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7월 17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 |
제 목 : |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
본 문 : | 고린도전서 12:1-31 |
오승주 목사
- 신령한 것에 대하여_고린도전서12:1-11
고린도전서 12장은 당시 고린도교회의 예배에 문제가 되는 것들 중에 마지막 문제인 것 같습니다. 고린도교회에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직분자든, 신령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이 남을 업신여기고 또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비난하고 군림하려고 하는 이런 문제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그것에 대해서 답변을 시작하는데 이렇게 시작합니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_고린도전서12:1
그러니까 신령한 것이 그런 문제 있는 사람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고 추구하고 이렇게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오용하고 남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것까지 훼손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이런 것이 되게 많습니다. 교회가 문제가 많으니까 나 진짜 신앙생활 못하겠어. 교회가 문제가 많다고 해서 교회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니죠. 그런 것처럼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 때문에 원래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신령한 것을 우리가 잃어버릴 필요가 없다는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령한 것이 왜 필요하냐는 것입니다. 도대체 신령한 것이 뭐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하냐? 2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이방인은 뭐에요? 불신자로 있을 때에, 무신론자로 있을 때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_고린도전서12:2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지금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가 우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는 우상숭배 하지 않았냐, 귀신을 섬기지 않았냐, 마귀를 섬기지 않았냐, 우리가 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몰라서 구원과 상관없는 천국과 상관없는 그런 저주 받은 자 이지 않았냐? 죄인이지 않았냐? 그런데 그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었으니까 당연히 신령한 것을 추구해야지. 그러면 그 신령한 것이 무엇이냐? 그 신령한 것으로 우리 인생이 새롭게 변화되고 그 신령한 것으로 우리 삶이 새로워지는 것이 맞는데 그 신령한 것이 무엇이냐? 3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_고린도전서12:3
그러니까 당시에 신령한 것 이러면 지금도 신령한 것 이러면 병 고치는 은사나 방언을 하거나 이렇게 생각을 하시지만 사도 바울은 확실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은 유일한 목적,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그게 우리가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주라 시인한다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만 주라는 단어가 200번 이상 나옵니다. 로마시대에는 로마황제에게만 주라는 큐리오스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러니까 황제에게만 유일하게 주다, 주님이다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주라 시인한다? 이것은 완전히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 때문에 기독교가 로마로부터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로마가 이유 없이 괜히 핍박한 것이 아닙니다. 정치적으로 핍박하거나 그럴 세력도 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는. 미비했고 기독교가 나쁜 일을 저지르지도 않았고. 그런데 왜 그토록 기독교인을 많이 핍박했냐? 주라고 하니까. 황제에게만 주라고 해야 하는데 그들이 믿는 나사렛 예수, 십자가에 죽은 예수, 그리고 부활했다 그러지, 주님이라 그러지. 핍박을 해도 고문을 해도 사지를 찢어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주님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니까 로마 황제가 세상 말로 빡쳐가지고. 마치 우리가 신사참배 할 때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를 하지 않으니까 기독교인들만 더 핍박했던 것처럼. 공산주의자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이상하게 기독교가 거기에 딱 걸려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성령이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말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하는 것. 