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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1-05-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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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5월 23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2부예배)
제 목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본 문 이사야 37:1-20

 

 오승주 목사

 

Ⅰ. 자기 옷을 찢고_이사야37:1-2

 

이사야 37장 말씀이 히스기야의 본문 말씀이 나옵니다. 굉장히 유명한 부분입니다. 이사야 설교를 하시면서 목사님들이 많은 설교를 했던 본문입니다. 사실 옛날에 어렸을 때 히스기야에 대한 설교를 들었을 때는 히스기야가 믿음의 사람이다, 믿음의 왕이다, 언약 붙잡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응답하셨다 이런 내용을 많이 들었는데 이사야를 하나하나 설교하다 보니까 또 제가 이번 주에 37장을 설교준비를 하려고 읽으면서 두 가지의 감정을 느꼈습니다. 하나는 제 손 발이 약간 오그라드는 감정이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어쩜 이렇게 뻔뻔할 수 있을까. 왜냐하면 불과 작년 만해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작년만 해도 앗수르와 우호정책을 펴고 애굽에 사신을 보내고 애굽을 의지했습니다. 많은 다른 정책을 폈는데 오늘 갑자기 하나님 앞에 주 만이 여호와인줄 이렇게 기도하니까 엄청 손발이 오그라 들었습니다. 이럴 수 있구나, 이런 상황이구나. 그런데 또 하나 느끼는 것이 뭐냐면 하나님이 그런 기도에도 너무 기뻐하시고 응답하신다는 것입니다. 뭐냐면 우리 신앙은 조금 뻔뻔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한 줄 아시고 우리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당신 앞에 나오는 것을 다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인것도 아시고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하고 혹은 낙심하고 있는 것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 앞에 나아오기만 하면 당신을 바라보기만 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그 마음을 돌이키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탕자의 비유를 통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내 자식이 나에게 어떤 배신감을 주고 나에게 어떤 나쁜 짓을 했든지 상관없습니다. 그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자기 죄를 자복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신앙은 굉장히 뻔뻔해야 합니다. 사단은 하나님 앞에 가지 못하도록 우리의 체면, 입장, 인간관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가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 그런 분들이 진짜 많이 있습니다. 저희 교회에도 그런 분들이 몇몇 계십니다. 목사님, 제가 교회 나가기 창피하다고, 내 삶이 창피하다는 거예요. 내가 너무 지은 죄가 많아서, 교회가기 힘들다고 합니다. 제가 그래서 오시라는 것입니다. 죄를 많이 지으셨으니까 예배 나오셔서 은혜 받으시라는 거예요. 그게 잘 벗어내기가 힘든가 봐요. 내가 너무 창피해서 교회를 못 가겠다고 합니다. 그것은 굉장히 겸손하신 것 같고 맞는 말 같지만 틀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의지하고 바라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신앙은 100번 넘어지면 101번째 일어나서 하나님 바라봐야 합니다. 1,000번 넘어지잖아요? 우리는 그런 실수를 할 수 있습니다. 10,000번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럼 또 일어나야 합니다. 또 일어나서 하나님 품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시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히스기야 왕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에 가장 가까운 모델입니다. 아주 완벽한 사람도 아니고 대단한 실력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히스기야가 하나님이 보실 때는 굉장히 못 됐고 우리 인간이 보기에도 되게 부끄러운 짓을 많이 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했습니다.

 

(1) 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2)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굵은 베 옷을 입으니라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_이사야37:1~2

 

