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2월 20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 |
제 목 : | 정직한 신앙, 정직한 예배 |
본 문 : | 이사야 66:1-14 |
오승주 목사
Ⅰ. 내 영혼의 감사
여러분 신앙은 무엇일까요? 신앙생활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뭐라고 이해하고 지금 하고 있습니까? 역사를 공부하다보면 역사 속의 신앙생활을 마주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교개혁시대, 경건주의시대, 하나님이 부흥을 주셨던 시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 믿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리고 새 나라로 이주했던 청교도 시대 이런 사람들의 신앙을 가까이서 마주해보면 지금 신앙생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게 맞나? 라는 그런 반문이 저한테 많이 생깁니다. 우리가, 내가 지금 이렇게 목회하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오승주 목사가 지금 신앙생활하고 있고 우리 성도들을 이끌어가고 있는 게 맞는 건가? 이런 생각들을 되게 많이 하고 있습니다. 교회 다니는 것 그리고 오늘처럼 주일에 나와서 예배드리는 것. 이런 마음도 있습니다. 교회를 평생 다녔기 때문에 습관적으로 교회를 가기도 하고 또 교회를 안 가면 뭔가 찝찝하고 옛날 말로 번개 맞을까봐 교통사고 날까봐 이런 두려움도 있을 거 같은데 여러분 교회를 나오지 않으셔도 번개 맞거나, 교통사고 나거나 그런 일이 전혀 없습니다. 없을 것이고 운전을 못해서 교통사고가 나는 거지. 그러나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신앙생활하고 있지 않나 이런 생각을 되게 많이 하게 됩니다. 저는 불신자가정에서 신앙생활을 시작을 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전혀 알지도 못하고 성경을 한 글자도 읽어본 적이 없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교회는 뭐하는 곳인지 이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또 저희 집이 가난해서 제 인생에 수많은 문제, 질병이 있어서 예수님을 믿은 것도 아닙니다.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교회 가는 것도 아닙니다. 감사하게 저는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주셨고 제가 억만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죄에서 건짐 받은 하나님 자녀가 되게 해주시는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교회를 다니는 이유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때문이라는 것을 점차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주셨기 때문에. 나 같은 죄인을, 나 같이 별 볼일 없는 자를, 나 같은 존재를 주님이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승주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리고 내가 너를 자녀 삼아주겠다, 내가 너를 천국백성 삼아주겠다 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물론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깨닫기 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고 또 제가 주님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삶까지 되게 오래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제 수준이나 형편이나 제 죄 많은 삶이 그것을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부침을 겪고 오랜 시간 그 깨달음과 그 은혜를 경험하고 내가 주님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 마음으로 신앙생활 했고 교회를 다니고 예배를 드리고 헌신하고 봉사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제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을 어떻게 복음화 했냐? 우리 가정이 어떻게 예수님 믿었냐? 특별히 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했고 성경에서 말한대로 가정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해서 기도했고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족들을 대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저는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이 나를 사랑해주셨고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 우리 성도님들도 주님 사랑했으면 좋겠고 주님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좋겠고. 주님이 한 영혼, 한 영혼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고. 그러니까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종종 잃어버리는 것은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이것입니다. 그게 없는 신앙생활을 혹시 우리가 지금 하고 있지 않은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모든 삶의 기준들, 방향들, 가치관들, 목적들이 다 바뀌게 됩니다. 그걸 변화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변화되었다.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주님을 온 마음 다해서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정직하게 살기 시작했고 내가 죄를 떠나기 시작했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범죄자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도 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너무 사랑해서 새로운 삶을 살려고 주님을 사랑하는 삶, 주님과 동행하고 함께 하는 삶을 살려고 돌아서는 것.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변화가 되는 거지 교회 다니고 1단계 2단계 3단계 이런 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교회를 다녀서 주님 사랑하고 고백하는 사람이 빨리 변화될 수도 있고 30년, 40년을 교회 다녀도 아무런 변화가 없기도 하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전도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선교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네팔에 선교비를 보내고 따루 목사님 같은 현지인 목회자를 우리가 후원하고 서포터하고 있는데 주님 사랑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것을 내 이름을 드러내고 우리 교회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렇게 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메시지를 해야 되고, 네팔에 내 이름이 드러나야 되고. 