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06월 06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2부예배) | |
제 목 | 병 걸린 히스기야의 기도 |
본 문 | 이사야 38:1-22 |
오승주 목사
Ⅰ. 하나님의 섭리:토기장이이신 하나님_예레미야18:1-12
예레미야 1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토기장이에 대한 비유를 드십니다. 여러분 읽어보셨을 것 같은데 한 번만 더 읽어드리겠습니다.
(1) 여호와께로부터 예레미야에게 임한 말씀에 이르시되 (2) 너는 일어나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라 내가 거기에서 내 말을 네게 들려 주리라 하시기로 (3)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4)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5)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7)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뽑거나 부수거나 멸하려 할 때에 (8) 만일 내가 말한 그 민족이 그의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 (9) 내가 어느 민족이나 국가를 건설하거나 심으려 할 때에 (10) 만일 그들이 나 보기에 악한 것을 행하여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면 내가 그에게 유익하게 하리라고 한 복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리라 (11) 그러므로 이제 너는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며 계책을 세워 너희를 치려 하노니 너희는 각기 악한 길에서 돌이키며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하라 하셨다 하라 (12) 그러나 그들이 말하기를 이는 헛되니 우리는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며 우리는 각기 악한 마음이 완악한 대로 행하리라 하느니라_예레미야18:1-12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면 하나님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토기장이, 도자기나 그릇 만드는 데에 데리고 간 것입니다. 여러분 도자기 굽는 데 가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제가 아는 분이 도자기 굽는 일을 하셔서 거기를 가보니까 진흙을 원하는 대로 디자인해서 불 속에 넣습니다. 꺼냈는데 원하는 대로 도자기가 구워지지 않으면 바로 깨버리셨습니다. 또 새로 굽고 이렇게 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데를 지금 데리고 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나라도 내가 만들기도 부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전능자이다, 내가 너희들의 토기장이이다 지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유다에게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그런데 나는 나라를 부수기도 하고 만들기도 하는 존재인데 내가 나라를 부수려고 죄악 때문에 멸망시키려고 하는데 너희가 죄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반대로 살리기도 한다. 그리고 또 내가 이 나라를 축복을 줘야지 계획을 세워서 축복을 주려고 했는데 그들이 악으로 돌아가면 다시 그 축복을 거두기도 한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세우셨던 계획을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돌이키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에 따라서요? 우리가 회개하냐, 그렇지 않냐에 따라서. 그런데 오늘 남유다 백성들에게 뭐라고 해요? 너희의 길과 행위를 아름답게 해라, 악한 길에서 돌이켜라. 그러면 내가 너희에게 내리려고 했던 재앙, 계책 이것들 내가 돌이킬게 이렇게 말씀하시는데 남유다는 헛된 소리 하지 마라, 헛소리하지 말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헛소리만 하지 말라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계획대로 행하고 우리가 가진 악한 마음 그대로 행하겠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돌이킬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지금 토기장이에 대한 말씀을 나누는 이유는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어릴 때 제 인생이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친구들과 비교를 했을 때도 그렇고 비교를 하지 않더라도 제 인생만 봐도 우리 가정만 봐도 또 제가 머리도 나쁘지 쉽게 말하면 내세울 만한 게 하나도 없는 그런 환경에 살았기 때문에 참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교회 가면 그런 마음이 가라져야 되잖아요? 그런데 교회 갔더니 그 마음이 더 커졌습니다. 신학교 가서는 그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너무 낙심이 되었습니다. 나는 목사도 될 수 없겠구나, 나는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고 싶고 나도 복음을 위해서 유익한 삶을 살고 싶은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겠구나 하고 제 자존감이 바닥을 칠 때가 있었습니다. 정말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성경을 읽다보니까 야곱이 그런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야곱은 원래 잔머리를 많이 쓰기도 했지만 마마보이다 이렇기도 합니다. 창세기 강해설교 할 때 재미있게 설교 했었습니다. 야곱이 너무 머리를 많이 쓰는데 머리를 쓰는 만큼 잘 되면 좋은데 머리를 쓰는 것만큼 결과가 좋지 않았습니다. 하는 것마다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다 포기하고 돌덩이 위에서 그냥 돌베개를 베고 포기하고 잠자는 것입니다. 앞뒤좌우가 꽉 막히니까. 그런 야곱이 만약 오늘 날 우리 교회에 있다면 왕따 당하는 성격일 것입니다. 나이 먹은 사람이 맨날 엄마 이야기나 듣고 맨날 잔머리나 쓰고. 우리 그런 사람 별로 좋아하지 않잖아요? 그런데 그런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자고 있는데 하나님이 그 야곱을 만나주시는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저는 그 장면이 너무너무 생생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장면에 관한 자료를 너무 많이 찾아봤습니다. 