얼마나 많은 핍박을 감수하고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을 주라 고백한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라고 고백한 것은 목숨 걸고 생명 걸고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런 자를 예수님을 주라 고백하는 자를 신령한 자다 사도 바울은 정의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고백하는 자를 신령한 자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정말 믿는 자를 신령한 자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자들에게 나타나는 은사가 여러 가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 바울은 은사에 대해서 뭐와 동일시하고 있죠? 직분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은사와 직분은 하고 두 가지를 항상 같이 거론을 하고 있습니다. 직분도 여러 가지잖아요. 은사와 직분은 여러 가지입니다. 은사와 직분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직분도 주고 저런 직분도 주고. 이런 은사도 주고 저런 은사도 주고. 7절에 보니까 이런 은사를 왜 주시냐? 이런 직분을 왜 주시냐?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_고린도전서12:7
뭔가를 유익하도록 직분을 주시고 은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데 뭐하려고요? 유익하게. 정확한 원어의 뜻을 보니까 이롭게 하도록. 우리를 이롭게 하도록. 유익하게.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8절에 보니까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_고린도전서12:8
다 성령을 따라서입니다. 9절부터는
9.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10. 어떤 사람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 분별함을, 다른 사람에게는 각종 방언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 통역함을 주시나니_고린도전서12:9-10
이런 은사를 우리에게 주시고 직분들을 주셨는데 이 모든 것을 주신 이유가 무엇이냐? 유익하게. 그런데 뭐가 유익하냐? 11절에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_고린도전서12:11
그런데 당시 고린도교회는 이런 은사를 받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여러분 직분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은사와 직분을 가지고 교회를 군림하려고 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을 비난했고. 은사 받지 못한 사람에게 나는 같이 예배드리지 못하겠다 나는. 그 작은 교회에서도. 그렇게 서로 파당을 짓고 이랬다는 말이에요. 이런 은사. 그게 진짜 은사인가? 사도 바울은 그게 은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국 19세기-20세기에 은사 주의, 은사 운동이, 지금으로 말하면 순복음 운동이 휩쓸었습니다. 미국에 그런 것이 휩쓸면서 치유의 역사, 은사, 귀신 쫓고, 병고치고. 저도 그런 영상을 봤습니다. 사람들이 줄 서 있고 목회자가 와서 귀신 쫓아내고 손대면 넘어가고 휠체어에 있다가 일어나고. 이런 역사들이 일어납니다. 엄청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런 은사주의가 일어난 이유가 있습니다. 미국이 엄청 문화적으로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부흥하다보니까 성도들은 뭘 추구했냐면 레저 문화, 스포츠 이런 것들이 발달했습니다. 주일에 교회도 가야 되고 금요일에도 교회 가고 성경공부하고 이랬는데 성도들이 편리한 것을 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토요일 1부 예배부터 주일 저녁까지 10부 예배해서 원하는 것 하나만 드리고 마음대로 드리고 놀러가고. 주의 날은 오전 예배 드리고 놀러 가는 날이 아닙니다. 원래 주의 날, 주일은. 그것은 잘못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편리함을 가지고 은사주의자들이 뭘 만들었냐면 방송설교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미국이 미디어가 발달하고 아 저거야 이렇게 돼서 그런 은사운동을 하는 목회자들이 미디어 쇼를 만든 것입니다. 세트장을 만들고 카메라를 두고 거기에 휠체어 탄 사람 나오게 하고 귀신 들린 사람 나오게 하고 넘어가고. 이제 사람들이 그 방송을 보는 것입니다. 휴가가서도 볼 수 있고 어디 놀러 가서도 볼 수 있고. 미국 안에 이런 편리함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 은사 사역을 하는 진짜 유명한 목회자 한 사람이 폭로가 되었습니다. 미국에는 은사주의가 거의 다 사라지고 없어졌습니다. 유명한 방송 설교가입니다. 조회 수가 어마어마하고 그 돈으로 빌딩으로 몇 채를 사고 떼 돈을 번 그런 목회자인데 그 사람이 방송을 하고 집회를 하고 저녁에 호텔에서 사는데 호텔에 들어갈 때마다 창녀를 데리고 간다는 것이 제보가 된 것입니다. 그게 미국에 난리가 났습니다. 그 목회자가 그것에 대해서 변명한 내용이 진짜 기가 막혔습니다. 뭐라고 변명을 했냐? 사역에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여러분 그게 코미디죠? 사람을 고쳐주고 은사를 하는 것이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창녀와 매일 밤 잠을 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게 은사인가요? 신령한 것인가요? 저는 그것을 귀신의 역사라고 보는 것입니다. 미국교회를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그나마 믿던 신자들도. 그것은 은사가 아닙니다. 그게 어떻게 병 고침입니까? 물론 그런데 가서 병 고침을 당한 사람들은 기분이 좋을 수 있지만 그게 예수 믿는 것입니까? 휠체어 타다가 일어서는 것이 구원 받는 것인가요? 서로 서로가 성도들은 편리를 추구했고 어떤 자극적인 메시지와 그런 단기적 치료를 받으려고 운동도 하지 않고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지 않고 그냥 그런데 가서 고침 받으려고 하고. 