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6월 05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 |
제 목 : | 복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사람 |
본 문 : | 고린도전서 9:1-15 |
오승주 목사
- 자유와 방종_고린도전서9:1-7, 8:13, 갈라디아서5:1
1.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2.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3.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4.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6. 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_고린도전서9:1-7
오늘 말씀을 잘못 읽으면 약간 민망한 말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갑자기 왜 이러냐, 희생하고 헌신하려면 끝까지 희생하고 헌신하지. 왜 갑자기 자신의 권리를 들먹거리느냐? 이렇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2절에 보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_고린도전서9:2
그러니까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내가 다른데서 사도라고 칭함 받지 않아도 되는데 내가 너희에게는 칭함을 받고 싶다 지금 이 말입니다. 너희라도 나를 사도라고 인정해달라. 왜냐하면 바울이 그 어떤 지역, 어떤 교회보다 고린도 지역, 고린도교회를 위해 많이 희생하고 헌신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나의 사도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라. 인친 것이 너희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고린도교회 성도가 사도 바울이 사도다 이렇게 말을 해줬다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교회에서 사역하면서 사도바울을 자기가 사도됨을 확신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령의 역사를 진짜 맛 봤다. 내가 목회자로서 새로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고린도 사역 전에 아덴이었잖아요. 이 고린도지역에 와서는 진짜 기도하고 영적인 사역을 했다 이렇게 표현 할 수 있겠죠. 그러면서 본인의 정체성을 찾았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 다른 교회 성도들은 모르지만 적어도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복음을 받고 바울이 심혈을 기울여 그들을 양육했고 심지어 바울이 교회를 세우려고 무진장 노력한 지역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믿고 그랬으니까 바울이 그들에게 나의 사도됨을 인정해달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3절에 보니까
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_고린도전서9:3
지금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우고 이런 일들을 했는데 오히려 고린도 지역에서는 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이 나온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사역을 마치고 다른 지역으로 사역을 떠나고 나서 이 고린도교회와 지역에는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이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다른 것으로는 흠 잡을 것이 없으니까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바울이 정통 사도냐? 열두 사도냐 이 말입니다. 게바냐? 요한이냐? 이렇게 예수님의 직속 사도이냐? 사도라는 것은 사실 예수님의 직속 열두 제자에게만 붙여졌던 직함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직속 제자가 아니지 않느냐? 그런 것으로 바울의 사도직에 이의를 제기했고 그것으로 인해서 배척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게바가 필요하다. 고린도교회는 사도가 필요하다. 뭐 이런 식으로. 저렇게 바쁘고 밖으로 돌고 이런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는 우리를 양육해주고 또 정통성을 가진 사도가 우리 교회 와서 목회를 했으면 좋겠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바울이 욱 한 것입니다. 억울하고 속상하고. 그래서 조금 민망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런 의도로 본문을 썼다면 바울은 진짜 위대한 전도자로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그런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죽도록 헌신했던 고린도교회. 이 성도들이 거짓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릇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사도직을 문제 삼았던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었지 않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오늘 본문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목회자상을 가지고 계십니까? 여러분 교회 다니면서 우리 목사님이 이랬으면 좋겠다 라는 목회자상을 혹시 가지고 계십니까? 가지고 계셔야 합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스펠교회 성도님들은 어떤 목회자상을 가지고 계실까? 그런데 사실 참 이상합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목회자들은 가난하고 초라하게 사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스스로가 겸손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그런데 그런 목회자를 보고 성도들이 우리 목사님 참 겸손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지만 또 어떤 성도들은 우리 목사님 진짜 무능하다, 진짜 실력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삶이 풍족하게 부유하게 사시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집안이 좋다든지 이래서. 자기 목회 사례로 풍족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성도들은 정말 축복 받은 목회자라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있지만 또 그런 삶이 아니고 궁핍하게 살면 또 이렇게 말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자기도 저렇게 살면서 누구보고 축복 받으라고 말씀을 전하느냐 이렇게 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살든지 욕먹지 않게 살 재주가 없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는. 왜냐하면 성도들 각자, 자기가 생각하는 목회자상이 다 다르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의 생각을 다 만족하게 해줄 수 있는 목회자가 있을까 과연.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특별한 사역을 했습니다. 다른 지역보다 훨씬 오래 머물렀습니다. 여러분 고린도라는 지역을 아시죠. 얼마나 우상이 심하고 음란이 심했는지. 고린도에서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사역이었습니다. 바울이 굳이 여기까지 와서 교회를 세워야 돼? 할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바울을 돕는 동역자들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서 교회를 세우고 목회를 하면서 사실 고린도교회에서 사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후원을 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서 후원을 받았고 다른 지역의 성도들에게 받았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오래 머물지도 않았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고린도처럼 에너지를 쏟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다른 지역의 성도들이 바울을 서포트했습니다. 후원해줬습니다. 그게 빌립보서 4장 15-16절에 나옵니다.
