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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1-06-20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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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6월 20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2부예배)
제 목 내 백성을 위로하라
본 문 이사야 40:1-11

 

 오승주 목사

 

이사야 39장과 40장은 완전히 대상이 다릅니다. 39장까지는 이사야가 활동하면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예언했다면 말 그대로 40장부터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바벨론에 포로 된 사람들이 1차 대상자입니다. 지금 이사야가 살고 있는 시대의 100년 뒤입니다. 바벨론에 포로 된 사람들에게 주는 말씀이 이사야서의 하반부입니다. 그러니까 39장과 40장 사이가 굉장히 멉니다. 그리고 그 포로생활을 하는 동안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가 메시지이고 그 다음에 중요한 이면에 깔린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류를 구속하겠다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고 또 하나는 신약교회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유업들이 이런 메시지들이 40장부터 66장까지 담겨져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도 이사야 후반부 성경을 진짜 많이 인용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뿐만 아니라 외경에도 정말 많은 사역자들이 이사야 하반부 말씀들을 인용을 했고 성취가 되었던 말씀들입니다. 그 배경을 가지고 40장부터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전에는 역사를 반복적으로 다루다보니까 한 장씩 설교를 했지만 40장부터는 디테일하게 깊게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마 1년 이상 걸리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이사야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하나하나 고침을 받고 회복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많이 찾아 누리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Ⅰ. 무엇이 하나님의 위로인가?

 

모든 종교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가르침이 없는 종교는 없습니다. 불교든 이슬람교든 모든 종교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심지어 이단이나 사이비도 다 가르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가르침이 얼마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지 이단 사이비를 포함해서 모든 종교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이런 가르침들은 지식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종교들은 이런 지식이 특정 수준에 오른 사람만 뽑아서 핵심부를 만듭니다. 그것을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제자화다 라고 해서 핵심부를 만들어서 단체를 견고하게 흔들림 없이 만들어가는 것이 종교들이 하는 일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일본에 갔더니 일본에 SGI 이런 종교는 건물도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단계를 넘어간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찰 같이 만들어 놨는데 어느 수준에 도달해야 들어갈 수 있는 건물이 있고 그냥 입문자는 밑에 건물에 가야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처럼 지식이 특정수준에 오른 사람만을 뽑아 핵심부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교회들, 개신교들이 그런 식으로 했잖아요? 왜냐하면 예수님이 12제자를 뽑았다, 12제자에게 특별한 메시지를 주셨다 하는데 저는 반대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기독교가 놓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개신교 자체가 본질적으로 초자연적인 종교입니다. 여러분 이 단어를 앞으로 많이 들으실 것입니다. 개신교 자체가 본질적으로 초자연적인 종교입니다. 왜냐하면 보세요. 예수님 자체가 육신을 입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는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또 그 예수님이 동정녀에게 나셨습니다. 동정녀는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처녀입니다. 흔히 말하는 성관계를 하지 않은, 영어로 Virgin입니다. Women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동정녀에게 나셨습니다. 세상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죽으신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또 구약의 그렇게 예언된 대로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이 영생의 선물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초자연적 역사가 있는 것이 개신교입니다. 그런데 이게 누구에게만 있냐? 특별히 가르침을 많이 받고 특정 지식수준이 높은 사람에게만 주시냐? 성경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뽑아서 훈련을 시키셨지만 12제자 자체가 특정한 사람,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전부 죄인들이고 세리이고 병든 사람이고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마저도 12제자가 변질되고 12제자가 하나님 앞에 서지 않으니까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더 연약한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초자연적인 역사로 하나님이 만나주시고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았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저는 교회가 초자연적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탓에 기도의 열정들이 사라진 것 아닌가? 그렇죠? 우리는 더 이상 초자연적으로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그래서 기도가 죽어버린 시대를 지금 저와 여러분은 살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들이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반-초자연적인 가르침을 확산하고 그 확산되는 바람에 성령께서 우리 교회를 떠나달라고 정중히 부탁하는 교회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교회 안에 성령이 필요하지 않게 되어있어요. 반-초자연적인 믿음이 확산되고 있으니까. 그래서 더 이상 우리 교회는 성령이 필요하지 않아요 라고 우리 교회는 수준 높은 교회에요, 우리 교회는 교양 있는 교회에요, 우리는 기도를 그렇게 수준 낮게 하지 않아요. 이래서 더 이상 성령께서 필요하지 않는. 그래서 기도가 죽어버린 시대를 살고 있지 않나. 이것은 원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완전히 멀어진 모습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생각한 교회는 그런 교회가 아닙니다. 이제 교회는 뭐만 남아있냐면 정통교리나 메시지만 강의하는 강의실로 변해버린 것이 아닌가. 교회가 강의실이 되어버렸습니다. 목회자들이 칠판을 세워놓고 진리에 대한 자신의 시각을 설명하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칠판을 세워놓고 진리에 대해서 자신의 시각을 설명할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인도를 해야 됩니다. 여러분 이게 제 목회의 핵심입니다. 저희 가스펠교회의 목회 방향입니다. 여러분 성도들을 영혼들을 하나님과의 관계로 우리는 인도해야 합니다. 그것을 서포트 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것은 성령이 우리 마음속에 주신 초자연적인 계시입니다. 초자연적인 계시를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초자연적인 계시가 깨달음입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인간의 머리로 절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 사건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달달달 외우는 신학자 중에서도 저는 신학자 책들을 많이 봅니다. 성경을 파헤치고 해석하고 주석하고 강의하는 신학자들 중에서도 정작 개인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도바울이 성경으로 하나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항상 가르쳤습니다. 한 지역에 머물면 많게는 몇 년 적게는 몇 달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을 떠납니다. 그러면 떠나서 그 지역에 쓴 서신서를 보면 항상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주야로 심히 기도한다, 그리고 내가 기도를 쉬지 않고 있다 이런 내용들이 진짜 서신서에 많이 나옵니다. 여러분 서신서를 읽어보시면 알 것입니다. 내가 기도를 쉬지 않겠다. 그 말은 자기는 말씀을 주고 떠났지만 하나님이 그곳에서 역사하시고 일하신다는 초자연적인 역사를 사도바울은 믿었기 때문에 무엇을 쉬지 않았냐면 기도를 쉬지 않았던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이 일하시는 때는 기도응답의 때뿐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하나님은 항상 일하고 계시지만 인간의 입장에서는 이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일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 기도를 성취하시려고, 응답하시려고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초자연적인 계시, 그리고 초자연적인 역사들, 초자연적인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우리가 마음속에 회복하려고 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사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문제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원하고 또 어떨 때는 그 문제를 해결 받고 싶은 마음도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막상 뭐는 안하냐면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막상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진짜 아이러니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속에 초자연적인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기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가 꿈은 꾸는데 노력은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 꿈이 자기가 생각해도 헛된 꿈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것처럼 마음에 우리 영혼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가만히 있는데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를 기도의 자리로 이끌고 가셔서 응답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Ⅱ. 내 백성을 위로하라!

