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13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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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
다메섹_왜 기억하지 못할까? |
본 문 |
이사야17:1-14 |
오승주 목사
Ⅰ. 실패한 동맹
오늘 본문은 딱 다메섹에 관한 거라기보다는 북이스라엘은 에브라임, 다메섹은 아람입니다. 지금 현재는 시리아라는 국가에 모토가 된 나라이고 북이스라엘이 바로 에브라임입니다. 에브라임과 다메섹이 동맹을 해서 두 나라에 대한 경고, 심판에 관한 말씀이 오늘 17장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메섹에 관한 말씀이지만 또 북이스라엘에 관한 말씀이기도 해서 오늘 조금 자세히 이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어떤 분이 목사님 설교가 조금 길어지셨다고 하는데 제가 길어졌다기보다는 내용이 길어진 것입니다. 이사야서 설교를 40분에 끝낼 수 가 없습니다. 배경설명을 하지 않으면 이사야 말씀을 여러분이 전혀 모르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보시면 무슨 내용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실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본문을 읽으면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고 주석 찾아봐야 되고 배경 살펴봐야 됩니다. 공부를 일주일에 창세기 설교를 20시간 준비했다면 이사야 설교를 40시간 정도 준비하는 느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가 조금 길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의도적으로 1시간정도 예상하고 설교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전도사님들이 목사님 설교할 때 말이 너무 빠르다고 하시는데 제한된 시간에 작성한 설교원고를 다 전달해야 되니까 빠른 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 부분은 제가 죄송한 마음을 전해드립니다. 유튜브 말씀을 더 빠르게 해서 들으시더라고요? 여러분? 설교를 대충 빨리 들으시려고 그래서 뭐 한 시간 설교를 30분에 듣고 이러시던데 느리게 들으시면 어떨까요? 네 그런 것도 있습니다. 지금 가정에서 예배하고 있는데 나라를 위해서 여러분 많이 기도해주시고 3단계가 돼서 국가가 셧다운이 되면 정말 모르겠습니다. 진짜 힘든 가정들은 더 힘들게 되겠죠, 우리 어려운 사람들은 더 어렵게 될 것입니다. 많이 기도가 필요하고 저는 지금 비브릿지를 통해서 연말에 연탄배달도 가고 한부모 자녀들 선물꾸러미도 사서 가고 보육원도 방문하는 많은 일정들이 매년 했었던 것인데 그런 것들이 조금 제 마음에는 어떻게 어려운 사람들을 돌볼 수 있을 까 생각도 많이 들고 본질적으로 그게 진짜 미비한데 어떻게 하면 나라와 민족, 아이들, 소외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까 고민이 많습니다. 우리는 사실 이럴 때 고백이 진짜 중요합니다. 고백. 사람들이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르고 살아갑니다. 내가 진짜 환경이 힘들어요. 힘들다, 어렵다 이렇게 고백하면 그 쪽으로 가더라고요. 그런데 환경이 어렵지만 내 영혼은 내 마음은 빼앗기지 않을거야라고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은 내 영혼을 빼앗기지 않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고백은 진짜 중요합니다. 절망이 가득 하더라도 나는 은혜를 뺏기지 않을 거야, 나는 찬송을 뺏기지 않을 거야, 나는 이 믿음의 고백을 뺏기지 않을거야. 이렇게 이기거든요. 절망을. 저는 그렇게 이겼습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진짜 앞뒤좌우가 꽉 막히면 사람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고백은 안 뺏겨야 되고 내 마음, 정신은 빼앗기지 않아야 되는 거죠.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이 딱 오면 쉽게 동맹을 해버립니다. 동맹은 손을 잡는 것입니다. 저 사람과 손 잡아야지. 오늘 배경이 그런 장면입니다. 에브라임이 누구와 동맹을 했냐면 다메섹하고 동맹을 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아람하고 동맹을 했습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이 어려워서 동맹을 한 것도 있지만 상황이 조금 난처했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초반에 설교를 했습니다. 앗수르나 거대한 민족들이 쳐들어와서 불안하기도 했고 또 그걸 대비하기 위해서는 남유다를 먹어야 되는데 남유다를 자기들이 흡수해야 하는데 그래야 되는데 남유다를 이길 방법이 없었습니다. 강력한 요새를 가진 남유다. 그러니까 같은 형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아람에게 손을 뻗쳐서 아람과 동맹을 했습니다. 그 동맹의 결과가 비참합니다. 오늘 하나님이 다 멸절하리라. 오늘 그런 내용입니다. 네가 이웃의, 이방의 가지를 이종했구나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북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의 민족 아닙니까? 하나님의 선택받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잖아요. 이렇게 쉽게 동맹을 해버리는거죠. 우리는 살면서 사실 누구랑 가깝게 지내냐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제가 인생을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내가 누구랑 가깝게 지내냐 이것은 정말 중요합니다. 사실 사람뿐만 아니라 음식도 그렇습니다. 어떤 음식과 가까이 지내냐에 따라 우리 건강이 달라집니다. 운동도, 내 라이프스타일도 어떤 것과 가까이 지내느냐에 따라서 완전 달라집니다. 중요합니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좋은 것을 찾아야 하고 안 좋은 것은 피해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거 아세요? 안 좋은 것을 피해야 하고 좋은 것을 찾아야 되는데 좋은 것을 피하게 만들고 안 좋은 것을 가깝게 만드는 게 죄입니다. 여러분 그거 아셔야 돼요. 죄가 얼마나 무섭냐면 좋은 것을 멀리하게 만들고 안 좋은 것을 가깝게 하게 만듭니다. 진짜 신기합니다. 그래서 좋은 것과 친해지려면 굉장히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렵습니다. 좋은 사람과 친해지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좋은 음식과 운동 이런 것과 친해지려면 엄청 고달픕니다. 운동, 음식, 친구, 교회도. 좋은 교회 만나려면 힘듭니다. 