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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10-11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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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1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스불론과 납달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본 문

이사야 9:1-21

 

 오승주 목사

 

Ⅰ. 전에 고통 받던 자들_이사야9:1

 

오늘 1절에 보니까 하나님께서 스불론과 납달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계십니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_이사야9:1’

 

전에 고통 받았다 라는 표현이 오늘 말씀을 시작하는데 중요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와 여러분은 모두 다 전에 고통 받던 자들입니다. 장로님이든, 권사님이든, 목사인 저도 전에는 고통 받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는 단지 인간의 삶의 고통 그러니까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어떤 질병이라든지, 인간관계라든지, 경제문제라든지 이런 고통을 성경에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의 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에 모두가 다 죄의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고통을 사람들이 느끼지 못할 뿐 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고통을 쾌락으로 느끼기도 하고 즐거움으로 느끼기도 하기 때문에 죄의 고통은 굉장히 강력합니다. 죄가 주는 고통이 단지 경제 문제다, 육신의 아픔이다 라고 했으면 죄를 다 멀리하고 살았겠지만 이 죄는 우리에게 쾌락을 주기도 하고 즐거움을 주기도 합니다. 성경에 보니까 악한 영 사단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해서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 우리가 고통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느끼느냐? 많은 사람들이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게 고통인가? 나는 지금 술도 좋아하고 지금 돈도 많이 벌고 쾌락을 즐기고 사는 것이 행복이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그 이면에 그것들이 우리 삶에 고통이 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왜냐면 심판을 아직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는 결과를 아직 맛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자매가 얼마 전에 저에게 상담을 해왔습니다. 목사님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제가 왜 이런 가정에 태어났을까요, 저는 왜 이런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고 있을까요. 제가 다 말씀을 드리진 못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니 너무 딱했습니다. 이럴 수도 있구나. 얼마 전에 기사에도 났지만 형제가 라면을 끓여먹다가 화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살아있는 것도 괴로운 것입니다. 평생 수술을 20번 이상 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런 고통은 태어났는데 그런 가정에 태어난 것입니다. 끔찍합니다.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알코올 중독자다, 폭력이 있는 가정이다. 그러면 끔찍합니다. 아이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태어났는데 우리 집이 이런 상황이다 그러면 끔찍한 것입니다. 해도 해도 안 된다고 합니다. 그 자매 집사님 표현입니다. 해도 해도 안 되다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지쳐서 연락이 오셨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해도 해도 안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천국 갈 때 까지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끝까지 안 되는 것이 이 땅의 삶 일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했더니 처음에는 엄청 낙심하시더라고요. 제 표현이 본인이 원하는 답이 아니었습니다. 원하는 답변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맞아요 여러분. 우리가 그런 상황들을, 그런 고통들을 겪을 수 있습니다. 사실 저희 교회 성도님들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그런 상황을 마주하고 계신 분들이 계십니다. 위로하고 싶고 손 잡아주고 싶고 다독거려주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 고통들을 우리는 다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에 그런 고통을 다 받았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을 섬기고 세상을 사랑했던 죄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의로 그것을 지키신다고 합니다. 구약 내내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왜요? 죄의 결과입니다. 구약 내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포로로 이끌고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나쁜, 악한 신인가요? 죄에 대한 결과가 그것입니다. 우리는 다 그런 고통을 받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진리, 정의, 공의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왜 구약 내내 죄에 대한 진노를 보여주셨죠? 그것이 우리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종교로 따질 때 기독교가 위대한 종교라고 하는 종교학자들의 이유는 다른 신들은 모든 죄를 인간에게 너희들이 이렇게 노력해서 해결하라고 이야기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유일한 다른 종교와 다른 것이 뭐죠? 하나님이 직접 그 일을 다 감당하셨습니다. 모든 진노, 재앙 다 구약에 보여주신 것입니다. 죄가 이렇게 무서운 거야. 너희들이 마귀를 섬기고 귀신을 섬기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라고 하나님이 진노로, 공의의 하나님이 구약 내내 보여주시고 그것을 누가 다 감당하셨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감당하셨습니다. 다 감당하셨습니다. 본인이 직접, 하나님께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것 입니다. 