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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05-17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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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7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네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본 문 :

레위기23:33-44

오승주 목사

 

. 유월절로 시작된 하나님의 구원 계획

 

오늘 7대 절기의 마무리인 초막절입니다. 7대 절기가 유월절로 시작됩니다. 초막절까지. 이것이 한 눈에 보이도록 도표도 만들고 7대 절기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도 하고 싶지만 이것이 몇 월 몇 일인지 다 알 필요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지키는 절기의 형식들을 알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알아야 합니다. 유월절부터 초막절까지 상징하는 것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이것이 7대 절기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사,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구원의 여정이라고 표현이 됩니다. 유월절은 출애굽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노릇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건지셨습니다. 거기로부터 우리를 끄집어내신 것입니다. from입니다. 구원은 from에서 끝나면 안 됩니다. to가 있어야 합니다. 어디에서 나와서 어디로 가느냐가 구원의 완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가는 것입니다. 가나안이 목적지인가요? 아닙니다. 이것은 상징입니다. 왜 가나안인가요? 가나안에 예수님이 오실 것이기에. 가나안에서 십자가를 지실 것이기에.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건지셔서 예수님께로 가게 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에서 초막절까지의 절기. 그리고 또 하나는 종말론적인 해석은 예수님이 2천 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때로부터 요한계시록에 나온 예수님의 재림할 때까지. 우리는 그 사이를 살고 있습니다. 이 시기를 신학자들은 종말시기라고 합니다. 종말이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구약을 성취하시고 부활하셔서 성령이 임할 때부터 종말은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때를 대추수의 때라고 합니다. 이미 추수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시작을 하셨습니다. 들판에 추수할 곡식이 많은데 추수할 일꾼이 없구나. 라고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복음을 제일 먼저 전하셨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끝나는 것입니다. 끝나는 것을 초막절로 설명을 하십니다. 초막절은 초막에 대한 설명은 너무 간단하고 쉬운 것인데 우리가 이 땅에 7일 동안 초막을 짓고 살라고 합니다. 나팔을 불고 대 속죄일이 지나고 나서 7일동안 초막을 짓고 살라고 하는데 오늘 본문에 보니 초막을 짓고 살라는 목적이 하나입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 초막을 짓고 살라고 합니다. 애굽에서 출애굽하고는 광야에서는 초막생활을 하였습니다. 광야에서 계속 이동해야 해서 초막을 짓고 허물고. 이런 생활을 하였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드디어 정착을 합니다. 가나안 땅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에게로 가서 정착을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정착을 하는데 가나안 땅에서 예수님에게 정착을 해야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을 해버렸습니다. 풍요롭고 경작물도 가꾸고 집도 짓고 조직이 생겨서 성주도 군대도 생기다보니 하나님이 아시고 1년에 한 번씩 7일 동안 초막을 지으라고 하였습니다. 버드나무 가지나 푸른 가지들을 가지고 초막을 짓고 거기서 생활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착해서 큰 대궐 같은 곳에서 지내다가 정착해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일주일동안 불편한 초막에서 자야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유월절을 잊지 말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너희를 구원한 십자가의 사건을 잊지 말라고 초막절을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아파트에 살다가 지푸라기로 집 짓고 살면 얼마나 불편한지. 십자가의 사건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초막절의 종말론적인 해석은 초막은 이 땅에서 사는 삶입니다. 초막절이 끝나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는 천국으로 입성합니다. 영원한 육신의 부활까지 완전한 부활에 이릅니다. 그러면 초막에 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천국에 예비하신 장막. 하나님 나라의 왕국에서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초막절에 대해서 설명을 할 것인데 엄청난 말씀의 의미들이 있습니다. 주의 깊게 말씀들을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 초막에 사는 축복된 인생

 

-누구든지 다 추수하라

 

레위기에 나온 초막절 말고 신명기에 초막절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절기를 지킬 때에는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이레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_신명기16:13-15’

 