인터넷에 그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영상으로 만든 것들도 많이 봤습니다.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돌베개를 세워서 거기에 기름을 붓고 예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창세기에 야곱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냐고 우리가 배웠습니까? 돌 같은 인생입니다. 야곱의 인생이 진짜 돌 같습니다. 돌 뿐인 인생입니다. 거기는 주변을 다 둘러봐도 실제 돌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돌처럼 흔하고 별 볼일 없는 인생입니다. 가진 것이 돌 밖에 없습니다. 목에 베고 잔 돌덩이 하나 밖에 없습니다. 자기는 다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생이 잘 풀리는 것도 아니고 잔머리를 너무 써서 인생이 다 꼬여버린 것입니다. 그런 돌 밖에 없는 인생, 의지할 것이 없는 인생. 사기 쳐서 재산을 좀 있지만 그것이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돌에 기름을 붓고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그 돌에 기름을 붓고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돌에 기름 붓고 예배했는데 하나님이 거기를 뭐라고 이름 지었죠 나중에? 벧엘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집이 돌 뿐이 없는 그 곳에 세워진 것입니다. 벧엘, 벧엘은 나중에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됩니다. 수백년이 흘러서 역사가 한참 흘러서 야곱이 돌베개 위에 기름 붓고 예배 드렸던 거기가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늘 문이 열려서 천사들이 왕래했습니다. 야곱과 씨름도 했어요. 나중에 야곱이 뭐라고 고백해요? 하나님이 과연 여기 계시거늘. 이렇게 고백합니다. 자기는 자기 인생에 가장 실패한 순간 돌 밖에 없는 순간, 그 돌에 기름 붓고 예배했지만 그곳이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이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여기 계시구나 하고 영적으로 가장 큰 큰 깨달음을 얻은 그런 곳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그 뒤로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군대를 피해서 캄캄한 동굴에 겨우 숨어들어갔습니다. 곧 잡히면 끝입니다. 바로 밖에 군인들이 왔다 갔다 합니다. 너무 무서워서 벌벌 떨어요. 누구죠? 다윗입니다. 인생이 곧 끝날 것 같습니다. 희망이라곤 있습니까? 미친 척 하고 뛰어다니고 도망 다녀야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만큼. 그런데 어쩔 수 없이 깊은 동굴 속에 숨어들어갔습니다. 밖에는 군인들이 다윗 잡으면 바로 죽인다고 수많은 군인들이 진치고 있습니다. 들키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 때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그 동굴에서.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그것을 거기서 고백했습니다. 수금이 어디 있습니까? 악기가 어디 있냐는 말이에요, 비파가 어디 있냐는 말이에요. 무슨 내 영혼을 깨웁니까 그 상황에? 그런데 다윗이 그 위급한 위험한 상황을 피해서 들어간 동굴에서 내 영혼아 깰지어다 이렇게 찬양했습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저는 제 인생이 진짜 불공평하고 별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가장 힘든 그 시기에 인도를 갔습니다. 인도를 한 3주 간 것 같습니다. 인도에 단기선교를 간 것입니다. 정말 저는 거기서 제 인생의 모든 터닝 포인트를 거기서 얻었습니다.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지만 인도의 영혼들을 보고 우상숭배하고 정말 지금도 인도가 지저분하다고 하는데 여러분 벌써 20-30년 전이니까 얼마나 비참했겠어요? 또 선교사님을 통해서 좋지 않은 현장, 인도 북부 지역을 투어 했는데 정말 비참했습니다. 갠지스 강에 시체가 떠다니는 것도 보고, 부모가 없는 고아들 천지구요 더럽고 추악스러운 우상들이 한 두개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비참한지. 거기서 제가 아침마다 저녁마다 성경을 읽으면서 제 인생의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그렇지, 하나님이 토기장이이시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셨지. 하나님이 나에게 구원이라는 엄청난 은혜를 주셨는데 내가 왜 불평하고 있지? 내가 왜 원망하고 있지? 내가 왜 여호와를 찬송하지 못하고 찬양하지 못하고 있지? 제가 그 인도를 갔다 오면서 불렀던 찬양이 오늘 불렀던 찬양입니다. 94장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인도에 가서 너무 은혜 받았던 찬송가입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여러분 제가 인도에 가서 완전히 다른 사람,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장 힘든 시기에 인도 갈 때도 빚내서 선배들이 십시일반 도와서 갈 때도 비참하게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하나님이 저에게 그러셨습니다. 이 영혼들을 보라고, 네가 할 일이 없겠냐고, 네가 감당해야 될 사명이 없겠냐고. 저는 저희 가정 때문에 또 제가 처한 상황 때문에 너무 불평하고 불공평한 인생이라고 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눈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예레미야 18장에 토기장이이신 하나님을 배경에 두고 오늘 말씀을 들으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시 회복시키시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시는데 우리의 태도, 우리의 자세, 거기에 달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38장은 진짜 유명한 본문입니다. 아마 교회 다니지 않는 분들도 병 걸린 히스기야의 기도는 다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암 환자들 병원에 가서 예배하는 것 보면 다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하시는 것을 보기도 했습니다. 기도하면 15년이 연장된다, 암도 치유된다, 히스기야가 걸린 병이 암이다. 이런 설교하시는 말도 안 되는 자료에도 역사에도 없는 기록에도 없는 것을 추측으로 막 짬뽕해서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이 하도 많아서 이 본문이 되게 병 걸린 사람들에게 유명한 본문입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병 고침이 주 내용이 아닙니다.
