이 부러웠습니다. 소풍을 가도 친구들이 부럽고 학교를 가도 친구들이 부러웠습니다. 늘 제 처지와 비교가 되니까 늘 부러운 시선으로만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진짜 감사한 것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제 삶의 태도가 바뀐 것은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소망이 생겼습니다. 성실하게 살아야겠다. 배경도 없죠, 특출난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죠, 제가 박사를 할만한 머리가 있는 것도 아니죠. 제가 설교 준비 하는 것을 보시면 불쌍할 것입니다. 머리가 나빠서 다 살펴봐야 합니다. 머리가 좋아서 구조를 잘 만들어서 여러분들에게 원 포인트 메시지를 깔끔하게 하면 좋겠는데 그것을 해보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릅니다. 잘 안 됩니다. 제가 설교준비를 하는 것을 오픈 되어서 보신다면 불쌍하고 짠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다 말 한마디 다 기록해서 이것을 보고 하면 또 실력 없어 보일까봐 오늘 새벽까지 또 읽고 소화하고, 소화해서 틀리지 않고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 저니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성실, 진실, 열심히 사는 것 이런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망이라는 것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소망이 우리 삶에 현실이 되려면 소망을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도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이 내 것이 되고 내 삶의 것이 되려면 그 사랑을 살아내야 합니다. 믿음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이라는 것을 주셨습니다. 엄청난 선물로 믿음을 주셨는데 이 믿음이 내 삶의 것이 되려면 믿음을 살아내야 합니다. 상담했던 친구처럼 멈춰버리면 열매가 없습니다. 열매라는 것은 신앙인들을 보고 인과응보를 바라보고 살라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믿고 천국을 믿는다면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정직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되고 신실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는 그 순간까지 그래야 합니다. 하나님께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가까운 가족에게도 그래야 하고 내 아내와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저는 그것이 크리스천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목사가 돼서 방황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해외도 돌아다니고 강의도 불려 다니고 속된 말로 젊을 때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진짜 신기한 것은 그때 제가 제일 타락했습니다. 저는 제가 괜찮은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하나님이 어떤 사건을 통해서 말씀으로 제가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건을 주셔서 기도하러 갔는데 그때 하나님 말씀으로 성령의 충만함으로 제 삶, 내 안을 들여다보니까 내 속에 죄가 가득했습니다. 더러운 것이 가득했습니다. 회칠한 무덤과 같았습니다. 하나님께 성실하게 신실하고 진실한 삶을 멈춰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비춰주신 빛, 은혜가 다 멈춰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다 셈하신다고 분명히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과정을 다 지켜보고 계십니다. 옛날에 교회에 가면 할머니 권사님, 장로님들을 새벽예배나 금요예배 때 보면 눈물로 기도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보면 권사님들 삶이 너무 고통스러운, 그 분들의 삶이 너무 괴로워 보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 중에 뭐하고 계시냐면 찬송 부르고 계십니다. 제가 전도사 때 제가 아는 장로님이 암에 걸리셔서 소천을 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아마 제가 그 장로님을 만난 것이 저에게는 되게 큰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장로님이 갑자기 암에 걸리셨습니다. 암 4기라고 합니다. 병원에 계시는데 제가 병원에 가게 되었습니다. 가는 내내 저는 의문이었습니다. 왜냐면 이 장로님이 교회에도 충성봉사 잘하신 분이고 실력이 있는 분이고 진짜 많이 하나님께 헌신한 분인데 갑자기 암에 걸렸다는 것입니다. 가는 내내 저는 의구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괜찮은 장로님이 암에 걸렸지? 제가 병원에 들어갔는데 제가 예상했던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병원 안에서 찬송을 틀어놓고 성경을 읽고 계셨습니다. 제가 앉아서 손잡고 장로님 어떻게 해요, 하나님이 어떻게 장로님께 이러실 수 있어요 했더니 장로님이 제 말을 딱 막으셨습니다. 전도사님 방금 한 말을 취소하세요 이러셨습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왜요? 제가 엄청 당황했습니다. 제 나름대로는 위로한다고 이야기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이러실 수 있어요 그 말을 취소하세요. 저는 하나님 한 번도 원망한 적 없어요. 하나님 날 구원해주셔서 여태 주님 사랑했고 변함없이 주님 사랑했고 저 천국 갈 때 까지 변함없이 사랑하다 갈 거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지 마세요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정말 그때 쇼킹했습니다. 왜냐면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신앙생활은 하늘에서 뭐가 뚝 떨어져서 우리 문제가 해결되고 내 삶에 무슨 기적이 일어나고 질병이 치료되고 가난한 것이 부자가 되고 응답되고 역사가 일어나는 것으로만 신앙생활을 생각했습니다. 장로님의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암 4기에 걸려서 사경을 헤매는데 뭐라고 하시냐면 변함없이 주님 사랑하다 가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신앙이 완전 다릅니다. 우리는 지금 앗수르의 침략, 우리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앗수르의 침략들을 받아들일 것인데 앗수르의 침략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주시는 지 살펴봐야 합니다. 

