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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1-07-11 주일예배

 

2021-07-11 주일예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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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7월 11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하나님께서 보내신 한 분, 예수님
본 문 이사야 41:17-29

 

 오승주 목사

 

 

Ⅰ. 베데스다의 병자들_요한복음5:1-18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_요한복음5:1~18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또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 보면 베데스다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 안에 들어가셨는데 예루살렘 성 안에 보면 히브리어로 베데스다라는 작은 못이 있습니다. 연못 같은 것입니다. 거기에는 전설 같은 것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밖, 이방 땅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 안입니다. 흔히 말하면 교회 안에, 구약의 교회, 성전 안에 연못에 전설이 내려오고 있는데 그게 뭐냐면 물이 빠지고 새 물이 올라올 때 그게 물이 끓는다고 표현을 하는데 그때 천사들이 내려온다는 것입니다. 천사들이 내려와서 새 물을 준다는 그런 전설이 있는데 그때 환자들이 병자들이 그 물에 들어가면 치료된다는 미신 같은 이야기가 실제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지금처럼 의료시설이 있습니까? 그러니 수많은 병자들, 요한복음 5장 3절에 보니까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물의 움직임을 보고 기다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움직임이 나타났다,  물이 움직였을 때 거기에 먼저, 처음 들어간 한 사람만 병이 낫게 됨일러라, 병이 걸러진다는 미신 같은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누가 있냐면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다고 합니다. 다른 성경에는 앉은뱅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리가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록을 찾아보니까 태어나면서 병자는 아닙니다. 어린 시절에 원인 모를 이유로 다리를 못 쓰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리를 쓰다가 못 쓰니까 얼마나 괴롭겠어요. 그래서 삼십 팔년 동안 그 베데스다 연못에서 살았던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와서 갑자기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이렇게 물어보신 것입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그런데 이 사람의 대답이 낫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누군지를 몰랐습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했는데 삼십 팔년 된 병자가 하는 이야기가 나도 저 물에 들어가면 살겠는데 나를 저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낫기를 원하느냐고 물어봤는데 대답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했습니다. 저 물에 들어가야 낫는다는 미신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나보다 다리가 멀쩡한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 버립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네가 오랫동안 누워있으니까 이제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라고 했습니다. 돗자리 같은 것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냥 거기서 사는 것입니다. 희망도 없고 인생이 미래도 없고 비전도 없고. 자리를 들고 있어나라고 했습니다.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진짜 자리를 들고 일어난 것입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삼십 팔년 동안 한 번도 걸어보지 못한 사람이 돗자리 같은 것을 들고 일어났습니다. 여러분 다리가 멀쩡해지니까 가만히 서 있습니까? 뛰어 다녔겠죠, 너무 신났겠죠. 그것을 보고 유대인들, 바리새인들이 와서 뭐라고 합니까?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 성 안에 베데스다 연못의 사람들을 다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 안에 있으니까. 그리고 삼십 팔년 동안 있었으니까 그 병자를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알았겠죠. 여러분 같으면, 여러분이 유대인이고 바리새인들이고 종교 지도자라면 앉은뱅이, 삼십 팔년 된 병자가 돗자리 들고 걸어가면 뭐라고 반응하시겠습니까? 우리의 반응이 무엇이겠습니까? 우와, 네가 어떻게 걸어? 우와, 진짜 감사하다 이게 반응인데 유대인들은 뭐라고 반응했습니까? 거룩한 안식일에 누가 일하라 그랬어? 돗자리 들고 가는 것을 율법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피부로 와 닿지 않으시죠?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일어나서 걷고 있는데 그것에 대한 반응이 하나도 없고 돗자리 들고 걸어가는 것을 지금 유대인들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자기를 고쳐준 사람이 누군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모르겠다고, 누가 와서 일어나 걸으라고 해서 걷는거라고, 나중에 병자를 예수님이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가서 그가 예수님이었다 이야기를 하니까 그때부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미워하게 되었다 이런 내용이 요한복음 5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구약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 같은 개념입니다. 어쩌면 지금 교회와 비슷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거기 베데스다라는 연못은 간헐천이라고 합니다. 물이 끊어졌다, 나왔다 하는 간헐천입니다. 거기에 병자들이 모여서 천사들이 와서 그 물에 들어가면 치유한다는 그 일이 예루살렘 성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도 황당합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은 뭐하는 데에요? 예배하는 곳이고 하나님 앞에 제사하는 곳이고 성경을 낭독해주고 하나님 말씀 뜻대로 살도록 안내해주는 곳 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그것이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거기에 삼십 팔년 된 병자가 거기 계속 있었다는 말은 그 환자들이 주변에서 베데스다 연못만 바라보고 살고 있는 그것을 유대인들, 하나님을 믿는 종교지도자들이 방치했다는 것도 코미디 같은 일입니다. 그런데 더 어이없고 황당한 것은 그 환자를 예수님이 고쳐주셨는데 그것을 안식일에 자리 들고 걸었다는 이유로 율법을 어겼다고 했습니다. 안식일에 법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몇 미터 이상 걸으면 안 되고 물건, 음식을 만들어서도 안 되고.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 전에 음식 다 만들어 놓고 몇 미터 걷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그 율법을 어떻게 다 지키고 사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유대인들을 보고 저는 너무 충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쩌면 우리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 말씀을 배우고 성경을 배워서 우리의 삶이 거룩해지고 믿음으로 가면 좋겠는데 교회 한 구석에는 이런 베데스다 연못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교회 한 구석에는 베데스다 연못 상황과 같은 게 우리 안에 있지 않나. 예루살렘 성입니다. 메시아가 오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두고 목회자들이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것을 방치하고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치료 받고 해결 받았는데 그게 중요하고 그게 기쁜 것이 아니라 교회 전통, 율법, 우리가 서로서로 가지고 있는 어떤 관습들이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목사, 장로, 어른들이 그 관습, 전통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떠들면 안 돼. 이런 거 있잖아요. 예배시간에 감히. 저는 그것을 너무 많이 보고 자랐습니다. 과연 우리가 진짜 예수님이 우리 삶에 오셔서 우리가 정말 천국백성이 되고 구원 받는 일에 관심이 있나? 교회가? 목회자인 저는 이런 유대인, 바리새인과 같은 시각으로 쳐다보고 있지 않나? 예수님이 삼십 팔년 된 병자를 두 번째 만났을 때 이야기하셨습니다. 다시는 가서 죄를 짓지 말라고. 여러분 삼십 팔년 된 병자가 무슨 죄를 지을 수 있어요? 베데스다 연못에 앉아서 삼십 팔년동안 그 물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가서 음란죄를 지었겠습니까, 사기를 쳤겠습니까, 사람들을 괴롭히기나 했겠습니까. 무슨 죄를 지었다고 죄인이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그런데 우리는 알잖아요. 죄가 뭐라는 것을. 여러분 예루살렘 성은 우리의 교회입니다.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을 들어가기 전에 제가 베데스다 연못을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오늘 본문 속에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같은 모습이기 때문에. 똑같은 모습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Ⅱ.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_이사야41:17-20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갈증으로 그들의 혀가 마를 때에 나 여호와가 그들에게 응답하겠고 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아니할 것이라_이사야41:17