 

-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_이사야40:1-2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_이사야40:1~2

 

조금 이상합니다. 지금 배경이 어디라고요? 바벨론에 포로 된 상황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역사 기록에 보니까 바벨론은 앗수르처럼 포로를 대접하지 않았습니다. 눈알도 뽑고 부모나 학자들을 다 죽였습니다. 다시는 독립을 하지 못하도록. 심지어 마을의 집들을 다 태웠고 논밭을 갈아엎었습니다. 자갈을 뿌렸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 가시겠죠? 바벨론이 얼마나 무섭게 했는지. 다시는 독립을 하지 못하도록 씨를 말려버렸습니다. 그리고 똑똑한 친구들, 왕가의 후손들은 전부 신하로 삼았습니다. 신하로 삼고 다시 이 나라를 재건하지 못하도록 만든 정책이 바벨론의 정책입니다. 포로 입장에서 봤을 때는 끔찍한 일입니다. 부모가 내 눈앞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사지가 찢겨가면서, 눈알이 뽑혀가면서, 말 뒤에 줄로 사람을 달고 시골길, 자갈길을 끌고 갔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머리만 남는다고 합니다. 몸이 닳아서. 그런 짓을 바벨론이 했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민족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바벨론을 두고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 포로가 되어 와 있는 그 소수, 바벨론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는 포로들을 두고 하나님이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여기서 이미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는데 위로라니요?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을 자세히 깊게 살펴봐야 합니다. 포로가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부어주신다고 오늘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언가를 깨닫게 하시려고 포로가 되게 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야, 너네 나한테 쪼잔하게 헌금도 제대로 안하고 내 말도 제대로 안 듣고 내가 바벨론에 포로 된다 했지, 한 번 당해봐 이러셨나요? 아니죠. 하나님이 나중에 에스겔에도 그렇고 특히 예레미야애가에는 하나님이 우셨습니다. 내 백성이 포로로 끌려간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우셨다고 합니다. 마음이 아프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100년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냥 바벨론에 포로가 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백성이 온갖 우상을 다 섬기고 온갖 죄악을 다 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하실 일이 있고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시는데 기회를 주고 주고 주셨는데도 안 해서 마지막 기회로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픈 가슴으로 눈물을 흘리면서 자기 백성을 포로로 끌고 가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역설적인 것 같지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남유다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이 저를 비웃을 수도 있지만 저는 좋은 아빠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희 아들들한테. 저희 한빈이한테 진짜 좋은 아빠다. 왜냐하면 저는 저희 아버지에게 그런 사랑을 못 받아서 나는 자녀가 태어나면 좋은 아빠가 돼야지 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한빈이에게 정말 잘해주려고 하고 친구처럼 하려고 합니다. 원래 착하고 그렇게 좋은 아빠인데 하루에 평균적으로 3번 정도는 소리를 지르는 것 같습니다. 그냥 소리를 지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아빠가 저렇게 화를 왜 내지 할 정도로 저 안에 다른 사람이 나옵니다. 야!! 오한빈!! 이런 것. 어제도 어디를 갔다 오면서 뭘 사달라고 해서 사 먹으러 내려서 가는데 차가 막 오는 것입니다. 한빈아 아빠 손잡고 가 처음에는 다 좋게 이야기합니다. 아빠랑 같이 가, 아빠 손 잡아, 위험하니까.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한빈이 다다다다닥 갑니다. 한빈아 위험해 아빠 손 잡고 가. 다다다다닥 갑니다. 야!!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죽을래? 당장 튀어와!! 아이스크림이고 뭐고 없어!! 아이스크림 안 사준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귀가 열려서 옵니다. 저도 그러지 않고 싶은데 3단계 정도 가면 소리를 지르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나님의 심정이 딱 그렇습니다. 저는 한빈이에게 소리를 지르고 싶지 않습니다. 매를 들고 싶지 않고 무섭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아빠가 되고 싶지 않은데 위험하니까 그렇게 되더라고요. 나쁜 길로 가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왜요? 사랑하니까. 그래서 훈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히브리서에 훈계하지 않는 징계가 없는 자식은 사생아라고 하였습니다. 내 자녀가 틀린 길 가는데 징계하지 않으면 그것은 잘못된 부모입니다. 