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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1-07-18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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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7월 18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본 문 이사야 42:1-13

 

 오승주 목사

 

Ⅰ. 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_요한복음14:8-21

 

가정에서 예배한다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왜냐하면 저도 수요일에 주간말씀묵상을 전도사님들에게 부탁하고 일정이 있을 때 밖에서 핸드폰 틀어놓고 집중해서 보려고 해도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교회 있을 때라야 분위기가 되니까 같이 예배를 할 수 있는 건데 가정에 혼자 있으면서 아이들이 떠들죠, 울죠, 그리고 화장실도 가고 싶죠, 또 상황이 환경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리 예배한다고 해도 그게 잘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일상에서 드리는 예배 이 개념들을 우리가 훈련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생각이 들고 또 우리의 중심, 마음을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집중해서 예배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수능시험 보는 것처럼, 대기업 면접 보는 것처럼 예배드려야 된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 예배가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금방 다시 모일 것이고 또 조만간 다시 모여서 예배할 때가 올 것이니까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진짜 큰 힘을 얻어야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행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행하지 않으면 그 어떤 것도 내 것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인류에게 주신 원칙이고 법칙이고 룰입니다. 행하지 않는데 자기 것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농부가 일을 하지 않고 곡식을 얻을 수 없고 돈을 지불하지 않고 물건을 살 수도 없을뿐더러 그 돈을 벌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을 해야 됩니다. 운동선수가 메달을 따려면 반드시 남들보다 피나는 노력을 해야 되고 훌륭한 선수가 되기 위해서 인내를 해야 되고 또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 세상의 법칙입니다. 모든 법칙이 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그 어느 것 하나 행하지 않고 얻는 것은 없고 내 것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지식을 습득하고 또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합니다. 제 아들도 영어, 수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그거에 대해서 힘드니까 하지 마 이렇게 말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것이 돼서 훌륭한 사람이 되고 많은 중요한 일들을 하기 위해서 교육이란 것을 수년 동안 오랜 세월 받게 됩니다. 행하지 않고, 그것을 하지 않고 훌륭한 사람이 돼야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런데 말만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난한 이웃을 돕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지 않고 그들이 회복되기를 원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가 선교지에 많은 선교비를 보내고 물자를 보냅니다. 그들을 돕지 않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입니다. 행하지 않고 얻는 것은 없습니다. 이 나라에 수많은 미국 선교사님들, 호주 선교사님들, 세계 열방의 먼저 믿은 믿음의 선배들이 이 나라에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세워주셔서 이 나라는 진짜 빠른 시간 성장할 수 있었고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전쟁의 상처를 금방 아물고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 땅에 행함이 없이 얻는 것은 없습니다. 노력 없이 얻는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름이 되니까 수영장에 가야지, 코로나 때문에 그것이 쉽지 않지만. 그래서 몸매를 만들어야 되겠다? 노력 없이 몸매를 얻을 수 있습니까? 음식 먹는 것도 조절해야 되죠, 누워서 TV나 보면 좋겠지만 내가 몸매를 생각해가지고 수영복 입을 환상, 그런 그림 같은 것이 아마 여자 분들의 핸드폰에 그런 사진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필 이럴 때만 그런 사진으로 동기부여를 하려고. 그래서 운동도 한 시간씩 더하고 그러는 것입니다. 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행하지 않고 얻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신앙생활은 행함이 없습니다. 특히 거짓된 복음주의자들, 타락한 복음주의자들, 제가 앞에 단어를 붙였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주의자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변질된 복음주의자들이 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시면 안 됩니다. 그들은 신학이라는 잘못된 교리들을 인용해서 우리에게 행함을 마치 율법인 것처럼, 신앙생활에 행함, 노력, 애씀 이런 것이 마치 틀린 것처럼 우리에게 그동안 설교해왔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신학적인 논쟁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깨어 기도해라, 범사에 감사해라, 쉬지 말고 기도해라 그런 이야기들은 그릇된 변질된 복음주의자들의 메시지로 말하면 틀린 메시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성경을 외면하고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행해야 합니다. 행함 없이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응답을 받는 법은 없습니다. 예배드리지 않고 하나님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는 지식을 얻으려고 공부하지 않고 신앙의 성숙은 없습니다. 성령을 간절히 구하고 부흥을 준비하지 않고 부흥을 맛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에서 21절에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_요한복음14:8-21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_요한복음14:8 

 

빌립이 코미디 같은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자기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시면 우리가 족하겠나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마치 이런 식 아닌가요? 하나님 좀 보여주세요, 기적 좀 일으켜 주세요, 하나님 축복 좀 해주시고, 응답 좀 주세요 그럼 우리가 믿을게요. 이런 식입니다. 지금 빌립이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_요한복음14:9-11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_요한복음14:13-14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_요한복음14:15

 

너무 중요한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_요한복음14:20-21

 

