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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2-05-22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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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5월 22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 한 분만 계십니다
본 문 : 고린도전서 8:1-13

 

 오승주 목사

 

- 그러나 우리에게는_고린도전서8:1-6

 

오늘 고린도전서 8장부터 16장까지는 고린도교회가 안고 있던 실질적인 문제를 다루게 됩니다. 이전의 음행의 문제라든지 이런 문제들은 바울이 가정과 성도들을 향한 메시지였다면 8장부터는 그 당시 고린도교회가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이슈들, 문제들을 다루고. 아마 저희 교회 성도님들도 이런 갈등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이런 문제들이 오늘 고린도전서에 나와 있고 그것에 대해서 명쾌한 말씀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시간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첫 번째가 8장은 우상에게 바친 제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상 숭배하는 제사 드린 다른 신에게 우상에게 드린 제물에 대해 먹어도 되냐. 먹지 않아야 되냐.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는 내용이 8장입니다. 그런데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지 마. 먹어. 하면 쉽습니다. 예수 믿으니까 먹어. 예수 안 믿으면 먹어야 하는데 예수 믿으니까 먹지 마. 쉽게 답하면 좋은데 오늘 굉장히 까다롭고 사도바울이 마음을 많이 담아서 준 말씀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_고린도전서8:1-3

 

우상에 관한, 제물에 관한 답변을 하는데 지식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의 고린도교회 성도들도 그랬던 모양입니다. 우상의 제물 당연히 먹으면 안 되지. 먹어도 되지. 우상의 제물은 구약의 율법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시잖아. 구약에 말씀이 있으니까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 사람은 오랜 한 사람대로 경험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짧게 한 사람은 짧게 한 대로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지식들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다. 저렇다. 먹어도 된다. 안 된다. 이런 이야기들을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해서 사도바울이 먼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나요?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우리가 다 지식을 가지고 있는 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반대적인 입장으로 무엇이라고 말씀을 던지나요?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덕을 세우는데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면서 이런 것이 되게 많습니다. 성경에 관한 지식 혹은 우리가 어떤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던 간에 신앙의 연차가 쌓여서 나이가 들어서 직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많은 경험들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오래하면 신앙생활이 능숙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하나요? 성경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여러분 이것이 동의가 되시고 구분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한 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믿음이 무엇일까?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믿음에 대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아마 제 작년 설교가 교회를 개척해서 가장 힘들었던 설교였던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교회 안팎의 많은 문제들 때문에. 저는 안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제 마음에 압박함, 스트레스가 있어서 그게 여러분들도 느껴졌던 모양입니다. 저는 안 그렇다고 생각하고 성경을 성실하게 강해를 했지만 느낌이 들어갑니다. 올해 학교를 가서 옛날 은사님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교수님께 고민들을 이야기했더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떤 것이 진짜 믿음이냐. 첫 믿음을 끝까지 가지고 간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에 대한 첫 은혜와 사랑을 끝까지 가지고 간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변치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믿음의 기준이 무엇이냐. 섬기는 사람이 되느냐. 자랑하고 교만 하는 사람이 되느냐. 믿음이 아닌 것은 내 신앙의 지식이나 성경에 대한 앎이나 어떤 신앙생활의 경험들이 자랑하고 교만하게 되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매의 무엇이냐. 섬기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열매는 사랑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성숙하다. 좋다. 그 열매는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것이고 그 섬김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교수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네가 처음 은혜를 받았을 때에 처음 하나님 앞에 뜨겁게 신앙생활을 했던 것을 나이가 들어서도 노인이 되어서도 그렇게 할 수 있느냐. 이것이 우리가 지켜야할 신앙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이 부족한 것이 지식의 결핍이라고 생각을 많이 합니다. 맞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도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지식이 없으니까 우상 제물을 함부로 먹습니다. 구약의 말씀을 제대로 알지 못하니 우상의 제물을 함부로 먹어서 죄를 짓습니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사랑 없는 지식입니다. 사랑이 없는 지식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창세기에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떠나십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에덴동산으로부터 추방이 됩니다. 추방된 원인이 죄인데 그 죄, 욕망. 욕망이 생기는데 욕망이 하나님이 없어도 된다고 하면서 새로 하나님 자리에 가지고 있는 욕망이 무엇입니까? 지식입니다. 나도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내 지식, 과학, 문명, 발전된 우리의 문화들, 혹은 물질들. 그래서 이것을 지식의 오류, 지식의 저주.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이런 지식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에 C.S. 루이스는 지식의 저주라고 표현했습니다. 무섭습니다.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어떤 분들은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가장 큰 적이라고 합니다. 과거의 성공했던 경험 때문에 미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온전히 준비하지 못하고 건강하게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성공이 미래의 가장 큰 적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내가 옛날에는 말이야. 그것에 사로잡혀서 미래를 준비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해서 꿈꾸지 못하고. 지식의 저주는 구약의 많은 말씀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확인을 했습니다. 그래서 잠언에 참된 지식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참된 지식이 하나님이십니다. 지식 자체가 사실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질이 지식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식의 저주, 욕망, 우리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험, 지식을 우상시하는 것들 때문에 인류의 재앙을 가져올 수 있는 것입니다. 지식을 숭배하기 시작하면 지식이 우리를 완전히. 왜냐하면 지식을 숭배하는 것은 사랑, 섬김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왜냐하면 지식에 대한 확신으로 내가 맞다 라는 오류가 생기기 때문에 남을 해치기도 하고 정죄, 손가락질하고 그것이 얼마나 큰 죄라는 것을 성도들이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인류도 그렇습니다. 그릇된 확신 때문에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고 수많은 질병과 수많은 재앙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전에 해왔던 것들 때문에 오늘 지금 하나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지식의 저주입니다. 경험의 저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적용해보자면. 과거에 해왔던 신앙생활의 노하우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순전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닐 것입니다. 

