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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10-18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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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18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자랑할 것 없는 인생

본 문

이사야 10:1-19

 

 오승주 목사

 

Ⅰ. 신앙(목회)의 본질

 

오늘 본문 내용은 이스라엘이 왜 앗수르에 포로가 되었는지 하나님이 밝히고 계시고 그리고 하나님이 왜 앗수르를 들어 사용하셨는지 그리고 그런 앗수르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으시면 다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제가 요즘 목회자로서 굉장히 혼란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너만 혼란스럽냐고 하면 할 말은 없는데 제가 10-30년, 혹은 1000-200년 전에 목회자들도 다 그런 고민을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지금 되게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이쪽 가면 이 이야기가 맞는 것 같고 저쪽 가면 저 이야기가 맞는 것 같고 이런 시대잖아요? 그리고  예전처럼 이것은 신앙이고, 이것은 불신앙이고, 이것은 믿음이고 이것은 불신이고 이렇게 구분되어있는 시대가 아니고 이게 다 믹서 되어서 믿음 속에 불신앙이 있고 불신앙 속에 믿음이 있는 경우도 있고 도무지 알기가 어려운 시대인 것 같습니다. 여기가 옳지 않아서 떠나서 이쪽으로 가면 이쪽이 믿음이냐? 꼭 그런 것도 아니고 어디를 가든지 이런 것들이 혼합되어 있는 시대를 살기 때문에 저 혼자 살 것 같으면 그냥 제 신앙의 양심으로 살면 되겠는데 교회를 이끌어가는 주의 종이고 후대들, 청년들, 아이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야하는 주의 종이기 때문에 무게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더 성경을 많이 읽는 것 같고 더 교회 와서 기도하는 시간이 더 늘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극복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그리고 역사적인 책들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 도대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는지, 어떻게 이런 시기들을 극복해야하는지 하나님의 지혜를 달라고 많이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기도하고 있는 때입니다. 그런 혼란스러움들이 이제 우리 마음이나 우리 삶에 침투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빼앗긴 것이 무엇인가? 제가 성경을 읽으면서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신 것이 뭐냐면 베이직, 기본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 기본을 다 빼앗기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여러분 교회가 해야 될 일, 목사가 해야 될 사역, 성도들, 신앙생활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이 성경읽기이고 성령의 도우심, 인도를 받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 천국을 향해서 천성을 향해서 믿음의 길을 가라는 것이 기본인데 이상하게 그것을 다 빼앗겼죠. 요즘은 대화를 많이 하나보면 구원의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가 참 드뭅니다. 너무 복잡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내가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구원받아서 너무 감사해요, 너무 기뻐요, 내가 천국 갈 수 있게 돼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이런 고백을 들을 수가 없는 그런 시대가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우리는 다시 어려운 시대에 믿음의 길,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올바른 길을 가기 위해서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기본의 자리로 가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매우 혼란스럽다. 이번 주에 제가 속한 노회에 참석했습니다. 노회를 참석하고 나서 머리가 너무 복잡했습니다. 이게 맞나, 이게 틀리나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총회에서 결정을 못해서 노회에 내려온 것에 대해서 성도님들은 아셔야할 것 같습니다. 원래 교회는 당회가 구성되어야 교회입니다. 당회가 구성되어 있으면 당회장이기 때문에 담임목사가 당회장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회장은 담임목사가 곧 당회장입니다. 지금 총회에서 이슈가 되어서 부딪히는 것이 뭐냐면 당회장을 두고 밑에 담임목사를 세울 수 있는 법을 총회에 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되실 수 있는데 일단 저희 총회는 목사님들 은퇴시기를 스스로 없애 버렸습니다. 90-100세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교회 목회하실 수 있도록 은퇴라는 개념을 없애 버렸습니다. 그것을 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 또 새로 내려온 법이 당회장이 있고 담임목사님이 있다는 것 입니다. 저는 노회 6년간 참석하면서 제가 손 들어서 의견을 낸 것이 이번이 처음입니다. 무슨 의견을 냈냐면 지금 당장은 목사들에게 좋은 것 같아 보이지만 은퇴도 없고 당회장직을 유지한다는 것 이 말은 담임목사를 두고 은퇴목사나 20년 이상 목회하신 분들을 원로목사로 추대하는 것 자체를 없애버렸습니다. 계속해서 교회 당회장직을 유지하고 목소리를 낼 수 있고 권한을 가질 수 있고 밑에 담임목사를 따로 세워서 하겠다는 것 입니다. 저는 이것에 대해 반대의견을 처음으로 냈습니다. 당장 목사들이 좋은 것 같으나 한국교회 미래를 봤을 때는 악법이 될 수 있습니다. 몇몇 소수의 대형교회들이 그렇게 할 수 도 있지만 대다수의 교회는 그것이 말도 안 되는 법이라고 안건을 냈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은 있습니다. 제가 제법 존경하는 100주년 기념교회에서 은퇴하신 이재철 목사님은 은퇴하셔서 시골에 집 짓고 완전히 은퇴하셨습니다. 거기는 은퇴하시기 전에 100주년 기념교회는 특수한 교회입니다. 일반교회가 아닙니다.  양화진 선교사묘역도 관리해야하고 경기도에 있는 선교사묘역을 관리하기 위해 100주년 기념 사업회에서 세운 교회입니다. 거기를 은퇴하시면서 5명의 담임목사를 세우셨습니다. 설교하는 목사, 주일학교를 담당하는 목사, 심방하는 목사, 그리고 100주년 기념사업을 대, 내외적으로 담당하는 행정목사와 책임목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위에는 누가 있냐? 없습니다. 담임목사가 공동으로 교회를 같이 팀을 이루어서 목회를 하고 있는 아주 특수한 경우입니다. 그런다면 이해가 됩니다. 그런 교회는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당회장이 있고 밑에 담임이 있다는 것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냐면 기도해 달라는 것 입니다. 제가 성경을 많이 보는데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혼란스러움 들 이 너무 많습니다. 이게 맞나? 저는 목사니깐 그런 단체나 소속된 곳에 속해있으면 마치 제가 돌연변이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성경을 보고 성경에서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확인해보면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교회를 개척하면서 개척멤버들은 아시겠지만 저희 교회는 건축헌금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건축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떻게 건축을 안 할 수 있겠어요. 우리도 이 건물이 필요하고 예배처소 옮길 때 여러분들이 헌금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사람들이 모여들고 장소가 필요하면 늘릴 수도 있고 줄일 수도 있는 것이 당연한 건데 제가 왜 건축헌금을 하지 않겠냐고 했냐면 제 나름대로 신학적인 결론을 내린 것 입니다. 어찌 보면 제 마음은 건물 중심의 신앙보다는 우리 성도들에게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의 신앙을 가르쳐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구약을 읽으면서 저는 성전에 대해서 많이 공부를 했습니다. 구약에 다윗이 다윗 전 세대부터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것이 사명이었습니다. 