15.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16.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_빌립보서4:15-16
바울의 쓸 것을 두 번이나 도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립보교회는 그 이후로도 끊임없이 바울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왜 고린도교회에서는 바울이 사례를 받고 전문적으로 목회를 하지 않고 뭐했죠? 천막을 만들었습니다. 고린도교회에서 목회하면서 같이 천막을 만들면서 자기의 쓸 것을 스스로 공급 받으면서 목회를 했습니다. 참 아이러니 합니다. 많이 아이러니합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역을 많이 하지 않는 지역에서는 후원을 받고 자기가 사역을 많이 한 지역에서는 사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4절에 보면 그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억울한 표현으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절에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다른 사도들처럼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7절에 재정적 지원을 받을 권리가 없겠느냐? 8-9절에 이 모든 권리가 마땅하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거 아니냐?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스스로 수고하는 종이 되어 고린도교회를 섬겼습니다. 여러분 바울을 오늘날 오승주 목사와 비교하지 말아주세요. 바울에 관해서 설교를 할 때 많은 성도들이 교회 목사님과 바울을 많은 비교를 한다고 합니다. 비교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바울이 아닙니다. 저는 천막을 만드는 기술도 없고 평일에 택시운전해서 돈 벌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니 비교하지 말아 주세요. 그런 모습에 은혜를 받으시면 안 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어떤 상황인지 제가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상황을. 그런데 그런 모습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오히려 무능한 모습으로 비춰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도들은 엄청난 권위와 본부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된 어떤 후광들 이런 것이 되게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진짜 고린도교회를 사랑하고 섬겼던 목회자는 바울입니다. 맨 땅에 헤딩해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우상이 가득하고 음행이 가득한 곳에서. 여러분 서신서 읽어보면 빌립보서, 에베소서 다 은혜롭지만 그 어떤 서신서보다 바울의 마음을 가장 느낄 수 있는 서신서가 고린도전후서 아닙니까. 저는 서신서를 비교하면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 고린도전서, 후서 만큼 바울이 애정을 많이 쏟고 이 서신서를 그냥 쓴 것이 아니구나. 그만큼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많이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거짓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바울을 무능하다고 했습니다. 마치 실력 없는 목회자처럼. 심지어 사도가 아니지 않느냐. 그런 것으로 바울을 배척하고 비판하고 비난하고. 그런데 12절 보시면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_고린도전서9:12
바울이 이 권리를 쓰지 않고 참는 것은 복음 전하는 것에 장애가 없게 하려고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지 그 이유뿐입니다. 제가 오늘 바울의 고린도전서 9장을 묵상하면서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중물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습니다. 어떤 책에 보니까 사하라 사막을 여행하면 사하라 사막은 물이 없죠, 그런데 사하라 사막을 건너가는 여행객들을 위해서 물을 길러서 먹을 수 있는 펌프 시설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하수 깊은 곳에서 물을 끄집어내서. 그런데 막상 가면 그 펌프 안이 바짝 말라 있어서 물이 한 방울도 없다고 합니다. 너무 실망스럽고 왜 펌프에 물이 없지, 왜 물이 말라버렸지 하고 돌아서려는 순간 펌프 옆에 글귀가 하나 적혀있다고 합니다. 펌프에서 동쪽으로 2m쯤 되는 곳에 모래를 파헤치면 큰 돌이 나올 것입니다. 그 돌을 들면 플라스틱 통이 하나 있습니다. 그 통 안에는 물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그 물을 절대 마셔서는 안 됩니다. 먼저 그 물을 1/4쯤 펌프에 부어서 펌프의 마른 가죽을 젖게 하십시오. 그리고 15분쯤 지나서 가죽이 다 불어나면 이 때 통에 물을 서서히 부으면서 계속 펌프질을 하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넘치는 물을 얻을 것입니다. 