 

- 우상의 제물에 대한 습관이 있어_고린도전서8:7-8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_고린도전서8:4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_고린도전서8:7

 

이 두 절이 오늘 본문의 핵심구절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서 우상의 제물을 먹는지 안 먹든지 상관없는 자유한 신분이 되었어. 우리가 제사의 음식을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고 사실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한 분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아버지가 되시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_로마서8:1-2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고 합니다. 해방했다고 합니다. 해방이 주는 단어는 자유입니다. 자유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이 좋으면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나면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진노해? 우리가 벌 받아? 이런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먹어도 됩니다. 먹지 않아도 됩니다. 제사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우리를 해하거나 우리를 영적으로 누르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완전히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은. 구원은. 그런데 7절에 사도바울이 그러나 그런 지식을 너희들이 가지고 있어서 자유하게 되었지만 하나님 하나님을 섬기기 때문에 우상의 제물이 너희와 상관없이 되었지만 신경 써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염려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체크해야 할 것이 있다고 하면서 하는 것이 우상의 제물에 대한 습관이 남아있는 자들 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한 습관이 있는 사람들. 그 습관으로 인해서 양심이 약해지고 더러워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습관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죄의식이라는 것이 들어옵니다. 죄책감이 들어옵니다. 그러면 그 죄는 죄와 사망의 올무입니다. 그래서 그 죄의식이 죄와 사망의 굴레, 올무로 우리를 묶어서 죄인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다시 죄인이 될 수 있나요? 그럼요. 우상의 제물에 대한 습관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래서 죄책감을 늘 가지고 있으면 죄책감은 죄와 사망의 올무이기 때문에 우리를 옮아 매서 우리를 실제로 죄인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7절에 양심이 쉽게 더러워지고 12절에는 쉽게 상처를 받고 13절에는 쉽게 실족한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양심이 더러워지고 쉽게 상처받고 실족 한다는 것입니다. 실족이라는 단어 아시죠? 히브리서에서는 구원에서 떨어져 나간다고 표현했습니다. 양심이라는 단어를 사도바울이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 양심이라는 단어. 수네이데시스. 헬라어로 함께 알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양심이 찔린다고 합니다. 양심은 함께 아는 것입니다. 알고 있기 때문에 양심에 찔리는 것입니다. 지식이 없으면 양심이 찔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양심에 찔리라고, 죄라는 것을 분별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이 양심에 화인 맞았다고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양심에 화인 맞았다고 표현을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지식을 망각해버리고.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특히  말라기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포로 생활하고 나서 돌아와서 많은 믿음의 사람을 통해서 성전이 재건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공동체에 선포가 됩니다. 에스라가 말씀을 낭독할 때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고 자신의 삶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삶으로 예배하는 삶으로 준비합니다. 그런데 말라기를 읽어보세요. 하나님 앞에 더러운 것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합니다. 제사장들이 얼마나 타락했냐면 제사 드리는 것을 번거로워 했다. 귀찮아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무슨 말씀을 주고 계시는지 제사장들이. 지금으로 말하면 목회자들이. 그래서 이 양심이 더러워지고 쉽게 상처받고 실족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 우상 제물에 대한 습관이 남아있다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유진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을 보니 오늘 7-8절이 쉽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 교만한 지성보다는 겸손한 마음이 우리에게 더 많은 도움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상이라는 것은 전혀 실체가 없는 것이고 아무것도 아니며, 우리 하나님 한분밖에는 다른 신이 없다고 아주 정확하게 말합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느 고기와 똑같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참된 앎은 그렇게 무신경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평생 동안 우상에 바친 고기를 먹어왔고 그 고기 속에는 악한 것들이 들어 있어서 여러분 안에서도 악한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조건 아래에서 형성된 상상력과 양심이라면 하룻밤 사이에 바뀌어 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자신의 