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5월 15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 |
제 목 : |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 무엇이냐 |
본 문 : | 누가복음 24:13-35 |
박영성 목사
매년 한 번씩은 이렇게 오는 교회인데 팬데믹으로 인해서 이리저리 잘 못 오게 된 것 같습니다. 대면으로 다시 예배하게 돼서 영적인 분위기가 다시 잡히는 것을 보면서 참 감사하다 생각을 합니다. 저는 가스펠교회를 놓고 항상 기도를 합니다. 요즘 그런 교회가 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가 되게. 하나님의 마음에 흡족한 교회가 되게.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게. 제가 친구가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제가 가장 아끼는 친구가 섬기는 교회이기 때문에 더 그렇게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참 슬프지만 전 세계 교회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미국 교회도 많은 부분에 있어서 이번 팬데믹으로 더 무너져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모습, 저런 모습으로 무너지고 있는데 중심에 그런 기도들을 해봤습니다. 하나님, 왜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가 이렇게 문을 닫고 무너지고 있나요? 하나님이 주신 부분이 뭐냐면 필요가 없나요?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인데 무너져가고 문을 닫게 되는 부분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분명히 남겨놓으실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냥 문을 닫게 놔두시는 부분들을 보면서 혹시 하나님, 하나님의 촛대를 옮기셨습니까? 그래서 그 교회가 문을 닫게 되는 건가요? 교회가 문을 닫게 되고 무너지게 되는 것들을 보면서 참 마음이 아픕니다. 왜냐하면 교회들이 세워져야 캄캄한 거리에 불이 있는 거잖아요. 적어도 캄캄한 그 곳에서 헤매던 자들이 불빛으로 나와서 참 빛이 뭔지 하나님을 알아가는 삶이 뭔지 알아갈 텐데. 그게 안 되니까. 이게 영적인 흐름인 것 같습니다. 한국 교회나, 미국 교회나 전 세계 교회가 점점 어려워지는 것들을 보면서 이유가 뭘까 라는 생각을 참 많이 했습니다. 특히 미국은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그 자리에,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을 놔요. 그러니까 교회가 무너지더라고요. 하나님이 왕으로 좌정하셔서 그 하나님이 교회를 이끌어 가시고 통치하시고 끌어가셔야 될 것이 맞는데 점점 그 하나님 자리에 다른 것들을 놓는 교회들이 참 많더라고요. 특히 미국은 하나님 자리에 나 자신을 놔요. 개인주의가 팽배합니다. 그냥 이데올로기다 그렇게 보시면 착각인 것 같습니다. 그 영적인 흐름을 끌고 가는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있습니다. 그 공중 권세 잡은 자가 전략을 가지고 이데올로기도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게 알게 모르게 많은 사람들 가운데 들어가 있고 그 사람들이 세상의 영향을 받고 교회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그 영향을 받고 목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교역자들이, 교회의 리더들이 그 영향을 받고 교회에 앉아서 교회를 끌고 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자리에 누구를 놓고요? 나 자신을 놓고. 하나님 말씀 대신에. 교회에 가장 중요한 것이 뭔가요? 하나님의 말씀이잖아요. 그 하나님 말씀 대신에 뭘 놔요? 자신의 생각을 놔요. 자신의 의견을 놔요. 여러분들 생각이 틀렸다 생각해보신적 있으세요? 계속 그렇게 살면 정신병이 올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옳다 라고 생각하고 그 생각대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생각들이 같나요? 너무나도 틀립니다. 여러분들 결혼하셨으면 옆에 계신 분의 생각이 또 우리의 생각이 같나요? 틀립니다. 100명이면 100명의 생각이 다릅니다. 교회가 하나 될 수 있을까요? 안 되겠죠.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내 생각, 내 기준을 집어넣으니까 교회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어떤 현실이 와도 어떤 사단의 공격이 와도 이겨낼 수 있는 비밀이 그리스도 복음 안에 있잖아요.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무너지고 성도들이 무너질까요? 그게 저는 고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는데 하나님은 약속이 신실하신데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들을 정말 신실하게 끌고 가고 계시는데 하나님의 교회를 분명히 끌고 가고 계실 텐데. 왜 우리는 힘없이 살아갈까? 왜 교회는 힘없이 무너지고 있을까? 무언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다시 점검해봐야 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섬기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신앙의 고백들을 하게 되는데 왜 나는 일주일의 현실에서는 그렇게 힘없이 주저 앉아있을까? 작은 문제가 와도 힘든 부분이 와도 이겨낼 수 있어야 하는데 왜 그렇지 못하고 있을까? 하나님은 문제가 없잖아요. 그렇죠? 하나님의 말씀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어디 있죠? 저한테 있습니다. 우리한테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 부분들을 점검하고 하나님이 또 그 부분을 어떻게 다루시는지를 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24장은 너무나도 유명한 성경구절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3년을 마치시고 십자가 상에서 피 흘려 죽으시죠,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한 명의 이름만 나왔습니다. 글로바라고. 