 

이게 무슨 말이냐면 가련하고 가난한 자가 물을 구하되 물이 없어서. 여러분 우리는 물이 없어본 적이 없습니다. 진짜 갈증 난 것을 경험해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편의점에 가서 생수 사서 마시면 되니까. 물이 넘쳐나는 나라에 살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 당시 중동은 물이 없습니다. 물을 퍼내도 우리처럼 깨끗한 물이 없습니다. 석회물이 있습니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이 포도주를 만들어서 마시는 것이고 맥주를 만들어서 마시는 것입니다. 깨끗한 물이 없어서 마실 수가 없어서 맥주를 마시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물이 없는 사람들이 갈증이 와서 혀가 마를 정도면 어떻게 되요? 간절히 구하겠죠. 여러분 물을 찾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할까요? 시편의 저자도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처럼. 지금 물이 없어서 갈급한데 금은보화가 눈에 들어오겠어요? 물이 없어서 갈급한데 공부 이런 것이 눈에 들어오겠어요? 물이 없어서 목말라 죽게 생겼는데 내 미래의 비전이 들어오겠어요? 물이 없어서 갈급한데 사람끼리 갈등하고 그러겠어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물이 없어서 목말라 갈증으로 곧 죽는데 물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것을 왜 이야기하고 계시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이런 갈급한 상태가 아닌 것입니다. 간절함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 왜 그럴까요? 진짜 갈급하고 목마른 상태가 아니냐? 영적으로 그런 상태인데 다른 것으로 그것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오늘 본문에 우상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이 실제로는 엄청 메말라 있고 갈급하고 갈증을 내고 있는데 그 갈증을 못 느끼고 살 정도로 세상적인 것들이 세속적인 것들이 우리 마음과 영혼을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갈증을 내고 있고 우리 영혼이 황폐해진 것에 대한 결과, 열매가 곧 오고 있는데 다른 것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에 그게 얼마나 위급한 상황이고 위기인지를 모르고 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제가 누군가 소개해줘서 청년을 한 명 만났습니다. 신앙에 도움을 받으려고 만나러 왔는데 상태가 별로 안 좋았습니다. 딱 보는 순간 조금 힘들겠다 오늘 이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어렵겠다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예배는 드리시냐고 했더니 예배 안 드려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왜 예배를 안 드리냐고 물었더니 교회들이 코로나 때 교회 때문에 코로나가 전국에 다 퍼져서 교회가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교회 안 가요. 예배 안 드려요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알겠다고, 충분히 그렇게 느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은 조금 다릅니다. 지금은 교회 때문에 코로나가 퍼진 것이 아니고 코로나 자체가 전염성이 있어서 독감, 감기 퍼지듯이 바이러스니까 전파되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더니 그래도 그렇지 이런 식입니다. 제가 그런 대화를 한참 하고 충분히 팩트로 이야기를 하고 본질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는 코로나고 교회가 부패했다고 치더라도 본인인 예배는 왜 안 드리시냐고. 예수님을 찾지 않고 간절히 원하지 않냐고. 이제 사이드에 있는 것들을 다 제거하고 청년과 마음으로 대화를 시작했는데 청년이 할 말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찾아본 적도 없고 믿어본 적도 없고 성경을 단 한 번도 읽어본 적도 없고. 본인은 신앙생활을 굉장히 열심히 잘하고 교회에서 일도 많이 하고 찬양팀도 해봤고 다 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은 예수님을 사랑하거나 예수님을 진짜 만나서 구원의 감사와 기쁨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제가 보니까 당신은 그런 마음이 하나도 없는 것 같네요 이렇게 제가 이야기를 했습니다. 진짜 갈급한데 다른 것이 다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회적인 이슈라든지, 상황이라든지, 언론이라든지, 이념이라든지, 사상들로 가득 덮여 있습니다. 자기 마음이 병들어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제가 제 간증도 하고 기도해주고 왔습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보실 때 딱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 하시냐면.

