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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09-27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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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9월 27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징조를 구하라

본 문

이사야 7:10-25

 

 오승주 목사

 

Ⅰ.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_이사야7:10-11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_이사야7:10-11’

 

오늘 말씀은 지난주 설교와 완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사실은 설교를 하나로 해야 하는데 시간상의 제약으로 나눠서 한 설교입니다. 지난주 말씀에 이어서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말씀을 직접하시고 계십니다. 뭐라고 이야기하시냐면 11절에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징조를 구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보니까 하나님께서 아하스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냐면 내 하나님이라고 표현을 하신 것처럼 아직도 하나님은 아하스에게 너는 아직도 나를 내 하나님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아하스와 하나님과 관계를 하나님은 계속해서 가지고 가시려는 의도가 보이시고 그래서 아하스에게 기회를 주시고 계십니다. 너는 징조를 구해라. 네가 깊은 데 있든지, 높은 데 있든지. 네가 어디 있든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네가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네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징조를 구해라 이렇게 지금 기회를 주시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아하스가 어떻게 했죠? 징조를 거부했습니다. 발로 차버렸습니다. 위선적인 말로 하나님께서 징조를 구하라고 하신 말씀을 거부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오게 됩니다. 

 

- 프레임으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세대

 

프레임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여러분 너무 잘 아시죠. 프레임은 인식의 뜰,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시대마다 세대마다 프레임은 우리가 프레임을 걸려고 프레임을 만들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정치인들이나 어떤 세력들에 의해서 시대나 나라나 프레임 같은 것을 겁니다. 어떤 사상들이 프레임일수도 있습니다. 공산주의라든지, 사회주의라든지, 자유주의라든지. 미국에 가면 미국은 되게 좋은 나라다, 민주주의 국가라는 프레임을 걸어서 되게 좋은 나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도 많이 있습니다. 마약이라든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범죄라든지, 부도덕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많습니다. 프레임을 무섭습니다. 중국은 공산국가야해서 중국은 다 나쁜 나라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그 안에는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프레임이라는 것은 고정관념, 편견, 선입견으로 시대마다 어떤 프레임을 걸어버리는 것입니다. 프레임은 굉장히 무섭습니다. 고정관념도 무섭습니다. 우리 개개인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자라오면서 어떤 상처나 배경에 의해서 내 스스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성공해야 해, 나는 인간관계를 잘 해야 해, 나는 저 높은 자리에 올라가야해 라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남들이 볼 때는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남과 비교해서는 훨씬 더 잘 살고 훨씬 더 여유가 있고 행복해 보이는데, 자신의 프레임 때문에 나는 불행해,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자살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저 사람 왜 자살 했지 라고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가난하게 컸기 때문에 어렸을 때 부자들이 자살하고 연예인들이 자살하면 나 좀 주고 자살하지 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게 뭐냐면 자기 자신의 프레임에 걸린 것입니다. 프레임이라는 것은 무섭습니다. 프레임으로 비교를 하고 판단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프레임을 걸어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세상의 프레임은 다 거짓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프레임은 진짜입니다. 