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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09-1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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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9월 13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성도의 사명은 은혜입니다

본 문

이사야 6:1-13

 

 오승주 목사

 

Ⅰ. 웃시야가 죽고 난 뒤

 

- 육신의 희망이 사라질 때_이사야6:1, 역대하26:16-21

 

온라인으로 몇 주 계속 예배를 드리다보니까 저희 교회 성도님들이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설교하기 직전까지도 제 핸드폰으로 몇 분이 접속해 있는지 살펴보곤 합니다. 많이 접속했는지 적게 접속했는지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님들이 예배를 드리고 계시는지, 생방송에 참여하고 계시는지 그런 목회자의 마음이 늘 저에게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예배를 드려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의 유일한 통로입니다. 예배가 여러분에게 안식이 되고 평안이 되고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놀라운 힘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사야서 5장까지가 이사야 선지자를 사용하시던 어떤 시대의 상황들을 하나님이 설명하시고 이사야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예언에 관한 설명이었다면 6장부터는 본격적으로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사역들,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일들을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 6장에 보니까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_이사야6:1’

 

다시 말해서 웃시야 왕이 죽던 그 해에 이사야는 처음으로 천국, 하나님의 보좌를 보게 되었다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대해서 어디에 기록이 잘 나왔냐면 역대하 26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제사장 아사랴가 여호와의 용맹한 제사장 팔십 명을 데리고 그의 뒤를 따라 들어가서 웃시야 왕 곁에 서서 그에게 이르되 웃시야여 여호와께 분향하는 일은 왕이 할 바가 아니요 오직 분향하기 위하여 구별함을 받은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이 할 바니 성소에서 나가소서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에게서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 웃시야가 손으로 향로를 잡고 분향하려 하다가 화를 내니 그가 제사장에게 화를 낼 때에 여호와의 전 안 향단 곁 제사장들 앞에서 그의 이마에 나병이 생긴지라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음을 보고 성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웃시야 왕이 죽는 날까지 나병환자가 되었고 나병환자가 되매 여호와의 전에서 끊어져 별궁에 살았으므로 그의 아들 요담이 왕궁을 관리하며 백성을 다스렸더라_역대하26:16-21’

 