하나님이 왜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셨냐면 이유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고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야 하는데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있고 우상을 섬기고 있는 그 이스라엘에게는 그 영광을 하나님이 절대 주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걸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이 절대 가지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그 영광을 받도록, 소유하도록 하나님이 그들을 바꾸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바꾸시도록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게 포로로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천국을 믿어야 되는데 그래야 천국을 전파하고 살잖아요? 천국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인생은 잘 풀리는 것입니다. 앗수르를 따라하고 바벨론을 따라하고 애굽을 따라하니까 인생은 잘 풀립니다. 그것은 남들이 봤을 때 남유다가 잘 산다, 남유다 번영하네 이렇게 생각을 하지만 여러분 그것은 저주입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천국이 믿어지지 않는데 인생이 잘 풀리면 그것은 저주 아닌가요? 육신적으로 뭐가 잘 풀려? 그것은 저주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기준이 필요합니다. 즉, 본질이 필요합니다. 기준은 본질입니다. 본질이 뭐에요? 본질이라는 단어의 원뜻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야기를 합니다. 이 시대가 그렇잖아. 이 시대는 변합니다. 여러분 로마는 자기들이 영원하다고 했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부터. 모든 문화, 경제, 정치가 다 로마에서 나와서 전 세계로 영향을 주던 패권국가입니다. 아마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 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지금 로마가 있나요? 로마 사라졌습니다. 로마의 잔재는 있습니다. 그 강력한 로마는 사라졌습니다. 대영제국. 옛날에 영국은 세계 최강 강대국이었습니다. 유일한 원탑 강대국이었습니다. 지금은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 본질입니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본질을 기준 삼고 살아야 합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그게 뭐가 있을까요?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평가할 수 없지만 영원하신 하나님, 스스로 계신 분, 알파와 오메가가 되신 분 하나님 그리고 천국. 이런 것들이 변하지 않는 본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본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당신을 알려주시기 위해서 주신 성경,   유일한 길이 본질이고 기준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개혁자들은 캐논(canon)이라고 했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기준이어야 됩니다. 성경이 본질이고 기준입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구원이 무엇을 뜻합니까? 죄 사함이 곧 구원입니다.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 성경이 가르치는 핵심이 무엇이냐면 죄 사함입니다. 신앙은 죄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 길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가깝게 지내는 것 밖에 없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도 보니까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에 계시도록 우리 삶에 실제로 함께 하시도록. 왜 이게 중요하냐면 죄는 항상 열매가 있습니다. 죄는 열매가 있습니다.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 그것은 본인들의 죄에 대한 값입니다. 저는 기독교 신앙에서 인과응보를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왜 인과응보를 이야기하지 않냐면 예수님의 죄 사함과 예수님의 긍휼과 은혜가 있기 때문에 인과응보를 이야기하지 않지만 오늘 이 본문에서는 제가 다른 단어로 해석할 것이 없을 정도로 인과응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구원도 받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올 스탑을 시키시고 회복시키시는 초자연적 능력을 주시는 것이 맞지만 성경은 인과응보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죄는 반드시 결과를 냅니다. 마음속에 죄가 있으면 나중에 이게 썩고 부패하고 냄새를 만들어냅니다. 저희 집에서 요리를 하면서 제일 필요한 재료가 계란, 파입니다. 파는 항상 모든 요리에 들어가니까. 저는 뭘 하다보면 또 와이프가 뭘 하다보면 늘 파가 필요해서 파 좀 사와 합니다. 그 때 사놓은 것 다 썼나? 몰라 없어, 파 좀 사와. 어느 날 냉장고를 열어보니까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뭔가 썩은 냄새가 나는데 파가 오래 돼서 썩으면 물이 되거든요? 새까매집니다. 파가 썩어서 안에 몇 다발이 있었습니다. 냉장고를 늘 관리하고 안에까지 살펴봐야 하는데 파가 다 썩어 있었습니다. 냄새가 나오는데 얼마나 지독하던지. 덕분에 냉장고 청소를 깨끗이 했지만. 파가 하나 썩어있어도 냄새가 나고 다 소독해야 될 정도입니다. 그런데 죄가 열매가 없다고요? 죄가 결과가 없다고요? 그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 위로는 죄 사함을 깨닫는 것입니다. 너희가 죄 때문에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는데 그 때 뭘 깨닫냐? 그 때서야 하나님의 필요함을 하나님의 도우심을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깨달음이 위로입니다.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_이사야40:3-5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_이사야40:3~5