초막절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엄청난 의미가 많이 담겨 있습니다. 제일 먼저 보니 너희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에서 소출을 거두어들이다.’ 원래 이스라엘 절기에서는 모든 추수가 끝나고 새해가 시작되고 대속죄제를 거쳐서 초막절에 들어갈 때에는 또 다른 예물을 드리면서 유월절을 기억하는 절기를 시키는데 신명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적용을 하자면 타작마당과 포도주의 틀은 다 교회를 상징합니다. 구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표를 보면 우리의 인생이 50-60년이지만 하나님의 시간표를 보면 예수님이 이 땅이 오시고부터 재림하실 때까지 추수 기간입니다. 추수를 끝내고 나서고 최종적으로 지키는 절기는 초막절 입니다. 타작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곡식을 거둘 수 없습니다. 마지막 추수입니다.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날 때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리고 또 하나, 최인으로 태어나 이 땅에 살아가면서 인간에게 가장 큰 죄의 본성은 이 땅에 정착하고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이 마치 종착지인 것처럼 마음을 줍니다. 저도 40대 중반인데 저도 죽음이 나한테 멀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듭니다. 청년들은 죽음이 먼 미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언제가 죽음이 옵니다. 그 때가 영과 육이 분리되는 죽음이 올 때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땅이 이 세상이 종착지인 것처럼 살아버립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놀라운 것은 교회가,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 땅을 종착지로 여기로 삽니다. 이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 보고 이 땅에 나그네처럼 외국인처럼 살라고 합니다. 잠깐 왔다 가는 사람처럼 살라고 합니다. 내세를 깨닫는 사람이고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의 하는 행동입니다. 천국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 땅에 정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절기를 지킬 때에초막절을 말합니다. 초막절에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주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이 명단은 그 당시의 수준에 있어서 모든 사람입니다. 작은 부족국가를 이루던 그 당시에서는 모든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을 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초막절 때에. 굉장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줍니다. 이 모든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왜 초막절이냐. 우리가 전도하고 있나요? 주변사람에게 복음전파하고 있나요? 주변사람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나요? 아니죠. 아닌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저도 이번에 네팔을 3번째 갔습니다. 처음 갔을 때, 두 번째 갔을 때, 올해 갔을 때가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올 해 갔을 때에 하나님 앞에 회개를 많이 했습니다. 네팔은 복음의 불모지입니다. 이 사람들이 불교국가이며 힌두교의 문화권 안에 있는 국가입니다. 타루 목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여기 사람들은 윤회설을 믿기 때문에 장례식을 치르면 엄청 슬퍼한다고 합니다. 그 슬픔이 우리가 잠깐 헤어진 슬픔이 아니라 따루 목사님은 이 사람들은 내세를 믿지 않고 하나님이 계신 것도 잘 모르고 자기들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자기가 산 것에 대한 도움을 받는다고 너무 슬프게 운다고 합니다. 제가 네팔에 가서 네팔 사람들을 보면서 물질적으로 많이 도와 문이 많이 열려서 복음을 전할 시간표라고 생각하고 가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복음의 불모지가 전 세계에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네팔과 같은 나라가. 태어나서 아이들이 10살이 채 안되기 전에 죽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세요? 질병, 재앙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아이들이 예수의 도 들어보지 못하고 자기가 사는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다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불모지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더 나은 시스템, 더 나은 교양, 더 나은 수준, 더 나은 교리, 더 나은 탄탄한 조직, 이런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네팔을 다녀오면서 비행기 안에서 일기를 쓰고 기도제목을 적는데 다짐들을 하였습니다. 주님, 저 복 받고 싶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복음 전하고 싶어요. 예수님 말해주고 싶어요. 그래서 제가 청소년 때에 대학교 때 복음의 뜨거움이 이번 네팔 때에 많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눈이 어두워져 다른 마음을 가지고 목회를 했구나 하는 회개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 초막절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초막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예수님 안에 풍성히 거할 때 내 이웃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초막 안에 거하지 않고 하는 전도는 그릇된 전도가 될 수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는 전도를 많이 했습니다. 복음전하고 영접시키고. 이번 주에도 어떤 분이 상담을 요청했는데 요청이 목사님과의 갈등이었습니다. 갈등이 자기 혼자의 갈등이었습니다. 교회가 너무 가기 싫다고 합니다. 주일에 예배 끝나고 전도를 하러 다닌다고 합니다. 나쁜 것 아니잖아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목사님이 그것을 안 가면 성도 취급을 안 한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해서 영접을 시키고 그 다음에는 관심을 끊습니다. 이것이 전도입니까. 이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전도는 초막절이라는 절기에 내 이웃들과 자녀들, 내 성중 안에 거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의미가 있나요? 내가 예수님으로 즐거워하는 것.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들로 같이 즐거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에 들어와서는 영원히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했을 때 복음을 전하고 영접도 하지만 그렇지 않고 계속 만날 사람들에게는 영접기도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어느 순간 스며듭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면. 왜냐하면 예수님을 좋아하니까 예수님을 이 사람에게 안내하고 소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목회자의 역할이고 여러분들의 역할입니다. 우리의 스승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목사의 역할은 여러분을 예수님께로 안내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서 너무 행복하고 좋잖아요. 내가 예수님을 만나서 너무 감사하고 기쁘잖아요. 이것을 나눠주는 것입니다. 당신도 예수님에게로 가면 살 길이 있어. 예수님에게 가면 살 수 있어. 이것이 우리의 역할입니다. 그런데 이런 즐거움에 이웃들이 동참하는 것. 이것이 초막절의 역할입니다.