그것이 이해되지 않으면 구원 못 받습니다. 십자가의 공의와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구원 못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구약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깨닫지 못하면. 이것은 도덕적인 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거짓말 좀 했는데.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가 해결할 수 없는 죄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해결 받을 수 없는 고통입니다. 사람들이 자꾸 육신의 질병 이런 것을 죄의 결과라고 이야기하는데 죄의 결과가 맞아요.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죄의 결과로 살고 있습니다. 죄의 결과는 지옥, 무저갱, 스올, 심판입니다. 그런데 전에 고통 받던 자들이라는 단어를 묵상하면서 우리가 모두 다 고통을 알고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교회 공동체가 이 시대에 어떻게 변해버렸죠? 남을 정죄하는 단체로 전락해버렸습니다. 남을 정죄합니다. 기독교가 타락하는 것은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은혜를 받았는데 어느 순간 그 은혜를 다 잊고 사는 것입니다. 마치 내가 거룩한 것처럼, 마치 내가 열심히 기도해서, 신앙생활 잘해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오른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남을 정죄하는 도구가 되어 버렸습니다. 집단 이기주의를 우리는 굉장히 경계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청년들 꼭 르네 지라르의 책들을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의 책 중에 희생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류역사를 공부하다 보니까 사람들이 단체를 구성할 때 사람들이 자기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희생양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희생양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고 공격하는 인간의 특징들, 죄에 똘똘 뭉친 단체에 대한 특징들을 고발했습니다. 이 사람의 모든 논문, 책은 다 그것이 배경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우리도 무언가 희생양을 찾는 것이 지금의 심리 아닙니까? 정치인들도 그렇고 뭔가 희생양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가 그랬습니다. 중세교회가 흑사병이 돌 때 그때는 교회가 국가권력보다 위에 있었는데 사람들이 흑사병으로 죽고 전염병으로 어려움 당하니까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풀지 못하기에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 재앙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죠? 자기 마을에 예수 안 믿는 사람은 마녀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마녀사냥을 시작했습니다. 그래가지고 마을마다 책임을 넘길 희생양을 찾아서 불에 태워 죽이고, 십자가에 태워죽이고 화형 시키고 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세월이 100년쯤 지나서 흑사병이 유럽 전역에 퍼진 원인을 밝혀냈습니다. 그 마녀들을 찾아 죽이려고 마을마다 돌아다녔던 기사들, 사제들을 통해서 전염병이 더 확산되었다는 논문이 있습니다. 인간이 그렇게 더 무섭습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어떤 분이 신앙생활 하다가 사회적으로 큰 죄를 지었습니다.무슨 죄를 지어서 감옥에 갔다 왔습니다. 다시 교회를 올 수 있어야 하는데 못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다 죄인 취급 하는 것입니다. 저 사람 우리 교회 안 왔으면 좋겠다, 저 사람 우리 교회 없었으면 좋겠다. 우린 깨끗한데, 우리 교회는 굉장히 이미지가 좋은데 저런 사람이 우리 교회 와서 분위기 흐린다면서. 맞나요?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은연중에 그런 문화가 있습니다. 조금 몸이 불편하거나 마음, 정신이 불편한 분들이 교회 오면 은근히 정죄하고 수군수군 거립니다. 얼마나 악해요? 무슨 사연에 의해서 교회를 몇 년간 못 나왔다가 다시 교회로 올 수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환영해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르네 지라르가 말하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르네 지라르가 이야기 했습니다. 이 분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인류 전체가 예수님께 책임을 짊어지게 하시고 그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단 자체가 이간질입니다. 사단이라는 단어의 뜻이 원어에 보면 분열이라는 뜻 입니다. 사단의 본질이 분열하는 것입니다. 이간질 하는 것입니다. 이 사회를 이간질시키고 교회를 이간질시키고 전부 분열시키는 것이 사단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분열시켜 놨죠. 이간질 시켜놨죠. 그래서 여러분 이간질하는 분열하는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목사도 매일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내 영혼을 관리하지 않으면 이 설교로 남을 정죄하게 됩니다. 말씀으로 목회로 남을 죽이기도 합니다. 성도를 죽이기도 합니다. 목사도 그렇습니다. 똑같은 설교지만 제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고 은혜 받지 않고 하나님을 내 앞에 모시면서 아침마다 깰 때에 주의 얼굴로 만족하리라 이런 신앙이 없으면 남을 죽이는 것입니다. 저는 개척하면서 저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지 않기를 기도하면서 개척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죽기 직전에 옆에 있는 강도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사람 죽인 강도입니다. 이것이 뭐냐면 전에 고통 받던, 전에 죄인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오만함이고 교만함입니다. 여러분 은혜를 잊으시면 안 됩니다. 사람도, 인간도 좋은 사람에게 은혜를 받고 살았으면 잊고 살면 안 됩니다. 부모의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고 나를 도와준 손길들을 기억하고 사는 것이 인간다운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가 억만 죄악 가운데서 그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았는데 우리가 사람을 정죄할 수 있어요? 진리를 지키고 공의를 행사하는 것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공의와 항상 같이 있었던 것이 십자가 사랑입니다. 잊어버리시면 안됩니다.   