지금 성경은 웃시야 왕이 사람을 죽였다,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죄라고 조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딱 하나 엄청난 죄악을 조명하고 있는데 그것이 제사장이 드려야 하는 제사를 웃시야 왕이 직접 드렸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범죄인지 하나님 앞에서 즉결심판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제사장의 일을 왕이 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이야기 하나요? 그냥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의미인가요? 물론 그런 의미도 있겠지만 월권을 했다는 의미인가요? 아니죠.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사,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언약을 설명하고 오실 메시야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일에 누가?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자신이 가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엄청난 인간의 욕망이고 교만입니다. 사단이 창세기 3장에 아담과 하와를 속일 때와 똑같은 것입니다. 그런 죄의 유혹이 웃시야 왕에게도 있고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계속해서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 목회자들도 예수 그리스도가 사라지고 내가 그 자리에 가려고 하는 욕망들. 우리 신앙에 예수님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예수님이 있습니까? 한국교회에 지금 예수님이 계신가요? 아니죠 목사님이 계시고 어떤 뛰어난 사역자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사야 때에,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에게 하나님이 거룩한 현장을 보여주셨다는 것은 굉장한 상징적으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웃시야 왕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백성들의 어마어마한 기대와 희망을 몸소 다 받고 있는 아주 뛰어난 왕이었고 하나님이 그를 세워서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던 왕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의 육신적인 희망인 왕이었습니다. 왜? 웃시야 왕 때 남유다는 엄청난 번영을 이루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엄청난 번영을 이루어서 심지어는 제사장들과 모든 선지자들까지 웃시야 왕을 존경하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었습니다. 어떻게 죽었죠? 교만함으로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하나님의 구속사의 역사에 침범해서 죽었습니다. 여러분 웃시야 왕이 타락하고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자기 아들이 섭정을 하게 되는데 섭정이지만 구약에 나병은 지금의 나병, 코로나와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구약에 나병, 문둥병이 걸렸을 때는 완전 격리입니다. 나중에 웃시야는 죽고 나서도 왕의 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완전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평생을, 수십 년 동안 남은 인생을 별궁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요담으로부터는 완전히 타락하는, 쇠퇴하는 남유다를 보게 됩니다. 여러분 세상이 갑자기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무너집니다. 교회가 갑자기 무너지는 것이 아니고 서서히 무너집니다. 대영제국, 대로마와 같이 앞에 대자, 위대한 Great 이런 단어들이 붙어서 역사를 호령할 것 같은 그런 큰  애굽과 같은 바벨론 같은 나라들이 다 무너졌고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냥 무너진 것이 아니라 서서히 무너졌습니다. 작은 사상들, 작은 타락들, 작은 것들이 어마어마한 강한 나라들을 무너뜨리고 강한 시대들을 무너뜨렸습니다. 영원할 것 같은 나라와 왕들, 왕조들이 무너졌습니다. 세상은 갑자기 무너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이 엄청난 짧은 기간에 엄청난 발전을 이루고 엄청난 강대국이 되었지만 어떻게 무너질지 모릅니다. 작은 이념들, 사상들, 별거 아닌 것들에 의해서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뭐 저 정도가 나라를 무너뜨리겠어? 이렇게 생각하는 아주 불순한 사상들. 그래서 우리 어른들이 그렇게 싸우는 것입니다. 그런 사상들이 걱정이 되어서 싸우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학교의 교육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최소 15년-20년을 교육 받습니다. 그런데 교육을 하는 교사가 불순한 사상을 가지고 교육을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집에서 영향 받는 것보다 몇 배는 더 큰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불순한 사상을 가지고 가르치는 선생님들이 많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대학교 교수가 동성애를 가르치는, 동성애를 하는 교수라면 영향이 스며들게 됩니다. 이건 죄가 아니구나, 즐기는 거구나. 그래서 서구사회가 다 무너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모님들 자녀교육에 신경 써야 합니다. 