 

무슨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는데 뭘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어떻게 예비하고 사막에서 무슨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고 골짜기마다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고 높아져서 고르지 않은 곳이 평지가 되게 해라. 도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이런 메시지들을 정말 잘못 적용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메시지는 앞에 메시지와 연결 된 것이고 뒤에 메시지와 연결이 된 것입니다.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이 죄 사함 받기 위해서 우리보고 광야에 길을 내라고 합니다. 사막에 길을 내라고 합니다. 죄 사함 받기 위해서 앞에 무언가 가리고 있는 물건들을 낮춰서 평탄하게 만들고 가다가 빠지지 않도록 골짜기를 올려서 평지를 만들라고 합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야 되는데 여호와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하는 앞에 산, 사막 같은 거 이것을 다 고르게 해서 길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죄 사함 받기 위해서. 왜요? 무슨 말이에요? 예루살렘은 메시야를 상징합니다. 남유다는 메시야를 기다리고 메시야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 선택받은 구약의 민족입니다. 그런데 남유다가 메시아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나 예수님은 같은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없는 것입니다. 예배도 드리고 하나님께 기도도하고 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다른 데에 가 있었습니다. 성공이나, 바벨론이나, 앗수르의 번영 이런 것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속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목표로 살아가야 되는 민족인데 그 목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 죄가 확 하고 들어온 것입니다. 이 죄를 사하기 위해서 다시 예수님을 바라봐야 되는데 예수님을 바라보는데 보이지 않습니다. 왜? 길이 다 막힌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광야에 길을 내라, 사막에 길을 내라, 산을 낮추고 골짜기를 올려서 갈 수 있게, 올 수 있게 만들어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보도록, 메시아를 보도록 길을 만들어라 지금 그 이야기입니다. 아니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는데요?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인생이 엉망진창이 되었는데요? 평탄하게 만들라고요? 네. 그제서야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그냥 두면 그것을 못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무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셔서 이 영광을 회복시키시려고 포로로 끌고 가서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오직 기도만 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야 길을 평탄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누구를 향해서? 예수님을 향해서 길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를 우리 인생에 대로를 만들어라, 성공하기 위해서 길을 닦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시도록 길을 닦으라는 메시지입니다. 메시아를 받아들이도록 길을 닦으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가진 세상적인 모든 것은 구원을 위해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장로교가 조금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장로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우리 교회도 장로교 소속입니다. 칼빈주의. 칼빈이 장로교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에 가보니까 미국은 장로교 없습니다. 제일 많고 제일 큰 교단이 침례교입니다. 남침례교. 제일 큽니다. 그 다음 루터교입니다. 미국에 루터교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장로교가 많지 않습니다. 미국에 가장 복음이 뜨거운 보수주의 교단이 침례교단입니다.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합니다. 미국의 장로교는 분위기가 많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장로교가 많습니다. 장로교에서 선교를 많이 했다는 이야기겠죠. 장로교의 문제는 칼빈이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칼빈이 하나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 사람들에게 칼빈의 기독교강요가 성경입니다. 우리에게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그냥 참고서적일 뿐입니다. 제가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는데 왜냐하면 성경을 보지 않습니다.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냐 마치 칼빈이 하나님인 것처럼. 성경까지 가지를 못합니다. 여러분 성경 위에 그 어떤 책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신학책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 어거스틴이 어마어마한 책들을 많이 썼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죽을 때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 묘지에는 내 책을 아무것도 언급하지 마라, 성경만 언급해라. 그게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 우리의 리더십이나 목사의 설교가 성경보다 위에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신학적으로 목사의 설교와 성경이 동등하다고 이야기한 분이 있는데 저는 절대 반대입니다. 어떻게 목사의 설교가 성경과 동등할 수 있어요? 이것은 진리이고 본질인데. 목사의 설교는 본질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목사가 성령충만하고 아무리 그리스도의 대언자로 이 순간에 하나님이 붙잡아주신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그 정도로 중요합니다. 왜 그렇게 중요하냐면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의 죄 사함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말씀으로만 우리가 구원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고 이 말씀으로만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길을 예비하라고 하셨습니다.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는데 육체가 그것을 보려면 길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서만 가능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느헤미야, 에스라, 다니엘 이런 사람들, 남은 자들은 무릎을 치며 아하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우리 민족에게 주시는 비전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이 아니구나, 우리가 계획했던 것이 아니구나. 느헤미야가 그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에스라가 깨달은 것입니다. 무릎을 쳤습니다. 왜 우리를 포로 되게 하셨는지 깨달은 것입니다. 유다 백성이 그 어느 때보다 포로가 되어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찾았습니다. 무엇으로 그게 가능한가? 이 길을 만드는 것이 무엇으로 가능한가?