 

Ⅱ. 스불론과 납달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 다른 지파와 같이 죄악을 따르던 스불론과 납답리_열왕기하15:29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말씀에 북이스라엘이라는 공동체는 남유다와 다르게 열지파로 똘똘 뭉쳤습니다. 베냐민, 유다 지파를 제외하고 나머지 지파들이 좋은 환경, 좋은 상황으로 똘똘 뭉쳐서 남유다를 엄청 괴롭혔습니다. 웃깁니다. 원래는 한 민족입니다. 열두 지파가 하나님의 하나의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하나의 공동체이고 하나님의 택한 민족인데 그것이 분열되었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 남유다가 나눠져서 북이스라엘은 똑똑한 왕들을 세워가면서 자기들은 더 강력한 나라가 될 거라고 신정국가에서 벗어나버렸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겠다. 이것이 북이스라엘입니다. 그 가운데 북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특별한 지파가 나왔는데 그 지파가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입니다. 아주 특별합니다. 우리가 다 남유다를 공격하고 우상을 섬기고 악을 행하고 있는 그 북이스라엘 공동체 속에서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가 나왔다는 것은 참 신기한 것입니다. 오늘 그 부분을 살펴볼 것입니다. 이 부분은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북이스라엘에 소속된 지파였지만 그들이 사실은 북이스라엘과 똑같이 악을 행했을 것입니다. 똑같이 악을 행했기 때문에 똑같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합니다. 

 

‘이스라엘 왕 베가 때에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이 와서 이욘과 아벨벳 마아가와 야노아와 게데스와 하솔과 길르앗과 갈릴리와 납달리 온 땅을 점령하고 그 백성을 사로잡아 앗수르로 옮겼더라_열왕기하15:29’

 

납달리와 갈릴리(스불론)이 다 점령당했습니다. 다 앗수르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지금 이것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냐면 스불론과 납달리도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왜?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죄가 작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앗수르를 통해서 나중에는 바벨론을 통해서 완전히 포로가 되고 북이스라엘이 쑥대밭이 되었는데 쑥대밭이 되는 과정에 스불론과 납달리도 똑같이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냥 진노를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죄 없는 사람에게 그냥 진노를 주지 않으십니다. 전부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습니다. 북이스라엘에도 괜찮은 왕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섬겨 보겠다고. 그래도 뿌리가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의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혈통들이기에 당연히 고통 받을 때마다 하나님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가끔 좋은 왕들이 나왔지만 성경에 보니까 꼭 꼬집는 것이 있는데 왕이 부모의 행적을 따라서 선한 왕이고 좋은 왕이 되었는데 그들의 산당에 제하지 아니하였더라. 이런 장면들이 열왕기상, 하, 역대상, 하를 읽으면서 그런 장면들이 계속 나옵니다. 무슨 말인가요? 완전하게 하나님을 섬긴 적은 없습니다. 완전하게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을 깨끗하게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꼭 무언가를 남겨두었습니다. 여지를 남겨두었습니다.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하나님이 두려워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뒤에 가서는 그래도 우리가 재물의 신, 다산의 신에게 제사해야지 하고 이것은 남겨놔야지 하는 것이 북이스라엘의 왕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진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아무 잘못도 안했는데 하나님 도대체 우리에게 왜 그러십니까 라고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 너무하시네, 진짜 너무하시네 이러면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 특히나 우상에 대해서는 타협이 없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상 섬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거나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강력한 진노를 항상 주셨습니다. 그 속에 누가 있었냐면 스불론과 납달리도 똑같았습니다. 전에 고통 받는 것. 우리도 다 똑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욕하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것, 교회들이 불신자들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 우리도 사실 똑같았잖아요. 우리는 이기적이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쾌락을 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어디 세상적으로 축복받고 싶지 않았습니까? 그런 스불론과 납달 리가 어떤 이유에서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스불론과 납달리는 북이스라엘 중에서도 가장 불평해야 될 지형과 환경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갈릴리가 스불론과 납달리입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갈릴리 호수의 해변 길이었습니다. 바다로 따지면 칠레와 같은 나라였습니다. 남미의 칠레와 같이 길쭉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니까 무역을 하러 오거나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들과 무역을 하러 올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러니까 오고 가는 곳이 지저분했습니다. 그런데 무역하러만 거치러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적들이 침략하러 올 때도 반드시 첫 번째로 거쳐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앗수르가 공격하자고 했을 때 제일 먼저 공격당하는 곳이 스불론과 납달리  였습니다. 항상 늘 제일 먼저 침략 당하는 곳이었습니다. 지금이야 공중전도 있고 미사일도 쏩니다. 옛날에는 강원도가 전쟁나면 첫 번째 타격 받는 곳이었는데 요즘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판문점 근처에 살아도 괜찮습니다. 요즘은 그렇게 공격해오지 않을 것입니다. 미사일로 서울을 공격하고 부산을 공격하고 전투기가 날아옵니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전투기가 있어요, 미사일이 있어요 사람이 공격해오는 것이었습니다. 무조건 스불론과 납달리는 전쟁이 일어나면 첫 번째로 공격 받는 타격지였습니다. 괴롭습니다. 북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지형, 환경적으로 열악했습니다. 마치 우리 인생을 이렇게 표현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태어났더니 우리 집은 왜 그래? 이런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왜 그래?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 내 얼굴은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럴까. 너무 불평한 것이 많은 것입니다. 그것이 스불론과 납달리였습니다. 환경적으로 다른 여덟 지파보다 훨씬 더 어려움이 많았던 스불론과 납달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을 하나님께서 멸시 당하게 하셨습니다. 남들보다 훨씬 치욕을 많이 당하던 땅들 입니다. B.C. 732년에 디글랏 빌러셀 3세가 이끄는 앗수르에 의해서 스불론과 납달 리가 제일 먼저 앗수르에게 포로가 됩니다. 다른 지파보다 제일 먼저 포로가 되고 제일 먼저 점령당했습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 이방인에게 통치를 당한 곳입니다. 그래서 이방의 갈릴리라고 그런 것입니다. 다른 여덟 개의 지파는 지형적으로 환경이 괜찮아서 조금 더 버틸 수 있었지만 스불론과 납달리는 제일 먼저 점령이 되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괴로운 것입니다. 엄청 괴로운 땅이었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스불론과 납달리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빛을 향해 가는 스불론과 납달리_시편68:19-35, 사사기4:4-10, 5:18, 6:35, 역대상12:33-38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 그의 원수들의 머리 곧 죄를 짓고 다니는 자의 정수리는 하나님이 쳐서 깨뜨리시리로다’