Ⅱ. 병 걸린 히스기야의 기도
- 그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_이사야38:1, 6, 39:1
그 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_이사야38:1
히스기야에게 갑자가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너 너희 집에 유언해, 너는 죽고 다시 살지 못해. 그 말은 끝났다, 너 죽는다. 원어에 보니까 현재완료형입니다. 너의 목숨이 이제 끝난 거야.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여기서 하나를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여기서 ‘그 때에’는 36-37장 앗수르가 18만 5천이 포위하고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기도해서 18만 5천 군대가 하루 밤에 송장이 된 사건을 지난 주 까지 설교했습니다. 그 37장과 연결된 38장이냐? 아니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그 때에’는 많은 신학자들이 앗수르 18만 5천 군대가 남유다를 둘러싸서 작은 나라 남유다가 승리한 사건의 10년 전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B.C.710년 정도라고 다들 이야기를 합니다. 그게 옛날에는 3:7이었습니다. 당연히 37장-38장 연결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7정도였는데. 이제는 자료가 많이 발견되고 현대 시스템들이 발견 되서 지금은 반대로 7:3이 되었습니다. 저도 이것을 지지합니다. 어떤 보수적인 신학자들은 37장-38장이 연결되어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특히 구약은 예레미야도 그렇고 오늘 이사야도 그렇고 성경 장 순서대로 기록이 되어있지 않습니다. 마태복음-마가복음-누가복음-요한복음도 순서대로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38장은 주전 710년경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 본문을 설명하면서 여러분에게 다뤄진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있습니다. 유다라는 작은 국가는 앗수르 제국과 전쟁에서 놀라운 승리를 거둡니다. 그래서 고대근동지방의 역사를 공부하는 모든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아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전쟁에서 승리한 결정적인 요인이 히스기야의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그 히스기야가 그렇게 기도하기 전에 하나님이 한 10년 전쯤에 그 일을 두고 히스기야에게 질병을 주신 것입니다. 죽을병을 주신 것입니다. 병을 걸리게 하신 것입니다. 이게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역사를 공부하면서 이런 비슷한 일들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종교개혁이 대표적이라고 봅니다. 마르틴 루터를 통해서 요한 칼빈, 쯔빙글리, 요한 낙스를 통해서 종교개혁이 확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종교개혁이라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을 이루기 위해서 종교개혁 100년 전부터 준비를 하셨습니다. 어떤 준비를 했냐면 로카 가톨릭이 갑자기 면죄부 같은 것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갑자기 범죄를 하고 하나님 앞에 죄악을 지은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독일의 성주들과 갈등을 빚는 사건들이 계속 일어났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었는데 그런 일이 갑자기 생겼습니다. 또한 로마 가톨릭 사제들은 충성심이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갑자기 로마 가톨릭에 반기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이 옳지 않다, 성전을 무리하게 건축하는 것, 백성들이 헌금을 무리하게 거둬가지고 이렇게까지 하는 것이 옳지 않다 라고 거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리고 인쇄술이 개발되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맞아 떨어져서 루터가 한 것이 아니라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딱 걸 때는 모든 하나님이 준비하신 섭리들이 맞아 떨어지는 때가 차매 입니다. 마치 그런 것처럼 히스기야에게 10년 전에 병이 걸린 것은 아주 중요한 하나님이 일하시고자 하시는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히스기야가 이런 병에 걸려 죽게 되었어요. 여러분 사람이 죽을병에 걸리면 얼마나 괴로워요? 저는 그런 분들을 진짜 많이 봤습니다. 특히 말기 암, 췌장암, 폐암 걸리신 분들 병문안 가고 그러면 얼굴 낯빛이 다 좋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 한 분 빼놓고. 그 장로님은 저보고 병원에 와서 예배 드려 달라고 해서 제가 갔는데 예배를 드릴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성령충만하셔서. 너무 찬송부르고 계시고 기뻐하셔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제 기다리던 천국에 간다면서 저보고 그러던 특이한 분 한 분 계셨고. 그 분이 정상이겠죠? 거의 대다수가 죽을병에 걸리면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래서 히스기야가 어떻게 했는지 보세요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_이사야38:6
그 때에 발라단의 아들 바벨론 왕 므로닥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 들었다가 나았다 함을 듣고 히스기야에게 글과 예물을 보낸지라_이사야39:1
- 얼굴을 성전의 벽을 향하고_이사야38:2-3
(2)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3) 이르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기억하옵소서 하고 히스기야가 심히 통곡하니_이사야38:2-3
이제 병 걸려 죽게 생겼으니까 진실과 전심으로 기도하는데 뭐라고 하냐면 하나님 내가 과거에 조금이라도 착한 일 한 것을 기억해달라고, 조금이라도 내가 선한 일 한 것 기억해달라고 전심으로 기도한 것 입니다. 여러분 죽음이 있으니까 히스기야가 전심과 진실로 기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죽음이 없었다면 죽을병이 아니었다면 히스기야는 히스기야의 인생에 하나님 앞에 진실과 전심으로 기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 당시의 왕, 아무리 작은 소국의 왕이라고 할지라도 고대 근동지방의 왕은 강력합니다. 그냥 우리처럼 대통령 선거제 이런 것이 아닙니다. 나라의 대장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조선시대에도 조그만 나라이고 이름도 없는 나라 조신시대에도 우리나라의 왕 이러면 얼마나 많은 시스템이 왕 주변에 있는지 아십니까? 왕이 병 걸려서 죽지 않도록 왕이 혹시 누가 독극물이라도 탓나 싶어서 음식 만들면 맛보는 신하들이 있었습니다. 미리 먹어보는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대변을 하거나 소변을 하면 그것을 맛보는 신하들도 있었습니다. 믿기지 않으시죠? 왕의 대변과 소변을 먹어보는 신하도 있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조선의 왕도 그러는데 이 당시의 왕들은 주치의부터해서 완벽합니다. 그러니까 병에 걸릴 일도 잘 없고 병에 걸려도 웬만하면 다 치료할 수 있을만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을 텐데 이건 진짜 해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병이 아닌 것입니다. 