그냥 사교육이나 학교 교육에만 맡겨두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신앙교육은 부모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신앙교육에 대한 프로그램들을 잘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앞으로 우리교회가 굉장히 많이 투자하고 신경 써야 되고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 부어야 할 것이 자녀들의 신앙교육입니다. 그것은 아낌없이 쏟아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왜냐면 그런 것이 나라를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들은 교육에 생명을 겁니다. 나라가 무너지지 않아야 되니까. 그런데 놀랍습니다. 외부의 어떤 공격과 어떤 어려운 환경들이 어마어마해서 진작 무너질 것 같은데 무너지지 않는 나라들, 교회, 단체는 뭐가 있나요? 교육이 있습니다. 교육이 무너지지 않기에. 신앙은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의 문제들은 점차 세상과 타협하고 세속적인 것과 타협하고 무너지는데 한국교회의 문제들이 무엇인가요?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지 않고도 성장 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수많은 목회자들이 교회 중직자들이나 사역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지 않고도 성장할 다른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수많은 교회 안에 활동들을 만들어서 그것이 마치 신앙을 성장시켜줄 것 같은 착각들. 교회에서 같이 모여서 교제하고 활동하면 신앙이 성장합니까? 기분 좋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하는 성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참을성 있게 공부하고 참을성 있게 묵상하는 훈련을 통해서 하나님에 대한, 말씀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지식보다 교회활동이 훨씬 중요한 시대를 2000년대 들어와서 교회가 열어버렸습니다. 교회가 너무 많은 활동이 있습니다. 권사님들 밥하고 이런 것뿐만 아니라 교회가 성장하는 도구로 활동이라는 것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한국교회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나요. 모임도 많고 훈련도 많고 활동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습니다. 그 결과 삶을 변화시키고 우리 인격을 하나님 닮아서 키워주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교회 안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의 공격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것이 마귀의 공격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밖에서 핍박하고 문제가 많네, 밖에서 언론이 공격하고 그것은 마귀의 핍박이 아닙니다. 진짜 핍박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공부하고 묵상해서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것들을 빼앗아 가는 것들이 진짜 사단의 공격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너무 거룩해서 죄인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분에 관한 참 지식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삶에 우상이 가득하고 거짓 헌신이 가득하다는 것. 거룩함을 다 빼앗겨버렸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우리 다 빼앗겨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다시 이사야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웃시야 왕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셨습니다. 웃시야 왕에 대한 어떤 소망들을 이사야가 봤을 것입니다. 이사야도 헷갈렸을 것입니다. 이사야도 사람인데 웃시야 왕 끝내준다, 정책 끝내주네, 외교 끝내준다, 가난한 우리  나라, 작은 땅에서, 어려운 환경에서 배불리 먹게 하는 왕 끝내주네. 엄청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무너졌습니다. 어느 날 삽시간에 소문이 났습니다. 왕이 나병에 걸렸다고? 왜?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웃시야가 뭘 잘못했는데? 사람들이 하나님께 따졌을 것입니다. 왜? 하나님의 계획과 마음을 알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왜 웃시야 왕을 어렵게 합니까 라고 그 당시의 문헌들을 살펴보니까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이 머리까지 가득했습니다. 왜 우리 왕을 벌주십니까.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왜 교회를 이렇게 어렵게 만드십니까. 우리 목사님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남유다 백성들이 웃시야 왕이 나병이 걸렸다고 했을 때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머리 끝까지. 그래서 입술이 얼마나 부정했는지 하나님을 저주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의지했다는 말이에요? 하나님이 웃시야 왕을 통해서 주신 복이라고 생각을 안하고 웃시야 왕을 우상시하고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 것처럼, 하나님인 것처럼 섬겼다는 것 입니다. 그 웃시야 왕을 하나님께서 무너뜨리셨습니다. 그때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이사야를 부르시고 무엇을 보여주셨나요?

