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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1-01-31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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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1월 31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마지막 때를 위한 올바른 준비

본 문

이사야 24:1-23

 

 오승주 목사

 

Ⅰ. 진짜 구원 받은 자는 개인의 흥망이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일하실까에 대한 관심이 있습니다.

 

23장까지 이제 유다 이스라엘, 그리고 주변 국가에 대한 심판이 끝나고 24장은 땅에 대한 심판 같지만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그 시점을 심판하는 것 같지만 사실 종말론적인 의미가 훨씬 더 많이 담겨져 있습니다. 마지막 때, 종말이 왔을 때 이사야를 통해서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4장으로부터 쭉 보면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는 종말의 때와 연관지어서 이사야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우리가 종말론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균형을 굉장히 많이 놓칠 수가 있고 시대의 문화라든지 시대가 주는 어떤 기준들에 혼란스러울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건강한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재림신앙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얼마나 놀랍냐면 이단과 사이비들이 잘못된 종말론과 재림신앙을 이야기해버렸기 때문에 교회가 그거와 연결하지 않으려고 피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전도하는 것이 문제다, 이단들이 전도하기에 그것이 문제가 되어서 우리는 전도를 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쌀이 문제다 해서 우리가 쌀을 먹지 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럴 수 없잖아요? 그래서 이사야서 말씀을 앞으로 살펴볼 때 건강한 종말론적 신앙이라든지, 재림신앙이 갖춰지기를 원합니다. 하버드 대학교에 마이클 샌들 교수님이 있습니다. 그분이 쓴 정의란 무엇인가? 이것이 책이 아니라 하버드 학생들을 대상으로 교양 수업을 했던 내용인데 그게 너무 유명해서 책으로 나온 것입니다. 저도 그 책을 2번 정도 읽었습니다. 책 내용이 너무 괜찮았습니다. 교수님이 강의한 내용 중에 제가 전문적인 용어(경제학, 인류학)는 잘 모르겠고 정의에 대해서, 인간의 도덕적, 윤리적 정의에 대해서 강의하는 챕터의 내용들을 인용을 하려고 합니다.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기관차에 기관사입니다. 기관사가 기차가 가고 있는데 뭐가 문제가 생겼냐면 브레이크 장치가 고장이 난 것입니다. 원래는 이 역이 마지막 역입니다. 이 역에 멈춰야 되는데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마지막 역을 지나면 기차가 마지막 역에 설 줄 알고 다음 선로에서 역에서 일하는 직원들이 6명이 철도 보수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짧은 순간에 그냥 지나가면 6명은 죽게 되는 것입니다. 짧은 순간에 무전이 왔습니다. 비상 우회 철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짧은 순간에 핸들을 틀어서 비상 우회 철로로 가면 거기는 기차가 다니지 않는 길입니다. 그 우회 철로로 가면 누가 있냐면 마침 민간인 1명이 철로 위에 있는 것입니다. 우회 철로에는 민간인 1명이 있고 여기는 철도직원 6명이 일하고 있습니다. 이제 교수님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대답해보세요. 여러분이 기관사라면 무엇을 선택하겠냐는 것입니다. 저는 당연히 우회하겠다 선택을 했습니다. 당연하죠. 6명 목숨보다 1명 목숨이 죽는 것이 훨씬 상식적이니까. 그런데 하버드 학생들 가운데 아주 독특한 학생들이 몇 명 있었나봐요. 100명 중에 3-4명은 직진하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6명은 원래 죽을 운명인 것이고 여기는 내가 핸들을 꺾어야 돼서 그리고 민간인이고. 이런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습니다. 대다수 97-8% 학생들은 우회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왜? 6명보다 1명이 죽는 것이 나으니까 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이 교수님이 두 번째 질문을 이어서 했습니다. 그렇다면 앞에서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가 오고 있고 이 기차가 다리를 건너오고 있는데 다리 위에서 일하는 사람이 2명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한 명이 무전을 받았습니다. 공무원입니다.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여기를 지나가면 6명이 죽게 된다. 그런데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기차의 바퀴에 물건을 짚어 넣으면 제동이 걸려서 6명이 살릴 수 있다. 그런데 당장 물건을 던질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세탁기, 냉장고도 없고. 교수님이 질문하는 것입니다. 직접 무전을 받지 않은 옆에 같이 일하는 사람은 빅 맨입니다. 이 사람을 던지면 기차가 멈출 수 있어. 왜? 나는 왜소해. 내가 뛰어내려도 멈추지 않을 것 같아. 그런데 이 사람은 나보다 훨씬 덩치가 큰 사람이기에 이 사람을 밀면 기차가 멈춘다. 그러면 무슨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그 사람을 밀면 기차가 멈춰서 6명을 살릴 수 있습니다. 하버드 학생들이 놀랍게도 아까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습니다. 97-8%가 밀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 6명이 죽는데. 직접 살인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밀쳐서 피가 튀기는 것을 못 보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전차윤리라고 설명을 합니다. 신기합니다. 여러분은 순간적으로 어떤 대답을 하고 계십니까? 내가 직접 죽이고 직접 살인하는 것은 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즉 이 이야기는 절대적인 정의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사회적 관습 속에서 형성된 그리고 개인의 양심과 개인적인 논리 속에서 실천되는 것이 이 사회가 요구하는 도덕적인 정의라는 것 입니다. 절대적 정의라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타락해갑니다. 놀라운 것은 타락의 기준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덕적 기준이 모호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많은 크리스천들도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괜찮은 것이 아닌가. 그리고 심지어 세상 문화,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그런 기준들이 교회와 우리 신앙 안에 들어와서 어떤 도덕적 기준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도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그런 기준들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마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행동하니까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게 죄가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는 문화 속에 우리가 살고 있지는 않은가? 여러분 하나님이 빠진 세계관, 윤리관은 온전히 선한 판단을 사회적인 합의에 맡기는 절망적인 주관성만을 남겨놓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입니다. 세상 문화가 옳다고 여기면 옳은 것이며 세상 문화가 잘못이라고 치부하면 잘못이라고 되는 것입니다. 제 고등학교 친구 중에 제가 제 친구들을 전도를 다했는데 유일하게 예수님에 대해서 여러 번 설명했지만 영접을 하지 않은 친구가 있습니다. 그 친구가 되게 착한 친구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 친구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남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 예수님 너나 믿어. 이런 논리를 늘 저에게 펼쳤습니다. 