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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07-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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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7월 26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본 문 :

이사야1:1-20

 오승주 목사

 

Ⅰ. 유다 왕 웃시야의 업적_이사야1:1, 역대하26:16

원래 성경의 책 제목을 이사야, 아가, 시편이라고 적은 것은 후대들이 정한 것이며 장과 절도 읽기 편하게 편집을 하면서 적은 것입니다. 원래 성경은 장과 절이 없으며 이름도 없습니다. 주로 이 책의 내용들이 이사야에 관해 많이 나와있었기에 이사야의 책이라고 하는 것이 원 제목입니다.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서 주로 NIV에서 이름들을 붙이고 장, 절을 나누는 작업을 많이 했습니다. 성경이 우리가 읽기 편하게 우리 손에 들어왔습니다. 구약의 이름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사야라는 뜻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입니다. 이사야는 네 명의 왕, 웃시야로부터 히스기야 왕까지 네 명의 왕 시대에 관련된 기록이 적혀져 있는 책입니다. 이사야가 그렇게 오래 살면서 활동했던 선지자는 아니고 이사야의 제자들, 이사야를 기억하는 후대들이 기록한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로 이어지는 네 대에 걸친 기록물이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주로 이사야가 많이 활동을 했고 이사야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이사야를 통해서 네 왕 시대의 남 유다를 살펴본 책입니다. 남유다, 북이스라엘이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남유다는 북이스라엘에 비해서 굉장히 열악했습니다. 왜냐면 지파적으로 따질 때 북이스라엘은 10개의 지파가 소속되어 있었고 남 유다는 2개의 지파만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숫자적으로도 밀리고 지파적으로도 밀리는 것이었습니다. 남북이 6.25전쟁으로 갈라진 것과 같은 느낌으로 갈라졌습니다. 남유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많은 소망을 두시고 구약성경에는 남유다에 대한 기록들이 많이 있습니다. 남유다는 지정학적으로도 굉장히 불리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그래도 땅이 비옥했는데 남유다는 석회질, 석회암이 주로 형성되어 있어서 비가 오면 그대로 땅으로 스며드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이른 비, 늦은 비를 주시라는 기도가 많이 있습니다. 비가 땅 속에 스며들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른 비, 늦은 비를 주시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도 다 망하고 먹을 것도 없는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환경이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주변에 앗수르, 바벨론이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웃시야로부터 망한 것이 기록된 성경이 이사야입니다. 처음에는 앗수르를 통해서 망했습니다. 앗수르를 통해서 거의 망하다시피 하고 그 바톤을 이어받아서 바벨론이 망하게 했습니다. 앗수르가 끝까지 완전히 정복하지 않은 것은 하나님이 앗수르를 기억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성전을 파괴했을 때 당하는 보응은 엄청 컸습니다. 이런 독특한 기록도 이사야서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셨는데 끝까지 멸망시키지 않으시고 어느 정도 압박하고 빠지고 이어 받은 것이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켰습니다. 바벨론은 완전히 초토화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용하신 바벨론인데 하나님의 성전을 무너뜨리고 신앙공동체를 무너뜨린 바벨론은 끔찍하게 역사 속에서 사라집니다. 이런 것에 관한 기록들도 이사야서에 많이 들어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이런 남유다에 아버지를 이어서 웃시야라는 왕이 나타났습니다. 처음으로는 섭정으로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죽고 나서 본격적으로 웃시야가 개혁이라는 것을 했는데 웃시야에 관한 기록은 열왕기하에 잘 나와 있습니다. 웃시야 왕은 굉장히 똑똑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왕이 되어서 무너진 성벽을 재건했습니다. 기록물을 찾아보니 건축학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면 성벽위에 수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비를 모아서 수로를 만들어서 농사를 짓는데 물을 공급해주는 아주 똑똑한 건축물도 세웠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전략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남에게 조공을 주던 나라가 조공을 받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싸워서는 이길 수 없는 조건들인데 전략들이 뛰어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봤을 때는 웃시야 왕의 업적을 볼 때 뛰어났다고 볼 수 있지만 역대하26:5 성경에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_역대하26:5