 

(18) 내가 헐벗은 산에 강을 내며 골짜기 가운데에 샘이 나게 하며 광야가 못이 되게 하며 마른 땅이 샘 근원이 되게 할 것이며 (19) 내가 광야에는 백향목과 싯딤 나무와 화석류와 들감람나무를 심고 사막에는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을 함께 두리니 (20) 무리가 보고 여호와의 손이 지으신 바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가 이것을 창조하신 바인 줄 알며 함께 헤아리며 깨달으리라_이사야41:18~20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물 없는 골짜기에 무슨 샘이 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다시 회복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메마른 우리의 마음을 메마른 우리의 영혼을, 헐벗은 산과 같은 우리 영혼을, 골짜기 같은 우리 영혼을, 광야 같은 우리 영혼을, 마른 땅 같은 우리 영혼을 회복시키시겠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수많은 나무들을 심어서 다시 푸르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으니까. 그런데 보세요. 

 

- 거짓 신들아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_이사야41:21-24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희 우상들은 소송하라 야곱의 왕이 말하노니 너희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_이사야41:21

 

21절. 소송 아시죠? 따져보라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준비해서 내 앞에 와서 이야기해보라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상보고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우상보고 소송하라고 해놓고 확실한 증거를 보이라고 하십니다. 그 증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22) 장차 당할 일을 우리에게 진술하라 또 이전 일이 어떠한 것도 알게 하라 우리가 마음에 두고 그 결말을 알아보리라 혹 앞으로 올 일을 듣게 하며 (23) 뒤에 올 일을 알게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신들인 줄 우리가 알리라 또 복을 내리든지 재난을 내리든지 하라 우리가 함께 보고 놀라리라 (24) 보라 너희는 아무것도 아니며 너희 일은 허망하며 너희를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_이사야41:22~24

 