 

Ⅱ. 누가 앗수르의 침략 앞에 당당할 수 있는가

 

- 그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_이사야10:20-21

 

‘그 날에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야곱 족속의 피난한 자들이 다시는 자기를 친 자를 의지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리니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_이사야10:20-21’ 

 

그 날이면 앗수르가 침략한 날입니다. 자기를 친 자는 앗수르입니다. 오늘 본문에 남은 자들. 남은 자 사상이 구약을 관통하는 사상 중에 하나입니다. 신학 중에 남은 자 신학이 있습니다. 그것이 렘넌트 신학입니다. 남은 자가 영어로 렘넌트입니다. 우리는 렘넌트를 조금 다르게 쓰고 있는데 젊으면 렘넌트라고 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오늘 남은 자에 대해서 정확하게 확인을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것이 사실은 이스라엘의 남은 소수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이스라엘 전체였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인류 전체 중에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전체에 대한 마음이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문맥적으로는 소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은 자는 앗수르의 침략이 왔는데 그 침략 속에서 정확히 표현하고 계십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 혹은 여호와께 돌아오는 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상식적으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못하고 있는 죄인들 때문에 앗수르의 침략을 받으면 짜증이 날 것입니다. 걔네들 탓을 할 것입니다. 너네들 때문에 우리까지 고통당한다고 할 건데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여호와를 의지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는 자가 남은 자라고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 다시 말해서 축복을 받던 앗수르의 침략이라는 고난과 고통을 받던 하나님을 한결 같이 의지하고 그런 수많은 사건 속에서 깨달음을 얻고 여호와께 돌아오는 그들을 남은 자라고 성경은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같은 사람들이겠죠. 평생 고통 중에 찬송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여러분 고통 중에 찬송을 부른다는 말이 얼마나 어패가 안 맞는 말 인줄 아시죠? 고통인데 어떻게  찬송을 불러요? 멍에를 메고 어떻게 기도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인간이 참 특이합니다. 특히 종교적으로는 그것이 증명이 안 되어 있지만 기독교 신앙에서는 너무너무 이해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풍족하고 풍요하면 의지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풍요롭고 풍족하면 주님을 더 의지할 것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을 봐도 그렇습니다. 풍요롭고 풍족하고 행복하면 주님을 더 의지할 것 같은데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침략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누구에게요? 남은 자에게. 왜요? 왜 그런가요? 여호와께 돌아오게 하고 여호와를 더 의지하게 만드니까. 아멘인가요? 앗수르의 침략이 무슨 하나님의 사랑이냐, 축복이냐. 그런데 이 앗수르의 침략에 대해서 오늘 본문 하반절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_이사야10:33’

 

하나님이 앗수르를 몽둥이 삼아가지고 혁혁한 위력으로 앗수르 도시 도시를 침략하는 장면을 오늘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바, 아나돗, 맛메나, 게빔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정확하게 어디 어디 도시들을 정복하는 과정들을 기록해 놨습니다. 앗수르가 우리 이스라엘 침략해야지, 이스라엘 정복해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앗수르 보고 이스라엘을 침략하도록 절대적인 권력으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앗수르의 침략이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라고요? 하나님이 사랑이 아니라고요? 또 증명해보겠습니다.

