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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1-06-27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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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6월 27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2부예배)
제 목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
본 문 이사야 40:12-31

 

 오승주 목사

 

Ⅰ. 나는 누구인가요?(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_창세기1:27-28, 에베소서1:4-5, 이사야43:7, 21, 마태복음6:33, 요한복음14:1-3, 요한계시록21:3-4

 

지난주에도 여러 번 말씀을 드렸는데 네팔에 상황이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되게 많이 어려운 상황인 것 같습니다. 슬픈 소식은 우리가 여러 번 방문했던 네우라니 마을, 산꼭대기 마을입니다. 영상을 보셔서 아시겠지만. 네팔도 가난한데 그 산꼭대기에 있는 사람들은 훨씬 더 가난합니다. 산비탈에 움막 같은 것을 지어놓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희가 그 학교를 여러 번 방문을 했고 또 따루 선교사님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서 사역을 하던 곳입니다. 저희가 가서 봤던 아이들 중에 두 아이가 죽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냥 죽은 게 아니고 부모님이 아이를 죽이고 부모님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참한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마음이 되게 좋지 않았습니다. 오래 마음에 담겨있어서 되게 속상했습니다. 제가 따루 목사님께 싫은 소리를 하면 안 되는데 원망 섞인 말도 했습니다. 뭐하고 계셨냐고 그렇게 어려운 가정 있으면 우리한테 연락을 해주시지. 거기 네우라니 마을은 한 달에 3만원, 5만원만 있으면 온 가족이 한 달을 먹고 삽니다. 3만원, 5만원이면 저도 줄 수 있고 누구나 줄 수 있는 돈입니다. 그게 없어서 비관해서 코로나 때문에 뭐가 많이 겹쳤겠죠. 아이를 죽였다고 하더라고요. 여러분 아무리 부모가 가정의 경제가 비관스러워도 아이들을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 본인들이 목숨을 끊고 죽는 것은 괜찮은데 아이들을 고아원에 맡기고 죽으시든지. 아이들이 부모 없이 실패할거라고 생각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고아로 커서 성공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부모들의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자기 자식들은 자기들이 없으면 못 살거다 라고 생각하시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함부로 생명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자기가 목숨을 끊는다고 해서 자녀들까지 그렇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저는 또 너무 아쉬운 것이 그 사람들이 한 집만 건너면 도움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학교에 부탁을 하고 또 따루 목사님에게 부탁을 하면 도와주는 사람, 후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왜 그것을 하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그게 부끄럽거나 말해 뭐하냐 이런 생각이 든다면 아주 나쁜 생각입니다. 그게 바로 자기 정체성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신앙생활해서도 안 되고 우리 인간 세상이 그래서도 안 됩니다. 정말 죽을 것 같으면 도움을 구하는 것이 정상이고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네우라니 마을에 우리가 후원을 하지 않으면 모를까 사역자가 없으면 모를까 그 가정의 부모님이 우리 아이들이 너무 힘들다, 먹을 것이 없어서 굶고 있다 한 번만 우리에게 부탁을 했으면 왜 우리가 돕지 않았겠어요. 뭘 보내주지 않았겠어요. 그러니까 뭐가 문제냐면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도움을 구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 지역을 위해 기도하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학교를 몇 번이나 갔는데. 그런 것이 너무 아쉬운 것입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정체성, 나는 누구인가를 잘 모르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나는 누구인가를 왜 모를 수밖에 없는 게 나를 돕는 사람, 나를 창조하신 사람, 내 인생길을 계획하신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면 내가 누구인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땅에 태어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그냥 죽는 사람이 허다합니다. 장례식만 가봐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어디서 왔고 뭘 해야 될 사람이고 왜 살아야 되는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쾌락을 즐기다가 죽는 사람도 있고 목적 없이 정처 없이 열심히 살다가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에서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분에게도 제일 중요한 것이 정체성입니다. 내가 누구이냐. 아이덴티티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데 왜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냐? 내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모르니까 신앙생활하면서도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축복하셨습니다. 우리의 존재에 대해서 성경은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_창세기1:27~28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개, 돼지 같은 짐승으로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비유는 그렇게 하셨지만 우리는 개, 돼지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생기를 우리 코에 집어넣으신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피조물과 다르게 우리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어떤 복이냐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런 우리가 창세기 3장에 보니까 사단의 꼬임에 넘어가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우리에게 떠난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인간이 죽은 상태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이 죽은 상태가 아니라 우리 영이 죽은 상태다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냥 우리를 두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이 땅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사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_에베소서1:4~5

 

하나님은 왜 우리를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애쓰고 계시냐면 그래야 천국에 입성할 수 있고 거룩하고 흠이 없어야 하나님 나라에 입성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거룩하고 흠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5절.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_이사야43:7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_이사야43:21