처음 있는 물통에 물을 넣어서 마개를 막아서 다시 제자리로 돌 밑에 통에 물을 가득 채워서 다시 가져다 놓으셔야 합니다. 무슨 말이에요? 마중물을 옆에 저장해놓은 것입니다. 이 펌프는 말라 있지만 거기에 물을 붓고 펌프질을 하면서 지하수에서 물이 올라옵니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이기적인 사람이 그 물통의 물을 그냥 마셔버렸다면 영원히 지하수의 물을 먹지 못합니다. 다른 여행객들이. 혹은 물을 실컷 마시고 물통에 물을 받아두고 가지 않는다면. 그 뒤에 오는 여행객들은 영원히 이 물을 마시지 못하겠죠. 이 약속을 지켜야 되는 것입니다. 사하라 사막에는 이 물을 부어 펌프질을 해서 물을 먹게 하는 시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여행가가 쓴 글에 그런 내용들이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그 펌프가 계속해서 그 사막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목을 시원하게 해주는 생명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사람이 자신의 유익과 욕망을 절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얼마나 목마르겠습니까. 물통에 물 보고 그냥 글도 제대로 읽지 않고 그냥 먹어버린다면. 이기적으로. 나나 먼저 먹고 살자 이런다면. 한 사람이라도 그 통 속에 물을 다 마셔버렸다면 뒤에 오는 사람은 모두 목이 말라 고통 속에서 사막을 건너가겠죠. 혹은 죽게 되겠죠. 사도 바울의 삶은 이런 마중물이 많이 생각이 납니다. 사도의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인정받으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이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어찌하든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절제하고 인내하는 것이 꼭 마중물과 같은 것입니다. 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이 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_고린도전서9:7
모든 사람은 노동에 대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지금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고린도교회에서 그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른 교회에서 도움을 받았고 그런 이유가 데살로니가후서 3장 6절에서 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9절에 특히.
6.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게으르게 행하고 우리에게서 받은 전통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7. 어떻게 우리를 본받아야 할지를 너희가 스스로 아나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무질서하게 행하지 아니하며 8. 누구에게서든지 음식을 값없이 먹지 않고 오직 수고하고 애써 주야로 일함은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 함이니 9. 우리에게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요 오직 스스로 너희에게 본을 보여 우리를 본받게 하려 함이니라_데살로니가후서3:6-9
권리가 없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를 양육했고 내가 너희 교회를 세웠고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으니까 다 이 권리를 취해도 마땅하지만 내가 사도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은 복음을 위해서. 또 하나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신앙의 본을 보이기 위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자유하게 됐죠. 갈라디아서 5장 1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_갈라디아서5:1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완전히 자유를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영적으로 완전히 자유해진 것입니다. 구원은 그런 것입니다. 자유한 것입니다. 천국에 입성할 신분을 얻었기 때문에 자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냐? 지금 이 말입니다. 그 자유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냐? 그렇지 않는 그리스도인이냐 라고 그 차이에 대해서 오늘 사도 바울은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으니까 마음대로 살아도 됩니다. 네, 자유를 얻었으니까, 하나님 자녀니까. 적당히 예배드리고 적당히 살다가 그렇게 죽으면 되겠죠. 천국은 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구원은 받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오늘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이냐? 9절에 보십시오.