 

20-21절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사단의 머리를 깨뜨리신다고 합니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을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 곳에서 도로 나오게 하고 네가 그들을 심히 치고 그들의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집의 개의 혀로 네 원수들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 하나님이여 그들이 주께서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로 행차하시는 것이라 소고 치는 처녀들 중에서 노래 부르는 자들은 앞서고 악기를 연주하는 자들은 뒤따르나이다 이스라엘의 근원에서 나온 너희여 대회 중에 하나님 곧 주를 송축할지어다 거기에는 그들을 주관하는 작은 베냐민과 유다의 고관과 그들의 무리와 스불론의 고관과 납달리의 고관이 있도다 네 하나님이 너의 힘을 명령하셨도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것을 견고하게 하소서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전을 위하여 왕들이 주께 예물을 드리리이다 갈밭의 들짐승과 수소의 무리와 만민의 송아지를 꾸짖으시고 은 조각을 발 아래에 밟으소서 그가 전쟁을 즐기는 백성을 흩으셨도다 고관들은 애굽에서 나오고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 땅의 왕국들아 하나님께 노래하고 주께 찬송할지어다 (셀라) 옛적 하늘들의 하늘을 타신 자에게 찬송하라 주께서 그 소리를 내시니 웅장한 소리로다 너희는 하나님께 능력을 돌릴지어다 그의 위엄이 이스라엘 위에 있고 그의 능력이 구름 속에 있도다 하나님이여 위엄을 성소에서 나타내시나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나니 하나님을 찬송할지어다_시편68:19-35’

 

27절 베냐민과 유다는 남유다입니다. 하나님께서 남유다를 사랑하셨는데 거기에 북이스라엘 중에 스불론과 납달리를 포함 시키셨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다른 것입니다. 축복입니다. 사사기 4장 4-10절을 보면 드보라라는 여자 선지자가 나옵니다. 드보라는 랍비돗의 아내였습니다. 여자 선지자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싸웁니다. 그때 누가 군대로 일어나서 여자 선지자 드보라를 돕는 줄 아십니까?

 

‘그 때에 랍비돗의 아내 여선지자 드보라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지 라마와 벧엘 사이 드보라의 종려나무 아래에 거주하였고 이스라엘 자손은 그에게 나아가 재판을 받더라 드보라가 사람을 보내어 아비노암의 아들 바락을 납달리 게데스에서 불러다가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지 아니하셨느냐 너는 납달리 자손과 스불론 자손 만 명을 거느리고 다볼 산으로 가라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의 병거들과 그의 무리를 기손 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넘겨 주리라 하셨느니라 바락이 그에게 이르되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면 내가 가려니와 만일 당신이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나도 가지 아니하겠노라 하니 이르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가리라 그러나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서는 영광을 얻지 못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여인의 손에 파실 것임이니라 하고 드보라가 일어나 바락과 함께 게데스로 가니라 바락이 스불론과 납달리를 게데스로 부르니 만 명이 그를 따라 올라가고 드보라도 그와 함께 올라가니라_사사기4:4-10’

바락은 스불론의 지도자였는데, 여러분 드보라가 외인과 싸우고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키실 때 그 군대가 바로 스불론과 납달리의 군인이었습니다. 아무도 헌신하지 않고 아무도 드보라를 지지하지 않았는데 드보라 선지자가 사역할 때 유일하게 스불론과 납달리에서 군대 만 명을 차출해서 보냈습니다. 보통일이 아닙니다.