 

Ⅱ. 이사야에게 보여주신 거룩과 맡기신 사명

 

- 거룩을 보고 기뻐한 것이 아니라 회개한 이사야_이사야6:2-5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_이사야6:2-5’

 

어떤 상황이냐면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불렀습니다. 스랍은 천사들, 사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사들이 어떻게 보필 하냐면 천사들도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얼굴을 가리고 발을 가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사들마저도 하나님을 볼 때는 얼굴을 가리고 다리를 가립니다. 옛날에는 그런 왕들이 많았습니다. 조선시대나 황제들 시대는 황제 앞에 나가면. 에스더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에스더가 왕 앞에 나갈 때 왜 목숨 걸고 나갔냐면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 왕 앞에 나가면 사형입니다. 그것이 법입니다. 에스더가 목숨 걸고 간 것입니다. 자기 히브리 민족이 하만에 의해서 모략을 당했을 때. 왕 앞에 갈 수 없습니다. 그냥 왕 앞에 가면 누구라도 사형입니다. 유일하게 왕이 황금지팡이를 내걸 때 살 수 있었습니다. 권한이 왕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을 하만이 알고 전략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인간 황제도 그런데 하나님은 거룩하십니다. 천사들도 눈을 가리고 다리를 가리고 뭐라고 부르죠?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세 번을 부릅니다. 세 번을 했다는 것은 완전한 거룩을 이야기 합니다. 그 거룩을 이사야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늘 보좌를 보여주십니다. 우리 같으면 하늘 보좌를 봤으면 하나님을 봤으면 찬송이 나오고 기쁨이 나오고 신날 것 같고 주님 감사합니다 할 것 같은데 이사야가 뭐라고 회개하나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뭐가 망했는지 뒤에 보충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내 입술이 부정하다. 그리고 부정한 입술을 가진 백성들 중에 함께 거했다. 무슨 말인가요? 선지자 이사야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송하고 경배하고 하나님을 의지했던 입술의 고백, 찬송의 고백, 구원의 감사와 감격의 고백으로 살지 않고 웃시야 왕을 섬기고 하나님을 원망했던 그 부정한 입술들 속에 이사야도 같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깜짝 놀란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하나님의 거룩을 마주하면, 정말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면 뭐가 터져야 되죠? 회개가 먼저 터져야 됩니다. 그동안 우리가 죄악 속에 살았던 것,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이 계시다고 듣기는 들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믿지 못했던 우리의 모든 삶은 사실 죄악 투성 입니다. 지금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성도들이. 내가 죄인이라고?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았는데? 천사도 눈을 가립니다. 얼굴을 가립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천사도 다리를 가렸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회개할 것이 없습니까? 대부분 자기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한국교회의 현실모습입니다. 대부분 한국교회 목사들이 우리 죄인 아니라고 합니다. 아직 거룩을 보지 못해서 죄가 우리의 삶과 마음과 눈을 가리고 우리의 삶의 소망을 가려서 부족함이 없다고 할 때에 우리는 무엇을 봐야 하나요? 주님이 내 안에 계시는지, 내가 주님 밖에 있는지, 주님이 밖에 있는지. 그것을 살펴야 합니다. 회개 없는 신앙은 주님과 동행하는 신앙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회개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어제 회개했는데 오늘 또 해야 되나? 네. 싱싱한 야채가 계속 싱싱한 것 보셨나요? 금방 시들어 버립니다. 우리의 영혼은 금방 부패하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 앞에 걸리적거리는 것이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 앞에 우리 인간은 늘 걸리적거리고 늘 부패하고 늘 타락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으로 이야기합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부정이 아니라 강한 긍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거룩해지고 싶고 정말 우리 영혼이 소생케 되어지고 우리 영혼이 정말 살아있는 영혼이 되려면 우리는 매일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가야 합니다. 은혜를 매일 받아야 합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이것이 정상입니다. 진짜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갔을 때는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범죄 해놓고 오리발 내미는 사람들, 나 뭐 한적 없는데? 이러다가 법관 앞에 가면 나중에 회개합니다. 잘못했던 것들이 그때 생각납니다. 법 앞에 가면, 경찰서 들어가면 고발하고 나면 생각납니다. 인터넷에서 이상한 짓 하는 사람들, 사람들 죽이고 비난하고 비판했던 사람들 고소해서 법 앞에 가면 당장 감옥 갈 거 같고 그러면 다 회개합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잘 모릅니다.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가 회개하는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회개한 이사야에게 하나님께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그것도 강제로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우리는 신학자들이 성삼위 하나님을 설명한다고 하고 있는데 하나님 자신을 복수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가 하나님 보좌를 봤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나를 보내소서. 그때 이사야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상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 회개한 이사야에게 맡기신 이해할 수 없는 사명_이사야6:6-12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_이사야6:6-12’