천국이 있다. 네가 거할 처소가 있다. 내가 너희를 거기로 인도하려고 이 땅에 왔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 서기관들은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군림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말라기를 뒤로 하고 약 50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이스라엘의 영적인 지도자로 군림했는데 백성들의 영혼, 마음, 속사람을 살리고 속사람을 어떻게 하면 구원의 은혜와 감사와 감격이 있게 할까 생각을 하며 사역을 한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파생된 장로들의 전통, 문화, 다시 말해서 율법의 문자적 해석으로 인한 겉모양만 갖추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열린 무덤 같다, 회칠한 무덤 같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겉은 보기가 좋고 겉은 옳은 삶 같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냄새나고 썩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 같다는 것입니다. 페인트칠한 무덤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이스라엘을 종교화 시켜버렸습니다. 자기들은 그것을 위해서 군림했습니다. 500년이나 그런 프레임을 걸어버렸습니다. 메시야를 찾지 않고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속뜻을 살펴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역사라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위선적인 겉모양의 종교생활을 강조하다 보니까 그것이 마치 구원 받는 것처럼. 십일조하면 구원 받고 하루 5번 기도하면 구원받고. 아주 위선적인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성도들은 그것에 열심을 내었습니다. 왜? 그것이 구원인줄 알았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구원 받을 것 같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영적으로 깨어서 기도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멀리 있지 않았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한 2-30년 전입니다. 어렸을 때 기억이 되게 많습니다. 그때는 저희 교회에서도 부흥회, 집회를 제법 많이 했습니다. 그때 보면 사람이 가득했습니다. 우리교회 성도로는 가득하지 안았을 텐데 이웃교회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웃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면 우리가 같이 가기도 했습니다.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은혜가 있었습니다. 금요예배면 교회 안에 사람이 가득했습니다. 그때가 지금보다 잘 살던 때인가요? 아니죠. 사실 경제적으로 더 어려운 때였습니다. 가만 보면 사회적으로도 그때는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일하면 집 한 채 살 수 있는 그런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퇴근하고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같이 텔레비전도 보고 수요예배도 가고 하는 이런 여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강팍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것도 있었습니다. 자녀들이 집에 늦게 들어와도 어떤 조금 안심이 되는 그런 사회였습니다. 지금은 많은 것이 발전했습니다. 기술도 발전하고 IT라든지 문화라든지. 그런데 사람들이 여유가 없습니다. 어떤 청년이 저한테 카톡을 보냈습니다. 목사님 죽어라 일하고 집에 와서 씻고 누우면 12시가 넘는다고 합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다들 입에 달고 사는 말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스트레스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문화가 발전하죠? 그것을 즉흥적으로 해결해주기 위해서 레저문화가 발전합니다. 다들 여행이 가고 싶어서 안달이 나는 것입니다. 왜? 삶이 팍팍하니까, 답답하니까. 제주도라도 3박4일 갔다 오면 뭔가 가슴이 뻥 뚤리는 것 같고. 저도 솔직히 그렇습니다. 뭔지 모르게 여유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아졌냐면 10-30년 전보다 어떤 조사에서 보니까 정신적인 문제, 정신적인 문제로 인한 범죄가 40-50배가 증가했다고 합니다. 편의점 안에 가서 차로 헤집는 거 보셨습니까? 제 정신이 아닙니다. 편의점 직원이 기분 나쁘게 했다는 것입니다. 차를 가지고 들어가서 몇 바퀴 돈 것입니다. 그냥 기분 나뻐서. 어제는 두 연인이 공원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어떤 남자가 뒤통수를 돌로 때렸습니다. 왜요? 자기는 솔로야, 자기는 연애도 못하는데 기분 나쁘다는 것입니다. 