저와 논리적으로 되게 많이 트러블이 있었던 대화를 많이 했던 친구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지금은 결혼도 하지 않고 알코올 중독으로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을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정말 많이 학창시절에 복음을 전했는데 거부했던 친구입니다. 그 친구의 논리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데. 심지어 그 친구에게 제가 목사가 되어서 그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 친구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내 쾌락과 내가 즐기는 모든 삶들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내 돈으로 술집 가는데 뭐가 문제냐는 것입니다. 제가 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면. 제가 네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네팔의 오지 산골짜기에 가면 너무 너무 가난해서 자기 자녀들을 특히 여자들을 팝니다. 돈을 얼마를 받고 팔면 우리 집은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이 여자도 너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파는데 대부분 그렇게 팔려간 여자 아이들이 어디로 팔려 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대다수의 아이들이 어디에 쓰이고 있냐면 매춘에 쓰이고 있습니다. 당연히 매춘을 하면서 더 좋은 자동차도 탈 수 있고 더 좋은 집에서도 살 수 있겠지만 삶은 매춘이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매춘을 이용하는 사람들, 돈을 주고 성을 사는 사람들은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나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 나는 내 돈 주고 내 쾌락을 위해서 사는데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악순환입니다. 인간이 얼마나 악한지. 하나님을 배제한 윤리관은 이런 정말 냉엄한 악의 실체를 다 보게 합니다. 공허한 실상을 보게 합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조금 길지만 제가 그대로 책을 인용해드리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생각하고 선택하고 창작하고 사랑하며 예배할 수 있다. 하지만 동시에 미워하고 탐내고 싸우며 죽일 수도 있다. 인간은 환자를 돌보는 병원과 지혜를 추구하는 대학, 하나님을 예배하는 교회를 고안해 냈지만, 한편으로는 고문실과 강제노동수용소, 핵무기도 만들어냈다. 인간 됨됨이의 역실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고상하면서 비열하고, 이성적인 동시에 비합리적이며, 윤리적이지만 비도덕적이고, 창조적이면서 파괴적이며, 사랑이 넘치는 반면 이기적이고, 하나님을 닮았으면서도 짐승 같은 면모를 보인다’ 저는 존 스토트 목사님이 인간에 대해서 너무 객관적으로 글을 잘 썼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지만 인간은 창조주의 뜻을 저버리고 제 멋대로 살기를 추구했기 때문에 결국 저마다 자신을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2절에 모든 인간이 다 곁길로 빠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조주는 인간을 설계하면서 이렇게 설계했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게 1,2번입니다. 3번이 자기 자신입니다. 그런데 죄는 그것을 거꾸로 뒤집었습니다. 1번이 자기 자신이고 2번이 이웃이고 3번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아예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데서 돌이켜서 자신을 경배하고 사는 것. 그렇지 않다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싶을지는 모르겠지만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 친구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면서 살겠다고 했지만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고 결혼을 하지 않고 쾌락을 추구하고 그 쾌락이 자기에게 자유를 준다고 생각했지만 쾌락이 올무가 되어 꽁꽁 묶여서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모습을 저는 보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섬기는데 온 힘을 쏟느라 정작 영혼의 여백을 채워줄 복음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존재를 거부하고 외면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반역하는 죄에 빠져있습니다. 거기서 돌아서는 것은 복음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복음은 예수님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알려주는 유일한 것이 성경이고 말씀입니다. 교회가 이 성경을 기준 삼지 않고 예수님을 기준 삼지 않으면 교회는 타락한 것입니다. 교회가 뛰어난 문화로 중무장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복음은 반문화적입니다. 이것에 관해서 놀라운 책을 한 권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2월 달 추천 도서입니다. 2월 달 추천도서는 꼭 완독해보시길 바랍니다. 아주 좋은 복음과 반문화에 관한 책입니다. 왜 복음이 반문화적이라는 표현을 쓰는지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문화들은 세상의 정의, 도덕적인 윤리관 이런 것들은 하나님이 없으면 지극히 주관적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섬기는데 있어서 자기 자신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 다 주관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인간의 결론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만나면 우리는 개인의 흥망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개인의 성공, 실패냐 성공이냐, 잘 되냐 잘못 되냐 이런 기준에서 벗어나는 것이 복음이라고 생각합니다. 2월 달 추천도서의 저자이신 목사님께서 한국교회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축복의 노예가 된 한국교회. 한국교회는 축복이라는 단어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는 한국교회. 그러나 성경은 축복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이야기하고 천국을 이야기합니다. 한국교회가 왜 이렇게 됐는지 그것을 그렇게 설명하셨습니다. 기복신앙부터 한국 사람의 특징. 축복의 노예가 되어버린 한국교회라고 표현했는데 저는 정말 맞는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을 개인의 흥망 때문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만나면 십자가의 복음을 정말 만나면 우리가 예수님을 만들어서 섬기는 하나님을 만들어서 섬기는 그런 종교생활 말고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를 그 존재하시는 원래부터 존재하고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그대로 만나면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하고 살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실까 거기에 관심을 두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기준이 세상적인 도덕이나 윤리관이나 문화가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그 자체가 기준이 되는 신앙생활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영화로우신 주님을 만나면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면. 저는 저희 가스펠교회 성도님들이 우리 자녀들이 그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가 만들어낸 하나님 말고,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복음 말고 성경이 말하고 계시면 원래부터 존재하고 계신 그 신비롭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만나기를 원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래서 오늘 본문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Ⅱ. 하나님의 심판과 남은 자