하나님이 인간을 지은 목적은 하나님을 찬송하고 예배하도록 지으셨습니다. 그게 우리가 기분 나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 당신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저와 여러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_마태복음6:33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전도하러 가야한다? 맞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사역하러 가야 한다? 맞습니다. 그런데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는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진짜 정확히 이야기하면 예배이고 찬송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어떤 전도라는 아주 편협 되고 한계가 있는 전도행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을 위하여 사는 자에게 하나님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원래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으로 가지면 하나님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채우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 건강도 그렇습니다. 창조원리대로 살면 아플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병에 걸리고 아프죠? 창조 원리대로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창조원리대로 정확히 살면 아플 일이 없습니다. 병원 가서 하는 이야기 다 똑같습니다. 창조원리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풀 먹고 운동하고 이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저도 라면 의사선생님이 절대 먹지 말라고 했는데 어제 유혹에 넘어가서 라면을 먹어버렸습니다. 창조원리대로 산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절대 안 먹어야지, 절대 나는 안 먹을 거야. 이렇게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니까 뭐든지 창조원리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리로 가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채우시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3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 대해서 더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_요한복음14:1~3

 

예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 지음 받은 우리가 죄인인 상태에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찬송이 되는 것이 뭐냐면 우리가 하나님의 집, 천국에 입성하는 거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어쩌면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찬송하는 것은 한계가 있는 찬송이고 한계가 있는 영광일 수 있습니다. 웨인그루뎀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짜 영광 돌리는 것은 우리가 천국에 입성하는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잘못된 신학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어떤 유토피아 사상을 가지고 신학계가 이 땅에 천년왕국을 건설해야 되고.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해야 되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그런 내용은 없습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우리가 좁은 길을 갈 거래요, 고난이 올 거래요. 갈수록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만 합니다. 성경은 예수 믿으면  핍박이 있고 좁은 길을 갈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천국은 물론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우리 마음이 천국이 될 수도 있고 우리 가정이 작은 천국이 될 수 있겠지만 진짜 천국을 이야기합니다. 존재하는 천국. 내세는 진짜 존재하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혼동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께서 처소에 예비하러 가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와서 우리를 영접해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그런데 그게 뭐냐? 그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우리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천국에 입성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찬송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21:3-4에 천국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_요한계시록21:3~4

 