 

우리는 성경을 믿습니다. 웃시야 왕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 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지혜를 주고 전쟁때마다 승리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그를 형통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했을 때는 웃시야가 똑똑하구나, 대단한 왕이구나라고 기록을 볼 수 있지만 실제로 웃시야는 늘 하나님 앞에 갔습니다. 제사장을 통해서 제사를 지내고 하루를 시작하고 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하는 왕이었습니다. 이사야 6장에 보면 웃시야가 죽고 난 후로 이사야의 활동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이사야에게 임하게 됩니다. 웃시야가 말년에 비참한 말년을 겪게 됩니다. 웃시야가 나병에 걸리게 됩니다. 이것도 후세들이 정확하게 나병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나병에 걸렸다고 추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염병인 것은 확실합니다. 왜냐면 웃시야가 죽고 나서 왕들이 있는 묘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별도로 묘를 만들었습니다. 명예롭지 못한 것입니다. 선조들의 왕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전염병은 확실하며 이것이 나병, 문둥병이라고 확인하고 있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철저하게 고립되고 분리됨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대단한 왕이었지만 병에 걸렸기에 말년이 외로웠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이 형통을 주셨던 웃시야가 이렇게 되었나? 역대하26:16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_역대하26:16‘

 

하나님은 왕권과 제사장권을 분리하셨습니다. 왕은 절대 제사장의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해서 실패한 왕이 사울 왕입니다. 사무엘이 오지 않자 급하게 자기가 제사를 지낸 사울 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확실히 버리셨습니다. 웃시야는 사울 왕보다 더 나쁘고 악했습니다. 왜냐면 나라가 강력해지고 부강해져서 이제는 제사장이 필요 없으며 내가 더 이상 무엇을 해야 할까?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들도 나를 존경해, 돈도 많아, 실력도 좋기에 더 이상 할 것이 없어서 웃시야는 역사적 기록에 보니까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겠다는 마음으로 제사장을 제외하고 제사장들의 무리들이 자신의 뒤를 따라오게 만들고 자신이 앞에 가서 분향을 하려고 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문둥병을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남유다는 앗수르의 침략이 생기고 바벨론에 포로가 되었습니다. 지금 중국에 심각한 재앙이 있다고 합니다. 메뚜기 떼가 중국 전역을 덮었다고 하고 홍수가 몇 달째 계속되고 있다고 합니다. 코로나를 걱정할 틈이 없이 자연재해가 중국을 뒤덮고 있습니다. 미국도 코로나 뿐만 아니라 수 많은 재앙들이 나라를 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환경학적이라고 설교를 했지만 사실 저의 믿음은 하나님의 진노이며 재앙입니다. 중국은 지난 몇 년동안 교회 십자가를 다 철거하고 교회 성경을 빼앗고 국가에서 만든 성경을 제공하고 교회마다 주석의 사진을 다 걸게 만들었습니다. 온갖 교회를 탄압하고 핍박했습니다. 하나님은 신앙공동체를 핍박한 무리들을 그냥 두지 않으십니다. 미국은 반대의 경우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무서운 죄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싲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완전 가난한고 지정학적으로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황에서 웃시야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웃시야를 사용하셨는데 하나님의 도우심, 구원하심, 붙잡아주심, 베푸신 은혜를 잊어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정해주신 법도를 어기고 교만하여서 악을 행하였고 하나님께 범죄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은혜를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오늘 그런 남유다에 대한 고발로 이사야는 시작하고 있습니다.