지금 예수님께서 무슨 말을 하고 계십니까? 지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빌립이, 수많은 제자들이 주님 사랑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렇게 말하는데 아버지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뭔데? 예수님이 이야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가 아버지를 내게 보이라고 말하는데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미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내 말, 그 말도 너희가 믿지 못하면서 듣지 못하면서 무슨 아버지를 보이라고 하느냐? 무슨 하나님을 보이라고 하느냐? 그것은 인간의 욕심이고 의입니다. 교만, 오만, 온갖 이단 사이비들, 교주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 외에 알려고 하는 것도 욕심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교만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 너희가 나에게 구해봤냐? 너희가 진짜 아버지를 만나려고 아버지 안에 거하려고 나에게 기도해봤냐?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예수님이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릇된 복음주의자 목사님들 이것도 부인하려고 하십니까? 계명을 분명히 지키라고 하십니다. 계명을 지켜야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 수영 레슨을 해보지 않고 수영의 기쁨을 맛볼 수 있겠습니까? 어찌 수학문제를 선생님이 가르쳐주신 것을 예습, 복습을 통해서 혼자서 스스로 풀어보는 그 기쁨을 연습 없이, 노력 없이, 행함 없이 알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 북한산에 가보셨습니까? 저는 북한산에 2번 가봤습니다. 북한산에 올라가려면 죽도록 힘듭니다. 산위 쉽지 않았습니다. 돌산입니다. 2번 올라가는 동안 죽을 뻔 했지만 북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느끼는 그 희열, 기쁨은 올라가 보지 않고 행함 없는 사람은 모릅니다. 여러분 북한산 사진 1,000번을 봐보십시오. 그게 기쁨이 있나. 직접 올라가야 희열,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등산 애호가들은 등산에 미쳐서 사는 것입니다.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고 직접 행하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독 신앙생활만 가만히 있어라,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 교회만 잘 다녀라, 헌금만 열심히 해라. 이렇게 복음주의자들이 가르칩니다. 여러분 그러면 우리 신앙은 결코 맛보지 않을 것입니다. 장례식을 많이 가보는데 장례식 가서 정말 안타까운 것은 내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여호와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살았다고 하는 그 장례식이 진짜 축복되다 하는 장례식을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겨우 구원 받았다, 죽기 직전에 예수님 영접했다, 겨우 겨우 어찌어찌 교회를 다녀서 천국은 가는 것 같다. 다들 아슬아슬한 어떻게 보면 부끄러운 구원의 장례식이 대다수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장례식이 천국환송예배로 진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기뻐하는 장례식을 진짜 많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많은 분들이 교회를 30년, 40년 그렇게 오랜 세월 다니지만 실제로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맛보고 알고 내 삶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삶은 멀리 있다는 것입니다. 왜 멀리 있을까요? 그게 왜 우리에게 가까이 있지 않을까요? 그것은 목사님들이 그동안 잘못한 것입니다. 행함 없는 신앙을 가르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행함이 없는 신앙. 바울은 디모데에게 농부가 되고 경기하는 자가 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군사가 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메시지를 그냥 듣고 아멘하고 끝납니다. 우리 삶에 치열하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 신앙의 오묘하고 깊은 진리, 그 희열을 맛보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겨우 교회에서 성전건축이나 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 제일 잘한 것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우리의 이웃을 위해서 우리가 불신세계를 살아가면서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교회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면서 선한 능력을 드러내면서 살았는가? 그러니 교회 안에서는 큰소리 치고 교회 안에서는 신앙생활 잘한다, 나는 복음주의자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교회 밖에만 나가면 입을 딱 다물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 그게 오늘 날 현실입니다.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세상 적으로 성공하는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성의 문제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래서 교회 안으로 피하고 교회 건물 안으로 피하고 교회 어떤 조직 안으로 피해서 거기서 살아가는 거지 교회 밖에서 교회 밖 세상이 우리 삶의 터전이고 우리가 살아가야 될 선교지라는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거기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승리하면서 살고 어떻게 신앙의 승리를 할 것이고 어떻게 영적인 싸움에 승리할 것인지를 우리는 많이 고민하지 않습니다. 왜? 거기서 살다가 그냥 교회 안으로 피해버리면 되니까. 영성은 실력입니다. 다시 말해서 실력이 곧 영성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영성이 없습니다. 왜 실력이 없냐? 행함이 없기 때문에. 행함이 없어서 우리가 죽을 때 부끄러운 구원, 살면서 가슴 벅찬 주의 일에 헌신해보지 못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영국의 18세기에 대해서 많은 자료들이 나와 있습니다. 영국의 18세기는 정말 부패한 교회, 여자들을 쉽게 겁탈해도 법이 그것을 보호해주지 못하는 시대, 많은 사람들이 술에 취해 절어 살아가던 시대, 그게 당연하다는 시대, 엄마, 아빠들이 술에 취해 있어서 집집마다 자녀들이 방치되어 있던 시대. 그런 영국 18세기의 모습들을 많은 자료를 찾아봤습니다. 그 어떤 정치인도 기업가도 그런 나라를 바꾸지 못했는데 한 사람이 그것을 바꾸었습니다. 바로 존 웨슬리 목사님입니다. 감리교 목사님입니다. 알미니안 주의입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옥외 설교자였습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설교하지 않았습니다. 공장을 찾아가고 길거리 운동장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자기 교회 성도들에게 설교한 것이 아니라 불특정다수들에게 설교했습니다. 그 설교에 대해 훗날 후세들의 평가는 대단했습니다. 