그 뒤로 신앙생활을 잘 할까요? 그런 사람들이?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인기를 얻고 그 뒤의 삶이 타락이라면 그것은 귀신의 역사죠. 그런 게 한국교회 안에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이비 교주들이 있는지. 이번에 보니까 JMS 정명석이 10년만에 출소했는데 또 성범죄 저질렀죠. 저는 정명석한테 가 있는 대학생들이 너무 웃긴 것입니다. 부모들이 피, 땀 흘려서 번 돈을 지식을 얻으라고 대학에 보내놨는데 그런 똑똑한 친구들이 그걸 예수 그리스도라고 믿고. 정명석은 자신을 신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또 구속되었습니다. 그게 귀신이지 그게 어떻게 목회자이고 그게 어떻게 성령의 역사이고 거기에 무슨. 그러니까 사람들의 필요와 그것을 이용하는 것들이 결합되어서 그런 문화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신령한 것이 무엇인지 증명하기 위해서 고린도교회에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4절에 보면
-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_고린도전서12:12-27
14.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15.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16.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_고린도전서12:14-16
무슨 말이냐?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17.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18.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19.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20.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21.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_고린도전서12:17-21
여러분 이것을 정확하게 이해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귀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눈이 따로 나 아침에 좀 갔다 올게. 나 좀 출근 좀 할게. 눈이 몸에서 나와서 돌아다니고 다 보고 와서 다시 붙어서 로봇처럼. 심장이 나 가슴 뛰는 일을 해야 되겠어 너는 여기 일하고 있어, 나 좀 나갔다 올게. 이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가요? 우리는 지체를 그런 식으로 이해합니다. 분리된 것처럼. 오늘 성경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다. 그게 그리스도다. 한 몸이 무엇이냐? 그리스도다. 나는 줄기니 나는 나무니 너희는 가지라. 내게 붙어있어라 이렇게 이야기한 것처럼. 주님이 몸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는 것이 구원이고 연합했기 때문에 한 성령이고 한 구원이다. 성경은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떨어지면 우리는 지체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떨어지는 순간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연약한 지체가 있을수록 오히려 귀히 여김을 받는다. 제가 시력은 좋은데 눈이 좋지 않습니다. 다래끼도 많이 나고 피곤하면 눈이 깜빡거리기도 하고 건조증도 있고. 저는 눈이 약하니까 늘 밤마다 안약을 비치하고 잡니다. 눈 때문에 몇 번 어려움을 겪어보니까 늘 눈을 보호하기 위해서 눈에 좋다는 것은 다 합니다. 세척도 하고. 사람들이 눈에 관한 선물을 주시기도 합니다. 제가 연약하다는 것을 아니까. 눈은 제 몸 중에 가장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희 와이프도 보호 안경도 사주고. 청년부에서 선글라스도 사주고. 눈이 약하다는 것을 다 아는 것입니다. 눈은 제일 약한데 제일 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왜? 눈이 아프면 보지 못하면 온 몸이 고생을 합니다. 그러니까 몸은 하나입니다. 지체가 다양하지만 그 지체가 모여서 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서로 귀히 여겨야 된다. 귀가 아프면 몸이 아프고 눈이 아프면 몸이 아프고 입이 아프면 모두가 다 아프기 때문에. 그러니까 우리의 몸은 주님인데 그리스도가 우리의 몸인데 우리는 거기에 지체가 됐다 그렇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지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전 교회에서는 형제, 자매 이렇게 불렀잖아요. 그 전에는 지체라고 불렀습니다. 인석 장로님 이렇게 부르지 않고 우리 지체다 이렇게 소개를 했습니다. 옛날에는. 우리 형제님, 자매님 이렇게 소개를 했습니다. 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주님의 몸 된 교회, 지체 이렇게 설명을 하잖아요. 우리가 정말 주님과 연합한다면 우리 모두는 귀합니다. 왜? 주님과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 몸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몸에 우리가 붙어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를 귀히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 당신의 양자 삼아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과 연합하지 못하면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썩어지기 때문에. 가지가 잘려지면 썩고 말라버립니다. 그래서 밖에 버리라는 것입니다. 불에 태워버리라는 것입니다. 쓸모없으니까. 열매도 못 맺으니까.