와서 유언장을 쓰라고 하니까 히스기야가 전심으로, 진실로. 그래놓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선한 거 한 것,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왕이 원래 선한 일을 많이 했냐? 그렇지 않습니다. 히스기야 전 조상들 왕,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 이런 왕들이 다들 악했습니다. 전부 예루살렘 성 안에 산당을 설치하고 우상을 설치하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관심 없고 제사만 잘 드려서 축복만 받으려고. 그것을 히스기야도 역사적으로 전통적으로 관습적으로 문화적으로 가지고 있는 왕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나마 히스기야가 조금이라도 산당을 제거해보려고 노력한 것은 아마도 정치적으로 인기를 얻기 위해서 그 종교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아마 여러분, 우리가 죄 이러면 성경의 하나님 말씀의 죄 보다 도덕적으로, 관습적으로, 특히 어른들은 옛날부터 살아온 어떤 전통을 가지고 죄에 대해서 혀를 끌끌 차고 이런 것은 전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 문화 속에서 죄를 가지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렇지 성경에서 말하는 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율법에서 말하는 죄에 대해서 우리는 솔직히 잘 모릅니다. 관심도 없습니다. 그게 왜 죄야? 우리 예배 잘 드리고 있는데? 여러분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었습니다. 토기장이가 계획하기에는 생선을 담으려고 길게 만들었습니다. 굽고 보니 생선을 닮을 수가 없네? 깨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릇 입장에서는 억울합니다. 생선 담지 않고 반찬 다른 것 담으면 돼지, 다른 그릇들 다 반찬 담고 있는데 왜 나를 깨? 그건 하나님 마음이에요, 토기장이 마음입니다. 죄가 그런 것입니다. 왜 깨냔 말이에요 하나님. 원래 생선 담으려고 만든 그릇인데 딴 짓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딱 그 죄입니다. 도덕적인 죄가 아닙니다. 남들 다 하니까 해도 되는, 남들 안 하는 거 하지 않으면 되는 그런 죄가 아니란 말입니다. 문화적인, 관습적인, 전통적인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생각했을 때 이 죽을병이 아니면 히스기야는 도저히 그것을 깨고 죄가 뭐라는 것,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수 있는 방법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깨우셨어야 했습니다. 왜? 그래야 남유다 이스라엘 백성 안에 기도하는 남은 자들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한 번이지만 하나님이 강력한 앗수르 군대를 물리치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후손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사용하셔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왕권이 강력했기 때문에 왕이 우상 들고 오면 백성들이 다 우상 섬겨야 됩니다. 왕이 우상을 치우면 백성들은 우상을 섬길 수가 없는 나라입니다. 우리와 다릅니다. 지금 시대와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히스기야를 깨우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죽을병에 걸렸는데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얼굴을 벽으로 향한다는 말은 죽을병에 걸려 있기 때문에 침대에 누워서 고개를 돌렸다 이렇게 뜻할 수 있겠죠. 그런데 아람어 성경에는 조금 다르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게 너무 궁금했습니다. 여기서 벽을 향하고 있는 이 벽이 어떤 벽인지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이 병이 치유 받고 나서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전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 때는 침대에서 벽으로 돌렸는데 아람어 성경에는 이 벽이 성전의 벽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어찌됐든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간절하고 전심으로. 여러분도 그러겠죠? 죽을병에 걸리면 진짜 간절해집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집사님은 암에 걸리셨는데 그 집사님이 그런 분인 줄 몰랐습니다. 암에 걸리니까 술, 담배를 딱 끊으시더라고요. 여러분 술, 담배를 끊으라고 그 가족들, 자녀들이 얼마나 기도하고 아빠 생일 때 금연프로그램 이런 것도 선물하고 이랬는데 암 걸리니까 그냥 끊었습니다. 강력하구나 암이. 죽음이 그렇게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신기합니다. 죽음이 늘 우리 앞에 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죽음이 늘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피부적으로 법적으로 의학적으로 우리에게 와있지 않으니까 안심하고 살 뿐이지 사실 죽음은 늘 우리 앞에 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교통사고로 죽을지, 병 걸려 죽을지. 솔직히 우리 모릅니다. 그런데 죽을병에 걸리니까 히스기야가 너무너무 간절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렇게 간절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간절함이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교회? 신앙? 간절히 사모하는 신앙이 그런 사라지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신앙에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공부가 왜 필요하냐? 우리 신앙생활 하다보면 어떤 신앙의 기준이 제 턱 까지 오는 기준이 있습니다. 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이 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이것을 깨고 올라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건, 계기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간절히 사모하고 흠모하는 기도와 사건들을 통해서 이 기준들이 높아져 가는 것입니다. 턱에 있는 기준이 제 눈높이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의 신앙이 이렇게 깊어지고 넓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공부를 통해서도 깰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성경을 공부하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공부하는 그 공부를 통해서 우리의 지경을 넓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것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아는 것에서 끝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천지차지입니다. 같은 단어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 설교를 듣는데 다 안다고 주일 날 고개를 끄덕끄덕합니다. 심지어 아멘 이러십니다. 그런 집 심방 가보면 아멘 한 분이 맞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제가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싶은데 설명할 것이 운동 같은 거 밖에 없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저희 교회가 볼링을 진짜 좋아해서 교회에서 볼링을 진짜 많이 쳤습니다. 