사람들이 그의 메시지를 듣고 그의 복음 메시지를 듣고 마음에 감동을 받고 변화되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도덕적으로 회심하고 윤리적으로 양심에 찔리는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밖에 나와 있던 많은 엄마, 아빠들이 가정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성실하게 일하기 시작했으며 교회들은 부패와 싸우기 시작했고 많은 성도들은 음란과 음주와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그의 말씀, 집회들을 통해서 주신 은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집회들이 한국에도 다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존 웨슬리의 복음사역은 영국을 바꿔놨습니다. 작은 일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많은 영국 사람들이 술 먹고 게임하고 음담패설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기 시작했고 교회를 세우기 시작했고 가정을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쓰는 시작. 그 동기부여를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집회를 참석한 자들에게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계명을 실천하는 것으로 아신다고 분명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계명을 실천하는 것은 올바른 지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경건생활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성경을 읽고 신앙서적을 읽는 것입니다. 왜 신앙서적이 포함되어 있냐? 성경을 읽지만 그 성경을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를 반드시 들어야 됩니다. 그게 우리를 도전하고 우리를 성경으로 더 가까이 가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신앙서적을 읽는 것은 기독교인의 필수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신앙서적을 읽는 경건생활을 회복해야 합니다. 저는 TV를 많이 보지 않는데 몇 년 전에 저에게 아주 유익한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입니다. 저는 그런 프로그램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백종원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프로그램을 봤습니다. 조금 교만한 거 같기도 하고 왜 저 사람이 남의 식당에 가서 함부로 지적질을 할까 처음에 프로그램을 보면서 생각도 했는데 그럴 만 했습니다. 백종원의 식당이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그가 내놓은 식당이 실패한 식당이 하나도 없다면서요. 제가 자주 가는 식당들이 다 백종원의 식당인 줄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프로그램을 보면서 답답함을 같이 느끼셨을 것입니다. 우와, 속 뒤집어지겠더라고요, 환장하겠더라고요. 어떤 식당에 갔는데 식당 주인이 아저씨입니다. 백종원이 쳐다보면서 당신은 레시피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음식 맛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식당이  얼마나 더러운지. 파리 같은 것이 날아다니고 있는데도 그것을 치우지 않고 요리만 하는 식당 주인을 보고 백종원이 이야기했습니다. 여기부터 깨끗이 치우고 요리하세요. 누가 이 음식을 먹겠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하는 대답이 가관이었습니다. 요리할 시간도 없는데 이것을 어떻게 다 치우면서 요리합니까. 백종원에게 대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종원이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정리하면서 요리하는 것을. 주방이 깨끗해지면 내가 기분도 좋아지고 손님을 대접하는데 음식도 깨끗하게 나갈 텐데 그런 기본도 되어 있지 않은 그 사람에게 이야기했습니다. 그 사람이 방송이니까 마지못해서 청소하는 것처럼. 그거 아시죠? 한 달 뒤에 다시 간 거. 하나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대로. 자기가 노력을 하겠다고 해놓고 노력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당연히 손님들이 갈 리가 없습니다. 그게 우리 모습 아닌가요? 하나님이 말씀으로 우리 삶에 계속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해주고 계시는데 우리는 마치 백종원의 솔루션을 듣지 않고. 그러면서 우리는 불평합니다. 왜 장사가 안 돼지? 이상하게 우리 집은 음식도 맛있고 내 음식이 최곤데 왜 손님들이 안 오지? 최고가 아닌 것입니다. 착각하는 것입니다. 한 튀김집에서 백종원이 이야기했습니다. 튀김 온도를 1도만 낮추시면 됩니다. 그런데 그 사장님이 얼마나 고집이 센지. 1도를 낮추지 않는 모습. 우와. 고집이 셉니다. 원래 사장님이 하던 1도를 올려서 했더니 겉은 바삭바삭한데 속이 하나도 익지 않은 것입니다. 1도만 낮추세요, 그리고 더 오래 튀기세요. 그런데 사장님은 오래 튀기면 더 많은 것을 팔지 못한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그 집이 폐업했다는 소식을 기사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그 한 마디 솔루션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이 갱신되고 개혁해야 되는데. 여러분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성도들 심방가면 우리 삶에 수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성도님들 만납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저는 답을 줄 수 없습니다. 저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설계하시고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창조하신 분이잖아요. 그래서 믿음을 가지면 예수님을 온전히 믿으면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하면 거기서부터 우리 인생에 대한 깨달음, 회개 이런 것이 나온다는 것을 꼭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바르게 믿으세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질적인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자기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발버둥 치면서 사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즉흥적으로 해결은 할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기 때문에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서 그 문제는 악순환이 계속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짧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정말 중요한 답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Ⅱ.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_이사야42:1-3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_이사야42:1-3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누구죠? 예수님이죠.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누구죠? 예수님입니다. 내가 택한 사람.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냐면.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_이사야42:2-3