우상이 뭐에요? 여러분 우리가 세상에 살다보면 세상에서 하는 이야기들은 다 마치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고 우리 인생이 세상에서 하는 이야기대로 살지 않으면 큰일 날 것 같고 남들 하는 것 우리 하지 않으면 망한 것 같고 실패한 것 같고 하지만 다 허망한 것입니다. 세상이 말하는 거 다 쟁취해서 얻어서 소유했는데 별거 아닌 것 우리 알잖아요. 죽을 때 되면 다 후회합니다. 장례식 가서 사람들이 죽기 전에 임종할 때 후회하지 않는 분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진짜 해야 될 것을 못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런 것들에 빠져 살면서 내가 가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올바르게 섬기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못해서 너무 후회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라고 평생 손에 쥐고 소유하려고 악착같이 살았는데 이게 우리 가정을 오히려 깨버리고 이게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버렸다는 것을 후회하시는 분들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와서 소송하라. 와서 이야기해라. 너희의 힘으로 우상 너희들이 진짜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냐? 세상은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정치인들, 권력자들도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마치 자기들이 다 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상한대로 되나요? 마음대로 되나요?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어제는 되게 좋은 분을 티비에서 봤습니다. 하반신이 마비가 됐는데 그것을 스포츠로 이겨낸 여자 분입니다. 이 분이 경기도 준비하고 임신도 하고. 하반신이 불구인데 임신도 하고. 그런데 죽었다고 합니다.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그 분을 유심히 보고 있었습니다. 왜 죽었냐?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배속 아이도 같이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티비 녹화도 준비하고 내 인생 이제 폈다 하는 찰나에 코끝에 호흡이 멈추니까 올 스탑이 되었습니다. 저도 충격이 되었습니다. 진짜 허망하다. 진짜 허무하다.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유대인들이 따라갑니다. 그것을 부러워합니다. 하나님은 거짓 신, 우상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거짓 신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아무런 진술도 하지 못하고 과거, 미래에 대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들을 마치 세상은 정답인 것처럼 떠들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교육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제 나이 또래까지 아마 주산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주산, 주판. 저 초등학교 때 주산학원을 다녔습니다. 기억납니다. 주산을 배우지 않으면 미래에 아무것도 못할 것처럼 선생님들이 이야기했습니다. 전 초등학생이 주산을 다 배웠습니다. 올리고 내리고 하는 거 지금 기억도 나지 않는데 왜 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컴퓨터, 핸드폰이 나올 줄 몰랐습니다. 시대는 꼭 우리에게 이거 하지 않으면 큰일날거라고 가르칩니다. 정작 우리가 미래를 두고 내 재능을 깨워서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준비하는 창의력이라든지, 내 달란트라든지 이것을 개발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주입식 교육, 획일화된 교육을 하는 나라에서는 그게 훨씬 더 심합니다.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고 만드는 교육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미래가 없는 세상 이야기들을 마치 주님인 것처럼 붙잡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우상, 세상이 자기들 세상의 미래도 알지 못하면서 더 중요한 우리의 영적인 미래, 우리의 내세를 알 수 있을까요? 전혀 모릅니다. 우리의 죽음, 인생의 미래. 그리고 죽고 난 뒤 내세의 문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책임져 주지도 않습니다. 우리를 마음껏 써먹으려고 이거 해, 저거 해 하면서 다 써먹고 필요 없으면 버리는 존재가 세상이고 우상입니다. 여러분 우상이 손으로 뭔가 만들어놓고 절하는 그 우상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우상은 문화이고 이념이고 사상입니다. 그런 우상이 미디어를 통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저희 아들이 콩순이라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보는 내용입니다. 제가 볼 때 콩순이는 내용이 좋았습니다. 엄마, 아빠에게 예절을 배우고 하는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보통 아이들을 위한 영상, 애니메이션을 만들면 교육적인 내용을 넣어서 만듭니다. 그런데 갑자기 콩순이가 밤에 귀신이 와가지고 콩순이에게 교육하는 이런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환상의 나래를 펼쳐서 하늘에서 차가 하늘을 날아다니고 이런 내용이 나왔습니다. 제가 깜짝 놀랐습니다. 한빈이 이거 그만 보자, 다른 거 보자. 차라리 말하는 버스 타요가 낫습니다. 저는 콩순이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들이 그것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겠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치 허황된 꿈, 비전을 계속 집어넣어서 내 현실에서는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고 엄마 아빠와 싸우고 잔소리 들어가면서 사는 것이 마치 가볍게 별거 아닌 것처럼. 그런 것을 유도하는 내용들을 읽었습니다. 신앙도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편리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어떤 목사가 코로나 시대 미래를 예측한다면서 설교했습니다. 자기는 더 이상 현장예배를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성도들보고 성전도 필요 없고 모이는 공동체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온라인 시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택트 교회를 개척해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성도들도 편하고 나도 편하지. 서로 마주칠 일 없고, 교회 와서 청소 안 해도 되고, 주일학교 교사 안 해도 되고, 봉사 안 해도 되고. 그냥 이런 시대가 지났어 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욕이 얼마나 나오던지. 제정신입니까? 신앙이 다 그런 식인 것입니다. 가정이 힘들고 어려워서 가정을 나오게 만듭니다. 신천지가 그렇습니다. 너네 가정은 힘들고 어려우니까 나와.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서로 부딪히고 거기서 깨닫고 내 죄를 깨닫고 남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하나님은 우리 공동체를 통해서 서로 서로 가르치고 교제하고 호흡하면서 우리의 모습을 보게 만들고 남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주시는 것이 예수님이 하시는 사역이었고 하나님이 우리 인류사회에 주신 공동체입니다. 가정을 왜 주셨어요? 가정이 힘드니까 밖으로 돌면 됩니까? 남편들 이야기해보세요. 부인이 연예할 때처럼 예쁘지 않으니까 설거지하고 아이 키우고 아무 옷이나 츄리닝 입고 있으니까 예쁜 여자들 새로 만나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데 그런게 문화로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교회도 마치 코로나 때 미래가 이렇게 바뀔 거라면서 그런 것을 자기가 예언하는 것처럼. 아닙니다. 속으시면 안 됩니다. 우상이 그렇게 우리에게 찾아와 있습니다. 편리주의로 편하게. 우리는 실제로는 갈급하고 갈증이 많은데. 그 갈급과 갈증을 다른 것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채워지나요? 채워지지 않습니다. 거짓 신이 우리 앞에 그렇게 와 있는 것입니다. 그 우상을 택한 자는 가증하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가증하게 보십니다. 그 우상을 택한 것은 인간입니다. 그 우상은 시대마다 항상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택한 것은 우리입니다. 우리의 책임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기쁜 소식을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_이사야41:25-29

 

(25) 내가 한 사람을 일으켜 북방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을 부르는 자를 해 돋는 곳에서 오게 하였나니 그가 이르러 고관들을 석회 같이, 토기장이가 진흙을 밟음 같이 하리니 (26) 누가 처음부터 이 일을 알게 하여 우리가 알았느냐 누가 이전부터 알게 하여 우리가 옳다고 말하게 하였느냐 알게 하는 자도 없고 들려 주는 자도 없고 너희 말을 듣는 자도 없도다 (27) 내가 비로소 시온에게 너희는 이제 그들을 보라 하였노라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할 자를 예루살렘에 주리라 (28) 내가 본즉 한 사람도 없으며 내가 물어도 그들 가운데에 한 말도 대답할 조언자가 없도다 (29) 보라 그들은 다 헛되며 그들의 행사는 허무하며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들은 바람이요 공허한 것뿐이니라_이사야41:25~29

 

25절. 이거는 1차적으로는 누구에요? 고레스 왕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고레스 왕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고레스 왕을 어떤 의미로 주신 거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그림자처럼 주신 것입니다. 