 

‘스불론은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아니한 백성이요 납달리도 들의 높은 곳에서 그러하도다_사사기5:18’

 

드보라를 돕는 스불론과 납달리를 하나님이 이렇게 평가하고 계십니다. 

 

기드온 때입니다. 나중에 사사기를 설교할 때가 오겠지만 그 연약한 기드온 사건 아시죠. 기드온이 정말 마마보이 같은 성격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징조를 보여주시면 제가 싸우겠습니다. 징조를 보여줬더니 또 징조를 보여주세요. 또 보여주세요. 네가 정말 나를 안 믿는구나 이런 연약한 사사, 선지자였습니다. 기드온이 처음에 두려워서 군대를 엄청 모았는데 하나님이 다 가라고 해서 300명만 남깁니다. 

 

‘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_사사기6:35’

 

‘스불론 중에서 모든 무기를 가지고 전열을 갖추고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능히 진영에 나아가서 싸움을 잘하는 자가 오만 명이요 납달리 중에서 지휘관 천 명과 방패와 창을 가지고 따르는 자가 삼만 칠천 명이요 단 자손 중에서 싸움을 잘하는 자가 이만 팔천육백 명이요 아셀 중에서 능히 진영에 나가서 싸움을 잘하는 자가 사만 명이요 요단 저편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지파 중에서 모든 무기를 가지고 능히 싸우는 자가 십이만 명이었더라 이 모든 군사가 전열을 갖추고 다 성심으로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을 온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자 하고 또 이스라엘의 남은 자도 다 한 마음으로 다윗을 왕으로 삼고자 하여_역대상12:33-38’

 

다윗을 왕으로 삼고자 싸웠던 군대 중에서 스불론과 납달리가 그 일들을 감당한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기록이 스불론과 납달리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나와 있습니다. 도대체 이 스불론과 납달리는 무엇을 바라봤을까요? 여러분 북이스라엘의 지파 같으면 북이스라엘의 강력한 정권과 왕, 시대상황들, 분위기로 남유다와 같은 신앙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인데 그런데 그들은 그 속에서 무엇을 보았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9장에 하고 계십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를 이야기를 하시면서 하고 계십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_이사야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봤습니다. 그 빛이 무엇인가요? 3절입니다.

 

‘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하게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 앞에서 즐거워하오니_이사야9:3’

이러면서 하나님이 축복하시면서 이야기하십니다. 스불론과 납달리가 본 것이 무엇입니까?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_이사야9:6’

 

