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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0-07-19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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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7월 19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우리의 정체성

본 문 :

레위기27:26-34

 

 오승주 목사

Ⅰ. 1%만 방향을 틀어도 됩니다.

 우리는 1%라고 하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1%가 우리 삶에 가져다주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저는 개인적으로 많이 경험한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 1%라고 하면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기찻길처럼 평행선을 놓으면 가까이 아무리 좁혀도 절대 만나지 못합니다. 평행이 있으면 절대 만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이라도 1%만 방향을 바꾸면 언젠가는 만나게 됩니다. 만약에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의 길이고 우리의 인생의 길이라면 우리가 1%만 방향을 틀어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진리를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신 섭리와 경륜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영상들을 보면 우리나라 뿐 만 아니라 루터의 독일의 종교개혁이라든지 영국에서 일어난 영적 각성 운동이라든지 이런 것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구속사에 쓰임 받았던 사람들은 1% 혹은 더 많이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에 복음을 받고 짧게 신앙생활을 하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제가 간 신학교가 좋은 신학교이고 좋은 친구들이 많이 온 학교였습니다. 처음에 신학교에 가서 제가 방황을 했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면 저의 집이 너무 어려울 때에 신학교에 갔고 아버지는 밖으로 돌아다니시고 어머니는 글도 모르셨습니다. 제가 부산으로 유학을 갔으니 돈을 필요한데 어머니가 보내시는 것도 정기적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제가 돈을 내고 기숙사나 자취방에 살아본 적이 없습니다. 친구 자취방에 얹혀서 지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런 상태에다가 공고에 나와서 학교에 갔더니 아이들이 너무 뛰어났습니다. 공부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괜히 목사 된다고 했을까. 낙심, 원망이 많았습니다. 집에 전화하면 좋지 않는 가족의 소식들이 들렸습니다. 그래서 이로 인해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방황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인도 단기선교에 갔는데 저와 룸메이트를 하던 선배가 있었습니다. 숙소에 가서보니 그 선배가 아침에 일어나면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꼭 기도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런 생활이 없었습니다. 제가 그 선배와 같이 은혜를 받고 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선배가 다짜고짜 저에게 성경을 한 번도 안 읽어봤지?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성경을 읽어본다는 생각을 안 하던 때였습니다. 그 선배는 한 시간은 성경을 읽고 한 시간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 성경읽기모임이 있으니 오라고 했습니다. 도서관에 갔더니 성경모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앉아서 1시간씩 성경을 읽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학교 졸업할 때 성경을 엄청 읽고 나왔습니다. 학교 안에 기도처가 있는데 가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밤에 그 곳을 놀러갔는데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기도를 하고 있던지 기억이 납니다. 그냥 1% 제 방향을 살짝 틀었는데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러다 진리를 만나고 하나님을 만나고 완전하신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환경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환경을 대하는 믿음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런 가정에 보내신 이유가 있구나. 하나님이 나를 여기에서 건지셨는데 이유가 있구나. 여기서 건지셨는데 이유가 있구나. 진짜 미래가 보였습니다. 원망하고 불평하던 제가 믿음으로 살기 시작한 계기 되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아이들 때문에 코로나로 예배드리러 오지 못하고 집에서 인터넷으로 드리는 분들이 있습니다. 환경이 되면 우리에게 믿음이 필요할까요? 환경이 좋고 교회 갈 만한 환경이고 예배드리기 좋은 환경이면 믿음이 필요할까요? 구약에 다니엘서가 있습니다. 