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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5-03-09 주일예배

3월 9일 1,2부 예배
본문: 출애굽기 14:1-14
제목: [모세 12]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찬송: 546장(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
찬양: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하스데반)

1. 애굽의 영향

애굽의 문화와 가치관이 얼마나 대단한지 봐야 합니다. 단순히 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열왕기상 3장에 보면 솔로몬이 애굽의 왕 바로의 딸과 결혼하면서 애굽의 사위가 되어 애굽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문맥상 뜬금없이 창기 두 여자와 와서 재판을 요구합니다. 유명한 판결을 내리죠? 아이의 몸을 두개로 갈라서 나누어줘라.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데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왜 이걸 기록했죠? 솔로몬 때부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결국 자녀 때에 완전하게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멸망의 길을 가잖아요. 그런데 이 판결은 솔로몬의 지혜 같지만, 사실은 애굽의 전통적인 지혜인 마하트(수리 합리 논리)에서 온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그 지혜를 사용하셨습다만, 더 확실한 증거는 열왕기상 7장에 보면 솔로몬이 자신의 궁을 13년 동안 짓는데 전부 애굽의 건축양식으로 짓습니다. 
애굽은 단순히 강대국이 아니라 세계를 지배하고 세계의 가치관이자 문화였습니다. 바로는 그 시대의 신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시면 처음에는 모세와 바로의 대결 같지만, 점차 모세는 사라지고 하나님과 바로의 대결 구도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출애굽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면서 동시에 애굽과 그 속의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어둠과 무질서와 혼란으로 몰아넣습니다.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제 세상의 상징인 애굽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지 설명하는 본문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 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더라_출애굽기 14:2-3’

여기서 바로의 시선은 광야에 갇힌 바 된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저들이 강력한 힘으로 출애굽한 거 같지만, 결국 홍해 앞에 가지도 못하고 막혔구나! 생각합니다. 누구의 생각이죠? 바로의 생각입니다. 시대마다 역사마다 믿음의 사람들이 항상 그랬잖아요. 항상 예배하는 사람들이 그랬거든요.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합니다. 믿음이 결국 막혔구나! 그런 성도님들 그런 상황에 계신 분들 계시죠? 오늘 말씀이 힘이 되길 바랍니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리라_출애굽기 14:4’

그래서 5절에 바로는 ‘왜 그들을 놓아 보내었는가?’ 후회합니다.그러면서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라고 하는데 여기 변하여는 히브리어 ‘나함’인데 이 뜻이 ‘멸망’입니다. 10가지 재앙을 당하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죽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변하여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다시 이스라엘을 죽일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정도 총력을 다하냐면 애굽에 있는 모든 병거를 다 동원하여 출격합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심을 보여주기 위해 그리시는 밑그림입니다. 

2. 구원은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_출애굽기 14:8’

여기서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담대히 라고 하는 데 담대히는 ‘손을 높이 들고’ 라는 뜻입니다. 손을 언제 높이 들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반기를 들어서 이제는 우리가 분명히 승리할 것이다 승리했다 이런 의미로 간 거예요. 독립된 국가와 공동체가 되어서 의기 양양해서라는 거예요. 이게 믿음이 아니예요. 믿음으로 손을 들고 찬양하고 경배한 것이 아니라 이제 애굽에서 승리했다 의기 양양한 것 입니다.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_출애굽기 14:9’

보세요. 의기양양하던 이스라엘이 430년 동안 자기를 속박했던 애굽 군대가 눈에 보이니까 바로 불안하고 두려워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누굴 보고 있었죠? 앞에서 이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어야 하는데, 그들이 손을 들고 찬양하고 경배했다면 하나님을 봤을 텐데 이들은 뒤에 따라오는 거대한 애굽 군대를 본 거예요. 