우리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이사야의 세 번째 징조의 메시지입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전에 큰 고통을 받던 흑암을 향하던 백성이 빛을 봐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빛을 향해서 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이 본문 이사야는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한 것 같지만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본 스불론과 납달리 땅을 조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납달리와 스불론이 알고 그런 것인지 모르고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빛을 향해서 갔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미련하고 바보 같아서 스불론과 납달리의 역사를 보면 늘 승리했던 것은 아닙니다. 어쩔 때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기도 하고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또 어쩔 때는 기드온이 일어나고 드보라가 일어나고 다윗 왕을 세울 때 갑자기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싸우겠다고 헌신하기도 하고 스불론과 납달리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참 고민이었습니다. 마치 우리 인생 같습니다. 넘어지고, 좌절하고. 그런데 스불론과 납달리의 특징이 뭔 줄 아십니까? 그렇게 넘어지고 좌절하는데 또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서 어디로 갔냐? 빛으로 갔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니까 속고 속았는데 왕들에 속고 주변 지형이나 환경에 속았는데 그래서 또 넘어지고 좌절했는데 또 어떨 때보면 일어나서 결정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신합니다. 빛으로 가기 위해서 그런 결정적인 장면들이 스불론과 납달리 역사에 굉장히 많이 나와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여러 부류의 성도들을 만나는데 이런 분들이 제일 많습니다. 신앙생활 적당히 하자는 분들이 제일 많습니다. 대충 눈치 보면서 주변 상황 좀 맞춰가면서, 굳이 내가 튀면서 할 필요 없잖아.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영혼을 파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빛으로 십자가로 나아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옆 사람 눈치보고 적당히 포장하고 우리 집은 지금 큰 고통으로 흑암으로 인해서 진노가운데 있는 우리 가정을 두고 그것 드러내기 싫으니 양복 갖추어 입고 주일날 교회 오면 괜찮은 척, 사회적인 지위가 있지, 내 명예가 있지 이러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타락입니다. 공동체의 타락입니다.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렇게 교회 다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포로로 끌려가면 다들 포기했을 것입니다. 포로로 끌려가는데 하나님을 원망하며 다 포로로 끌려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가는데 무엇을 생각했죠?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포로로 끌려가면서 왜 우리 백성이 지금 포로로 끌려갈까 생각한 것입니다. 포로생활을 오래해서 이제 거기에 익숙해질 뻔한, 나라의 정치 지도자가 되어서 탄탄대로를 겪고 있었던 느헤미야는 자기 고국의 성벽이 무너지고 악한 사람들로 인해서 성벽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자기 고국에 하나님의 성전이 농락당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가만히 있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스불론과 납달리가 특별한 사람들은 아닙니다. 오히려 남들보다 더 열악하고 환경도 배경도 어쩌면 남들보다 시작도 늦습니다. 그런데 그는 오늘 말씀에 보니까 역대상에 보니까 두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빛으로 가려고 주를 위해서 싸웠다고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어둠과 싸웠습니다. 그러면서 얼마나 많이 넘어졌나요? 그런데 스불론과 납달리 또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또 붙잡아 주셨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저와 여러분은 어둠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둠은 보이지 않아요. 마귀가 보이면 싸우겠는데 안 보입니다. 오히려 광명의 천사로 온다고 합니다. 어떻게 분별해요? 그래서 많은 신자들이 우리 가정, 교회를 악한 영들이 공격하는데 가만히 있습니다. 안 보인다고 뭐하라고? 이러면서. 아닙니다. 싸워야 합니다. 분별하고 싸워야 합니다. 작은 신앙생활이라도. 여러분 저 같은 힘없는 목사, 제가 진리를 이야기한다고 해서 제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몇 명이라고 될 것 같으세요? 우리 교회 성도들이나 들으시지 누가 듣겠어요 제 이야기를. 누가 제가 말한다고 제 이야기에 관심이나 가지겠어요? 그렇다고 안 해요? 목사가 그렇다고 죄에 대해서 설명 안하고 심판에 대해서 설교를 안 하면 되겠어요? 악한 영들이 하는 일에 대해서 고발해야 하는 것이 정상 아닌가요? 그래도 우리 교회 성도님들, 우리 자녀들을 이끄는 영적인 지도자인데 양심을 팔면 안 되죠. 저 잘 먹고 잘 살아보겠다고 줄 잘 서고 있으면 안 되죠. 목사는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 가족, 교회를 공격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안 됩니다. 내 영혼이 빼앗기지 않도록 내 신앙양심을 팔면 안 됩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죽음을 무릅쓰고 목숨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빛으로 가기 위해서 생명 걸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아무도 예수님을 안 믿는대요. 그래서 다 넋 놓고 있습니다. 자기는 예수 믿잖아요. 그래서 제가 가정복음화를 위해서 어떻게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때 되면 하시겠죠. 이것이 보통 듣는 말입니다. 그 말에는 난 관심 없어요, 때 되면 하시겠죠. 진짜 심판을 아시는 분인가, 진짜 십자가의 보혈로 은혜를 받은 분인가 의심이 됩니다. 죽도록 애써야 되는 거 아니에요? 내 부모, 형제가 예수 믿도록 죽도록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구원에 생명 걸어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걸 어떻게 포기 할 수 있어요? 내 부모, 형제가 천국가게 하는 것을 포기라는 것을 할 수 있나요? 내가 천국, 지옥을 안다면 불가능한 것 아닌가요? 그런 납달리, 스불론이 신약에도 나옵니다. 참 놀랍습니다. 

 

- 예수님이 기억하시고 첫 사역을 하신 지역_이사야42:7, 마태복음4:12-16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_이사야42:7’

 

처음으로 예수님이 첫 사역을 한 지역이 이 지역입니다. 예수님이 굳이 스불론과 납달리로 가지 않으셔도 되는데 세례 요한이 죽고 나서 예수님이 그 상황을 피해서 놀랍게 갈릴리로 가십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_마태복음4:12-16’

그냥 가신 것이 아니라 오늘 이사야 9장의 말씀을 성취하고 이루시기 위해서 가신 것입니다. 정확히 지명까지 이야기하십니다. 거기서 사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영광스러운가요. 그러면서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이 거기서 제일 먼저 선포하시는 것이 천국복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를 선포하십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서 제일 먼저 선포하십니다. 놀랍습니다. 우리는 빛 가운데로 걸어가야 합니다.

