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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03-15 주일예배

2020-03-15 주일예배.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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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5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공동체를 위한 거룩한 삶

본 문 :

레위기 19:1-37

오승주 목사

.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_레위기19:1-2

 

빛이 있습니다. 빛이 프리즘이라는 도구를 통과하면 다양한 색, 형태의 빛을 나타냅니다. 그것을 스펙트럼이라고 합니다. 다양한 색이 프리즘을 통과하여 나오지만 본질은 빛입니다. 빨간색도 빛이고 노란색도 빛이고 하얀색도 빛이고 주황색도 빛입니다. 색깔이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지 않으면 이런 색이 나타날 수 없습니다. 본질은 참 중요합니다. 본질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진리가 무너지면, 정의가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요? 전쟁을 하면 적군들이 가장 먼저 공격하는 것이 그 나라의 핵심 시설입니다. 본질이 무너지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본질이 무너지면 사회는 금방 주저앉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가정예배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 가정예배가 아닙니다. 가정에서 드리는 주일예배입니다. 똑같은 자세와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만약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에 츄리닝 바람에 자다가 일어나서 예배 시간이 됬다고 소파에 앉아서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평상시에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평상시에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자세를 갖추고 교회를 왔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라면 가정에서 드리든, 직장에서 드리든 같음 마음과 자세를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가 점검하고 있습니다. 기독교 리서치 단체에서 조사를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온라인으로 90%정도 예배를 드리는데 90% 중에서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는 숫자가 60%라고 합니다. 30%는 집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상이고 우리의 마음입니다. 이면에 우리의 마음이 다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공동체를 굉장히 많이 강조합니다. 구약에서 특히 모세오경은 전부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공동체를 굉장히 강조합니다. 이스라엘 나라도 공동체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를 선택하셔서 구약내내 이스라엘 나라에 관련된 이야기들을 풀어내십니다. 신약은 교회 공동체를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셔서 교회를 통해서 하시는 일들, 일어난 일들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신약입니다. 공동체가 무너지면 어떻게 되나요? 개인이 살 수 있을까요? 개인이 살 수 없습니다. 본질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는 것입니다. 국가가 무너지면 백성들은 방황하게 됩니다. 국가가 건강하지 못하면 국민들은 방황하게 됩니다. 국가가 속국이 된다면, 얼마나 치욕스럽고 불편하고 고통스러운지 우리의 증조, 부모 세대는 경험했습니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습니다. 왜냐하면 국가가 없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없다면, 신앙 공동체가 없다면 개인의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요? 개인이 나 혼자 예수 잘 믿고, 성경 잘 읽고, 신앙생활 잘하면 됬지 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은 신앙인가요? 그래서 성경은 공동체가 더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신앙은 다 공동체 신앙입니다. 전도는 개인전도가 아니라 공동체 전도입니다. 전도를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에게 복음을 전했으니 내 제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틀린 생각입니다. 내가 이 사람에게 시간표가 돼서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하나님이 공동체를 통해서 복음을 받게 하셨습니다. 누군가 이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누군가는 이 사람을 위해서 기독교, 복음, 예수님에 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준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복합적으로 그 사람에게 시간표가 된 것입니다. 그때 내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간증하고 소개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신앙을 키워가고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이십니다. 공동체 안에 들어와야 신앙이 자랄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신앙이 자랄 수 없습니다. 전도는 공동체의 사역입니다. 성경은 공동체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한 규례가 레위기 19장입니다. 공동체를 만들고 지키기 위한 질서가 레위기 19장의 내용입니다. 19장이 엄청 중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19장을 여러 번에 나눠서 설교를 할까 고민을 했습니다. 저는 부산의 고신대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고신교단이라고 하면 소문이 났습니다. 좁고 율법적이며 보수적인 학교입니다. 학교 가니까 반바지를 못 입게 했습니다. 4년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학교의 기도실에 사람이 끊긴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저녁시간 대학교회에 빈자리를 본적이 없습니다. 고신교단에서는 예배에 대해 보수적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주일날 드리는 예배만 예배라는 단어를 붙입니다. 고신교단은 수요기도회, 금요기도회, 새벽기도회라고 합니다. 우리는 다 예배라고 붙입니다. 예배는 Ceremony가 아닙니다. 예배는 Public Worship 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법대로, 규례대로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본질이 깨지면 다 깨지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예배만 드리면 다냐, 삶이 거룩해야지, 삶이 괜찮아야지. 맞는 말 같지만 사실 틀린 말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삶이 변화할 수 있고 거룩해질 수 있습니다. 좋은 교회를 만나면 우리 삶은 변화되게 됩니다. 좋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 영햐을 받아 우리의 삶이 좋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계속 말씀을 듣고 신앙의 가르침을 받고 신앙의 교육을 받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인도를 받고 하나님과 교제를 하고 관계를 맺으면 우리의 신앙은 좋아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공동체가 없으면 신앙이 좋아질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약에서 끊임없이 공동체에 대한 도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이 무너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죄악으로 무너질 수 있고, 실수도 할 수 있고, 연약해서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돌아갈 곳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이 나에 대해서 가족으로 존중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가정이 있어야 합니다. 바르게 교육해주는 가정이, 틀린 길을 가면 올바르게 가라고 이야기해주는 부모가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실수했을 때 감싸주는 따뜻한 가정이 있을 때 우리의 자녀들은 방황하지 않습니다. 방황했다가도 돌아오는 것이 가정입니다. 가정이 온전하게 있다면 돌아올 수 있습니다. 청소년 사역을 할 때 비행청소년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가정에 문제가 있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청소년들이 갈 곳이 없어 방황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가정이 따뜻하고 가정이 건강하면 가족들은 계속해서 건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이런 곳이고 공동체가 이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_19:1-2’