 

예수님의 사역을 지금 두 줄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2-3절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나오는 공생애 사역 3년 동안과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은 외치지 않으셨습니다. 목소리를 높이거나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죠? 바리새인들. 저자거리에 가서 나는 하나님을 잘 믿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십일조를 했습니다, 저는 어려운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절대 소리 내지 않았습니다. 왜? 진짜 진실로 정의를 행하는 사람은 소리 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합니까?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이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적용을 많이 하시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 상한 갈대를 꺾지 않았다, 죄인들을 꺾어버리지 않았다. 꺼져가는 등불, 사마리아 여인이나 세리나 과부나 그런 죄인들을 꺾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릇된 복음주의자들, 바리새인들은 그들은 꺾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죄인이야, 그들과 함께 하지마라고 손가락질 했습니다. 그게 꺾어버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꺾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꺾지 않는 상한 갈대를 예수님이 끄지 않는 꺼져가는 등불을 교회가 꺼버립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율법적으로 꺼버립니다. 예수님은 절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고 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정의를 실제로 시행하는 분이셨습니다. 우리 인간들 중에 제일 큰 문제 있는 인간이 자존심이 세고 자존감은 낮은 사람입니다. 세상 말로 상종하기 힘든 사람입니다. 자존심은 엄청 센데 자존감은 또 낮아. 제일 힘든 유형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자존심은 낮고 자존감이 높아야 합니다. 자존심만 셉니다. 그런 분들은 주로 목소리가 높습니다. 내가 말이야 이러는 것입니다. 내가 너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이런 사람들. 무섭습니다. 데이트를 하셔도 그런 분들과 데이트를 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너한테 해준 것이 얼만데 그러면서 약간 보상심리를 바라는 사람들은 결혼해서도 똑같이 갑니다. 그러니까 주로 그런 사람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뭐가 없는 사람이죠? 내용이 없는 사람, 실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실력이 없으면 자존심은 높고 자존감은 낮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이 실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한동안 자존심은 세고 자존감은 낮았습니다. 그 말은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내 안에 비어 있는, 아무것도 없는, 실력이 형편없는 저의 삶. 여러분 우리가 실력 있고 진짜 내용이 있으면 절대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상한 갈대를 결코 꺾지 않습니다. 그들을 돕습니다. 실력 있는 사람은 남을 배려하고 돕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정의를 시행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거짓 선지자들이 아무리 법으로 종교적으로 비난하고 손가락질해도 그 길을 가셨습니다. 왜? 실력이 있으셨습니다. 사마리아 땅에 가도, 세리의 집에 가서 같이 밥 먹고, 제자들과 같이 병든 자를 찾아다녀도 유대인들이 종교적으로 압박하고 손가락질 하고 겁을 줬습니다. 그런데 꿈쩍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본인이 구원자이시니까. 십자가에 지셔야 되고 죽으셔야 되고 부활하셔야 될 분이니까. 하나님이시니까. 예수님이 그것이 실력이었고 그 내용, 로드맵을 다 가지고 오셨기 때문에 그 길을 가신 것입니다. 신앙은 실력이 필요합니다. 세상은 원래 그렇습니다. 아마 더 심해질 것입니다. 말세 때 더 심해질 것이라고 성경은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럼 세상이 힘드니까 우리가 세상에 휩쓸려야 됩니까? 세상과 같이 타협하고 살아야 됩니까? 아니잖아요. 낙심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고 두려움 가지고 살아야 됩니까? 아니잖아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실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실력이 믿음입니다. 영성입니다.

 

-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_이사야42:4-6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5) 하늘을 창조하여 펴시고 땅과 그 소산을 내시며 땅 위의 백성에게 호흡을 주시며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6)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_이사야42:4-6 

 