- 진정한 자유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_고린도전서9:8-10, 빌립보서4:15-16, 데살로니가후서3:6-9
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_고린도전서9:8-10
하나님께서 어찌 이 소들을 위하여 글을 썼겠느냐. 우리를 위해서 글을 쓰지 않았겠느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밭을 가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무슨 말이에요? 먹이를 먹게 하라는 것입니다. 밭을 갈고 나면 먹이를 줘서 보상을 주라 이것입니다. 그게 어찌 소를 위해서 율법을 썼겠느냐. 우리를 위해서 쓴 거 아니냐? 이것이 자신의 자유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서 영광을 위해서 사는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다 라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소도 밭을 갈고 나면 소망이 있잖아요. 밭 갈고 나면 맛있는 여물을 먹을 거야, 시원한 물을 마실 거야. 주인이 나를 사랑해줄 거야. 밭 갈고 나면 곡식을 털고 나면 수고하고 힘든 일을 하고 나면 주인이 나에게 뭔가 보상해 줄 거야. 그 소망을 가지고 소도 견디고 참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밭을 갈아야 됩니까? 우리가 왜 씨앗을 뿌려야 됩니까? 자유롭게 살면 되지. 아니 구원 받아서 우리에게 자유가 있는데 이런 권리가 있는데. 함부로 권리를 다 쓰고 자유도 내 마음대로 살면 되지. 교회 가고 싶으면 안 가고 싶으면 안 가고 예배드리고 싶으면 드리고 안 드리고 싶으면 안 드리고. 성경 읽고 싶으면 읽고 안 읽고 싶으면 안 읽고. 내 감정대로, 내 상황대로, 내 형편에 맡게 아무렇게 살면 되지. 그게 자유 아니야? 편안하게 신앙생활하면 되지. 네 맞습니다. 그런데 왜 기도해야 되고, 헌신해야 됩니까?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눈물로 기도해야 됩니까? 왜 씨앗을 뿌려야 됩니까? 밭을 갈아야 됩니까? 소망이 있잖아요. 그게 단지 육신적인 축복만을 받기 위해서냐? 오늘 바울이 반문합니다. 그렇게 해서 육신적인 축복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이냐? 성숙한 빌립보교회 성도들이나 혹은 다른 지역의 바울의 성숙한 동역자들은 왜 바울을 후원했을까요? 바울이 후원해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고린도에서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이야기하는 것과 참 많이 다르고 정말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진짜 아이러니하게 자신을 후원해주는 교회에서는 사역을 많이 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러니합니다. 오히려 복음의 불모지. 어쩌면 남들이 가지 않는 곳, 사역이 가장 힘든 지역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또 이런 오해를 같이 받은 것입니다. 사도의 권리가 있냐 없냐, 정통성이 있냐 없냐. 바울은 예수님의 직속 제자냐 아니냐. 성도들이 이런 것을 따지는 것입니다. 다행입니다. 이 시대는 예수님의 직속 제자가 단 한명도 없으니까. 이 시대는 사도가 없습니다. 다행입니다. 다행히 여러분은 제가 학교를 어디 나왔는지 관심이 없으시더라고요. 제가 박사인지 아닌지 유학파인지 아닌지. 요즘 대형교회들은 목회자 후임을 결정할 때 유학파가 1순위라고 합니다. 영어도 할 줄 알아야 되고. 저는 조금 이해가 안 됩니다. 왜 목사에게 영어를 원하지? 영어 설교하면 알아 들이시나? 진짜 그렇다고 합니다. 목사들 면접 보러 가면 스펙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좋은 설교를 해주고 얼마나 좋은 삶을 살았느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 목사님은 이런 분이야 하고 싶은 거죠. 그런 오해를 받으면서 바울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무슨 소망이었죠? 고린도라는 타락한 지역, 우상이 가득한 지역, 거기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져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구원하려는 진짜 소망. 그거 아니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이런 수모를 왜 당하고 고린도를 위해서 몇 번이나 사람을 보내고 그 지역에서 천막을 만들면서 신앙의 모범을 보이고 절제하고 인내하면서 목회를 했을까요? 한 가지 이유입니다. 고린도에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여러분 진정한 자유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소망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밭을 갈기도 하고 씨앗을 뿌리기도 합니다. 요즘 젊은 부부들은 아이를 안 낳으려는 부부도 있다고 합니다. 왜요? 그냥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여행도 가고, 캠핑도 가고 돈 번 것을 즐기면서 살고 싶은 것입니다. 이해는 갑니다. 충분히 이해가 갑니다. 그런데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가 아닙니다. 진짜 자유는 무엇입니까?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를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고. 소망이 있기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는 사람들 보고 노는 사람들, 여러분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 보시면 아시죠? 베짱이가 놀면서 개미보고 참 미련하다. 왜 일하고 있느냐 이렇게 좋은 날씨에. 그런 것과 똑같습니다. 어리석다, 미련하다, 좀 즐기고 놀지.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는 소망 때문에 땀을 흘리는 것이고 노력하는 거 아닐까요? 우리는 복음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바울은 오늘 11절에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_고린도전서9:11-15