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은사를 이야기하고 직분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걸 우리에게 왜 주셨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정말 주님이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은 예수를 주라 고백하도록 우리에게 보내셨는데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정말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냐?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위험에서든 정말 주님이라고 너희가 믿고 있냐? 따르고 있냐? 정말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신가? 주인이신가? 가장 신령한 은사, 직분은 무엇인가? 28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_고린도전서12:28-31, 고린도전서13:1, 히브리서12:14-29, 요한일서5:1-12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_고린도전서12:28
이런 이야기를 쭉 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 당시에 직분, 은사의 순서를 기록해 놓은 것 같습니다. 그 당시 사도면 다 끔뻑 넘어갑니다. 여러분 사도라는 직분 아니나 못 받죠. 예수님의 제자에게만 붙었던 호칭입니다. 예수님과 실제로 직접 만났던 사람들에게만 사도라는 직함을 줬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 바울은 스스로 나는 사도라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베드로, 요한, 마가 등 예수님의 열 두 제자에게 사도라는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엄청납니다. 그 다음은 뭐에요? 선지자, 교사. 이 당시 지금 주일학교 교사와 개념이 다릅니다.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고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자고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등 교회 안에 있는 순서를 매겨 놨는데 29절에 뭐라고 기록하고 있나요?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_고린도전서12:29-30
이런 말입니다. 다 눈이겠느냐? 온 몸이 다 눈이라고 생각해봐라. 다 입이겠느냐? 다 귀겠냐? 한빈이랑 차타고 가고 있는데 버스 광고를 봤는데 미니언즈 영화 광고였습니다. 아빠 왜 쟤는 눈이 하나야? 제가 말을 참았습니다. 꿈과 희망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한빈아 보러 갈래? 이렇게 꼬셔놨는데. 여러분 사람이 눈만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온 몸이 눈이에요. 그런 애니메이션 많잖아요. 입만 있는 애니메이션. 무슨 쓸모가 있겠어요. 지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선지자만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교회 안에 사도만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교회 안에 병 고치는 사람만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것을 조금 더 우리 삶에 적용하자면 우리의 신앙에 한 가지만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 많죠. 균형 없이. 어떤 목사님이 저보고 목사님은 동성애 반대하고 동성애자들을 위한 이야기를 하는데 왜 시청에 나오시지 않느냐? 구체적으로 반대하는 운동에 왜 동참하지 않냐? 이렇게 질문을 하셨습니다. 제가 답변을 했습니다. 뭐라고 답변을 했냐면 제가 살아오면서 동성애자를 섬겨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단 한 번도 품어본 적이 없습니다. 성경적으로 동성애는 죄라고 가르치고는 있지만 그것을 실제로 가서 운동으로 하기에는 부적합한 사람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 신앙이 너무 말과 삶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이런 은사주의자들이 은사를 가지고 막 사역을 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그 목회자처럼 뒤에서는 성적으로 완전 타락해서. 그게 무슨 열매가 있어요? 나중에는 그나마 믿었던 성도들마저 다 떠나가고 신앙의 길을 잃어버리고. 그게 마귀의 역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직분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은사들을 다 어떻게 사용해야 하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고 이롭게 하기 위해서, 유익하기 위해서 사용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사도 바울은 31절에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_고린도전서12:31
큰 은사? 가장 신령한 것? 여러분 머릿속에 생각해보세요. 가장 신령한 은사 하나만 받는다면 뭐를 받고 싶으세요? 저도 이번주 설교 준비하면서 생각을 해봤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제일 큰 은사를 주신다면. 조금 인기를 얻으려면 예언하는 은사 이런 거 아닐까? 제가 예언해주면 어떻겠어요. 집사님 언제 시집 갈 것이고 아들을 낳을 것이고. 그러면 저한테 줄 서겠죠. 진짜 맞아, 목사님 말하는대로 다 됐어 이러면 대박나겠죠. 제 인생도. 아니면 얼마나 많을까요. 병 고치는 은사. 허리 아프신 분들, 무릎 아프신 분들. 암에 걸리신 분들 제 손만 대면 다 낫는다고 생각해보세요. 뭐가 되죠? 이 손이? 그게 신령한 은사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게 진짜 큰 은사냐?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 다음 장 고린도전서 13장 1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_고린도전서13:1