저는 관심 없습니다. 네팔에는 그 현지인 목회자가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도록, 그 일이 되어지도록. 왜냐하면 목적이 뭐냐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님을 사랑하는 그 마음으로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네팔의 한 영혼, 한 영혼이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예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는 그 목적이 이루어져야 되기 때문에 그 외에는 우리가 중요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그런 거 있잖아요. 내가 저 사람 영접시켜야지, 내가 저 사람 복음 전해서 영접 시켜야지. 그런데 거기에 사랑, 사랑하는 마음,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빠지면 그것은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입니다. 너희들 다 죄인이야, 내가 지금 전하는 복음 들으면 죄에서 건짐 받을 수 있어. 안 들으면 지옥 가고 계속 저주 받을 거야. 그건 폭력입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들으려면 듣고 마려면 말아. 이건 폭력입니다. 그것은 우월감으로 전하는 것입니다. 왜 그런 폭력적인 전도가 한국교회에 있었냐면 사랑이 빠져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빠져서 그렇습니다. 영혼을 사랑하면, 그 사람이 정말 구원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방법이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내 남편이 진짜 예수님 믿고 정말 천국 가기를 원한다면 방법이 뭐가 중요해요?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섬기겠죠. 발도 씻겨줄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하지 못할 거 같으세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진짜라면 내 옆에 있는 지체가 정말 주님 사랑하는 것이 최고의 축복이고 그게 인생에 가장 큰 해답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는 방법이 중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도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무엇인가요? 내 영혼이 주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감사, 찬송. 그게 진짜라면 우리는 세상에서 능히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니까 세상이 그런 사람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내 영혼에서 나오는 감사가 있고 내 영혼에 찬송이 나오는데 예수님을 진짜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감사이고 찬송입니다. 그거는 어떻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가식적으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당신 교회 3년 정도 다니고 훈련을 이렇게 받았으니까 장로는 중 수 있고 권사는 줄 수 있는데 내 영혼의 감사는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혼의 고백을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을 이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진짜여야 합니다. 그게 있어야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얼마나 악해요, 얼마나 유혹이 많고 강력해요. 그런데 여러분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서 승리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은 주님을 가까이하려는 행동이 나오는 것이 당연하겠죠. 주님 사랑하니까 주님이 싫어하는 죄에서 멀어서 주님을 가까이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입니다. 거기에는 기준이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신앙생활 하고 있으니까 너도 이렇게 해 가 아니라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 전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조금씩 조금씩 차이가 있긴 하겠지만 그 마음으로 각자가 신앙생활을 해 가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어린 아이답게, 이제 새신자는 새신자답게 주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가까이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획일화된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주님 사랑하는 것이 다 다른데. 주님을 가까이 하는 것. 왜요?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그런 신앙이 주님을 가까이하다보니 주님께 은혜를 받고 힘을 얻을 것입니다. 엄청 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마귀가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이다. 맞죠. 내 영혼에 감사가 있는 사람을 마귀가 어떻게 하겠어요. 어떻게 이길 수가 없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틈이 없습니다. 그런데 불평하고 원망하고 부정적이고 그럼 당연히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기쁨이 있고 찬송이 있는 사람이겠죠. 내 영혼에. 그렇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 시대가 경건주의 시대인데 그 경건주의 시대에 성도들, 리더들은 전부 주님 사랑하는 마음을 위해서 몇 가지 중요한 일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오지만. 제일 했던 행위 중 하나가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주님이기 때문에. 주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으로 어떻게 가까이하지? 그렇죠? 성경은 하나님 말씀, 성경이 주님이라고 당신이라고 말씀해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내 마음에 모신다? 말씀을 내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주의 시대의 리더들은 항상 성경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하겠죠. 주님을 가까이하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기도를 게을리 할 수가 없습니다. 주님과 늘 대화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고 내 마음을 주님께 아뢰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그래서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경건주의 시대 때 평균적으로 그 당시 목회자가 하루에 기도를 3-4시간을 기도했다고 합니다. 아, 저는 제가 너무 쇼킹했습니다. 3-4시간? 