무섭습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밤늦게 집에 들어오지 못하면 어떤 범죄가 있는지도 모릅니다. 스트레스가 계속 많아집니다. 사회가 발전 되었는데 이상하게 하나님과는 더 멀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는 더 이상 사람들이 모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개교회 집회, 부흥회 다 사라졌습니다. 모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이 바글바글하던 기도원들이 절반은 요양원으로 바뀌었습니다. 누가 기도하러 가지 않습니다.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현장예배 오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것처럼 비극적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뭐가 그리 급하고, 뭐가 그리 죽을 것 같은지 예배에 소홀한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일에는 죽네 마네하고 얼마나 큰 상처를 받았는지 조금만 상처만 받아도 교회를 떠나네 마네라는 말들이 심심치 않게 들립니다. 무엇을 다 놓쳤냐면 재림을 준비하는 신앙을 다 놓쳤습니다. 구원의 감사와 기쁨을 삶에서 찾아서 찬송하지 않습니다. 저는 목사들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메시지, 대중이 찾는, 원하는 새로운 메시지를 계속 목사들이 하다보니까. 새로운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다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뉴에이지, 새로운 문화, 시대, 메시지 다 세상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다 우리의 겉모양을 화려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의 메시지는 새로운 메시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진리, 이미 우리에게 주신 성경. 그래서 우리는 새로운 메시지를 듣고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듣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뛰어난 기획된 새로운 전략을 들어서 우리 삶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 말씀으로 우리는 새로워지고 변화 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착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메시지를 위해 세상의 자기개발서, 마케팅 책을 읽고 교회에 적용하고 메시지를 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설교에 매력적인 사람이 되라, 훌륭한 사람이 되라, 청년들에게 성공된 사람이 되라. 우와 교회가 새로워졌네, 메시지가 기가 막히네 하고 사람들이 우르르 모였지만 결과적으로 진리를 전하지 않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우리의 영혼을 살리는 십자가의 메시지는 구석기 시대 메시지처럼, 잔소리처럼 되었습니다. 여러분 진리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세상이 발전하는 것은 새로워 보이지만 그것은 결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옛날 말 같고 잔소리 같은 성경 말씀을 들어야 살 수 있습니다. 자꾸 속입니다. 재림의 때를 믿지 못하게 합니다. 이 시대의 분주함에 파 묻혀서 목사들이 정말 해야 될 설교를 하지 못하고 성도들도 그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저는 목사입니다. 솔직히 고민이 엄청 많습니다. 우리 교회는 또 오승주 목사에게는 오직 예수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늘 갈등입니다. 세상 프레임은 갈수록 새로운 것, 발전, 성공 이런 겉모양을 계속 가르칩니다. 여러분 예전에는 금요예배에 와서 속사람이 은혜 받도록 기도하는 것이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지금은 교회 와서 기도해도 전부 다 겉모양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성공하게 해 달라, 축복받게 해 달라. 내 영혼이 살아나고 내 영혼이 새로워지는 기도제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시편, 잠언을 읽어보십시오. 다윗의 기도를 살펴보십시오. 전부 속사람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단 한 번도 내 외적인 모습을 위해서 기도한 적이 없습니다. 그만큼 이 시대가 발전한 것 같지만 영적으로 황폐해져가고 있는 시대입니다. 속사람들이, 내 영혼이 다 죽어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로 인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다 놓치게 합니다. 아하스 시대가 딱 그런 시대입니다. 어쩜 지금하고 비슷한지. 이때 하나님께서 징조를 구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오늘 뭐라고 이야기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눈에 보이는 것들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놓치게 하는 시대