다윗은 꿈에도 성전건축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다윗을 통해서 성전을 건축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다윗을 정말 사랑하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다윗이 준비한 모든 것을 가지고 성전을 지었는데 솔론몬이 성전을 짓고 나서 여러분 성경 읽어보셨죠? 봉헌기도할 때 그 기도, 솔로몬 인생에 가장 지혜로운 기도였습니다. 제가 볼 때 가장 복음적이었습니다. 뭐라고 기도했죠? 하나님 우리가 이 성전을 지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 성전에 갇혀지고 여기서 머물러 계시지 않은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하늘에 하늘에도 갇혀계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러나 이 성전을 바라보고 기도하는 흩어져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하나님이 어디 계시는지 모르는데 이 성전을 바라보고 당신의 약속을 기억하고 말씀을 기억하고 기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기억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엄청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답변하셨나요?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나의 이름과 나의 마음과 내 눈이 그곳을 향할 것이다. 그 말은 하나님이 성전에 계시겠다는 거에요? 머물러 사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 성전에서, 그 성전을 통해서 믿음으로 기도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마음을 주시고 눈길을 주시고 하나님 당신의 이름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성전에 하나님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솔로몬 성전이 어떻게 변질되어 버렸죠? 나중에는 그 성전이 하나님이 되어버렸습니다. 성전 자체가 하나님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이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이 한 것입니다. 성전이 하나님이 되었다는 말은 어떤 의미가 있죠? 성전 자체가 거룩하게 된 것입니다. 솔로몬 성전이 거룩하기 때문에 그 안에서 이뤄지는 모든 것이 거룩해져 버렸습니다. 장사하는 것도 거룩한 장사고 그 안에서 회의하는 것도 다 하나님 뜻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거룩은 그게 아니잖아요. 성전이 거룩한 것이 아니고 성전 안에 예배하는 사람들의 삶이 거룩해야, 예배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거룩성이 모여서 거룩한 공동체가 되는 거지 성전 건물은 거룩성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장사치들을 다 뒤집어 엎으셨습니다. 어떤 권사님들이 성전 안에서 상추 팔고 했다고 하는데 그런 장사치가 아닙니다. 지도자들이 얼마나 악하냐면 성전 안에서 쓰는 화폐를 밖에서 쓰는 화폐랑 다르게 만들었습니다. 거룩한 화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화폐를 교환하면서 취득한 이윤을 자기들이 먹는 것입니다. 완전 삯꾼들입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다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하셨죠? 예루살렘 성전은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로마 장군 티토에 의해서 주후 70년에 진짜 그대로 다 무너졌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성전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성령이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것을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사마리아에 가셨습니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물 한잔을 얻어먹으려고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이 남편이 얼마나 많나요 그런 이야기를 하시다가 이 여인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너는 왜 예배를 드리지 않니? 라고 물어보셨습니다. 이 여인의 대답이 엄청난 한, 상처가 튀어 나왔습니다. 그 여인이 뭐라고 했나요? 당신들은. 당신은 유대인들이라는 말입니다. 왜죠? 사마리아 땅은 예전부터 침략이 많아서 이방족속과 섞여가지고 유대순수혈통이 없는 땅입니다. 그래서 상종도 하지 않는 땅입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아닙니까? 사마리아에 유대인들은 가지도 않았습니다. 더러운 땅, 이방인들과 혼혈된 땅. 거기에 사마리아 여인이 당연히 남편도 많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이 왜 예배드리지 않니? 라고 하시니까 그 여인이 당신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잖아요. 우리는 예배 할 곳이 없어요.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그러시나요?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 나 들어본 적 없다. 그러면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 그 예배를 나는 받고 있고 그 예배자들을 찾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영, 내 영으로 예배하는 것, 진리, 구원의 진리, 십자가 복음의 진리로 변화된 삶을 사는 삶. 이런 건물들이 유럽, 미국,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습니까. 엄청 많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일에 교회 한번 갔다 오면 한 시간 예배드리고 오면 마치 내 인생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같고, 하나님 자녀가 된 것 같고, 구원 받은 것 같고 인생의 문제가 다 풀릴 것 같습니다. 악착같이 가려고 합니다. 그거라도 감사하지만,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이 종교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영적인 예배라고 하는 이 시대. 주일에 교회가면 당연히 구원 받고 당연히 거룩해지고 당연히 응답받는 것이라고 엄청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일날 건물, 가스펠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만 제가 양심적으로, 성경적으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과 동행하고 철저하게 주님을 닮아가려고 하고 주님의 거룩을 사모하고 그 예배가 회복되지 않으면 주일 날 예배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예배하는 사람들이 주일날 지역교회로 모였을 때 우리가 세상에 시너지를 내고 선한영향력을 끼치는 것입니다. 또 반대로 공동체예배가 그런 예배를 드리도록 양육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코로나에 대해서 정말 해석들이 많고 말들이 많습니다. 다른 것은 복잡해서 잘 모르겠고 하나님이 코로나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종교개혁이 필요해서 주신 것이 아닐까. 하나님이 앗수르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침략하게 하시고 고난을 주시고 포로 삼으신 것은 무언가 하나님 백성들의 개혁을 원하시기 때문에 그런 것 이 아닌가. 우리가 주일에 교회당에 가면 다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서 보이지 않는 삶에서 하나님을 온전히 알고자 성경을 읽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와 간절한 간구, 영이신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래서 그 영으로 인해서 예배하고 내가 이 세상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사모하고 흠모하고 살아가는 그 삶으로 진짜 예수 믿는 삶으로 변화되라고 주신 것이 아닌가. 그래서 코로나 때 우리가 여러 가지 말들을 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때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고 내적이고 영적인 실력을 준비해서 안디옥 교회처럼 복음 전할 수 있는 실력들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표가 아닌가. 그래서 여러분 가스펠교회는 편리를 위한 이 교회당 건물이 아니라 내가 예수 믿고, 예수님 사랑하고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하고 사는 내 자신임을, 여러분이 가스펠교회임을, 가스펠이라는 단어를 붙이지 않더라도 주의 교회임을 기억하고 사는 것. 오늘 이 본문에 정말 중요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Ⅱ. 자랑할 것 없는 인생