감당이 안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3-4시간을 매일 기도할 수 있지? 그런데 그때 목회가 다 어떻게 됐죠?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교회가 부흥하고 가정들이 회복되고 자녀들의 신앙이 회복되고. 그 말은 무슨 말이에요? 역설적으로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사역들이 다 맞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현대적으로 올바르게 사역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육신적으로 세상적인 방법으로 교회가 굉장히 시스템화 되고 성도님들이 생각할 때는 우리 목사님 사역 잘해, 우리 교역자 누가 전도사님 부서 사역 잘 해 이렇게 생각 하는 게 사역을 잘하는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게 다 오판이라는 것입니다. 진짜 사역을 잘하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어주셔야 되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가정 가운데 우리 자녀들 가운데 우리 심령 가운데 역사하셔야 되는데 그거는 기도 밖에 없잖아요. 그러니 기도를 3-4시간씩 하는 게 세상사람, 믿음 없는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 미련, 천치 같이 보이지만 여러분 그 시대가 가장 뜨거운 시대였고 미국이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시간이었고 시대였습니다. 과연 요즘 시대 어떤 목회자들이 하루에 3시간씩 기도할까요. 하루에 30분도 기도하지 않는 시대인데.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주님을 가까이 하고자 하는 그런 기도생활도 다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사랑하게 됩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에. 그래서 수많은 봉사와 헌신을 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그게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이 경건주의 시대 때 많은 성도들이 교회 주변으로 이사 오기도 하고 교회에서 교사하고 봉사하고 이웃을 살리는 일에. 교회를 너무 사랑한 것입니다. 길고 긴 이사야의 강해설교가 이번 주 다음 주면 끝이 납니다. 우리가 이사야서 설교를 듣고 그 시대를 다 배웠잖아요? 이사야 시대 때 이스라엘은 어떤 상황이었는지, 왜 이런 말씀들을 주셨고 어떤 역사였는지 우리는 2년간의 이사야 설교를 통해서 이사야 시대 때 이런 죄를 지었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회개하면 이렇게 회복하신다고 하구나 이런 것을 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66장의 결론 말씀을 우리가 확인해봐야 하는데 결론은 뭔가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직하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껍데기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거 하등 쓸모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드리는 제사, 너희가 드리는 것. 마음이 가증한데, 마음은 떠나 있는데 육신적으로 열심히 하는 거 그거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신앙생활하지 않으면 쓸모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정직한 신앙생활이 뭐냐? 오늘 본문에 하나님은 세 가지를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데 그 세 가지를 이야기하기 전에 뭐라고 이야기하십니까? 1절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무슨 말이냐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종교적으로 육신적으로 그 시대 상황적으로 성전을 건축해서 하나님을 거기 모시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그 성에, 성전, 건물에 있는 것이 아니야. 나는 이 세상 어디든지 머물 수 있고 내가 이 세상을 지었는데 너희들이 나를 위해서 무슨 집을 짓겠냐? 내가 진짜 머물 곳은 어디냐? 내가 진짜 너희와 함께 하고 내가 진짜 머물 성전은 무엇이냐? 오늘 본문에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게 너희의 심령이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정말 정직하게 신앙생활하는 그 정직한 신앙에 내가 함께 머물겠다는 것입니다. 정직한 신앙이 무엇인지 보는 것입니다. 첫째는 2절에 보니까
Ⅱ. 정직한 신앙
- 마음이 가난한 자_이사야66:2-4, 예레미야7:21-2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하나님이 어떤 사람에게 함께 하시고 머물러 계시냐면 성전 삼고 계시냐면 마음이 가난한 자. 목사님 마음이 가난한자? 심령에 통회하는 자. 심령은 마음입니다. 영과 혼입니다. 통회하는 자.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쉽게 마음이 가난하다는 의미는 마음에 욕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잉태해서 낳는 것이 죄라고 합니다. 마음에 욕심이라는 것이 있어서 죄를 낳고 그 죄가 어떻게 되죠? 우리를 지옥으로 멸망으로 끌고 갑니다. 그러니까 이 욕심은 마음의 모든 죄를 만들어냅니다. 마음에 더러운 죄들이 가득하고 오염물들, 쓰레기들이 마음에 계속 차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크리스천들이 생각보다 마음 관리를 잘 안 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어떤 감정 쓰레기들이 있습니다. 감정이 막 요동치잖아요, 그 감정을 그냥 내버려두면 감정 쓰레기가 되어서 마음에 다 담깁니다. 스트레스, 우리가 유튜브 같은 거 보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들어서 그런 것들이 다 마음에 담기는데 마음이 다 병들어 가는데도 마음 관리를 하지 않습니다. 우리 육신은 다리가 부러지기만 해도 감기 하나만 걸려도, 오미크론 하나만 걸려도 병원 가고 격리하고 몸 회복하려고 영양제 맞고 수술하고 깁스하고 이런 거 다 하잖아요. 직장 병가내고 쉬고 이런 거 하잖아요. 그런데 마음은 방치합니다. 마음은 보이지 않으니까. 육신은 조금만 아파도 병원가고 그러면서 며칠씩 쉬고 그러면서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고 그냥 방치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병들어있는지 오염물이 가득한지, 감정 쓰레기가 쌓여있는지. 그런데 마음이 병 들면 육신도 병 듭니다. 아시죠? 우리 육신이 병드는 것에 모든 원인이 다 마음에서 오잖아요. 심근경색부터 해서 요즘 생기는 수많은 요즘 시대의 질병들 다 마음의 병에서, 스트레스에서 온다고 하잖아요. 의사들이. 이스라엘은 그들 마음에 가증한 것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가증한 것. 지금 이사야가 3-4절에 이들이 예배를 잘 드렸다가 아닙니다. 앞으로는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이지만 뒤에서는 살인했고 어린 양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뒤에서는 개의 목을 꺾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것 같지만 돼지의 피와 다름없이 했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없이 했다는 것입니다.