그 제자 말고 다른 제자 두 명이 엠마오로 다시 내려가고 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자신의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3년 동안은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의 행적들을 잘 붙잡고 따라오면서 이리저리 기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나름 기대를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완전 무너진 것입니다. 가지고 있던 그 기대, 흥분 이런 것이 다 무너지고 낙심해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들이 나누던 대화들이 있습니다. 그런 대화들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됐잖아요? 그렇죠? 우리가 예전에 어떻게 살았던지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셨습니다. 그게 신앙생활이잖아요.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인데 혹시 여러분들의 실제 삶에서 어떤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지 점검해보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누고 있는 대화는 우리 중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니까 안에 있는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하루 같이 시간 보내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습니다. 더 하고 싶습니다. 중심에 있는 이야기들을 나누고 통하고 싶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짜 찐친이라 그러죠. 만나면 내 안의 것들을 내놓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대화를 나누시나요? 점검해보셨나요? 정말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이 피 흘려서 그 값진 피로 새 생명 얻은 자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그 신분을 가지고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가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지. 아니면 그것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 그대로, 내가 가지고 있던 기대 그대로, 기준 그대로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이런 대화들을 나누고 있는지. 두 제자들의 대화를 보면 신기한 것이 있습니다. 둘이 대화를 나누는데 어떤 이야기냐면 나사렛 예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제자들이잖아요. 당연히 그 부분들을 이야기하겠죠. 요즘 일어났던 일입니다. 아주 핫한 이슈입니다. 그러니까 그 이야기를 나누겠죠.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_누가복음24:19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라고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중 가르치신 가르침을 다 들었던 제자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 직접 그런 가르침을 받으셨나요? 저는 그랬으면 좋겠어요. 그게 무엇일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 보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실제 얼굴을 맞대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산상보훈. 너무나도 유명하잖아요. 너무나도 소중하고. 그 산상보훈을 직접 들었습니다. 산상보훈이 너무나도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제껏 이렇게 들어왔잖아, 그런데 나는 너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 그러면서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기준을 다 바꿉니다. 잘못된 것을 다 바꿉니다. 그게 산상보훈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됐잖아? 하나님 나라의 자녀가 됐잖아? 그러면 이제는 전에 생각들 내려놓고 잘못된 종교의 가르침 내려놓고 이제는 이렇게 살아가야 되는 거야. 이게 너희들의 가치관이 돼야 돼 라고 이야기를 다 하셨습니다. 비유의 말씀들. 예수님이 더 자세히 더 실제적인 부분으로 다가서기 위해서 비유도 사용하셔서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뿐인가요? 예수님의 기적, 이사. 이런 것들을 두 눈으로 목도했습니다. 우리 가운데 혹시라도 예수님이 행하셨던 그 기적을 두 눈으로 한 번 봤다면 평생 안 흔들릴 거 같죠? 홍해가 갈라진 것을 여러분들이 직접 경험했다면 안 흔들릴 것 같잖아요? 그 기적 한 번 체험하면 평생 그것 가지고 갈 것 같잖아요?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적과 이사를 다 두 눈으로 목도 했습니다. 가나 혼인잔치,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습니다. 오병이어. 우리말로 대박이잖아요. 진짜 보잘 것 없는 것 가지고 4,000명을 먹이시고 또 남겼습니다. 이거는 뭐에요? 말도 안 되는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풍랑을 잠잠케 하셨습니다. 자연이 예수님의 말에 복종하고 순종하는 것들을 봤습니다.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고 병든 자들을 고치시고. 이 기적과 이사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요한복음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으라고. 그 기적과 이사를 주셨는데 그것을 다 경험하고도 지금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은데 힘이 안 돼요. 소망이 안 됩니다. 