25-29절. 무슨 말씀이에요? 하나님이 한 사람을 북방에서 일으켜서 오게 하는데 너희를 구원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겠다고 했는데 이것에 대해서 말해주는 사람도 없고 이것을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이것을 들려주는 사람도 없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예루살렘에 보내주겠다는 이 기쁜 소식을 본 사람도 없고 관심 있는 사람도 없고 다들 뭐하고 있냐면 바람과 같은 우상들, 공허한 우상들만 바라보고 있구나 라고 하나님이 지금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7절. 시온에게 너희는 이제 그들은 보라 하였노라. 그들은 누구죠? 기도하는 사람들.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 그들은 기쁜 소식을 전할 자가 예루살렘에 왔을 때 그들은 만났습니다. 왜? 기다렸으니까. 기다린 사람은 알아봅니다. 기다린 사람은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습니다. 저도 이제 공부를 하려고 학교들을 알아보고 있는데 제가 원서도 준비하고 대학교 다녔던 성적증명서나 졸업증명서도 떼어놓고 다 해놨습니다.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야 되지? 몇 군데 학교를 픽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다 준비하고 쳐다보고 있으니까 기회가 왔을 때 원서를 넣고 면접 준비를 하고 테스트를 봐서 학교를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준비하는 사람은 기회가 왔을 때 압니다. 그 날짜도 알고. 그런데 여러분은 모르잖아요. 언제 입학원서를 내야 될지, 언제 그 학교는 면접을 보는지. 아무도 관심이 없고 잘 모릅니다. 기다리지 않으니까, 준비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런데 저는 어디 학교를 가려고 준비하고 있으니까 그 학교가 언제 시험을 보고 언제 원서를 내야 되고 언제 서류를 내야 되는지 다 알고 달력에 다 체크해두고 있어요.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예수님이 오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남은 자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늘 기다렸어요. 그냥 기다렸나요? 가만히 있었나요? 준비하며 기다렸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준비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를 기다리면서 그 준비를 하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온에 있는 남은 자들을 제외한 나머지들은 전부 우상을 붙잡고 살았습니다. 예수님 언제 오셔? 예수님 안 오시잖아. 금방 오시겠어? 안 오셔. 야, 증거도 없어. 너 예수 믿었는데 네 삶이 부자가 됐어? 예수 믿어서 얻은 거라도 있어? 다들 그런 논리입니다. 거기에 속아서 우상들이 하는 말들이 문화가 하는 말들이 세상이 하는 말들이 이념과 사상이 하는 말들이 마치 맞는 것 같은 착각 속에 사는 것입니다. 그게 마치 진짜라고 믿고 있습니다. 대학도 나오고 좋은 직장을 다니는 청년이 마치 저와 하는 대화가 초등학생들이 나쁜 형들이 해준 이야기를 그대로 듣고 믿고 저한테 그대로 이야기하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이렇게 똑똑한 청년이 팩트체크도 하지 않고 사는구나.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사는구나. 요즘 젊은이들이 미디어, 언론을 그대로 믿는 사람도 있네. 여러분 지금 이 시온에 기쁜 소식을 전해줄 자를 예루살렘에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해 줄 자가 누굽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이 예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보세요. 

 

Ⅲ. 하나님께서 보내신 한 분, 예수님_요한복음8:42-47, 10:1-3, 7-18, 11:25-26, 14:1-3, 15:4-6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_요한복음8:42~47

 

42절. 이거는 유대인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이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하나님만 섬겨 이러는데 예수님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구속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메시아를 보내시고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는 그 내용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기 의를 드러내는 일에만 관심이 있는 유대인들. 내가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고 십의 일조를 내고 내가 저자거리에 가서 남들 보는 앞에서 의로운 행동을 하고, 남을 돕고 이런 것에만 관심이 있고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내가 제사를 이렇게 정확히 딱딱딱 맞춰서 드리는 것만 관심이 있지 진짜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 예수님이 지금 그것을 이야기하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아버지를 진짜 알았으면 나를 사랑했을텐데. 나를 사랑하지 않지. 그만큼 메시아를 공부하지 않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진짜 의도를 파악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스스로 오셨다고 말씀하셔도 되는데 유대인들을 설득하려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신 것입니다. 

43-46절. 유대인들이 화가 날 만합니다. 자기들은 하나님 최측근이라고 하나님께 속했다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속하지 않았다고 반론을 하시면서 너희가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낫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십니다. 마귀에게서 낫던 이야기를 뭐라고  하시냐면 마귀에게서 낫던 사람들의 행동을 이야기합니다.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행하고자 하는지라. 기쁜 소식은 무엇인가요? 예수님이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이야기를 계속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기쁜 소식은 나야. 이 이야기입니다. 나는 죄가 없고 나는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보내신 메시아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지금 욕심대로 마귀에게서 나서 거짓말하고 욕심대로 살고 있는데 그래서 진리인 나를 믿지 않는 거야. 너희가 하나님께 속했다고 스스로 종교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너희가 하나님께 진짜 속했다면 내 말을 들어야 돼. 그런데 너희는 듣지 않고 있어.

 

(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_요한복음10:1~3

 

양은 시력이 약합니다. 양은 앞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양치는 목자의 소리나 개, 강아지의 소리를 익히는 훈련을 하고 풀을 뜯게 한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양에게 자기 목소리를 계속 듣게 하는 훈련을 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양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소리를 듣고 가버리면 안 되니까 양을 치는 개들이 있는데 개와 같이 지내게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개의 소리를 익숙하게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앞을 보지 못하는 양들이 목자의 소리를 듣고 그 개가 짓는 소리를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주인 목소리구나. 다른 소리에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양의 특징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양이 하루 종일 밖에서 풀을 뜯고 밤에 자기 우리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우리로 들어가면 어떻게 되요? 절도며 강도입니다. 남의 집 들어가면 절도며 강도입니다. 그런데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양의 목자라는 것입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지금 무슨 이야기에요? 예수님이 문지기로 목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음성을 몰라? 구약에 내내 선지자를 통해서 내 음성을 들려줬잖아. 여러분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세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신 모든 하나님의 음성은 내 음성이야. 그런데 그것을 구분해버려? 그 말은 무슨 말이에요? 그러니깐 지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와서 하신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안 듣는 거예요. 그러면 너희는 원래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안 들었어. 지금 이 이야기입니다. 계속 보실래요.