자유를 부주의하게 행사한 나머지 아직 과거의 틀과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한 동료 신자들을 길에서 벗어나게 할까봐 마음을 쓰십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염려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파하는 것보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상 제물에 대한 습관이 남아있어서 양심의 죄책감을 가지고 쉽게 상처받고 실족하는 사람들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을 평생 그렇게 살도록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주 안에서 성장하고 교회가 되며 믿음이 성숙하도록 안내하는 방향에서 그러나 우리에게는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우리에게 준 자유는 함부로 아무렇게 쓰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의 기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로마서 8:1-2에 자유를 누리는 것에서 가지고 있어야 될, 밑바닥에 가지고 있어야 될 하나의 약속이 무엇이냐. 그게 바로 사랑이라고 오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하라고 하는 거죠? 상처 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처 주는 행동은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가 목사님들 안 좋은 이야기를 해서 욕먹는 것 같은데 사실이니까. 제가 식사자리에 갔는데 누가 봐도 우리가 목사입니다. 종업원들이 밥 먹기 전에 기도도 하고 하니 목사인줄 다 아는 것입니다. 갑자기 목사님이 맥주를 시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얼마나 불편한지. 그 분이 맥주를 마시냐  안 마시냐가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마셔도 됩니다. 개인의 신앙이니까. 저 얼마 전에 강남에서 공동체성경읽기모임을 하고 걸어가고 있는데 오 목사님. 20년 만에 부산에서 만났던 저를 알아봤습니다. 강남에 점심시간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죠. 그 곳에서 저를 알아보셨습니다. 20년 만에. 식당에서 맥주를 먹고 안 먹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분에게 그런 대화를 했습니다. 했더니 우리가 복음을 가졌고 무엇이 문제가 되냐면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 내 신념이 내 믿음에 대한 교만함, 오만함입니다. 한국 문화에서는. 여기가 영국, 미국이라면 유럽이라면 다를 수 있습니다. 거기에 목회자에 대한 인식이 다르니까. 그러나 자기는 똑똑하고 개성 있고 믿음 있고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마음대로 살아도 되지만 혹시나 그 식당에 우리의 성도가 목사님, 술 마시네. 그 모습을 보고 실족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예가 본문과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경험한 세계는 목회자의 세계밖에 없으니까.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서 3절에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사람의 방언이 얼마나 뛰어난 믿음이에요? 사람이 방언한다는 것이 얼마나 실력 있는 믿음이에요? 천사의 말을 한데요. 와. 천사의 말이니까 끝난 거 아니에요?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그런 분들이 계십니다. 목회자에도 이런 분들 많습니다. 나는 다 알아. 복음, 하나님 말씀 다 꿰뚫었어. 교만이 오만이 그 지성에 대한 교만이 하늘 끝까지 가있는. 제 지도교수께서 한국에서 최고가는 교회사 석좌교수입니다. 전 세계가 인정하는 석학이십니다. 그런데 수업시간마다 습관적으로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옛날에 호주에 가서 어떤 교수에게 배웠는데. 항상. 세계적인 석학입니다. 우리가 그 분 앞에서 년도에 대해서 무슨 말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1998년 8월 12일에 무슨 일이 한국 교회에 일어났다는 것을 다 외우고 계신 분이십니다. 무슨 사건이 있으면 줄줄줄 나오시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항상 수업시간에는 내가 공부를 해보고요. 이 부분은 확인을 해보고요. 이 부분은 자료를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아요. 라고 이야기합니다. 단 한 번도 그냥 수업시간에 내가 다 알고 있는데 너희는 모르지. 라는 태도는 없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목사가 무엇을 안다고 여러분에게 함부로 정죄하고 손가락질하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함부로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보세요. 뭐라고 기록되어있는지.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모든 것을 아는 지식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얼마나 뿌듯하겠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했으니까.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_고린도전서13:1-3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순교를 말할 수 있겠죠. 내 목숨을 내서 신앙생활을 할지라도. 그런 분 얼마나 무섭습니까. 내가 목숨을 내서 이 교회를 위해서 헌신했는데. 내 재산 다 헌금했는데. 이런 분들이 제일 무섭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자유, 신앙이 성숙하고 믿음이 성숙한다는 것에 대한 열매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신념, 내 믿음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남을 정죄하고 남을 평가하는 것에 우리의 믿음이 쓰이고 있지 않습니까? 사도바울은 무엇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전파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직 습관이 남아있는 연약한 성도들, 쉽게 상처받고 쉽게 실족하고 아직 양심에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_고린도전서8:11