청소년들이 볼링을 치면 점수 많이 나와 봤자 70-80점이 나옵니다. 엄청 굴려도 70-80점입니다. 그런데 저는 운동 신경이 조금 있어서 볼링 치면 100점정도 쳤습니다. 인기도 있었습니다. 볼링을 100점씩 치니까. 잘 치니까 어깨도 교만했습니다. 제가 고신대를 갔는데 신학과에 볼링 수업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의문입니다. 왜 신학과에 볼링 수업이 신학과 수업으로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볼링을 루터가 만들었다고 해서 건전한 취미를 가지라고 해서 신학과에서 지원을 해주는지 모르겠습니다. 볼링 수업 갔는데 교수님 이름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교수님이 우리 보고 볼링을 가르쳐주시는데 이상했습니다. 거부감이 들게 가르쳐주십니다.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너희들 공 굴러가는 거 신경 쓰지 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공이 어떻게 굴러가고 스핀을 어떻게 먹이고 이런 것에 관심이 있는데 그런 것 신경도 쓰지 말고 오직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왼팔을 쫙 펴고 오른팔이 귀까지 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오른쪽 다리를 뒤로 쫙 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렇게 10분씩 서 있게 합니다. 재미없고 지루하고. 시험도 중간고사 테스트도 이것으로 봅니다. 볼링으로 쳐서 점수가 높은 것으로 A, B, C 줘야 하는데 이 자세로 점수를 주는 것입니다. 대다수의 친구들 가운데 볼링을 잘 치는 친구들은 교수님 말 듣지 않습니다. 교수님이 볼 때는 하고 있다가 우리끼리 볼링 칠 때는 하라는 것 안 하고 자기들끼리 스핀하고 굴리고 합니다. 그런 친구들은 자기 점수 100을 넘지 못합니다. 신기합니다. 저는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볼링을 잘 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광주에 가면 볼링을 조금 더 잘 쳐서 볼링으로 인기도 얻고 내기도 해서 밥도 얻어 먹고 이런 마음이 있어서 볼링을 제대로 배워 보자하고 제 것을 다 내려 놨습니다. 제가 치던 방식을 다 내려놨습니다. 저 A+받았습니다. 교수님 앞에서 자세를 하고 있었습니다. 볼링 칠 때도 가르쳐준 자세대로 던집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제 마음대로 가지 않습니다. 옆으로 빠지고 끝에 한 개 맞고. 이상하다? 자세대로 했는데 왜 안 되지?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진짜 자세가 갖춰지면 어느 순간부터 점수가 확 늘 거라고. 그런데 신기하죠. 제가 또 그렇게 한 또 하나의 이유는 교수님한테 잘 보이면 점수를 잘 받으면 토요일에 토토볼링장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티켓을 주셨습니다. 남포동 토토볼링장이 크리스천이 하시는 볼링장이었는데 신학과 학생들을 조금 할인해서 해 주셨습니다. 저는 토요일에 또 볼링을 공짜로 쓰고 싶으니까 자세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신기하죠? 그 자세 배우고 나서 점수가 어느 순간부터 확 올랐습니다. 평균이 130-140-150 이렇게 올랐습니다. 제가 볼링이 잘 안 쳐질 때는 그 자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다시 자세를 회복하고 기본을 연습하면 또 그 점수가 나옵니다. 신기합니다. 여러분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합니까? 교수님이 이 자세를 이야기할 때 아이들이 다 예 알겠습니다 해놓고 실제로는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깨닫는 것은 그것을 토요일마다 가서 연습하고 그 자세대로 쳐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느 날 그 자세대로 쳤는데 공이 반드시 굴려가는 것입니다. 가운데 1번하고 3번이 맞는 것입니다. 스트라이크가 된 것입니다. 깨닫는 것입니다. 이거다. 그 뒤로는 교수님을 절대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한 개를 더 예를 들어볼까요? 제가 골프를 배우려고 하는 것은 아닌데 주은 전도사님에게 골프를 조금 배웠습니다. 골프를 배우는데 골프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사님이 뭐라고 뭐라고 저한테 잔소리를 합니다. 목사님 고개를 들지 말라니까요? 채를 떨어뜨리라니까요? 뭘 떨어뜨리라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채를 던지라니까요? 채를 어디에 던지라는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말은 알아먹습니다. 알겠어, 잔소리 그만해. 그런데 깨닫지는 못한 것입니다. 제가 시간이 여유가 있어서 골프 연습장에 가서 전도사님이 가르쳐 준대로 계속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어느 날 나도 모르게 공이 힘 빼고 가르쳐 준대로 쳐지고 그 연습이 내 몸에 체득이 되어서 그 자세로 쳤더니 공이 반드시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깨달음이라고 합니다. 전도사님이 해 준 말이 맞구나. 그거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저희 아들 한빈이가 수영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토요일에만 수영을 갑니다. 일주일동안 공부하는 것, 엄마 아빠한테 혼나는 것, 잔소리 듣는 것, 모든 스트레스를 수영으로 푸는 아이입니다. 그날만 기다립니다. 심지어 집에서 목욕할 때도 좁은 욕조에서 물 받아서 수영 연습하는 아이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이 하는 이야기를 한빈이가 다 이해하고 들어요. 그런데 저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왜? 수영을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제가 어른이니까 더 잘 알아 먹겠잖아요? 체대 다니는 수영강사가 하는 이야기를 제가 더 이해를 많이 하겠는데 한빈이는 깨달았지만 저는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엄청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은 공부를 하지 않으면 깨닫지 못합니다. 계속 내가 가지고 있는 내 지식, 내 경험에서 계속 맴도는 것입니다. 내 문화, 내 주변의 전통, 관습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그런 이야기 많이 합니다. 나도 옛날에 많이 해봤어. 나도 옛날에 성경 읽어봤어. 그러면서 오늘은 안 읽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 수준으로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나는 성령충만 받아봤어. 언제요? 과거에요? 신앙이 거기에 멈춰 있는 것입니다. 그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어디선가 다윗이 했던 이야기도 들었고 우리 조상들이 지은 죄에 대해서도 다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별이 어려웠습니다.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죽을 병이 걸려서 성전 벽 앞에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동안과 다른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한 것입니다. 이 죽을병은 히스기야에게 어떤 거예요? 축복이었습니다. 연약함인 줄 알았는데 강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그때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이 히스기야에게 이런 답변을 보냅니다.