 

- 왜 멸망했는가?_이사야10:1-2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_이사야10:1-2’ 

 

1-2절이 이스라엘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냥 저주하시고 진노하신 것이 아닙니다. 전부 진노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유 없이 진노하시지 않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의 상태가 뭐냐면 불의한 법령을 만들고 불의한 말을 기록하고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고 권리를 박탈하고 고아와 과부의 것을 약탈하는 모습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상태가 그런 상태인 것입니다. 본인들은 타락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산다고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불의합니다. 불법이 관영합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포로가 되기 전에 이미 정신적으로 포로가 되었습니다. 왜냐면 실제 앗수르가 침략하기 전부터 앗수르의 모든 문화, 심지어 그들의 점쟁이까지 다 데려다가 앗수르를 심히 흠모하고 사모했습니다. 이미 앗수르에 정신적인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침략을 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앗수르와 친하게 지내고 앗수르를 사모하고 흠모하다 보니까 불의한 법령들을 다 개정했습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선택 받은 특별한 민족, 구원을 위해서 선택 받은 민족이어서 하나님이 십계명, 모세오경을 다 주셨는데 앗수르 법으로 다 바꿔버렸습니다. 그들의 말도 다 기록했습니다. 제가 괜히 노회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성경을 벗어나면 위험한 것입니다. 성경을 확인해야 합니다. 아무 목사님도 성경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시대의 흐름이 그러면 그렇게 가야지. 시대의 흐름대로 우리가 가야 합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벌하시는 날과 멀리서 오는 환난 때에 너희가 어떻게 하려느냐 누구에게로 도망하여 도움을 구하겠으며 너희의 영화를 어느 곳에 두려느냐_이사야10:3’

 