다니엘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다니엘이 어렸을 때에 바벨론의 포로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신앙공동체가 무너지고 성막안의 지성소가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바벨론으로 포로를 끌러갔습니다. 포로의 정책 중에 어린 아이들 중 똑똑한 아이들을 데려다가 교육을 시켜서 그 아이들을 썼던 정책이 있었는데 다니엘이 뽑혔습니다. 이름도 바뀌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섬겼는지 다니엘서에 잘 나왔는데 포로로 끌려간 거리가 2000km가 넘습니다. 자기 나라는 망했고 자기가 섬기던 교회는 무너지고 포로로 끌러가면서 낙심들을 했을 것입니다. 바벨론에 가서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하는데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조건이 하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에는 교회가 없었습니다. 다니엘은 평생 교회를 못 다녔습니다. 그런 다니엘이 거기서 신앙을 고백하고 믿음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한 내용이 다니엘서에 나옵니다. 여러분, 로마 카톨릭하고 개신교와 차이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카톨릭은 교회를 어떤 개념으로 받아드렸냐면 성경의 문자 그대로 장소적인 개념으로 받아들었습니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고백을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축복하시면 네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했습니다. 카톨릭은 진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베드로 무덤 위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성베드로 성당입니다. 그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개신교는 어떻게 해석을 했을까요? 네 위의 네가 베드로 시신이 아니라 베드로의 신앙고백입니다. 그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운 것이며 믿음을 신앙고백으로 보는 것입니다. 장소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교회가 없는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뜻을 정했습니다. 방향을 정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아이들을 잘 먹이려고 진수성찬을 먹였습니다. 이것을 거부하였습니다. 저는 이것이 거룩한 저항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음식을 거부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 청년이 음식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지 않고 말씀을 보지 않는 편리함에 대한 거부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여러분, 믿음의 길을 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편리한 것과 싸워야 하는데 다니엘이 안락한 생활에 거부를 한 것입니다. 저는 해외에 집회하러 다닐 때에 경유하는 싼 비행기를 타고 다녔습니다. 한 번은 캐나다에 집회하러 가는데 저에게 비행기 값을 주셔서 직항을 타고 갔는데 그 동안에 비행기를 많이 타서 마일리지가 많이 쌓였나봅니다. 카운터에 갔더니 비즈니스로 업그레이드를 해주었습니다. 비즈니스를 처음 타보았는데 일단 의자가 누울 수 있고 밥 먹을 때에 접시에 음식을 담아왔습니다. 메뉴도 다양하고 티비도 컸습니다. 제가 그 때에 이런 것을 타고 다니면 평생 비행기를 타고 다닐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가서 집회를 하고 올 때보니 이코노미석 이었습니다. 갈 때 타는 바람에 올 때 힘들게 왔습니다. 이상하게 허리도 더 아픈 것 같고 밥도 더 맛없는 것 같았습니다. 좋은 것을 경험하게 되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기가 힘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좋은 것들에 길들여 지면 어려운 것을 하지 못합니다. 다니엘이 이것에 대한 거부를 하였습니다. 내 나라가 무너지고 포로가 되어서 왔는데 왕이 주는 음식을 먹는다는 것? 거룩한 저항입니다. 결단을 하고 뜻을 정한 것입니다. 대학교 때에 저는 좋은 선배를 만나지 않았으면 평생 불평, 불만하고 살았을 것인데 좋은 선배를 만나 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다니엘이 그랬습니다. 예루살렘을 바라보고 창문을 열고 기도했습니다. 창문을 열고 나 기도하는 사람이야, 하나님의 자녀야, 아직 신앙이 무너지지 않았어, 그렇게 하루에 3번씩 기도한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믿어지고 행동으로 옮기면 더 용감해지고 더 담대해집니다. 다니엘이 어명을 어기면 풀무불, 사자굴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을까요? 몰랐을까요? 알았습니다. 알고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담대하고 용감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승진 못하면 어떻게 할까? 돈 못 벌면 어떻게 할까? 좋은 대학에 못 가면 어떻게 할까? 생각을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고급 유치원에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그런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입니다. 