 

- 더러워진 땅과 구별이 필요 없는 때_이사야24:1-13, 16-20 

 

보라 여호와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며 황폐하게 하시며 지면을 뒤집어엎으시고 그 주민을 흩으시리니 백성과 제사장이 같을 것이며 종과 상전이 같을 것이며 여종과 여주인이 같을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같을 것이며 빌려 주는 자와 빌리는 자가 같을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같을 것이라 땅이 온전히 공허하게 되고 온전히 황무하게 되리라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하셨느니라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세계가 쇠약하고 쇠잔하며 세상 백성 중에 높은 자가 쇠약하며 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그러므로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 중에 사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 새 포도즙이 슬퍼하고 포도나무가 쇠잔하며 마음이 즐겁던 자가 다 탄식하며 소고 치는 기쁨이 그치고 즐거워하는 자의 소리가 끊어지고 수금 타는 기쁨이 그쳤으며 노래하면서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고 독주는 그 마시는 자에게 쓰게 될 것이라 약탈을 당한 성읍이 허물어지고 집마다 닫혀서 들어가는 자가 없으며 포도주가 없으므로 거리에서 부르짖으며 모든 즐거움이 사라졌으며 땅의 기쁨이 소멸되었도다 성읍이 황무하고 성문이 파괴되었느니라 세계 민족 중에 이러한 일이 있으리니 곧 감람나무를 흔듦 같고 포도를 거둔 후에 그 남은 것을 주움 같을 것이니라_이사야24:1-13

 

1-2절. 무슨 이야기인가요? 종과 상전을 누가 구분해 놨나요? 여종과 여주인을 누가 구분해놨나요? 사는 자와 파는 자를 누가 구분해 놨나요? 빌려주는 자와 빌리는 자가,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그것을 누가 구분해 놨나요? 이게 세상의 원리들입니다. 누가 부자냐 가난하냐, 누가 주인이냐 종이냐, 누가 건강하냐 병 들었냐. 그것은 우리의 기준들입니다. 세상의 기준들입니다. 저 사람 건강하니까 축복 받은 것 같습니다. 나는 병 걸려서 굉장히 저주 받은 것 같습니다. 우리의 기준입니다. 어제 구룡마을에 가서 연탄배달을 하고 왔는데 연탄배달 하시는 분들이 다 여기 불쌍하다, 짠하다, 안타깝다. 왜요? 겉모양을 보니까 판자촌이고 연탄을 떼고 있기에. 네팔에 가서 네팔 사람들을 보면 불쌍하다 짠하다. 이런 마음이 듭니다. 왜요? 그게 세상 기준입니다. 우리는 자동차도 있고 집도 있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을 하거든요. 비교해서. 그러나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심판하실 때에 이것을 다 없애버리겠다고 하십니다. 구별이 필요 없는 때. 왜? 땅이 다 더러워져 버렸습니다. 땅이 다 부패해져버렸습니다. 그러니 이런 모든 인간이 설정해놓은 기준들이 다 사라집니다. 여러분 대한민국에 지진이 일어난다면? 화산이 폭발한다면? 핵무기가 떨어진다면 부자와 가난한자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전염병이 돌아서 전부 비참하게 고통을 당한다면 우리에게 돈을 빌리는 자와 꾸어주는 자가 무슨 의미가 있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기준에 의해서 성공이니 실패니 하면서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기준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합니다. 이런 구별들을 심판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 구별이 어디서 생겼냐면 성경은 죄악으로부터 생겼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심판의 결과가 오늘 이사야 24:3-20절입니다.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 땅의 주민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네게 이르렀나니 두려운 소리로 말미암아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빠지겠고 함정 속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리리니 이는 위에 있는 문이 열리고 땅의 기초가 진동함이라 땅이 깨지고 깨지며 땅이 갈라지고 갈라지며 땅이 흔들리고 흔들리며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_이사야24:16-20

 