환란을 당할 텐데 너희의 영화를 어디에 두려느냐?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너희가 지금 도대체 너희의 영화를, 기쁨을, 응답을 어느 곳에 두려느냐? 그렇게 너희가 사모하고 흠모하던 앗수르가 침략할 텐데 그럼 너희는 영화를 어디에 둘래? 앗수르 말고 다른 나라에 둘래?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추종하는 것들이 우리를 공격해 올 때 우리는 배반감을 느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렇게 사모하던 앗수르. 내가 그 앗수르를 몽둥이를 삼아서, 막대기로 삼아서 분노의 표출로 앗수르를 사용해서 너희를침략시킬건데 이제 너희의 영화를 어디에 둘래? 어떤 사람이 이렇게 반문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우리가 무슨 불의하고 불공평하게 살았습니까? 과부와 고아를 언제 우리가 약탈했습니까? 저희는 그렇게 한 적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 언약 백성,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살아내지 않고 세상을 쫓는 것 자체가 이미 고아와 과부들을 약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우리 직장과 가정에서 살아내야 우리 주변의 고아와 과부들이 주의 복음을 들을 기회라도 있을 텐데 우리가 이미 신실한 삶을 살지 않는 것 자체가 그들을 약탈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할 때라야 하나님이 높은 곳에 들어 올려서 사용하실 텐데 이미 앗수르를 쫓는 순간 고아와 과부들, 병든 자들, 연약한 자들 주의 복음 들을 기회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멀어지면 그렇게 됩니다. 저희 집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어느 집에나 문제가 많겠지만 제가 예수님 처음 믿을 때 저희 집은 그다지 상태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꼭 교회만 가려고 하면 집에 문제가 생깁니다. 집에 문제가 생기면 교회 가기가 그렇게 두렵고 창피합니다. 사실 교회에서 나를 신경 쓰는 사람도 없고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데 나는 그렇지 않고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부끄럽고 창피하고 괴로웠습니다. 예배가 잘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에 선교사로 가있는 제 친구에게 전화통화를 하면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 친구가 저에게 금요예배를 나오라고 했습니다. 그때 교회 다닌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금요예배가 뭔지 몰랐습니다. 금요예배는 조금 다르다고 와서 기도하는 예배가 있다고 나오라고 했습니다. 제가 금요예배를 갔습니다. 사실 사람들은 내 어려움을 이해해준다고 하지만 실상은 이해해주지 못합니다. 부부나 부모자식간이 아닌 이상 다 각자의 삶을 살기 때문에 어려움을 이해해주는 것 같고 위로해주는 것 같은데 다 말뿐입니다. 맞죠? 각자의 삶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금요예배에 갔는데 금요예배가 금요예배가 아니었습니다. 제 인생에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였습니다. 제가 그 전에 살아계신 하나님이라고 믿었는데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는 시간이었고 내 소망이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금요예배 때마다 얼마나 눈물로 기도했는지. 하나님과 교제가 시작되고 은혜를 맛보니까 제가 변화되었습니다. 사실 저희 집에 문제 많은 가정은 그대로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손가락질 하는 것도 그대로였는데 그리고 저는 그런 집이 싫었고 문제가 남아 있던 집에 대해서 불평이 있었는데 알고 보니까 내 마음이 문제였고 하나님이 그런 문제를 통해서 나를 당신을 만나게 하신 신실한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제 마음에 소망이 생겼습니다. 목사가 된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우리 교단에서 조금 특별한 목사입니다. Special이라는 특별이 아니라 많이 고독하고 외롭습니다. 신학교 가면 저희 교회 이야기가 많다고 하고 노회 가도 많이 물어봅니다. 근데 제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제가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이 신앙의 길이 조금 다른 가 봐요. 하루에 수도 없이 고민이 됩니다. 내가 뭐한다고 이 길을 갈까 이런 생각도 듭니다. 지난주 금요예배 때 찬양을 하는데 주님만이 내 모든 것 되시니, 주님만을 더 알게 하소서 하는데 얼마나 위로가 되던지, 얼마나 감사하던지. 그래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길을 가고 천국을 향해서 신앙의 길을 간다는 것 자체가 우리는 축복된 삶입니다. 맞죠? 그것이 믿어지세요? 왜 사람들이 불의한 법령을 만들고 불의한 말을 만들고 그런가요?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에 자꾸 불의한 것들을 만들어 냅니다. 제가 이야기하잖아요. 목사님들 모임에 가면 술을 드시는데 술 안 먹는 저에게 자꾸 술을 먹이려고 합니다. 같이 마시도록 만들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안 먹으면 불편한 것입니다. 우리 모임에 안 왔으면 원합니다. 왜 그런 불의한 법령, 말을 만드나요? 하나님과 가까이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자신은 의로운 말을 하는데 세월이 지나서 보면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없는 악한 말이 되기도 합니다. 왜요? 은혜가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가 은혜입니다. 은혜가 소멸되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게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은혜 안 받는 것이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은혜를 받지 않으면 사람은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타락이라는 것이 대단한 범죄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 오늘 이사야 10:1-2을 볼 때 별 내용도 아닙니다. 사람을 죽인 것도 아닙니다. 별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 볼 때는 별거입니다. 대단한 범죄가 아닌데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의 삶에서 떠나면 우리의 달란트, 재능, 물질, 뭐든지 우리의 모든 것이 악한 일에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에서 떠나면. 