여러분 이 땅에서는 사망도 있습니다. 애통도 있습니다. 곡하는 것도 있고 아픈 것도 있습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돈이 많고 아무리 명예와 권력이 많아도 이것을 극복한 사람이 없습니다. 네 극복했다 칩시다. 삼성그룹 회장님이 이것을 극복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보다 100년을 더 사셨습니까? 200년을 더 사셨습니까? 그런 인간은 없습니다. 이 땅에서는 누구나 다 예수를 믿으나 믿지 않으나 어려운 삶을 사는 것이 세상살이입니다. 겨우 그거 벗어나고 나 어렵지 않게 살았다 하는 것, 쾌락 좀 즐기고 사는 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뭐라고 하냐면 천국은 그 모든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다고 합니다. 지나갔다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짧게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평균적으로 80년을 산다고 칩시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갑니다. 여러분 그렇게 안 느끼시나요? 제가 목사니까 아무래도 돌아가시기 전에, 임종 전에 병문안 같은 것을 많이 가서 돌아가시기 직접의 분들을 많이 만납니다. 만나면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후회하는데 제일 먼저 후회하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한 것을 제일 먼저 후회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가족들에게 잘 해주지 못한 것을 다 후회합니다. 자식들에게 자기 아내와 남편에게 잘 해주지 못한 것. 시간이 이렇게 빨리 갈 줄 몰랐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성공해서, 조금 더 잘해서 그 때 잘해주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와버렸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쑥 지나갑니다. 저는 지금 제가 40대 중반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습니다. 배 나온 아저씨가 됬다는 것이 너무 슬픕니다. 저는 20대 때부터 30때 초반까지 농구장에 살았습니다. 제가 농구하고 있으면 꼭 동네 배 나온 아저씨들이 40대 아저씨들이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엄청 싫습니다. 배 나온 아저씨들과 같이 농구하면 싫은데. 요즘 제가 농구하러 가다보면 아 쟤네들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때마다 서글픕니다. 여러분 10대는 시속10km로 간다고 그러잖아요, 20대는 시속 20km로 간다고 그러잖아요. 어른들이 하는 말인데 그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30대는 30km로 가고 40대는 40km로 갑니다. 그런데 제가 느끼는 40대의 속도는 40km가 아닙니다. 한 400km로 가는 것 같습니다. SRT 가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얼마나 빨리 일주일이 지나가고. 벌써 7월 달입니다. 올해 송구영신예배가 어제 드린 것 같은 느낌인데 그렇게 세월이 빠릅니다. 어리석습니다. 지금 성경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의 인생이 순삭입니다. 천국은 영원합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내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누구라고 성경은 설명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내가 누구인지 내 정체성을 알기 힘든 시대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로마 네로 황제가 핍박했던 시대는 그 당시에는 엄청 핍박했습니다. 왜냐하면 황제들이 스스로 주라고 큐리오스라고 내가 주야 이렇게 했는데 다른 모든 종교들은 그 단어를 쓰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기독교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기독교만 골라서 핍박했습니다. 나중에 다 사형도 당하고 비참하게 죽였습니다. 에베소 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사도 요한은 밧모 섬에서 18개월이나 채석장에서 하루에 17-18시간씩 일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냥 밧모 섬에서 성경이나 쓰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얼마나 모지게 핍박했는지. 그런데 그렇게 핍박이 있던 시대는 오히려 내 신분을 정확히 알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는 사람이야. 우리는 천국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당연히 핍박이 있어. 우리는 모여서 기도할거야, 우리는 예배드릴 거야 이런 것인데 지금은 그런 핍박과 고난의 시대가 아닙니다. 반대로 문맹이 발달하고 어떤 편리주의라든지 번영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보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그 편리주의와 번영은 핍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단, 마귀가 네로황제와 같은 독재자를 통해서 우리 사지를 찢어 죽이는 것만 핍박이라고 생각하지 이런 편리주의나 번영이나 사상과 이념을 핍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영적인 싸움도 싸우지 않고 그냥 무방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편리주의가 좋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시대에 주시는 문명의 혜택은 우리도 누려야 합니다. 저도 엘리베이터도 탑니다. 요즘 차가 얼마나 좋아졌는지. 차 안에 기능들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차도 타야 합니다. 이런 혜택들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편리주의가 우리에게 빼앗아가는 것을 아주 냉정하고 통찰력 있게 관찰하고 또 그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우리에게 뺏는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우리에게 빼앗아가는 것들이 많습니다. 특히 예수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는 영적인 무감각이라든지, 하나님의 은혜라든지, 십자가의 보혈, 복음의 능력. 이런 것을 다 빼앗아 갑니다. 그것을 빼앗긴 우리에게 하나님은 책임을 물으신다고 합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해서 꽤나 진지하고 심각합니다.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게 편하게 쉬지 말아라, 문명혜택을 누리지 말아라 이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내 안에 하나님을 향한 어떤 뜨거운 예배라든지 복음의 능력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복음의 능력을 모르냐? 다 압니다. 그런데 왜 복음의 능력이 우리 삶에 나타나지 않냐? 이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만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그 편리주의들. 제가 컨디션, 몸이 안 좋으면 집에서 쉬어야지 이럴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니까 제가 꼭 해야 될 기도 스케줄이 있습니다. 집에서 기도하려고 생각하고 있으면 일단 집에서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어른들이 자식들 다 키워서 출가 시키고 기도실도 있고 기도처도 있으면 집에서 기도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저는 기도하려고 눈 감으면 저희 아들이 아빠 하고 옵니다.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기도하려고 눈 감으면 와이프가 쓰레기 좀 버리고 오라고 합니다. 저는 안 됩니다. 제가 영성이 조금 떨어져서 그런지 능력 있는 목사가 아니어서 그런지. 기도하려고 하면 저는 분명히 교회를 갑니다. 그러면 가족들이 이야기를 합니다. 뭘 기도한다고 교회까지 차 30-40분씩 운전해서 막히는데 가냐며. 몰라서 그렇습니다. 교회 와서 의자에 앉고 바닥에 앉아서 기도하면 생각나지 않던 기도제목도 생각나서 기도하게 됩니다. 기도는 그렇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내가 편리하자고 운전하기 싫어서 교회가기 싫어서 집에 있으면 기도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못하면 내 안에 복음의 능력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편리주의들이 우리 삶에서 빼앗아가는 것을 생각해봐야 합니다. 편하게 살고 편리하게 산다는 것이 영적으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사단의 무기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사람 사이에도 좋은 교제를 하려면 노력이라는 것을 해야 합니다. 부부사이에도, 부모자식 간에도 편리하게 살고 나만 편하면 되지, 내 와이프가 힘들던 말든, 내 자식이 힘들던 말든. 이렇게 살면 진짜 사회문제가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가족 간에 화목하거나 건강하게 크는 가족이 없다고 합니다. 그냥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니까 나 혼자 돈 벌어서 나 혼자 놀러 다니고 애완견이나 키우면서 사는 것이 좋으니까. 그런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게 편리하게 살다가 빼앗겨버리고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신앙은 더욱 그렇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눈 뜨면 핸드폰부터 봅니다. 그리고 핸드폰 들고 인스타그램이나 유튜브나 페이스북 쳐다 보고 있으면 10-20분 금방 지나갑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을 말씀해 드릴까요? 그거 하고 있는 시간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몇십 분이 지나가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희 교회 성도님이 저에게 간증하셨습니다. 아침에 눈 떠서 성경책 겨우 3장 읽는데 끽해야 5분입니다. 5분 동안 성경 읽는데 별 생각이 다 든다고 했습니다. 빨리하고 출근해야 되는데. 뭐 해야 되는데. 겨우 5분 동안 얼마나 잡다한 생각이 많이 들던지.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게 편리주의입니다. 유튜브 보고 있는 것은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책 한두 장 읽는 것은 너무 아깝게 생각이 되는 것이 편리주의가 우리에게 빼앗아 가는 것들입니다. 여러분 예배도 그렇습니다. 교회 오는 것이 얼마나 불편해요. 예배 시간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어요. 옷 갈아입어야 되죠. 코로나 끝나면 어쩌나 이런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코로나 때 집에서 너무 좋으셨죠. 양복 안 입어도 되고, 화장 하지 않아도 되고. 코로나 끝나면 어쩌실까. 그게 우리의 병든 마음입니다. 그런 편리주의가 우리를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정체성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내가 누구인지 절대 알 수 없습니다. 남유다가 왜 자기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냐면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리니까 남유다는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원래는 이 길로 가야 되는데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곁길로 빠져버린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Ⅱ.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