3.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4.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_이사야66:3-4
그러니까 형식적으로 레위기의 제사는 드리는데 마음은 가증한 것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가증한 것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가증한 것이 뭐에요 여러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이죠. 하나님 말씀을 어기고 이방인들처럼 죄를 짓고 사는 것. 그것을 이스라엘의 몸이 그런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마음이 그것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마음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 쾌락과 우상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사모한 것입니다. 마음이. 마음이. 여러분 목사들 조심하셔야 합니다. 목사들이 양복 입고 강대상에 올라와서 설교하고 메시지 진짜 좋네 이런 모습으로 목사를 따르시면 안 됩니다. 목사를 리더로 따르셔야 되는데 목사의 삶을 살펴보셔야 합니다. 목사의 마음을 살펴보셔야 합니다. 마음에 가증한 것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 목전에서 악을 행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목전에서. 하나님 앞에서. 마음이 얼마나 완악하고 강퍅하고 병 들어가지고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도 그런 죄책감 하나도 없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다고 합니다. 마음이. 그래서 성경은 마음이 가난해야 된다고 합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 적으로 말하는 그런 가난이 아닙니다. 마음을 비워야 된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음을 비워낸다 이런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마음이 가난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모든 세상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가서 우리는 겸손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가난하다는 뜻은.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가면 내 마음이 다 보이기 때문에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심령의 통회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심령이 통회하고 마음이 가난한 증거가 뭐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 오늘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 오염되어 가지고 우리 마음에 가증한 것이 가득차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음이 병든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다는 증거는 하나님 말씀을 들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여러분 성경을 읽어도 성경의 말씀이 달콤하지 않는 상태. 여러분 스스로 자가진단을 해 볼 수 있겠죠. 하나님 음성이 들리지 않는 우리의 삶. 하나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담기지 않는 삶. 그 말은 마음이 가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면서 설교를 들으면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나요? 여러분 마음은 주님 앞에서 가난하신가요?
21.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희생제물과 번제물의 고기를 아울러 먹으라 22. 사실은 내가 너희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령하지 아니하고 23. 오직 내가 이것을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_예레미야7:21-23
왜 하나님께서 번제나 제사를 이야기하셨는지 말씀하시냐면 솔직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은 하면서 애굽 땅에서 평생 우상을 섬기던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을 듣고 하나님 목소리를 들어야 되는데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 형식에 익숙해져 버린 이스라엘. 그래서 하나님께서 번제를 만드셨다고 성경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이게 이해가 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형식, 양을 잡고 피를 내고 이게 중요하지 않은 분입니다. 그 제물이 필요하신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번제를 드리게 하고 양을 잡고 제사를 드리게 하셨냐면 그렇게 해야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오니까. 우리가 주일날 이렇게 예배 형식을 만들어놔야 여러분이 예배를 오시잖아요. 이때라도 오셔서 말씀을 들으시잖아요. 그런 것처럼. 그러나 사실은 그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내 명령을 듣는 것입니다. 그럼 복을 받습니다. 내 목소리를 들으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된다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제사를 말씀하셨지만 가만히 보면 이스라엘의 마음이 개혁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없는 신앙은 가짜입니다. 그건 진짜가 아닙니다. 그러나 마음이 없어도 왜 교회를 다니고 교회를 다니게 하냐면 그래서 마음이 생기니까. 그 기회를 하나님이 제공해주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주님을 모셔야 되고 내 마음이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게 진짜일 때 우리의 예배도 우리의 삶도 진짜가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아니면 모든 행위는 가짜가 될 수밖에 없겠죠. 가짜. 어쩔 수 없잖아요. 마음이 없는데 그게 어떻게 진짜에요. 가짜는 천국이 없습니다. 가짜는 내 영혼에 감사와 기쁨을 맛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진짜로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 진짜 신앙이 왜 없어졌는지 우리는 그것을 지금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정직한 신앙은 5절에 보니까
