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6일 1,2부 예배
본문: 출애굽기 15: 22-27
제목: [모세 13] 도대체 왜?(feat. 마라의 쓴 물)
찬송: 421장(내가 예수 믿고서)
1. 모세의 노래, 미리암의 노래
‘바로의 말과 병거와 마병이 함께 바다에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바닷물을 그들 위에 되돌려 흐르게 하셨으나 이스라엘 자손은 바다 가운데서 마른 땅으로 지나간지라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_출애굽기 15:19-20’
이렇게 하나님이 하신 일에 대해 감격하고 또 신나게 찬양도 했는데 왜 현실은 물이 없는 광야인가?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 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_출애굽기 16:22’
심지어 물을 만났는데 왜 하필 쓴 물인가?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_출애굽기 15:23’
홍해 뒤 마라를 만나면 무너져야 하는가?
우리는 이 문제를 믿음으로 풀어야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문제 앞에 실망과 낙담을 할 것이 아니라 기도로 풀어야 합니다.
그들은 불평이 아니라 호소, 원망이 아니라 탄원을 했어야 합니다.
찬송과 환희가 있었고 변화와 성장만 있을 줄 알았는데, 꽃길 위에서 동행의 기쁨만 있을 줄 알았는데 고작 3일 길을 물 없이 가다 보니 뭐 하나 나아질 것이 없는 인생? 그 안에서 미친 듯이 흔들리는 내 인생!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아닐까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제가 큰 꿈을 가지고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사실 박사과정을 할 마음이 없었는데 학비도 만만찮고 또 시간도 엄청 나게 잡아 먹잖아요. 그럼에도 우리교회나 저에게 너무 큰 배움이 되는 시간들입니다. 너무 좋은 만남들을 우리교회가 지금 진행되는 것은 전부 학교 때문입니다. 그 와중에 제일 많이 만나는 어른이 이상규교수님이신데 만날 때마다 오박사 오박사 해서 지금 너무 큰일입니다. 현실은 마라의 쓴 물이거든요. 박사를 못할 확률이 더 높거든요. 학생들 시험감독으로 들어가면 그렇게 소개해서 아직 저도 학생인데 라고 꼭 입장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더 문제는 교수님이 자꾸 한자로 된거, 라틴어로 된거 자료를 주시면서 오목사 이거 알지? 교수님은 그게 쉬우시지만 저는 한글자도 모르거든요. 그래서 제가 생각해보니까 하나님은 다르게 창조하셨다. 전혀 다르다. 다르게 쓰신다. 저는 다른 길을 찾아봐야겠다.
2. 도대체 왜?
뼛속 깊이 애굽을 의존하던 삶의 방식을 고치길 원하셨습니다. 저도 그런 시간을 지금 보내고 있습니다. 무엇에 의해 살고, 무엇을 의존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배워야 했습니다.
출애굽기 15: 25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여기서 시험은 일반적인 시험이 아니라 중명prove로 번역되는 것이 맞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이 믿음이 있는지, 순종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믿는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사회(도시, 농경사회)에서 430년이나 정착하며 살았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유목민사회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순례자 즉 영적 유목민의 삶을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끝내 우리를 정착시키길 원하시는 곳에서 살 수 있도록 우리를 훈련 시키시는 것입니다. 천국에 정착해서 살 수 있는 훈련입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바로 나침판입니다. 광야의 삶에서는 지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침판만 있으면 됩니다. 저도 사실 여러분이 보실때 너무 부족한 목사잖아요.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앞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얼마나 떨리고 두려운지 모릅니다. 그래도 제 손가락은 이렇게 떨지만 그래도 올바른 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침판이 그렇잖아요. 떨고 있지만 올바른 방향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애굽의 삶의 방식과 총체적으로 결별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삶을 배우길 원하신 것입니다. 마음껏 울기 위해 마음껏 찬양하기 위해 마음껏 고백하기 위해 광야로 나왔잖아요.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르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_출애굽기 15:25’
모세라고 해서 이 상황이 고통스럽지 않습니까? 모세는 물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마라의 쓴 물이 모세는 달았을까요? 자신을 영웅시 했었는데 불과 얼마 전만 해도 말입니다. 그들을 바라보면서 더욱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 고통을 주님 앞에 쏟아놓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문제를 푸는 것입니다. 매우 단순합니다. 고통 속에서 우리는 믿음의 공식을 대입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때 주님은 바로 응답하십니다.