 

-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_이사야40:12-17

 

(12) 누가 손바닥으로 바닷물을 헤아렸으며 뼘으로 하늘을 쟀으며 땅의 티끌을 되에 담아 보았으며 접시 저울로 산들을, 막대 저울로 언덕들을 달아 보았으랴 (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14) 그가 누구와 더불어 의논하셨으며 누가 그를 교훈하였으며 그에게 정의의 길로 가르쳤으며 지식을 가르쳤으며 통달의 도를 보여 주었느냐 (15) 보라 그에게는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고 저울의 작은 티끌 같으며 섬들은 떠오르는 먼지 같으리니 (16) 레바논은 땔감에도 부족하겠고 그 짐승들은 번제에도 부족할 것이라 (17) 그의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니라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시느니라_이사야40:12~17

 

12절. 손바닥으로 바닷물 퍼 보셨어요? 다 담기던가요? 바닷물이 뭐에요 수돗물 켜도 손바닥에 종이컵보다 담지 못합니다. 다 세어 나갑니다. 뒤에는 더 기가 막힌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13절. 누가 하나님을 훈계하거나 하나님 하시는 일에 대해서 누가 교훈하거나 가르치거나 한 사람이 있냐는 것입니다. 

15절. 지구, 열방이 통의 한 방울 물과 같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럴만 한 것이 우주천문학이 발달이 되었습니다. 옛날 3-4000년 전에는 별이 5천개까지 발견이 되었습니다. 지금 발달된 기술로 본 지구 같은 별이 몇 개냐? 우리가 쓰지 않는 단어 몇 십 해의 별이 있다고 합니다. 은하계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숫자로 존재하는 것이 우주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지구를 보실 때 없는 것 같이 보신다는 말씀이 일리가 있습니다. 물방울 같다는 것입니다. 바닷속의 물방울 갔다는 것입니다. 섬들은 먼지 같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보이실 것입니다. 

16절. 왜 레바논을 들었냐면 레바논은 그 당시에 백향목이라는 나무가 나던 부유한 지역입니다. 그것을 수출해서 엄청 부를 쌓은 지역이 레바논입니다. 가장 좋은 나무가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레바논 자체가 땔감에도 부족하다고 합니다. 무슨 땔감에요? 그 살찐 짐승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도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헌금하니까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드리는 것으로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1%도, 0.00001%도 우리가 드려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공로는 한 개도 없습니다. 레바논에 있는 모든 것을 땔감 삼아서 짐승을 태워서 제사를 드려도 하나님에게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족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열방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 실제로 우리가 그렇잖아요. 우리가 장례식만 가 봐도. 저는 목사니까 장례식을 진짜 많이 갑니다. 올해만 해도 얼마나 많이 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장례식 가면 진짜 허무합니다. 저희 부모님 장례를 다 치뤘는데 진짜 허무했습니다. 우리 엄마, 아빠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 구나. 진짜 허무합니다. 그런데 진짜 감사한 것이 뭐냐면 천국이 있다는 것이 너무 고맙웠습니다. 엄마 인생이 이렇게 고생스럽게 사셨는데 그냥 여기서 끝나면 정말 허무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내세가 있습니다. 천국에 입성하셨습니다. 그게 얼마나 감사하던지. 여러분 정말 허무합니다. 아무리 부자이든, 명예를 가졌든 대통령이든 다 장례를 치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장례식에 가면서 가장 따뜻하고 감사한 장례식은 자녀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장례식장입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가 부모님에게서 받은 신앙의 유산으로, 그 부모님을 존경하는 장례식장에 가면 진짜 마음이 따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그렇게 하찮은 존재라는 것을 지금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왜 그런 이야기를 하고 계신지 아시나요? 남유다에게, 포로 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 무슨 형상이 그에게 비기겠느냐_이사야40:18-26