 

- 멸망의 도구로 쓰임 받은 앗수르_이사야10:5-11

 

‘앗수르 사람은 화 있을진저 그는 내 진노의 막대기요 그 손의 몽둥이는 내 분노라 내가 그를 보내어 경건하지 아니한 나라를 치게 하며 내가 그에게 명령하여 나를 노하게 한 백성을 쳐서 탈취하며 노략하게 하며 또 그들을 길거리의 진흙 같이 짓밟게 하려 하거니와 그의 뜻은 이같지 아니하며 그의 마음의 생각도 이같지 아니하고 다만 그의 마음은 허다한 나라를 파괴하며 멸절하려 하는도다 그가 이르기를 내 고관들은 다 왕들이 아니냐 갈로는 갈그미스와 같지 아니하며 하맛은 아르밧과 같지 아니하며 사마리아는 다메섹과 같지 아니하냐 내 손이 이미 우상을 섬기는 나라들에 미쳤나니 그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신상들보다 뛰어났느니라 내가 사마리아와 그의 우상들에게 행함 같이 예루살렘과 그의 우상들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하는도다_이사야10:5-11’ 

 

그것을 두고 하나님이 앗수르라는 나라를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그 당시 앗수르는 초강대국입니다. 대단한 나라입니다. 그런 강대국도 하나님이 쓰시는 겁니다. 어떤 일에 사용하셨나요?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욥기에 보면 하나님이 욥을 시험하기 위해서 사단을 사용하십니다. 사단과 하나님을 동등한 입장에서 악과 선의 대립의 관계로 설명하는 목사님들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단과 동등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허락 없이 사단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사단은 이미 무저갱, 지옥에 갈 존재입니다. 앗수르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입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설명하고 계십니다. 내 손에 몽둥이가 앗수르다. 내 손의 지팡이, 분노의 표현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를 원망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은 앗수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나 깨달아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오는 시험,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수많은 어려움들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 일을 하게 하시려는 계획이 아닌가. 나는 넘어지고 있는데 나는 자빠지고 있는데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 아닌가. 그 믿음이 생겼습니다. 나는 지금 실패하고 있는데 나는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포로가 되었고 앗수르의 핍박을 받아서 고난당하고 있는데 그것이 지나고 보니 축복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향한 사랑이 아닌가. 우리 가정에 와있는 수많은 어려움들이 없었으면 금요예배를 갔을까. 눈물로 기도했을까. 내가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아버지가 되었을까. 지나고 보니 우리 삶에 질병이나 환경의 어려움, 가난이라든지 그런 것들이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믿음의 자리로 가게 하는 것이 아닌가. 왜요? 하나님이 진짜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의 골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지 않으면 암 걸렸다 회복됐다는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구원 안 받으면 가난했다가 부자 된 것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맞죠? 구원이 아니면 구원이 기쁨이 되는 삶. 여러분 이스라엘이 얼마나 타락했냐면 오늘 12절부터 보면 이런 것입니다. 

 

- 우리가 걱정하는 앗수르의 부귀, 영화, 축복_이사야5:12-19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 그러므로 내 백성이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사로잡힐 것이요 그들의 귀한 자는 굶주릴 것이요 무리는 목마를 것이라 그러므로 스올이 욕심을 크게 내어 한량 없이 그 입을 벌린즉 그들의 호화로움과 그들의 많은 무리와 그들의 떠드는 것과 그 중에서 즐거워하는 자가 거기에 빠질 것이라 여느 사람은 구푸리고 존귀한 자는 낮아지고 오만한 자의 눈도 낮아질 것이로되 오직 만군의 여호와는 정의로우시므로 높임을 받으시며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므로 거룩하다 일컬음을 받으시리니 그 때에는 어린 양들이 자기 초장에 있는 것 같이 풀을 먹을 것이요 유리하는 자들이 부자의 버려진 밭에서 먹으리라 거짓으로 끈을 삼아 죄악을 끌며 수레 줄로 함 같이 죄악을 끄는 자는 화 있을진저 그들이 이르기를 그는 자기의 일을 속속히 이루어 우리에게 보게 할 것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는 자기의 계획을 속히 이루어 우리가 알게 할 것이라 하는도다_이사야5:12-19’

 