 

- 네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니

 

14절에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내 몸에서 나오는, 내 농작지에서 나오는, 내 삶에서 나오는 모든 소출과 내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이 복은 받으셔도 됩니다. 이 복은 무슨 복인가요?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니 그 사랑에 충만해서 이웃과 나누는 복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살았던 그 중심으로 살았던 사람의 모든 것이 복되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나를 위해서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내 기쁨을 위해서 전도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 예수님이 좋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영혼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전하는 복음하고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네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것에 복을 주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믿었는데 초기에는 이중생활을 대부분 합니다. 내가 다시는 직장과 교회가 아무 상관없는 것 같고. 내가 하는 일과 예수님을 믿는 것과 복음 전하는 일이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주에 영상보셨죠? 트레이너 이야기.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니 트레이너가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될 수 있구나. 내가 버는 돈이 복음을 위해서 쓰임 받을 수 있겠구나. 내가 가진 달란트와 내가 가진 재능이 내 삶에서 주시는 복들이 복음을 위해서 쓰라는 것이구나. 라고 깨닫는 것입니다. 단지 헌금해라 전도현장에 같이 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지금 예수님이 전해지냐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님이 존재 하냐는 것입니다. 네 이웃, 네 자녀, 네 노비, 레위인, , 고아, 과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영생을 얻기 위한 계명이었습니다. 네팔에 가서 네팔 영혼들을 사랑한다면 저는 다 주고 왔어야 했습니다. 내 몸과 같이 사랑했다면. 물질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팔의 영혼을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사랑했다면 내가 누리고 있는 성경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 예수님을 믿고 받은 축복들을 다 나눠주고 와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해라. 그것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네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을 주시겠다고 합니다.

 

- 그들과 함께 온전히 즐거워 하라

 

그러면서 그들과 함께 온전히 즐거워하라. 이것이 초막절입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면 이웃과 온전히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웃과 무엇으로 즐거워 할 수 있나요? 먹을 것을 주면 즐거워하나요? 잠깐은 즐거워할 수 있겠죠. 영원히 즐거워 한다는 것은 그들과 함께 천국에 입성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예수님을 안 믿어요. 형제가, 남편이나 아내가, 자녀가 예수님이 안 믿어요. 그것이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인가요? 아닙니다. 나중에 슬피 울 것입니다. 나는 천국에 입성하는데 내 형제는 지옥에 간다면 너무 슬플 것입니다. 영원히 함께 즐거워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요? 내가 믿는 예수님.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전도이고 진짜 복음 전파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마태복음13:10-43에 씨 뿌리는 비유가 있습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_마태복음13:15-16’

 

예수님이 인용하신 말씀이 이사야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면서 씨 뿌리는 비유를 갑자기 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하고 제자들을 불려서 이에 대해서 해석을 했는데 37절입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_마태복음13:37-43‘

 

씨 뿌리는 비유를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좋은 씨는 예수님, 밭은 세상. 가라지를 뿌리는 존재가 있는데 악한영이죠. 가라지는 전라도에서 피라고 합니다. 모를 심어 어느 정도 자라면 피가 나옵니다. 벼가 아닌 것입니다. 가라지를 뽑지를 못합니다. 어릴 때 뽑으면 구분이 안 됩니다. 그래서 벼가 같이 뽑힙니다. 그래서 언제 뽑냐면 추수가 될 때까지 기다립니다. 특징이 달라집니다. 추수 때가 되면 벼가 열매가 있어서 고개를 숙입니다. 피는 열매가 없어서 서있습니다. 그 때 뽑는 것입니다. 그 뽑은 피를 가지고 말립니다. 그리고 불에 태워버립니다. 이 씨앗이 얼마나 강한지 또 논에 피가 되니 태워버린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그 비유를 드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열매를 맺습니다. 천국곳간에 들어갑니다. 우리는 천국 곳간에 열매가 됩니다. 그러나 피는 같이 살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않는 피 같은 사람들은 불에 들어갑니다. 지옥을 상징합니다. 추수 때를 이야기합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_도행전1:7-8’

 