 

(18)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19)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장색이 금으로 입혔고 또 은 사슬을 만든 것이니라 (20) 궁핍한 자는 거제를 드릴 때에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하여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아니하도록 세우느니라 (21) 너희가 알지 못하였느냐 너희가 듣지 못하였느냐 태초부터 너희에게 전하지 아니하였느냐 땅의 기초가 창조될 때부터 너희가 깨닫지 못하였느냐 (22) 그는 땅 위 궁창에 앉으시나니 땅에 사는 사람들은 메뚜기 같으니라 그가 하늘을 차일 같이 펴셨으며 거주할 천막 같이 치셨고 (23) 귀인들을 폐하시며 세상의 사사들을 헛되게 하시나니 (24)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자 곧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 가는 초개 같도다 (25)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_이사야40:18~26

 

18절. 이 말은 지금 하나님이 따지시는 것입니다. 남유다가 지금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

19절. 우상은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20절. 여기서 궁핍한 자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거제를 드릴 때는 썩지 아니하는 나무를 택하고 지혜로운 장인을 구해서 우상을 만들어 흔들리지 않도록 세운다는 겁니다. 너희 진짜 대단하다, 너희 먹고 살 것도 없고 자식들 밥 먹이는 것도 힘든데 우상 세우는 것은 돈을 들여서 흔들리지 않게 세워 놓냐? 지금 이 말입니다.

21절. 이 땅만 봐라, 우주만물을 봐라. 

23-24절. 인생이 조금 잘 사는 사람들, 귀인들이 인생을 성공해서 땅에 뿌리를 박는 겁니다. 가문도 만들고 이제 우리 이 땅에 떵떵거리며 살자. 그렇게 말했는데 땅에 뿌리를 박자마자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말라 회오리바람에 불려가는 초개 같도다. 회오리바람에 불려가는 먼지, 지푸라기 같다는 것입니다. 인생이 그렇잖아요. 아무것도 우리는 가져가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25절. 남유다가 얼마나 웃기냐면 하나님이 계시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레바논이 발전하고 앗수르가 발전하니까 눈을 열어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복음을 전해야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전해야 되는 사람들이 가서 보니 레바논, 앗수르, 바벨론이 발전하고 있으니 거기의 우상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웃기죠? 코미디 같은 일입니다. 그래놓고 하나님 앞에는 예배드리면서 뒤로는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것은 눈에 보이잖아. 그러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주는 참 선지자들을 남유다, 북이스라엘이 진짜 많이 죽였습니다. 여러분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였습니다. 죽이니까 어떤 선지자가 나오냐면 거짓 선지자들이 나옵니다. 우상 섬기라고, 잘하고 있다고, 아부하고 비유 맞추는 선지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똑같습니다. 목사들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유, 성도님들 잘 하고 계십니다. 이러는 겁니다. 저도 그럴 수 있겠죠. 그러면 여러분 쫓아내세요. 교회최고 기구는 공동의회입니다. 세례 받은 성도들이 연말에 하는 공동의회가 교회에 최고 높은 기관입니다. 교회법으로 성도들이 교회에 주인입니다. 여러분이 거기에서 투표해서 과반  수 이상이 우리 목사 교체하자고 하면 교체가 되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그렇게 하세요. 정말 그렇습니다. 목사를 죽였습니다. 참된 목사를 죽이기도 하고 참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에스겔 선지자가 퍼포먼스까지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죽었다,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 라고해서 그 죽은 뒤에 초막 같은 것을 치고 있는 그래서 상복을 입고 초막에서 살았습니다. 그 말은 무엇인가요? 너네 다 죽었다, 너네 다 살아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고 퍼포먼스를 했습니다. 그런데 에스겔 선지자를 보고 종교지도자들이 정신병이라고 매도했습니다. 언론에 배포하고 티비, 방송에서 정신병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겔 선지자의 말을 듣겠어요? 만약에 여러분이 이 나라 정부가 교회 가지 마세요, 교회는 이상한 사이비 단체에요 라고 연일 언론에서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신뢰 가는 방송인, 언론인들이 때린다고 생각해보세요, 누가 교회 오겠어요? 그런 식으로 선지자들을 다 몰살시켰습니다. 그러니깐 지금 하나님을 이방신하고 견주고 비교하고 이제는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27절에 나와 있습니다. 