그러나 안 좋은 것은 정말 가깝습니다. 손만 뻗으면 안 좋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도 아이들 교육할 때 좋은 거, 거짓말 하면 안 돼, 착하게 살아야 돼, 공부하는 거 가르치려면 힘듭니다. 애들이 말도 듣지 않습니다. 안 좋은 것은 교육하지 않아도 다 압니다. 거짓말도 다하고 나쁜 짓도 다 합니다. 죄가 우리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런 상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지식을 가져라. 영적인 지혜를 가져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져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가 은혜를 선택하고 하나님을 선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니까 우리를 미혹하는 것들, 우리에게 어둠을 주고 멸망을 주고 지옥에 가게 하는 것들을 우리는 자연스럽게 선택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어요. 영적인 것도. 우리 마음은 늘 죄를 향해서 안테나를 세우고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인생은 다 죄를 향해서 방향을 정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경건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자기 개인의 이익의 방도로 경건을 사용해서 문제가 되지 사실 성경은 경건을 계속해서 주장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시간이라든지, 오늘 같이 예배하는 시간이라든지, 여러분 성경을 읽는 시간이라든지. 우리 영혼을 위해서 그만큼 좋은 시간이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시편 한 장만 읽어도 생각이 완전히 바뀝니다. 우리가 잠언 한 장만 읽고 하루를 시작해도 삶이 달라집니다. 별 거 아닌 거 같은데 그렇습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예수님 사복음서만 읽어도 아 우리가 이런 핍박과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지켜야겠구나 이런 믿음이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힘듭니다. 왜요? 좋은 거잖아요. 내 영혼에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육신에도 좋은 것 가까이 하려면 힘든데 내 영혼과 내 마음에 좋은 것은 더 힘듭니다. 3-4배 더 힘듭니다. 텔레비전 켜고 있으면 요즘은 제가 안 보지만 옛날에 무한도전을 너무 좋아했습니다. 무한도전으로 주일 예배 끝나고 녹화방송 보는 낙으로 살았었는데 무한도전 보고 있으면 1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5-10분 같습니다. 쑥 지나갑니다. 좋아하니까. 스포츠, 농구, NBA 이런 거 보고 있으면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는지. 그런데 이상합니다. 성경을 읽으려고 성경을 열잖아요? 한 2장쯤 읽으면 지겹기 시작합니다. 왜 이렇게 기냐 오늘은. 시편이 118편, 119편 쯤 오니까 이거 다 읽어야 되나 이런 생각도 들고 너무 시간도 아깝고 또 성경 읽고 기도하려고 하면 바쁜 일이 생각납니다. 못 한 일이 생각납니다. 텔레비전 볼 때는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그냥 놀 때는 바쁜 일이, 중요한 일이 생각도 안 나는데 성경 펼치면 중요한 일이 생각납니다. 아 맞다 청소도 해야지, 아 맞다. 평상시에는 하지도 않으면서. 그거 읽으려고 할 때는 그렇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저는 그렇다라구요. 그래서 선택도 여러분 습관입니다. 계속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내가 늘 좋은 것을 선택하기 시작하고 반복하고 지속하고 의도적으로 좋은 것을 선택하면 나중에 그 습관이 나를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줍니다. 저는 라면을 요즘은 교회에서 가끔 김밥 먹을 때 먹지 완전히 끊었습니다. 제가 라면을 얼마나 좋아했냐면 광주에서 살 때는 일주일에 6-7일 라면을 먹었습니다. 너무 좋아합니다. 김치를 좋아하니까. 돌아가면서 먹었습니다. 매일 먹다시피 했습니다. 라면이 제 몸에 해롭잖아요? 그리고 제 몸이 문제가 왔고 아펐습니다. 라면을 끊기가 정말 처음에는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습관입니다. 계속해서 생각하고 이것은 내 몸에 해를 줄 거야, 당장은 내 몸이 괜찮은 거 같고, 한 끼 먹으면 어때, 아니요 그런데 그게 쌓여서 무너집니다. 우리가 완전히 멸망합니다. 그때 되면 후회가 너무 심합니다. 제 주변에 친구들이 위암 걸리고 무슨 암 걸리고 아픈 것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다 음식 때문입니다. 싸워야 합니다. 선택해야 합니다. 라면 먹고 싶을 때 고구마 집어 들고. 그래서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그 순간을 이거 힘들어, 어려워하고 손이 안 좋은 쪽으로 가면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가 계속 동맹을 합니다. 실패한 동맹을 계속하면 안 됩니다. 사람도 죄송하지만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악한 사람도 만날 수 있겠지만 성경은 악한 사람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빼앗는 사람을 피하라고 했습니다. 로마서, 히브리서, 잠언에서도 함께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과 같이 어울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람도 선택입니다. 좋은 사람, 믿음의 사람, 내 삶에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들과 동맹을 해야 하는데 계속 실패한 사람들과 동맹을 합니다. 그러니까 친구따라 강남 간다고 안 좋은 사람과 어울리니까 안 좋은 길로 갑니다. 진짜 제가 그랬습니다. 사람이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면 그것이 정상인줄 압니다. 술 먹고 이상한 이야기하고 늘 불평하고 불만하는 사람들과 어울려 있으면 그 속에 있으면 나도 동화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정상 같습니다. 거기서 나와서 보질 못합니다. 사람이라는 게. 거기서 나와서 믿음의 사람, 기도의 사람, 신실한 사람들과 어울리면 와 내가 전에 어떻게 저런 사람들과 어울렸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저런 사람들이 훨씬 편하고 쉽습니다. 그런 실패한 동맹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굉장히 중요한데 왜 이런 죄와 세상과 사람들이 동맹할까? 실패할 줄 알고 동맹할까요? 