 

- 작정된 파멸_이사야10:22-23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파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이미 작정된 파멸을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_이사야10:22-23’  

 

여기서 확인하고 넘어갈 단어가 작정된 파멸입니다. 작정된 파멸은 뭐에요? 파멸이 작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변경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파멸이라는 것을 이미 작정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작정된 파멸은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요? 하나님의 공의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를 정확히 공부를 했지만 한 번 더 확인해볼까요. 하나님의 공의를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공정한 의입니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의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판사가 공정하지 않다면 어떻게 되나요? 저 사람 좀 불쌍해 보이네 형을 좀 깎아주고, 쟤는 나한테 어제 김밥 사줬으니까 쟤 형 좀 깎아주고, 좀 친한 사람들은 살짝 봐주고 하면 나라가 개판이 됩니다. 대통령이나 위정자들이나 어떤 크던 작던 지도자들이 공정이라는 것을 잃어버리면 큰일 납니다. 그래서 법치국가가 좋은 나라입니다. 법이 없는 나라들, 왕이 자기 마음대로 하는 나라들, 북한 같은 나라들이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기분 내키는 대로 감정대로 나라를 다스리면 큰일 납니다. 하나님보고 재판장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의의 재판장이라고 하는 것은 공의의 하나님. 그런데 이 공의가 얼마나 무섭냐면 작정된 파멸입니다. 이미 작정하셨습니다. 뭐에 대해서요? 죄를 지으면 파멸이야. 하나님의 기준에 있어서 너희가 죄를 지으면 이런 파멸이야 라고 율법으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변경이 안 됩니다. 우상 섬겼죠,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더 사랑했죠 파멸이 오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가 뭐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나요? 사망, 죽음. 그냥 죽음이냐? 목숨이 죽는 인간의 죽임이냐? 아닙니다. 죄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저는 제가 결정적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계기가 내세가 믿어질 때입니다. 솔직히 이 땅에서 어떻게 되느냐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 잘 되냐 못 되냐는 별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진짜 두려운 것은 내가 죽고 나서 지옥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지옥은 한 번 가면 영원하다고 합니다. 백년 있다가 나오고 이백년 있다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정말 두려웠습니다. 예수님 믿어야 되는 거구나. 죄에 대한 결과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작정된 파멸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앗수르의 침략은 작정된 파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 때문에 오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변경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인은 누구나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이 공의의 결과가 죽음이지만 그리스도인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공의의 결과가 사랑이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왜요? 공의의 진짜 끝은 사랑입니다. 공의 끝, 결정체가 십자가 사랑입니다. 공의 때문에 우리가 다 죽어야 되는데,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 할 수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직접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셔서 그 공의를 그 죽음을 대신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위대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가 죽어야 하는데 그 죽음을 대신해서 직접 본인이 죽어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공의의 결정체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작정된 파멸 속에 북이스라엘과 남유다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작정된 파멸, 이스라엘의 침략을 앞두고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_이사야10:24-27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시온에 거주하는 내 백성들아 앗수르가 애굽이 한 것처럼 막대기로 너를 때리며 몽둥이를 들어 너를 칠지라도 그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오래지 아니하여 네게는 분을 그치고 그들은 내 진노로 멸하리라 하시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채찍을 들어 그를 치시되 오렙 바위에서 미디안을 쳐죽이신 것 같이 하실 것이며 막대기를 드시되 바다를 향하여 애굽에서 하신 것 같이 하실 것이라 그 날에 그의 무거운 짐이 네 어깨에서 떠나고 그의 멍에가 네 목에서 벗어지되 기름진 까닭에 멍에가 부러지리라_이사야10:24-27’