신하들이 히스기야 왕에게 랍사게의 이야기를 전달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히스기야가 바로 취한 행동이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습니다. 자기 옷을 찢는다는 것은 지금과는 다릅니다. 지금은 옷으로 신분을 확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대 근동은 옷으로 특히 외투로 신분을 다 확인했습니다. 이 사람이 귀족인지, 이 사람이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인지, 이 사람이 천민인지 이런 것을 전부 옷으로 판단했습니다. 옷을 함부로 입지 못했습니다. 옷을 찢는다는 말은 내 신분을 다 찢고 내가 가난하든 부자든, 빈부 이런 것과 다 상관없이 내가 어떤 직책을 맡던 하나님 앞에 갈 때는 이것을 찢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회개하라고 하실 때 회개를 이야기하실 때 자기 옷을 찢으라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옷을 찢으라는 것입니다. 네 발에 신을 벗으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굵은 베 옷을 입으라고 합니다. 이것은 장례 치르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런 절망의 순간을 의미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하나님 밖에 없다, 기도 말고는 할 게 없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자기 옷을 찢고 베옷을 입고 어디로 갔냐면 여호와의 전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갔습니다. 하나님 보좌 앞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2절에 보니까 굉장히 중요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지도자들, 관료들, 이런 서기관이라든지 제사장들 어른들을 전부 다 회개시키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도자 한 사람이 엄청 중요합니다. 나라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습니다. 가정도 지도자가 있습니다. 부모가 있고 아버지가 있습니다. 아버지 한 사람의 입장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특히 교회는 목회자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특히 한국교회의 목회자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생각하면 목회자, 지도자는 엄청 중요합니다. 이 지도자가 예를 들어서 그릇된 길을 가면 그 지도자 속에 속해있는 공동체 일원들은 어떤 분별력이 없이 그릇된 길로 가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맹목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대표적인 것이 중세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세교회 때 어떤 일들이 진짜 많이 일어났냐면 국가와 종교 간의 권력다툼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들이 자기의 세력들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 것이 뭐냐면 성전을 지은 것입니다. 지금도 유럽에 가면 모든 관광지가 다 몇 천 년 된 성들입니다. 그것을 지어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회의해서 만들어 낸 것이 면죄부입니다. 이 면죄부가 얼마나 웃기냐면 처음에는 면죄부를 살아있는 사람에게만 판매했습니다. 면죄부가 얼마인데 이것을 사면 너희 죄 사함을 받을 수 있어, 말 그대로 죄를 면해주는 증서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 팔고 나도 성전 지을 돈이 부족한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잖아요? 그래서 만든 것이 뭐에요? 너희 조상의 죄도 면죄부를 사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돌아가신 너희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가 아직 천국에도 못 가고 지옥에도 못 가고 연옥이라는 곳에 있다. 그래서 이 면죄부를 사면 천국으로 갈 수 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식적이지도 않은 그런 내용들을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만들어서 팔았습니다. 무지한 성도들은, 성경을 읽지 못하는 성도들은 신부들의 말에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수많은 면죄부를 샀습니다. 덕분에 아름다운 성전은 지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여러분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성도들이 예배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면 충분합니다. 깨끗하고 정갈하고 우리가 예배드리는데 불편 없는 정도의 성전만 지으면 됩니다.  여러분 유럽 교회 가보셨죠? 물론 관광수입으로 돈은 많이 벌지 모르겠지만 과합니다.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세력을 나타내는 것이었습니다.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교황이나 신부들, 지도자들의 그릇된 신앙의 그런 것들이 많은 성도들을 그릇된 길로 가게 만들었습니다. 무섭습니다. 여러분 너무 무섭습니다. 성도들이 대부분 설교, 메시지를 듣고 따라갑니다. 목사들이 바르게 하나님 앞에서 눈물로 기도하고 정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목회를 하면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 맞지만 만약에 그렇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목회자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목회자들이 갑자기 야망이 생기거나 갑자기 그릇된 어떤 정치적이거나 그런 목적들이 생기면 성도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를 드리는 것입니다. 가스펠교회 성도님들은 성경을 더 읽으셔야 합니다. 목사의 설교보다 성경 읽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셔야 합니다. 그게 너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맹목적으로 다 따라가서 다 같이 죽습니다. 여러분 혹시 제가 그렇다면 여러분 저를 떠나셔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제가 그런 목회를 한다면 과감히 떠나셔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내 영혼이 천국 가는 것이 훨씬 중요하고 구원 받는 것,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선악이 구별 되는 시절이 있었습니다. 진리다, 비진리다 이게 맞고 틀리다는 이게 구별되는 시대가 있었는데 요즘은 진짜 헤깔리는 것입니다. 전체가 다 맞는데 맞는 것 속에 틀린 경우가 조금 섞여 있습니다. 이건 진리인데 진리 속에 비진리가 섞여있습니다. 요즘은 이런 혼재된 사회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얼마나 헤깔리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 교단도 그렇습니다. 저 교단은 굉장히 보수적인 교단이야, 보수적인 교단인데 뒤에서 어떤 사건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면 그것과 전혀 상관없는, 건강한 신학과 상관없는 전혀 생뚱맞은 문제들이 그 안에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분별하고 어디를 따라가야 될까? 이게 너무 헤깔리는 부분들이 너무 많은 시대를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회개라는 단어를 가장 많이 말씀하시는 그룹이 있는데 그게 지도자 그룹입니다. 구약의 회개는 대부분 제사장, 선지자, 왕이나 이런 리더들에게 주는 메시지가 훨씬 많습니다. 평신도들에게 회개하라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거의 대다수가 지도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쉽게 이야기하면 목사가 회개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목회를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지도자들이 회개라는 삶이 없으면 건강하고 올바르게 지도자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교회 뿐 만이에요? 나라도 그렇습니다. 대통령 한 사람, 권력자 한 사람의 영향력이 얼마나 큽니까. 여러분 지금 남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유다 지도자들이 깨어 있었다면 우상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했었다면 남유다 백성들은 갈등자체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남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긴 것이 아닙니다. 왕이 지도자들이 우상을 섬기고 세상을 의지하고 쾌락을 탐하다 보니까 그 행정이나 시스템도 다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을 뭐라고 그래요? 