 

(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_요한복음10:7~18

 

7-12절. 삯꾼은 돌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세상은 우리를 돌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에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음성을 우리가 어떻게 들을 수 있죠? 구약에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 뭐라고 이야기했냐면 이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에게 승주야 하고 어떤 마음의 소리를 주시기도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소리를 어떻게 주시냐면 제가 성경을 읽고 오랫동안 묵상했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서 제 마음에 말씀을 주십니다. 성경을 읽을 때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이 말씀에 순종해서 살려고 할 때 예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입니다. 승주야, 죄 짓지 마. 승주야, 너 그렇게 살면 안 돼. 승주야, 나는 너를 사랑해. 나를 붙잡으면 돼. 두렵고 힘들 때 나를 의지하면 돼. 이런 음성들은 전부 성경을 통해서.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경을 달달 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이 하나님의 말씀에 정말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그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정말 마음에 담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구약에 율법은 그래서 어떤 역할을 하냐면 예수님이 오셨을 때 구약에 그 말씀들을 읽고 묵상한 사람들이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오! 구약에 읽었던 말씀들이 암송했던 말씀들이 주야로 묵상했던 말씀들이 이 예수님 음성을 듣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성경을 읽게 했구나 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유대인들 중에서 메시아닉 쥬시들라고 수많은 구약을 공부한 사람들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는 일들이 이스라엘 안에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왜? 구약은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되는 겁니다. 여러분 그 청년처럼 평생 성경 한 장, 한 절 읽어본 적 없고 암송도 안 해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일이 없습니다. 당연히 세상 미디어에서 하는 이야기 우상이 하는 이야기, 세상이 하는 이야기가 정답인 것처럼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마음은 계속 갈급하고 갈증이 나서 미치겠는데 그래서 짜증이 나서 미치겠는데 그 짜증을 어디다 풀고 있냐면 교회에다가 풀고 있습니다. 조목조목 하나하나 따져서 다 팩트로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널 구원할 분이 누구라고 생각 하냐고. 널 지옥에 보내지 않고 천국으로 인도할 분이 누구라고 생각 하냐고, 우리가 진짜 두려워해야 될 분이 누구라고 생각 하냐고. 우리가 정말 붙잡아야 될 분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 하냐고. 삯꾼, 절도, 강도, 도둑질하고 이리가 왔는데 양 버리고 도망가는 삯꾼 목사, 목자 그게 세상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고 예수님이 우리를 양의 우리 천국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는 겁니다. 우리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시겠다고 합니다. 승주야 하고. 부르시면 천국에 가야합니다. 그런데 그 음성을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요? 평소에 예수님의 음성이 무엇인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음성을 알아차리나요? 이것이 예수님의 음성인지, 삯꾼 강도 이리의 음성인지 구분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 신앙생활이 흔들리냐? 왜 신앙이 헷갈리냐?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깊이 오래 읽고 묵상하는 삶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니 신앙이 헷갈리는 겁니다.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가 누가 옆에서 한 마디 이야기하거나, 누가 옆에서 영향을 주면 휙 넘어가버립니다. 왜요?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신앙생활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_요한복음11:25~26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에요. 예수님을 믿으면 죽어도 살아요, 살아서 믿으면 영원히 죽지 않습니다. 요한복음14:1-3에 그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지 구체적으로 계속해서 밝히고 있습니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_요한복음14:1~3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양의 우리, 우리의 본향 천국에 데리고 가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 일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완성된 구원의 메시지를 가지고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15:4-6. 그러면 그것을 믿는 사람은 어떤 삶을 살아야 되냐?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_요한복음15:4~6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뒤에 읽어보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내 안에 거하고 내가 너희 안에 거하지 않으면 이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 있지 않으면 말라버리고 마른 가지는 밖에 버려서 불 태워버린다고 합니다. 저도 우리 화분이 있는데 줄기가 말라있으면 저도 떼버립니다. 말라 있으니까요. 살아있는 것은 살려두지만 죽은 것은 잘라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말라 버리냐? 예수님이 내 안에 거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런데 여러분 요한복음 15장 4절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는 영접할 때 우리 안에 계신다고 영접하지만 성경은 정확하게 헬라어는 뭐가 전제조건이냐 너희가 내 안에 거할 때 내가 너 안에 있겠다는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는 것이 1번입니다. 제가 예수님 안에 거해야 예수님 내 안에 거하시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그런데 그렇게 안 배웠습니다. 예수님이 이 내 마음에 오세요, 주님이 내 마음에 계시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사나요?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그러면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신다는 거예요, 안 계신다는 거예요? 안 계신다는 거예요. 