여기에서 시온은 특정한 지역, 유대인에게 특별한 지역이 시온 성, 시온 산 이렇게 되겠지만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시온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모든 신, 구약의 언약의 말씀을 시온이라고 합니다. 시온에 거주한다는 의미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그 말씀 안에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시온이라고 합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말씀입니다. 거기에 거주하는 겁니다. 그런 사람은 몽둥이, 즉 앗수르의 침략에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아니 하나님이 너는 패스해줄게, 너는 몽둥이로 안 맞을거야, 두려워 마 이게 아닙니다. 너도 몽둥이로 맞는데 두려워하지 마 이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웃기십니다. 너도 매를 맞을 건데 너도 몽둥이로 맞을 건데 혁혁한 위력 앞에 가지가 다 쓰러지고 기둥이 다 뽑힐 텐데 두려워하지 마. 그 고통, 그 아픔. 이게 뭘 의미하나요? 잘 들어보세요. 지금부터 하는 설명이 매우 중요합니다. 앗수르를 의지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그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의지하던 소수의 남은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이 앗수르의 침략이 슬프지만 기뻤을 것입니다. 이런 마음입니다. 이 나라 교회가 타락해가고 이 나라가 무너져가고 불법과 부패가 만연해져 가는데 하나님이 심판하시지 않는다? 그럼 진짜 믿음의 사람들에게 이것이 슬픈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심판하시고 이런 징조를 주신다면 그 믿음의 사람은 그 고통을 받으면서도 기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구나. 이것이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내 자식이 부랑자들과 어울리고 강도짓을 하고 그릇된 길을 가면 부모는 어떻게 해요? 가슴 아프고 마음 아프지만 훈계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자식은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엄마, 아빠 내 마음대로 살게 내버려둬. 그런데 부모가 내버려둘 수 있나요? 자식이 언젠가는 깨닫게 됩니다. 그 때 부모가 붙잡아줘서 내가 지금 바른 길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게 남은 자입니다. 철이 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통해서 앗수르의 침략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왜? 안 그러면 앗수르를 계속 의지하고 살아야하고 안 그러면 계속해서 우상을 섬기고 살아야 되고 계속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귐의 관계가 아닌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아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 앗수르의 침략은, 작정된 파멸은 하나님 백성에게는 주님을 의지하게 만들고 아버지께서 다시 돌아가게 만드는 진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십니다. 넓은 들, 산에서 사람들이 예수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듭니다. 떡 다섯 개 ,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적을 베풀고 그러니 제자들이 흥분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왕이 되셔야 합니다. 세상 임금이 되셔야 합니다. 내가 당신의 오른팔, 왼팔이 되겠습니다. 이러고 있을 때, 그런 마음이 들 때 예수님이 이상한 행동을 하십니다. 갑자기 제자들보고 지금 여기 복잡하고 어수선하니깐 너희 먼저 배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 있으라고 합니다. 이해가 안 되죠. 같이 뒷정리하고 가야지. 예수님이 나는 여기 무리들 좀 보내고 기도 좀 하고 갈게 이러셨습니다. 또 제자들은 예수님 놔두고 그냥 갔습니다. 무언가 사건을 벌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저는 너무 이상하더라고요. 예수님 왜 제자들을 먼저 배타고 보내시지. 무리들 뒷정리를 같이 해야지. 그런데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는데 갈릴리 바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갈릴리를 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큰 호수입니다. 이 갈릴리 바다를 배를 타고 가는데 풍랑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큰 풍랑을 만나서 죽게 생긴 것입니다. 두렵고 떨리고 이제 죽었다. 그때 예수님이 바다 위에 풍랑을 뚫고 걸어오십니다.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이 왜 바다를 걸어오시지. 그냥 다 아시는 하나님이 풍랑아 멈춰라 한 마디 하시면 되는데? 아니면 하늘에서 내려와서 배로 바로 점프해서 오시면 되지. 바다를 그냥 걸어오실 실력이면 배로 가서 제자들을 바로 만나서 풍랑아 잠잠해 하면 되지. 아니면 큰 배를 구해서 타고 오던지. 왜 풍랑을 걸어오셨냐 이 말입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유령이다 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그 때 중요한 이야기합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그랬더니 그 중에 수제자인 베드로가 주님 나도 바다 위를 걷겠습니다. 저를 불러주십시오. 바다를 걷다가 빠집니다. 그냥 계속 갔었으면 좋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래서 풍랑이 언제 멈추냐면 예수님이 배 위에 탔을 때 풍랑이 멈춥니다. 사실 이런 본문을 해석할 때 많은 목사님들이 기적의 예수, 바다 위를 걸으시는 예수, 우리 인생에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 풍랑을 잠잠하게 하신 예수님 이렇게 할 수 있겠지만 제가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궁금하고 의문점이 생겨서 자료를 찾아봤더니 그 당시 유대인들의 사상, 세계관, 천국관이 요세푸스의 음부론이라는 책에 있는데 그 당시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그 책을 살펴보니 유대인들의 천국관은 슬픔도 없고 아픔도 없고 잠도 없다고 합니다. 목사님들이 성경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천국관입니다. 그런데 그 유대인들의 천국관 중에 특이한 것이 있는데 천국에 사람은 바다를 다스린다는 표현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료에 보니 유대인들의 세계관 중에 하나가 이 바다에 관한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바다, 물은 악한 영들이 바다 속에 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다가 태풍이 불면 이것은 악령이 역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신화에 관련된 영화를 보면 전부 바다에서 괴물이 나옵니다. 유럽영화를 보면 전부 바다에서 괴물이 나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세계관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요나서에 보면 배타고 가다가 풍랑 만났을 때 그 선원들이 전부 자기들 신에게 기도합니다. 누가 신을 배신했냐고 물어봅니다. 왜냐면 이 바다의 풍랑을 일으키는 것이 악한 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지금 제자들이 풍랑을 만났는데 풍랑 속에 걸어오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할 만하고 두려워할만 합니다. 이것은 굉장한 일입니다. 그 풍랑을 예수님이 걸어서 오시는데 내니 두려워 말라 말씀하십니다. 풍랑이 잠잠해졌습니까? 풍랑 속에 예수님이 계시는 겁니다. 고통 중에 우리를 찾아오신 겁니다. 그 때 베드로가 뭐라고 말합니까. 사실은 개역개정 번역이 저는 잘못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14장 28절 헬라어 원어를 직독한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내니 두려워 말라 그 음성을 듣자말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주님이시거든 물 위로 오라하소서. 이 헬라어 원어를 자세히 살펴보면 물 위를 걷고 싶습니다 나도 주님처럼 물 위를 걷고 싶습니다 나도 기적을 체험하고 싶습니다가 아니라 주님의 음성을 듣고 저 주님께 가까이 가고 싶습니다. 주님 나를 오라고 해주세요, 이 두려운 바다 위를 지나서 폭풍을 지나서 주님께 가겠습니다. 저 좀 맞아주세요 라는 표현이 더 맞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언제 풍랑이 잠잠해졌냐면 배 위에 올라왔을 때. 우리 신앙에 고통과 아픔 어떻게 보면 풍랑 같은 것들은 이 땅에서 계속 되고 있는데 우리 신자들의 기도는 풍랑을 없애주세요, 기적을 체험하게 해주세요. 마치 저의 전도사 때처럼. 아닙니다. 진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풍랑 속에 찾아오신 우리 예수님, 내니 두려워 말라 그 주님께 가까이 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을 내 안에 모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Ⅲ. 인생은 실제 사건의 연속_이사야10:28-34