6절. 누구를요? 예수님을요. 예수님은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고 세상에 정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행함을 하시는데 예수님이 공생애 사역을 하시고 십자가 지러 가시는데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십자가는 반드시 본인이 짊어져야 될 본인의 사명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영을 주시고 그와 함께하셨습니다. 의로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손을 잡아 보호하시고 그래서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에게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역이었습니다. 십자가 사역은 예수그리스도만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역입니다. 예수님이 그 일에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쇠한다는 말 아시죠? 포기한다는 말입니다. 후퇴한다는 말입니다. 희미해져간다는 말입니다. 낙담. 낙심해서 주저 앉아있다는 말입니다. 신앙은 쇠하거나 낙담하는 것이 아닙니다. 겉 사람은 우리가 나이가 들어가서 후패해져 갈 수 있지만 낡아질 수 있지만 속사람은 낙심하거나 쇠하거나 그러면 안 됩니다. 왜 우리가 낙심하고 쇠하냐? 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이 희미해져가고 낙심이 되고 쇠해지냐? 낡아지냐? 그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봐야 될 신앙의 오묘한 진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십자가의 진리를 우리가 아직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다시 말해서 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 다니는 신앙생활하시는 분들이 아직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될 사명에 대해서 아직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지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지하니까, 쇠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아는 사람은, 무언가를 깨달아서 아는 사람은 남들이 주변에서 어떻게 이야기해도 낙심하지 않고 쇠하지 않습니다. 아니까, 그것을 확신하고 있으니까. 확신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합니다. 제가 시험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지만 신학대학교 다니고 신대원 다닐 때 공부를 조금 열심히 했을 때가 있습니다. 공부를 확실히 했습니다. 책을 다 마스터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답을 다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가 나와도 나는 그 문제를 풀 자신이 있었습니다. 제가 주로 성경신학에 구약총론, 신약총론 다 A+ 맞았는데 거의 팠습니다. 그냥 제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머리가 나쁘니까 읽고 또 읽고 읽고 또 읽고 밑줄 긋고 또 읽고 또 문제내서 문제 풀고 해서 거의 몇 일 밤을 세웠습니다. 주변에서 시험 보기 전 날에 공부 안 한 애들이 예상 문제 가지고 다니는 거 아시죠? 공부 안 한 애들이 남의 노트 빌려다가 시험 보기 전에 공부하는. 별 희한한 이야기들이 다 들립니다. 저는 제가 공부한 그 과목만큼은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듣지 않았습니다. 왜? 다 알고 있습니다. 책을 외워버렸습니다. 머리가 나빠서 통째로 외웠습니다.  어떤 문제가 나와도 저는 그 문제를 풀 자신이 있었습니다. 제가 주로 성경신학에 구약, 신약총론을 다 A+를 맞았습니다. 거의 팠습니다. 그냥 제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머리가 나쁘니깐 읽고 또 읽고, 읽고 또 읽고 밑줄 긋고 또 읽고, 또 읽고 또 문제 내서 문제 풀고 해서 거의 몇 일 밤을 새웠습니다. 주변에서 시험보기 전날에 공부 안하는 애들이 예상문제집 가지고 있는 거 아시죠. 공부 꼭 안 하는 애들이 남의 노트를 빌려서 시험보기 전에 공부합니다. 별 희한한 이야기가 다 들립니다. 저는 제가 공부한 그 과목만큼은 그 사람들 이야기를 안 들었습니다. 왜요? 다 알고 있습니다. 책을 다 외워버렸습니다. 머리가 나빠서 통째로 외웠습니다. 시험문제가 어떤 문제가 나와서 쓸 자신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남들이 하는 이야기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시험보기 전에 이 문제가 맞다더라, 이 노트가 맞다더라. 별 말들이 돕니다. 공부 못하는 애들이 이것저것 보다가 더 헷갈립니다. 신앙을 우리가 마치 그런 식으로 합니다. 성경에 밑줄 쫙쫙 긋고 성경을 파야 되는데 왜 그렇게 못하죠? 왜 우리가 그것을 못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이 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우리에게 호흡을 주시려고. 이 땅에 행하는 자에게 영을 주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를 이방의 빛 되게 하시려고 예수님이 이방의 빛이 되셔서 우리도 이방의 빛이 되게 하시려고. 그런데 우리는 그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해서 우리 인생이 얼마나 귀하고 값어치 있는 줄 잘 모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 흑암의 감옥에서 나오게 하리라_이사야42:7-9

 

(7) 네가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며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며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_이사야42:7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고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고 흑암에 앉은 자를 감방, 감옥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예언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눈이 얼마나 어두운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신 천국을 보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우리 인생이 지금 그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그래서 우리 인생도 세상의 감옥에 갇혀 있고 지옥, 저주의 감옥에 갇혀 있고 세상에 갇혀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쁨이 없고 환희가 없습니다. 저는 가스펠교회를 개척하면서 많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지금도 많이 읽고 있습니다. 제가 책을 읽기 전 예전에는 어떤 마음이 있었냐면 교회를 개척해서 훌륭한 목사가 되어야지, 교회를 부흥시켜서 내 이름을 좀 내어야지. 이런 삯꾼 목사, 거짓 선지자와 같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책을 읽기 시작한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 팀 켈러 목사님,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의 책도 읽기 시작했습니다. 정말 신실한 주의 종들의 책들을 읽기 시작한 겁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깨달음이 저에게 확 왔습니다. 목회가 무엇이다. 목회는 나의 때에 완성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의 구속사, 장차 마라나타 오실 예수님의 재림 때를 준비해서 하나님이 지금 영혼을 구원하고 계시는 그 역사 속에 잠깐 쓰임 받는 것이구나. 그러면 내 역할이 그 큰 구속사의 역사 속에서 내 역할이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죽고 나서 가스펠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내가 은퇴하고 나서 후배 전도사님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면 제가 목회하는 것은 겉으로 볼 때 심방 열심히 하고 설교 열심히 하고 교회 부흥을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는 것 같지만 이 목적점이 다르기 때문에 타켓, 골이 다르기 때문에 그 내용은 완전히 다릅니다. 똑같이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것 같지만 저의 목적은 영원에 있어요. 저의 목적은 천국에 입성할 때 하나님께 받을 면류관, 그 칭찬에 있기 때문에 제가 이 목회를 그냥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제 후대들, 자손들, 자녀들, 후배들을 바라보고 목회를 하기 때문에 목회가 결이 다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 눈이 어두워져있다는 말은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예수님을 만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을 아직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좁은 시야 속에서 감옥 같은 삶을, 감옥에 갇혀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우리에게 오는 수많은 문제들, 가정 문제를 즉흥적으로 감정적으로 풀고 해석하며 풀어나가지만 본질적으로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복음적인 삶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추구하지 않는 삶을 살다보니까 계속해서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조금 힘들면 교회 가서 기도하고 인생이 잘 풀리면 교회에서 멀어지고. 이런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우리를 흑암의 감옥에서 갇힌 곳에서 풀려고 하시는 게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것이 이유인데. 우리는 여전히 흑암의 감옥 안에 갇혀있고 여전히 우리 삶의 틀 안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냥 거기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제가 사역을 하다보면 정말 정말 힘든 사역이 있습니다. 저는 진짜 포기를 잘 하지 않습니다. 저 여러분 아시죠? 한번 시작하면 끝장 보는 스타일입니다. 제가 머리는 나쁘고 기능은 좀 떨어지고 배경이 없지만 잘 포기는 안 하는 스타일입니다. 글을 한번 쓰기 시작하면 끝장나게 쓰는 스타일입니다. 마음을 먹으면 성실하게 끝까지 하는 것이 저의 유일한 장점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포기하고 싶은 사역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님들이 그 감옥, 어둠에서 나오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사람들은 정말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그건 도와줘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귀가 닫히고 마음이 닫혀 있는 사람은 가서 도와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진짜 힘듭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손을 내밀었을 때 손을 잡는 시늉이라도 해야 살 수 있을텐데. 꺼져가는 것 같은 등불이라도 등불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상한 심령이라도 상한 마음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아예 마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도 안 됩니다. 얼마나 노력해도 안 됩니다. 정말 눈물 나도록 예수님 만나게 해드리고 싶은데 정말 눈물 나도록 신앙을 그 가정에 세워주고 싶은데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신 이유를 빨리 깨달아야 합니다. 이 엄청난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이유는 오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눈먼 자들의 눈을 밝히고 갇힌 자를 감옥에서 이끌어 내고 흑암에서 앉아있는 자를 감방에서 나오게 하리라. 지금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보셔야 되고 이 이야기가 무슨 말인지 성경을 통해서 공부하고 읽고 깨달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존 웨슬리 목사님이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의 일대기를 읽어보세요. 그가 복음이라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이라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 삶이 바뀌었는지. 그가 배경이 좋았습니까? 가정환경이 좋았습니까? 원래부터 천재였습니까? 가정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왜? 영국의 18세기는 모든 가정이 엉망진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께 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 저에게 은혜를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대로 무너지고 싶지 않다고.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매일 하나님 앞에 가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고.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의 사역들이 큰 사역들이 아닙니다. 큰 사역이 되었을 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어야 되는가? 그러면 우리는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해야 되나?