지금 신앙이 반쪽짜리도 아니고 앞뒤가 하나도 안 맞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믿지만 나는 예수님 안에 있으려고 하지 않는 겁니다. 그 청년처럼 말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있으려고 하는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예수님 안에 내가 있는 다는 것이 어떤 신앙생활입니까? 내가 예수님 안에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베데스다 연못에 병자들처럼 물에 들어가서 치료 받을 생각을 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세상 사람들입니다. 베데스다 물은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런데 거기 들어가서 치료 받으려고 살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치료는 예수님이 해주시는 것입니다. 진짜 우리 인생을 들고 일어나서 찬송하며 감사하며 살게 하시는 분은 예수님을 만나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들이 치료받는 것에 관심도 없고 예수님을 만난 것에 관심이 없고 그들의 율법, 그들이 만든 율법을 어긴 것으로 미워하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기쁨도 없고 천국에 관심도 없고 구원에 관심도 없는 것입니다. 지금 잘못하다가 한국교회, 목사들이 그렇게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든 틀, 고정관념. 그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해석하고. 진짜 해야 될 일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성령을 받아서 새사람이 되어서 우리가 그들을 돕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내가 만난 예수님, 내가 만난 천국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 베데스다 연못에 삼십 팔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고 돗자리 들고 일어나 걸어 다니는데 예수님을 안 믿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찬양 안하고 감사하지 않고 살겠어요? 그런데 왜 유대인들은 계속 그렇게 사냐? 왜 자기 율법, 의로 사냐? 예수님을 만난 적이 없으니까요. 속은 썩어 문드러져 가는데 겉으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척을 하면서 사니깐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도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가 섬겨야 하는데, 따라야 하는데 예수님이 아닌 우상을 우리가 따르고 있나? 그리고 그 우상에 우리의 마음, 생각, 인생을 빼앗겨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어느덧 우리 인생이 예수님에게서 너무너무 멀어지고 예수님이 아닌 것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삶. 그러면서 잘 산다고 생각하고 풍요롭게 산다고 생각하고 자유롭게 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어제 밤에 찬양을 하나 부르는데 여러분에게 아침에 제가 들려드렸습니다. 우리 윤목사님께서 제가 좋아하는 찬양인도자이신데 불렀던 찬양입니다. 그런데 이 찬양을 계속 부르는데 가사가 이렇습니다. 계절은 흐르고 꽃은 피고 져도. 계절은 계속 흐르고 꽃은 계속 피고 집니다. 시들지 않는 생명이 있네. 그것을 바랄 수 없었던 시들지 않는 생명을 예수님입니다. 그것을 바랄 수 없었던 죄인인 나에게 생명인 주님은 자신을 주셨네. 바람이 스치듯 삶이 지나가고. 여러분 바람 스치듯이 우리 인생은 지나갑니다. 그러나 꺼지지 않을 소망이 있네. 예수님입니다. 그 길을 떠나서 헤매는 자들이 주를 찾도록 나 살길 원하네. 이런 가사입니다. 나의 삶은 내 주 예수의 것이니, 내 생명 다해 예수로 살리. 내 모든 것 내 주 예수의 것이니 내 전부되신 예수로 살리. 이런 가사입니다. 제가 어제 이 찬양을 듣고 부르면서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우리 사실은 우리 인생을 살아가면서 바람에 스쳐 가는듯한 인생인데 왜 그것에 우리의 마음이 다 빼앗기고 싸우고 화가 나고 마치 그것 없으면 세상 포기한 것처럼 살고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이 응답 안 해주셨다고 하나님께 등 돌리고. 그러면서 진짜 정말 관심 가져야 될 생명, 진짜 관심 가져야 될 천국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정말 들어야 될 예수님의 음성은 들리지 않고 우리 자녀들 성공시켜 보겠다고 부모들이 얼마나 고생하고 헌신하고 희생해서 자녀들을 키웁니까? 그런데 나중에 후회하고 허망한 것은 자녀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커주지 않았을 때 실망하고 그러는 사이에 자녀들이 스스로 예배하고 성경을 읽으면서 살아가는 그 아름다운 신앙생활을 가르쳐주지 못하고 마치 미국에 그 학생처럼. 제가 너무 자주 이야기해서 그 학생이 연락이 왔습니다. 목사님 제 이야기하는데 진짜 필요하시면 계속 하시라고. 저는 뭐라고 할 줄 알았더니 제 설교를 듣고. 여러분 우리 진짜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막 사역을 많이 하거나 대단한 일을 많이 하고 정작 집에 와서는 내 자녀에게 상처를 주고. 그게 무엇인가요? 지금 유대인들이 하는 것입니다. 삼십 팔년 된 병자가 고쳐서 자리 들고 일어나는데 율법 어겼다고 그게 말이나 됩니까? 지금 교회에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법대로?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생명이 살고 죽는데. 진짜 법은 하나님 나라의 법 아닙니까? 성령의 법이 아닙니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킨 법은 성령의 법 밖에 없습니다. 잘못하다가 우리 인생을 거짓 선지자, 삯꾼에게 다 빼앗기고 정말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양의 우리로 천국으로 입성해야하는 그 음성을 헷갈려서 듣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이것저거 다 해주는 정작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신앙은 하나도 없는 상태로 키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신앙생활 해야 하나?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 거하라. 그래야 나도 네 안에 거할게. 1번이 나의 안에 거하라고 합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이 뭐에요?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의미를 이해해보세요. 예수님이 집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이 성경이라고 생각해보세요. 쉽죠. 이해가 되시죠.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일까? 우리는 반대로 신앙생활 했습니다. 예수님이 영접해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니깐 나는 구원받아. 구원 못 받습니다. 그것은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우리나라 신학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칼빈주의 신학이 많이 사라져야 합니다. 참고만하고 그 정답 같은 신학이 사라져야 합니다. 칼빈주의자들이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너무 완벽한 신학논리에 빠져서 너무 따졌습니다. 사람을 살리는데 어떻게 하나, 둘 논리적으로 이론적으로 따져서 살립니까? 네팔에 수많은 사람들이 힌두교에 우상에 빠져서 죽어 가는데 우리 한국 총회 법, 교회법, 교회 정관을 가지고 따지면 어떻게 그들을 살립니까? 마치 그런 식으로 우리도 이 신학이라는 오류에 빠졌습니다. 신학은 완벽한 것이 없습니다. 