 

‘그가 아얏에 이르러 미그론을 지나 믹마스에 그의 장비를 두고 산을 넘어 게바에서 유숙하매 라마는 떨고 사울의 기브아는 도망하도다 딸 갈림아 큰 소리로 외칠지어다 라이사야 자세히 들을지어다 가련하다 너 아나돗이여 맛메나는 피난하며 게빔 주민은 도망하도다 아직 이 날에 그가 놉에서 쉬고 딸 시온 산 곧 예루살렘 산을 향하여 그 손을 흔들리로다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혁혁한 위력으로 그 가지를 꺾으시리니 그 장대한 자가 찍힐 것이요 그 높은 자가 낮아질 것이며 쇠로 그 빽빽한 숲을 베시리니 레바논이 권능 있는 자에게 베임을 당하리라_이사야10:28-34’

 

- 실제로 벌어지는 내 주변의 일들 

 

신앙은 우리 인생에 벌어지는 수많은 실제 사건들 속에서 질병이던지 이런 문제, 저런 문제 속에서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개개인의 인생에 펼쳐지겠어요. 쉼 없이 쉼 없이. 다 잘 되기만 하나요? 잘 됐다가 안 되기도 하고 또 안 됐다가 잘 되기도 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런 실제 사건 속에서 내 주변에 실제로 벌어지는 수많은 일들. 그 속에서 우리 신앙인은 어떤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되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꼭 해야 합니다.