-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_이사야66:5-9, 시편95:7-8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아 그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지금 뭐라고 말씀하고 계시냐면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 떤다는 말은 부르르 떤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떤다는 것입니다. 왜 말씀으로 말미암아 떨어야 되냐? 여러분 말씀을 들으실 때 성경을 읽을 때 떨리는 마음이 있으십니까? 그게 없죠? 그게 우리에게 없어졌습니다. 그게 없어졌다는 말은 무슨 말이에요? 안 믿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진짜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읽는 것입니다. 그냥 성경 읽는 것입니다. 복 준다고 하니까 그냥 성경 3장씩 읽는 것입니다. 조금 낫다고 하니까 그냥 읽는 것입니다. 그거라도 해야 다행인데 경건주의 시대 때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은 줄 아세요? 한 절 한 절을 두렵고 떨림으로 읽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이니까. 경건주의 때 예배는 어떻게 예배를 드렸냐면 주일 공동체 예배드릴 때 목회자가 성경을 봉독을 하면 전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앉아서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니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창조주 심판주 하나님 말씀을 우리가 읽고 듣는 것입니다. 목사 설교 말고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말씀을 지금 여러분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떨림이 없다는 말은 어떻게 되는 거죠? 우리가 병 들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병 들었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이야기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항상 신중하고 집중하고 귀 담아 듣게 되는 것이 당연한데 그게 사라졌다는 것은 더 이상 주님을 사랑하거나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엄청난 사역을 많이 합니다. 바울처럼 큰 역사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섰다 하면 넘어질까 주의하라. 저는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섰다 하면 넘어질까 주의하라. 그런데 이제 역사를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엄청난 왕이었습니다. 물론 그가 실수도 했고 넘어지기도 했지만 하나님 사랑하는 것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가 기도하는 것, 말씀을 사모하는 것. 그래서 그 축복을 누가 다 받았냐면 솔로몬이 다 받았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이 다윗을 통해 얼마나 받은 복을 받았는지. 시편 72편이 다윗의 기도인데 솔로몬이 그것을 인용합니다. 그것을 늘 고백합니다. 다윗의 기도를 늘 반복해서. 솔로몬이 얼마나 큰 복을 받았어요. 그런데 솔로몬 자녀 때 다시 악을 행하는 자녀들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녀들이 나왔습니다. 얼마나 악했는지 모릅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에요? 솔로몬이 다윗이 행한 대로 따라간 거 같지만 그 풍요로움 속에서 점차 영적으로 무뎌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영적인 긴장감들이 사라지고 아버지와 같이 기도하겠다고 했지만 그렇게 기도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자들이 많고 물질이 많고 풍요롭기 때문에. 점차 그런 영적인 긴장감들이 사라지고 어떻게 됐죠? 자기 자녀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대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노아 아시죠? 노아는 역대급 입니다. 왜 역대급이냐? 하나님이 심판으로 온 인류를 지면에서 쓸어버리시고 유일하게 남겨두신 가정이 노아 가정입니다. 노아가 얼마나 신앙생활을 잘했냐면 무려 120년 동안 산꼭대기에서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해서 매일 하루하루 성실하게 방주를 성실하게 지었던 사람이 노아입니다. 120년 동안. 인류가 다 죽고 홍수가 끝나고 나왔을 때는 이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어, 우리 가족 밖에 없으니까, 우리 완전히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 제대로 해보자. 다 이런 마음이었겠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성경은 뭐라고 기록해요? 노아가 술에 취해 옷을 벗었더라. 노아가 술에 취해요? 120년 동안 산꼭대기에 그 핍박과 고난을 감수하면서 노아의 방주를 지었던 노아가 술에 취해. 그게 우리 인간입니다. 어떻게 됐죠? 그 술 취한 것을 함이 저주했습니다. 어떻게 됐죠? 함의 자녀-자녀, 노아의 4대손이 니므롯이라는 사람인데 니므롯이 바벨탑을 쌓았습니다. 니므롯이라는 뜻은 반역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공개적으로 반역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여러분 이해가 되시죠?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게 사라져버리면 우리 자녀들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짜 무섭고 기분 나쁜 게 뭐냐면 지금 우리 시대가 딱 그 시대와 너무 똑같은 것입니다. 노아가 술 취하던 시대. 대한민국이 대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역사상 유래 없는 부흥을 경험했고 한국교회가 많은 선교와 전도와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어요. 우리가 복음을 얼마나 많이 전했어요. 그런데 지금 마치 노아가 술 먹고 옷 벗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그것을 보고 비웃고. 마치 솔로몬 시대 같은 것입니다. 