16절. 여러분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이게 불가항력적인 심판입니다. 내가 세상 기준을 가지고 문화를 가지고 나는 괜찮아, 우리 교회는 괜찮아, 나는 구원 받을 수 있어, 나는 잘하고 있어 이거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땅이 뒤집어졌습니다. 지면이, 땅이 완전히 망가져버렸습니다. 나는 괜찮아. 제가 얼마 전에 환경에 관한 다큐를 봤습니다. 진짜 플라스틱 안 써야 되겠더라고요. 그 넓은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 전 세계의 오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물의 흐름이 있을 것입니다. 섬이 작은 섬이 아닙니다. 여의도의 몇 배라고 합니다. 진짜 멀리서 보면 섬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가면 다 쓰레기라고 합니다. 바다 한 가운데 어마어마한 양의 쓰레기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다큐에서 무엇을 보여 주냐면 거북이, 물고기가 죽어있는 사체를 보여 주는데 배를 갈라보니 다 플라스틱 인간이 버린 낚싯줄, 플라스틱 이런 것을 먹고 죽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치울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환경학자들이 하는 이야기가 이 섬이 커져가는 속도가 빨라진다고 합니다. 나중에는 우리 자녀들이 얼마가지 못해서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제가 생각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30년 전), 초등학교 다닐 때 이럴 때는 그냥 지하수 마셨습니다. 그때 생수를 사먹는 날이 올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욕했습니다. 제 정신이냐면 무슨 물을 사 먹냐면서. 그런데 지금 보세요. 다 생수를 사먹습니다. 다 오염되었습니다. 이런 날이 올 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상상도 못했습니다. 환경학자들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다 멸종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야기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판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가 심판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결과로 오는 것이 심판입니다. 하나님이 갑자기 우리에게 땅을 오염되게 하셔서 땅이 뒤집어지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그렇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뭐가요? 인간의 죄, 욕심. 이것은 환경적으로 그냥 땅을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영적으로 해석을 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 문화와 타협하고 교회가 사람들의 수준이나 세상의 이치, 도덕, 윤리적인 것과 타협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해서 많은 목사님들이 그렇습니다. 십자가 이야기하지 않고 복음 이야기를 하지 않고 구원 이야기를 하지 않고 영적인 세계, 마귀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고 회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그럼 당장은 우리 교회 수준 있어, 우리 교회는 고상해, 우리 자녀들은요? 우리 후대들은요? 복음 들을 교회 자체가 사라져버립니다. 영적으로 황폐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는 예수님 믿고 구원 받았으니까 내 삶에 대해서 신경을 안 쓴다면 나 같은 거 그냥 좀 그렇게 해도 괜찮지 않아? 나 같은 거 분리수가 안 하고 그냥 막 쓰고 버리면 그 조금이 영향이 가겠어? 아닙니다.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악하냐면 신앙생활도 똑같은 것입니다. 나 한사람쯤이야 가 아니라 나 한사람이라도 내 인생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내지 않으면 복음을 위해서 살지 않으면 우리 자녀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을 물려줄 수 없는 그런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문화와 싸워야 합니다. 복음은 반문화적입니다. 문화와 싸워야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고 있는 세속적인 신학들과 싸워야 합니다. 동성애. 어떤 목사님은 그렇습니다. 오목사 동성애는 어쩔 수 없는 세계적인 트렌드야. 왜 이렇게 예민하게 반응해? 여러분 우리 자녀들이 벌써부터 초등학교에 가면 성별 란을 적는데 남, 여의 칸이 없어집니다. 당장 우리나라에 법이 적용이 되면. 그게 세계적인 트렌드이고 우리가 막을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 후손들에게 창조질서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그런 자존심이라도 남아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인 트렌드라구요? 그것에 대해서 싸우면 쪼잔하고 남들 보기에 불신자들이 보기에 수준 떨어지는 목사 같아서 말을 못하면 그게 목사입니까? 그게 교회입니까? 그래서 밖에 있는 문화인들이 수준 높은 사람들이 보기에 기분 좋게 사는 것이 목사입니까? 그 비위를 맞추면서 사는 것이 교회입니까? 이 땅의 심판은 죄로 인한 심판입니다. 이유는 죄 때문입니다. 

 

- 죄로 인한 심판과 영적인 배후_이사야24:5, 20-22, 요한복음16:7-11, 베드로후서2:4, 유다서1:6, 요한계시록20:1-15

 

땅이 또한 그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으니 이는 그들이 율법을 범하며 율례를 어기며 영원한 언약을 깨뜨렸음이라_이사야24:5

 

누구 아래에서요? 주민 아래서 더럽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땅이 더러워진 이유는 인간이 언약을 깨드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깨뜨리신 것이 아닙니다. 땅이 더러워진 것은 영원한 언약을 깨뜨려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

땅이 취한 자 같이 비틀비틀하며 원두막 같이 흔들리며 그 위의 죄악이 중하므로 떨어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리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높은 데에서 높은 군대를 벌하시며 땅에서 땅의 왕들을 벌하시리니 그들이 죄수가 깊은 옥에 모임 같이 모이게 되고 옥에 갇혔다가 여러 날 후에 형벌을 받을 것이라_이사야24:20-22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_요한복음16:7-11

 

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죄의 배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범죄한 천사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지옥에 던져 어두운 구덩이에 두어 심판 때까지 지키게 하셨으며_베드로후서2:4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_유다서1:6

 

천사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또 내가 보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용을 잡으니 곧 옛 뱀이요 마귀요 사탄이라 잡아서 천 년 동안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어 잠그고 그 위에 인봉하여 천 년이 차도록 다시는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리라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천 년이 차매 사탄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들이 지면에 널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을 두르매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태워버리고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더라_요한계시록20:1-15

 