 

(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9)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알리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에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_이사야42:8-9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이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영광인데, 이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찬송인데. 이것을 다른 자에게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꾸 목사님들이 교회 건물 이야기하고 계시고 어떤 자기의 세력을 이야기하고 계시는데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광은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고 우리를 감옥에서 건져 줄 수 있고 그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만이 새 인생을 살 수 있게 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영광은 십자가 밖에 없습니다. 지금 자꾸 영광이 교회 숫자가 늘어나는 거고 재정이 탄탄해지고 건물을 지어 놓고 이게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그거 영광 아닙니다. 중세교회가 그것 때문에 망했음을 알면서도 우리는 또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건물 필요해요. 제가 몇 번 이야기하잖아요. 그것은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성도 수가 늘어나고 아이들을 교육하고 그러기 위해서 건물이 현실에 따라서, 성도들의 숫자에 따라서, 필요하게 되니깐 렌탈도 할 수 있고 건물도 새로 누가 땅이 있으면 기부해주시면 지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시일반 돈을 모아서 리모델링도 하는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이 아닙니다. 영광은 십자가입니다. 영광은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새사람 되는 것이 당신에게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영광을 절대 뺏기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그 영광을 우상에게 절대 주지 않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를 다른 자에게 주지 않으십니다. 목사님들이 이 영광을 가지고 목회를 하다가 다른 마음으로 변질되잖아요? 그러면 그 영광을 하나님이 뺏으십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그러는 겁니다. 우리가 다른 마음을 가지면 하나님 아시잖아요? 그래서 열매가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은 아닌 것입니다. 수많은 목회자, 영적지도자들이 복음을 이야기하지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영광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자에게,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 말은 인간에게 절대 속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정말 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 즉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예수님이 전부인 사람에게 하나님은 그 십자가의 영광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Ⅲ.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_이사야42:10-13

 