술에 취해 여자에 취해서 사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민감하고 예민한 것이 다 사라졌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한 말씀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 기울이여서 순종하려고 애씀의 신앙이 다 사라졌습니다. 목회자들이요? 똑같습니다. 성도들이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목회자들이 그러고 있습니다. 저 같은 목회자들이. 하나님 말씀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말씀 뽑기 이런 거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떠는 자. 그건 진짜 정직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들을 때 떨리십니까? 두렵습니까? 저는 진짜 두렵습니다. 저는 제 자녀들이 예수님 믿지 않을까봐 두렵습니다. 우리 다음 세대가 더 이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사 시대가 올까봐 진짜 무섭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될까? 우리 장로님들, 권사님들과 함께 기도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될까? 우리가 회개하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어떻게 해야 될까?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 되고 우리가 그의 기르시는 백성이 되려면 그의 음성을 듣거든. 8절 보세요.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_시편95:7-8
므리바 사건 다 아시죠? 시편 저자가 므리바 사건을 인용했습니다. 원래 반석에서 물이 나오게 하려면 반석을 지팡이로 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반석을 쳐라. 반석을 치면 물이 나오도록 하셨는데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원망하고 짜증내고 화내니까 화가 나서 말로 반석에서 물이 나올 거야. 이런 식으로 감정적으로 대처를 한 것입니다. 물이 나왔습니다. 하나님이 그때 뭐라고 하셨죠? 너와 아론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거야.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결정적인 사건입니다. 므리바 사건. 그래놓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뭐라고 하셨냐면 너는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어.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한 것입니다. 이 므리바 사건. 우리의 상황과 환경이 굉장히 많이 우리에게 영향을 많이 끼칩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훼손해버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을 바꿔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아침마다 하나님 말씀에 떨어야 합니다. 경건주의 시대 때 많은 크리스천들은 그런 삶을 살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성경을 그냥 읽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떨어야 합니다. 그거 잃어버리면 우리 믿음, 신앙, 하나님이 함께하심도 다 사라진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세 번째 정직한 신앙은 무엇이냐?
-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 위로를 받으리니_이사야66:10-11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읍과 함께 기뻐하라 다 그 성읍과 함께 즐거워하라 그 성을 위하여 슬퍼하는 자들이여 다 그 성의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성과 함께 기뻐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 그런 자들에게 뭐라고 하시냐면 하나님은 11절에. 너희가 젖을 빠는 것 같이 그 위로하는 품에서 만족하겠고 하나님이 우리를 품어주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 품안에 있는 것이 위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품 안에 있으려면 예루살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예루살렘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먹어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 성전을 다 파괴하셨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예루살렘은 성전, 건물, 벽돌로 세운 건물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 오시기를 고대하는 신앙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구약은 그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 많은 우리에게 찾아오려고 소망하는 마음이 예루살렘 이었습니다.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주시려고 약속하신 그 메시아가 그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시는 그 교회가 그 우리의 믿음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그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가 주님 품에 위로를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 언제 위로 받죠? 신앙생활하면서? 우리 집이 갑자기 부자가 되면 위로 받습니까? 그건 위로가 아니라 잠깐 기쁜 거죠. 우리 자식들이 좋은 직장, 대학에 합격하면 위로 받습니까? 그건 위로가 아닙니다. 잠깐 기쁘죠. 세상 살면서 좋은 일이 생긴 거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진짜 위로는 하나님 품에 있을 때잖아요. 여러분 우리가 그거 알잖아요. 진짜 위로는 주님이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와 함께할게, 너는 내 자식이야 이거잖아요. 그건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라는 것입니다. 주님 오심을, 주님이 오시는 그 예루살렘. 주님이 메시아로 오시고 그리스도로 오시는. 우리가 예루살렘을 교회로 많이 비유를 하는데 교회는 무엇인가요? 지금 신약교회는 무엇인가요? 