공범이라고 합니다. 절대 혼자 하지 않습니다. 평신도들은 쾌락을 범하고 타락하더라도 영향력이 거기서 끝납니다. 나 혼자에서 끝납니다. 그런데 국가 지도자들이 타락을 하고 우상을 섬기면 국가 전체적으로 그렇게 만들어버립니다. 여러분 지도자가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가정도 그렇잖아요. 엄마 아빠가 가정의 어떤 어른이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면 가정은 올곧게 갑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부모님이 올곧은 길을 놔버리고 문제를 일으킨다던지, 어떤 도덕적이지 않은 행동을 한다든지 그러면 그 가정은 굉장히 어렵게 가겠죠. 여러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남유다의 지도자들이 깨어있었다면 백성들이 우상을 함부로 섬기고 했을까요. 여러분 왕, 제사장, 선지자들이 하나님 앞에 서 있었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섬기고 이러는 것을 가만히 두고 봤을까요?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깨우려고 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뭐라고 하냐면 어른들도, 왕도.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쉽지가 않습니다. 왜 목사들이 회개하기 어려운지 아세요? 예를 들어서 제가 설교를 합니다. 주중에 저는 반드시 복기합니다. 설교를 복기하다 보면 실수했구나, 잘못 말했구나 그러면 다음 주에 반드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지난 주 설교의 어떤 부분을 제가 그릇된 정보를 전달했습니다. 제가 이런 실수를 했습니다. 그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목사들이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뭐가 있기 때문에? 자존심이 있기 때문에, 체면이 있기 때문에. 우리 교회가 큰 교회가 아닙니다. 주일에 출석 백 몇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교회인데도 예를 들어서 제가 가끔 전도사님들과 같이 청소하고 일하고 이러면 진짜 거의 그런 생각이 들지 않지만 가끔 그럴 때가 있습니다. 내가 꼭 이것까지 해야 돼? 같이? 알아서 해주면 안 돼?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제 마음에. 꼴에 담임목사라고 꼴에 나이가 좀 더 많다고. 저도 그런 마음이 들 때 순간적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저 같은 작은 조직의 리더도 그런 마음이 있는데 큰 조직의 리더들, 대통령들.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만약에 리더들이 회개한다? 기적이 일어나겠죠. 반성한다? 기적이 일어나겠죠. 그럼 백성들은 어떻겠어요? 존경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나라 대통령이 자기의 과오를 반성하고 자기의 지난날의 삶들을 회개하고 우리 백성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이렇게 가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한 번도 그런 대통령이 없습니다. 전부 다 감옥 갔습니다. 단 한명도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왜 안 되냐면 경험이라는 것 때문에 잘 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경험들, 내가 그동안 살아왔던 지식들, 쌓였던 지식들 그것 때문에 어른들이 여호와 앞에 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저는 청소년수련회를 많이 해봤습니다. 수련회 하면 둘째 날 저녁에 기도회를 인도합니다. 아이들은 뜨겁게 한 시간씩 눈물로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난리입니다. 그런데 기도회 딱 시작하면 제일 먼저 일어나서 나가시는 분들이 다 목사님들입니다. 다 나갑니다. 왜 나갈까요? 희한합니다. 제가 수련회 인도를 십 몇 년을 했는데 그 현상을 한 번도 보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기도회하면 다 일어나서 나가십니다. 그래서 아예 먼저 이야기를 합니다. 어른들 먼저 나가세요. 기도를 한 시간정도 할 거니까 중간에 나가실 분들 미리 나가세요. 그 말은 무슨 말이에요? 어른들이 나는 옛날에 다 기도했어. 이거는 아이들이나 하는 기도야. 우리가 이렇게까지 기도해야 돼? 굳이? 우리는 다 알고 있는데? 무슨 말이에요? 여러분 반대로 생각해보세요. 진짜 위험한 생각입니다. 아이들이 변화되기를 원하고 이 청소년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고. 그러면 어른들이 같이 기도해주고. 자기들도 성령 받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정상이잖아요? 말씀을 들었으면. 그런데 다 일어나서 다 나갑니다. 이상합니다. 여러분 지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어른들이 굵은 베 옷을 입고 히스기야 왕이 옷을 찢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다. 이것은 진짜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정말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믿음은 실제를 동반합니다. 이 실제는 다른 말로 말하면 행합니다. 믿음은 행함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것은 행함이 동반되어야 그 행함에 따라서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그래서 믿음과 행함이 분리된 단어가 아닙니다. 믿음은 행함이 포함된 단어라고 인식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이야기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죽어버린 믿음이라고 합니다. 쓸모없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를 진짜 많이 듭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을 이야기할 때 독자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것, 그것 없이 어떻게 믿음을 이야기할 수 있냐? 기생 라합이 여리고가 타락해서 곧 무너질 것을 믿기 때문에 정탐꾼 두 명을 숨겨주지 않았냐? 그것을 믿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아니냐? 믿음은 그런 행함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의 행위들이, 행동들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를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습니다. 제가 공부하고 있는 것이 부흥입니다. 제가 공부하고 책도 쓰고 싶은 주제입니다. 그래서 제가 궁금해서 우리나라 70, 80, 90년대에는 어떤 설교를 목사님들이 하셨나 어떤 메시지들이 나왔나 이런 것을 찾아보고 듣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여러분에게 원종수 권사님 음성도 들어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자료가 많지 않습니다. 70년대는 음성이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녹음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80년대쯤 되면 이제 막 지지직거리는 설교들이 남아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복원 되서 유튜브에 올라오고 있는데 거의 듣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경배와 찬양 이런 찬양들도. 옛날에 훌륭한 시스템이 있었나요? 스피커, 믹서가 없던 시절이니까 아주 듣기가 거북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의 설교를 요즘 듣고 있는데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합니다. 설교가 허접하시다. 그 당시의 설교가 너무 허접합니다. 구성도 허접하고 논리적이지도 않고 설교에 쓰는 단어들도 원색적입니다. 예수 믿고 천국가자는 것입니다. 천국을 소망하자는 것입니다. 지금은 신학이 엄청 발달했습니다. 그리고 인터넷이라든지 이런 곳에 엄청난 많은 설교의 자료들이 있고 또 그 당시를 비교해서 우리나라에 신학서적이라든지, 번역된 신학서적이 백배 이상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설교들은 그 당시의 설교에 비하면 이 설교를 대학교를 다니지 않고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렵고 난해합니다. 우리 한국교회 설교가 얼마나 난해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런 설교를 더 즐겨 듣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희열을 느끼는 부분이 뭐냐면 설교가 이렇게 전개가 되다가 끝에 나가서 이렇게 결론을 맺네? 이런 것에 희열을 느낍니다. 그런데 70년대, 80년대 설교는 다 원색적입니다. 우리 예수님 믿으십시다. 우리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합시다. 이런 설교가 끝입니다. 그게 논리적으로 희열을 주는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에 성도들이 반응하고 성령이 임하고 회개하고 심지어 이렇게 설명하면 될까요? 하나님의 능력. 