 

Ⅲ. 빛 가운데로 걸어가라

 

- 하나님의 열심(무엇을 위하여)_마태복음4:17-25, 5:1-12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_마태복음4:17-25’

 

4장의 내용이 스불론과 납달리의 땅에서 사역하신 내용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 이 제자들이 스불론과 납달리 사람입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 스불론과 납달리 사람입니다. 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을까요? 원래 구약의 자기들의 조상들이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빛을 향해서 걸어갔던 사람들 입니다. 제일 먼저 스불론과 납달리 땅부터 고쳐주셨습니다. 그냥 고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무리가 어디로 왔냐면 스불론과 납달리 땅으로 왔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사야 9:6에 기묘자, 모사라 영존하신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를 구약에 설명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열심을 내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영선 목사님의 하나님의 열심 이라는 책을 쓰셨습니다. 진짜 좋은 책입니다. 정말 우리나라 목사님들 중에 그런 책을 쓰시는 분 드뭅니다. 저는 하나님의 열심을 읽으면서 정말 믿음이 많이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어려워요. 그 목사님의 특징 어려워요. 설교, 책도 어려워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금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인도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그 표현이 쓰여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라. 지금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께로 우리 인생을 안내하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겁니다. 어떻게요. 열심히 일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깨달아 지니는 것이 은혜이고 감동이고 감격입니다. 우리가 억만 죄악 가운데서 고통에서 흑암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하나님이 구약 내내 예수님을 위한 장치들을 다 걸어놓으셨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열심이신지. 구약에 일어난 사건 하나 그냥 된 것이 없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하나 그냥 계획하신 것이 아닙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 복음전파를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서 처음 시작하셨습니다.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5장에서 제자들을 불러서 이 천국복음을 전파하시고 나서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서 제자들에게 산상수훈을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_마태복음5:1-12’

 

스불론과 납달리 땅에서 이 아름다운 천국복음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을 선택해서. 여러분 어쩌면 우리는 스불론과 납달리처럼 전에 고통 받던, 흑암을 쫓아서 살았던, 어떤 면에서 스불론과 납달리보다 더 억울한 우리 인생일 수 있습니다. 우리 가정이 다 깨지고 해도 해도 안 되는 지형적인, 환경적으로 이 땅에서 별 볼 일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빛을 향해서 일어서고 또 일어서고 가다보니 그 땅이 천국복음을 듣는 땅이 되고 산상수훈의 축복을 받는 땅이 되고 영광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는 땅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스불론과 납달리는 구약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했습니다. 드보라, 기드온, 다윗 때에도 다 동참했지만 지금은 진짜 동참이 된 것입니다. 이 갈릴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사역에 동참하는 땅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이렇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신앙생활하세요. 여러분 자녀들이 여러분 가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는 가문이 되고 축복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빛을 향해서 가셔야 합니다. 큰 빛을 보고 가셔야 합니다. 빛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목사를 보고 가시면 안 됩니다. 이 공동체 분위기를 보고 가시면 안 됩니다. 북이스라엘 공동체에 속해서 가면 안 됩니다. 성경을 읽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기묘자라, 모사라, 영존하신 아버지. 철저하게 하나님 보고 가셔야 합니다.

 

-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을 바꾸라_이사야9:8-9

 

이사야 9장 하반절에서 하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죠? 왜 스불론과 납달리와 다르게 나머지 지파들은 큰 빛을 보지 못하고 이 길을 가지 못했는가?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_이사야9:8-9’

 

얼마나 악하게 말했는지 보세요.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는도다_이사야9:10’

 

뒤에는 읽지 않아도 됩니다. 이 한절로 북이스라엘의 마음 상태를 다 점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가 죄를 지어서 다 무너뜨렸는데 다듬은 돌로 다시 세우는 겁니다. 마치 바벨론 탑을 쌓듯이. 하나님이 뽕나무를 다 뽑아버렸는데 황폐하게 만들었는데 이 악한 인간들이 하나님이 뽕나무 다 뽑았어? 진노하셔? 심판하셔? 그럼 우리는 백향목이 있어, 더 큰 나무 심으면 돼. 이것이 인간의 악함입니다. 하나님께 항복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경고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버티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겉으로 착한 것 말고. 교만은 엄청난 죄입니다. 하나님보다 자기가 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난 죄인 아니라고 합니다. 그게 교만입니다. 내 삶은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죄인입니다. 목사들이 그럽니다. 내가 거룩한데 말이야. 어감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구원받았지만 죄인입니다. 왜? 우리가 그 죄 문제를 해결 받은 것이 우리의 공로로 된 것이 없기에 늘 죄인입니다. 아닙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해결해주셨기에 예수님을 의지하는 것이지 우리는 늘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늘 감사하고 감격할 수 있는 겁니다. 고맙잖아요. 그쵸. 저에게 복음을 전해주신 목사님, 광주에 가면 저의 은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 앞에 가서 제가 신학 좀 공부하고 교회 좀 부흥했다고 목사님 옛날 거 다 틀렸네 라고 말하면 되겠어요? 목사님 인생을 왜 그렇게 사셨나요? 그렇게 말하면 되겠어요? 그 목사님 명절 때마다 찾아뵈면 무릎 꿇고 기도 받습니다. 단 한 번도 제 마음에 그런 생각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인간도 은혜를 받으면 존경하고 사랑하고 그 분 앞에 가면 내가 부끄러워지고 작아지는 것이 사람 됨됨이입니다. 은혜를 저버려요? 북이스라엘이 은혜를 저버렸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해주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징조를 주셨는데 오히려 하나님이 죄 때문에 무너뜨리셨는데 벽돌로 다듬은 벽돌로 쌓는다고 합니다. 더 강한 나라를 만들거야. 그것의 상징적인 것이 바벨론 성입니다. 니므롯이 세운 바벨론입니다.