사람의 방언은 은사를 말하고 천사의 말은 직분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몇을 세우셨다고 합니다. 직접 세우셨다고 합니다. 사도도 세우시고 교사도 세우고 선지자도 세우고 그리고 능력 행하는 사람도 세우시고 병 고치는 은사도 세우시고 그리고 서로 돕는 자, 다스리는 자, 각종 방언 이런 것들 다 세웠다고 합니다. 다 중요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게 있어서 우리가 지체입니다. 말도 해야 되고 눈으로 보기도 해야 되고 코도 풀어야 되고 냄새도 맡아야 되고 귀로 듣기도 해야 되고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 같다고합니다. 저런 직분, 은사를 가지고 사역을 다 해도 대단한 것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이 사랑은 무슨 사랑이에요? 인간적인 사랑인가요? 아니죠. 다음 주, 그 다음 주 고린도전서 13장은 제가 한 3주에 걸쳐서 설교를 할 것입니다. 이 사랑은 뭐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그래서 주님께 붙어 있으려고 하는 주님과 연합하려고 하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해서 내가 주님의 몸에 붙어 지체로 살아가려고 하는 그 사랑을 말하는데 그 사랑이 없으면 주님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다 꽹과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너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런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목회자가 인기를 얻고 미국 전역으로 방송을 하는 목회자가 정말 주님을 사랑했다면 정말 영혼들을 섬기고 영혼들이 주님을 만나도록 자기의 삶을 겸비했다면 얼마나 귀할까요? 그런데 점차 뭘 더 사랑했죠? 주님과 연합을 거역한 자들에게 주는 경고에 관한 말씀이 히브리서 12장 말씀인데 히브리서 12장 14절에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_히브리서12:14
여러분 이 한 구절을 잘 보셔야 합니다. 아무도. 그러니까 지체로 살지 않으면. 화평함은 지체로 산다는 말입니다. 주님과 연합해서 사는. 예수님이 성육신하셔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셨잖아요. 그래서 우리를 연합하셨잖아요. 화평함, 화목함. 하나님과 우리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교제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그 은사입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셨다는 증거이고. 그 화평함과 더불어 또 뭘 따르라고 하나요? 거룩함을 따르라고 합니다. 거룩함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주님의 몸은 거룩함을 향해서 갑니다. 주님의 몸 된 교회도 거룩함을 향해서 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기 붙어있기 때문에 우리도 같이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악한 본성을 제하여 버리고 새로운 본성.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보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디에 붙어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붙어있으면 계속 죄의 영향을 받고 죄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 붙어있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님을 닮아갈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를 보지 못한다고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누가 팔아버렸습니다. 히브리서 12장 15절부터 쭉 보면 팔아버렸습니다. 대표적으로 누가 나오죠? 에서가 나옵니다. 또 이 은혜를 팔아버렸습니다. 뭐에요? 음행으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성적 타락함으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우상숭배하고 바꿔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에서는 배고픔 때문에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바꿔버렸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12장 17절에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죠? 다시 회개할 기회가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_히브리서12:17
에서에게는 다시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28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_히브리서12:28