오늘 에브라임(북이스라엘)은 다메섹(아람-시리아)을 하나님 대신 선택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 대신 아람을 선택했습니다. 심지어 선택한 정도가 아니라 아람과 연합해서 남유다. 남유다는 자기 형제 국가입니다. 사실 열두 지파니까 한 뿌리인데 공격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잊어버려서. 무엇을 잊어버렸냐?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능력을 잊어버렸습니다. 원래 그들은 열두 지파 즉 한 민족입니다. 여러분 출애굽해서 가나안에 정착할 때 지파를 열두 지파로 나눴습니다. 그 말은 원래는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한 민족입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도 같이 했고 광야도 같이 지나갔던 민족입니다. 여호수아 갈렙을 따라 가나안에 입성도 같이 한 민족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입니다. 그 말은 전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어버렸습니다. 자기 정체성을 다 상실해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성장하고 번영하고 축복을 받으면 그것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오만, 교만이 쑥 들어옵니다. 제가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목사님들하고 미팅이 있어서 직접 만나지는 않았지만 통화도 하고 줌으로 미팅을 하면서 다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힘들어 죽겠다, 미치겠다. 목사님들 입에서. 같이 대화하다 보니까 저도 힘든 것 같습니다. 저도 하소연하고 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교회도 힘들고 상황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생각이 났습니다. 내가 처음 예수님을 언제 믿었지? 내가 하나님께 첫사랑 받은 게 언제지? 그게 고등학교 1학년 때입니다. 그때를 생각해봤습니다. 우리 집, 제 상황, 제 배경.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완전 불신가정에 완전 가난했습니다. 지금은 이런 옷이라도 입고 다니지 그때는 뭐 교회 갈 때 매형 옷 입고, 물려받은 옷 입고, 옷을 사서 입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저씨들 옷 입고 교회가고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생각하면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제가 이렇게 목사를 하고 있는 것도 기적입니다. 목회를 하고 있는 거 자체가 사실은 기적입니다. 제가 곁길로 새서 이상한 삶을 살 수도 있고 죄인의 삶을 살수도 있는데 축복입니다. 목사님들이 다 비슷할 건데 왜 이렇게 입에서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할까?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자기가 성장하고 나면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이 사라지면 그때는 뭐라고 하죠? 태도가 바뀝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다 하나님 때문이라고 합니다. 주신 이도 하나님 거두어 가신 이도 하나님이신데. 신앙에 있어서 이 부분은 진짜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왜 신앙이 쇠퇴할까? 저는 이 부분이 고민이 너무 많이 됩니다. 왜 신앙이 쇠퇴할까? 어떻게 신실한 저 사람이 신앙이 퇴보할 수 있을까? 어떻게 교회가 저렇게? 여러분 이게 개인의 문제에요? 유럽, 미국 교회를 봤을 때 어떻게 저 미국이. 미국교회 아시잖아요? 청교도들이 건너가서 정말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 영광이었는데 그런 미국교회가 지금 다 등을 돌려가지고 세속적인 것 재물과 손을 잡고 동맹하고 문화와 동맹하고 세상 마케팅 이런 것과 동맹하고 교회들이 오직 성경이 아닙니다. 미국교회 사람들은 주일에 교회 갈 때 성경도 들고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경 이야기를 안 하니까, 성경을 찾아서 보지 않으니까 목사들이. 자기개발 이야기하고 어떻게 하면 성공할까 이런 이야기하고 그것이 축복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고난, 애통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신실하게 천국을 바라보라는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다 그런 것과 동맹을 맺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마음이 죄로 얼룩졌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모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것입니다. 죄로 얼룩졌기 때문에 우리가 신실하게 주님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죄는 우리 마음을 우리 스스로에게 공을 돌리게 만듭니다. 죄가 주는 최고의 인간의 유혹은 교만과 오만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그걸로 무너뜨렸잖아요.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최고가 교만과 오만입니다. 인간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이 교만과 오만입니다. 다윗이 시편 1편에 보니까 최고로 경계한 것이 무엇입니까? 교만과 오만입니다. 그게 들어오면 그 어떤 사람도 버티지 못합니다. 교만이 오만이 내게 들어오면 어떤 사람도 버티지 못합니다. 다 무너집니다. 그 교만과 오만이 무엇인가요? 죄의 꽃이고 죄의 얼굴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하나님 너무하신 거 아니냐고 합니다. 말이 됩니까? 하나님 원망한다는 그 자체가? 그래서 우리는 우리 영혼을 관리하는 것이 진짜 중요합니다. 내 영혼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 영혼들, 자기 마음을 절대 관리하지 않습니다. 교회 갈 때도 집에서도 육신은 관리하는데 돈을 엄청 투자를 합니다. 헬스장도 끊고 필라테스도 다니시고 영양제도 사서 먹고, 좋은 음식도 사서 먹고, 소고기도 사서 먹고, 돼지고기도 사서 먹고, 야채도 사서 먹고, 과일도 사서 먹고 우리 육신을 위해서는 엄청난 투자를 합니다. 차도 사고 집도 사고 다 육신을 위한 투자잖아요? 그런데 놀랍게도 평균적으로 한국교회 성도들이 성경 읽는 시간이 일주일에 10분이 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매일이 아니고 일주일이빈다. 평균적으로. 그러면 2-3시간 저 같이 많이 읽는 사람이 있으니까 평균은 더 내려갈 것입니다. 안 읽습니다. 내 영혼과 내 마음을 관리하지 않습니다. 