 

Ⅱ. 징조를 구하지 아니한 아하스와 백성들

 

-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_이사야7: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_이사야7:12’

 

언뜻 보면 아하스가 하나님을 굉장히 생각하는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 피곤하신데, 내가 뭘 징조까지 구하고 그럽니까. 이것은 굉장히 위선적인 말입니다.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 이것이 그냥 말한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살펴보면 아하스는 이렇게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바로 앗수르에게 도움을 구합니다. 앗수르에게 성전의 금, 국가의 재산을 바칩니다. 그리고 앗수르에게 북이스라엘, 에돔을 쳐달라고 합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의 도움은 안 받으면서 앗수르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질까요? 하나님이 아하스와 그의 백성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는 이 징조는 무엇입니까? 이 징조는 하나님이 믿음을 주시는, 다시 말해서 천국을 믿고,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주신 기회가 징조입니다. 내가 아람과 북이스라엘로부터 앗수르로부터 너희를 보호하겠다. 그러니까 믿어라. 이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너희는 언약백성이야, 내 백성이야, 내가 너희를 보호할거야, 믿기만 하면 너희를 보호할거야. 아하스는 왜 위선했을까요? 그 시대의 프레임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목회자들과 모임이 있었습니다. 가서 대화하는데 제 마음에 되게 큰 갈등이 있었습니다. 이런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시대를 두고 또 우리의 목회를 두고 또 우리 단체의 이야기들을 하면서 많은 대화들을 하는데 제 마음에 슬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되게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냥 목회자들이 여러 가지였습니다. 어떤 목회자들은 그거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시겠지 하는 방관자적인 태도를 가진 목회자들이 있고, 또 어떤 목회자들은 그것을 비난하고 비판하고 그러면서 자기의 모습은 돌이키고 회개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제가 그런 속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제 신앙양심에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왜냐면 제 모습에서 아하스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하스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이 상황을 처리하실 분이 하나님이신데, 주님이신데, 자기 아버지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줄 분이라고 믿어야 하는데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을 엄청나게 자존심 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내 인생에 찾아온 문제들, 가정문제, 자녀문제 내 인생의 수많은 문제들을 오픈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을 자존심 상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모습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 회개하자, 우리가 그동안 잘못 살았지 않냐. 이거 자존심 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세련된 척, 매력적인 척, 멋있는 척을 했습니다. 아마 아하스는 자기가 전략을 다 세웠는데 자기가 계획을 다 세웠는데 그것을 계속해야 하는 어떤 압박감, 그리고 사람들이 자기를 칭송하고 인기를 얻었던 왕이기에, 백성들이 자기를 바라보고 의지하고 있었으니까 지금 이것을 하나님 앞에 다 이게 아니다, 이게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내가 세웠던 계획들이 계속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자기를 바라보고 있으니까. 자존심, 자기 이름, 자기 명예. 이런 것이 중요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서 도움 받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금요예배를 가면 성도들이 하는 기도소리가 들립니다. 기도소리를 들어보면 부끄러운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술을 한잔 했는데, 제가 와이프에게 이런 일을 했는데 회개합니다. 요즘요?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기도하시는지 모르겠지만 들리지 않습니다. 제가 상담을 하면서 그것을 되게 많이 느낍니다. 상담의 일색은 전부 남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나는 의로운데 저 사람은 악하다고 합니다. 자기 모습을 회개하고 자기 모습을 진정으로 정직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앗수르에게는 성전의 금을 내어주고 아람을 공격하게 부탁하는 요구했습니다. 세상의 것을 완전 의지한 것입니다. 의지할 분이 우리 하나님 밖에 없다고 간절하게 기도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문제가 생겨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돈으로, 지식으로, 사람들의 힘, 자신의 머리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해결이 됩니까? 다시 말해서 징조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징조가 무엇입니까?

 

-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_이사야7:13-17

 

‘이사야가 이르되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_이사야7:13-17’

 

부탁합니다. 들어봐라. 아하스에게 지금 경고하는 것입니다.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이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일인데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하나님까지 괴롭히려고 하느냐. 지도자 한 사람이 징조를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니까 그 시절에는 지도자가 중요한 시절 아닙니까. 여러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이 징조는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구원, 재림 때 우리가 하나님께 들려 올림 받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14절 이 말씀은 두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잘 아는 예수 그리스도, 메시야. 왜냐면 마태복음, 마가복음에서도 이 말씀을 인용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압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아하스 시대에도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아하스에게 경고성 메시지로 주신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에게 하나님은 오실 메시야, 구원자에 대한 말씀을 징조로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붙잡는 것이 그 시대에도 분명히 똑같이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말세 시대를 살아갑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실 때부터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까지를 말세시대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적으로, 신학적으로 말세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모릅니다. 그냥 한 가지 약속만 하셨습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 되면 끝이 온다는 그냥 아주 막연한 약속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오십니다. 그 말씀을 징조로 가지고 오늘을 사는 것이 믿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언제 오셔? 안 오시지, 우리 때에 오시겠어?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나의 때에 오실 것이라고 믿으며 사는 것이 징조입니다. 아하스는 오실 메시야, 오실 그리스도,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약속하신 그 약속의 말씀을 아하스는 징조로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나의 시대와 상관이 없는 거야.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과, 현상들과 그 징조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거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타락한 것은 지금 그것을 분리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타락했다는 말은 예수님이 다시 재림주로 오실 그 재림을 지금 우리 삶에 적용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재림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_요한복음 14:3’

 