주님이 다시 재림하시는 것을 고대하고 준비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저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제가 뭐 남들이 볼 때는 비전도 없고 목적도 없고 목회방향과 철학도 없어 보이지만 제 나름대로 비브릿지를 하고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클로리를 하고 또 중직자 기도회를 하면서 제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비전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교, 전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브랜드를 만든 것이 비브릿지와 클로리입니다. 클로리는 청년들 예배이름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가 무신론자들을 향해서 전도하려고 만든 비브릿지와 같은 브랜드입니다. 클로리 이름으로 우리는 찬양전도도 시작할 것이고 클로리 이름으로 전도지도 만들 것이고. 클로리 이름으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예수님이 찾아가셨던 것처럼 우리가 찾아갈 것입니다. 그게 이해가 안 되면 왜 이거 이런 식으로 하지? 왜 기부금을 받고 이런 것이 필요하지? 이렇게 이해를 하실 것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중직자 기도회를 왜 해야 됩니까? 사실 저는 장로님, 권사님하고 오래전부터 기도모임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모임이 제가 기도모임을 합시다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합시다 그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바이블 스쿨을 통해서 우리 장로님, 권사님들이 성경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서포터를 했고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기도해야 될 이유들을 찾아냈고 아, 이제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돼. 이런 마음이 저 안에 많이 들어서 중직자 기도회를 하자. 진짜 장로님, 권사님들이 함께 모여서 기도하고 흩어지면 또 자기의 기도처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기도밖에 없는데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예루살렘을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이 우리 가정에 다시 오시도록. 예수님이 이 나라와 민족에 우리 다음세대에 다시 오시도록 그것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완전히 이해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이게 진짜 정직한 신앙입니다.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보다 강력한 힘은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밥도 하고 봉사도 하고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주님 오심을 그걸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다시 오심을. 물론 예수님이 재림 때 땅 끝까지 복음이 증거 되면 오시겠지만 지금도 오시고 계시잖아요. 우리 가정에 오셔야 되잖아요. 우리 청년들에게 오셔야 되잖아요. 예수님이 지금 우리 자녀들에게 오셔야 되잖아요. 그 일을 사랑하는 게 바로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가 없다면 불가능합니다. 예수님 오심을 기대하고 사모하고 사랑하는 자 그들이 전도도 하고 헌신도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없다면 우리가 네팔에 어떻게 교회를 세우고 어떻게 저 많은 네팔의 영혼들이 세례를 받고 예수님 믿고 할 수 있겠어요. 헌신도 사랑해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역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폭력이 됩니다. 제가 폭력이라는 단어를 써서 죄송하지만 그래도 목사님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사랑 없는 사역을 폭력이라니요? 여러분 솔직히 교회는 사랑하는 자들로 이루어지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회사가 아니고 월급 주는 곳이 아닙니다. 권사님들 장로님들이 우리 장로님 주차 봉사한다고 누가 교회에서 월급 줍니까? 표창장이라고 하나 줍니까?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찬양팀을 하고 성가대를 하고 헌신해도 누가 이런 관리를 하는데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꽃에 물을 주고 있을 것이고 누군가는 이 화분을 관리하고 있겠잖아요. 알아주는 사람 없습니다. 내가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부족한 교회지만 주님 오심을, 주님의 임재를 소망하고 섬기기 때문에 이 교회에서 많은 영혼들이 예수님을 믿고 우리 자녀들이 신앙생활하고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경건주의 시대 때 많은 성도들이 교회를 사랑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사랑했는지 제가 마주하니까 부끄러웠습니다. 교회를 진짜 사랑했네. 내 집보다 먼저 사랑했네. 우리 집짓기 전부터 그 사람들은 교회부터 먼저 지었으니까. 우리 주일학교 양육 교사하는 것이 세상에서 교사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으니까. 주일학교 교사를 훨씬 더 명예롭게 생각했으니까. 교회를 다닌다가 아니라 교회를 사랑하기를 여러분 축복합니다. 그럼 하나님은 그 품으로 위로하신다고 합니다. 그 영광의 풍성함으로 우리를 즐거워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이 세 가지가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이고 이스라엘을 축복하시는 내용입니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보면 뭐에요? 정직하게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마음대로 되나요? 잘 안 됩니다. 왜 잘 안 될까요? 정직한 신앙은 우리 마음으로 하는 신앙인데 이 마음을 아무도 관리하지 않고 이 마음을 아무도 보지 않기 때문에 꽁꽁 숨기고 있기 때문에 마음을 오픈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마음으로 교제하지 않습니다. 마음을 다 숨깁니다. 마음이 고장 나 있는데도 내 마음이 고장 났다는 것을 들키면 창피하다고 생각하니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하는 신앙이라야 하나님 앞에서 정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정직한. 그래서 우리가 정직한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서 엄청난 축복을 하셨습니다.