 

- 회복은 무엇으로만 가능한 가_이사야40:6-8

 

(6) 말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하니 이르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의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과 같으니 (7) 풀은 마르고 꽃이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라_이사야40:6~8

 

여러분 이 백성이 풀이라고 비유하는 것은 우리가 죽는다는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기운이 그 위에 불면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풀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예쁘게 꽃 장식을 해도 몇 주 지나면 시들시들 합니다. 인생도 그렇습니다. 젊음이 있지만 나이가 들어 늙고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기운이 우리에게 스탑 되면 우리는 가야 됩니다. 천국, 내세로 가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으로는 구원,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으로만 가능하냐?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서리라.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으로만 그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구원, 즉 천국을 만나는 길은 죄 사함을 받는 길은 말씀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사람은 결코 구원 받을 수 없고 구원 받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이 기쁨이 아니고 이 말씀으로 살지 않는 사람을 구원 받았다고 우리가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많은 목사님들이 당신 구원 받았어 이렇게 말하는데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대적, 월권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이 구원 받았다는 것은 아무도 확인해 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자기 자신에게만 확인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남이 교회에서 전도사, 목사님들이 너는 이제 하나님 자녀야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도왔다 할지라도 우리가 그것에 대한 확신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은 보혜사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십니다. 보혜사 성령자체가 그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는 역할로 우리에게 오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는데 우리 삶은 그대로다? 말도 그대로고 행동도 그대로다? 그러면 성령께서 도우시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말씀을 읽고 듣기는 하지만 그게 지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계속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 말씀을 사랑하지는 않고, 말씀으로 깨달음이 없기 때문에 오래 할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론이 본질일고 정답이라고 합시다. 그 이론이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 즉 연습이 없으면 그 이론은 이론일 뿐입니다. 깨달음은 없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있다면 연습할 것이고 또 연습하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연습은 기도입니다. 성령께서 일하시는 기도입니다. 수학은 정확한 과학적인 문제와 풀이가 있잖아요. 정답이 있잖아요. 수학이라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론입니다. 그런데 이 수학을 내 것으로 만들려면 뭘 해야 돼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풀어보고 과정을 이해하고 그래서 아하 하고 깨달아야 이거구나 하고 깨달아야 어떤 시험지에라도 이 문제가 나오면 풀 수 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척이라는 것을 합니다. 아는 척 아무리 해봐야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아는 것은 진짜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내 것이 되어야 진짜 아는 것입니다. 아는 척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남들은 속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아는 것. 속일 수 있습니다.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우와 저 사람 천국 아는가보다. 그런데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바리새인이 천국 가겠다고 얼마나 기도를 많이  하고 얼마나 헌금을 많이 하고 율법을 잘 지켰습니까? 예수님이 오셔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들의 기도를 들은 적이 없는데? 신기하죠? 너무 놀랍습니다.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우리 마음에 진짜 하나님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 그것을 하나님은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진짜 우리 속에 받아들이는 것, 하나님의 영광과 천국을 받아들이는 대로 작업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작업이 무엇으로 할 수 있냐? 하나님 말씀으로 할 수 있고 이 말씀을 깨닫게 하는 것이 누가 하시는 일이냐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 성령께서 하시도록 우리가 해야 되는 연습은 기도입니다. 연습이 없는데 내 것이 될 수 있어요? 없습니다. 그냥 책 속에 있는 이론일 뿐입니다. 소화해서 내 것이 되고 내 자산이 되고 내 깨달음이 되려면 반드시 연습이 필요합니다. 맞잖아요? 백종원이 요리하는 거 백날 천 날 유튜브로 쳐다보고 있어도 내가 막상 요리하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절대 못합니다. 연습해야 합니다. 레시피 대로 수도 없이 반복해서 연습해야 음식이 비슷하게라도 나오는 것입니다. 천번 만번 쳐다보세요. 막상 혼자 음식 만들려고 하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뭐라 했는데 백종원이? 이러면서. 저도 한 번 따라했다가 맛이 조금 이상합니다. 레시피 하나를 빼먹었던 것입니다. 이거 하나 빠졌는데 맛이 이렇게 이상할 수 있구나.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해보셔야 합니다. 