1-2절. 지금 뭘 이야기하고 있냐면 이 땅의 주민들이 주민 아래에서 땅이 더러워진 이유가 주민들의 죄. 주민들이 율법을 범하고 율례를 어기고 언약을 깨뜨렸는데 그 배후에 누가 역사하고 있냐면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악한 영, 옛 뱀, 붉은 용, 마귀, 사단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느끼지 못합니다. 마귀, 사단이 세상 공중 권세를 잡았다고 합니다. 정사와 권세를 잡았다고 합니다. 지금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권세, 정사, 정치, 경제, 문화 다 사단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문화가 어떻게 복음과 같이 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것을 교회가 수용해서 교회라는 곳을 할 수 있겠습니까? 복음은 철저하게 반문화적입니다. 그게 결코 우리 시대의 문화가 우리 신앙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 안에 들어오고 있는 수많은 문화들, 신학들. 번영신학, 해방신학. 이런 신학들이 시대의 트렌드라고 해서 목회자들이나 성도들이나 신학교에서 배운 전도사님들이 무분별하게 다 받아들입니다. 성경으로 확인도 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물어보지도 않습니다. 그냥 신학교 교수님에게 배운 것이 맞다고 생각해버립니다. 그것을 교회 와서 설파합니다. 그 인간의 죄. 그것을 죄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깨고, 율례를 깨고, 영원한 언약을 깬 것. 지키지 못한 것입니다. 그 죄로 심판을 당한다고 합니다. 쉽게 이야기를 하면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복음을 지키지 못해서 당하는 심판인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워하시지는 않지만 우리가 짓는 죄는 미워하십니다. 우리가 고통을 당한다는 것은 우리 자녀들이 고통을 당할 미래가 온다는 것은 우리의 철저한 죄, 욕심 때문입니다. 배후가 있다는 것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영적인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자꾸 이 사실을 놓칩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고, 오직 예수 하지 않아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고, 열심히 노력하면 내 삶의 수준이 높아질 것 같으니까 무엇을 놓치나요? 영적인 세계를 놓치는 것입니다. 구원을 놓치는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 열심히 좋은 학교 보내고 수준 높은 교육 시키면 부모의 사명을 다하는 것 같고. 아이들이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지 신경도 쓰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하는지 관심 갖지 않고 그건 중요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에 맡겨놓는 것입니다. 교회 선생님이, 전도사님들이 알아서 해주겠지. 그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문화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스며드는데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요즘 같은 때 누가 성경 읽냐? 무식하게. 요즘 같은 때 누가 교회 가서 예배하고 헌금하냐? 누가 십일조 같은 거 하냐? 누가 요즘 전도하냐? 요즘 전도 그런 식으로 안 해. 교회가 조금 세련되어져야지. 교회가 수준을 높여야지. 무슨 수준이요? 설교가 세련되고 수준 높아야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설교가 무슨 세련되고 수준 높습니까? 얼마나 수준이 높아야 됩니까? 영어 좀 쓰고 한문 좀 써야 수준이 높아집니까 설교가? 이 때 하나님은 남은 자를 남겨두시겠다고 합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구원 받은 자입니다.

 

- 남은 자의 사명_이사야24:13-16

 

무리가 소리를 높여 부를 것이며 여호와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바다에서부터 크게 외치리니 그러므로 너희가 동방에서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며 바다 모든 섬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땅 끝에서부터 노래하는 소리가 우리에게 들리기를 의로우신 이에게 영광을 돌리세 하도다 그러나 나는 이르기를 나는 쇠잔하였고 나는 쇠잔하였으니 내게 화가 있도다 배신자들은 배신하고 배신자들이 크게 배신하였도다_이사야24:14-16

 

14-16절. 어떤 남은 자인지 보셔야 합니다. 누구인가요? 남은 자가 하고 있는 사역, 사명입니다. 이 와중에 땅이 뒤집어지고 공허해지고 완전히 황폐해져서 구별도 없이 모두가 심판을 당할 때 남은 자는 뭘 하고 있냐면 땅 끝에서부터 모든 섬에서부터, 바다 끝에서부터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찬송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이 남은 자는 성경에 복음을 믿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순종하는 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 본문에 나와 있는데 그게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고 영광을 돌리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냐면 쇠잔한 삶을 살아야 됩니다. 세상 문화와 반대로 살아야 되기 때문에 그것을 십자가의 길, 천성을 향해 가는 길. 세상 문화와 반문화적으로 살아야 되기 때문에 좋은 말로 말하면 구별되었고 거룩한 삶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지만 실상은 우리는 치열하게 문화와 싸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는 우리는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과정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의 과정. 누가 보든 보지 않던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서 과정은 필요 없다. 그럼 교회를 떠나셔야 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그게 마귀가 가장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렇게 문제가 많은 것은 그 기준, 남은 자가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기준을 잃어버리고 자기 자신, 다시 말해서 죄로 가기 때문입니다. 과정이 중요하지 않고 결과만 노래 부르는 자들을 배신자들이라고 오늘 본문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신했다고. 남은 자들 중에서도 배신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데 결과만 가지고 영광을 돌린다? 결과만 가지고 영광을 돌린다는 것 그것은 자기 우상입니다. 자기만족입니다. 남은 자는 다시 말해 복음을 믿는 자는 과정 전부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매우 중요합니다. 그리고 남은 자는 문화와 싸웁니다. 반문화적입니다. 그런데 교회들이 문화를 받아들입니다. 자기 합리화가 바로 문화입니다. 자기중심적인 문화. 이 정도는 괜찮지 않아? 이 시대와 상황과 환경을 기준 삼는 문화입니다. 지금 시대가 그렇잖아? 남은 자는 그 시대의 문화가 기준이 아니라 성경이 기준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그 복음이 어린양의 복음이 기준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배신합니다. 왜? 시대의 문화가 훨씬 더 강력하니까. 훨씬 더 파워 있게 보이고 매력 있게 보이고 아름답게 보이니까 사람들은 배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더 나쁜 사람은 스스로 그 문화를 받아들이며 그 속에서 하나님을 만들고 그 속에서 자기가 믿고 싶은 예수를 만들어서 믿는 사람들을 종교인들이라고 합니다. 환란이 오면 배신합니다. 로마서에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기 배를 따라가는 사람들. 우상과 돈, 쾌락을 쫓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남은 자는 여호와의 영광을 보았기 때문에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존재하시는 그 여호와 자체를 만난 사람은 내가 병에 걸리나, 병에 걸리지 않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 존재하시는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성경을 통해서 확인한 사람은 내가 부자냐, 가난하냐 아무 상관없이 신앙생활 합니다. 시험 들어요? 사람들 말에 시험이 들어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아직 하나님, 천국, 내세를 모르는 사람들, 종교인들이나 하는 이야기입니다. 시험이 들 수 있어요? 저분은 교회 진짜 열심히 다녔는데 어느 날 시험 들어서 교회 안 나온데. 그거는 아직 하나님 영광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교회를 안 나와서 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등진 사람들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 신앙생활 안 할래, 기독교가 이미지가 안 좋아졌어, 교회 안 다닐래. 그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두렵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믿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진짜 신앙인들, 복음을 따르는 남은 자들은 자기 흥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선택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지막 때를 위해서 몇 가지 준비를 해야 합니다. 올바른 준비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그냥 준비가 아닙니다. 올바른 준비를 해야 합니다. 가스펠 교회는 이 준비를 같이 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 준비를 하는 건강한 교회들이 한국교회에 몇 교회들이 있습니다.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겉으로는 복음이고 겉으로는 하나님 사랑한다고 교회를 세워서 목회를 하지만 그 내면에 아주 악한 모습들을 가지고 있는 교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고 행하는 교회들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은 다음세대 우리의 후대를 생각하는 교회들입니다. 다음세대, 후대를 생각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교회 중직자들이 돈 많이 버셔서 후대에 쏟아 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돈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도 최선을 다해서 성경을 읽고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서 그 삶을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줘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문화와 싸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목회자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은퇴나이가 되면서 목회자들이 교회가 크고 거룩해지면 삶이 변질되잖아요. 목사님보고 회장님, 대표님이라고 그럽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우리의 삶이 한결 같아야 합니다. 저는 어제 청년들, 집사님, 외부봉사자들과 연탄배달을 다녀왔습니다. 저는 나이가 들어서도 하고 오히려 은퇴하면 더 자주 할 것 같습니다. 그런 삶을 살지 않으면 우리는 건강하지 않은 상태에서 미래를 보는 시야가 다 사라지게 됩니다. 제가 왜 죽도록 힘들게 네팔 좀 갑시다, 봉사활동 좀 갑시다 꼬시냐면 그것을 보는 사람이 내가 살고 있는 삶의 기준이 틀린 거구나, 네팔만 가서 봐도 내가 살고 있는 삶의 기준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얼마나 치열하게 세상 문화는 우리는 성공으로 축복으로 내모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끝은 마귀입니다. 배후는. 나 중심으로 살게 만듭니다. 이기적으로. 그래서 무엇을 사라지게 만들어요? 십자가의 복음, 구원이 희미해지게 만들어서 우리 자녀들에게 물려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모들이 권사, 장로님, 집사님 부모들이 자녀들의 신앙을 생각하지 않고 선택한 것들 다 회개하셔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자녀들을 지옥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가지 준비를 해야 합니다. 