 

-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겼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_이사야40: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_이사야40:27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내 길이 여호와께 숨겨졌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너무 어렵게 써놨고 쉽게 이야기하면 내 길은 이제 하나님과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이 내 길에 대해서 참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문명이 발달하고 이렇게 좋은 시대에 우리가 계획한대로 갈테니까 하나님 신경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의뢰하지 않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저는 이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라고 말하는 것을 개인적으로 제일 싫어합니다. 자꾸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시대이야기를 합니다. 시대를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무슨 말이냐면 성경에 있는 내용들이 고리타분하다는 말입니다. 시대 시대하면서 성경 읽는 것, 교회에서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것 다 바보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목사님, 교회 운영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죠. 그러면 교회운영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기업들이 , IT기업들이 운영을 얼마나 잘하는데요. 교회도 그런 식으로 하셔야죠. 네, 참고할게요. 그런데 지금 딱 그런 것입니다.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다는 것입니다. 고리타분한 하나님,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이. 앗수르가 이렇게 발전하고 있는데 알 길이 있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유다 백성과 지도자들이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다고 하나님은 모르신다고 내 송사는 하나님께 벗어났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것을 화가 나시고 분노하신 것이 아니라 속상하시고 마음이 아프셔서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어리석은 당신의 백성들. 여러분 우리 어린 자녀가 부모님들이 얼마나 자녀들을 키우려고 애쓰는지 아세요? 저도 아이를 낳고 더 정신이 차려졌습니다. 자녀가 생기니 힘드록 어려워서 쉬고 싶은데 한 번 더 하게 됩니다. 그래, 우리 아들들 생각해서 조금 더 뛰게 되는 것이 부모입니다. 자식들은 그것을 잘 모릅니다. 자식들이 철없이 삐뚤어지고 나쁜 길을 가면 그게 화가 나는 것이 아니라 안타까운 겁니다. 그런데 감히 하나님의 마음과 부모의 마음을 비교할 수 없지만.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겁니다. 잘 모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속상하셔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부부끼리도 서로 진실하지 못하고 솔직하지 못하면 그런 관계는 서로 힘든 것입니다. 아무리 남편이 돈을 많이 벌어다 주어도 아무리 부인이 예쁘고 살림을 잘해도 서로 속이고 외도하고 다른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좋은 관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자기 백성에게 속임 당하는 거잖아요. 정확히 말하면 자기 백성들이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몰래 자기들은 하나님이 모른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어찌 그럴 수 있느냐 라고 하나님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Ⅲ. 야곱아 이스라엘아(승주야, 오목사야)_이사야40:28-31, 욥기3:25-26, 잠언29:25, 로마서8:28

 

야곱아 이스라엘 이 말은 엄청 중요한 말입니다. 제가 괄호 열고 승주야, 오목사야라고 써놓았습니다. 그것입니다. 야곱은 뭐에요?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외침은 뭐에요? 야곱일 때 즉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모를 때부터 우리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러니깐 제가 예수님을 믿기 전부터 승주야 하고 저를 찾으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저를 구원하시려고. 그리고 제가 주님을 만나고 나서는 제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습니다. 너는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살리는 목사가 되어서 오목사로 바꾸어 주신 겁니다. 사명을 감당하라고 이 세상에서 먹진 백성, 멋진 나라가 되라고. 그런데 오목사가 되어서도 딴 짓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아 이스라엘아. 하나인데 그 과거까지 끄집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승주야, 오목사야. 이렇게 부르시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어떻게 구원하셨습니까? 그냥 구원하셨습니까? 얼마나 사랑해주셔서 얼마나 여러분을 사랑해주셔서 이 자리에 계시는지 다 아시잖아요? 십자가 그 보혈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아서 새 인생 사는데 그래서 이스라엘이 됐는데. 우상을 그때부터 섬기네, 하나님을 비교하고 사네, 그 사랑 다 잊고 딴 짓하고 사네. 기도를 해도 예배를 드려도 마음이 떠난 것입니다. 성전 뜰만 밟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게 아쉬워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안타까워서 부르시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쉽지 않습니다. 이 인류가 물방울 같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먼지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안타까우셔서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렇게 불러주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름을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승주야, 오목사야 이렇게 부르시는 겁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내가 너희를 우상섬기라고 겨우 멸망할 나라의 우상을 섬기라고 멸망의 시대의 문화를 거기에 잠식당해서 타락하라고 죄 짓고 살라고 너희를 부른 것이 아니지 않냐.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사랑하신 이유는 불신자와 똑같이 살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너무 마음 아프셨겠다. 제가 이번 주 말씀을 준비하면서 가슴을 손을 얹고 하나님이 너무 가슴 아프셨겠다. 그러면서 회복의 메시지를 주신 것입니다. 

 

(28)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29)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_이사야40:28~31

 

28절. 이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라는 겁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은 피곤이 없으십니다. 