상황은 이렇지만 내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그 기적과 이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기 때문에 나는 이 길을 갈 거야 이렇게 돼야 하는데 돌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훈련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이것만이 아니고 20절과 24절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 부활하심을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이게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의 대화들 중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대해서 분명히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 두 제자들이. 어떻게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는지 그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또 부활하셨던 사실도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한명이 아닙니다. 여러 명에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 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초대교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로마황제 10명이 기독교를 박해하고 이것을 말살시키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그 박해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이 이 핵심 메시지를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사도들의 가르침의 중심이 뭐였어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 이게 이렇게 힘 있는 메시지인데 이것을 나눕니다. 또 이것을 압니다. 그런데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습니다. 왜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그리스도의 기적과 이사가 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소망이 되지 않았을까요? 왜 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요? 왜 낙심해서 예전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을까요? 이와 비슷한 것이 구약에도 나와 있습니다. 출애굽 사건 아시잖아요. 출애굽, 어마어마한 일이 터졌습니다. 애굽의 열 신들,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이건 아니야. 하나님이 다 꺾으셨습니다. 그리고 출애굽하게 만드셨습니다. 430년동안 그렇게 빠져나오고 싶었던 그 노예의 삶, 건져내셨습니다.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거기에 애굽 군대, 전차부대가 다 몰살당했습니다. 그것을 두 눈으로 다 봤습니다. 그런데 광야 40년 동안 출애굽 1세대들이 이야기했던 이야기들 기억하세요? 애굽으로 돌아가자. 그것을 다 경험했는데. 그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는데. 두 눈으로 목도했는데. 왜 이 사람들은 계속 예전의 노예의 삶,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이야기를 하죠? 저는 궁금했습니다. 혹시 나는 그러고 있지 않나? 많은 성도들이 그러고 있지 않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초대교회에는 로마를 뒤집을 정도로 로마의 박해를 넘어설 수 있을 만큼의 힘과 능력이 되었는데 왜 우리에게는 그렇지 않을까? 이유 중에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들의 기대에 맞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게 너무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내가 기대했던 메시야라는 기대가 있잖아요. 메시야가 오시면, 그리스도가 오시면 이런 일이 일어날 거야. 기대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들어도. 그 기적과 이사를 봐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보고 들었어도. 내가 가지고 있는 기대, 기준이 바뀌지 않으니까 이게 안 바뀌니까 그 어마어마한 메시지가 나에게 힘이 안 됩니다. 소망이 안 됩니다. 21절에 이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_누가복음24:21
지금 정치적인 상황이 이스라엘이 로마에 속국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를 건져내실 거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힘없이 십자가에. 십자가는 저주의 형틀입니다. 그냥 보통 죄수가 십자가의 형틀에 죽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악랄한 죄인들에게 지어지는 것이 십자가 형틀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었던, 내가 그렇게 믿었던 메시야 일거야. 이스라엘을 속량하고 우리를 거기서 건져낼 거야라고 했던 그 기대, 기준. 이게 싸그리 무너진 것입니다. 너무나도 힘없이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것을 보면서. 이들이 이해한 구원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조금 더 나아진 삶을 바란 것입니다. 지금 로마에 속국이 되어 있는데 여기서 빠져 나오면 너무 좋겠습니다. 메시야가 오시면 이해하시겠지. 나중에 사도행전 1장에도 부활하신 주님을 여러 번 만난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승천하시기 전에 뭐라고 물어보냐면 예수님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몇 번 봤는데 그 때 또 묻는 질문이 뭐냐면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예수님이 얼마나 답답하셨겠어요. 이거는 너희들이 알 바가 아니야, 그러면서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완전히 동문서답을 하신 것입니다. 그냥 무리들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을 좀 따랐던 무리들이 아니고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이 고민을 계속하고 질문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이 이 기준을, 이 기대를 버리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이 나에게는 별로 소망이 되지 않습니다. 