이것을 지금은 하나님의 능력을 신학적으로 설명하고 성경에서 그런 내용들을 찾아서 논리적으로 성도들에게 설명합니다. 그런데 그 시절에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단어도 잘 쓰지 않았습니다. 그냥 예수 믿는 것, 예수 보혈의 피가 너무 감사하데요. 그런데 성도들의 삶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을 너무 잘하는데 성도들의 삶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제가 그 부분이 너무너무 궁금했습니다. 왜 이렇게 다를까? 하나 찾아낸 것이 있습니다. 물리적인 시간입니다. 그 당시에는 우리나라가 너무 힘들고 어려운 시절입니다. 밥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입니다. 기록에 보니까 어떤 지역에서 부흥회가 있는데 부흥회를 가려고 도시락 두 개씩 싸서 40km를 갔습니다. 요즘은 여러분 40km를 부흥회 가려고 걸어서 간다고 하면 미쳤다고 하겠죠? 요즘은 400m도 잘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주머니들이 40km를 걸어서 부흥회를 간 기록도 있습니다. 도시락 싸서 먹어가면서. 저녁 부흥회를 참석하고 돌아오면 새벽이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사모하고 갔는지. 얼마나 사모한 마음으로 그 부흥회를 참석하려고 갔는지. 새벽에 십리, 이십 리 길 아이들 등에 보자기로 업고 새벽기도 다니는 것은 그 기록에 너무나도 많습니다. 말이 십리 길입니다. 그냥 가서 그렇게 새벽예배가고 예배 가서 멍하니 앉아있다 그냥 앉아있다 옵니까? 기록에 보면 한 시간씩 기도하고 어떻게든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그대로 살아보려고 애쓰고. 그런 물리적인 시간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성령의 역사라는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지금은 엄청나게 좋은 설교들이 나오지만 물리적인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습니다. 그만큼 간절하거나 그만큼 하나님 앞에 그 일이 아니면 안 된다 하는 것이 없어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때는 예수님 아니면 소망이 없던 시대입니다. 예배드리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시대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많은 분들이 심방을 하고 어렵고 힘든 분들 상담을 하면 목사님 죽을 것 같아요, 힘들어 죽겠어요 라고 합니다. 예, 그럼 우리  기도 합시다 라고 하면 뭐라고 그러냐면 기도가 그렇게 안 된다고 합니다. 정말 어렵고 힘들어요. 그럼 예배드립시다. 그런데 예배는요 제 스케줄이 이래서 이런 식입니다. 그래서 지식적으로 복음에 대해서 알고는 있는데, 신학적으로 복음 메시지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다, 그리스도는 왕이고 제사장이고 선지자다 다 알고는 있는데 삶에 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느냐? 왜 성령의 역사가 우리 삶에 나타나지 않냐?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여러분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저한테 신학생들이 가끔 연락이 옵니다. 좋은 의미로 연락이 오기도 하고 어떤 신학생들은 논문 쓴다고 저한테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합니다. 신학생들이 연락 와서 저한테 물어보는 것이 뭐냐면 여러 가지 질문들을 많이 합니다. 어떤 신학생이 저한테 물어보는 것이 전문성에 대한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이런 전문사역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전문사역을 위해서 어떤 것을 준비하셨나요? 라고 물어보길래 나 전문사역 없는데 라고 했습니다. 목사님 오랫동안 청소년 전문사역? 교회에서 청소년부 하라니까 청소년부를 열심히 해서 전문사역처럼 보인 거지. 지금은 아닌데. 이 친구가 완전 당황해서 그러면 저는 미래에 전문사역을 어떻게? 아니 목사가 전문사역이 따로 필요가 있나? 제가 그 친구의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 주특기인 팩트 폭격을 했습니다. 그런데 자네는 신학교 다니고 있는데 기도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나? 물어봤습니다. 기도생활이요? 제 질문과 동문서답 같이. 성경은 어떻게 읽고 있어? 성경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어? 아 그건, 그게.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신학생이 목회자가 되는 것이 꿈이고 비전인데 성도들을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해서 기도의 사람으로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목회자가 가져야할 아주 기본적인 전문사역인데 그것 준비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네가 자꾸 비전, 전문사역, 다민족, 찬양전문사역이니 이런 쓸데없는 것들 붙잡고 있다가 진짜 준비해야 될 것을 하나도 준비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신학생이면 하루에 한 시간씩은 기도해야지. 신학생이면 신학교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성령을 체험하고 그런 체험들이 나중에 성도들에게 목회를 하고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살아계심을 확신 있게 전할 수 있는 거지. 신학교 때 성경을 십독 정도는 해야지. 성도들 3장 읽는다고 너도 같이 3장을 읽으면 안 되는 거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무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런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을 지도하는 목회자들이, 여러분에게 말씀을 주고 여러분에게 영적인 리더가 신학교 때 기도 한 번도 안 하고 전문사역이니 뭐니 하고 그런 것을 쫓아다니는 목사가 여러분 앞에 설교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끔찍하지 않으세요? 성령을 체험하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해보지도 못하고 십자가의 복음으로 내 인생을 내가 하나님 앞에 다 드리겠다고 결단도 해보지 못한 사람이 여러분에게 천국을 말할 수 있겠어요? 신학교 다닐 때 성경 한 번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성경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여러분의 영혼을 책임지고 목회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끔찍하지 않으세요? 여러분 지금 그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놓고 목사가 됩니다. 목사가 되고 나서는 더 힘듭니다. 기도요? 기도시간이요? 바빠서 못한다고 합니다. 사역이 바빠서 기도를 못한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사역이 바빠서 기도를 못해? 이게 뭐야. 그게 우리입니다. 믿음은 행함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믿기 때문에 그 행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믿지 않고 그것을 행하지 않는데 어떻게 역사가 일어날 수 있어요? 저는 고등학교 때 공고를 다녔습니다. 실업계 고등학교였습니다. 학교 가서 납땜하고 이랬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나님의 은혜로 신학교를 가야 되니까 입시학원을 다녔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2학년 시작할 때 입시학원을 등록했습니다. 한 2년은 공부를 해야 수능 준비를 할 수 있으니까. 학교에서는 수능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학교가 일찍 끝나면 입시학원에 가서 학교처럼 또 저녁에 수업을 하는 것입니다. 입시학원에 처음 갔는데 수학 이런 것을 학교에서 배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수학시험이 너무 쉬웠습니다. 왜냐하면 학원 선생님이 수학을 너무 잘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학을 잘 풀어주니까 수학을 풀어주는 그 순간에는 이해가 다 됩니다. 저렇게 풀면 되겠구나. 시험 보면 한 개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수업 때 이해된 것을 이해했다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시험을 보면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요? 그 이해된 문제를 내가 혼자서 또 풀어봐야 합니다. 풀어보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또 풀어보고, 또 풀어보고 물어보고. 그 과정들을 마스터하고 가야합니다. 마스터하고 시험 보러 가면 그 문제가 나왔을 때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아는 것입니다. 수백 번도 더 풀어본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지식, 메시지, 어떤 관념적인 정보. 이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정말 중요합니다.  