29-31절. 여기서 앙망은 간절한 마음으로 우러러 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내하면서 바라본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모하고 인내하며 도움을 기다린다는 뜻이 있어요. 이 앙망이라는 단어는 종합적으로 보면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고정시키고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모한다는 뜻이 앙망이라는 뜻입니다. 그냥 대충 한번 지나가다가 쳐다보는 것이 아닙니다. 죽을 것 같은 인생 지금 포로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딱 앙망은 포로들이 아무 희망도 없을 때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는 환경 속에서 그것이 앙망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앙망하다, 이 말을 가끔 주일에 교회 오면서 가끔 성경 읽으면서 쓰시면 안 됩니다. 아무 희망이 없고 고통스러울 때 하나님만이 우리의 답이고 길이구나 라는 것을 느낄 때 쓰는 말입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했느냐 내가 누구인지 모르냐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주시는데 그것을 잊어버렸느냐.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고 찾고 구하면 지금도 은혜를 주시고 지금도 당신의 능력으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앙망하라고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라고 합니다. 정말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라는 겁니다. 우리 인간도 무언가를 좋아하고 사랑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영향이라는 것을 줍니다. 그쵸? 우리가 뭔가를 좋아해요. 그 좋아하는 것이 내게 영향이라는 것을 줍니다. 사람도 그렇고 물건도 그렇고 운동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산을 좋아하면 산에 영향을 받고 자전거를 좋아하면 좋은 자전거를 사고 자전거 정보도 알고 싶고 영향이라는 것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앙망하면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면 하나님의 것들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새 힘입니다. 그런데 이 새 힘을 왜 못 받느냐? 하나님을 앙망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릅니다. 저는 성도님들과 상담하면 깜짝깜짝 놀랍니다. 이 분들이 여호와를 앙망하고 여호와를 바라본다는 말에 이해를 잘 못하고 계시구나. 그런데 제가 그랬습니다. 원래는 제가 짜증이 많은 성격이었습니다. 왜 그랬는지 몰랐습니다. 왜 짜증이 많은 성격이고 원망, 불평, 남이야기 이런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결혼해서 저희 아내가 그런 이야기를 몇 번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자꾸 듣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 너무 나빴습니다. 내가 지금 밖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역을 하고 들어오는데. 피곤해 죽겠구만. 자꾸 그런 것으로 시비거냐고. 그거 자체가 짜증입니다. 사람이 그런 식이었습니다. 집에 가면 피곤하니깐 말도 하기 싫었습니다. 그런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하길래. 그래도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짜증이 많고 원망, 불평이 많지? 제가 신앙생활하면서 잘 안 되는 문제가 올 때 마다 그랬습니다. 그리고 제 인생은 꼭 하나씩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제 친구들 보면 고속도로 가는 것 같은데 저는 늘, 제 인생은 늘 비포장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책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들을 본 것입니다. 도대체 신앙생활이 무엇이냐? 도대체 여호와를 바라보고 새 힘을 얻는다는 것이 뭐냐? 그러고 쳐다보니깐.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믿음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게 묵상이었습니다. 다윗이 시편 1편에 여호와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 여러분 신앙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전부 가지고 있는 것이 묵상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 내가 복음도 알고 있고 목회자까지 됐는데도 묵상이라는 것이 없었구나. 이 묵상이라는 것이 없으니, 내 감정이나 상황에 컨트롤을 당하고 있구나. 기분이 나쁘면 사람이 그렇습니다. 기분이 조금 나빴다가 건들면 더 나빠지고 자존심까지 합쳐져서 나중에 폭발합니다. 점점 짜증이 커집니다. 이것을 멈출 수 없습니다. 머리로 이성적으로는 아는데 감정이 컨트롤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죄가 딱 그렇습니다. 작은 죄라고 지었는데 죄가 나중에 눈덩이처럼 불어납니다. 컨트롤이 안 됩니다. 왜 나는 컨트롤하지 못할까? 아, 묵상이 되지 않구나. 여호와를 앙망하는 것이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도 앙망하는 것이지만 그래서 제가 그때부터 아침에 믿음의 사람들이 다 성경을 읽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면 그 말씀이 마음에 담겨져 있습니다. 처음에는 잘 까먹고 잊어 먹지만 계속하니깐 그러면 제가 화날 일이 있고 감정이 상할 일이 있을 때 옛날 같으면 감정에 함몰되어서 쭉 가버리는데 이제는 화가 나려고 할 때도 아침에 읽었던 성경과 기도했던 내용들이 마음에 있으니까. 맞아, 이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야. 제가 집에 들어와서도 맞아, 우리 와이프는 하루 종일 얼마나 고생했을까. 그래, 내가 왜 화를 내지? 대화하고 사랑해주고. 그래서 성경을 읽고 제가 이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감정컨트롤, 마인드컨트롤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영적으로. 제가 상황, 환경에 휘둘리지 않게 된 것입니다. 왜요? 말씀을 묵상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야. 이것은 죄야. 여러분 묵상이 없으면. 그래서 여호와를 앙망한다는 말은 행위를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그 행위가 우리에게 새 힘을 줍니다. 내가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사랑한다 말할 수 있고 미안하다 말할 수 있고. 여러분 부모님들이 자녀에게 미안해라고 말 한마디 하면 자녀들은 눈 녹듯이 녹습니다. 남편에게, 아내에게 부부싸움 할 때도 먼저 미안하다고 하는 것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 뭐가 오나요? 새 힘이 옵니다. 위로가 오고 가정의 평화가 옵니다. 밖에서 아무리 좋은 사역하고 대형사역을 많이 해도 왜 가정에 문제가 많고 가정을 다 잃어버리냐면. 사실 복음의 능력이 밖에 큰 사역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옛날에는 큰 사역을 하기 전에 부모님들이 예수 믿고 회개하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미안하다, 사랑한다 이 말 한마디에 가정들이 다 살아났습니다. 가정이 살아나니 교회는 당연히 부흥이 됩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보세요? 여러분 가정이 살면 우리 가스펠교회 부흥이 안 되겠어요? 다 부흥됩니다. 그런 것입니다. 새 힘입니다. 앙망해야, 바라봐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라보는 방법을 모릅니다.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역사하시는구나. 내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이 아버지 하나님이구나. 이것을 모르고 사니까 내가 위기를 만나고 문제를 만나도 내가 기도해야 된다는 것을 깜빡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마치 네우라니 마을의 그 분처럼 도와달라고 한마디만 했으면 도와줬을텐데 그것이 있다는 존재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 고난, 아픔에 함몰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게 정체성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이냐? 우리가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이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여호와를 앙망하면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 우리는 천국에 입성할 수 있는 엄청난 축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25) 내가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내가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26) 나에게는 평온도 없고 안일도 없고 휴식도 없고 다만 불안만이 있구나_욥기3:25~26