 

하나님께서 공동체를 세우시는 첫 번째 기준입니다.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이것이 오늘날의 설교이며, 사역입니다. 무엇을 알려야 하나요? 하나님의 계시를 알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신 계시.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알려주신 것이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계시하고 합니다.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려주신 것이 성경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보여 주신대로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계시를 온 회중에게 전달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공동체의 사역입니다. 다시 말해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즘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를 다닌다고 합니다. 약속되지 않은 청년을 만났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물어봤습니다. 어떻게 해줄까요? 성경을 읽으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을 혼자 읽는 것이 어렵다면 강해설교를 들으면서 성경을 읽으시라고 했습니다.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말씀이 없고, 우리의 삶에 말씀이 희미해져있습니다. 요즘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설교도 듣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은 공동체를 위한 규례입니다. 여러 가지 내용이 있지만 네 가지로 분류가 가능합니다.

 

. 공동체를 위한 거룩한 삶

 

신앙의 대상이 분명한가? 안식일과 우상숭배에 관하여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_레위기19:2-4’

 

19장을 특별히 읽다보시면 하나님께서 한 가지를 말씀하시고 끝에 꼭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니라’. 이제 내가 너희의 주인이야, 내가 너희를 구원한 구원자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지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신앙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훈련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상을 섬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로, 대제사장 국가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시는데 가나안에 온갖 잡신들이 다 있습니다. 아스다롯을 비롯해서 수많은 우상들이 있는데 가면 금방 또 희미해져버립니다. 뭐가 희미해지나요? 우리의 주인이 아스다롯인가? 우리의 주인이 풍요의 신인가? 쾌락의 신인가? 즐거움의 신인가? 이러다가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또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신앙의 대상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 안식일을 지키고 내 성소를 귀히 여기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이니라_레위기19:30-31’

 