 

Ⅱ.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 왕이 그들을 이사야에게로 보내매_이사야37:1-4

 

(1) 히스기야 왕이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으로 갔고 (2) 왕궁 맡은 자 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어른들도 굵은 베 옷을 입으니라 왕이 그들을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에게로 보내매 (3) 그들이 이사야에게 이르되 히스기야의 말씀에 오늘은 환난과 책벌과 능욕의 날이라 아이를 낳으려 하나 해산할 힘이 없음 같도다 (4)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랍사게의 말을 들으셨을 것이라 그가 그의 상전 앗수르 왕의 보냄을 받고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하였은즉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그 말로 말미암아 견책하실까 하노라 그런즉 바라건대 당신은 이 남아 있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하시더이다 하니라_이사야37:1~4

 

제사장과 서기관, 왕궁 맡은 자가 이사야에게 가서 히스기야 왕이 보냈다 하고 지금 앗수르의 상황을 이야기해주는 장면입니다. 이사야가 모르고 있었어요? 다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랍사게가 히브리어로 이야기했기 때문에. 전 국민이 다 들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스기야는 자기는 하나님의 전에 기도하러 가면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핵심 관료들을, 핵심 종교지도자들을 이사야에게 보냈습니다. 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서. 하나님 말씀을 듣고 싶어서. 어떻게 해야 될지 지혜를 구하기 위해 보냈습니다. 여러분 이게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남유다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우리는 그동안 공부했습니다. 외면당하고 무시당하고 조롱당하고. 심지어 이사야를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이 이사야가 바른 말하고 이사야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라고 할 때마다 이 정치지도자들이 이사야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이 생각을 했습니다. 얼마나 비아냥거리며 이사야가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그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한결같이 올곧게 정직하게 전했습니다. 그런 이사야에게 위기가 오니 히스기야는 관료들을 보냈습니다. 왜요? 왜 보냈을까요?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교회와 우리의 위치를 찾아야 합니다. 이사야가 만약에 한결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면? 이사야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거룩함 속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면 히스기야는 이사야를 찾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대에 그런 거짓 선지자들이 진짜 많았습니다. 정권에 아부하고 정치와 결탁하고 앗수르 우상을 섬기고 바벨론 우상을 섬길 때 이 거짓 선지자들이 그 일을 같이 섬겼습니다. 위기 때 그런 선지자들을 찾겠습니까? 깨달은 히스기야가? 아닙니다. 외면당하고 무시당하고 조롱했지만 한결같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준 회개하는 삶을 살았던 이사야를 찾았습니다. 교회가 그 자리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가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곧게 전해줄 이런 선지자, 교회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이 교회가 그런 역할을 못한다면 그런 교회를 찾아서 떠나셔도 괜찮습니다. 저는 그 정도로 우리에게 목회자인 스스로에게 그런 요구를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같이 변질되고 같이 타락하고 그러면 위기의 순간에 정말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 거짓 선지자들만 있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다행히 이사야가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그들에게 전달해주는 장면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히스기야 왕이 그 이사야에게 관료들, 종교 지도자들을 보내고 자기는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 말은 기도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실지 종을 통해서 확인했다는 증거가 여기 나와 있습니다. 그때 히스기야 왕에게 이사야가 선지자가 뭐라고 답변을 합니까?

 

- 보라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_이사야37:5-13

 

(5) 그리하여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이사야에게 나아가매 (6) 이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너희 주에게 이렇게 말하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들은 바 앗수르 왕의 종들이 나를 능욕한 말로 말미암아 두려워하지 말라 (7) 보라 내가 영을 그의 속에 두리니 그가 소문을 듣고 그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며 또 내가 그를 그의 고국에서 칼에 죽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라 (8) 앗수르 왕이 라기스를 떠났다 함을 듣고 랍사게가 돌아가다가 그 왕을 만나니 립나를 치고 있더라 (9) 그 때에 앗수르 왕이 구스 왕 디르하가의 일에 관하여 들은즉 사람들이 이르기를 그가 나와서 왕과 싸우려 한다 하는지라 이 말을 듣고 사자들을 히스기야에게 보내며 이르되 (10) 너희는 유다의 히스기야 왕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너는 네가 신뢰하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이 앗수르 왕의 손에 넘어가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에 속지 말라 (11) 앗수르 왕들이 모든 나라에 어떤 일을 행하였으며 그것을 어떻게 멸절시켰는지 네가 들었으리니 네가 구원을 받겠느냐 (12) 나의 조상들이 멸하신 열방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및 들라살에 있는 에덴 자손을 그 나라들의 신들이 건졌더냐 (13) 하맛 왕과 아르밧 왕과 스발와임 성의 왕과 헤나 왕과 이와 왕이 어디 있느냐 하라 하였더라_이사야37:5~13

 

6절. ‘너희 주’는 히스기야 왕입니다. 

7절. ‘그’는 앗수르 왕입니다. 산헤립이 이 말씀대로 실제로 칼에 죽게 됩니다. 지금 그런 답변을 하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답변은 앗수르의 수장 산헤립 속에 그 영을 두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다 운행하고 계십니다. 역사를 다 운행하고 계시는 하나님입니다. 영원히 살 것은 산헤립. 지금 이 장면이 되게 웃긴 장면인 게 여러분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전에 가서 기도하고 이사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했을 때 앗수르가 얼마나 강력했는지 아세요? 지금 18만 5천군대를 예루살렘에 포위하고 있고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산헤립은 이것을 그대로 랍사게에게 맡겨놓고 다른 곳을 또 치러 간 것입니다. 얼마나 강대국인지 아시겠죠. 동시다발적으로 다른 나라들을 다 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를 치고 있는데 똑같은 전략을 다 썼습니다. 항복하지 않는 나라들은 직접 가서 다 전멸시켰습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를 치고 있는데 이 남유다에게 온 답변이 무엇인가요? 항복을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항복을 안 하겠다는 소식을 랍사게가 산헤립에게 가서 전합니다. 그랬더니 산헤립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이제는 글을 씁니다. 랍사게가 항복하라는 전략이 먹히지 않았기 때문에 이번에는 직접 글을 씁니다. 내가 지금 너희처럼 항복하지 않은 나라들을 치고 있어, 여호와가 너희를 구원할거라고 생각해? 착각하지 마, 그렇게 생각한 나라들, 그렇게 자기의 신을 믿은 여러 민족들이 우리 앗수르 왕과 신에 다 굴복됐어. 지금 그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이것입니다. 그것을 글로 또 협박합니다. 2차 협박입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 편지를 가지고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 직접 가지고 갑니다. 그것을 펼쳐놓고 기도하는 장면이 본문에 나옵니다.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펴놓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 보십시오. 저들이 섬기는 우상은 나무이고. 이제서야 깨닫는 겁니다. 저들이 섬기는 우상은 말도 못하는 돌덩이입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하나님을 저들이 훼방하고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그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이렇게 해야 됩니다. 내가 계획을 세워놓고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내가 이미 결론을 내어놓고 기도의 자리로 가서 기도하는 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히스기야는 이미 작년에 그런 기도를 다 했습니다. 애굽과 동맹을 다 맺어놓고, 산헤립에게 물질을 다 줘 놓고 뇌물을 다 줘 놓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애굽과 동맹 맺었습니다, 우리 지켜 주세요. 하나님! 우리가 저들에게 뇌물 보냈습니다, 우리 지켜주세요. 이런 식으로 기도했을 거예요. 우리 다 그렇게 기도하잖아요. 하나님! 나 이런 것 다 계획해 놓았으니 계획한 대로 이뤄주세요.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진짜 기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계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정말 믿는다면 두렵고 떨림으로 섬긴다면 하나님 앞에는 완전 오픈해야 합니다. 그것을 정말 믿어야 합니다. 거기에 내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게 70-80년대 하셨던 어른들의 기도였습니다. 지금은 다 계획을 세웁니다. 목회도 다 계획을 세웁니다. 성전건축도 다 준비해놓습니다. 모든 걸 전략적으로 시스템을 만들어 놓습니다. 그렇게 해놓고 하나님 역사해주시옵소서. 하나님이 하실 일이 업습니다. 마치 우리 청년들이 저한테 와서 목사님, 이 남자 어때요? 목사님, 이 여자 어때요? 결혼하겠다고 온 거예요 제가 이제 사귀기 시작한 거예요? 아니요, 결혼식 날짜 다 잡았는데요. 그런데 뭐 어때요 라고 물어보면 나보고 뭐 어쩌라고. 진짜 청년들 웃기죠. 결혼식 날 다 잡고 결혼할 계획 다 세워놓고 저한테 와서 목사님, 이런 남자 어때요? 이런 식입니다. 그럼 제가 거기에서 안 돼요, 이렇게 말해요? 이미 다 해놓고요. 무조건 축복해야죠. 무조건 축복합니다. 웃깁니다. 저한테 물어보고 허락 맡고 결혼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예화를 드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그런다는 말입니다. 다 해놓고 다 계획해 놓고 좋으신 하나님이 응답하시려고 하셔도 너 이것 다 틀어야 되는데 다 바꿔야 되는데?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같이 일하는 스텝들, 교역자들이 자기 계획 다 세워놓고 목사님, 저 이렇게 계획 세웠는데 허락해주세요. 허락을 어떻게 안 해주나요. 이미 다 자기들끼리 이야기 다 끝냈어요. 그런 거예요. 우리 기도가 그런 식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기도를 바꿔야 합니다. 정말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도록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우리는 그 기도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 기도를 못하냐? 왜 그렇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하냐? 