 

-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것인가?_요한일서1:1-10, 2:1-5, 3:18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_요한일서1:1-10’ 

 

11월달 추천도서입니다. 꼭꼭꼭 읽어보세요. 요한일서에 보니깐 오늘 제 설교를 결론을 맺을 수 있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을 나중에 읽어보세요. 요한일서 1장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사귐이 있듯이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와 사귀게 하시기 위하여 찾아오셨다고 합니다. 왜 아버지와 사귀어야 하냐? 아버지만 빛이시기 때문에. 아버지만 어둠이 아니시고 빛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와 사귀게 하시는 것. 그 분과 사귐이 있어야 비로소 빛에 거할 수 있고 죄와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이 부분을 자꾸 반복적으로 주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_요한일서2:1-5’

 

2장에서는 아버지와 사귀는 것이 어떻게 사귀는가? 어떻게 빛 가운데 거하는가? 어떻게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와 사귐이 있느냐고 했을 때 2장에 아버지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거기서 계명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주 구체적으로 나옵니다. 계명, 즉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버지와 사귀는 것입니다. 요즘 한국교회나, 지금 시대의 많은 기독교가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곧이곧대로 적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렇게 받아드리면 된다 이런 식으로 설교합니다. 그러나 성경 일점일획이라도 변경하지 말라고, 일점일획도 바꾸지 말라고 합니다. 아를 어로 바꾸지 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요즘 교회들은 이 성경이 그냥 우리 삶의 성공지침서, 행복지침서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열심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이야기입니다. 대부분은 성경이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못합니다. 주일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 찾는데 여보 내 성경 어디 갔어. 이것이 요즘 현실입니다. 우리 교회는 다르죠. 성경읽기 시작하시니깐요. 다행이 핸드폰이 있어서 다행히 교회 오면 프로젝트로 성경구절 띄워주니 성경책이 없어도 부끄럽지 않은 시대이지만 도대체 성경책이 어디 있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시대를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습니다. 즉 아버지와 사귐이 없는 겁니다. 루터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당시에 유명한 말씀을 많이 전했지만 정말 가슴에 와 닿는 말씀이 뭐냐면 우리가 매일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루라도 성경을 읽지 않는 그 날은 아버지와 사귐이 없는 날이다. 성경 읽지 않는 날은 아버지와 상관없는 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100% 내 감정, 내 경험, 내 생각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_요한일서3:18’

 

3장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딱 나옵니다. 무엇에 대해서 입니까? 계명을 지키고 아버지와 사귐을 다 말로만 합니다. 혀로만 합니다. 다들 그렇습니다. 심방을 가면 잠깐 감정적으로 은혜 좀  받고 나면 목사님 제가 충성하겠습니다. 제가 그리스도의 제자가 그럼 다행인데 목사님의 제자가 되어서 인생을 다짐하고 합니다. 말로 혀로는 진짜 지구를 몇 개 만듭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그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행함과 진실함. 그냥 행함이 아닌 진실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도 적용이 되겠지만 부부관계에 문제 있으신 분들 내 아내와 남편에게 진실하게 행해보세요 금방 풀립니다. 내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인생에 수많은 문제들, 어려움들 진실하게 행하면 풀리게 됩니다. 가난 문제, 자녀 문제, 사실은 진실하게 행하면 그 속에 다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다들 말과 혀로만 합니다. 열심히 해야지. 사랑하지. 그래도 내가 좀 하지. 말로만 합니다. 돌아서서 하는 사람 못 봤습니다. 말과 혀로만 하는 겁니다. 성경 읽어야지. 절대 안 읽습니다. 그런데 4장, 5장에 어떤 내용이 나오나요? 왜 인간이 못하는지에 대해서 요한일서 4, 5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적그리스도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의 대적자인 적그리스도가 있다고 합니다. 정사와 권세를 주장하는 영적인 세력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북한에 크리스천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이렇게 모여서 예배도 못 드립니다. 나라와 정사, 적그리스도가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우리가 깨어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적그리스도라고 생각해보세요. 큰 대형교회,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목회자의 사상이 적그리스도 쪽에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무섭습니다. 영향을 미치는 겁니다. 여러분은 분별도 못하고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뭐라고 기록되어 있냐면 요한일서 5장에 기도하라고 합니다.