(10) 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11) 광야와 거기에 있는 성읍들과 게달 사람이 사는 마을들은 소리를 높이라 셀라의 주민들은 노래하며 산 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12)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며 섬들 중에서 그의 찬송을 전할지어다 (13)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_이사야42:10-13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하냐면 항해하는 자들. 우리 인생이 항해하는 것입니다. 바다 가운데 많은 섬들. 바다는 타락한 세상을 이야기한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섬들, 교회들, 믿음의 사람들. 우리에게 뭐라고 이야기하냐? 새 노래로 여호와를 노래하고 찬송하라고 합니다. 11절은 땅으로 비유를 드는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입니다. 광야는 세상입니다. 그 광야 속에서 있는 성읍. 게달 사람이 사는 마을, 교회를 이야기합니다. 이 교회는 소리를 높여라. 셀라의 주민아. 셀라는 제가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셀라는 노래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멈춰 서서 그 중요한 신앙고백 앞에 멈춰 서서 그것을 깨달아서 감사를 표현하고 지나가라는 것입니다. 셀라의 주민들 쉽게 말하면 묵상하는, 기도하는 주민들아. 산꼭대기에서 즐거이 부르라. 왜 산꼭대기인가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광야, 바다도 없는 상태. 그것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산꼭대기에서 여호와를 불러야합니다. 찾아야 합니다. 바다는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드넓은 바다. 겉은 고요해보이지만 속은 전쟁터 같습니다. 온갖 식물들이 바다 속에 다 살고 있습니다. 그렇죠? 그게 세상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에게 셀라의 삶을 살래요, 묵상의 삶을 살래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면서 살라고 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그 섬들 중에서 찬송하면서 살래요.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의 터전에서 여러분의 직장과 가정에서 여러분의 인생 중에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시간, 묵상의 시간, 기도의 시간, 성경 읽는 시간,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서 정신 차리면서 사는 시간. 많은 목회자들이 젊었을 때 뜨겁게 기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하나님의 많은 역사를 이루지만 나이가 들어서 자기의 경험을 의지하고 더 이상 산꼭대기에 올라가지 않고 묵상하지 않고 교만하고 오만해져서 그 능력들을 다 잃어버린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봤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성경말씀, 예배와 기도와 찬양 가운데 혹은 생활 속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시점에 내 마음을 강타한 그 복음의 강력한 자각, 깨달음, 뉘우침을 말하는 것인데 이런 분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그 능력들을 체득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이 어제보다 오늘 더 복음적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그 거룩한 부담감을 우리에게 주시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꾸 산꼭대기로 가려고 합니다. 새벽을 깨우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더 하나님을 닮으려고 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더 궁금합니다. 그게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입니다. 그게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인인 것이고 그게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구원 받지 못한 상태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신앙의 수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수준이 높지 않더라고 그 고민의 방향성 자체가 맞다면 여러분 잘 가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비록 이렇게 살고 있지만 나는 언젠가는 예배드리고 싶고 언젠가는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싶고. 이런 마음들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빛의 역할입니다. 지금 우리가 온라인으로 예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본질적으로 교회당에 모여서 함께 예배하는 것이 예배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비대면이라는 단어를 저희 교회에서는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냥 예배라고 해주세요. 비대면이라는 단어는 성경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이러스가 만들어낸 단어입니다. 예배는 그냥 예배일 뿐 입니다. 흩어져서 예배를 드리든,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든, 직장에서 예배를 드리든, 우리가 주일날 같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든 그냥 예배 일 뿐입니다. 거기에 세상이 만들어낸 단어를 교회가 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예배를 드리든 고3이 수능 볼 때처럼, 대기업에 면접 보러 갈 때처럼 진짜 집중해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배는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알고 계셔야 합니다. 예배의 1번 사명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내가 은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 내가 은혜 받으려고 예배드리는 태도를 가지고 계시면 점차 예배는 여러분에게 은혜가 끼치지 않는 본질적인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예배를 은혜 받으려고 가지 마세요. 예배는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 날 창조하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은혜를 안 받습니까? 그런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수영을 배우러 가야지, 내가 수영을 잘 하려고 잘 해서 어떤 목적을 이루러 가야지하고 수영을 가는 겁니다. 거기서 위로 받으면 안 됩니다. 수영 연습 안 하는 사람에게 코치가 똑바로 해, 연습하기 싫으면 집에 가라고 합니다. 연습을 하러 가서 코치가 혼내고 제대로 가르치고 훈련을 시키면 받아야 하는데. 그냥 위로 받으러 가는데 수영장에 왜 가나요, 연습장에 왜 가나요. 혼나면서 배우려고 가는 거잖아요. 공부를 잘하고 싶은 사람이 공부방, 학원가서 선생님에게 공부를 배우는데 선생님이 시킨 것은 안 하고 매일 자고 맨날 아이스크림만 우리 선생님은 아이스크림도 안 사주고 공부만 시켜요, 저는 저 학원이 싫어요. 그 학원은 진짜 좋은 학원입니다. 교회에 예배드리러 와서. 여러분 교회, 세상은 다 연습하는 기관입니다. 우리가 미술학원에 가서 미술을 연습하러 갑니다. 거기 가서 게임하지는 않습니다. 술집에 가면 술을 먹어야 합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연습입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이해를 돕기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운전면허학원에 가면 운전하는 것을 연습해야 합니다. 수영을 배우러 갔으면 수영연습을 하러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무엇인가요?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훈련을 하는 곳이 교회이고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거룩해지지 않으려고 하고 변화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 우리에게 주신 그 십자가의 영광, 그 능력. 우리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10년, 20년을 교회 다녀도. 그런데 하나님은 영광을 사단, 세상에 절대 빼앗기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주신다면 빼앗기는 것이니까. 여러분 이것을 정말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주시나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찬송하는 사람에게 주십니다. 섬들, 광야 속에서 게달의 성읍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는 사람에게 그 영광을 주신다고 합니다. 아무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13. 우리의 곳간에는 백곡이 가득하며 우리의 양은 들에서 천천과 만만으로 번성하며 14. 우리 수소는 무겁게 실었으며 또 우리를 침노하는 일이나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으며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음이 없을진대 15.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_시편 144:13-15 

 