자기들이 완벽하다고 신학자들이 이야기해서 완벽이라고 우리가 착각하는 것이지 완벽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신학자들도 신학에 빠져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지옥 가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어떤 우상에 갈증 있는 내 마음, 갈급한 내 마음이 뭐에 채워지고 있는지 봐야 합니다. 여러분 정말 예수님을,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예수님을 찾는 마음이 그게 정상적인 인간입니다. 그게 은혜 받을 사람이고 구원받을 사람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을 찾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찾지 않는데 어떻게 만나요. 구하지 않는데 어떻게 주신단 말인가요. 그래서 지금 우리 시대가 예수님을 찾지 않는 시대이기 때문에 남들이 볼 때 교회 건물도 멋지고 사역도 많이 하는 것 같지만 예수님을 찾지 않는 시대기 때문에 제가 위기라고 이야기하고 가장 위험한 시대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많은 성도, 젊은이들이 구하고 바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목사님들도 예수님을 안 찾습니다. 자기가 사역해왔던 시스템이나 기반 이런 배경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붙잡고 목회를 하지 예수님을 붙잡고 목회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말씀이 이해가 되어서 요한복음을 다시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삶, 교회에 완전히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생각, 삶, 마음이 예수로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이 그 예수로 사는 방법, 예수 안에 거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예배를 주셨고 성경을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어떤 목사님이 성경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편지라고 합니다. 편지에 서론이 필요 있어? 없어? 편지에서 몇 날 몇 시 어디에서 만나자 그것만 알면 되지, 꽃피는 여름 잘 지내니? 이런 것을 알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더라고요. 그래서 성경 안에 있는 핵심 내용만 알면 되지 이게 왜 다 필요하냐고. 그래서 성경 읽는 것을 비하하더라고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교단의 모 목사님께서. 무서웠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우리 인생을 다 몇 날 몇 시 어디에서 만나자, 감정도 없고 대화도 없고 부부사이에도 부부가 왜 결혼합니까? 애만 낳으면 되지, 계약 결혼하시지, 왜 설거지도 해주시고 방바닥도 닦아주고 남편 옷도 빨아주고 하십니까, 왜 수고했다고 말하십니까? 그게 다 필요 없습니까? 창세기 1장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까지 필요 없는 내용이 단 하나라도 있습니까? 진짜 이상하죠. 그리고 이것을 전체를 습득해야 이 안에 핵심 내용도 알 거 아니에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보고 성경 읽지 말라고 합니다. 복음 성구 몇 구절만 알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 안에 거할 수가 있나요. 여러분 그런 면에서 우리가 너무 편리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읽지 말아라, 기도 세게 할 필요 없다. 뭐하러 기도를 한 시간씩 눈물 흘리면서 하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정말 성경과 반대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신다니까요.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실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착각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지 않으면서 나 예수님 영접했는데, 예수님 내 안에 계시는데.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나요. 사람의 관계가 그럴 수 있나요? 하나님과 우리의 사귐이 있다고 했는데 사귐이라는 것이 그런 것인가요. 내가 원하는 것만 쪽 빼먹는 것인가요? 아니잖아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딱 보내신 한 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예수님이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 자체도 기쁜 소식이지만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려고 오셨습니다. 그 소식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다 듣고 구원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진짜 기다리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의 꼬임에 넘어가고 거짓 삯꾼 목자에게 속아서 그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끝까지 지켜줄 줄 알았는데 이리가 오니 양을 다 버리고 도망가네. 그게 세상이고, 우상들이 하는 짓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러분 하나님 말씀을 읽으셔야 합니다. 이 말씀을 읽고 행하려고 노력하셔야 합니다. 그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시는 그 생각이 우리를 유혹하는 공격이고 우상들이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예수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 그 분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도 유대인, 바리새인처럼 율법에 빠질 수 있고 아니면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들처럼 그 신비, 미신에 빠져서 그것만 쳐다보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 아깝게 다 허비하고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빛이 너희에게 임할 것이니,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어떤 삶이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삶인지.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진짜 기도제목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저희 가스펠 가족들이 성경, 예배를 통해서 우리 생각과 삶을 통해서 예수로 살리, 내가 예수님으로 살겠다는 이런 고백들을 하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다 돈으로 삽니다. 우리는 기능이라는 것을 가지고 삽니다. 우리는 사회적인 형태를 가지고 삽니다. 목사는 목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살 듯이 예수로 살라는 것입니다. 목사를 버리고 예수님으로만 살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는 직장에서는 직장인이고 가정에서는 가장, 엄마이기도 하지만 그걸로 다 살아가잖아요. 그것처럼 예수님이 우리 삶에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로 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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