하나님을 경외하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단어 안에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에도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공경하는데 부모 공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께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하나님을 공경하는 잣대로 삼으신 것입니다. 신앙이 성숙하면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알게 됩니다. 부모의 자녀를 향한 사랑은 완전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님들은 수준이 조금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미국에 가면 이런 일들이 많습니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간 부모 1세대는 영어를 하지 못합니다. 세탁소, 페인트 할 거 없이 헌신해서 자녀들을 잘 키워서 좋은 대학에 보냅니다. 이제 자녀들은 영어도 잘하고 사회적 지위도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부모님들을 보니 세탁소에서 일하고 페인트칠하는 모습을 보고 수준이 낮다고 합니다. 신앙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적인 자녀들을 연단하십니다. 하나님이 연단하실 때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나에게 왜 이렇게 시련을 주시고 고난을 주세요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고 절대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광야에 있는데 하나님을 절대 따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80%만 믿고 나머지는 점을 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부모를 공경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강력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안식일의 제도였습니다. 안식일의 제도에 대해서 출애굽기, 신명기를 강해할 때 자세히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식일 하루에 관한 규례만 해도 수십 가지가 있습니다. 아마 안식일에 대한 율법을 들으면 교회 다니기 싫으실 수도 있습니다. 그것을 다 지킬 수도 없습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신약으로 해석해야 하는 것입니다. 해석하지 않고 지킬 수 없습니다. 그만큼 안식일에 하나님만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예배가 타락하고 변질 되었다는 말은 예배가 모이고 않고 교회가 성장을 안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가 타락했다는 것은 예배의 대상이 상실되었다는 것입니다. 19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들어온 열린 예배, 구도자예배가 히트를 쳤습니다. 예배의 무대를 화려하게 하고 예배의 모든 형식을 없애고 불신자들이 와서 복음을 들을 수 있는 예배를 만들어야 한다고 여러 가지의 내용을 접목했습니다. 불신자들과 더 가까워지는 목적을 가지고 예배를 드렸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아니었습니다. 예배는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예배만 받으십니다. 불신자들의 예배는 받지 않으십니다. 불신자들이 예배에 초청이 돼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서 나도 예수님을 믿어야겠다고 초청이 되는 거지 예배는 믿는 자, 십자가를 믿는 구원받은 자들의 예배를 하나님께서 흠향하십니다. 예배의 대상이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배의 대상이 새신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새신자 중심의 예배는 무서운 말입니다. 하나님 중심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 주인의 하나님이십니다. 물론 일주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확인하는 시간으로 하루를 비워 놓으신 것입니다. -금은 세상에서 먹고 살되 그 증거로 주일날 하루는 내 자녀, 내 백성이라는 증거로 예배를 드리라고 법으로 정해놓으셨습니다. 신앙의 대상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예배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예배의 대상을 사람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예배는 하나님 백성들의 송영입니다. 거룩하게 찬송으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우상숭배를 하는 것에 대해 엄격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가서 여러 가지 기적을 경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축복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시려고 모세를 시내산으로 부르십니다. 시내산이 안개로 둘러 쌓여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으로 올라가고나서 백성들이 기다리지 못하고 신을 만들자고 합니다. 아론이 주도를 해서 금을 모아서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아론은 모세를 도와서 출애굽한 중직자였습니다. 배교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조금 섭섭하다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너희의 예배는 70점은 줄 수 있다고 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고 뭐라고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격노하셔서 땅을 가르시고 묻어버리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예배가 인간을 위한 예배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기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열심이 나를 위한 것이면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다른 사람보다 돋보이기 위한 나 중심의 예배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목숨도 걸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냐 사람 앞에서 예배를 드리냐는 것입니다. 예배, 신앙의 대상이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이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안식일의 규례를 자세히 공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바르게 예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예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가르쳐주는 예배에 대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예배가 타락하면 교회는 타락하게 됩니다. 쯔빙글리, 칼빈,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제일 먼저 예배 개혁부터 했습니다. 왜냐면 중세교회가 타락했는데 예배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전부 사람을 위해 예배했습니다. 그래서 예배갱신부터 했습니다. 교회 안에 형상들, 모양들을 다 철거하고 부셨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로 위한 예배로 갱신했습니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예배개혁입니다. 복음을 깨닫고 제일 먼저 회복한 것이 예배입니다. 예배가 회복되어야 공동체가 세워지고 후대들이 바른 복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의 예배에 하나님의 영광, 임재가 없다면 우리는 예배를 해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지 않아야 재앙과 저주가 공동체 안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곳에 머물러주셔야 우리 공동체에 사단이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화목공동체를 추구하고 있는가?