Ⅲ. 정직한 예배_이사야66:12-14, 48:17-22
12.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그에게 평강을 강 같이, 평강을 강같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에게 뭇 나라의 영광을 넘치는 시내 같이 주리니 너희가 그 성읍의 젖을 빨 것이며 너희가 옆에 안기며 그 무릎에서 놀 것이라 이 예루살렘 성읍이 마치 어머니 같은 것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옆에 눕고 젖을 빨고 그 안에서 놀고. 13절 보세요. 13. 어머니가 자식을 위로함 같이 내가 너희를 위로할 것인즉 너희가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으리니 14. 너희가 이를 보고 마음이 기뻐서 너희 뼈가 연한 풀의 무성함 같으리라 여호와의 손은 그의 종들에게 나타나겠고 그의 진노는 그의 원수에게 더하리라_이사야66:12-14
우리가 이런 신앙생활을 회복하고 이런 정직한 예배를 회복하면 교회는 저와 여러분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품안에 있는. 세상 무신론자들이 이 교회를 그렇게 느끼는 것입니다. 어머니 품 같이. 따뜻하고 위로받는 곳이 되고. 사랑이 있으니까. 여러분 그런 교회 가면 사랑이 있겠잖아요. 우리가 가식이 다 사라지고 거짓이 사라지고 정직해진다면 우리 교회가 어떻게 될까요? 참 따뜻하게 될 것 같아요. 물론 그런 모난 모습으로 우리가 흉도 보고 뒤에서 쑥덕쑥덕하겠지만 저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그걸 충분히 충분히 그것까지도 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역사자료에서 그것을 보고 있습니다. 정말 강퍅한 사람이 마음이 완악한 사람이 교회를 너무 싫어하는 사람이 그 교회의 따뜻함, 성도들의 따뜻함으로 변화되어서 예수님 믿고 같이 따뜻해지는 것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 위로가 무엇인가? 바로, 예수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신랑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것만큼 우리를 위로해주시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와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신앙생활하면 예배의 기쁨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예배는 예수님과 연합입니다. 예수님을 신랑 삼아 살아가는 모든 삶이 곧 예배입니다. 우리 인생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린다 이 정도가 아니라 우리 인생 자체가 예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 경배하고 예수님을 친구삼아 예수님이 나의 신랑 되시는 예배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의 삶은 예배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직장도 예배의 현장, 가정도 예배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 예배드리시는 분들 계시잖아요? 저는 가정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립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 사랑하기 때문에 내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집에서 그런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다 모여, 사도신경 합시다. 아빠가 말이지. 그 예배를 통해서 엄마, 아빠들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게 아닙니다. 그것 예배가 아닙니다. 아이들은 그것을 예배라고 느끼지 않습니다. 예배는 엄마, 아빠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걸로 말하고 행동하고 아이들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을 아이들이 느끼는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 사랑하는구나.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구나. 그게 가정예배입니다. 물론 형식적인 예배도 필요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하셨습니다. 사실은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 너희가 내 음성을 듣기 위해서 이런 제사법을 주는 거야. 제사법이 없어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그게 있어야 되냐? 왜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되고 주일날 예배를 드려야 되냐? 우리가 그만큼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이렇게 모이게 하셨고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는 신앙생활인가요? 그게 진짜 신앙생활입니다. 그게 예수 믿는 것입니다. 내 직장, 가정, 삶에서 내가 진짜 주님을 사랑합니다. 내가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내 평생 주님을 사랑합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히브리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마귀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진짜 예수님 사랑하고 마음에 예수님 오심을 늘 고대하고 예수님 가까이하려고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어떻게 이겨요.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목사지만 제 신앙은 늘 어떻게 하면 주님을 가까이할까. 어떻게 하면 죄에서 멀어지고 더 하나님을 가까이할까. 어떻게 하면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 거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가득하다고 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거기에 임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으로 하는 신앙생활, 정직한 신앙생활, 정직한 예배.
17. 너희의 구속자시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이신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는 네게 유익하도록 가르치고 너를 마땅히 행할 길로 인도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18. 네가 나의 명령에 주의하였더라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공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19. 네 자손이 모래 같았겠고 네 몸의 소생이 모래 알 같아서 그의 이름이 내 앞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겠고 없어지지 아니하였으리라 하셨느니라 20. 너희는 바벨론에서 나와서 갈대아인을 피하고 즐거운 소리로 이를 알게 하여 들려 주며 땅 끝까지 반포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야곱을 구속하셨다 하라 21.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이 목마르지 아니하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이 솟아나게 하셨느니라 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_이사야48: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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