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_고린도전서9:11-15
신령한 것을 뿌렸다고 이야기합니다. 신령한 것을 뿌리기 위해서 헌신한 것은 그냥 사라지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라지지 않습니다. 14절에 보세요.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_고린도전서9:14
15절에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_고린도전서9:15
바울의 자랑은 무엇이냐면 내가 고린도에 신령한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내가 복음 때문에 내가 너희를 구원하려고 아무쪼록 고린도 지역에서 성실하게 목회를 한 것입니다. 그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자체가 헛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지난번 8장 설교에 음식을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되는 자유가 있지만 왜 안 먹었냐?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_고린도전서8:13
그것이 진정한 자유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을 나는 선택하고 너희들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서 오는 열매를 먹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권리를 주장해서 자유를 방종해서 얻는 육신적인 열매가 아닌 진짜 소망을 가진 자유, 책임을 가진 자유. 내가 정말 한 영혼을 구원하고 이 도시에 교회를 세우는 그 열매를 먹기 위해서 나는 권리를 포기하고 복음을 위해서 살겠다는 그 진정한 자유를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을 위해서 살아서 오는 열매가 무엇일까요? 에이, 목사님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살아서 도대체 뭐가 우리 인생에 나아진 것이 있습니까? 그렇게 저한테 항변하시는 분도 만나봤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살았는데 도대체 우리 인생에 남는 게 뭐가 있습니까? 라고 말하시더라고요. 그런 분들하고는 저는 아예 대화를 안 하거든요. 대화할 가치가 없잖아요. 아예, 대화의 결이 다르니까요. 네, 그렇게 사시면 되겠네요, 살던 대로 사세요.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인내하고 때로는 기도하고 절제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기도 하고. 우리는 그것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 소망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도 봤습니다. 목사님 제 삶이 안정적이면 헌신할게요. 내가 복음을 위해서 살게요. 그런데 여러분 아시죠? 삶이 안정적이면 절대 헌신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이러니입니다. 오히려 삶의 위기가 왔을 때 도전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고 그 위기가 도전해야만 풀리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지난주에 이상규 교수님께 여쭤봤습니다. 저녁에 같이 대화를 나누면서 교수님, 왜 요즘은 옛날 시대처럼 성령의 역사나 부흥, 사람들의 거룩한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을까요? 오목사님, 참 좋은 질문이네요 하시면 한 마디 하셨습니다. 그 시대처럼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죠. 아, 딱 오지 않습니까? 그 시대처럼 가정복음화를 위해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헌신하지 않기 때문이죠. 이 말입니다. 내가 새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원하면서 건강한 교회가 되도록 헌신하지 않고. 가정이 복음화 되길 원하면서 가정이 복음화 되도록 기도하지 않고, 민족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길 바라면서 민족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삶을 드리지 않고. 내 삶이 새로워지고 거룩해지고 하나님 앞에서 축복받길 원하면서 내 삶이 새로워지고, 거룩해지고 축복받을 노력은 하지 않는. 그런 참 아이러니 한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내 직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길 원하면서 정작 내 직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희생, 헌신하며 살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여러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이 복음을 위해서 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운 하나님의 교회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만든 조직이 세 개가 있습니다. 가정, 국가, 교회. 가정은 아주 기초적인 조직이라면 국가는 세상에 큰 조직으로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가정과 국가와 다르게 교회는 세상에 속한 조직처럼 보입니다. 여러분 헌금으로 건물도 임대해야 되고. 목회자 사례도 줘야 되고. 수많은 리더십이 교회 안에 필요합니다. 