 

- 경건을 회복하라_이사야9:13-21

 

‘그리하여도 그 백성이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와 종려나무 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그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그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을 미혹하니 인도를 받는 자들이 멸망을 당하는도다 이 백성이 모두 경건하지 아니하며 악을 행하며 모든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들의 장정들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 대저 악행은 불 타오르는 것 같으니 곧 찔레와 가시를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 연기가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말미암아 이 땅이 불타리니 백성은 불에 섶과 같을 것이라 사람이 자기의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오른쪽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왼쪽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진노가 돌아서지 아니하며 그의 손이 여전히 펴져 있으리라_이사야9:13-21’

 

장로와 존귀한 자는 누구인가요? 지도자들입니다. 지도자들이 제일 먼저 교만하니까. 목사들입니다. 하나님이 다 자르신다고 합니다. 구약 내내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 중에 납달리와 스불론을 보게 하십니다.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경건. 경건 별거 없습니다. 경건은 대단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 닦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 경건이 아닙니다. 납달리와 스불론이 경건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경건입니다. 그 삶이 경건입니다. 죄를 향하고 있는 내 삶을 하나님께 살짝 방향을 트는 것이 경건입니다. 별거 아닙니다. 옆에 성경책을 끼고 다니고 8:2 가르마하고 기름칠하고, 나는 경건합니다가 경건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경건입니다. 내 주님을 모시고 사는 것이 경건입니다. 아닙니까? 그 길로 가야 합니다. 납달리와 스불론이 그 경건의 삶을 산 것입니다.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목사라도 매일 은혜 받지 않으면 순간적으로 그릇된 길로 갑니다. 아차 싶습니다. 내가 왜 이 길로 가고 있지? 순간적으로 교만, 오만이 찾아들어옵니다. 내가 마치 왕이 된 것처럼 내가 마치 목회 잘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경건입니다. 은혜는 경건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힘들더라도 제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배드리셔야 합니다. 죽을 것 같아도 성경 읽으십시오. 정말 죽을 것 같아도 성경을 펼쳐야 됩니다. 성경을 펼치면 하나님이 빛을 비춰주시는데 성경을 안 펼치는 어떻게 깨달음을 주시고 빛을 비춰주시겠어요? 다윗이 이야기합니다. 우둔한 사람이 말씀 열면 그의 얼굴 빛을 비춘다고 합니다. 안 여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역사하시겠어요?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 않는데 설교를 듣지 않는데 무슨 깨달음이 있겠어요? 소설책도 읽어야 깨달음이 있고 영화도 봐야 줄거리를 압니다. 안 보는데 어떻게 알아요? 빛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스불론과 납달리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하나님 앞에 목숨 걸고 나아갔습니다. 그들이 받은 축복 마태복음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주 중요한 제자들이 전부 갈릴리 사람들이었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사람들이었습니다. 빛으로 가야 합니다.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 우리는 그 하나님의 열심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넘어지고 또 넘어지실 수 있습니다. 또 다리 일으켜 세워서 십자가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께 가셔야 합니다. 가정이 쑥대밭 되면 사단, 마귀가 우리 가정을 욥의 가정처럼 쑥대밭 시킬 수 있습니다. 그럼 포기하실 건가요? 우리가 천국,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마귀가 우리 가정을 쑥대밭 만들면 주저 앉아서 넋 놓고 있으실 건가요? 목사님 저희 가정 기도해주세요. 장로님 저희 가정 기도해주세요. 저 다시 일어날래요.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갈래요. 그것은 창피, 수치가 어디 있어요? 오늘 스불론과 납달리는 수치를 무릅쓰고 사람들의 시선, 북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뒤로 하고 빛을 향해서 갔어요. 그런 인생이 돼야 돼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돼야 돼요.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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