당장 내 현실에 조금 더 나은 삶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예수 믿게 되면 문제가 없다던데? 예수 믿게 되면 행복해진다던데?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너무나도 힘없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무언가 지금 내 현실에는 너무나도 급하게 필요한데. 경제적인 부분이나 사회적인 부분이나. 그것을 주시면 좋겠는데 안 주십니다. 낙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대하는 그리스도의 구원은 무엇인가요? 미국에는 번영신학, 번영복음이 있습니다. 이들이 가르치는 복음은 예수 믿으면 번영할 거야. 더 나은, 더 밝은 미래가 너희 앞에 있어. 조엘 오스틴이 이야기하는 복음입니다. 교수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솜사탕 복음이라고. 복음 그거 아닌데. 솜사탕 주니까 달콤하잖아요. 미국에서 가장 큰 교회입니다. 스타디움을 빌려서 교회로 만들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캘리포니아 남가주 지역에 아주 크던 영향력 있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수정교회입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로버트 슐러 목사님의 설교를 조사했습니다. 그분이 사역했던 사역 기간에 설교를 다 조사했는데 죄에 대한 지적이 없었습니다. 지옥에 대한 이야기 없습니다. 회개를 촉구하지 않았습니다. 헌신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왜요? 오는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야 되잖아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전달해야 되잖아요. 교회가. 그런데 오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교회로 바꿔놨습니다. 교회가 하나님 자리에 뭘 놨어요? 나를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대신에 내 기준을 놓은 것입니다. 지금 수정교회 부도났습니다. 이리저리 해봐도 안 됩니다. 천주교가 샀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유럽교회를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미국교회 모습입니다. 이유가 뭘까요? 나만의 기준이 있습니다. 내가 메시야, 구원에 대한 생각을 할 때 가지고 있는 기대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점검해보셔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들 나누는 대화 가운데 그것이 스물 스물 나올 것입니다. 진짜 내가 교회 다니고 예수 믿으면 이렇게 되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것 때문에 낙심해 있는 사람들. 그것 때문에 주저앉고 있는 사람들.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 너무 많습니다. 낙심한 것들을 서로 나누면 얼마나 은혜 되는지 모릅니다. 믿음의 고백들을 하면 잘 안 믿기잖아요. 반응도 잘 안 해줍니다. 그런데 낙심된 이야기, 너무 현실적입니다. 너무 이성적입니다. 그러니까 그렇지 하면서 무릎을 치고. 이거는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확산력이 강하고 빠릅니다. 치사율도 엄청나게 높습니다. 우리는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해서 보호하고 싶어서 마스크를 끼고 있는데 영적인 바이러스에 대해서는 전혀 감각이 없습니다. 사단이 교회를 어떻게 가지고 놀고 있는지. 그리스도인들의 생각과 기준을 어떻게 가지고 놀고 있는지 전혀 무감각합니다. 교회가 무너진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무너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교회가 무너지죠?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교회 건물이 팔리죠? 안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계속 되다보니까 마이클 호튼 교수가 책을 썼습니다. 예수 없는 기독교. 말이 돼요? 그리스도가 없는 기독교 말이 돼요?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이야기해야 되잖아요. 그분만이 우리의 소망이고. 그분이 우리의 삶을 바꿨고 유일한 소망되신 그리스도, 유일한 힘 되신 그리스도, 이게 증거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리스도가 빠진, 없는 기독교라고 합니다. 교회가면 예수가 중심이 아닙니다. 뭐가 중심이죠? 내 기준이 중심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중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들었습니다. 초창기에 들어서 그렇구나 하고 영접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삶을 모르잖아요. 그거는 전혀 나한테 힘이 안 됩니다. 구원은 받았을지 모르는데 구원 받은 자의 삶을 모릅니다. 세상의 기준 그대로 가지고 가고 세상의 기준 그대로, 가치관 그대로. 기독교라는 종교형식, 모양은 남아있는데 그 핵심은 사라진 상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그 분의 능력이 뭔지 들었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이 무엇인지 듣고 알게 되었는데 힘이 되거나 소망이 되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고 회개하는 부분이 제 기도의 대부분이 하나님 이렇게 이렇게 해주세요 이게 너무 많은 거 같습니다. 하나님 현실 이게 너무 힘들어요. 이런 기도 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다 아뢸 수 있어야 돼요. 그런데 기도의 중심에 뭐가 빠졌냐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을 헤아리려는 기도는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 왜죠? 