놀라운 것은 내 영혼과 마음이 죄로부터 계속 공격을 받고 어둠으로부터 계속 공격을 받는데 그건 보이지 않으니까 타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몸은 조금만 어려워도 타격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병원을 가거나 좋은 음식 먹어야지 이런 것 있잖아요? 가난해서 억울해서 부자 되려고 몸은 내 육신은 엄청난 노력을 합니다. 심지어 교회 올 때도 다 육신적으로 교회를 옵니다. 내 마음과 영혼이 병든 것을 치유 받고 고침 받고 나음 받으려고 교회 오지 않습니다. 신앙생활 자체가 교회들의 영적인 분위기가 그쪽으로 넘어가버렸습니다. 마음 관리를 하지 않습니다. 마음 관리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죠? 거기서 다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제가 예전에 한 번 소개한 책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떤 마을 위에 마을에서 먹는 물, 씻는 물, 농작물을 기르는 물. 물을 받는 큰 저수지가 있었어요. 그 저수지에 관리하는 분이 계시는데 나이가 들어서 노인이 되었습니다. 저수지에서 계속 깨끗한 물이 오니까 이 마을 사람들은 으레 깨끗한 물이 온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어느 날 회의하다가 너 늙은이에게 노인에게 뭐 하는 일이 있겠어? 힘도 없는데? 우리가 저 사람에게 월급 주는 것이 아깝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을 회의에서 그 노인을 잘라버렸습니다. 노인이 이제 일을 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됐죠? 처음에는 괜찮은 거 같습니다. 하루 이틀은 괜찮은 거 같습니다. 그 깨끗함이 며칠은 갑니다. 어느 날 물을 틀어보니 더러운 물이 나오고 먹을 수 없는 물이 나오고 악취가 나오고. 가서 봤더니 저수지에 오물이 가득하고 물이 더러워지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다시 저수지 관리하는 노인을 복귀시켰습니다. 오래 걸리겠지만 그래서 다시 물이 깨끗해졌습니다. 아는 거 에요, 깨닫는 거 에요. 여러분 우리가 예배하는 것이 별거 아닌 거 같고 성경 읽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가 기도하고 은혜를 받는 것이 별거 아닌 거 같지만 우리는 그것을 선택하고 살아야 합니다. 내 영혼을 위해서 투자하고 내 마음을 관리하는데 투자해야 돼요. 내 육신을 위해서 투자하시잖아요? 헬스장도 가고 돈도 내고 악착같이 벌어서 좋은 음식도 먹고 하시잖아요. 이상하죠. 마음 관리하고 영혼 관리하는데는 투자도 하지 않습니다.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무 아까워, 보이지도 않는데 그게 우리 삶에 무슨 영향을 끼치겠어?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북이스라엘(에브라임)은 무언가에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에브라임이 뭔가에 마음을 빼앗겼는데 그것이 앗수르, 바벨론을 보고 눈이 돌아갔습니다. 여러분 앗수르, 바벨론을 공부를 했으니 아시겠죠? 바벨론의 정원, 발전된 도시를 보고 우와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 번영의 눈이 완전히 돌아갔습니다. 거기에 마음을 빼앗겼는데 그 때부터 하나님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 버렸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본토 친척 아비 집 우상의 땅에서 건져내서 믿음의 아비, 열방에 주의 복음을 전하는 민족으로 하나님이 불러주셨는데 그것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떤 민족인지, 애굽 노예에서 홍해를 어떻게 건넜는지, 광야 생활을 어떻게 했는지, 우리가 가나안 땅에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우상과 어떻게 싸웠는지 다 잊어버렸습니다. 눈이 돌아갔습니다. 마음을 다 빼앗겨버린 것입니다. 그 때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인격적으로 내 삶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으로만 남아있는 것입니다. 관념을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물건 같은 것입니다. 내 마음에 있기는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예수님을 물건처럼 예수님 너 안에 계시잖아 괜찮아 이런 식입니다. 예수님 영접만 하면 구원 받을 수 있어. 아니요. 저는 그것을 신학적으로 증명할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인격체시라고 했습니다. 성령은 인격체이시지 물건이 아니고 관념이 아닙니다. 지식체가 아닙니다. 예수님 인격체입니다. 매일 찾고 만나야 되고 교제해야 되고 친밀해야 됩니다. 성경은 이이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이 마음을 하나님과 아닌 세상과 동맹을 맺는 순간부터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관념만 남습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이 절기 때 제사만 드렸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우리 일주일동안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나님과 상관없이 살다가 주일에 교회만 갔다 오는 것처럼. 십일조 하면 됐지, 내가 십일조까지 하면 믿음이 좋은 거지 어떤 분이 그러셨습니다. 아닙니다. 물론 십일조를 할 정도 되면 믿음은 굉장히 좋은 것입니다. 그 분의 뉘앙스와 말이 십일조가 보험처럼 느껴졌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인격은 무엇입니까. 부부 사이에도 인격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대화하고 싸우고 울고 웃고 감정이라는 것이 살아있습니다. 그것이 관계입니다. 하나님을 더 이상 알려고 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궁금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타락했습니다. 타락이라는 단어자체가 술 먹고 담배피우는 그 타락을 지우셔야 합니다. 타락은 그것이 아닙니다. 타락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 경건, 자기 의로움. 그거 타락입니다.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서 도덕적으로 사는 것 타락입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은 아람, 다메섹을 선택해서 동맹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본문을 보니까 그냥 두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Ⅱ. 왜 기억하지 못할까?