롯이 눈을 들어 소돔과 고모라를 본 것처럼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반대로 하나님을 바라봤잖아요. 성경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어디 장소가 복이 아니라, 하나님이 복이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도전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이게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애굽의 군대가 다가오고, 예기치 못한 상황에 놓이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어쩌면 인본주의에서, 현실에서 당연한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정상일 수 있습니다. 뒤에 애굽의 어마무시한 군대가 오는데 여러분은 두렵지 않겠습니까? 도산 안창호 선생님도 평생 독립운동을 하셨는데 그의 길에는 대부분 지도자로써의 글이 많죠. 나를 사랑하면 건건한 인격이 되고 인물이 되기 위해 공부를 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가 그리스도인이잖아요. 두려움이 없어야 하는데 감옥에서 투옥할때 쓴 글을 보면 얼마나 두려움이 많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많았는지 모릅니다. 아무리 옳은 길을 가더라도 그 길에서 만나는 거대한 세상은 두렵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 지실때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이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잖아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두려워하며서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보세요. 이들이 인격적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아니니까 이 두려움이 불평으로 원망으로 확대됩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_출애굽기 14:11’ 

매장지 타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광야에서 죽게 하죠?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불평하고 원망하니 광야에서 죽게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무섭습니다. 차라리 애굽에서 노예생활이 좋지 않냐? 노예 생활이 어떤 상태인지 몰라서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 십자가의 보혈을 잘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믿어가지고 사업도 안되고 문제가 더 커지고 세상적으로 더 좋아지지도 않고 차라리 안 믿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죠?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직 죄인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3. 모세의 믿음: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모세는 백성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어다_출애굽기 14:13’

가만히 서서 라고 합니다. 여러분 가만히 서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진짜 가만 있으라는 것인가요? 불평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가만 있으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못하면 동굴에 갇힐 수 있거든요. 자기 생각, 자기 상황, 자기 판단에 빠져서 동굴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죄와 믿음의 문제입니다. 동굴은 나만 보이고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곳이기도 하고, 또 나만 실패한 거 같고 나만 잘 안되는 것 같은 고립된 곳이기도 합니다. 거기 오래 있으면 하나님을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배에 나와서, 기도하면서, 믿음의 사람들의 어깨에 기대면서 또 내 어깨를 내어주면서 일어서고 걸어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11:1-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으니라’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이 믿음은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신앙고백으로 예배로 드러냅니다. 아벨이 그랬고 에녹이 그랬고 노아가 그랬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하니까요.

히브리서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갈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고 합니다. 믿음은 약속을 믿고 앞이 보이지 않아요. 이 세상의 길이 아니예요. 우리의 길은 천국을 향한 순례자의 길이지, 믿음의 길이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길이 아니란 말입니다. 무슨 사건을 만날지, 무슨 문제를 만날지 몰라요.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해주시고가 아니라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이 아니라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거예요. 거기서 나를 믿음의 사람으로 세우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29 ‘믿음으로 그들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건넙니다. 믿음으로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는데 하나님은 이걸 누구의 공로로 돌리죠? 너희가 믿음으로 승리했어 잘했어! 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애굽의 문화와 가치관 즉 세상의 마귀가 승리하고 마귀가 말하는 논리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이긴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감격스럽게 걸어가는 이 길이 결국 승리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이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행하리라_출애굽기 14: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너희가 왜 기도하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지팡이를 들고 손을 바다 위로 내밀어 그것이 갈라지게 하라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그렇게 했더니 바다가 마른 땅이 됩니다. 마른 땅은 구약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바다에서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는 생물들이 나옵니다. 바다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런데 바다가 갈라지고 마른 땅이 바로 됩니까? 21절에 보면 밤새도록 바람을 불어서 마른땅이 되게 합니다. 마른 땅은 전략적 미끼가 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구원의 길이 됩니다. 뻘이면 병거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밤새도록 동풍 바람 곧 따듯한 바람이 불어서 땅을 마르게 합니다. 

‘내가 바로와 그의 병거와 마병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이스라엘 진 앞에 가던 하나님의 사자가 그들의 뒤로 옮겨 가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쪽에는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_출애굽기 14:18-20’

나중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 병사 사이에 구름 기둥으로 막아버립니다. 저쪽에는 흑암이 있고, 이쪽에는 밤이 밝으므로 밤새도록 저쪽이 이쪽에 가까이 못하였더라고 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이렇게 강력합니다. 구원이 그냥 같이 섞여 있고 짬뽕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그냥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 몸을 찢어서 피를 흘려서 그리고 성령의 바람이 불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홍해가 갈라진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이 갈라놓으신 마른 땅이 되게 하신 곳을 믿음으로 걸어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내 죄를 위해 하신 일이구나 믿는 것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합니다. 조롱하고 비난하고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럼 빠져 죽습니다. 

여러분 구원의 은혜가 넘치길 또 여러분 삶과 우리교회에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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