예수님이 언제 오시냐. 제자들이 물어보았습니다.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이 말은 무슨 말인가요? 예수님이 언제 오실 것이다. 몇 월 몇 일에 올 것이다. 완전 다 사이비입니다. 성경은 너희가 알 바 아니요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언제 올 것이다. 다 사이비입니다. 이런 것과 같습니다. 철없는 학생 때 엄마한테 물어봅니다. 엄마 언제와. 계속 확인합니다. 엄마 오기 전에 다 정리하려고. 자기 맘대로 놀다가 엄마 오기 전에 다 정리하려고 물어봅니다. 마치 우리도 마음껏 살다가 예수님 오기 직전에 거룩해지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도적같이 빛처럼 오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정말 사랑하면 지금 오셔도 괜찮은 것이 아닙니까? 밤에 오든 낮에 오든 일할 때 오든 내가 공부할 때 오든 상관없겠죠. 예수님이 언제오시냐고 물어보는 것은 사이비입니다. 예수님과 늘 동행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묻지 않습니다.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_사도행전28:23-31’

 

왜 초대교회에 바울이 28장 이런 이야기를 했냐면 초대교회 때에 3천명-5천명이 모였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제자들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흩으신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 교회가 복음의 불모지에 가지 않으면 하나님이 흩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사는 초막생활을 하지 않으면 교회는 부흥할지모르지만 듣기 들어도 깨닫지 못한 한국교회 성도들만 일어날 것입니다. 전도 현장에 한 영혼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를 깨달을 때 교회도 살아날 수 있습니다. 우리끼리 시스템 이야기, 프로그램 이야기 계속 할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타락할 수 없을 것입니다.

 

뭇 백성들아 이를 들으라 세상의 거민들아 모두 귀를 기울이라 귀천 빈부를 막론하고 다 들을지어다 내 입은 지혜를 말하겠고 내 마음은 명철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로다 내가 비유에 내 귀를 기울이고 수금으로 나의 오묘한 말을 풀리로다 죄악이 나를 따라다니며 나를 에워싸는 환난의 날을 내가 어찌 두려워하랴 자기의 재물을 의지하고 부유함을 자랑하는 자는 아무도 자기의 형제를 구원하지 못하며 그를 위한 속전을 하나님께 바치지도 못할 것은 그들의 생명을 속량하는 값이 너무 엄청나서 영원히 마련하지 못할 것임이니라 그가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그는 지혜 있는 자도 죽고 어리석고 무지한 자도 함께 망하며 그들의 재물은 남에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을 보게 되리로다 .그러나 그들의 속 생각에 그들의 집은 영원히 있고 그들의 거처는 대대에 이르리라 하여 그들의 토지를 자기 이름으로 부르도다 사람은 존귀하나 장구하지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들의 길이며 그들의 말을 기뻐하는 자들의 종말이로다 그들은 양 같이 스올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사망이 그들의 목자일 것이라 정직한 자들이 아침에 그들을 다스리리니 그들의 아름다움은 소멸하고 스올이 그들의 거처가 되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니 이러므로 내 영혼을 스올의 권세에서 건져내시리로다 사람이 치부하여 그의 집의 영광이 더할 때에 너는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그가 죽으매 가져가는 것이 없고 그의 영광이 그를 따라 내려가지 못함이로다 그가 비록 생시에 자기를 축하하며 스스로 좋게 함으로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을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역대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리로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_시편49:1-20

 

이와 같이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날에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말하기를 우리가 우리 떡을 먹으며 우리 옷을 입으리니 다만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부르게 하여 우리가 수치를 면하게 하라 하리라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며 또 초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_이사야4:1-6’

 

일곱 여자는 교회이고 한 남자는 예수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시편의 말씀, 이사야 말씀. 대조적입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이 땅에 정착하려고 합니다. 이 땅에 영원한 집을 지으려고 합니다. 집들을 수리합니다. 영원히 살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나 시편의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 영원히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않을 것인가. 이사야 말씀은 초막에 있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합니다. 더위를 피하게 해주고 풍우를 피하게 해주는 초막. 영적인 위기를 면하게 해주고 지옥에 가는 것을 면하게 해주고 영원히 멸망당할 그 삶을 건져주신 초막. 예수 그리스도. 너무 중요합니다.