 

이사야에게 거룩을 보여주시고 사명을 맡기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변화시켜봐, 남유다 백성을 회복시켜봐 이런 사명이 아니라 가서 너희들 망한다고 말해라, 황폐하게 될 거라고 말해라, 어차피 깨닫지 못할 거긴 한데 깨닫지 못한다고 말해라. 남유다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보여주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미래 예언적인 말씀입니다. 남유다가 끝끝내 언약을 회복하지 못하고 바벨론에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하는 것 입니다. 끝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바벨론에 완전한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하는 것이고 그리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야 하는 어떤 이스라엘 민족, 지금 신약시대, 저와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당해야 할 사명 중에 하나였습니다. 포로가 되는 것.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특별한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설명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온갖 모진 것들을 다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 선교학자들이 땅 끝이 이스라엘, 유대인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남유다가 완전히 황폐하게 되는 것. 이사야에게 이런 사명을 언제 맡기셨냐면 이사야에게 죄사함이라는 은혜가 있을 때 맡기셨습니다. 이사야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입술이 부정합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그때 하나님이 회개하는 이사야에게 천사를 보내서 제단 숯불, 숯불이 피었을 때, 불에 탔을 때. 하나님이 제단에 숯불 올리고 제물을 올렸을 때 그것을 응답하시는 방법이 불로 태우셨을 때입니다. 그것이 다 타고 숯불이 빨갛게 피었을 때 그것을 가지고 이사야의 입술에 대었습니다. 네 죄가 사하여졌다. 죄가 사하여 졌다는 것은 어떤 은혜인가요? 여러분 우리가 평생 소망하고 평생 간절히 원해야 할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우리 죄 사함 받는 것입니다. 아닌가요? 에이 그거 예수님 영접할 때 죄 문제 다 끝났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죄가 그렇게 사해질 것 같습니까? 죄가 사해졌다는 것에 대한 은혜와 감동이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뭐에 대한 감동입니까? 응답받은 것, 축복 받은 것, 교회가 부흥 된 것, 승진한 것, 성공한 것, 번영한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와 똑같습니다. 웃시야 왕 같은 왕이 생겨서 이 나라가 잘되는 것. 한국교회들 정신 차려야 합니다. 이 나라의 어떤 정치인이 이 나라를 잘 이끌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뭐에 대한 소망이 있습니까? 교회가 죄 사함의 소망이 없습니다. 마치 사도행전에 이방인에게 처음으로 성령의 세례가 임해서 고넬료 가정에 난리가 났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이 고넬료 가정에도 임했습니다.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이 그들에게 임했습니다. 고넬료 가정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뻐 뛸 일인가요? 베드로가 그 소식을 가지고 돌아갔더니 예루살렘의 할례자들이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가서 그들과 밥을 먹는 것이 말이 되느냐? 가당키나 하냐? 뭐에 관심이 없죠? 성령이 임하는 것에 관심이 없고 죄 사함에 관심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밖의 불신자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교회가 목회자들이 장로님들이 권사님들이 중직자들이 뭐에 관심이 없나요? 죄 사함에 관심이 없습니다. 옷 똑바로 입고 다녀, 신앙생활 그게 뭐냐? 지금 교회 프로그램이 이게 뭡니까? 다들 그런데만 관심이 있습니다. 인사 똑바로 하라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아닌가요? 전통, 관습, 우리 자리, 우리 명예, 우리 자존심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원하시는 것은 우리 죄를 사해주시려고 하나님은 구약, 신약, 모든 역사를 통틀어서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우리를 죄사하시려고 하나님은 모든 계획, 모든 전략, 모든 하나님의 것을 동원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하시는데 우리의 관심은 죄 사함에 관심이 없습니다. 죄가 사하여 졌다는 것은 우리가 천국에 입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감동이 잘 안 오시죠? 잘 안 믿더라고요 사람들이. 장례식장에 가보면 다 압니다. 예수님 믿고 돌아가셨는데 다 울고 있습니다. 우는 것이 저도 부모님 돌아가실 때 울었습니다. 당연히 웁니다. 그런데 우는 것이 느껴지는데 저거는 부모님이 내세에 천국 갔다는 것에 대한 기쁨의 눈물이 아니구나. 거의 없습니다. 제가 장례식을 수백번 가봤는데 천국환송에서 정말 그 기쁨으로 신앙을 표현해서 예배하는 장례예배를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이 믿지 않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죄 짓고 사는 것이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지옥을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지옥은 영원합니다. 한 번 가면 기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가면 무저갱 속에서, 유황과 불구덩이 속에서 영원히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 형제, 자녀 천국 가는데 관심이 없다고요? 죄 사함 받는 것에 관심 없다고요? 죽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족이 지금 예수님 안 믿으면 죽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내 자존심이 어디 있습니까? 바닥을 기어서 무릎을 꿇고라도 예수님 믿게 해야 합니다. 헌신하고 희생을 다해서.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 믿게 하는 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닙니다. 강제로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그것을 본 것입니다. 이사야가 봤습니다. 죄 사함을 받아 버렸습니다. 거기다 무슨 사명을 맡기십니까? 이사야에게 이상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여전히 웃시야 왕이 죽고 나서도 그 영향 아래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 말씀을 들어도 외면하고 부정하고 이건 하나님이 완전히 역설적으로 이사야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서 말해라 너네들 못 깨달을 거라고. 이 말은 못 깨달을 것을 아시는 것입니다. 가서 회개를 선포해라.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해라. 그 말이 아니고 선포해도 안들을 것이다. 이것은 또 하나의 역설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약 전체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너희들이 소망했던 의지했던 웃시야의 왕이라도 우리의 영혼의 문제, 구원의 문제, 죄 사함의 문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야라고 역설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발전된 시대라도, 그 어떤 능력 있는 왕이라도 너희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해줄 수는 있지만 너희들의 영혼이 하늘 보좌 앞으로 와서 영광스럽고 거룩한 곳에 와서 천국에 입성하는 것 해결 못해 주는 거야. 다 황폐하게 될 거야. 너희들이 의지하는 것들, 우리가 의지하는 의술, 경제, 제도, 이 시대, 우리는 정말 좋은 시대에 살고 있어 이런 것들. 다 황폐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의지하는 것들에게 포로가 되고 노예가 될 것이다. 실제 그렇게 됐습니다. 죄는 여러분 우리에게 굉장히 좋은 것을 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처음에는 그것들을 의지하고 좋아합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우리를 노예 삼아버리는 것이 죄입니다. 죄의 노예, 중독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중독 시켜 버립니다. 빠져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친구 목사가 예수님을 늦게 믿고 신학교를 늦게 갔습니다. 가기 전에 사업을 하고 불신자로 살다가 예수님 믿고 복음 받고 목회자가 된 친구가 있는데 친구에게 제일 힘든 것이 담배를 끊는 거라고 합니다. 미치겠다고 합니다. 알겠는데 안 된다고 합니다. 담배를 15년 가까이 펴서 너무 어렵다고 합니다. 늘 성도들에게 설교하고 사역하면서 죄책감이 든다고 합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담배를 안 끊고 있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이 두렵지 않다는 건데, 담배가 죄는 아니지만 목사로서 편하게 이야기를 하니까 하나님이 두렵지 않아서 그래. 여러분 죄가 저를 노예 삼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중독에서 어떻게 벗어나요? 그냥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 벗어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그냥 벗어나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두려워야 됩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 남은 자를 통해 다시 회복시키는 나라(남은 자는 거룩한 씨가 있는 자)_이사야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_이사야6:13’

 