- 하나님 대신 다메섹(아람, 시리아)을 선택한 에브라임(북이스라엘)_이사야17:1-3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아로엘의 성읍들이 버림을 당하리니 양 무리를 치는 곳이 되어 양이 눕되 놀라게 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에브라임의 요새와 다메섹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가 멸절하여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_이사야17:1-3’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 같이 되리라 라고 하십니다. 멸절했는데 거기에 무슨 영광이 있나요? 하나님이 영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다메섹을 선택한 북이스라엘이 멸망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가로채는 자를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안 돌리면 멸망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존재가 증명이 됩니다. 하나님 공의, 사랑이 증명이 됩니다. 그러니 하나님 무섭습니다. 아람을 선택하고 거기하고 동맹을 맺은 북이스라엘은 그들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면 하나님은 거짓 신입니다. 그것을 그냥 두시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것입니다. 그것이 신약에도 나옵니다. 너희가 사생아냐? 사생아이면 너희가 죄를 짓던지 너희 마음대로 살던지 신경도 쓰지 않는데 친자식이면 내 배에서 난 친 아들이면 이상한 삶을 사는데 부모가 가만히 있겠냐?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죄와 동맹을 맺고 세상과 동맹을 맺으면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 야곱의 영광을 다시 빼앗아 가시는 하나님_이사야17:4-6
‘그 날에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하리니 마치 추수하는 자가 곡식을 거두어 가지고 그의 손으로 이삭을 벤 것 같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주운 것 같으리라 그러나 그 안에 주울 것이 남으리니 감람나무를 흔들 때에 가장 높은 가지 꼭대기에 과일 두세 개가 남음 같겠고 무성한 나무의 가장 먼 가지에 네다섯 개가 남음 같으리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_이사야17:4-6’
농사를 지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영광이 쇠한다. 야곱이라는 단어가 왜 나올까요? 북이스라엘에게 정체성을 하나님이 말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날에는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참 신기합니다. 이렇게 멸망을 당하고 고통을 당해야 기억이 되살아나는 것이 인간인 것 같습니다. 북이스라엘을 다시 기억을 되살리는 하나님의 작업을 보십시오. 거짓말투성이고 여자에 눈이 멀었고 남을 속이고 형을 속이고 늘 거짓말만 했던 야곱. 그 야곱이 형 에서를 속이고 삼촌 라반의 집에 가서 14년을 일해서 돈을 벌고 또 거기를 속이고 나옵니다. 어떤 상황이냐면 뒤에는 라반이 쫓아오고 있고 앞에는 자기가 속였던 형이 자기를 죽일까 하고 있는 진퇴양난입니다. 누구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야곱이 스스로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이 야곱을 만나주시는 장면입니다. 앞뒤가 꽉 막혔을 때 성경은 하나님의 사자와 씨름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원어나 주석에 보면 하나님의 사자가 아니라 하나님이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하나님과 씨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야곱이 버텼는지 얼마나 하나님을 이겨보려고 했는지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를 치셨습니다. 지금도 유대인, 쥬시들은 짐승의 환도뼈를 먹지 않습니다. 환도뼈를 쳐서 절룩거리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야기하십니다. 네 이름을 더 이상 야곱이라고 하지 말아라. 야곱은 발뒤꿈치를 잡다 라는 뜻이 있습니다. 매일 남의 발뒷꿈치를 잡는 삶을 살았는데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 이름이 너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이스라엘은 여호와는 통치자다 라는 뜻입니다. 통치자라는 뜻이 있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거기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이 거기서 시작했습니다. 너희 이름이 이스라엘이잖아. 남을 늘 속이고 거짓말만 하는 야곱을 통치자로 다시 말해서 세상의 영적인 지도자로 세워 주신다는데 하나님이 다시 그 영광을 다시 빼앗아 가신다고 합니다. 야곱의 영광이 쇠하리라. 신앙생활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목회를 하면서 눈에 보이는 건물들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실 뒤에서 어떤 사역을 하느냐가 휠씬 중요합니다. 사실 이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뒤에서는 목회자들이 어떻게 말씀을 준비하고 설교하는지도 중요합니다. 더 더 뒤에서는 목회자가 어떤 믿음으로 교회를 위해서 사역을 하느냐가 훨씬 더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영, 마음에 속지 않습니다. 신앙이 굉장히 쉽다는 말은 하나님이 보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너무 쉽습니다. 반대로 그게 안 믿어지면 신앙은 억지로 할 수 없습니다. 교회 근처도 오기 싫습니다. 안 믿어지는데 어떻게 하나요. 아무리 쉬운 거라고 못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억지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님 우리 아들 신앙이 들어가게 해주세요. 제가 애를 도울 수는 있는데 신앙이 들어가게 할 수 없습니다.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제가 말씀도 줄 수 있고 예수님에 대해서 소개도 할 수 있지만 그가 은혜를 받는 것은 제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은 거짓이 없고 지름길이 없습니다. 신앙은 거짓이 있을 수 없습니다. 지름길도 없습니다. 어디를 가서 특별히 교육을 받으면 신앙이 확 자란다 이런 것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 경주를 마치고 천국보좌에서 받을 면류관. 살아계신 하나님의 보좌를 내세를 믿는다면 우리 삶은 자연스럽게 달라질 것입니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면 우리 인생은 달라집니다. 그래서 그 영광을 받기 위해서 말씀, 기도를 그래서 우리 삶이 거룩해지려고 애쓰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적인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합니다. 반대로 눈에 보이는 것을 선택하면 영을 다 빼앗깁니다.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이 남편이 부상을 입어서 직장을 못 다니게 되었습니다. 경제가 딱 어려워지니까 집도 정리해서 훨씬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고 여자집사님도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왔습니다. 제가 아는 분이니까 진짜 어렵겠다, 어쩌지, 주변 교회에서도 말이 많았습니다.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길래 보통 그렇습니다. 육신적으로 신앙을 평가해버립니다. 제가 그 집을 갔습니다. 