 

Ⅱ.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변론

 -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고발_이사야1:1-9

 -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_이사야1:10-17

 -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_이사야1:18-20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_이사야1:2-3‘

 

하나님이 구원하시고 축복하신 백성들이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동물들도 제 주인을 알아보는데 내 자녀들,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앗수르로부터 심각한 공격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다행인 것은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시키지 않으셨습니다. 소수의 생존자를 남겨두셨습니다. 소수의 생존자를 남겨두지 않으셨다면 소돔과 고모라와 같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야기하십니다. 소돔아 들어라, 고모라의 관원들아 들어라. 그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놓치면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라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는 나라,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나라, 하나님을 무시하는 나라, 은혜를 받고 은혜를 등지는 사람들, 교만하고 악을 행하는 공동체 단체들,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지 않는 것들,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뒤로는 수많은 우상을 섬기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_이사야1:4’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여긴 자들을 그냥 두시지 않으십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을 하나님이 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악을 행하고 범죄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신앙공동체를 공격하는 세력들을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이사야서를 보시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 원합니다. 제가 성경을 읽는 중에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가장  하나님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난 성경이 이사야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하나하나 다 드러나 있습니다. 그 시기에 이스라엘은 어떤 예배를 드렸나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_이사야1:11-13‘

 

그 시기의 제사를 봤을 때 엄청 많은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라가 부강했기에 살찐 짐승에 하나님이 배불렀다고 할 만큼 많은 재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우리의 주일, 희년 이런 제도도 그렇다고 합니다. 성회, 집회로 모이는 것도 그렇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견디지 못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지난주까지 안식일, 제사, 성회에 대해서 배우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고 생각했는데 완전 역설적입니다. 남유다 웃시야 시절에 어떤 예배를 드리고 있었냐면 우리 말로 표현하면 뜨겁고 열정적인 예배를 드렸습니다. 제가 예전에 CCC수련회를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나 뜨겁고 열정적인지 모릅니다. 우리 교단의 집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뜨겁고 열정적입니다. 그런데 그 뜨겁고 열정적인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왜냐면 예배와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열정적인 예배를 역겨워하셨습니다. 왜냐면 정의를 행하는 일을 동반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리를 동반하지 않은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가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안식일, 대회, 성회까지 입니다. 남들이 볼 때는 정말 하나님께 예배를 잘 드린다고 생각합니다. 집회와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성경을 낭독하는 성회.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셨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_이사야1:15-17‘

 