 

-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_이사야37:14-20, 마가복음9:14-29

 

(14) 히스기야가 그 사자들의 손에서 글을 받아 보고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서 그 글을 여호와 앞에 펴 놓고 (15)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16)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17)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시옵소서 여호와여 눈을 뜨고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사람을 보내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훼방한 모든 말을 들으시옵소서 (18) 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과연 열국과 그들의 땅을 황폐하게 하였고 (19)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그들은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일 뿐이요 나무와 돌이라 그러므로 멸망을 당하였나이다 (20)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사 천하 만국이 주만이 여호와이신 줄을 알게 하옵소서 하니라_이사야37:14~20

 

(14) 이에 그들이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그들을 둘러싸고 서기관들이 그들과 더불어 변론하고 있더라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매우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20)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그가 땅에 엎드러져 구르며 거품을 흘리더라 (21) 예수께서 그 아버지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이르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22)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24) 곧 그 아이의 아버지가 소리를 질러 이르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28)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조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2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_마가복음9:14~29

 

17-18절. 파리해지는지라. 아이의 행색이 엉망이 된다는 것입니다. 

20절. 예수님이 이때 그냥 귀신을 쫓아내면 되시는데 아버지에게 물어보는 겁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어릴 때부터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귀신이 우리 아들을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입니다. 그의 손을 잡아 일으키시고 귀신을 쫓아내십니다.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정말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귀신이 들렸는데 이 아이에게 제일 먼저 한 행동이 땅에 엎드러지게 했습니다. 그리고 땅에서 구르게 만들었어요. 아버지의 증언은 이 아이를 불과 물에 왔다 갔다 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불로 가면 뜨겁죠, 그럼 물에 가면 다시 살죠,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땅만 쳐다보게 만들고요, 땅에 엎드려지게 만들고요, 구르게 만들고요, 거품을 흘리게 만들고요, 물과 불에. 마치 저는 잘 모르지만. 주식하는 분들이 이야기했습니다. 빨간색, 파란색이 좋은 건지 잘 모르겠지만 주식처럼 왔다 갔다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귀신들린 사람들이 땅만 쳐다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귀신이 하는 일이 뭐냐면 우리를 땅만, 이 세상만 쳐다보게 만듭니다. 그런데 여러분 세상은 어때요? 앗수르 왕은 곧 칼에 죽은 운명입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옛날 70-80년대 목사님들의 설교는 거의 천국에 관한 설교가 대다수였습니다. 신기합니다. 천국 설교를 하면 우리가 완전 이상한 신앙생활을 할 것 같은데 천국을 믿고 의지하고 천국에 입성할 때 하나님의 면류관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상급 받을 것을 생각하고 우리 삶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땅에 매이지 않았습니다. 가난과 저주에서 열심히 최선을 살아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어디 있었냐면 이 성도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봤다는 겁니다. 그러면 지금은 설교가 무엇이냐면 땅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 땅 속에서 살아남으라는 겁니다. 땅 속에 전략들, 시스템들, 발전된 문명들을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천국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고 안 계신 것 같고 땅만 쳐다보고 성도들이 삽니다. 세상만 쳐다보고 삽니다. 그러니 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히스기야가 땅만 쳐다보고 살았던 히스기야 왕이 오늘 여호와의 전에 갔습니다. 엄청난 겁니다. 어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지도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기 시작한 겁니다. 여러분 이 죄는 악한 영들은 절대 하나님 바라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했습니다. 출애굽해서 이 사람들이 우상을 섬겼습니다. 하나님이 화가 나셔서 불뱀, 독사를 풀어서 다 물었습니다. 다 죽는 것입니다. 이 우상 섬긴 사람들 불뱀에 물려서 하나님이 다 쓸어버리셨습니다. 그런데 긍휼의 하나님이 놋으로 뱀을 만들어서 장대 끝에 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이야기하나요?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칩니다. 이 하늘로 높이 들린 놋뱀을 쳐다보면 너희가 살게 될 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지금 뱀에 물려서 수술도 해야 하고 다리가 붓고 빨리 치료하고 독도 빼내야 되겠고, 의사들에게 수술도 해야 되는데, 지금 미쳤어요? 놋으로 만든 뱀 쳐다볼 시간이 있게? 다 이런 식입니다. 안 쳐다보았습니다. 어마어마한 숫자가 죽었습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여러분 한번만 집 밖에 나와서 놋뱀 쳐다보면 살 건데, 한 번만 우리 인생에 눈을 들어서 하나님을 쳐다보면 살 수 있는데. 땅을 쳐다보던 우리가 한 번만 정신을 차리고 은혜의 보좌 앞에 나와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살 수 있는데. 한 번만, 한 번만 정신을 차려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살 수 있는데. 하나님 그 때마다 은혜를 부어주시는 하나님, 그때마다 돌아온 탕자들에게 잔치를 베푸셨던 것처럼 풍성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우리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능력도 사라지고, 하나님의 은혜도 소멸되어지고 성령의 역사와 그 기적들이 기독교인들에게 사라졌는지. 현대시대라서 그런가요? 과학 기술이 발달해서 그런가요? 문명이 발달해서 그런가요? 아닙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능력을 얻어낼 만한 물리적인 헌신을 하나님 앞에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뒤따라야 합니다. 나와서 쳐다봐야 합니다. 