 

Ⅱ. 우리는 왜 이렇게 연약할까요?

- 처음 난 것은 여호와께 드릴 첫 것_레위기27:26-29

  •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_레위기27:30-33
  •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_레위기27:34

오늘 레위기는 정말 중요합니다. 두 가지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첫 것.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려라. 또 하나는 네가 경작한 모든 것에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려라입니다. 자치 잘못하면 십일조 잘해라. 처음 월급 받으면 하나님께 드려라. 라고 들을 수 있겠지만 이것은 그런 헌금설교가 아닙니다. 레위기 전체의 결론되는 말씀입니다. 제일 먼저 처음 난 것은 다 하나님께 드리라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요? 무슨 이야기일까요? 우리는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지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갔는데 하나님이 예비해서 모든 것을 만들어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요단강도 가르셨고 여리고도 무너뜨리셨고 만나와 메추라기도 주셨고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훈련시키셔서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하셔서 농사를 짓고 성막을 짓고 성전을 짓고 나라를 이루고 축복 받고 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오실 메시야 언약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감당해야 하는 민족이야, 너희가 이방에 빛을 비춰야 하는 민족이기에 너희를 축복할게, 이것 잊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다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땅의 것들에 길들여졌습니다. 하나님은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그것에 길들여지는 순간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세상이 발전해야 합니다. 성경이 들어간 국가는 전 세계적으로 다 발전하였습니다. 왜요?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에 길들여지면 끝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민족이 그렇습니다. 한국 교회가 그렇습니다. 땅의 것에 길들여지면 안 됩니다. 그래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처음 난 것을 여호와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축복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농사지은 것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열매 맺게 하신 것이고, 가축들의 새끼를 낳은 것도 다 하나님이 축복하신 것이 아니냐. 너희의 힘이 아니지 않냐. 이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헌금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니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가서 제일 처음 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왕이 주는 것을 먹기 전에 바벨론에서 직분을 받기 전에 바벨론에서 제공하는 모든 금은보화 축복들을 받기 전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먼저 드렸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을 받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했습니다. 하루를 시작할 때, 학교에서 공부를 시작 할 때, 직장에서 일을 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의 뜻 구하고 시작하십니까? 하루의 첫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시작하십니까. 성경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것을 드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공부도 잘하고 좋은 직장을 가는 것이 꿈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입니다. 내 첫 마음을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이나 유럽 가서 엘리트를 만나보면 한국과 다릅니다. 한국은 비전이 무엇이냐 꿈이 무엇이냐 라고 물어보면 전부 다 명사입니다. 변호사요. 사장이요. 목사요. 다 이런 식입니다. 그런데 미국 가서 엘리트에게 물어보면 다 동사입니다. 저는 의사가 되긴 할 것인데 의사가 되어서 어려운 사람들을 고치고 치료하려는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 아이들은 꿈이 다 명사입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었는데 교수가 되었는데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방황을 합니다. 더 모으고 더 채우기에 급급합니다. 교수가 되게 한 이유가 있는데 의사가 된 이유가 있는데 그 다음 비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셔서 직장도 가고 사업도 하고 목사도 하는데 첫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처음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너를 그곳에 보낸 이유, 너를 신학교에 보낸 이유, 너를 서울에 개척하게 하신 이유, 학교에 나를 보내신 이유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거룩한 성물이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룩한 성물이라고 합니다. 거룩한 성물은 다시 쓸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성물을 인간이 다시 쓰면 죽습니다. 그것이 레위기의 법입니다.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다. 이것도 같은 의미입니다. 어쩌면 처음 것을 드리는 것보다 이것은 훨씬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십분의 일만 여호와의 것입니까?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전적으로 가나안 땅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가게 하셨습니다. 믿음으로 갔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셨고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제가 숨이 붙어있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가요. 하나님이 오늘 숨을 거둬 가시면 저는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절대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십분의 일을 나에게 줘라. 그 말은 하나님을 기억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농작물이 생길 때마다 수입이 생길 때마다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통치자이시구나. 하나님이 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구나. 나의 주인이시구나. 기억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어버렸습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물질인가요. 