그러니까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게 신학적으로 논쟁이 될 수도 있지만 정답을 말씀드리면 여러분 하나님을 만난 사람, 쉽게 말하면 장자권을 받은 에서가 장자권을 팔았다는 것은 회개할 기회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주님을 못한 불신자나 신앙이 약한 사람이 음행을 하거나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기다려주세요. 긍휼히 여겨주시고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이 그것을 팔아버렸다? 소홀히 여겼다? 그러면 하나님은 회개할 기회를 주시지 않는다 이렇게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무섭죠? 신앙이 그럴 수 있나요?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를 받았는데. 하나님 나라를 받았다는 말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되는데 이게 단지 겁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일서 5장 1절에서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2.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를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_요한일서5:1-2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낳았다고 합니다. 태어난 것입니다.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런 낳은 자가 하나님을 다시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고 그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그것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킬 때. 그 말은 우리의 신앙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구절이죠. 무슨 말씀일까요? 하나님 사랑해요. 그렇죠. 그런데 하나님 사랑한다는 것이 그의 계명을 지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히브리서 말씀도 그렇고 요한일서 말씀도 그렇고 그러면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죠? 계명을 지키는 게 경건이잖아요? 계명을 지키는 것이 거룩이잖아요. 계명을 지키는 것이 뭐에요? 예수님 몸에 붙어있는 것이잖아요. 연합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섰다하면 넘어질까 주의하라. 예수님에게 붙어있지 않으면 바로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의 신앙을 확실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옛날에 구원 받았고 옛날에 은혜 받았으니까 그냥 아무렇게나 살면 신앙이 유지가 됩니까? 구원 받았으니까 천국은 가겠지. 아니라니까요. 그런 말 자체가 틀렸습니다. 신학적으로. 너랑 나랑 결혼식 했으니까 이제 나 다른 여자 만나고 다닐게. 집에 안 들어가도 돼. 결혼식 했는데, 법적으로 부부인데. 다른 집에 가서 자고 다른 여자 만나고 다녀도 되겠네. 이런 거와 똑같다니까요 여러분? 그런 값싼 구원론이 교회를 다 망쳐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다 병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태어났으니까 이제는 너 알아서 살아. 부모가 그렇겠네요? 갓난아기가 태어났는데 알아서 살아. 이런 것인가요? 양육해야죠, 보호해야죠,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성인이 될 때까지 먹여야죠, 가르쳐야죠, 훈계해야죠. 자녀는 어디에 붙어있어야 돼요? 엄마에게 아빠에게 붙어있어야 합니다. 장성한 분량에 이를 때까지. 자기가 엄마, 아빠가 될 때까지. 신앙은 거룩과 경건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정말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라고 나의 구원자라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만이 내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억만 죄악 가운데 나를 건지신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주님께 붙어있는데 그 방법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_요한일서5:3
그러면서 4절에 왜 무겁지 않냐면. 여러분 계명 지키고 거룩해지고 경건생활하는 것이 무겁게 느껴지시죠? 그런데 무겁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4절에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_요한일서5:4
왜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거운 것이 아니냐면 세상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니까, 우리에게 주신 은혜니까,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니까요. 우리가 어린 자녀들이 공부하고 똑바로 살라고 교육하고 이런 게 아이들이 무겁게 느껴지잖아요? 학교 다니고 공부하고 엄마한테 혼나고 이런 게 무겁게 느껴지잖아요. 하루종일 놀고 싶은데. 그런데 그렇게 두지 않잖아요. 부모가. 커서 밥이라도 벌어먹고 살아야 하니까. 세상을 이기게 하기 위해서. 멀쩡하게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훈계하잖아요. 도둑질 하고 오면 뒤지게 패고 또 패야 합니다. 어디 남의 물건을 훔치면. 어디 거짓말 하면 그냥 둡니까 부모가? 나쁜 짓 하는데 부모가 그냥 둡니까?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왜? 왜 이게 무거운 것이 아닌 것이냐면 결과적으로 세상을 이기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 있어요? 어떻게 죄의 유혹으로부터 악한 영의 공격으로부터 이길 수 있어요? 주님께 붙어있어야 합니다. 지체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매일 계명을 지키고 거룩하고 경건하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제가 한창 전국과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훈련하고 행사 진행하고 일하고 이럴 때입니다. 저는 원래 저희 목사님께서 좋은 신앙을 가르쳐주셔서 술, 담배 이런 거 완전 죄죠. 입에 대본 적도 없고. 또 저희 아버지가 술 때문에 저희 가정을 어렵게 했기 때문에 술은 원래 입에 대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화가 얼마나 무섭냐면요. 