 

Ⅲ.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_이사야40:9-11, 마태복음7:1-14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_마태복음7:1~14

 

1-2절. 어려운 말 같은데 그 뒤에 예수님께서 보충설명을 하고 계십니다. 

3-5절. 여러분 들보와 티에 대한 감이 없으신가 본데. 들보는 기둥입니다. 기둥이 눈에 박혀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들보는 지붕을 받치고 있는 기둥을 들보라고 합니다. 들보가 내 눈에 박혀 있는데 남 눈에 작은 것, 티 박혀 있다고 정죄하고. 야 티 좀 빼. 눈에다가 그런 걸 끼고 다녀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리새인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뒤에 이야기가 더 재미있습니다. 6절에 같은 내용입니다. 분리가 된 것이 아닙니다. 6절. 눈에 들보 끼고 남 티 보고 뭐라고 하는 사람에게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개입니다. 그러면서 뒤에 진짜 중요한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7-10절. 그들이 개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계속 읽는데 제가 개, 돼지 같았습니다. 여러분 개, 돼지를 상상을 해보세요. 돼지우리 속이 얼마나 더러워요? 돼지는 먹을 것만 주면 좋아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진주를 줬습니다. 먹을 건가 보다하고 달려듭니다. 그런데 씹어보니 먹을 것이 아니네. 돌덩이잖아요 하면서 주인을 할퀴는 것입니다. 오늘 내용입니다. 개한테 먹을 것을 줬는데 늘 먹을 것만 주다가 갑자기 개한테 거룩한 것을 줬습니다. 개가 거룩한 것을 알게 뭐야. 개인데. 이거 뭐지, 먹을 건가? 아니네 우리한테 쓸모없는 거네, 이런 주인이 이런 것을 줘? 하고 할퀴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세요? 우리가 그런 존재입니다. 세상의 울타리 속에서 세상 먹을 것만 먹고 살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천국을 주시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인 죄 사함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려고 하는데 하나님을 할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였잖아요? 아니 바리새인들이 그토록 기다렸던 메시아가 오셨는데 예수님을 죽여 버렸습니다. 할퀴어버렸습니다. 그것을 비유하시는 것입니다. 아, 그런데 그게 우리 모습인 것입니다. 진주를 줬는데 먹을 것이 아니라고 화가 나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우리를 고난으로 이끌어 가시는데 화가 나고 짜증나고. 왜 하나님 나는 응답 안 해주세요. 왜 하나님 나는 축복 안 해주세요. 왜 저 집사 아들은 잘 되고 서울대 가는데. 저 집사 남편은 회사 승진도 잘하는데 우리 집은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예요. 하나님을 할퀴고. 그러는 거 아닌가요? 하나님은 지금 승진이나 대학 합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네가 구원 받기를 원해. 나는 네가 이 천국을 소유하기를 원해. 나는 네가 이 영광에 동참해서 아름답고 복된 인생을 살기를 원해 이러시는데 우리는 개, 돼지인 것입니다. 개, 돼지처럼 먹을 것만 찾는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을 바벨론에 포로 되게 하셨습니까? 개, 돼지처럼 먹을 것만 찾지 말고 우상만 섬기지 말고 천국을 찾으라고. 사막에 길을 내고 광야에 길을 내고 걸림돌을 제거하고 예수 그리스도, 메시아를 받아들이라고 하나님이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한국교회는 개, 돼지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목사들이 개, 돼지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개, 돼지로 만들어서 세상 우리 안에 먹고 살도록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왜? 천국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성령의 역사, 초자연적인 능력 이런 것이 교회 안에서 설교에서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인턴십을 하면서 아이들 성공해라, 대단한 인물 만들어라. 어느 순간 그런 분위기로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공도 했고 대단한 인물도 됐는데 교회로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왜? 그들이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교회가 더럽다고 합니다. 교회가 수준 떨어진다고 합니다. 교회가 뭐가 없다고 그래요? 교양이 없다고 합니다. 누가 개, 돼지인 줄 모르고. 성경을 읽으면서 성경이 비과학적이고 수준이 떨어지는 책이라고 합니다. 그런 세대를 우리가 교회들이 만들어냈습니다. 이렇게 오늘 말씀을 결론 맺고 있습니다.