 

- 기도로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_요한일서5:4-16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이시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언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 증언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은 합하여 하나이니라 만일 우리가 사람들의 증언을 받을진대 하나님의 증거는 더욱 크도다 하나님의 증거는 이것이니 그의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것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나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 아들에 대하여 증언하신 증거를 믿지 아니하였음이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_요한일서5:4-16’

 

깨어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냥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깨어 기도하라고 합니다.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과 사귐을 갖기 위해서 말씀을 지키고 진실하게 행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진실하게 행하지 못합니다. 알면서 못합니다. 왜요?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달라고 요한일서에서 기도하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기도하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읽고 아버지와 사귐이 가지기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뜨겁게 기도해야 합니다. 앗수르의 침략으로 남은 자들은 침략 전부터 기도도 했겠지만 앗수르의 침략으로 더 기도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앗수르가 침략했을 때 신앙을 포기할 법도 하겠지만 반대로 진짜 남은 자들은 하나님을 사랑했던 자들은 앗수르의 침략 때 더 뜨겁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더 여호와를 의지했겠고 여호와께 돌아왔을 것입니다. 이 기도는 우리의 정신을 깨우고 영혼을 깨우고 심지어 우리의 삶도 깨웁니다. 그리고 죄와 싸우고 믿음을 회복하게 만듭니다. 무엇이요? 기도할 때.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을에 5일 동안 새벽집회를 합니다. 이번 새벽집회 때는 기도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들을 나누려고 합니다. 우리 교회가 다시 뜨겁게 기도해야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왜 그 전에는 기도를 많이 강조하지 않았냐? 성경을 읽지 않는 상태에서 예배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도를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기도해야합니다. 무엇을 기도하나요? 축복 받기 위해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아닙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사귐이 깊어지기 위해서, 주님께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주님께 가까이 갈 때라야 우리는 죄에서 멀어질 수 있으니까. 우리가 하는 기도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 기도가 우리 삶을 굉장히 능력 있게 만들어주고 앗수르의 침략 앞에 당당하게 만들어줍니다. 아닌가요. 지난주 설교처럼 우리가 크리스천으로서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하나님 앞에 무엇이 영광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런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저는 그 장로님 돌아가시기 전에 병문안 하면서 많이 느꼈습니다. 와 장로님 진짜 하나님 사랑하네. 암으로 오늘 내일 하시는데 변함없이 주님 사랑하다 가렵니다. 저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도록 기도하고 가세요. 하나님이 왜 이러십니까? 이런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날 나오는데 엄청 부끄럽더라고요. 신앙이 달랐습니다. 이런 분들이 진짜 신앙입니다. 고통 중에 찬송한다고 합니다. 고난 중에 감사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이 되나요. 문법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어떻게 고통 중에 찬송이 나오나요. 그런데 그것이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축복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의 중에 남은 자들, 하나님이 앗수르의 침략을 통해서 주시는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앗수르의 침략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안할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1부 예배 때는 한명이 아멘 하셨는데 그 분도 잘 못 알아듣고 아멘 하신 거 같았습니다. 앗수르의 침략이 여러분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하시기를 바라고 아버지와 사귐이 있는 진짜 신앙생활이 우리에게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맞잖아요. 기독교가 개혁하고 갱신하는 것은 더 번영하고 더 교회가 커지고 세력을 키우는 부흥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세상이 복음화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우리의 거룩함입니다. 그런 앗수르의 침략 속에서 고통과 아픔 속에서 주님을 더 의지하고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 교회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진짜 가스펠교회 설교 이상하다. 무슨 침략이 축복이냐, 고통이 축복이냐. 아버지와 사귐이 있다면 우리가 훗날 천국에 입성할 때 얼마나 좋을까요? 아버지와 사귀는 상태에서 천국에 입성할 때 얼마나 좋을까요? 아버지하고 사귐 속에서 앗수르의 침략 앞에 우리가 당당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세상의 풍파, 죄의 유혹, 수많은 인간이 만들어낸 고난과 고통 앞에 우리가 무엇으로 당당해 질 수 있냐? 주님 내 안에 내가 주 안에 사는 것 아닌가요? 우리가 무엇으로 죄와 마귀 앞에 떳떳할 수 있나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 아닌가요. 하나님이 고통 중에 우리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풍랑 속에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서 내가 너희 구원할까 이렇게 이렇게 헌금해, 이렇게 신앙생활해라. 이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공의의 하나님이, 파멸을 작정하신 하나님이 그 파멸을 직접 경험하시고 그 고통 중에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내니 두려워하지 마라. 앗수르가 너희 침략할건데 너희 두려워하지 마라. 그 평안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그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침략 앞에 떳떳하고 부끄러움 없는 그런 주님의 백성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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