하나님이 왜 기도를 받지 않으시고 예배를 받지 않으시나요? 손에 피가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주석을 보면 여러 가지 설명이 되어 있지만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다는 것은 웃시야가 직접 제사를 지냈다는 것도 있고 또 하나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이미 거룩한 나라로 주신 축복으로 많은 것을 주셨는데 그 이후 인간의 욕심으로 사람을 더 죽이고 더 정복하려고 했던 그 핏값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이 있습니다. 우상은 다 죽여라. 그런데 제물을 죽이지 않고 살찐 짐승을 내 것으로 만든 사람들은 다 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정해주신 것이 있는데 그것을 인간의 욕심으로 오버했을 때 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사람을 죽이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면 우리가 깨닫고 구원 받게 하시는 것이 목적이지 더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더 많은 영토를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동안 악한 행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선행을 하지 않고 정의를 구하지 않고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고아와 과부는 지금과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그 당시 고아와 과부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적인 고아와 과부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단순한 형식적인 예배가 아닌 진리를 동반한 예배였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예배는 진리였습니다. 어떤 형상을 통해서 드리는 예배가 아닌 우리의 신실함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실함을 우리에게 요구하셨습니다. 신실함은 우리 삶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일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지 않는 삶이 동반된 주일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그런 성회, 집회 받지 않으시겠다고 합니다. 제가 지난 몇 달 동안 이사야서를 보면서 내적인 갈등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집회나 예배를 가면 창피함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자존심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제 환경, 제 모습보다 크시다는 것이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앞자리에서 예배드리는 것, 큰 소리로 찬양을 부르는 것이 창피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배 끝나면 선생님들이 목소리 크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수치심,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면 옆에 사람이 보이지 않습니다. 물론 예절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시절에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고 큰 목소리를 회개기도를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제 옆에 사람들이 제 죄를 다 알았을 것입니다. 왜냐면 회개기도 하는데 속으로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하는 것이 그렇게 좋았습니다. 지금의 제 모습은 말씀을 들으면 이 말씀을 어디에 써먹을지 생각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저의 문제도 있지만 공동체의 문제도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영혼을 사랑하고 주변에 이삭을 남겨둬서 고아와 과부들이 먹게 하는 자비와 베풂이 없는 공동체의 성회, 예배, 기도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십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 내가 너희의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너희의 기도를 들어보려고 너희의 얼굴을 보지 않고 기도를 들었는데도 기도를 못 듣겠다고 하셨습니다. 얼마나 악을 많이 행했으면. 우리가 진짜 해야 할 선교, 전도, 사역은 사실 어떤 전략이 아닙니다. 어떤 목적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 삶에 정의를 회복하고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어려운 이웃들과 고아와 과부들을 도우며 악한 행실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들, 돌아오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드리는 공동체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이유입니다. 우리 예배가 정열적으로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연결이 되어 있고 우리의 인생과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여러분이 은밀하게 짓는 죄와도 이 죄는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  없이 사는 삶, 그런 신자, 그런 교회, 그런 목회자들이 많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남유다를 보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_이사야1:18-20’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변론하자고 하십니다. 서로 따져보자, 대화 좀 해보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변론, 따지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목회자로 그것을 너무 많이 느낍니다. 한 청소년 아이가 굉장히 타락하고 변질되고 위험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중직자 자녀였는데 제가 연락을 해서 만나자고 했는데 됬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딱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변론하자고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됐다고 자신들 잘 살고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웃시야 왕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번영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얼마나 좋은 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곧 다가올 재앙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변호하고 계시나요? 은혜입니다.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사람이 번영하고 잘살게 되면 딱 잊어버리는 것이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어떤 은혜를 잊어버리나요? 