아닙니다. 시간, 인생, 십분의 일을 드리고 살아야 합니다. 다니엘이 포로로 가서 뜻을 정하고 기도만 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실행했습니다. 왕의 진미를 먹지 않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시간을 정하고 기도했습니다. 자신의 삶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말은 내가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할 때 목숨이 위태로운 것도 알고 친구들에게 밀리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왕에게 잘 보이려고 인정받으려고 얼마나 노력할까요? 이제는 하나님 필요 없어, 왕의 말을 잘 들어야 해 라고 했을 때 다니엘은 혼자 하나님을 바라볼 거야, 하나님께 기도할 거야, 내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이고 이 상황도 하나님이 나에게 주셨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고통과 고난이 오면 하나님이 주셨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들을 잘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뜻을 정하고 하나님 앞에 실제로 기도한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대대적으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제가 집사님들이나 청년들을 살펴보면 성경 읽는 것이 0순위가 아닙니다. 1순위도 아닙니다. 우리가 바쁘면 제일 먼저 빼는 것이 예배이고 제일 먼저 빼는 것이 성경 읽는 것, 기도하는 것부터 뺍니다. 회사 바쁘고 집안에 일 생겼으면 제일 먼저 빼는 것이 성경 읽는 것입니다. 성경 읽는다는 것을 뺀다는 말은 하나님을 뺀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0순위가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이 0순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타락했습니다. 하나님부터 빼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하나님만 섬기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가서 하난님이 0순위에서 1순위로 밀리고 1순위에서 2순위로 밀리고 3순위로 밀렸습니다. 그 사이에 돈이, 행복이, 우리가 추구하는 어떤 것들이 차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사이에 하나님은 순위에서 밀려버렸습니다. 다니엘이 이것을 알았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대단한 왕이어도 세상 사람입니다. 환관장이 대단해도 세상 사람입니다. 다니엘은 만왕의 왕, 완전하신 하나님께 줄서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다니엘이 깨달았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줄 서겠다.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겠다. 그것이 1%의 신앙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내 시간을 드려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려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 그것을 인정하는 시간입니다. 그렇게 살아도 실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니엘이 증명했습니다. 남들 다 잘되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안 되지? 무언가 부족한 것 같고 잘 안 되는 것 같습니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의 지성소가 무너진 것을 직접 본 사람입니다. 어릴 때 포로의 행렬에 동참했던 사람입니다. 자기의 나라의 민족이 무너진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의 부모 세대가 하나님을 섬기지 않아서 포로로 끌려간 것을 직접 경험한 다니엘이 왕이 내민 진미를 먹을 수 있을 수 있을까요. 신앙의 절망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저도 대학교 때에 그랬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제가 뜻을 정하지 않았습니다. 뜻을 정했습니다. 1%의 방향을 튼 것입니다. 주님,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지 제가 신학교에 간다고 했나요? 저를 여기에 보내셨으니 주의 종이 되도록 소원 주셨잖아요. 하나님이 책임지세요. 열심히 하세요. 라고 기도했습니다. 집안의 문제도 경제문제도 하나님께 맡기고 지혜도 주시고 하나님 책임지세요. 라고 하고 그 때부터 결단했습니다. 하루에 한 시간씩 성경 읽겠다고 한 시간씩 기도하겠다고 결단했습니다. 성경을 수십 번 읽으니까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너짐 속에 많이 보내주셨구나, 가난한 집에 왜 보내셨을까 하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하나님이 나를 이 가정에 보내신 이유가 있구나라는 것이 깨달아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와 같은 가정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불신자 가정에서 예수님 믿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그래서 불신자가정에 전도하는 것이 편했습니다. 저같이 무너진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제 첫 시간을 삶을 하나님께 드렸더니 깜깜하던 미래가 이렇게 살면 되겠구나.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려면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비전을 보았습니다. 다니엘이 그런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구나. 내가 비록 포로로 바벨론의 땅에 끌려왔지만 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구나. 난 거룩한 신앙공동체의 일원이구나. 비록 성전은 무너졌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릴거야 완전하신 하나님을 향해 두 손을 들고 예배를 드릴거야. 창문을 열고 예배를 드릴거야라고 고백했습니다. 환관장이 나중에 부탁했습니다. 네가 이것 안 먹으면 내가 죽는다. 그랬더니 다니엘이 두고 보십시오. 저들은 고기를 먹이고 진미를 먹이지만 저는 안 먹고 기도했는데 누구의 얼굴이 좋은가 지켜보십시오. 그렇게 살면 실력이 줄어드나요?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데 교회에 자주 가고 예배 자주 드리면 성경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한다고 하면 세상의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게으른 것입니다. 다니엘은 다 하고도 절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다니엘이 최고가 되었습니다. 넘버원이 되었습니다. 엄청 부지런했습니다. 남들 하는 것 다 하고 한 시간 성경 읽고 한 시간 기도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것이 기독교인의 사명입니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에 피곤하지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신자와 똑같이 피곤해서 예배 못 드리겠어요. 놀러간다고 예배 못 드리겠어요라는 것이 한국교회 성도들의 답변입니다. 똑같이 일해야 하고 돈 벌어야 하니까 우리는 성경을 안 읽어도 되는 거구나.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맞나요? 