시편 144편 13-15절에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높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를 거기를 건지시고 뭐라고 말씀하고 계시냐면 14절. 거리에 슬피 부르짖는 것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나아가 막는 일이 없고 우리 거리에는 슬피 부르짖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 자녀들은 장성한 나무들이 되고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다운 모퉁잇돌들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이처럼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리고 결론에 15절에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신데요. 주님은 우리의 삶이 꺾이지 않도록 오셨다는 겁니다.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 오셨다고 합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믿으면 신앙생활을 하면 꺼져가는 등불이 꺼지지 않고 상한 갈대 꺾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상한 갈대가 꺾여버리고 꺼져가는 등불이 꺼져 버리냐면 왜 흑암의 감옥에서 나오지 못하냐면 예수님 믿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우리 솔직히 이야기해봅시다. 우리 삶에서 예수님을 믿고 있는지 믿고 있지 않은지. 솔직히 이야기해봅시다. 주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고 있는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살고 그런 묵상, 기도의 삶을 살고 있는지. 이상합니다. 안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기대하냐면 교회가 부흥했으면 좋겠고 우리 삶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았으면 좋겠고 하나님의 대역사가 나타나면 좋겠다고 목사님들이 이야기합니다. 많은 목회자들이 기도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려고 무릎 꿇지 않으면서 거룩을 향해서 애쓰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그런 일들을 바라는 앞뒤가 안 맞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저희 가스펠교회 성도님들이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 예수님으로 선한 영향력이 있는 삶, 예수님으로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그런 축복된 삶.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다시 예수님이 우리 삶에 오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찬양하고 예배하면서 성령께서 우리 삶에 오셔서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내 체질, 경험, 배경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내 삶이 새로워져서 정말 축복된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저희 가스펠교회 성도들, 자녀들 그렇게 이끌고 싶고 그 길로 가도록 내몰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행함이 필요합니다. 연습 없이 내 것이 되는 경우는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습니다. 시행착오 없이 깨닫는 것은 없습니다. 틀려도 괜찮습니다. 시행착오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안 하는 사람보다 실수하고 넘어지더라도 하는 사람이 결국은 얻는 것입니다. 신앙생활 가만히 있으면 되나요? 그래서 예수님이 달란트 비유를 드셨습니다. 한 달란트 땅에 묻어놓고 예수님께 그대로 가져다주니깐 예수님이 그것을 뭐라고 이야기 하셨습니까. 그게 비유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앙생활, 행함이 없는 신앙생활.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뭘 해야 됩니까? 연습해야 됩니다. 이번 여름에 여름성경학교도 있고 말씀사경회도 있고 바이블스쿨도 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드릴 겁니다. 가리켜 드린다는 표현이 이상하지만 같이 나눌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 어떤 분은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자기는 정말 주님을 사랑한대요. 똑같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자기는 정말 주님을 사랑한대요. 그런데 응답이 없대요. 저에게 교회에 찾아왔습니다. 제가 상담을 하는데 제가 얼마나 고약한 목사인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저에게 이야기해보라고 했습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저에게 간증 좀 해달라고 했습니다. 자기는 그런데 계속 같은 말만 반복합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한대요. 그런데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제가 삶을 다 펼쳐서 하나한 점검해서 봤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행위가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왜 안 읽으세요? 바빠서 죽겠다고 합니다. 기도는 언제 하십니까? 밥 먹을 때 잠깐 한다고 합니다. 아, 그게 기도구나, 식사기도. 봉사는 하세요? 어려운 사람을 돕고 계세요? 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주님 사랑한다면서요? 그 백종원씨가 하는 이야기랑 똑같습니다. 백종원씨가 진짜 더럽게 말 안 듣는다고. 분명히 솔루션을 줬는데도 이유가 뭐냐고 하니깐 귀찮다고 합니다. 하던 대로 한다고 합니다. 그냥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라는 겁니다. 그러면 솔루션 받으러 백종원씨에게 왜 왔어요? 깨끗이 청소하는 것이 그렇게 하기 싫은 일인가요? 온도를 1도 낮추라는 이야기가 그렇게 하기 싫은 이야기인가요? 자기가 백종원씨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장사 안 되고 실패 속에 살아야 됩니다. 인간이라도 백종원씨를 보고 배우면 장사에 성공할 수 있는데 성경은 예수님을 보고 배우라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안 배우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보고 깨달아서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의 마음이 바뀌고 그것은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 삶에 모시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려면 하나님 어떤 분인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올바른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여러분 기억하셔야 합니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찬양하는 삶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일을 두고 영원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용사처럼 싸우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금 그러시잖아요. 하나님도 용사처럼 싸우는데 우리는 찬양하는 삶,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 용사처럼 싸우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있나요? 그게 말뿐인가요? 아니면 진짜인가요. 그것을 오늘 점검해보셔야 합니다. 우리가 흑암의 감옥, 어둠에서 나오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빛으로 오셨습니다. 십자가로 우리를 회복시키려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면 진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예수님 한 번이라도 붙잡아야 하는데 예수님의 옷자락도 안 만지려고 합니다. 삭개오처럼 뽕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한번이라도 쳐다보려고 노력이라도 해야 되는데 그것도 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교만한 죄가 우리 속에 있는지. 예수님 믿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쇠하지 않고 낙담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그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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