하나님은 약속에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고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왜 내가 지금 이런 현실을 걷고 있을까요? 왜 이런 여정을 내가 가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싶어서 기도하는 기도가 많지 않습니다. 뭐에요?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기대하는 것. 그것을 놓고 기도합니다. 그 기도를 그대로 절간으로 옮기면 비슷할 거예요. 다른 것이 없습니다. 두 제자들이 나누는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입니다. 자기들이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 앞과 모든 백성 앞에서 능한 일이고 말이래요. 그것을 체험했습니다. 죽으심, 부활하심. 들었습니다. 봤습니다. 그런데 힘이 안 됩니다. 그런 거 있잖아요. 복음도 알고 성경 지식도 많은데 교회에서 누가 나를 건드려요. 그럼 복음도 없고 하나님도 온데 간데 없습니다. 나를 건드려? 복음도 없고요, 하나님도 온데간데없습니다. 나를 건드려? 내 자존심을 건드려? 그러면 이제 화가 치밀어 오르고 그 안에 하나님의 계획 이런 거 없습니다. 때려 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교회를 찾아갑니다. 교회를 쇼핑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내 기준, 내 기대가 너무 큽니다. 이게 포스터모더니즘입니다. 사단이 전략적으로 깔아놓은 영적인 흐름입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여기서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것과 싸울 수 있는 힘이 우리가, 교회가 있어야 되는데 전혀 이야기를 해주지 않습니다. 그들의 귀를 간지럽혀 주는, 긁어주는 그런 설교는 많습니다. 그런데 진짜 하나님이 원하시는 소원, 그 기준, 절대 진리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라는 설교는 잘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면 너무 낙심되잖아요. 이 제자들이 완전히 바뀝니다. 180도 바뀝니다.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33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 및 그들과 함께 한 자들이 모여 있어 34 말하기를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35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더라_누가복음24:32-35
완전히 삶이 바뀌어서 전도자의 삶을 삽니다. 증인의 삶을 삽니다. 누가 강요도 안 했습니다. 부담도 안 줬습니다. 내려가서 낙심하고 있던 제자들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머리는 어마어마하게 컸던 제자들입니다. 보세요. 가르치심, 예수님의 행적, 기적과 이사를 다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부활하심을 듣고 보았습니다. 머리는 이만큼 큽니다. 그런데 가슴이 전혀 뜨겁지 않습니다. 이랬던 제자들을 이 큰 머리에서 무엇으로 바꾸었나요? 뜨거운 가슴으로 바꿔놓았습니다. 그게 누구인가요? 부활하신 주님. 지식으로 알고 있었던 그리스도가 마음으로 믿어져 알게 된 것입니다. 저는 요한일서 1장 1절을 너무 좋아합니다. 저는 모태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뜨거운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항상 미지근합니다. 그런데 요한일서 1장에 보니까.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_요한일서1:1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들은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눈으로 확인하고 끝나면 안 됩니다. 손으로 만져서 체험해야 합니다.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식으로 남아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 워렌 위어스비 목사님이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성경을 이해하는 지식은 큰 머리로 이끌 수 있다’ 머리가 커질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구원자와 함께 걷는 것은 뜨거운 가슴으로 이끈다’ 여러분들 지식만 꽉 차있는 신앙인이 안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없어야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만 꽉 차있으면 큰 머리를 가진 신앙생활. 말하기는 좋죠. 이리저리 정죄하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뜨겁지 않습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이 땅에 종의 몸을 입고. 비하하셨습니다. 우리는 절대 낮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누가 나를 건드리면 때려치는 겁니다. 그리스도는 철저하게 낮아지셨습니다. 이 마음이 우리에게 없으면 신앙이 힘듭니다. 제가 대학교 때 기도했던 기도가 있습니다. 그때 생각이 무엇이었냐면 내가 목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가는 거잖아요. 이게 직업이 되면 내가 이걸 평생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점이 생겼습니다. 저는 지금도 벌벌 떨고 있는데요. 사역을 시작한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십 몇 년 되면 달인이라고 하잖아요. 이렇게 했는데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이것 같습니다. 저는 사람 앞에 서는 것 너무 못합니다. 내가 이걸 직업으로 평생 가져갈 수 있을까? 의문되더라고요. 못할 거 같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이걸 직업으로 가져가면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나눠주신다면 잘 하든 못하든. 저는 잘 못할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 내 평생 내 인생을 드려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자로 서고 싶어요. 그게 저의 기도였습니다. 목사가 직업이 아니고. 