 

Ⅲ. 마지막 때를 위한 올바른 준비

 

- 이 땅의 성전(교회)은 천국의 모형입니다_요한계시록21:1-5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_요한계시록21:1-5

 

1절. 이사야 말씀과 똑같습니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바다도 있지 않다고 합니다. 말세 때에 벌어질 일입니다. 이 땅이 황폐해진다는 것입니다. 2-5절. 뭐에요? 천국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땅의 천국을 이야기하는데 이 땅의 유토피아는 천국이 아닙니다. 굉장히 위험한 사상입니다. 우리가 그 천국을 믿기 때문에 이 땅에서 천국을 전파하기 위해서 작은 천국을 이루면서 살자, 가정 천국을 이루면서 살자고 하지만 사실 엄청 위험한 말일수도 있습니다. 멸망할 것을 천국처럼 붙잡고 우리 좋은 집에 살면 천국이야, 성공하면 천국이야 이렇게 할 수 있어요. 아니요. 이 땅과 천국은 분리되어 있는 것입니다. 신앙을 오해하면 목사님들이 자꾸 이 땅을 천국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을 천국으로 만듭시다 하는데 이 땅은 다 사라질 것들입니다. 다 사라집니다. 여러분이 붙잡고 있는 것 다 사라지고 새 하늘로부터 새 예루살렘이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그 성전. 그 성전이 뭐냐?

 

- 곧, 어린양이 성전입니다_요한계시록21:22-23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_요한계시록21:22-23

 

22절. 천국에서 하늘에서 내려주는 성전이 뭐냐고 이야기를 하냐면 오늘 성경은 어린 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라고 합니다. 23절. 이 세상은 해나 달의 비침이 중요하잖아요 그러나 쓸데없다고 합니다. 영적인 것입니다. 육신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린양이 성전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교회는 뭘 해야 되나요? 예수님 믿는 곳입니다. 어린양 그것으로 우리의 영혼이 새로워지는  곳입니다. 변화되는 곳입니다. 여러분 저도 축복 받고 싶어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차도 바꾸고 싶고 더 큰 집으로 이사도 가고 싶고 좋은 음식도 먹고 싶어요. 이것이 인간의 양면성이에요. 그러나 그것에 노예가 돼서는 안 됩니다. 결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가야 될 천국이 희미해지거나 소멸되거나 작아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싸워야 될 것이 그 문화와 싸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집 이사 가지 말란 말이 아니고 큰 차를 타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 자녀들과 우리 형제들, 지체들, 이웃들이 어린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는 문화가 형성 될까봐 교회가 그것들과 타협할까봐 성경은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부자냐 가난한 자냐, 너희가 여종이냐 여주인이냐, 너희가 파는 자냐 사는 자냐. 우리는 그것에 신경 쓰고 살면서 무엇을 놓치죠? 땅이 황폐해지는 것을 놓치며 사는 것입니다. 영적인 토양이 무너지는 것을 놓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만큼은 신앙공동체만큼은 그런 차별, 구별이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놓은 기준이 아니라 교회만큼은 천국, 그 어린양 되시는 성전이 우리의 모형이 돼서 우리가 같이 찬송하고 같이 노래 부르고 가난하다고 손가락질 하지 아니하며 병 들었다고 저주 받았다고 영적문제 있다고 말하지 아니하며 사랑하며 보살피며 보듬어주며 나도 죄인이고 너도 죄인인데 목사가 성도를 정죄할 수 있나요? 목사의 권위로 그리스도의 대사된 권위로 권면을 하고 치리를 하고 회개하라고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이 강단에서 내려가면 저도 여러분과 똑같이 회개해야 되는 한 사람일 뿐입니다. 똑같이 봉사활동을 가지 않으면 세상 문화에 함락되어서 욕심을 쫓아서 갈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힘써서 봉사하고 힘써서 예수님처럼 가난한 자들을 찾아가는 것뿐입니다. 세상이 이야기하는 윤리, 도덕들은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기준은 구원, 심판 밖에 없습니다. 그 기준을 교회가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기준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게 남은 자가 해야 될 사역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되냐? 그럼 이 어린양이 무엇이냐? 