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핍박을 당하는데 앗수르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예배도 드렸고 제사도 드렸고 그래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도 했는데 왜 앗수르는 축복하십니까. 왜 앗수르는 부귀하고 영화를 주십니까. 따져 물었습니다. 그것에 대한 답변이 오늘 10장 앗수르에 대한 말씀의 내용입니다. 앗수르 내가 다 사용하고 철저하게 망하게 할꺼야. 앗수르는 내가 사용하는 도구일 뿐이야. 앗수르가 어떻게 멸망하는지 너희가 보게 될거야. 그게 예언입니다. 그런데 그 질문 자체가 무엇인가요? 이스라엘이 타락한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는데 왜 밖에 있는 불신자들은 잘 살고 행복한 것 같고, 그것이 너무 부럽습니다. 우리가 이러고 있습니다. 진짜인가요? 그것이 비교하고 추종하는 겁니다. 우리는 정말 슬픈 것 같습니다. 주일날 여행도 못가고 등산도 못가고 예배드리는 것이 슬픈 것 같고 뜨거운 금요일 밤에 교회 와서 멍청하게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이 믿음의 길을 가는데 솔직히 손해 보는 것이 많습니다. 저는 성경 좀 안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경 읽을 때마다 뭐 하나씩 버려야 됩니다. 성경 읽을 때마다 목사로서 괜히 읽었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없으신가요? 이거 안 읽었으면 몰랐을 텐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괜히 읽어서 이것도 지켜야 하잖아 이런 것이 있습니다.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구원에 감격, 감사 다 잃어버린 겁니다. 천국의 그 기쁨을 안 믿는 겁니다. 다 없어도 세상의 것 다 없어도 우리가 얼마나 구원이 감사하고 기뻐요. 하나님 사랑이 얼마나 놀라워요. 그런데 그 내세에 관한 신앙, 천국에 관한 신앙이 바르지 않으니까 우리가 마음속에 은근히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진짜 여러분 불신자들이 행복하다고 생각하세요? 부귀영화를 누리는 앗수르가 정말 행복하다고 생각하세요? 기독교인들은 그럼 거룩하게 살면 살수록 손해 보는 것 같나요. 당연히 거룩하게 살면 살수록 손해 봅니다. 아무것도 못하는데요. 거룩 속에 들어가면 아무것도 못하고 심지어 순교해야 합니다. 좁디 좁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가 얼마나 괴롭습니다. 그 갈등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 고독합니다. 그 좋은 술도 못 먹고 그 좋은 것 다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화를 다 잃어버린 것입니까? 기쁨을 다 빼앗긴 것입니까? 정말 이스라엘 백성이 그런 마음이라면 포로 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영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영화가 무엇입니까? 어떤 분들은 반대로 자기가 굉장히 검소하고 반듯하게 사는 것을 자랑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맞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성경을 정말 한 쪽만 해석하는 겁니다. 자꾸 교회에서 부패하고 타락하는 이야기만 하니 그것만 죄인 줄 압니다. 우리가 그것을 걱정한다는 말은 천국을 진짜 안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씌워 주시는 의의 면류관을 안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 잘했다 충성된 나의 종아 하시는 하나님의 상급을 안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보좌를 안 믿는 것입니다. 이사야가 그 보좌를 보고나서 주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사야 49:1-10 시간이 좀 지나지만 봐야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왜 구원하셨는지 49장에 나와 있습니다. 

 

‘섬들아 내게 들으라 먼 곳 백성들아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내 입을 날카로운 칼 같이 만드시고 나를 그의 손 그늘에 숨기시며 나를 갈고 닦은 화살로 만드사 그의 화살통에 감추시고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나의 종이요 내 영광을 네 속에 나타낼 이스라엘이라 하셨느니라 그러나 나는 말하기를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하였다 하였도다 참으로 나에 대한 판단이 여호와께 있고 나의 보응이 나의 하나님께 있느니라 이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나니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 야곱을 그에게로 돌아오게 하시는 이시니 이스라엘이 그에게로 모이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그가 이르시되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 내가 또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스라엘의 구속자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신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에게 이같이 이르시되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를 백성의 언약으로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에게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하게 하리라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헐벗은 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_이사야49:1-10‘

 