‘이것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이니라_레위기27:34’

이렇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입니다. 하나님이 포로로 끌려간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바벨론에 엎드려 절하고 우상 섬기고 왕에게 아부하고 사는데 다니엘은 거룩하게 저항하고 특별하게 살게 만들었습니다. 다니엘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회복시키려고, 후손들을 영원한 포로에 두지 않고 구원하실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이 시대가 악하고 어렵다고 해서 우리가 그렇게 살면 되나요? 우리도 다니엘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손들이 이 나라의 민족들이, 다음 세대가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교회에 어린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 아이들 가정에 심방을 가보니 다른 소그룹들은 성경읽기를 잘 공유를 하지 않지만 아이들 키우는 엄마들의 소그룹이 성경읽기를 잘 합니다. 태영아부는 교역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메신저를 정하고 찬양인도를 정하고 기도를 정하고 촬영해서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환경은 힘들지만 믿음은 다음 문제입니다. 다음 세대에 복음이 전해지지 않으면 다니엘을 세울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다니엘에게 하나님이 왜 그런 신앙을 요구하셨을까요? 아니면 계속 포로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대한민국을 많은 젊은이들이 헬조선이라고 합니다. 지옥 조선이라는 것입니다. 저도 어쩔 때에는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이 나라를 보고 불평하고 헬조선이라고 하며 살아야 하나요? 우리가 뜻을 정해야 합니다. 거룩한 저항을 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서, 어떤 신앙공동체를 만들어야 할지, 어떻게 성경공동체를 만들어야 할지, 우리의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왜 성경을 읽으라고 하고 성경 공동체를 만들려고 하냐면 이 교회는 담임목사의 공동체가 되면 안 됩니다. 제가 목회 전부터 꿈꾸던 공동체는 성경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저만 읽으면 성경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같이 성경을 읽어야 같이 꿈꾸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며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교회에서 하실 일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부르셔서 성경 낭독을 시키셨습니다. 성경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성경을 접하고 이 어지러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교회와 세상을 왔다 갔다 하는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사는, 인생의 십의 일조를 드리고 매일 첫 시간에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고 사는 구별된 아이들이 이 교회에서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꿈꾸고 기대하고 이 정체성을 가지고 다니엘처럼 사는 것입니다. 

Ⅲ. 우리의 정체성 : 완전하신 주

  • 거룩한 저항정신_다니엘1:8-16
  •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물어보시는 것_한국 경건주의가 시작된 때
  • 우리의 정체성 : ‘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대표’