 

너희는 화목제물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리고_레위기19:5-8’

 

안식일에 대해서 가르치시고 화목제에 대해서 설명하십니다. 화목제를 하고 다 나눠 먹으라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_레위기19:17-18’

 

공동체를 위한 삶이 예배만 잘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 화목제를 드려야 합니다. 왜 화목제를 이야기하나요? 다른제사가 아닌 왜 화목제인가? 이것은 성도간의 관계를 이야기 합니다. 십계명도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먼저는 하나님과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면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웃에게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나는 내 이웃에게 제사장이야, 교회야,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할 사람이야. 그냥 친하게 지내는 화목이 아닙니다. 내 이웃을 내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자신을 어떻게 사랑했나요? 어떻게 우리가 구원받고 어떻게 우리가 변화되고 친밀하고 교제한 것처럼 이웃을 생각하고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께서 화목을 주로 성령께서 하시는 사역으로 제한시키셨습니다. 왜냐면 화목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미움, 증오, 질투를 다스리는 것이 정말 어렵습니다. 증오는 쉽게 사라지지 않고 화가 끊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반드시 사랑의 용서가 동반됩니다. 용서가 없이는 복음이 전해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시고 어떻게 우리를 천국백성 삼아주실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용서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말미암으면 우리는 사망에 이르러야 하고 지옥에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았기에 우리는 은혜를 우리의 이웃들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화목제는 십자가 사건을 경험한 사람이 이웃에게 나누고 간증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지 않으면 화목공동체를 만들 수가 없습니다. 자꾸 교회가 프로그램으로 교회를 화목하게 만들려고 하는데, 프로그램은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교역자팀들과 같이 모여서 밥도 잘 먹고 놀기도 잘 놉니다. 그러나 한계가 있습니다. 마인드가 통하지 않으면 십자가 보혈의 은혜를 받지 않으면 같이 일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같이 밥 먹고 같이 여행을 다녀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화목공동체가 되어야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이끌 수 있습니다. 새가족 들이 교회에 오면 11로 양육도 받아야 하고 교육도 받아야 합니다. 사실 옛날에는 11 양육이 없었습니다. 교회에 오면 복음을 깨닫고 권사님처럼, 장로님처럼 신앙생활을 하면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복음이 스며들었습니다. 공동체 자체가 전도현장입니다. 공동체에 갔더니 저 분이 저런 삶을 왜 사는지 몰랐는데, 공동체 안에 들어가보니 알게 되고 얼마나 은혜를 사모하고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고 경외하는지 그래서 저 분이 저런 삶을 살고 있구나, 연단 속에서 인내하며 배려하며 사는지 알게 됩니다. 공동체는 화목공동체입니다.

 

약자를 배려하고 있는가?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_레위기19:9-10’

 

이 말씀을 지켜서 이삭 줍는 여인이 나왔습니다. 룻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우리는 남기지 않고 다 거두고 우리의 창고에 쌓아두고 나눠줍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발생하나요? 불편합니다. 가서 구걸해야 합니다. 줄 때 거만한 마음으로 나눠줍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나는 공짜로 받았는데 줄 때는 거만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줄때는 다른 마음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이 내게 복을 나눠주셨는데 내 복으로 줍니다. 그렇게 하지마라고 하십니다. 누구나 와서 가져가는데 불편함이 없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자를 이렇게 섬기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약자였다 라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_레위기19:15-26’

 

성경은 가난하다고 편을 들지 말라고 합니다. 가난한 자라고 잘못을 두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계속 그렇게 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자도 어떤 정의와 질서에 들어와서 규례를 통과해서 회복이 되어야 합니다. 공산국가, 사회주의국가에서 무료로 배급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공의롭게 해줄 때 약자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삭은 놔두라고 합니다. 살길을 열어놓으라고 하십니다. 죄를 지었으면 분명하게 재판을 하고 삶에서 살길을 열어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약자를 미워하지 말고 견책하라고 하십니다. 견책은 책임지고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약자를 보면 업신여기고 미워합니다. 복음도 모르는 저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복음도 모르는 저 사람이 바로 우리였습니다. 그래서 가르치라고 합니다. 저는 비브릿지가 커지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교육사업입니다. 아무리 먹을 것을 가져다줘도 그때뿐입니다. 학교 세우고 교회를 세워야 합니다. 그들에게 살길을 열어주어야 합니다. 미워한다는 말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인데 그러면 그냥 내버려둬야 하나요? 저희도 다 하나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들도록 가르쳐줘야 합니다. 34절에 보면 학대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구원의 길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 만날 길을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신약에 와서 학대하는 자에게 목에 연자맷돌을 달아 바다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성경은 공의롭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사회에 대해서 교회가 견책하려면 두 가지를 병행해야 합니다. 사회를 돕고 약자를 섬겨야 합니다. 약자를 배려해야 합니다. 이번 주에 박주영선수가 비브릿지에 많은 금액을 후원해주셨습니다. 그 금액 그대로 대구에 보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말만 하고 가르치려고만 하고 견책하려고만 하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학대하면서 밭에 이삭은 남기지 않습니다. 밭에 이삭은 자기 창고에 다 모으기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인생이 하나님께 거룩하게 쓰임 받도록 준비하고 있는가?