오랜 지인이기도 하고 뭐를 사들고 갔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느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집에 들어가면서 풍기는 이미지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정갈하고 깨끗하고, 집은 좁은데 집에 들어가면서. 대화를 하면서 마음이 엄청 부자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저희가 이제 은혜를 받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 부부가 친해지고 친밀하게 하나님께 기도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눈이 촉촉했습니다.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그 집이 망했다 생각하고 찾아갔는데 얼마나 매력적인지. 마음이 엄청 부자였는지 모릅니다. 마음을 하나도 빼앗기지 않고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까요? 안 드러날까요? 자녀들이 얼마나 얼굴을 행복해 보이던지. 돈이 기준이 아니었습니다. 돈 진짜 많은 사람들도 마음 다 빼앗겨서 힘들다 어렵다 불평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집은 쪼개서 비브릿지 후원하고,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보이는 것입니다. 제가 그 분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마음이 좋던지. 주려고 갔는데 얻어왔습니다. 그런 분들이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세월이 다 마칠 때 쯤. 정말 좋은 장례식. 자녀들 보면 다 알게 됩니다. 이런 야곱이 늘 육신적인 삶만 살다가 앞뒤가 꽉 막혔을 때 하나님과 씨름하고 영적인 것을 알고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이스라엘이 그런 나라, 민족입니다. 그런데 그 야곱의 영광이 쇠하여졌다고 합니다. 그의 살찐 몸이 파리해졌다고 합니다. 살이 너무 쪄서 너무 잘 먹고 잘 살아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너무 열매가 많고 풍족해서 주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그래서 나무 꼭대기에 과일 2-3개만 남게 두겠다고 하셨습니다.
- 하나님을 잊은 이스라엘_이사야17:7-11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뵙겠고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며 자기 손가락으로 지은 아세라나 태양상을 보지 아니할 것이며 그 날에 그 견고한 성읍들이 옛적에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버린 바 된 수풀 속의 처소와 작은 산 꼭대기의 처소 같아서 황폐하리니 이는 네가 네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그러므로 네가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하는도다 네가 심는 날에 울타리를 두르고 아침에 네 씨가 잘 발육하도록 하였으나 근심과 심한 슬픔의 날에 농작물이 없어지리라_이사야17:7-11’
이해가 가십니까? 하나님이 북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아시겠죠? 멸망시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왜 이런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냐면 북이스라엘이 무엇을 섬겼냐면 하나님이 선택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아세라와 태양상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나라, 도시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냥 폐허가 됩니다. 이유를 10절에서 정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나무를 심어주셨는데 이방 나무, 아람의 나무를 심고 울타리 만들고 물을 줬는데 다 말라버렸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 참 이상하다. 내가 의의 푸른 나무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을 심어주었는데 그 나무을 뽑아버리고 아람 나무, 아세라, 태양신 나무를 심어? 이유가 무엇인가요? 구원의 하나님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우리의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하나님께 의지하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않은 까닭입니다. 우리 마음이 공격받은 것입니다. 악한 영들이 우리 마음에 불화살을 쏜다고 합니다. 마음을 다 빼앗아 갑니다. 교회들 마음도 다 빼앗아 갔습니다. 다 빼앗기고 나니까 육신의 눈이 밝아집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육신의 눈이 밝아지니깐 아람과 동맹해야하고, 머리 써야 되고 권모술수 써야 되고 아부해야 합니다. 세상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인데 다 까먹었습니다. 그들의 기쁨은 남유다를 침략하고 다른 나라와 동맹을 맺어서 앗수르, 바벨론처럼 되는 그 기쁨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신앙은 중간정도 하면 되겠지 그런 것은 없습니다. 신앙이 절대 중간이 없습니다. 왜냐면 천국 아니면 지옥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자석처럼 하나님으로 확 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하고 멀어진다는 것은 내 마음이 다 빼앗긴 것입니다. 신앙은 중간이 없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에 교회만 가면되지, 그것은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이 빼앗긴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중간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기독교는 극단적이냐? 교회는 왜 이렇게 이기적이냐? 하나님은 왜 이렇게 이기적이냐? 우리가 병에 걸려서 내일 죽는다고 한다면 가만히 계시겠습니까. 병원을 찾아가고 무슨 약이라고 구해서 먹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냥 목숨이 아니라 영원한 내세입니다. 천국과 지옥. 신기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하냐면 암에 걸린 후 항암치료 받고 다 완쾌가 되었습니다. 또 술, 담배합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겨우 살아났는데 또 범죄 합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은 그냥 복음이 아닙니다. 그냥 좋은 소식정도가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는 죄에서 벗어나서 영원한 천국에 입성하시는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못 받는 것입니다. 이 능력이 우리 집 잘 살게 해주세요, 우리 남편 승진하게 해주세요. 하나님 능력을 믿습니다. 그런 능력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능력은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 이 다메섹과 동맹을 맺은 에브라임은 다른 복음을 쫓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다른 복음을 쫓아가는 이스라엘을 그냥 두시고 싶지 않으신 것입니다. 천국은 다른 길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으려고 살아야하고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Ⅲ.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_이사야17:12-14