이것은 성경을 관통하는 본문입니다. 여러분 세상 것들은 무너지고 망해도 십분의 일이 남아있습니다. 정치가 무너져도 웃시야 왕이 해놓은 것이 너무 탄탄해서 그 아들이 계속 이어 받아도 제도적으로 남아있습니다. 십분의 일이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황폐하게 된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남유다가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서 정말 우리가 의지하던 것들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그때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상수리나무, 밤나무가 다 베임을 당해도 그루터기가 남아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거룩한 씨를 이야기하십니다. 우린 자꾸 거룩한 씨, 남은 자 사상, 남은 자 신학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거룩한 씨는 사람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지금 우리가 자꾸 남은 자를 사람이라고 설명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물론 거룩한 씨를 품고 있고 거룩한 씨를 믿고 있는 사람이 남은 자가 될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거룩한 씨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명확하게 설명을 해야 합니다. 교회 다니는 우리 아이들보고 남은 자, 그루터기라고 이야기하는데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루터기입니다. 이 땅에 그루터기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신학적으로 정확히 선을 긋고 가야합니다. 단지 이 예수 그리스도께 이사야, 느헤미야, 사도바울, 디모데처럼 이 예수 그리스도께 발견되어서 쓰임 받았던 사람들을 남은 자라고 이야기 할 뿐입니다. 귀합니다. 다 포로가 되었는데 느헤미야, 다니엘은 무엇을 봤죠? 거룩한 씨를 보고 사는 것입니다. 다윗이 광야에 살 때 늘 하던 기도가 주님 내 눈을 열어 주옵소서, 내 눈을 밝히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무엇을 보길 원했습니까? 상황이 환경이 나를 완전히 짓누르고 악한 영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 끊어버리고 다 빼앗아가고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함몰시킬 때 다윗이 기도한 것입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씨를 보기 원합니다. 그런 자가 남은 자입니다. 핍박과 환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붙잡는 사람을 남은 자라고 합니다. 이것은 완전 소수입니다. 우리를 모두를 남은 자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씨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거룩한 씨를 통해서, 다시 말해서 어린 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도 해도 안 되는 죄 문제, 해도 해도 안 되는 지옥에서 빠져 나오는 문제, 재앙의 문제. 이 재앙은 우리가 잠시 가난하게 되고 육신이 병드는 재앙이 아니라 지옥 가는 재앙입니다. 거기서 건지실 분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이 말이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당장 힘들 수 있습니다. 경제문제, 인간관계문제, 가정문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문제가 없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제가 마음이 아픈 것은 남교회에 힘든 것은 마음이 아프지만 제 일이 아니죠. 우리 교회 성도님들이 코로나로 직장도 잃고 택배일도 할 수 있고 택배일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대리운전도 할 수 있고 그런데 그걸 부끄러워하고 비참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일에는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들과 여러분 가족들에게 나중에 존경받을 일이 될 것입니다. 진짜 비참한 것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내 중심, 내 신앙을 그것들에게 빼앗겨 버리는 것입니다. 그런 환경, 상황들이 우리의 주변을 에워쌉니다. 이사야에게 에워쌌습니다. 이사야가 어떻게 순교했는지 아시죠? 이사야가 거룩을 외칠 때, 죄 사함을 외칠 때 남유다 사람들이 미친놈 취급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그랬습니다. 다윗이 원래는 끝내주는 왕이 될 뻔했습니다. 골리앗을 물리치고 사울왕의 사위가 됐습니다. 내 인생이 목동이었는데 완전 풀렸구나하는 찰나에 사울 왕이 악신이 들려서 미쳐서 다윗이 인기가 더 많으니 죽이려고 자객들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다윗의 인생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여러분 아시죠. 10-13년 광야의 생활동안 미친놈처럼 살았습니다. 밥도 못 먹고 춥고 배고프고 살아보려고 발버둥 쳤습니다. 사망에 우겨싸임을 당했습니다. 그때 다윗이 뭐라고 고백하나요? 여호와의 사랑을 놓치지 않겠습니다. 주의 구원의 그 기쁨과 감사를 빼앗기지 않겠습니다. 다윗이 진짜 위대한 왕인 겁니다. 히브리서에서도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칼에 죽고 배고픔에 죽고 핍박 당하고 주를 위해서 순교하고. 그러나 그들이 믿음을 잃지 않았더라. 우리가 정말 잃어버리지 않아야 할 것이 있는데 절대 시험 들지 않고 포기하지 않아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거룩한 씨로 우리가 거룩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거룩해져서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거룩하신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있으니깐 가능한 것입니다.