-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_이사야38:4-8
(4)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5)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6)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7) 이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너를 위한 징조이니 곧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을 그가 이루신다는 증거이니라 (8)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_이사야38:4-8
4-5절. 무슨 말이에요? 질병을 주신 하나님이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었고 히스기야의 눈물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만약에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히스기야가 만약에 눈물로 심히 통곡을 하지 않았다면 히스기야 병은 거기서 끝납니다. 죽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아무리 많이 듣고 이해하고 아멘 해도 실제로 엎드려 기도하지 않았다면 히스기야는 병이 치료 받았다기보다는 15년 생명연장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중요합니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릅니다. 그래서 유명한 사건입니다.
6절. 이 사건이 앞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절입니다. 물론 결정적으로 이 사건이 10년 전의 사건이라는 것을 예측하는 것은 이사야 39:1 바벨론 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그 왕의 때와 이스라엘 역사의 때가 자료를 통해서 확인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38장 사건이 36-37장전에 있었던 사건으로 보는 것입니다. 6절에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이 성을 보호하리라고 하나님께서 예견하십니다. 그러면서 징조를 보여주십니다. 내가 15년을 연장해줄 건데 그 징조로 해시계의 그림자를 뒤로 물러가게 한다고 하십니다. 이런 사건이 많았습니다. 가나안 정복 할 때도 이런 사건이 있었고 이런 기적이 성경에는 진짜 많습니다. 해가 멈추고 달이 멈추고 광야에서 물이 나오고 이런 기적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흔한 기적들입니다.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에 히스기야가 부르는 시편, 노래에 담겨 있습니다. 히스기야는 해가 뒤로 십오도 불러 간 것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징조가 자기한테는 별반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해가 뒤로 십 도, 십오 도 물러나는 것이 중요해요? 내가 살았다는 것이 중요하지. 내가 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뭐에요?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천국이 진짜 있고 지옥이 진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거예요. 히스기야가 그것을 깨달았어요. 오늘 히스기야의 노래에 그 내용들이 나옵니다. 내가 잘못했으면 스올에 들어갈 뻔 했구나, 내가 지옥에 들어갈 뻔했구나. 내가 잘못했으면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한 상태로 스올의 문턱을 넘어설 뻔 했구나.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천국의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인간에게 진짜 기적은 내세,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우리 인생에 가장 큰 기적입니다. 태양이 멈추고 달이 멈추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다. 죽을병이 다시 살아나고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히스기야가 그 때 그 병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새 사람이 된 것이 진짜 기적인 것입니다. 오늘 그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실 어떻게 보면 히스기야의 병은 진짜 큰 약함입니다. 생각해보세요. 한 나라의 왕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이 병이 걸릴 때가 38-39세입니다. 왕위를 이을 자식도 없을 때입니다. 비참합니다. 그 당시의 나이로 중년의 때입니다. 왕위를 이을 자식도 없을 때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사람들 보기에 창피하고 쪽팔리고 해놓은 것 하나도 없는데 죽을병에 걸려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왕이 죽을병에 걸리면 난리가 날 것입니다. 주치의라든지, 신하들이라든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난리법석을 폈겠어요. 그렇게 약한 것입니다. 인간은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어도 질병 앞에 죽음 앞에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다 죽음이라는 것을 두고 살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 병을 통해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깊이 만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연약함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질병이 아니더라도 돌 같은 내 인생 혹은 캄캄한 동굴 속에 있었던 다윗처럼 그런 약함들. 내 인생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들. 우리에게는 그게 약함 같이 보입니다.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누구에게 말하기 힘든 가정의 상황들, 내 영적인 질병들, 부족함들. 이게 내 안에 다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약할 때 강하신 하나님을 만날 기회입니다. 능력의 하나님을 체험할 기회입니다. 천국을 깨달을 수 있는 기회로 하나님이 우리 인생 중에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께서 그런 기회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돌 위에 기름을 부었더니 거기가 하나님의 집이 되어버립니다. 훨씬 훌륭한 도시도 있고 대도시도 있고 훨씬 성도 많고 한데 그 돌 위에 예수님이 나오셨습니다. 태어나셨습니다. 여러분 히스기야가 이 병을 고침 받고 이렇게 노래를 부릅니다. 여러분 다윗의 노래, 시편 많죠? 모세의 노래도 있잖아요? 히스기야도 한 편의 노래가 있는데 이게 이사야 38:9-20입니다.
Ⅲ. 히스기야가 부른 구원의 노래_이사야38:9-20
(9) 유다 왕 히스기야가 병들었다가 그의 병이 나은 때에 기록한 글이 이러하니라 (10) 내가 말하기를 나의 중년에 스올의 문에 들어가고 나의 여생을 빼앗기게 되리라 하였도다 (11)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리니 산 자의 땅에서 다시는 여호와를 뵈옵지 못하겠고 내가 세상의 거민 중에서 한 사람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12) 나의 거처는 목자의 장막을 걷음 같이 나를 떠나 옮겨졌고 직공이 베를 걷어 말음 같이 내가 내 생명을 말았도다 주께서 나를 틀에서 끊으시리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13) 내가 아침까지 견디었사오나 주께서 사자 같이 나의 모든 뼈를 꺾으시오니 조석간에 나를 끝내시리라 (14) 나는 제비 같이, 학 같이 지저귀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내 눈이 쇠하도록 앙망하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압제를 받사오니 나의 중보가 되옵소서 (15)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고 또 친히 이루셨사오니 내가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 내 영혼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신토록 방황하리이다 (16) 주여 사람이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있사오니 원하건대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 (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18) 스올이 주께 감사하지 못하며 사망이 주를 찬양하지 못하며 구덩이에 들어간 자가 주의 신실을 바라지 못하되 (19)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 주의 신실을 아버지가 그의 자녀에게 알게 하리이다 (20)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_이사야38:9-20
10절. 스올은 지옥을 상징합니다. 죽음 앞에 내 여생을 빼앗길 뻔 했다는 것입니다.