늘 술자리, 목회자들이 가면 편하게 맥주 한 잔, 술 한 잔씩 하는 것입니다. 늘 이야기하세요. 오목사는 복음을 못 누린다면서. 오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이 좋은 것을 누리지 못한다면서. 합리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유럽 가면 다 맥주 마신다. 우리는 유럽 사람이 아니잖아요. 늘 저는 그것을 늘 절제하고 고수해왔습니다. 그런데 제 마음에 술을 먹었다는 것이 아니고 진짜 이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이런 마음이 쑥 들어왔습니다. 한 잔 마셔도 되는데. 다 그러니까 나 혼자 쫌 같이 마시고 어울려도 되는 거 아닌가? 그런 마음이 쑥 들어왔습니다. 저한테. 문화입니다. 남들 다 하니까. 그게 뭐 중요한가. 저도 그런 마음, 생각들이 들어오고. 무서운 것입니다. 제가 기도하고 성경을 읽고 주님과 교제하는 삶이 아니었다면 저도 넘어갔겠죠. 은밀한 삶들, 남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죄를 짓고 사는 삶 들, 회개하지 않는 삶들. 그런 삶들에 저도 함몰 됐겠죠. 무섭습니다. 하나님이 회개할 기회를 안 주신데요.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즉 예수님을 주로 믿고 그와 연합해야하는데 그 방법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이 바로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말이 좀 무겁죠.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우리 삶에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게 곧 거룩한 삶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믿음으로 하는 것인데 요한일서 5장 11절에 보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에 대한 증거가 무엇이냐?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_요한일서5:11
예수님 안에 우리에게 생명과 영생이 있다. 그래서 뭐라고 하나요?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_요한일서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 생명이 없다.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 12절.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얼마나 확실한 우리에게 주신 증거입니까. 우리의 무겁다고 생각하는 계명을 지키는 것, 거룩해지는 것의 목적이 무엇이냐? 예수님 안에 우리가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있는 삶이 목적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고 직분을 주시는 목적이 무엇이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삶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거룩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는 지금 예수님과 연합하는 거룩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게 오늘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큰 은사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삶. 그런 삶은 거짓이 없습니다. 그런 삶은 정직하고 진실합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삶은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가식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연약하면 연약한대로.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고 인내하는 삶은 신앙생활에 체면 이런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게 목적이니까. 나 주님 사랑하기 원합니다. 주님 더욱 사랑하기 원합니다. 내가 주님 사랑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이 진짜 더 큰 은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내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이 나의 안에 있는 것. 그것을 우리가 진짜 신령한 것으로. 여러분 그게 진짜 신령한 거잖아요.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삶. 예수님 내 안에 모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그게 목회자의 비전이어야 되고 꿈이어야 됩니다. 우리 여러분의 비전이고 꿈이어야 됩니다. 거기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다양한 은사들과 직분들은 그것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 성도들이 그런 삶을 살도록, 우리 자녀들이 그런 삶을 살도록. 헌신하고 섬기기 위해서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와 직분을 주셨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교만할 이유가 없고. 그게 없다고 해서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눈이 아니라고 해서 발가락이 낙심할 이유가 없는 것이고 우리가 듣지 못한다고 해서 입이 실망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몸 그리스도와 붙어 있는 지체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있다면 우리는 그의 지체로 구원 받게 되고. 우리는 그의 지체로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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