 

Ⅲ. 성도의 사명은 은혜입니다

 

- 은혜는 그리스도인의 시작이자 끝_히브리서12:14-17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_히브리서12:14-17’

 

거룩함을 따르지 않으면 주님을 보지 못합니다. 한 그릇 음식 때문에 신앙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굶어 죽으면 죽었지.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이 기회를 놓치면 하나님의 때에 은혜를 받지 못하면 나중에 기회가 없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저와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인의 시작과 끝입니다. 전부입니다. 목사님 무슨 은혜만 이야기하십니까? 우리가 해야 될 사역도 있고 선교, 전도도 해야 하는데 전도, 선교 우리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사도바울이 로마서 14,15장에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나는 저 영혼에게 복음을 전할 자격도 없고 저 사람을 구원할 능력도 없는 자라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합니까? 그 착각이 웃시야 왕이 제사장을 재끼고 자기가 제사 드리는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생각해야합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 주님 어떻게 할까요? 예수님 오늘은 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어떻게 전할까요? 내가 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서 사셔야 됩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자칫 잘못하다가 옛날의 과거의 은혜만 붙잡고 전통만 어떤 주변에 상황들에 매몰되어 살면 예수님은 사라지고 나만 남게 됩니다. 내가 목사인데 말인데, 내가 이 교회를 개척해가지고 저에게 그런 소리를 듣지 않도록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내가 개척했는데 이런 분들 있잖아요. 내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데, 내가 훈련을 얼마나 많이 받았는데, 전도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내가 장로, 권사인데 말이야, 내가 헌금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저희 교회 성도님들은 그러지 않기를 바랍니다. 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라고 고백하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고백하길 바랍니다. 이 설교가 말씀이 귀에 들리셔야 됩니다. 이 은혜가 무엇입니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이마에 나병 하나 준 것도 이기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우리가 그 과거 교만에 벗어나지 못하면 평생 그것에 발목 잡혀 살게 됩니다. 매일 은혜 받아야 겨우 하나님께 걸림돌 되지 않고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매일 은혜를 받아야 하나님의 거룩에 걸림돌 되지 않고 그래도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하나님 나를 사용해주세요 간절히 기도해야 쓰임 받을까 말까한 인생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왜 이 은혜가 중요한가요? 요한계시록에 일곱 교회에 편지를 쓴 내용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일곱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 우리가 받아야 할 은혜의 본질은 무엇인가(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일곱 교회를 통하여)_요한계시록2:4-5, 10, 17, 25-28, 3:4-5, 10-12, 16-21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_요한계시록2:4-5’

 

상징들을 보셔야 합니다. 신앙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그 첫사랑, 처음행위. 제가 이 말씀을 들으면서 무서웠어요. 제가 고등학교, 대학교 때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저는 알고 있잖아요. 지금 저는 그렇게 하지 않거든요. 그때처럼 새벽에 일어나서 교회 가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안 하거든요. 그때처럼 간절히 부모님, 형제를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고 오직 사랑하고 섬기고 그거 안하거든요. 그거 기억하래요. 그거 회복하지 않으면 촛대를 옮겨 버리겠다고 하십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_요한계시록2:10’

 

무슨 말인가요? 마귀가 우리 주변에 시험을 줍니다. 환난을 줍니다. 이 말은 예수님 믿으면 미래가 잘 풀린다는 것이 아니라 환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짜 믿고 이사야처럼 거룩을 맛보고 구원에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의 인생은 주변에 환난이 있다고 합니다. 그때 충성하라고 합니다. 이 충성은 교회, 목사들에게 충성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씨를 위해서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을 알아들으셔야 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_요한계시록2:17’

 

하얀 돌에다가 새 이름을 기록한다고 합니다. 누구의 이름인가요? 저와 여러분의 이름입니다. 누구에게 준다고요? 이기는 자에게.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이 자기만 알 수 있는 그 구원의 확신을, 자기만 알 수 있는 그 구원의 감사를 준다고 합니다. 이기는 자에게. 이기셔야 합니다. 환경에 매몰되지 마십시오. 어려운 상황에 함몰되지 마십시오. 다른 것 다 빼앗기더라도 은혜를 빼앗기지 마십시오. 신앙을 지키셔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그 이긴 자에게 하늘 보좌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해주신다고 합니다. 이기기 전에는 이름이 기록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너희가 배경이 좋아서, 능력이 많아서, 배후가 좋아서 이 시험에 합격했지. 아니요 완전 틀린 말이에요. 아무리 배경이 좋고 능력이 있어도 노력이 없이는 안 되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능력입니다. 지금 신앙생활은 무엇인가요? 성경이 이겨야 준다고 하는데 그 이기는 과정을 거쳐 가는 것이 은혜 받았다는 증거입니다. 은혜가 없으면 그 과정 통과 못해요. 시험을 어떻게 통과해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환난을 어떻게 통과해요? 무엇이 있으니까요? 이사야처럼 보좌를 본 것입니다.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이 하리라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_요한계시록2:25-28’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_요한계시록3:4-5’