‘슬프다 많은 민족이 소동하였으되 바다 파도가 치는 소리 같이 그들이 소동하였고 열방이 충돌하였으되 큰 물이 몰려옴 같이 그들도 충돌하였도다 열방이 충돌하기를 많은 물이 몰려옴과 같이 하나 주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리니 그들이 멀리 도망함이 산에서 겨가 바람 앞에 흩어짐 같겠고 폭풍 앞에 떠도는 티끌 같을 것이라 보라 저녁에 두려움을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이는 우리를 노략한 자들의 몫이요 우리를 강탈한 자들의 보응이니라_이사야17:12-14’
무슨 말인가요? 우리가 세상과 동맹을 맺고 있는 세상은 다 사라질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다 사라집니다. 티끌 같습니다. 13절에 보니까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흩어진다고 합니다.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다윗이 이야기했습니다. 악인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라고 했습니다. 바람에 나는 겨처럼 다 사라진다고 합니다. 저녁에 두려움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그들이 다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제 요한계시록에 아주 미래에 대한 예언도 담겨있는 본문이지만 그것은 나중에 설교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녁에 두려움 당하고 아침이 오기 전에 다 없어진다고 합니다. 다 사라집니다.
- 하나님은 징벌을 통해 미워하시는 죄와 사랑하시는 죄인을 분리시키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워하시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십니다. 분리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에서 분리되고 죄에서 분리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뜻대로 살 수 있기 때문에 죄에 분리됨과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땅을 밟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땅을 밝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 발에 신을 벗으라고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의 거룩한 땅을 입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죄와 섞일 수 없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죄를 벗어내려고 계속 작업하십니다. 죄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 있습니다. 마음에 악, 독이 다 있습니다. 마음에서 열매를 맺습니다. 잠언서, 신약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죄가 다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나요? 여러분 너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슬퍼하시면서 진행하신다고 합니다. 12절에 슬프다 많은 민족들이 소동하고 싸우고 파도 같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은데 그것과 동맹을 맺냐 북이스라엘, 에브라임아 어떻게 아람, 앗수르, 바벨론과 마음에 동맹을 맺을 수 있느냐, 슬프지만 너희들에게 주었던 영광 다시 빼앗아 갈게. 그 때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 때 그의 눈이 이스라엘 거룩하신 이를 뵙겠다. 축복입니다. 사람이 악인이 되면 하나님이 슬퍼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준비하면서 다메섹이 궁금했습니다.
- 사울의 회심 장소였던 다메섹_사도행전9:1-22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는지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너는 일어나 시내로 들어가라 네가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더라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니라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_사도행전9:1-22‘
성경에 다메섹에서 대해서 자세히 많이 나와 있지는 않습니다. 다메섹하면 사도행전 9장이 생각납니다. 사울이 다메섹에 공문을 가지고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갈 때 다메섹 길거리에서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하늘에 신기한 빛이 비쳤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 빛을 봤지만 그 빛을 느낀 사람, 본 사람은 사울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메섹 도시 안에 직가라는 거리에 가서 신실한 아나니아를 만납니다. 그 아나니아와 제자들과 함께 하면서 사울이 거기서 회심합니다. 사도행전 9장에 하나님이 사도바울에게 뭐라고 이야기하시냐면 이방을 위한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합니다. 다메섹에서 사울은 주님의 빛을 만났습니다. 아나니아와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신기합니다. 다메섹에? 아람에? 신실한 제자들이 있었고 다메섹에서 하나님이 시대의 전도자였던 이방을 살리려고 갔던 사울을 만나주십니다. 그러고 보니 다메섹에 얼마나 흩어진 디아스포라,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모여 있었는지. 알고 봤더니 이 다메섹에 제자들이 양육하고 제자들을 키워내는 우리말로 훈련하는 예배 공동체가 있었던 것입니다. 신기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스라엘이 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고 야곱에게 주신 은혜를 잊지 않고 있으면 이 다메섹도 같이 축복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마음을 다 빼앗기고 세상과 동맹을 맺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과 짝하려고 하면 다메섹도 함께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은혜를 향하고 있으면 다메섹도 같이 주님께 쓰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향하지 않고 다메섹과 동맹을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 삶의 모든 터전들, 우리의 기업, 사업, 달란트, 육신, 외모 모든 것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면 다 귀하게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주의 복음을 위해서. 그런데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있지 않고 이런 것들과 동맹을 맺기 시작하면 다 같이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짜 중요합니다. 사실 다메섹은 북이스라엘을 깨우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다메섹이 사도행전에 이스라엘이 성령충만함을 받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회복하고 나니까 다메섹에 이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다메섹도 이렇게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구나. 여러분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것을 이야기해주시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던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1장 6절에서 17절에 이야기합니다.