한 나무를 물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그 나무를 물에 던지고 나니 쓴 물이 달아졌습니다. 단물이 되었습니다. 마실 수 없는 물이 마실 수 있는 물이 된 것입니다. 이 나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십자가를 던졌더니 어떻게 되었죠? 그 물이 단물이 되었습니다. 200만명이 넘는 백성들의 갈증을 즉각적으로 해결해주셨습니다. 왜 쓴물을 만나고 나서 단물을 주셨을까요?
‘하나님께서는 단물을 먼저 주실 수도 있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쓴 물로써 그들 속에 잠복해 있는 쓴 뿌리를 뽑아내길 원하셨다._존 칼빈’
3.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_출애굽기 15:26’
공부는 깨달음이 목적입니다. 오답체크를 반드시 해야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시험은 증명하길 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너고 기적을 겪으면서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된 줄 알았는데 내가 이 은혜가 유지되려면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구나! 그래야 단물이 되는 구나! 깨달아야 합니다. 어쩌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는 삶이구나 이 삶을 여러분 고단하게 생각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이 삶은 생명의 삶입니다. 구원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통과해서 살아야 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야 충족되는 삶입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치유입니다.
결혼만 할 수 있다면, 학교만 들어갈 수 있다면, 이 문제만 해결될 수 있다면 이렇게 생각하지만 여러분의 삶의 모든 영역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단물이 됩니다. 갈증이 사라집니다. 십자가를 던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문제에 던져야 합니다. 쓰디쓴 마음에 던져야 합니다. 부부사이도, 부모 자녀사이도, 연인사이도, 모든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라는 우물이 있는 우리 자신입니다. 마라의 쓴 물을 내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교만한 냉소주의, 교만한 현실주의, 불평불만, 낙심과 우울, 두려움에 사로잡힌 상상력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것이 말이 되고 삶이 됩니다. 이 물은 결코 생명을 낼 수 없습니다. 우리 마음에 십자가를 던지십시요. 우리 마음에서 단물이 나와야 합니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으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_요한복음 7:19’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_요한복음 7:37-38’
놀라운 치유의 은혜가 있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호와 라파!
출애굽기 15: 27 그런데 하나님은 마라가 아닌 왜 엘림에 장막을 치게 하셨을까? 의미있는 장소입니다. 마라를 떠나 10킬로 정도 가면 엘림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습니다. 오하시스입니다. 이스라엘 12지파, 이스라엘 70인 장로를 상징합니다. 사막에서 태양으로 지친 그들에게 얼마나 큰 안식이 되고 평안이 될까요. 생명샘은 주님이고 주님으로 인해 12지파, 70인 장로가 되어 생명수를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해야 할 사명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 이 엘림이 꿈이죠? 그런데 마라 다음이 엘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믿음의 레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교회는 진짜 행복할 아니 진짜 항복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 순종하는 믿음을 통과해서 엘림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불행 끝 행복 시작 이게 아닙니다. 이런 훈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가요? 엘림에 한없이 머물고 싶겠지만 엘림은 가나안이 아닙니다. 엘림은 우리교회가 부흥하고 여러분의 가정이 구원받고 믿음으로 성장하고 또 축복받아 나누고 베풀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이지만, 거기가 우리의 최종목적지는 아닙니다. 엘림도 어쩌면 마라와 같습니다. 거기서도 증명해야 합니다. 오히려 엘림이 우리에게 시험히고 어려운 깨달음입니다.
힘들고 어려울때 교회를 지킨 분들이 교회가 평안하니까 할 일이 없다고 신앙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아서, 나침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마라의 쓴물이 십자가로 인해 단물이 되는 믿음이 증명되는 삶을 통해 엘림의 삶을 살길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엘림이 아닌 천성을 향해 믿음의 길을 가는 우리 모두 끝끝내 승리하는 신앙인들이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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