11절. 죽음을 두려워하는 고백입니다.
12절. 끝났다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끝났다는 것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끝내신다는 것입니다.
13-14절. 그러면서 뭐라고 고백합니까?
15-17절. 사람이 다 한 번은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만 우리의 영혼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히스기야가 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큰 고통 같은데 평안을 주려고 한데요. 여러분 고통스러워서 밤새 지저귀처럼 울었던 사람이 고통스러워서 방황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평안을 얻은 것입니다.
18-19절. 산 자. 두 번 반복합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해요?
20절. 있을 수 있나요? 지금 히스기야가 해가 뒤로 물러가고 해 그림자가 멈추고 이런 기적을 노래했나요? 아니죠. 그것은 기적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것이 기적입니다. 지옥에 가지 않은 것이 기적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것으로 인해서 내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이다. 히스기야가 이렇게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변화된 것입니다. 놀랍습니다. 죽을병에서 고침 받은 이후 히스기야가 자기의 경험을 글로 쓰고 그게 노래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자손들에게 이 노래를 들려주려고. 여러분 제가 그랬습니다. 그 당시의 노래는 요즘 나오는 유튜브나 인터넷에서 나오는 귀에 듣는 노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노래는 삶이고 문화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그 고난 중에 수많은 시편을 기록하고 그것을 다 곡을 붙여서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자녀들에게 전달하려고. 지금 히스기야의 노래는 히스기야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이전에는 그냥 조상들 왕을 따라서 살다가 정치적으로 산당을 제거하면 인기 좀 있겠네? 이정도의 정치를 했던 사람이 이 고침 받은 이후에는 산당을 본격적으로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상을 본격적으로 제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에는 아무런 생각 없이 그냥 문화적으로 전통적으로 훌륭한 왕이 되려고 했다면 이 경험 뒤에는 하나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예배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엎드리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죽음 앞에서 사람이 얼마나 나약하다는 것을 경험했고 그리고 그 죽음 앞에 빛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남유다의 왕이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들었겠어요? 다윗의 이야기, 율법, 모세오경. 얼마나 많이 들었겠어요? 그런데 그게 하나도 자기 것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죽음이라는 질병 앞에 그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위기, 남유다가 앗수르이 공격을 받을 때 히스기야가 잠깐의 실수도 하지만 그래도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전에 이렇게 히스기야 개인의 신앙을 준비하신 사건 때문이라는 것.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여러분 히스기야가 죽을병에서 고침 받았는데 죽음에서 완전히 건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유예된 것 뿐 이에요. 15년. 15년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히스기야에게 굳이 말 안 해도 될 법 한데 불안해하고 걱정하고 이러니까 말해주신 것 같습니다. 우리 인생도 15년이 남은 지, 20년이 남은 지, 30년이 남은 지 우리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때와 기한이 정해졌다고 그랬습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히스기야처럼 죽게 됩니다. 그 죽음이 그 질병에서 살아남은 것이 남은 15년을 15일처럼 짧게 생각이 될 수도 있지만 150년 사는 것처럼 알차게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알차게 살았는지 그 알찬 인생의 핵심은 하나님의 전에서 여호와를 예배하고 찬양한 것입니다. 구원의 노래를 부르고 그 구원의 노래를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너무 중요합니다. 히스기야는 죽음 앞에 서서 죽음을 실제로 느끼고 생각하고 인간의 나약함과 자기의 약함을 철저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약함을 깨달을 때 무엇을 깨닫게 되냐면 하나님의 강함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의 하나님임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심과 진심으로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구원은 거기서 나옵니다. 신기하죠? 여러분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 믿을 때 우리가 예수님 믿고 이런 최첨단 시대, 문화가 발전된 시대에 교회를 다닌다? 기적 같은 일입니다. 다들 교회 다닐 때 사람들에게 말은 못하지만 내 개인의 문제들, 어떤 영적이 어려움들, 가정의 문제들, 질병들. 이런 것으로 예수님을 믿기 시작합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다 그렇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경험하는 것을 다 배웁니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우리인생이 질병을 고침 받은 것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히스기야처럼. 우리가 신앙을 공부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해서 우리가 이것을 높여 가야 합니다. 이것을 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체험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굉장히 커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공부하지 않고 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다 안다고 이야기하는데 알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을 다 안다고 합니다. 복음 다 안다고 합니다. 완전 복음, 복음을 완전히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모릅니다. 그러니까 전혀 복음적인 삶이 아닙니다. 그것은 복음을 아는 거지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학교 후배들이 완전 복음, 오직 예수 이런 것을 이야기합니다. 이제 신학생들이. 이제 신학교 다니고 있는 친구들이 막 어른들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완전 복음이 어쩌고저쩌고 이럽니다. 남을 함부로 평가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은 작은 사소한 문제 하나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다가 사라진 아이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완전 복음이라고 했다가 자기 인생에 찾아오는 그런 죄의 문제, 유혹이라든지 이런 것 때문에 삶이 무너진 아이들을 너무 많이 봤습니다. 아예 복음을 떠나고 하나님을 등지고 외면하는 친구들도 봤습니다. 그게 완전 복음입니까 여러분? 아는 것이지 체험한 것이 아니잖아요. 깨달은 것이 아니잖아요. 우리가 약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강함을 드러내려고 합니다. 내가 강함을 들어내면 하나님의 강함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내 신앙은 내 수준의 강함 늘 여기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것이 강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알고 있는 이것이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깨주시기를 원합니다. 