-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_갈라디아서1:6-17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_갈라디아서1:6-17’
북이스라엘이 이렇게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속히 떠납니다. 순간 떠납니다. 지금 미국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교회도 다른 복음이 무엇이냐? 교회가 우상을 섬기고 소를 가져다 놓고 절하고 교회가 타락하고 술 먹고 이런 게 아닙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음, 회개의 복음, 죄인들보고 돌아오라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처럼 그런 복음이 아니라 교회가 자기개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를 가면 웃깁니다. 이야기 안 하려고 하는데 여러분 아셔야 합니다. 교회에 가면 좌석에 이름이 적혀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장로, 수석장로님. 교회가 무슨 신분이 있습니까? 신분대로 자리를 앉습니까? 일찍 온 사람이 앞에 앉는 것입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앞에 앉는 것입니다. 장로님들이 얼마나 은혜를 못 받으면 목사님들이 앞자리에 앉으라고 이름까지 적어 놓았을까라는 생각도 들지만 무슨 성도들이 보험입니까? 교역자실 들어가면 1교구, 2교구해서 실적 그래프를 그려놨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 이 말은 무슨 말인가요. 목사라도 그 은혜가 소멸되어 버리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입니다. 다메섹과 동맹을 맺어버리는 것입니다. 훨씬 좋아 보입니다. 다메섹과 동맹을 맺으면 남유다를 먹고 우리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대항할 수 있겠지. 우리도 저 나라처럼 강력한 나라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 보실 때는 세상 쓸데없는 것을 가지고 머리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내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내 능력의 반석을 내 마음에 두지 아니한 까닭이라. 11-17절 다메섹에게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간증하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님을 간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무슨 프로그램인가요? 예수님은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예수님을 프로그램으로 전하면 큰일 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부르심 속에 있어야 합니다. 매일 하나님의 부르심이 예수님 처음 믿을 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3장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이것은 새신자에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중직자, 교회 신실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늘 매일, 아침마다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잊지 않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그걸 하지 않으면 마음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 능력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우리 마음을 다 빼앗겨 버립니다. 보이지 않는 악한 영들의 존재가 얼마나 강력한지 아십니까? 그래서 바람에 나는 겨를 우리도 동맹 맺어 쫓아 사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중요합니까? 왜 하나님입니까? 왜 오직이냐고 이야기를 하는데 다른 복음으로는 천국에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으로는 구원을 못 받기 때문입니다. 암에 걸렸는데 암 수술을 할 수 있는 분이 서울 강동에 큰 병원에 의사 외에는 수술을 못한다고 합니다. 그럼 오직이 될 것입니다. 그 의사가 아니면 내 수술을 못해줘, 다른 의사는 절대 내 병을 못 고쳐주고 그 의사만, 그 전문의만 암을 고쳐줄 수 있는 특수한 상황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걸 보고 오직이라고 합니다. 오직 복음입니다. 오직 예수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직 예수라고 하냐면 다른 걸로 천국에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조금 열심히 교회를 봉사하면 가산점이 있고 천국을 가면 좋겠는데 그런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잊지 않아야 될 것이 우리가 그렇게 우리 영혼이 연약하고 죄인이기 때문에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매일 만날 수 있고 매일 예수님을 교제할 수 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할 수 있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 은혜를 위해서 우리에게 뭐라고 하냐면 경건을 회복하라고 합니다.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라고 합니다. 짐 엘리엇이라고 하는 젊을 때 남미에 식인종에게 죽었던 선교사가 남미에 선교하러 가기 전에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가 유명한 대학교에서 선수였고 촉망받고 실력 있는 엘리트였습니다. 그가 남미에 복음을 전하러 간다고 하니. 갔던 부인들이 다 미망인 될 정도로 가자마자 죽었습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것은 결코 바보가 아니다. 놀라운 것은 그 부인이 거기를 선교하러 또 갔고, 그 자손들이 선교하러 또 갔습니다. 결국 다 예수님 믿었습니다. 물론 그의 삶이 일찍 죽어서 안타깝고 억울하고 우리는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저 집사님 왜 가난하지? 저 집사님이 왜 저렇게 힘들게 살지? 우리는 육신을 가지고 그렇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영혼이 빼앗기지 않고 영혼이 풍성하신 분들 믿음이 탄탄하고 견고하고 완전하신 하나님 품속에 사시는 분들은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얼마나 평안하지 얼마나 만나면 기분이 좋고 행복하지. 우리가 이 정체성, 북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정체성은 특별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정체성은 특별합니다. 다메섹은 그 이스라엘이 마음이 빼앗기고 나서 세상과 동맹하고 세상의 그릇된 우상과 동맹하고 하나님이 그것을 멸망하고 다시 회복시키시는 과정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바라볼 때는 그 주변 나라들도 같이 쓰임 받습니다. 다메섹에서 사울이 회심했고 신실한 제자들을 키워냈습니다. 오늘 바울이 간증합니다. 내가 다메섹으로 갔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에. 우리 가스펠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이 부르심의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잊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첫사랑을 기억하고 사셔야 합니다. 옛날에 은혜 받았는데. 까먹었다는 말은 지금 그 은혜를 받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사는 겁니다. 그것을 매일 기억하기 위해서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는 것입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 우리의 눈이 거룩한 하나님을 향하고 있는 것. 그 구원의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교회가 교회답게 쓰임 받을 수 있고 우리 주변 사람들이 이 다메섹처럼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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