 

왜 욥이 이런 이야기를 했냐면 주변에서 다 뭐라고 했냐면 야, 네가 섬기던 하나님이 너 아내, 건강, 재산도 다 빼앗아 갔는데 아직도 하나님이 전부라고 이야기할 수 있냐?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그러니깐 무엇이 엄습해 옵니까? 그 말이 사실 같거든. 마음에 불안이 엄습합니다. 그런데 욥은 믿음의 사람이고 묵상의 사람이고 경건의 사람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뭐라고 이야기했나요? 주신 이도 하나님, 가져가시는 이도 하나님이시고 내가 정금같이 단련되어서 여호와 앞에 나아가리라. 이겨버린 겁니다. 한 번이 이기기 어렵지. 그렇게 계속 불안, 불신앙을 이기면 나중에는 그런 것들이 오지도 않습니다. 이겨 버릇하면 나중에 그것이 내 실력이 되어 있습니다. 이겨 버리셔야 합니다. 지실 이유가 없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_잠언29:25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_로마서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우리가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 당시에는 고난 같고 남들이 볼 때 불상해 보이지만 하나님은 결과적으로 승리하게 하시는 선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앙망과 같은 단어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안전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지하고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저는 우리 가스펠교회 가족들이 정말 행복하게 정말 축복받고 멋지게 복음의 능력을 나타내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스펠교회 다녔는데 가족들에게 후회스러운 인생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가셔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부끄러운 구원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무엇인가요?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로 사시면 됩니다. 많은 사역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배하는 자가 없는데 무슨 사역의 열매가 있겠어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는 자가 없는데 무슨 우리의 사역에 선한 사역의 열매가 있겠어요. 아무리 사역을 많이 해도 하나님을 경배하고 경외하지 않는데 남유다가 그렇게 번영하고 종교적으로 활동이 왕성했는데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비록 포로이고 고난의 길을 가는 것 같아도 주님을 앙망하고 주님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하나님은 항상 일하시고 역사하시고 부흥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이 내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다른 사람을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이 복음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내가 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미안하고, 사랑하고 그래서 삶이 변화되는 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밖의 사람들이 아니라 내 안에서, 우리 가족 안에서 들어나는 것이 진짜 능력입니다. 자꾸 남자들이 자기 집사람에게는 함부로 하면서 밖에서는 젠틀맨처럼 하는 것은 못됐고 나쁜 것입니다. 목사들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역이라는 것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가족들, 자녀, 아내,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자꾸 다른 사람에게 친절을 베풀고. 그게 말이 되나요? 그것은 복음의 능력이 아닙니다. 복음은 내가 회개하고 내가 진심으로 미안하고 사랑한다고 고백하고 그 안에서 내 삶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존재가 되어야 가는 곳마다 향기가 나고 주의 보혈의 그곳을 덮게 됩니다. 우리가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에 와서 주일에 예배도 드려야 하지만 내가 있는 곳에 예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곳은 예배터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야곱이 예배했을 때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셨습니다. 야곱아, 이스라엘아. 여러분 이름을 지금도 부르고 계십니다. 승주야, 오목사야 이렇게 부르고 계십니다. 너 하나님을 예배하던 승주 아니냐, 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던 승주 아니냐, 그런데 왜 목사가 되어서 예배하지 않니? 저한테 그러셨어요. 지금 딱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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