 

(9)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 (10) 보라 주 여호와께서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것이요 친히 그의 팔로 다스리실 것이라 보라 상급이 그에게 있고 보응이 그의 앞에 있으며 (11)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_이사야40:9~11

 

이것은 사실 그 시대의 이사야 같은 선지자에게 주신 말씀이기는 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는 선지자의 사역이기 때문에. 그러나 이게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남유다 전체에게 주시는 메시지이기도 하고 오늘 날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는 어디로 오르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높은 산에 오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힘써 외치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소식, 다시 말해서 이 아름다운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입니다.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것을 전하기 위해서 높은 산에 오르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높은 산에 오르라고 한 것을 엄청 오해했습니다. 이 높은 산에 오른다는 이야기가 세상 적으로 성공한다는 이야기인 줄 알았습니다. 교회가 건물도 짓고 조직도 탄탄하게 만들고 무언가 프로그램도 잘 만들고. 이런 것이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우리 학생들에게도 너 성공해야 돼, 지금도 그렇게 말하기는 합니다. 너 좋은 대학 가기는 해야 돼, 너 부자 돼야 돼. 이렇게 말은 하기는 하는데 그게 높은 산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저는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남유다도 바벨론의 문화도 받아들이고 앗수르의 문화도 받아들이고 구스의 문화도 받아들이고 애굽의 문화도 받아들여서 세상 적으로 남유다는 남 부러울 것 없을 정도로 성공을 이뤘는데 구원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고 죄악을 가까이 했기 때문에. 높은 산에 오르는 것이 뭘까? 마태복음, 마가복음을 읽고 계시잖아요. 거기서 높은 산이 뭐라고 느껴지십니까? 여러분 신앙의 성공은 거룩이에요. 더러운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 신앙의 성공입니다. 여러분 이게 가슴에 빵 하고 오지 않으면 우리는 정말 개, 돼지인 것입니다. 이게 감동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벌써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개, 돼지 인 것입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신앙의 성공이 죄 사함이라는 것을, 죄에서 벗어나서 하나님과 함께하는 거룩이라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벗어난 그 기쁨, 그리고 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하나님 당신의 사랑, 그 기쁨이 우리에게 없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했습니다. 아 높은 산에 오른 다는 것은 죄에서 벗어난 기쁨을 아는 것이구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것이구나. 그런 사람이 높은 산에 올랐다는 거구나. 그런 사람이 세상에 담대하게 큰 목소리로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지, 돈이 많은 사람이 외치는 것이 아니더라고요. 똑똑한 사람이 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너무너무 사랑한 사람이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구원이 너무 감사하고 죄 사함이 너무 기뻐서 외치는 거예요. 맞잖아요? 그런 사람이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내세도 생각하고 후대도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높은 곳에 사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높은 산에 오르라. 어떻게 오르나요? 높은 산에 쉽게 오르나요? 산에 오르는 것이  쉬운 가요? 오르라고 합니다. 높은 산에 오르라고 합니다. 성령은 어떤 특별한 사람, 특별한 그룹에 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주님을 간절히 찾을 때 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이 임한 사람을 늘 사용하셨습니다. 종교는 지식을 가지고 특정 그룹을 만들지만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성령이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메이저, 마이너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이 평양에서 대부흥회를 움직였지만 평양의 대부흥운동이 식어져버리고 그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공산주의를 받았을 때 하나님은 더 연약한 하나님을 간절히 사모하는 그 지역에 촛대를 옮겨서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런 종교적이고 세상적인 변화되는 변질되는 본질이 아니라 변화되는 것은 본질이 아닙니다. 변화되지 않는 본질을 기준삼아 살아야 합니다. 항상 언제나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을 간절히 바라보면 성령을 주실 수 있는 거구나. 개, 돼지 같은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하나님이 주시는구나. 여러분에게 이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에 대로를 만들라고 합니다. 대로는 예수님이 오시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하나님을 바라보라. 그렇게 이야기 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그 전에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포로가 돼서 간절히 기도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울고 계시는 하나님.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_이사야40:11