 

이기지 않는 자는 지워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꾸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면 안 지워진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신학적으로 다 따져봐야 될 것입니다. 히브리서에도 보니까 떠내려가는 사람이 있데요. 회개할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교회 다니고 열심히 신앙생활해도 결정적인 때, 다시 말해서 죽을 때 신앙고백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기억 못하신다고 합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은 한결같아야 합니다. 일관성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믿는 증거입니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_요한계시록3:10-12’

 

그냥 말씀이 아닙니다. 인내의 말씀입니다. 매일 성경 읽는 것, 설교 듣는 것 다 인내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은 우리를 지킨다고 합니다. 환난의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를 지키신데요. 누구를요? 말씀을 지키는 자가. 말씀을 우리가 지키고 주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우리 인생 위에 여호와의 이름을 성전에 기둥삼아서 기록하겠다고 합니다. 축복입니다. 자꾸 교회 성전 건축할 때 이 성경구절 가지고 기둥하나는 세워야 되니 헌금하십시오 하는데 말도 안 됩니다. 그 말입니까? 이 성전이 교회건물 성전인가요?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 구속사에 기둥이 되어야합니다. 우리의 작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이 구속사를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고 우리가 지키고 있는 거룩한 씨를 통해서 하나님의 구속사를 이루신다는 의미입니다. 교회건물 기둥은 헌금은 그냥 하시는 것, 공동체니깐 양심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_요한계시록3:16-21’

 

하나님이 토하여 버리신다고 합니다. 왜 토하신다구요? 교만입니다. 영적인 것입니다. 너희가 잘 먹고 잘 살아서 너 영혼이 공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이 말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권할테니 회개하라. 이것은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요? 불신자에게 영접메세지 할 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매일 모시지 않으면 매일 그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지 않으면 우리는 어떻게 된다구요?내 영혼이 피폐해지고 황폐해진다는 것을 모른다고 합니다. 우리 영혼이 얼마나 썩어 문들어지는 모른다는 겁니다. 매일 예수님을 만나라는 겁니다. 그게 회개입니다. 회개가 무엇인가요? 내 마음 문을 예수님을 향해서 매일 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은 불신자들에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저와 여러분에게 하는 말씀임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매일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이 은혜를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이 거룩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 황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유일한 거룩한 씨만 이 땅, 인류, 나의 가정, 자녀 살길인데 마귀에게 사단에게 지지 않으려면 거룩한 씨를 붙잡고 그 거룩한 씨를 붙잡는 은혜 안에 거해라. 마귀가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얼마나 영적으로 발악하고 있겠습니까? 이 복음을 희미하게 만들고 거룩한 씨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세상에 취해서 살게 만드려고 얼마나 악랄하게 발악을 하고 있겠습니까. 여러분에게 좋은 것 다 주면서 유혹해 가면서 이 은혜, 거룩한 씨를 향한 진짜 은혜를 놓치게 합니다.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그것을 못 듣게 하기위해서 사단이 얼마나 발악하고 있는지 아셔야합니다. 우리가 은혜를 놓치면 어떤 사역도 영원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저는 이 한국교회사를 조사, 연구하면서 확신한 것이 있습니다. 은혜를 놓치면 한국교회가 했던 사역은 도리어 우리에게 짐이 될 수 있겠구나. 영원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나 같은 죄인 주 은혜로 살고 있다고 매일 고백 할 때 우리 인생은 하나님 구속사에 걸림돌이 되지 않고 그나마 쓰임 받게 됩니다. 그 은혜 구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의 인생이 당장 고달프고 당장 광야 같지만 황폐한 세상 속에 살고 있지만 거룩한 씨를 붙잡아야 합니다. 거룩한 씨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으십시오. 예수그리스도를 사랑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가까이 하십시오. 행위가 아니라 사랑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해야 합니다. 거기서 나오는 말과 행동이 열매가 됩니다. 진짜 예수님을 사랑하시고 가까이 하셔야 합니다. 가식적으로 장로, 권사, 목사니깐 하는 것이 아닌 진짜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그게 은혜입니다. 그 은혜가 진짜 임할 때 거룩이라는 것을 체험할 때 여러분 인생에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에 일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사명은 교회의 사명은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셔서 먼저 예배자로 만드시고 그 후에 일하는 자로 만드신다’_A.W. 토저

 

예배. 다시 말해서 은혜 받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거룩을 보게 만드시고 체험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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