 

Ⅲ. 이왕 죽을 거 교회 가서 기도하다 죽으면_이사야55:1-5, 시편121:1-8, 히브리서12:5-13

 

(1)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영원한 언약을 맺으리니 곧 다윗에게 허락한 확실한 은혜이니라 (4) 보라 내가 그를 만민에게 증인으로 세웠고 만민의 인도자와 명령자로 삼았나니 (5) 보라 네가 알지 못하는 나라를 네가 부를 것이며 너를 알지 못하는 나라가 네게로 달려올 것은 여호와 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로 말미암음이니라 이는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느니라_이사야55:1~5

 

1절. 목이 마르면 물로 나와서 먹어야 합니다. 목마르니까 나와서 먹으면 목이 축여지고 시원해요. 그런데 그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목마른데 물로 안 나옵니다. 심지어 뭐라고 이야기를 합니까? 돈 없는 자도 오라, 와서 사 먹되. 말이 되나요? 돈이 없는데 어떻게 사 먹습니까? 돈이 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라. 누가 대신 사줬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값을 다 치루신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공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이 하나님이 베푸신 성령의 역사가 하나님의 능력이 공짜가 아닙니다. 공짜가 아닌데 우린 공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어떻게 값없이 될 수 있나요? 그런데 예수님이 그 값을 다 치루셨습니다. 죄에서 벗어나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너무 큰 값을 치러야 돼서 우리 인간이 값을 치룰 수 없는 정도입니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값을 십자가에서 다 치루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공짜라는 생각이 들고 와서 먹기만 하면 되는데. 

2절. 너희들 영혼도 못 살리고 너희들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할 것을 위해서 수고하면서. 뒤에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3절. 내가 이 확실한 은혜를 너희에게 줄 텐데 나오라는 것입니다. 나와서 들으라는 것입니다. 목마른 너희들아 와서 물을 마시라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뭐에요? 지금 한국교회 믿음은 무엇인가요? 기도하지 않습니다. 성령체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 없습니다. 왜 없죠? 그런 시간을 갖지 않으니까. 제가 후배 밥을 사주려고 수서 역에 몇 시까지 나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후배들 만나면 빈손으로 가지 않습니다. 제가 힘들고 어려워도 단 돈 오만원이라도 봉투에 넣어서 그래도 전도사들이고 후배들이니깐 용돈이라도 주려고 담아서 갑니다. 몇 시에 보자. 전화가 왔습니다. 형님, 못가겠는데요. 무슨 일이 생겨서. 그래, 알았어. 그럼 못 받아 가는 겁니다. 끝나는 것입니다. 제가 그걸 우체국에 가서 우편으로 보내줄 이유가 없습니다. 그 시간에 거기에 와야 받을 수 있는 은혜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성도님들에게 꼭 말해주고 싶습니다. 예수님을 멀리서 믿지 마세요. 교회 처음 나오시는 분들 처음이라고 어색하고 쑥스럽고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멀리서 믿지 마세요. 예수님을 가까이서 믿으세요. 내가 죽을 것 같은데 내 환경은 너무 어려운데, 눈치 보지 마세요. 하나님을 가깝게 두고 믿으세요. 하나님을 아주 가깝게 두고 믿으세요. 목마르면 목마를수록 물을 찾는 것이 더 강해지는 것입니다. 수고하라고 귀를 기울이라고 그래야 너희 영혼이 산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공부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그게 신학, 교회사, 역사든 말입니다. 그러나 하면 할수록 은혜 아니면 기도 아니면 답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그 귀신을 내어 쫓고 그 귀신들린 아이를 살려주고 제자들이 와서 물어봅니다. 왜 우리는 이런 일을 못합니까? 예수님이 마가복음 9장에 딱 한 마디 했습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예수님도 기도 아니면 안 된다는데. 제자들은 기도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도 기도 없이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하는데 감히 제자들은 신이 아닌 인간은 기도 없이 귀신을 내쫓고 있는 것입니다. 귀신이 나가겠습니까? 여러분 우린 하늘을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야 합니다.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_시편121:1~8

 