휴거입니다. 저는 휴거를 믿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 우리는 다 들림 받는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마치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자녀에게 엄마가 헬멧을 꼭 쓰라고 아침마다 오토바이 타고 나가는 아들에게 헬멧 쓰라고 잔소리를 하는데 아 알겠어, 아 그만 좀 이야기해, 알았다니까, 내가 알아서 할게 하고 매일 헬멧을 쓰지 않습니다. 헬멧을 그냥 오토바이 앞좌석에 걸어놓고 다닙니다. 사고가 나지 않습니다. 또 잔소리 들으면 싫습니다. 문제는 사고가 났을 때입니다. 사고가 났을 때 헬멧을 안 썼기 때문에 죽게 됩니다. 사고가 났을 때 헬멧을 썼다면 그 사람은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징조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들림 받지 못합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 목숨이 이 땅의 육신이 끝이 날 때. 사고가 나지 않을 것 같습니까? 우리 인생에 죽음이 오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이 잔소리처럼 들리시나요? 그러나 매주 잔소리를 들어야 하고 매주 진리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징조가 무엇이냐? 십자가의 복음, 예수그리스도가 그 징조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을 하등한 인간이라고 인간학에서 표현을 합니다. 감정대로 살면 제일 밑에 있는 하등한 인간이라고 합니다. 그냥 감정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그리고 그 위의 단계는 공동체, 사회 조직 속에 적응해서 사는 단계입니다. 공동체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금도 내고 사회가 서로가 약속한 질서도 지키는 것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공동체의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인간학에서는 하등한 인간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괜찮은 사람은 가치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가치를 위해서 삽니다. 나라, 자유, 박애, 봉사를 위해서 삽니다. 이것이 잘 사는 사람보다 훨씬 고등의 인간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등한 인간이든 중간 사람이든 공동체에서 잘 사는 사람이든, 가치를 발견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들은 잘 사는 삶은 아닙니다. 잘 사는 삶은 죽음 이후를 알고 사는 삶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이 땅에 사는 것을 구원 받을 기회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삶을 천국 갈 수 있는,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있는 기회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기회를 알고 구원을 위해서 사는 삶이 제일 잘 사는 삶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부자도 죽고 가난한 사람도 죽고 하등한 인간도 죽고 가치를 위해서 사는 사람도 죽지만 죽고 나서 전부 다 후회합니다. 왜요? 내세가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영원한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성공했냐, 실패했냐는 복음을 들었냐 듣지 못했냐는 것으로 결정됩니다. 그러나 목사들이, 교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매력 있는 사람이 되세요, 세련된 사람이 되세요, 훌륭한 사람이 되세요 라고 합니다. 새로운 메시지를 어디 책 같은데서 배워서 합니다. 우리 교회 세련 됐다, 우리 교회 멋있다. 사람들이 몰릴 수도 있습니다. 옛날 메시지, 성경을 그대로 설교하는 것은 듣기 싫어합니다. 십자가 메시지 또 하시네, 이제 그만 좀 하시지. 그러나 아셔야 합니다. 영혼이 구원 받는 것이 전부입니다. 한 영혼,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위해서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놔두고 한 마리를 구하러 가는 것이 목자의 마음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여러분의 가족 중에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매일 슬퍼하며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어떤 업이든, 전문성이든, 비전이든, 소망이든 그것이 영혼구원과 상관 없으면 그 일들은 아무 쓸모없는 일들이 되어버립니다. 이 땅이 전부 인 것처럼 사단은 프레임을 걸어 놓았습니다. 이 땅이 전부인거야, 좋은 집이 전부이고, 차가 전부이고 성공한 높은 자리에 가는 것이 전부라고 늘 우리에게 심어줍니다. 주입합니다. 늘 그것으로 남과 비교합니다. 그래서 슬퍼하고 낙심이 된다면 여러분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정말 아하스 왕과 이스라엘 백성처럼 앗수르를 부러워하고 바벨론을 부러워하고 그것과 비교해서 우리는 왜 가난하냐고 하나님의 백성이 그런 낙심 속에 있다면 그것은 회개해야 될 일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비록 우리가 가난하고 엄청난 삶이 아니더라도, 작은 삶이더라도 우리가 구원을 꿈꾸고 천국에 입성할 것을 기대하고 우리 삶을 가꾸고 보람되게 만들어서 우리 이웃에게, 저들에게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처럼 가치 있는 삶은 없는 것입니다. 기뻐 뛰며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 인간에게 소망을 둘 때 겪는 굴욕과 깊은 상심_이사야7:18-25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곳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 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쪽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 털과 발 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그것들이 내는 젖이 많으므로 엉긴 젖을 먹을 것이라 그 땅 가운데에 남아 있는 자는 엉긴 젖과 꿀을 먹으리라 그 날에는 천 그루에 은 천 개의 가치가 있는 포도나무가 있던 곳마다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라 온 땅에 찔레와 가시가 있으므로 화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보습으로 갈던 모든 산에도 찔레와 가시 때문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풀어 놓으며 양이 밟는 곳이 되리라_이사야7:18-25’