왜 섬들아 먼 곳 백성들아 라고 이야기 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3절 이스라엘을 이렇게 존귀하게 부르셨습니다. 4절 우리가 예배드리는 것이 헛되고 수고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괜히 헌신했구나, 괜히 거룩하게 살았구나. 그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마음이라는 이야기입니다. 6절 다시 부흥이 되고 다시 회복이 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8절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십니다. 은혜의 때에 네가 응답하겠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우리라.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영화로울 때는 은혜 받을 때입니다. 황무지 같은 땅 돌아오는 것 순식간 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큰 기쁨이 은혜 속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갈 때 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영화라, 하나님을 나의 힘이시라 고백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이방의 빛으로 삼아 당신의 구원을 베풀고 그래서 그들을 죄에서 어둠에서 지옥에서 건지시기를 원해서 그것이 이스라엘의 정체성입니다. 다른 것으로 이스라엘이 빛날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빛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게 하나님 백성입니다. 그 안에 기쁨과 안식과 평안이 다 있습니다. 우리 자랑할 것 없습니다. 교회도 너무 복잡합니다. 노회도 머리가 아픈데 교회도 복잡합니다. 무슨 교회가 삼성전자도 아니고 청와대도 아니고. 교회는 심플해야 합니다. 교회는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저도 뭐 누가 소개해줘서 4차 산업혁명 책 읽는데 머리가 아파서 멈췄습니다. 4차 산업혁명을 읽어서 내가 뭐할까 싶고, 그런데 목사인데 모르면 안 될 것 같고 나는 누구인지, 무슨 말인지, AI시대가 온다는데 그것이 나랑 무슨 상관인지. 우리 돈 벌어서 자랑할 수 있습니다. 공부 많이 해서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의로운 삶을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한다는 것 자체가 구원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주님의 영광, 주님의 영화를 위해서 평생을 살고 헌신한다면 그것은 정말 하나님이 자랑케 하실 것입니다. 앗수르의 것으로 자랑하고 앗수르의 선진 문물, 앗수르의 문화를 받아들인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사야를 보고 반역자라고 했습니다. 실제 안에 들어가 보니깐 아직도 거룩을 찾고 있냐, 아직도 하나님 보좌를 찾고 있냐, 지금 시대가 앗수르의 신식문물이 다 들어왔는데. 교회 안에 다 들어왔습니다. 교회에서 거룩을 이야기하는 사람 보셨습니까? 교회에서 은혜 이야기하는 것 보셨습니까? 요즘 목사님들 설교를 들으면 제 4차 산업혁명, AI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성도들 알아 들으시나요. 천국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구원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그거 자랑하고 있는 겁니다. 건물, 성전 화려하게 짓고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 없습니다. 제가 저희 어머니 전도할 때 시골에서 일하는 엄마, 내가 엄마 진짜 사랑하는데 진짜 예수님 믿으면 소원이 없겠다. 저희 엄마 그 한 마디 듣고 교회 가셨습니다. 일요일에 일해서 버는 5만원을 포기하셨습니다. 평생 일하셔서 아들 뒷바라지 하셨는데 일요일에 교회 가는 것이 기적 같은 일입니다. 그 말 듣고 교회 가셨습니다. 예배 드리셨습니다. 저희 아빠, 평생 원망 할 정도로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제 결혼식 전 주일날 저희 목사님 만나서 복음 듣고 무릎 꿇고 예수님 고백하는데 제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다 용서되었습니다. 아버지에 원망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세우셨나보다. 사람이 정말 은혜 받으면 자랑할 것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내 자식에게 내가 자랑할 것 예수 밖에 없습니다. 내 남편에게 내 아내에게 자랑할 것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만났다면 정말 그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로 구원 받았다면 우리 세상에 누구 자랑하고 살겠습니까? 예수님 자랑합니다. 그것이 없어서 세상이 악해지는 것입니다. 그것 하라고 이스라엘 백성을 부르셨습니다. 앗수르처럼 강대국이 되고 싶어서 앗수르처럼 발전된 문화를 얻고 싶어서 사모하고 좋아지고 그러다 보니 예수님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예수님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다 때려치운 것입니다. 구닥다리 말씀이라고 하며 지금 어느 시대인데 십계명 이야기를 하냐, 불의한 법령, 불의한 말을 기록하고 자기 뜻대로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불공평한 판결을 했습니다. 무엇이 신앙생활인가요? 하나님은 스불론과 납달리에 베드로 같은 인물을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 베드로 사도가 깨닫고 고백한 내용이 베드로전, 후서에 나와 있습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사도행전에 베드로가 사라지고 사도 바울이 나타나서 베드로를 폄하합니다. 베드로는 무식해서 이방선교를 위해서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주셨는데 못 깨달아서 하나님이 안 쓰셨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하는데 어떤 신학 자료에서는 반대 이야기를 합니다. 베드로가 너무 은혜를 많이 받아서 사도바울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나오니깐 자기가 스스로 겸손해졌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을 지지 합니다. 왜요? 베드로전, 후서를 읽어보세요. 

 

Ⅲ. 우리가 자랑할 것은 믿음의 삶

 

- 하나님은 우리에게 왜 믿음을 주셨는가_베드로후서1:1-1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_베드로후서1:1-11’

 

베드로가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보배로운 믿음을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이 믿음을 자기가 전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힘써 앎으로 알 때마다 그 은혜와 평강, 신기한 능력, 생명과 경건에 속하게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그것을 위해서 뭐하라고 하나요? 그 보배로운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 그래서 그 믿음을 닮기 위해서 베드로후서 2장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왜 믿음을 위해 살라고 하시는가_베드로후서2:15-22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_베드로후서2:15-22’

 