 

가옥에 가옥을 이으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에서 홀로 거주하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귀에 말씀하시되 정녕히 허다한 가옥이 황폐하리니 크고 아름다울지라도 거주할 자가 없을 것이며 열흘 갈이 포도원에 겨우 포도주 한 바트가 나겠고 한 호멜의 종자를 뿌려도 간신히 한 에바가 나리라 하시도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독주를 마시며 밤이 깊도록 포도주에 취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보지 아니하는도다_이사야5:8-12’

이 땅에 홀로 거하는 사람들. 나 중심. 난 부자가 됐어. 영원한 성을 짓고 영원히 살 것이야. 화 있을진저. 황폐하리니. 밤마다 포도주를 마시고 독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침에도 술을 마치고 흥청망청 이 땅이 전부 인 것처럼. 연회를 베풀어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피리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일, 그의 손으로 하신 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보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화 있을진저. 초막에 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동행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네가 내 안에 내가 네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살 때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 때 우리는 이 땅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시야가 열립니다. 천국을 믿는 사람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겠어요? 진짜 멋지게 살 것입니다. 나그네로, 외국인답게 살 것입니다. 천국을 믿는 사람들은 이 땅에 튼튼한 집을 지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파트 살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초막에 산다는 말은 영적인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종착지 마냥 세상에 정착하여 살려고 하는 타락한 기독교인의 모습입니다. 바리새인의 모습, 유대인의 모습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유월절을 기억하는 십자가의 사건을 기억하는 나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초막 안에. 이레 동안 거하라고 합니다. 절기로는 이레지만 이레는 완전한 숫자 7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인생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살 때 우리의 인생은 복음 전파하는 인생으로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과 교제하며 그 분으로 충만해져야만 우리의 달란트들이 우리의 전문성이 우리의 일생이 이 땅에서 나그네의 인생을 살지만 이 땅에 잠시 왔다가 가지만 이 땅에 있는 동안 해야 할 사명이 있구나. 이것이 복음 전파라는 것입니다. 내 주변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구나. 너무 중요한 말씀입니다.

 

천국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_요한계시록21:1-8’

 

왜 둘째 사망인가요? 태어날 때 죽어서 태어납니다.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완전히 죽어서 지옥불로 가는 둘째 사망. 첫째 사망과 둘째 사망 사이에 구원받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육신을 가지고 살 때에. 천국은 실존하는 곳입니다. 요즘 신사도 운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학교에 퍼지고 있습니다. 그 분들이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이 하나님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 같습니다. 그래서 실존하는 천국을 다 빼버렸습니다. 그 때는 가난 했을 때에 이 땅이 어려우니까 천국을 소망 한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말합니다. 로마 가톨릭이 그랬습니다. 원래 초대교회는 천국사상을 가지고 뜨겁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나중에 거대한 조직이 생기고 막강한 권력이 생기니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면서 계속해서 성전 짓고 있습니다. 성경은 초막을 짓고 살라고 합니다. 곧 떠날 것이니까. 우리가 천국을 소망하고 천국을 믿는다면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야 내 주변 이웃들과 함께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될지. 우리 교회에 얼마만큼 부흥과 역사를 허락하실지 모르겠지만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 있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훈련하고 있지만 어느 순간 우리 교회에 성령을 부으시면 뜨겁게 예수님의 이름을 증거 하는 그 때가 오리라고 확신합니다. 전 네팔을 두고 기도하고 복음의 불모지를 두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들을 마음껏 개발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주신 전문성들 최선을 다해 개발하세요. 그러나 전문성과 달란트들이 세상에 성을 짓고 나의 이익을 위해서 쓰게 된다면 저주가 될 것이지만 마음껏 준비하는 달란트들이 주의 복음전파 하기 위해서 쓰임 받는다면 여호와께서 네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는 일생을 살면서 한번뿐인 인생. 천국에 입성 했을 때 내 이웃들과 함께 입성하길 원하고 우리에게 맡겨진 영혼들과 함께 즐거워하길 원합니다. 교회는 획일화되면 안 됩니다. 복음은 진리라서 흔들리면 안 되지만 여러분은 다양합니다. 여러분의 달란트는 다양합니다. 교회에 와서 눈치 보지 마세요. 교회에 와서 음악을 잘하시는 분은 음악으로 복음을 전하시면 되고 설거지를 잘하시면 설거지로 복음을 전하시면 됩니다. 교회는 획일화되면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머리시고 우리는 지체이지 우리가 손만 있다면 징그럽겠죠. 한국 교회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유일한 문제는 장점을 보게 만들고 장점을 강화시키는 교육이 아니라 단점을 보완하는 교육을 과하게 합니다. 단점을 보완하다보니 장점도 사라져버립니다. 각자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가 있습니다. 그것을 개발하시고 그 일이 복음전하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문의 / 윤덕현 전도사 010.9899.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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