애굽을 파리로 표현하셨습니다. 앗수르의 군사들을 벌로 표현했습니다. 남유다를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거친 골짜기, 바위 틈, 가시나무 울타리, 모든 초장. 무엇인가요? 우리의 빈틈들 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사라진 황폐한 공간들입니다. 거기에 파리와 벌들이 와서 앉았다고 합니다. 20절에 앗수르 왕으로 인해서 네 털을 다 깎아버리겠다는 것입니다. 21-22절에 엉긴 젖은 젖이 너무 많이 나서 고여 있다는 것입니다. 모유 수유하면 아이가 젖을 먹지 않으면 뭉친다고 합니다. 엉긴 젖. 고여 있는 젖입니다. 무엇을 이야기합니까? 다 포로로 끌려가서 젖 먹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꿀이 많습니다. 벌들이 많잖아요. 앗수르 땅에 벌이니깐요. 꿀이 많은데 먹을 사람이 없어요. 다 포로로 끌려갔어요. 23-24절에 하나님의 포도나무가 있던 곳에 찔레와 가시가 납니다.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요. 무슨 말인가요? 이 땅에 살아야 될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서 없습니다. 25절에 농기구로 갈던 모든 산에도 찔레와 가시 때문에 두려워서 그리고 가지 못할 것이요. 우리가 징조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징조를 거부하고 앗수르에게 소망을 두었으니 나중에는 앗수르에게 도리어 고통을 당하고 굴욕을 당하게 됩니다. 앗수르가 남유다를 영원히 보호해줄 것 같습니까? 교회가 세상을 의지하면 그 세상이 교회를 보호해 줄 것 같습니까? 교회가 정치인을 의지하고 대통령을 의지하면 그 대통령이 교회를 잘 보살펴 줄 것 같습니까? 요즘 교회연합회들이 하는 짓을 보면 짓이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기도 안찹니다. 교회지도자들이 정치인들에게 가서 굽신거리고 정권에 아부합니다. 똑같습니다. 아하스는 앗수르가 자기 편이라고 생각했지만 앗수르의 속은 새까맸습니다. 에돔을 치고 북이스라엘을 치고 남유다 쳐야지. 이미 처음부터 앗수르는 그런 나라였습니다. 지도자 한 사람 때문에 다 빼앗겼습니다. 포도나무도, 보습으로 밭 갈던 행복도 빼앗기고, 젖을 내도 먹일 사람이 없습니다. 다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꿀 먹을 사람이 없어서 꿀이 넘쳐납니다. 자녀를 낳을 수가 없습니다. 포로로 끌려갔는데 무슨 출산을 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구원을 바라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십자가를 예수 그리스도의 징조를 구하지 않으면 인생은 그렇게 됩니다. 돈 벌어 놓아도 엉긴 젖이 되고 발전된 세상도 꿀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이 돈돈돈하고 돈 많이 벌어서 성공해야지. 그 성공이 엉긴 젖, 꿀이 됩니다. 먹을 사람이 없습니다. 내 자녀들 교회 다 떠나고, 내 자녀들 예수 다 안 믿고 성공해서 뭐합니까? 잘 살아서 뭐합니까? 오늘 잘 들으셔야 합니다. 오목사 한을 가지고 이야기 하네. 아닙니다. 이사야 본문 이야기 입니다.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징조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잘 살아보려고 앗수르와 결탁했습니다. 그래서 다 잘 살아서 하나님이 비유로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꿀도 많고 젖도 많은데 먹을 사람이 없구나. 다 포로 되어버렸습니다. 여러분 자녀들이 전부 구원과 상관없이 사는. 그래서 실컷 겉모양 추구해서 성공했는데 내 자녀들은 예수를 안 믿습니다. 완전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게 실패한 인생이에요. 내 자녀들이 변호사 되고 사장 되고 이런 것을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왜요? 예수를 안 믿어요. 우리 인생 잘 살았다. 행복하다 즐거웠다. 구원이 없어요. 그것을 황무지라고 하고 황폐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나님은 징조를 구하면서 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에 비슷한 본문이 있습니다.