믿음으로 한 걸음 내딛는 것입니다. 사자굴이 있고 풀무불이 있어서 한 걸음을 못 내딛습니다. 믿음이 아니면 한 걸음 내 딛지 못합니다. 그런데 완전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구나. 이것을 다니엘이 믿고 나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한 목사님이 한국의 선교단체에서 하는 집회를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강의 하러 와서 기절할 뻔 했다는 것입니다. 설교 끝나고 가려고 했더니 찬양인도자가 기도회를 시작했는데 2시간 30분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기도가 끝나고 다 원위치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한 걸음을 못 내딛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의 신앙의 패턴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일에 모여서는 목사도 저리 가라고 하는 충만한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은 불신자처럼 살고 주일에는 엄청 뜨겁습니다. 그런데 평일에는 하나님도 안 계십니다. 이것이 한국 사람의 특징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특징은 두려움이 많습니다. 내일이 불안하고 미래가 불안합니다. 믿는 사람은 달라야 합니다. 주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십니다. 우리는 다시 천국에 입성하잖아요. 그것을 믿으십니까? 그러면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미래가 불안하고 내일이 불안한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물어보십니다. 너에게 다 해줬는데 돈도 벌게 해주고 목사도 시켜주고 권사, 장로도 시켜주고 다 해주었는데 너 뭐하다가 왔어? 라고 하나님이 물어보십니다. 공부하고 기술도 배울 수 있게 해 주었는데 뭐 하다고 왔는지 하나님이 물어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는 곳마다 어둠이 떠나가고 저주가 떠나가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130년 전에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왔는데 여자들은 아무것도 못하던 시절입니다. 아기 낳고 밭에 가서 일하고 설거지하는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시절에 복음이 성경이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경상도 진주에 가면 교회가 하나있는데 이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아시나요? 처음에 성경이 보급된 것은 양반들에게 보급되었습니다. 양반 마을에 선교사님들이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혜로 백정들이 천민들이 예수님들을 믿었습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 백정들이 교회에 왔는데 양반들이 오지 말라고 눈치를 주었습니다. 그 당시의 기록을 보니 밖에서 창문을 통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선교사님이 교회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백정마을에 세웠습니다. 양반들이 백정 마을에 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교회가 진주에 있습니다.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5천년 역사의 신분제도를 없앴습니다. 1907년에 장대현 교회에서 말씀 사경회가 있었습니다. 성경을 풀어주었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평양에 대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 당시에는 인터넷도 안 되고 전화도 안 되니 마을을 타고 전해져서 대구 옆 경산까지 내려오는데 3년이나 걸렸습니다. 1910년 그 때가 경술국치의 해입니다. 말이 한일합방이지 일본이 우리나라를 완전히 먹은 것인데 국제적으로는 우리가 빚을 많이 져서 못 갚으니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고 합방을 시켰습니다. 그 때에 그 예배당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사실 미국 장로교 목사님들은 술, 담배를 다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때에 예수님의 생일이라고 막걸리를 가져 왔습니다. 그래서 선교사님이 막걸리 먹는 것을 허락했는데 한국 사람을 몰라 본 것입니다. 미국 문화는 한잔 문화입니다. 한잔만 마시고 대화하는 문화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완전 취할 때까지 먹습니다. 술에 취해서 선교사님을 보고 왜 눈이 파랗냐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이 임하시니 어떤 일이 벌어지신 줄 아세요?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니 어떤 일이 벌어진 줄 아세요? 대구 경산에 있는 청년들의 성령 운동이 사회 환원운동으로 되었습니다. 나라가 진 이 빚을 갚자고 일어났습니다. 돈이 없으니 술, 담배 끊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국채보상운동을 처음 한 것입니다. 한국의 경건주의가 시작된 시점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이 할 일입니다. 1%, 술, 담배 몇 푼 아껴서 나라 빚을 갚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을 청년들이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편한 길, 쉬운 길로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왜 고난이 많나요?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이 열심히 해도 축구국가대표 훈련은 하루도 못합니다. 매일 토할 것처럼 운동한다고 합니다. 태릉선수촌 보면 국가대표들 죽을 것 같이 훈련받는데 얼굴에 불평이 있나요? 원망이 있나요? 짜증이 있나요? 없습니다. 가슴이 태극기가 있습니다. 그것이 국가대표들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고난을 주십니까? 왜 다니엘에게 포로 된 환경을 주었을까요?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국가대표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거룩한 백성입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는 주의 자녀입니다. 세상에 나가서 저들과 밥도 먹지 말고 섞이지도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달라야 합니다. 달라도 한참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저들에게 빛을 비춰주어야 하고 저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게 안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대표처럼 살라는 것입니다. 처음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고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려가면서 하나님만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러면서 최고가 되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이 사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다니엘처럼 좋은 대학가고 좋은 직장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 세상에 복음으로 빛을 밝혀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야 합니다. 그 거룩한 길을 선택하고 가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에서 사는 것입니다. 교회가 빛이 되고 교회가 교회 되고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기를 진짜로 원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힘들어도 그 길을 갈 것입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우리 주님은 완벽하시기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레위기의 결론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문의 / 윤덕현 전도사 010.9899.3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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