죄에 대한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제가 많은 후배들과 대화를 하면 꼭 집어서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목회자가 경각심이 없으면 교회는 큰 위기가 올 거야. 성도들은 목회자가 죄를 강조하면 지겹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조절하지만 목회자 입장에서는 죄에 대한 경각심이 없으면 그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아시죠? 너희의 죄가 주홍, 진홍 같이 붉다는 것은 완전 빨갛게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죄는 일부분 깨끗하고 일부분 죄를 짓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떠난 죄,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경배하지 않는 죄, 예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천국이 있는 줄도 알지 못하고 사는 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온 인간은 전적인 죄를 가지고 있고 전적인 타락의 상태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건져주셨습니다. 웃시야 내가 너에게 이런 은혜를 주었는데, 내가 왜 너에게 지혜를 주고 수로를 만들게 하고 전쟁에서 이기게 한지 모르겠느냐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은혜를 나누고 베풀라고, 구원의 은혜를 이방인들에게 전하라고 세운 나라입니다. 신앙은 단계는 아닙니다. 그러나 세 가지 과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누구냐고 물어보면 그리스도, 왕, 제사장, 선지자, 구원자라고 이야기를 하며 다 아는 것 같은데 실상은 모릅니다. 왜냐면 성경을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그 예수님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하나도 모릅니다. 어떻게 내가 예수님을 믿고 있게 됐는지 그 과정을 하나도 알지 못합니다.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두번째 과정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는 것입니다. 구원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면 믿게 됩니다. 그 예수님이 내 안에 동행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 교회의 성도들 대부분 이 단계까지는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과정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성경은 순종을 요구합니다. 이 순종에 대해서 목사가 설교하는 것이 꺼려집니다. 왜냐하면 목사에게 순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 잘 들으라는 순종이 아닙니다. 성경의 순종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는데 나와 함께하시는 것도 너무 잘 아는데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주는 감동에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성경은 타락, 변절, 변질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면 예전에는 말씀을 들었을 때 아멘, 그렇습니다 주님,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고 내 삶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환경과 상황에 상관없이 그렇게 했습니다. 서상윤처럼 성경을 읽고 벅찬 감동이 가슴에 부딪혔을 때 내가 이 성경을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보급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국경을 넘어올 때 목숨을 걸고 넘어왔습니다. 성경을 보급하는 것이 금지였는데 목숨을 걸고 보급하였습니다. 거룩한 저항을 하였습니다. 국가에서 금지하니까 성경을 보급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구원의 축복을 누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코로나가 국가에서 이런 법을 정했으니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 음성, 감동들은 그것을 뛰어넘게 합니다. 순종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아침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동들, 말씀이 주는 깨달음들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는 타락한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말씀을 들을 때 나는 이렇게 살아야지 감동이 왔는데 삶에 돌아가서는 여전히 똑같이 하나도 변함없는 자기의 생각, 이익과 욕심을 따라 신앙생활하는 수 많은 목회자, 성도들의 모습에 경고하고 계십니다. 순종이 없는 모습에 하나님께서 경고하고 계십니다. 순종을 하지 않는 경우는 주로 어떤 갈등이 왔을 때 인가요? 내 이익을 못했을 때의 갈등, 내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입니다. 이 갈등 속에서 순종을 해야 하는데 순종을 포기하는 것은 내 이익을 따라가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 내 욕심을 따라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에서 멀어지고 말씀에서 멀어지고 뜨겁게 기도하는 은혜가 차고 넘지는 곳에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행위는 남들 보기에 잘해야 하기에 종교적인 행위만 하는 것입니다. 남유다가 드리는 예배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피를 묻히지 마,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마, 더 이상 범죄를 일으키지 마, 악을 행하지 마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주일에 뜨겁게 기도할 수 없어서 금요예배를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하는 시간으로 만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금요예배 오시는 분은 알겠지만  진짜 은혜가 있습니다. 손을 들고 찬양하고 하나님 앞에 큰 소리로 부르짖습니다. 제가 목사인데 저도 집에서 기도가 잘 안됩니다. 기도하려고 하면 아빠를 부르면서 뛰어오는 한빈이, 기도하려다보면 둘째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이어폰을 끼우고 말씀을 들으려고 해도 와이프가 문을 똑똑 두드립니다.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집에서 기도를 잘 할 수 있나요? 온라인 예배를 드리시는 성도님들 예배가 잘 되시나요? 예배 드릴때는 화장실 가고 싶어도 안가고 참습니다. 집중이 됩니다. 그런데 집에서 예배드릴 때 화장실이 가고 싶으면 갑니다. 누가 보는 사람 없으니까 물이라도 올려놓고 끓는 동안 메시지 듣자는 식입니다. 잘 안됩니다. 혼자해도 잘 하시는 분들이 계시지만 하나님께서 공동체 신앙을 허락해주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도자가 중요합니다. 웃시야가 타락하니까 온 백성이 다 재앙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것에 거룩하게 저항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세우셨습니다.