그 하나님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이신데. 눈을 들어서 산을 바라보듯이 여호와를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땅을 쳐다보고 살면 그 땅에 메여서 땅의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 환경에 메여 버립니다. 그 환경만 쳐다보고 있고 그 사건만 쳐다보고 있으면 사람이 그렇게 되어버립니다. 부모님에게 원망하는 자녀들 부모님에게 상처받은 자녀들 그것만 쳐다보고 있으면 자기도 그 인생 똑같이 삽니다. 아닌가요? 하늘을 쳐다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바라보라는 겁니다. 하나님 우리의 모든 것을 지키시는 분이고 우리를 축복주기를 원하시는 분이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죠? 그래서 지금 시대가 예수 믿기 진짜 진짜 어려운 시대입니다. 물리적으로 시간을 내지 않으니까. 시간을 낼 수 없는 그런 환경에 신앙생활을 우리가 하고 있습니다. 교회요? 저희 교회도 금요일 밤에 기도모임을 합니다. 저희 금요일 밤에 기도모임 예배 끝나면 10분이나 할까요? 그 10분도 기도하기 힘든 시대입니다. 1분도 눈 감고 기도 못하는 시대입니다. 1분요? 눈 감고 기도하고 있으면 핸드폰에 손이 갑니다. 핸드폰 옆에 두고 기도하는데 핸드폰에서 카톡 소리 나면 기도 멈추고 카톡 확인하고 기도하는데 기도가 되겠어요? 옛날에는 한 시간씩 두 시간씩 집중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맞죠? 그렇게 집중해서 기도한 결과가 응답이라는 것이 오는 건데. 지금은 당연히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당연히 역사가 안 일어납니다. 이 시대가 다시 부흥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저는 공부를 하면서 객관적으로 쉽지 않다고 생각이 듭니다. 절망적인 것이 훨씬 더 많습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비교하고 역사를 공부를 하면 할수록 다시 대한민국에 하나님의 부흥이 회복 될 수 있을까? 어렵다고 생각이 너무 많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이 없어지는 시대입니다. 기도하기가 너무 힘든 시대입니다. 예배드리기 너무 힘든 시대입니다. 성경읽기가 너무 힘든 시대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올인이라고 하잖아요, 완전히 매달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기가 너무 어려운 시대입니다. 너무 너무 어려운 시대입니다. 어른들이 경험과 지식이 많아서 회개하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목회자들이 회개하기 너무 어려운 시대입니다. 자존심 상해서 어디 감히 목사가 말하는데 이런 이야기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아니잖아요. 목회자도 틀릴 수 있고 실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전도사님, 직원들이 그런 걸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건강한 조직, 공동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만해도 얼마나 자존심이 센지. 그러니 부흥이라는 것이 올까요? 회개가 없는데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기도하는 시간이 없는데.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9)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_히브리서12:5-13 

 

5-6절. 하나님이 그 아들들을 채찍질 하신다고 합니다. 아들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징계하신다고 합니다. 

7-8절. 예수님과 같이 우리를 대우하시나니. 이 징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9-10절. 왜 징계하시냐면요 왜 우리가 징계라는 것을 받아야 하냐면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기 위해서. 

11절. 징계로 인해서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12-13절.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라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런 힘과 능력이 없으니깐 우리가 이 징계를 받고 새사람이 되고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매직 위해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라고 히브리서 저자는 이야기하고 있어요. 하나님 바라보라고요. 여러분 내 몸의 허리가 너무 아픕니다. 병원 아니면 의지할 때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요? 의사선생님이 하는 말을 잘 듣습니다. 치료 다 하고 운동 다 하고 약도 다 먹습니다. 그런데 안 아픈 사람은 미리 예방적인 차원에서 이런 운동하세요, 절대 안 합니다. 마치 신앙생활이 그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게 하시는 겁니다. 제가 부흥의 때를 공부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느낀 것이 있어요. 하나님이 항상 축복하시고 부흥을 허락하신 때는 이 성도들이 교회들이 하나님만 전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상황들을 다 만들어 놓으십니다. 그게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제가 그래서 갈등이 됩니다. 하나님이 가스펠교회도 이런 일이 벌어져... 저희 성도들이 병에 걸리고... 우리 성도들도 고통을 당하고? 교통사고라도 다 당해서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그렇게 기도해야 되나?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을 만큼 정확합니다. 그 어떤 시대라도 영적인 부흥이 일어났던 시대는 전부다 하나님이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여러분에게 하는 설교 중에 좀 심하게 율법적이고 조금 심하게 행함적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제가 복음 메시지를 모를까요? 제가 이 복음만으로도 완전하다는 클리어하게 신학적으로 복음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해서 70-80년대 그 모자라고 무식했던 시대의 신앙을 여러분에게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이라는 것이. 여호와의 전 앞으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히스기야가 여호와 전으로 안 가면 그 시대는 끝나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만 끝나나요? 그 남유다 백성들이 다 끝나는 겁니다. 백성들은 다 죽는 것입니다. 진짜 히스기야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와 가까운 사람입니다. 실수도 많고 얄미운 사람입니다. 그런데 결정적일 때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결정적일 때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기도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라 제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저는 시스템이라는 단어를 원래 좋아하지 않습니다. 저는 규모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단어가 아니고선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이 시스템을 오해하지 마세요. 이 시스템을 아무리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내 마음이 거기에 가고 있기 때문에 내가 간절히 바라고 원하기 때문에 시스템 자연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내 아내, 남편, 내 자녀, 부모에게 사랑한다면 시스템은 만들어 집니다. 설거지도 도와주고 내 아내를 위해서 희생하도 하고 헌신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삶의 그런 룰들이 생겨납니다. 그런 룰들이 생겨나는 것이지, 그 룰을 만든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이 먼저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 사랑하면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우리 가족들이 예수님을 믿게 만들고 우리 가족들이 천국가야 한다고 정말 그게 간절하다면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희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발을 씻겨서라도 구원받게 만들 거예요. 지옥을 안다면, 천국을 안다면. 여러분 우리는 은혜 받아야 합니다. 정말 기도하시길 원합니다. 우리가 은혜 받고 나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세상 다 가진 것 같습니다. 진짜 성령 받고 나면 세상 다 가진 것 같습니다. 죄가 얼씬도 못합니다. 죄가 우리를 침범하는 것은 우리가 은혜를 안 받기 때문에 침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기억 안 나게 하신다고 하죠? 우리도 죄가 기억이 안 나야 합니다. 천국에 입성할 때 하나님이 저에게 면류관을 주시고 상급을 주실 것을 소망하고 사니까 이 땅에서 설렙니다. 그래서 어디에도 메이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제가 오늘 결론을 이왕 죽을 거 교회 기도하다 죽으면. 이렇게 내놓았습니다. 히스기야가 딱 그렇습니다. 18만 5천 군대 돈으로도 안 되고 동맹을 맺어도 안 되고. 이왕 죽을 것 하나님 앞에 기도라도 하고 죽자. 그런데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우리가 이왕 죽을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런 심정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제발. 하나님이 축복하시겠다고 하나님이 너를 사용하시겠다고 너에게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우리는 계속 지식으로 관념적으로 아, 복음은 이런 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 다 알아. 이러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은 행함인데, 믿음은 행함이 동반되어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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