 

저 양털이 배설물, 곤충들이 집 짓고 살 정도로. 죄가 35kg나 쌓여서. 겉으로는 비대해지고 커지는데 속은 곧 죽기 직전이었다고 합니다. 영양실조로.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무거워지는 것입니다. 숲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는 것도 기적이라고 합니다. 울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보지도 못하니까. 그 자리에 서서 죽기 직전에 발견된 것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시편 23편에 여호와의 나의 목자시니 이렇게 고백한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이냐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한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사울 왕에게 피해서 죽기 직전에 너무 위험한 순간에 뭐라고 고백하냐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환경은 어렵고 비록 내가 지금 위험하고 힘들지만 내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 다윗은 묵상을 했고 그 때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공부했고 그 때 다윗은 하나님을 향해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는 시간들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그렇습니다. 아이 셋 키우고, 아이 넷 키우고, 집에 경제가 어렵고, 우리 집 가정환경은 이렇고. 맞아요, 이해가 갑니다. 물리적으로 육신적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할 수 있잖아요. 길은 만들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신 말씀은 내 자식들, 새끼들 오냐오냐 키우는 거 아니잖아요. 여러분 내 자식 예쁘다고 오냐오냐 키우면 아이 등신 됩니다. 바보 됩니다. 어디 가서 나쁜 짓 배워왔는데도 내 자식은 그런 애 아이야 하면 잘했어 이러면 이 아이는 끝장 보는 것입니다. 어디서 나쁜 것을 배워오면 반 패야 합니다. 반 패도 될까 말까입니다. 그러니까 오냐오냐 키우는 것은 좋은 부모가 아닙니다. 이 아이들에게 위로는 뭐에요? 부모가 바르게 키워주도록 길을 안내해주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커서 우리 엄마 아빠가 나를 바르게 키워줬구나. 거기서 위로를 얻는 것입니다. 맞잖아요? 그게 뭐에요? 바르게 키우는 것이 교육입니다. 친밀한 관계입니다. 그리고 모범도 들어갑니다. 부모가 모범을 모여야 되는 것입니다. 개, 돼지처럼 살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복된 진주, 거룩한 것. 그러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돼요? 교육을 받아야 되고 친밀한 관계가 회복되어야 되고 우리의 모범이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런데 우리가 지금 무엇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칼빈주의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어떤 신학사상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아니죠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의 모범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그런 축복된 존재로 회복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죄 사함은 예수 그리스도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그 길을 어떻게 만드냐? 말씀으로 밖에 만들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는 분은 성령이시고. 그래서 우리는 그 말씀이 길을 만드는 연습이 필요한데 성령께서 도와주시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말씀을 가지고 하나하나 점검해서 신앙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 천국이 진짜 있냐? 없냐? 내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 있냐?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냐? 없냐? 그게 진짜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척 한는 것이 진짜 신앙생활이 아니고. 그래서 여러분 정말 위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우와, 내가 예수 믿었더니, 내가 신앙생활 했더니 내가 완전히 달라졌네. 그게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개, 돼지처럼 계속 사는 것은 위로가 아닙니다. 돼지가 계속해서 먹을 것만 먹게 만드는 것은 위로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변화시켜주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위로입니다. 그 위로가 우리에게 조금 기분이 나쁠 수 있습니다. 돼지가 조금 기분 나쁜 것입니다. 나는 먹을 것만 주면 되는데 진주가 웬 말이냐 이럴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면 안 됩니다. 그것은 종교가 가지고 있는 것이고 어떤 이익 집단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익집단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익집단이 아닙니다. 우리를 구원 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공간입니다. 여러분 저는 높은 곳이 세상 성공인줄 알았는데 높은 곳이 예수 그리스도구나, 높은 곳이 죄 사함이구나, 천국을 믿고 사는 것이구나, 높은 곳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라고 고백하며 사는 것이구나 이제 깨닫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은 그런 자를 찾고 계시고 그런 자를 통해서 일하시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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