내가 하나님의 일을 성실하게 잘해가는 못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그 마음을 주신다면 평생 하나님 앞에 평생 이 일을 감당하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음이 뜨거워져야 돼요. 머리가 커지면 절대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바꿔야 합니다. 보세요. 제자들이 처음에는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이렇게 이야기하다가 더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서 강권해서 우리 함께 합시다. 조금만 더 시간을 가집시다. 이게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왜 교회 나오나요? 왜 우리가 말씀을 읽나요? 읽어야 되니까? 나와야 되니까? 죽어도 내가 장로인데? 권사인데. 교회 빠지면 체면이 안 서잖아. 이래서 교회에 나오시나요? 이래야 됩니다. 예수님과 더 가까이 있고 싶고 조금 더 시간을 보내고 싶고. 그래서 예배하고 그래서 공예배만 나오게 아니고 개인예배가 되겠죠. 내 삶이 예배의 삶으로 가겠죠. 어떤 핑계를 하더라도. 핑계가 무엇이 있나요? 너무 늦었다. 너무 늦었으니깐 여기서 밥 먹고 지내십시다. 연애해 보시면 아시잖아요.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만날 핑계를 댑니다. 그래서 만납니다. 사랑하니까요. 더 함께 있고 싶으니까. 이게 우리의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뜨거워지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변화의 시작은 은혜의 복음이었습니다. 생각해보세요. 배신하고 그렇게 내가 이것저것 다 가르쳐주고 훈련시켜 놨더니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어요. 그 배신감에 너희 마음대로 살아야 이렇게 할 수도 있는 건데 찾아가십니다. 그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가십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우리는 예전의 삶을 욕구하고 원해서 옛날로 돌아갈 수 있는데 그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구약을 보세요. 그 이상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직접 찾아오셔서 하시는 이야기는 꾸짖으셨습니다.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_누가복음24:25-26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메시지들을 때 따끔따끔하고 찔리잖아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전혀 없다? 무뎌진 것입니다. 저도 말씀을 들을 때 찔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 감사합니다. 전에는 기분 나빴거든요. 얼굴 빨개지고.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우리를 바꿔가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사랑의 징계입니다. 꾸짖으시잖아요.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러면서 말씀을 풀어 다시 설명하십니다. 우리 식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우리 식대로 예수님의 가르치심과 그의 행적을 보았기 때문에 전혀 소망이 안 됐습니다. 힘이 안 됐습니다. 우리 식대로가 아니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것이 이거였잖아. 메시야는 와서 고통 당하셔야 해. 너희들의 죄 때문에. 그렇잖아요. 이사야 53장을 보면 고난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용사로 오신 것이 아니고 고난의 종으로. 고통 당하셔야, 고난 받으셔야 했습니다. 그것을 해석해 주시니까 다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기독교 안에도 해방신학이 있습니다.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상처가 뭐에요? 눌림이었습니다. 노예로 억눌렸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해방. 여성신학이 있습니다. 평등, 정의, 여성 해방, 무폭력 구속.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이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을 행하시는데 폭력을 사용하셨어?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여성신학입니다. 자신들의 기준으로 보니까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다 바꾸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남성적인 모든 용어들을 여성적으로 다 바꿨습니다. 자기 기준을 가져다 대는 것입니다. 우리 식대로 말씀을 읽고 해석하면 절대 안 됩니다. 요즘 가스펠교회에서 성경읽기를 한다고 들었습니다. 루터가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 안 다니고 그냥 성경 읽으면 안 됩니까? 그런 청년이 왔습니다. 그래, 너는 성경 읽어. 지옥에서 성경 읽고 있을 거야.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내 식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전혀 가르침 도움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이거 도우라고요. 하나님이 제사장들, 레위 지파들을 왜 각 지파에게 파송시켜놨을까요. 도우라고. 네 식대로 네가 원하는 대로 하는 게 아니니까.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있음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깨달아서 알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누가 강요하지 않았는데 이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싶어서 다니는 내 직장, 내가 다니는 학교도 이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싶어서 다니는 학교, 직장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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