시설도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후원도 받아야 되고요, 조직도 갖추어야 되고요, 건물도 있어야 합니다. 맞아요. 그런데 이 교회는 세상 조직이 아닙니다. 세상 조직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희 교회 코로나 때 새가족들이 진짜 많이 오셨습니다. 알고 계시나요? 등록을 많이 안 하셔서 그렇지. 진짜 많이 오셨어요. 그런데 대부분 우리 교회를 어떻게 알고 오셨냐면 대부분 유튜브로 설교 듣고 오셨습니다. 99.9% 설교 듣고 오신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막상 오시면 불편합니다. 큰 교회가 아니니까. 아이들 케어도 별로 못해주지. 시설로 좋지 않지. 코로나 때 교제도 어려웠지. 많은 부분이 쉽지가 않았습니다. 주차도 불편하지. 그런데 여러분 교회가 그냥 거기서 머물러 버리면 국가나 회사, 가정이나 다른 조직과 다를 게 무엇인가요? 옛날 30년 전에는 목사님들이 신학서적 하나 없어서 번역된 서적이 없어서 성경을 그냥 줄줄줄 읽어주는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교회에 신디, TV, 자막이 있었습니까? 유튜브가 있었습니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뭐가 있었죠? 장로님들의 기도가 있었고 먼저 믿는 사람들의 사랑이 있었고. 목회자들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엎드려 기도했는지. 배우지 못했지만 배경이 없었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 마을에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얼마나 눈물로 기도했는지. 교회는 성령의 역사로 예수님을 믿고 영혼들이 변화되어야 하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깨어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령을 구해야 됩니다. 맞습니다. 좋은 시설이 교회를 다니게 할 수 있지만 변화는 시켜주지 못합니다. 좋은 설교가 우리 귀를 즐겁게 할 수 있지만 우리를 회개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기도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있는 조직 같아서 헌금도 필요하고 직원도 필요하고 다 필요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영적인 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이곳에 와서 예수님을 만나고 이곳에 와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천국의 소망이 생겨나고 변화되고. 그래서 중직자들에게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같이 기도하자고 금요일 밤이면 같이 눈물로 기도하자고 우리 교역자들에게 부탁하고 또 부탁하고. 우리 중직자들에게 중직자 기도회를 만들어서 뜨겁게 같이 기도하자고. 교회는 기도 없이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없고 세상에서 교회의 존재 가치로서의 가치를 지켜낼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영적인 변화가 없다면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다니는 회사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교회에 대해서 그렇게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에 수많은 영혼들이 주께 돌아와 거듭나고 이곳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그래서 그런 기도의 사람들이 복음을 사랑하고, 복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소그룹을 섬기고 교사도 하고. 그런 마음으로 무엇을 하든 거기에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도 없이 교회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미국에 큰 교단들이 많이 있습니다. 미국은 장로교가 메인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는 장로교가 많으니까 미국도 장로교가 많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미국은 침례교가 제일 큽니다. 거대한 조직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큰 교단이 루터교입니다. 여러분 처음 들어보셨죠. 미국은 루터교가 가장 큽니다. 그런데 이 루터교가 얼마나 막강하냐면 루터교 경우는 교단에 속한 교역자, 목회자들에게 향후 30년간 사례를 줄 수 있는 재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은 무조건 펀딩을 하니까. 재정을 모아서 기부를 받고. 미국 사람들은 기부문화가 있습니다. 죽으면 다 기부를 하니까. 어마어마한 돈입니다. 여러분 30년간 그 교단의 모든 목회자들에게 사례를 줄 수 있는 돈을 가지고 있으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얼마나 안정감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루터교 교단이 더 커지는 것입니다. 나 목사하려면 루터교 가서 할 거야. 왜? 장학금 다 줍니다. 목회사례 다 줍니다. 교회가 부흥하든 크든 작든 사례가 계속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미국에서 그런 교단에서 탈출하는 목회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안정감이 훨씬 더 목회를 잘하게 하고 선교를 잘하게 하고 한 영혼을 살리는 것을 더 잘하게 할 것 같은데 목회자들이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술 문제, 여자 문제. 미국에.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료이고 정보입니다. 그래서 진짜 복음이 뜨거웠던 폴 트립 목사님의 책 읽어보셨죠? 네팔에 가서 네팔의 영혼들을 보고 다시 미국에 돌아가서 성도들과 함께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를 잘못 세웠다. 