 

우리는 복음이라고 떠들지만 우리의 삶을 함부로 살지만 말씀을 안다고 하나님의 율법을 안다고 살지만.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그리스도께서 죄를 담당한 네 형제를 네 지식으로 멸망시켰다는 것입니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책을 예전에 추천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최고봉에 나온 멘트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이후,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실망한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았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비판은커녕 실망할 자격도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사회에 우리의 지식, 우리의 신념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는 요즘 기독교 크리스천 모습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 십자가의 사랑,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상들을 다 잃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는가. 그래서 8장에 이 지식은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고. 그래서 우리가 항상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_고린도전서8:9-1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_고린도전서8:3

 

우리보고 믿음이 성숙한 너희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이 연약한 사람들이 실족한다면 그것을 절제할 수 있는 것이 자유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유가 무엇인가요? 왜 자유를 이야기하셨는데 왜 우리는 주일마다 예배도 드려야 하고 성경도 읽어야 하고 해야 할 것이 많지 않습니까? 예수님 믿었으면 복음을 받았으면 완전히 자유 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죄와 사망에서 너희를 해방하였고 너희를 정죄할 사람이 더 이상 없고. 완전히 자유인이야 라고 말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니 자유 안에 너무 많은 의무와 책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똑같습니다. 우리가 결혼을 해도 부부 사이에 결혼했으니까 부부 사이가 자유롭습니다. 부부 사이가 자유로우니 내 신념과 믿음으로 그냥 살아간다면 그 자유가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사이에 예의가 있고 질서가 있고 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회사가 끝나면 집에 가야하고. 가정이 깨지는 것은 의무와 책임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정이 깨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밥 먹는 것, 운동하는 것. 부모님들이 자녀들에게 골고루 먹어. 아이들이 얼마나 싫어합니까. 그것이 사랑이라고 해서 좋아하는 것만 먹이면 그것이 습관이 됩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식사를 못하게 되는  병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 학교 다녀야 하고 교육받아야 하고 운동해야 하고. 이런 것을 자녀들에게 시키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왜 지켜야 하는지 왜 제 시간에 건강하게 먹어야 하고 운동을 해야 하는지 왜 우리가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집에 들어가야 하는지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하는지. 신앙도 똑같습니다. 거기에서 만약에 내 지식, 옛날에 했던 것이 드러나는 순간 그것을 안 하게 됩니다. 부부사이도 똑같습니다. 과거를 꺼내고 옛날에 내가 너한테 잘해줬던 것을 꺼내면 부부 사이에 문제가 오기 시작합니다. 신앙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은혜을 베푸시고 살아갈 말씀을 주시는데 지식에 매여 버리면 나는 믿음이 좋아 라는 지식에 빠져 교만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밀어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밀어내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우리의 삶에서 밀어냅니다. 그래서 신앙에는 신념만 남습니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말라기 이후에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500년 가까이 암흑기를 보냈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없던 시절을 보냈는데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했던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이 신념만 남아있었습니다. 저는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율법적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틀린 것인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식에 매인 유대인들. 그래서 사랑이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헌금을 하고 예배를 드리고 철두철미하게 율법적인 행위들을 했지만 그것으로 남을 정죄했습니다. 가난하고 병은 자들을 돌보지 못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에게 흘러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자마자 바리새인들에게 가장 첫 마디가 독사의 자식들아. 마귀의 자식들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이 음식에 관한 우상에 바친 제물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신앙생활에 많은 것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자칫 잘못하다가 가스펠 교회에서 성경 읽고 신앙생활도 거룩하게 하고 깨끗하게 하고 반듯하게 하고 이런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것으로 남을 정죄하고 손가락질 한다면 우리도 독사의 자식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식의 저주에 빠져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경험의 저주에 빠져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고 아무런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했던 경건생활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예물이 순교가, 방언이, 능력이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섭지 않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의 열매가 무엇이냐. 믿음이 자라고 성숙해서 나타나는 열매가 무엇이냐 라고 고린도전서에는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열매가 바로 섬기는 것이다. 섬기는 것을 성경은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연약한 성도를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정죄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길 원하십니다. 그 일에 교회가, 믿음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섬기는 사랑하는 믿음의 열매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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