 

Ⅲ.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 주를 멀리 떠났다면_이사야6:1-7

 - 내 영혼이 안전한 지 항상 살펴야 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_이사야6:1-3’

 

천사들이 날개가 여섯 개가 있는데 얼굴을 가립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 빛나서 가리운 것입니다. 자기 발도 가리웠습니다. 그리고 날며 뭐라고 고백하나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를 맛 본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에게만 벌어져야 할 일인가요? 우리에게도 벌어져야 할 일입니다. 지금 한국 땅에서 예배하고 있는 이 시간에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_이사야6:4-7‘

이사야가 지금 성전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거룩을 회복하기 위해서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거룩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이 땅의 어떤 것도 거룩이라는 단어를 붙여서는 안됩니다. 거룩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에게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분이 거룩하시네, 우리 목사님 거룩하시다. 그렇게 함부로 이야기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목사님들 타락해서 뒤에서 이상한 짓 하는 목사님들 정말 많습니다. 그것이 인간이 실수하는 것입니다. 웃시야 왕이 거룩하구나, 이 나라가 거룩하구나, 이 공동체가 거룩하구나. 아닙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시면 공동체에 거룩은 없습니다. 아무리 뜨겁게 정열적으로 예배드려도 하나님이 떠나시면 그 예배는 거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주홍 같이 붉은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며 부정한 우리의 삶을 깨끗하게 해주시며 악을 제하여 주시고 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 부정한 내 인생, 부패한 내 삶, 타락하고 멸망한 내 인생이 구원 받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거기에 화답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의 화답이 있었습니다. 내 입술이 부정하다. 내가 부정한 백성 중에 함께 거하여서 내 입술이 부정하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우리의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가 없으면 하나님이 떠나십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문지방이 요동하고 흔들리고 연기가 충만했다고 합니다. 예배 공동체가 성전이고 우리의 마음이 성전입니다. 거기에 요동함이 있고 연기가 가득하기를 원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하늘 보좌를 본 사람,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흔들립니다. 연기가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선조들이 가난하고 배우지 못했던 시절, 성경을 읽고 회개하고 돌이켜서 도박을 끊고 음주 문화를 끊고 우상 섬기는 것을 끊었습니다. 그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제사를 끊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은 모진 핍박을 참았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이 자리에 있게 했고 이 나라를 형통하게 했고 웃시야 왕처럼 축복되게 했습니다. 그런 웃시야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마치 웃시야 왕처럼 교만하고 악이 가득하여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거룩에 침범하는 그런 때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다시 회복해야합니다. 우리는 다시 뜨겁게 기도하는 시절로 돌아가야 합니다.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로 돌아가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 말씀 앞으로 나와 하나님과 화답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화답이 없는 때를 살고 있습니다. 화답은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보여주셨다면 말씀에 순종할 때 은혜가 진짜 우리 삶에 시작되는 것입니다. 죄 짓던 삶이 흔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문지방을 흔드시는 것입니다. 꼼짝도 하지 않고 요동도 하지 않는 우리의 죄악된 삶을 하나님께서 흔드십니다. 흔들리는 것이 회개입니다. 우리는 흔들려야 하며 다시 무너져야 합니다. 웃시야 왕이 죽고 나서 이스라엘은 다시 무너졌습니다.  앗수르의 침공과 끔찍한 재앙들이 눈앞에 보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구원하겠다. 구원을 놓치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그러셨습니다. 그렇게 회개할 것이 많아? 도대체 얼마나 회개할게 많길래 예배할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우냐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반대로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회개할 것이 그렇게 없으신가요? 그렇게 눈물이 없으신가요? 예배 때마다 감동이 없으신가요? 내 영혼이 안전하려면,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 있으려면, 하나님의 품 안에 있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저도 회개해야 합니다. 목사들이 끊임없이 회개하지 않으면 신앙공동체를 이끌어갈 수 없습니다. 아무리 큰 성회, 단체라도 회개가 멈춰버린 단체들은 다 무너졌습니다. 제가 제일 좋아했던 청소년 단체가 있었습니다. 그 청소년 집회에 가면 아이들이 회심하고 은혜 받았습니다. 그 단체를 설립한 대표가 청소년들을 성추행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웃시야처럼 뜨겁게 시작했지만 회개가 없는 곳은 무너집니다.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거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거룩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순간 악한 어둠의 세력들이 우리를 흔든다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주의 말씀이 선포될 때 하늘과 땅이 진동한다고 합니다. 메마른 곳이 거룩해지도록 우리가 주님을 찾게 만드신다고 합니다. 은혜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주님을 찾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한다고 고백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예배를 찾게 만들고 기도하는 자리를 찾게 만들고 성경 읽는 것을 찾게 만드는 것이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약간의 은혜임을 알아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우리는 다 멸망해야 하는데 소수를 남겨주신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그것을 붙잡지 못하면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처럼 끝나는 것입니다. 다시 기회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이사야서를 시작하는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를 기억하시면서 우리는 늘 우리의 죄가 주홍 같구나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가야하는구나. 예수 보혈의 은혜를 놓치지 않고 살아야 하는 구나 그것을 기억하면서 승리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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