 

- 말씀은 어린양의 사역입니다_요한계시록22:1-2, 7-10, 1:1-3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_요한계시록22: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_요한계시록22:7-10

 

1-2절, 7절. 생명나무가, 어린양에서 흐르는 생명수가 바로 말씀이구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 하기 위해서 있냐구요? 만국을 치료하기 위해서. 뭐가요? 말씀이요. 8-9절. 무슨 말이에요? 이 하나님의 말씀이 흘러서 만국을 치료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하나님 앞에 경배할 때 이 말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성경을 이상하게 푸는 교수님처럼 공부를 해서 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미국 유학을 가서 성경을 잘 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원어를 잘해서 잘 풀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호와를 경배할 때 하나님 말씀이 바르게 흘러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10절.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성전에서 나오는 것이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_요한계시록1:1-3

 

이 복이 무슨 복일까요? 우리가 이야기하는 집, 차, 돈 일까요? 아닙니다. 생명입니다. 바라크. 이 복의 원어는 바라크입니다.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구원입니다.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 여러분 매일 하루 3장씩 공동체성경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 성도들이 할 때까지. 모든 우리 교회 아이들이 동참해서 할 때까지. 저도 힘들 때가 있습니다. 목사인데 벅찰 때가 있습니다. 저는 제 설교할 성경본문 또 읽어야 하잖아요. 일주일에 한 권씩 읽습니다. 이번 주에는 요한계시록을 다 읽었습니다. 설교준비를 해야 하니까. 또 3장 또 읽어야 하니까. 목사니까 패스할까 이런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애써서 같이 하고 저도 읽었습니다 라고 올립니다. 저도 성도니까, 공동체 일원이니까. 별거 아닌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아무것도 아닌 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성경 읽는 자가 복이 있다고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듣는 자도 복이 있다고 합니다. 들으셔도 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목사의 표현을 듣는다는 표현도 되지만 성경 자체를 듣는 것입니다. 왜? 구약은 이것을 다 낭독해주었습니다. 말씀을 그대로 낭독해주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또 하나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 그것이 남은 자가 할 일입니다. 보수적이라고요? 이런 설교가? 율법적이라고요? 예. 그럼 저는 율법주의자가 되겠습니다. 저는 보수주의자가 되겠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매일 성경을 읽냐고 합니다. 저보고. 그럼 성경을 읽지 말라구요? 그럼 성경에 기록된 것은요? 이 말씀을 성경은 영의 양식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유대인, 이방인들이 하도 깨닫지 못하기에 영의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하루 세끼 먹어야 살 수 있지 않냐? 그런데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끼 정도 먹지 않으면 티가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음식 대신 불량식품을 한, 두 끼 먹어도 내 몸의 이상신호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몸 내부는 다 쌓여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10년 동안 라면만 먹고 담배만 피고 술만 마시고 살아보세요. 나쁜 중금속이 들어있는 그런 음식을 계속 먹어보세요. 몸이 어떻게 되나. 한 두 끼는 괜찮습니다. 나중에는 내 몸이 다 황폐해집니다. 어느 순간에는 함락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영혼도 똑같습니다. 당장은 성경 한 장 안 읽어도 괜찮은 거 같고 세상 이야기, 뉴스, 유튜브, 사람들의 유행들을 들으면 귀가 즐거우니까 그게 훨씬 더 좋아 보이니까 그것을 들으면서 살거든요. 드라마 같은 것. 드라마가 진실입니까? 다 허상인데? 그러나 우리 영혼은 마치 우리의 몸이 안 좋은 음식을  계속 먹어서 병이라는 것은 이미 안에가 다 썩어서 드러나는 것이 병입니다. 영혼도 똑같습니다. 이미 늦은 것입니다. 땅이 다 황폐해져버렸다고 합니다. 그 땅의 주민들이 밟고 있는 땅이 황폐해져버렸다고 합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말씀 사역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우리가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님들이 자꾸 말씀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역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교회 이미지나 프로그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교회는 말씀사역을 해야 합니다. 그 어떤 것도 말씀사역을 축소시킬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그것과 싸워야 합니다. 내가 정한 기준, 내가 만든 하나님, 내가 만든 어떤 종교적인 신앙이 아니라 경험이나 관습이 아니라 여러분이 30년 신앙생활 했다 할지라도 오늘 내가 신앙생활 어떻게 할까는 성경에서 찾아서 하셔야 합니다. 과거의 내 경험으로 절대 신앙생활 하셔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것 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성경 66권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 천국이냐 지옥이냐의 문제입니다. 그러니 축복의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말씀이 노예, 어린양의 노예,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기분 나쁘게 들리겠지만. 그게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십자가 지셨기 때문에. 그 어떤 세상의 존재도, 사람도, 그 무엇도 나를 위해 대신 죽은 존재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스펠교회는 이 말씀 사역을 어떻게 해야 하나? 성경을 읽으십시오. 제발. 부탁을 드립니다. 잔소리 좀 그만하세요. 이렇게 들리시지 않으셔야 합니다. 아마 여러분이 세월이 10-20년쯤 지나서 오목사의 잔소리가 그리워질 때가 오지 않을까. 