 

19절부터 보면 공동체에 대한 규례들이 자세히 나타납니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축을 다른 종류와 교미시키면 병이 걸리고 죽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먹고 있는 안좋은 먹거리들입니다. 원래의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DNA를 섞어버렸습니다. 당장은 좋지만 우리의 건강에 치명상을 가져다 줍니다. 과목을 심는데 3년 동안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십니다. 3년 동안 나오는 열매는 그 땅의 열매라고 하십니다. 최소 3년 동안은 생각도 바꾸고 마음도 바꾸고 체질도 바꿔야 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로 가나안으로 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체질, 생각, 마음을 다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4번째 첫 열매를 하나님께 다 드리라고 하며 5번째 열매를 먹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열매를 풍성하게 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우리는 광야가 없었으면 좋을 것 같고 당장 빨리 먹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광야를 지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 안에 있는 상처, 불신앙, 우상들을 다 꺼내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다가 갈등이 옵니다. 이것이 나를 위한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환란을 통해서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테스트하십니다. 4년째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지. 26절에서 보면 먹을 것, 머리 깎는 것, 수염 깎는 것, 문신하는 것, 딸이 창녀가 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축복되게 합니다. 하나님은 복이시고 복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삶은 왜 축복되지 않을까요? 말씀에 관심이 없기 때문에, 당장 눈 앞에 보이는 것 때문에 말씀을 선택하지 않고 늘 육신적인 선택을 하기 때문에 그 결과가 우리의 삶에 오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대표적입니다. 유대인들은 완전 성경 그대로 삽니다. 유대인들이 어떻게 저렇게 축복을 받고, 다른 민족들과 다를 수 있을까요? 나라들이 계속 사라지고 재건되고 멸망하고 반복하는데 유대인들은 계속 갑니다. 왜냐하면 말씀대로 살기 때문입니다. 바보 같고 천치 같고 무식하다하고 교회가서 엎드리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냐? 라는 소리에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예배, 오직 하나님의 영광. 이것이 무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는 창조주라면 이것이 맞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십니다. 3년 더 기다릴 수 있냐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생각, 삶의 방식, 전통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식, 하나님이 말하시는 전통을 배워합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 내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인간이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이것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똑똑합니다. 그래서 신앙을 준비하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잘 알아 듣지 못합니다. 축복은 축복의 길을 가야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답답한 원칙, 율법이 아니고 우리를 살려주는 길입니다.

 

. 인간이 살 수 있는 제일 잘 사는 삶

 

너희는 내 모든 규례와 내 모든 법도를 지켜 행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_레위기19:36-37’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_베드로전서1:3-9’

 

왜 신앙공동체, 믿음 공동체가 중요하냐? 구원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떤 세력을 얻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혼구원 때문에 모이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이 진짜 신앙입니다. 보지 못하지만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진수입니다.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것이 신자의 삶이고 거룩한 삶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들, 규례들이 불편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불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것이 신약에 와서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어보십니다. 첫 번째 계명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나는 제사를 원하지 않고, 너희의 사랑을 원해. 그래서 인간이 살 수 있는 제일 잘 사는 삶은 무엇일까요?

 

영원한 세계가 있음을 기억하기 위해 오늘도 말씀을 열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며 사랑하는 영적 공동체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신앙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매일 성경을 읽고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을 잊어버리지 말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신앙생활입니다. 이런 삶을 살 때 우리의 공동체는 거룩해지고,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예배가 될 것입니다. 제가 기도하는 저희 교회의 예배는 어떤 누구라도 이 예배에 왔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곳에 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우상을 제하고 하나님의 영광 앞으로 가야 합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_19:1-2’

 

문의 / 윤덕현 전도사 010.9899.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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