깨야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한 것 다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위대한 신앙인들은 믿음의 사람들은 큰 굴곡진 인생을 산 것입니다. 문제가 너무 많은 것입니다. 너무 많아서 주변 사람들이 어쩌냐 할 정도로. 그런데 야곱처럼 다윗처럼 크신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깨닫고 나서는 완전 다른 인생을 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임마누엘. 이것은 엄청난 사건인데 이것을 깨닫는 사람, 정말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그것을 지식으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지. 이거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지식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자기가 자기 입으로 이야기하고 다녀요? 자기 입으로 하나님 나와 함께 하셔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함께 하시지 않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릇을 깨버리시면 끝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은 완전 다른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하시는 삶을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내 연약함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삶이에요. 여러분 우리는 강함이 아니라 약함을 가지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내 연약함을 고백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게 참 힘듭니다. 죄가 그렇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교만하고 오만하기 때문에. 그래서 자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약함을 발견하는 것이 축복입니다. 우리 교회 성도님들 중에서도 어려운 일을 겪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저 가정 어떻게 하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 어떤 분들은 그런 어려움을 창피해하지 않고 목사님 저 진짜 신앙생활 잘해볼게요 도와주세요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애쓰고 정말 애써서 하나님 앞에 가려고 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그러면 그 어려움이 절대 그 사람에게 어려움이 아닙니다. 신앙이 단단해집니다. 믿음이 견고해집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너무 인생이 잘나가는 것입니다. 인생이 잘 나가서 기도하고 의지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면 그 잘나가는 인생은 그 사람에게 저주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을 살면서 내가 직장생활 승진도 잘 되고 인생이 잘 풀려서 내가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러면 인생 잘 풀린 것이 축복 같죠? 이 땅에서는. 그 인생이 천국을 깨닫지 못한다? 잘 나가는 것이 저주입니다. 아이들이 청소년 아이들이 유명한 대학교, 유명한 회사 취직하려고 노력하잖아요? 그런 것을 하는 동안에 마음에 예수님을 모르고 예배 시간에 은혜 받는 것 다 놓치고 살면 그것은 저주입니다. 왜냐 그것은 내세를 모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내세가 진짜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죽음 뒤에 천국과 지옥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은 저주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뭐가 진짜 축복인지.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들을 주시기도 합니다. 제가 폐암, 췌장암 암 걸리신 분들 병문안에 가면 다 얼굴빛이 잿빛입니다. 그런데 한 분 장로님 그 분은 저보고 예배를 드려달라고 했습니다. 병문안을 가려고 하는데 예배를 드려달라고 하시는데 제가 무슨 설교를 해야 할지 모르겠었습니다. 5-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으신 분이었습니다. 1인실이었는데 병원 방문을 여는 순간 그 근심이 사라졌습니다. 들어갔더니 천국인 줄 알았습니다. 장로니 얼굴이 너무 밝고 찬송 부르고 성경 읽고 계셨습니다. 아유 뭘 또 괴로운 인생에 계속 사시는 목사님이 곧 천국 갈 사람을 위로한답시고 내가 위로해야 되는데 이러셨습니다. 그 장로님 병원에서 뭐하신 줄 아세요? 평소 전도하고 싶은 사람들 다 불렀습니다. 그래서 슬프지 않은데 괴롭지 않은데 괴로운 척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야 내가 진짜 이 암에 걸리니까 너무 힘들고 어려운데 네가 내 소원 하나 들어달라고. 예수님 믿으라면서. 그거 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진짜 믿은 것입니다. 축복입니다. 그 분에게 암은 축복입니다. 우리는 다 암을 저주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볼 때 그분은 정말 정말 행복한 여정을 살고 가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어려움이라는 것, 우리의 나약함 이라는 것, 하나님이 돌 같은 내 인생에 기름을 부으시니까 거기가 하나님의 집 벧엘이 됩니다. 깨닫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한계를 가지고 살면 안 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그런 은혜로 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제가 인도에 갔다 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이 찬송을 펴고 사람들 다 옆에 있으니까 부를 수는 없습니다. 찬송가 위에 눈물이 뚝뚝뚝뚝 떨어집니다. 성경 읽다가 찬송가 94장을 마음 속으로 부르는데 눈물이 뚝뚝뚝뚝 떨어집니다. 주 예수보다 귀한 것은 없네. 제가 그 전에는 불평하고 나는 왜 이런 집에 태어났냐, 나는 머리가 왜 이렇게 나쁘냐, 해도 해도 되는 것이 없냐 이러던 사람이 인도에 갔다 오면서 얼마나 은혜를 많이 받았는지 완전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내 남은 인생 하나님 앞에 쓰임 받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작은 것에라도. 크게 쓰임 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저한테 그러셨습니다. 내가 너를 통해서 할 일이 없겠냐. 여러분 히스기야의 노래가 바뀌었습니다. 그 전에는 훌륭한 왕이 되겠다, 능력 있는 왕이 되겠다, 나의 강함을 드러내는 왕이 되겠다라고 노래를 불렀겠잖아요. 그 시절 왕에게는 다 노래가 있었겠으니까. 그런데 죽을 병 뒤로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그의 인생에 노래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여호와의 전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구원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에 구원의 노래로, 천국을 흠모하고 사모하고 사는 삶이라면 이 땅에서의 삶은 어떨까요? 전혀 다른 삶을 살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고 살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문화와 전통에 휩쓸려 살지도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건강한 멋있는 삶,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훌륭한 삶을 살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겠죠. 천국을 진짜 믿고 천국에 입성했을 때 하나님의 면류관을 받으려고 하니까. 여러분 그런 노래를 부르는 멋진 하나님의 백성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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