 

Ⅲ. 징조를 구하라_이사야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_이사야7:14’

 

-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니_마태복음16:1-4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시니라_마태복음16:1-4’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님에게 표적을 구합니다. 표적은 사인이잖아요. 어떤 목적을 위한 동기입니다. 왜 이것을 구하죠? 이미 하나님은 징조를 이스라엘백성에게 말씀으로 다 주셨는데, 이미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성경을 다 주셨는데, 이미 예수님이 징조로 이 땅에 다 오셨는데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그 앞에 있는 그리스도를 놔두고 표적을 구했습니다. 표적은 무엇인가요? 표적은 내 욕심, 내 목적, 내 동기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에게 표적을 구한다는 말은 이 예수가 능력이 있는 것은 확실한데 이 예수가 내 편인지 아닌지 와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예수 내 편 할래? 안 할래? 이런 식입니다. 표적은 이런 것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처럼 주님 우리 잘 먹고 잘 살게 해주시면, 주님 우리 성공하게 해주시면, 주님 우리 조금 잘되게 해주시면 잘 믿을게요. 이것이 표적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표적을 구합니다. 주님 제 목적을 이루어주시면, 제가 원하시는 것 이루어 주시면, 제가 교회에 충성, 봉사하겠습니다. 충성, 봉사하는 한 명도 못 봤어요. 왜?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상담하러 많이 옵니다. 목사님 제가 정말 힘든데 이것만 해결되면 교회 잘 다닐게요. 이것 좀 도와주세요. 그것 풀리면 교회 충성, 봉사할 것 같나요? 또 옵니다. 목사님 이번에는 이 문제가 이러면서. 이 땅의 것은 우리에게 만족을 주지 않습니다. 회사만 잘 가면, 승진만 하면, 내가 집만 사면, 제가 차만 있으면 다들 이러잖아요. 아닌가요? 결혼만 하면, 애만 생기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애 생기면 또 문제가 옵니다. 끊임이 없습니다. 그것이 표적입니다. 그러면 잘 믿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징조로 다 주셨습니다. 아닙니까? 그 욕심이 프레임이 되어서 바리새인처럼 내 앞에 계신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것입니다. 

 

-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을 삼가라_마태복음16:5-12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제자들이 서로 논의하여 이르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들아 어찌 떡이 없으므로 서로 논의하느냐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였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느냐 어찌 내 말한 것이 떡에 관함이 아닌 줄을 깨닫지 못하느냐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그제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_마태복음16:5-12’

 

왜 주의하라고 이야기하십니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50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쳤던 종교의 전통, 율법의 겉모양들 다 구원의 메시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한국교회 정신 차려야 됩니다. 거짓 선지자, 삯꾼 목사를 떠나라고 합니다. 구원을 말해주지 않고 진리를 말해주지 않으면 복음을 이야기해주지 않으면 떠나야 합니다. 성공하라 잘 되라 그렇게 설교하는 사람들 주의하라고 합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_마23:27-28’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무엇인가요? 회칠한 무덤 이야기입니다.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옳게 보이나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프레임에 속지 마라는 것입니다. 옳게 보이는 것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징조를 구하라고 합니다.