제가 이 말을 하지 않으면 저는 타락한 목사라고 생각합니다. 제발. 오목사의 설교는 안 들어도 되니까 제발 성경 좀 읽으십시오. 혼자 읽지 마시고 공동체와 함께 읽으십시오. 아침에 일어나면 읽으시고 잠자기 전에 읽으십시오. 자녀들에게 성경을 읽혀주시고 아이들이 한글을 떼면 성경을 읽게 만들어주십시오. 노력하십시오. 그런 문화를 만드십시오. 애써서 힘써서 자녀들이 하나님 말씀을 먼저 배우도록 그렇게 노력하십시오. 그게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 생각, 내 판단, 내 마음, 내 감정이 아니라 성경을 읽고 따르는 삶임을 여러분 늘 생각하십시오. 땅이 황폐할 때도 환란이 왔을 때도 견딜 수 있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왜? 천국을 보았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어린양을 따라가기 때문에. 어린양에서 나오는 그 생수 하나님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에 환란을 견딜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 우리도 똑같이 환란을 당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도 질병을 겪고 있고 우리도 교통사고가 나고 우리도 가난해질 수 있습니다. 코로나 우리를 피합니까? 교회를 피합니까? 그렇게 목사님들 설교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지켜주셨다고? 아니요. 우리가 안전수칙을 지켜야 코로나에서 조금 보호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코로나에서 우리를 지켜주시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도 코로나 똑같이 걸리는 것입니다. 더 걸리고 있습니다.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아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Q.T, 묵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잘못하면 시중에 나와 있는 묵상이나 유튜브에서 묵상에 관한 강의할 때 내 마음대로 살도록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것 그것 묵상이 아닙니다. 조심하십시오. 내가 원하는 거 하고 싶어서. 말씀 뽑기 할 때 목사님들이 뽑기 하는 함에 회개의 메시지 넣어놓을 것 같나요? 심판 메시지 넣어놓을 것 같으세요? 다 축복된 말씀만 넣어놓습니다. 뭘 뽑아도 다 축복입니다. 회개하라 이런 말씀 내용 없습니다. 그게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묵상은 그게 아니고 내가 하나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고 기도하고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순서대로 읽으셔야 합니다. 한 권씩, 전체를,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일독을 하셔야 합니다. 어디는 읽고, 이건 나한테 도움이 되는 성경이네? 시편 읽으니까 내 마음이 되게 편하네? 그런데 이사야는 읽기 싫어. 맨날 저주하고 심판하고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가 진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니라 내가 만든 하나님을 섬기고 있을 확률이 높은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러분이 깨달은 것 혹은 여러분이 읽고 있는 것 혹은 성경 자체를 나누십시오. 여러분 주변 지인들에게 성경책을 선물하십시오. 여러분 자녀들에게 성경책을 사주시고. 믿지 않는 부모님들에게 성경을 선물하십시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강남 대치동에 있는 학원 강사들보고 일타강사라고 합니다. 원탑입니다. 한해 연봉이 100억이라고 합니다. 무슨 학원 강사가 100억씩 받나 싶은데 이게 온라인화가 되면서 온라인이 아닐 때는 몸이 하나이니까 여러 군데를 가지 못해서 100억씩 못 벌었는데 온라인이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제일 잘하는 사람에게 몰리는 것입니다. 빈익빈 부익부가 학원 강사들에게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 강의는 여러분에게 소망을 주는 강의이고 여러분이 공부할 수 있도록 동기를 주는 강의야. 그런데 다들 수백 명, 수천 명, 수만 명이 내 강의를 듣지만 내 강의 내용을 순종해서 따라오는 자기가 직접 공부하는 사람만 나처럼 성공할 수 있어. 맞는 말입니다. 목사의 설교는 여러분에게 가이드입니다. 신앙은 이 설교로 끝내시면 안 됩니다. 나 목사님 설교 들었으니까 예배 드렸으니까 내 신앙생활 끝. 그러면 여러분은 마치 학원가서 강의 듣고 내 공부를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하지 않으면 그것이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공부는 무엇이냐? 바로 성경을 읽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듭니다. 그게 남은 자가 하는 사역입니다. 신앙생활이 쉬울 것 같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반문화적으로 살아야 되는데 치열하게 죄와 싸우고 어둠과 싸우면서 살아야 합니다. 치열하게 내 생각과 내 중심과 싸우고 살아야 되는데. 왜? 그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죄라는 본성. 그 본성과 우리는 늘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그것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여러분이 남은 자로 살 것인지 아니면 다수의 세상 문화와 타협한 배신자로 살 것인지 여러분의 몫입니다. 제가 아무리 설명을 해도 여러분이 해야 될 일입니다. 지금도 예배시간에 누군가는 자세를 갖추어서 예배하고 계시겠지만 누군가는 아무도 보지 않는데 어때하고 계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돌아보시고 감찰하시기 때문에. 그것은 제가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스펠교회 등록했다고 해서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승주 목사 설교를 듣고 있다고 해서 다 구원 받고 사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그런 교회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목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라고 다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 받은 사람이 목사를 하겠지만 목사도 치열하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 믿어야 합니다.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어린양 거기서 흘러나오는 하나님 말씀, 생수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만국을 치료하는 유일한 말씀 어린양, 그 성전을 놓치지 않고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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