우리가 세워가는 교회 이상은 전혀 다른 거였다. 회개하고 다시 교회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나요? 그래서 미국에는 독립교회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교단에 소속되지 않고. 왜? 교단에 소속되어 있나요? 우리도 교단에 소속되어 있나요? 한국교회들이 장로교, 침례교나. 왜냐하면 세금 혜택이라든지 교회를 보호해주고 지켜주는 법적인 연합체의 성경이 강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개혁하고 뜨겁게 복음을 전하고, 영혼을 사랑하고. 이런 일들이 너무너무 방해가 되니까. 너무 이해가 가죠. 시편 51편 9절에서 13절에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9.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13.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_시편51:9-13
다윗이 왕이 되고나서 엄청난 권력이 생겼습니다. 다윗이 주로 언제 범죄를 했나요? 왕이 되고 나서 범죄 했습니다. 다윗이 광야에서 범죄 했나요? 광야에서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다윗이 한 번이라도 죄를 지었나요? 사울을 죽일 수 있었는데 그것도 죄라고 여기고 적이었는데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죄에 민감했던 다윗이 언제 죄를 짓죠? 밧세바를 범하고 인구조사를 하고. 왕이라는 권리를 가지고 엄청난 자유를 가지고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짓고 다윗이 오늘 회개하는 시편이 51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원해서 예배드리는 것을 잊어버렸고 구원의 감격, 성령의 역사를 소멸해버렸고. 내 안에 그 십자가의 은혜, 그 첫사랑 다 소멸해버렸고. 지금 다윗이 회개하는 장면입니다. 다시 내게 와 주셔서, 주님 다시 내게 찾아와주셔서, 주님 다시 나를 만나주신다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죄께 돌아오리이다. 원래 다윗은 죄인들을 주께 돌아오게 하기 위한 소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자기의 자유를 희생하면서 광야생활을 했던 다윗이었습니다. 그가 엄청난 권리와 자유 앞에 무너진 것입니다. 방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 다윗이 성령을 구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주님 자원하는 심령을 주세요. 다시 광야 때처럼, 어릴 때처럼 하나님을 다시 예배하고 다시 주의 도를 가르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에 내 삶이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다시 내 안에 심령을 새롭게 해주세요. 지금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가 방종이 되지 않고 복음의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그런 멋진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우리에게 다시 주의 성령이 오셔서 주의 거룩한 영이 오셔서 이 땅에 부흥이 일어나길 소망한다면 복음을 위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우리 인생이 후회 없는 인생이 될까요. 하나님 앞에 나갔을 때.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 즉, 자유를 어떻게 사용했는지 하나님께서 평가하신다면. 그 평가가 중요하지 않더라도 우리가 자유를 어떻게 써서 사용했는지 남겨진 열매를 생각한다면 다시금 방종으로 빼앗겨서는 안 됩니다. 복음의 소망을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오늘 바울이 고백한 고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9장의 너무나 내용이 좋아서 다음 주 한 편의 설교를 더 준비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권리를 내려놨다고 고린도교회에 설명하는 이유는 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아무쪼록 바울처럼 우상에서 벗어나고 죄악에서 벗어나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그런 헛된 인생에 자기 자유를 마음껏 쓰고 있는 그런 성도들의 삶이 다시 주께 돌아와서 복음을 위해서 사는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 일은 기도 없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사랑 없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그런 영적인 것으로 세상에 가치 있는 공동체가 되려면 우리 장로님, 권사님들 기도해주셔야 합니다. 우리의 자유를 그 일에 쓰셔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에 쓰셔야 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일에 우리의 자유를 쓰셔야 합니다. 다윗처럼 혹시 우리의 권리가 생기고 자유가 생겨서 혹시 방탕하고 방종하고 있다면 다시 오늘 시편 51편의 고백처럼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주시고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다시 회복시켜주시고, 창조하여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복음을 위해서 다시 살 수 있도록 죄인들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며 살 수 있도록. 우리는 그런 기도가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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