 

- 징조를 구하라_마태복음16:13-20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이르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_마태복음16:13-20’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이 우리의 유일한 징조이십니다. 징조를 구하면 어떻게 되나요? 내 영혼이 살게 됩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게 됩니다. 천국이 믿어지고 하늘 보좌가 보이고 예수님 재림 때를 기대하면서 살게 됩니다. 지혜와 힘이 생깁니다. 엄청난 능력이 우리 안에 생깁니다. 사건과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이 다릅니다. 왜? 예수님을 매일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 징조를 구하고 살면 영적인 힘이 생기기 때문에 이 시대의 유혹과 이 시대가 프레임으로 겉모양으로 죽이려고 하는 것들에 분별하는 힘이 생깁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징조를 구하고 살면 우리가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반석 같은 교회로 이 땅에서 살 수 있습니다. 세상의 흐름, 발전이나 세상이 우리에게 압박하는 것들에서 벗어나서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반석 같은 교회로 우리가 이 땅에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하세요. 예수님을 찾으세요. 그 뿐 아닙니다. 천국열쇠를 주시겠다고 합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가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네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우리가 기도하고 간구하고 그때 하나님이 역사하시겠다고 합니다. 그 권세를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징조를 구하십시오. 다시 우리의 금요예배가 회복되어야 하고 가능하면 새벽예배도 회복되어야 합니다. 가능하면 우리는 성경을 읽고 성경공부를 하는 문화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제가 아주 조금씩 스텝 바이 스텝하고 있는 것 느껴지시죠. 사실 성격 같았으면 한꺼번에 확 풀고 한꺼번에 하고 싶은데 우리 성도님을 꼬시고 충격 안 받게 조금씩 교회 문화를 완전히 바꿀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오셔서 성경 읽고 성경 공부하시고 교제하는 문화가 될 것입니다. 같이 기도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이 내 인생에, 하나님의 재림의 약속이 다시 오실 주님이 내 인생의 소망이 되고 내 인생에도 약속이 되도록. 그래야 우리가 세상에서 함몰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 속지 마세요. 그것들은 우리에게 표적을 구하게 하고.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합니다. 징조를 구하지 않게 합니다. 인간에게, 세상에게 소망을 둘 때 우리는 엄청난 굴욕을 당하고 깊은 상심을 겪을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징조를 구하십시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이 깊고 단단해져야 합니다. 표적을 구하는 신앙이 아니라 징조를 구하고 그 징조로 내 영혼이 살아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반석 같은 교회가 되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 징조로 인해서 내 영혼이 살아나서 찬송하는 인생이 됩니다. 찬송하는 인생이 되어야 사단이 우리를 공격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영적인 세계가 진짜 벌어지고 있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교회도 프레임을 걸어 버립니다. 중고등부 설교는 15분 설교만 해야 한다. 요즘 아이들이 집중력이 없어서 15분만 설교해도 애들이 힘들어한다. 완전 사기꾼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내용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내용을 충분히 아이들에게 전달했는지가 설교의 핵심입니다. 시간이 방법이 핵심이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살려야 합니다. 학원만 가도 좋은 학원은 내용을 전달하는 학원입니다. 좋은 과외 선생님은 내용을 잘 전달하는 것입니다. 학원 이쁘게 꾸미고 시간 잘 지키고, 선생님이 예쁘고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가 자꾸 겉모양에 속습니다. 프레임에 걸려 버렸습니다. 속지 마십시오. 그래서 수많은 표적을 구하는 세대, 그들이 걸어놓은 프레임에서 빠져나와야 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는 징조. 내 인생이 어떻게 하면 구원 받을까? 우리 가족이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 내가 어떻게 영혼 구원을 위해서 내 인생이 쓰임 받을 수 있을까? 그 징조를 구하면서 사는 삶. 내 영혼이 살아나고 깨어나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사는  삶. 그것이 징조를 따라 사는 삶입니다. 아하스와 남유다가 그 징조를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신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이 징조를 깨달았으면 참 좋았을텐데. 다음 주에 이야기를 계속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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