자유를 주어도 소용없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2장에 이야기하는 것은 이 믿음을 담을 그릇이 되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무엇으로 증명해야 하나요? 어디에 담아야 하나요? 우리 삶이 그릇에 담아야 합니다. 이 삶이 계속해서 불법이나 불의, 어둠, 음란, 교만으로 간다면 이 믿음은 유지 될 수 없습니다. 믿음과 불법은 동행할 수 없습니다. 삶이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개와 돼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자유를 준들 믿음을 준들 다시 돌아간다는 것입니다. 더 심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인의 번영과 우상, 점술을 부러워하고 그 삶을 향해서 가니까 이스라엘에게 주신 특별한 믿음은 금세 변질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교회도 그럴 수 있고 목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오승주 목사가 변질되시면 분별하셔야 합니다. 제 설교에 맹목적으로 아멘하지 마시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왜 중세교회가 그렇게 타락했습니까? 성경을 아무도 안 읽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우리 교역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다른 것은 터치 하지 않겠다. 너희 삶, 사역 관심도 없다. 보고도 하지 말아라. 그러나 설교준비는 철저히 하고 너희 신앙은 철저히 해라. 성도들이 정말 치열하게 직장생활하면서 사업하면서 눈물로 번 돈으로 십일조하고 헌금해서 우리가 그 녹을 받고 목회자 하는 것이다. 정신 차려, 그런데 설교를 베껴서 해? 설교를 그렇게 해? 두렵고 떨림으로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서는 것은 자기 신앙이라고 하면 상식적으로 그렇습니다. 성도들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게 살아서 헌금한 그 돈으로 녹을 받아서 설교를 하는데. 목사들의 삶이 그러면 안 됩니다. 목사들이 너무 바빠서 성경 읽을 시간이 없습니다. 놀러가기 바쁘고 어울려 다니고. 목사들은 조금 고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구합니까? 사람들과 어울려 있으면 사람들의 뜻이 구해집니까? 조용히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 간절히 간구할 때 하나님의 뜻도 아는 것도 하나님 마음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독신으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삶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개혁교회은 리폼드 처치입니다. 계속 개혁해야 합니다. 신앙은 개혁이 멈추면 안 됩니다. 진리는 변질이 없지만 진리를 담는 그릇은 계속 개혁해야 합니다. 왜요? 히브리서 말씀처럼 그냥 두면 믿음은 흘러갑니다. 믿음은 그냥 두면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고 사모하지 않으면 믿음은 흘러갑니다. 쑥 흘러갑니다. 뭐라고 말합니까? 옛날에는 나도 뜨거웠는데, 옛날에는 나도 하나님 사랑했는데, 옛날에는 나도 성경 좀 읽었는데. 다들 그렇게 말합니다. 쑥 흘러갑니다. 그래서 경건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여자 분은 결혼이 너무 힘들고 결혼을 잘못했다고 합니다. 남편이 자기를 맨날 괴롭히고 폭언하고 심지어 교회 가는 것도 뭐라고 한다고 합니다. 여자 분이 정말 교회만 가면 좋겠다고 합니다. 남편이 신앙생활을 안 하니깐 너무 힘들다고 그래서 그것이 기도제목이었고 나중에는 그것을 핑계 삼아서 이혼을 했습니다. 저는 놀랐습니다. 이혼하고 그 여자분 교회 안 갑니다. 그렇게 방탕하게 살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도 있구나 싶을 만큼 깜짝 놀랐습니다. 그렇게 남편 때문에 교회 가게 해달라고 신앙생활 잘하는 남편 만나게 해달라고 하면서 그런 이유로 이혼했는데 이혼하고 나서는 교회 안 갑니다. 그럴 수 있구나. 그럴 수 있구나. 완전 방탕하게 삽니다. 저 인간만 사라지면 하나님 좋겠습니다하고 기도하더니 막상 그 핑계로 이혼하고 나서는 본색이 다 드러났습니다. 믿음은 삶으로 증명해야 합니다. 믿음 좋다고 하는데 욕하고 삶은 불신자들보다 더 불법하고 불의 하는 것.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음은 반드시 삶이 따라옵니다. 말만 번드러지게 하는 시간에 우리는 그럴 시간에 성경을 읽고 믿음을 담을 수 있는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우리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이야기합니다. 

 

- 회개가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_베드로후서3:8-13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_베드로후서3:8-13’

 

하나님께서 참고 계시는 이유는 우리가 회개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오십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의 삶이 다 드러납니다. 우리 삶을 그렇게 살 수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새 하늘과 새 땅 다시 오실 주님. 이스라엘 백성이 이 신앙회복하지 않으면 영원히 앗수르에서 못 벗어나는 것입니다. 심판이 있다는 것을 사단이 다 잊어버리게 만듭니다. 우리는 자랑할 것들을 쫓아가고 자랑할 것을 추구하고 살면서 죽어서 심판대 앞에 서면 다 쓸모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믿음으로 살아야 믿음의 열매가 있어야 우리 후손들과 자녀들에게 그것을 굳이 내 입으로 자랑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을 보고 예수님이 자랑처럼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랑하고 사는 겁니다. 은혜 자랑하고 사는 겁니다. 그것이 복된 하나님의 백성의 삶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깡그리 놓쳤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말씀을 가지고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하나님 은혜로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땅에서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고 우리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여러분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너무 복잡한 신앙 이야기도 듣지 마세요. 신학이 어쩌고 저쩌고 해도 아무리 신학이 뛰어나도 성경 위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 읽으세요. 그리고 틈만 나면 기도하세요. 뭐라고 기도해야 하나요. 우리를 인도해주세요, 우리를 구원해주세요. 믿음을 잃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세요. 우리는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 안에 엄청난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다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납달리, 스불론,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런 땅에서 구원 받은 저와 여러분이 변질되지 않아야 합니다. 앗수르 잠깐 부흥하고 번영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잠깐 몽둥이로 쓰시고 완전히 망합니다. 거기에 소망을 두지 마시고 주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고 그렇게 신앙의 길을 걸어가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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