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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1-02-28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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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2월 28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2부예배)

제 목

에브라임의 술 취한 자들

본 문

이사야 28:1-13

 

 오승주 목사

 

Ⅰ. 히스기야 시대의 에브라임(북이스라엘)

 

오후 시간은 저나 여러분이나 말씀을 듣거나 말씀을 하는 거나 쉽지는 않습니다. 저도 이미 오전에 설교를 3편이나 하고 이 시간이 오늘 마지막 설교의 시간입니다. 코로나 때 그런 고민도 했습니다. 예배를 하나 더 늘릴까? 그러면 80명이 아니라 120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으니까? 이런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성도님들이 현장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었습니다. 오후 시간이지만 많은 은혜가 있었으면 좋겠고 말씀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기도를 가지고 여러분 앞에 섰습니다. 여기서 이제 에브라임이라고 이야기가 나오는데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은 10개 지파의 연합국입니다. 그런데 10개 지파 중에 가장 뛰어나고 나머지 9개 지파를 리드해가는 대표적인 지파가 에브라임지파입니다. 그래서 에브라임 에브라임 하는 것은 마치 해외에 가면 대한민국 이렇게 말하지 않고 서울 서울 하는 것과 같습니다. 광주도 있고 부산도 있고 대구도 있는데 미국에 가면 마치 서울이 한국인 것처럼 이야기하듯이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대표되는 지파이고 그 에브라임의 성, 수도가 사마리아입니다. 그래서 에브라임 이야기하면 여러분 머릿속에 북이스라엘을 말씀하시구나, 사마리아 하면 북이스라엘이구나 이렇게 머릿속에 배경을 가지고 말씀을 들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28장부터 시작되는 본문은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히스기야 왕이 남유다를 통치하던 시기입니다(28-29장). 히스기야 왕은 누구죠? 여러분 우리는 히스기야 왕에 대해서 진짜 많이 들어봤습니다. 여러분 히스기야 왕 하면 어떤 이미지가 있나요? 굉장히 신앙이 좋은 기도해서 응답 받은 이렇게 설교를 많이 들었지만 실상 히스기야 왕은 실패한 왕이고 사실은 하나님이 약간 포기하신 왕입니다. 잘못된 설교를 들은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하나 찾아보고 왜 그런 것인지. 히스기야는 진짜 불의한 왕, 하나님께 배신하고 배반하고 우상을 섬기고 악했던 아하스 왕의 아들이 히스기야 입니다. 나중에 히스기야 왕에 대한 본문이 나왔을 때 히스기야 왕에 대해서 설명하겠지만 히스기야도 똑같이 아하스 왕처럼 악했습니다. 그런데 질병으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고 질병, 죽음도 몇 년 뒤로 미뤄지고 또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강이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부강이 아니라 많은 나라들과 동맹을 맺고 부강한 나라를 이뤘고 결국 히스기야는 나중에 아버지 아하스 왕의 길을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히스기야 왕을 위대하다고 믿음의 왕이라고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히스기야 왕 시대가 배경이 된 북이스라엘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시작할 때 화 있을진저 이렇게 시작합니다. 히스기야 왕 시대인데 화 있을진저 이렇게 시작하고 심지어는 슬프다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첫 마디가 화 있을진저, 슬프다 이렇게 오늘 본문이 시작이 됩니다. 어디에 대해서요? 북이스라엘에 대해서, 에브라임에 대해서. 사실 북이스라엘이 지형적인 조건으로 따지면 남유다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이었고 지파도 10개나 되니까. 그런 모든 하나님의 언약적인 축복을 남유다에게 다 빼앗겼습니다.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에게 준 모든 면류관을 사실 남유다에게 빼앗긴 그런 나라입니다.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이유가 분명히 있다는 것을 확인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이 북이스라엘은 아하스 왕 때(남유다)부터 히스기야 왕 때(남유다)도 마찬가지이며 하나님이 누구신지 잊어버린 민족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인지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히스기야 왕을 통해서 기회를 주셨는데 그 기회조차 발로 차버렸습니다. 그래서 사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잊어버린 어떤 전통과 절차만 남아있었습니다. 실제 북이스라엘은 어떤 나라였는지 오늘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원래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정말 예배하던 나라였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면류관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진정한 복이시다. 그게 북이스라엘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역사성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너는 복이 될지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복이 누구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할 때 이스라엘이 복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은 하나님을 믿어서 응답으로 오는 게 복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가 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복 삼고 살면 이스라엘이 복을 받고 하나님과 멀어지면 복과 상관없는 민족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믿음으로 그런 신앙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인데 오늘 5-6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Ⅱ. 술 취한 에브라임

 

-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면류관_이사야28:5-6

 

그 날에 만군의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의 남은 자에게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시며 아름다운 화관이 되실 것이라 재판석에 앉은 자에게는 판결하는 영이 되시며 성문에서 싸움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힘이 되시리로다_이사야28:5-6 

 

5절. 하나님이 영화로운 면류관이 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면류관이시고 화관이시고 재판장이시며 우리에게 힘이 되십니다. 그게 북이스라엘에게 원래 하나님은 이런 관계입니다. 백성들에게 화려한 꽃 화관이시고 또 하나님이 그들을 변호해주는 의로운 재판장이 되어주시고 싸움을 물리칠 때 힘이 되어주신다고 오늘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런 아버지가 이런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 하나님이 되십니다. 이 하나님이 신앙의 복입니다. 이 하나님이 바로 면류관이고 하나님이 우리의 복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기독교, 한국교회 신앙을 살펴보면 저도 그렇고 그렇게 배워 왔고 하나님을 만났을 때 어떤 결과가 있을 거라는. 그러니까 응답이라는 단어를 거의 한국교회가 만들어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응답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만났고 내가 교회를 다녔고 헌금을 냈고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어떤 결과로 내가 치료를 받는다, 내가 잘된다, 문제가 해결된다라는 그런 기복적인 신앙생활이 한국교회에 진짜 많습니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이 복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하나님이 우리의 면류관이신 것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때 계산이 있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그냥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은데 우리가 연인사이에서도 그렇습니다. 요즘은 결혼하려면 저 사람 연봉이 얼만지, 저 사람을 만나면 내가 이런 문제가 해결될 것 같고 저런 문제가 해결될 것 같고 이렇게 결혼정보업체를 통해서 결혼을 많이 하지만 우리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저 사람을 통해서 뭘 할 거야, 해결 받을 거야  이렇게 만나지 않습니다. 그냥 사랑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의 열매를 맺는 것뿐이지 사랑은 어떤 계산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녀를 사랑할 때 계산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당신이 우리의 복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어떤 분인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알면 신앙은 어떻게 되죠? 철저하게 인본주의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가 됩니다. 여러분 교회에는 인본주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입니다. 저는 한국교회에서 해방신학, 번영신학이 만들어 낸 단어가 뭐냐면 가정천국, 직장천국입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천국을 만든다고 하는데 의미는 알겠습니다. 그게 어떤 의미가 있고 그게 나쁜 의도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러나 진짜 천국을 다 변질시켰습니다. 여러분 천국은 한곳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죽고 나서 아버지 하나님이 계시는 존재적인 천국은 한 곳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보세요? 그 천국에 대한 소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천국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갈수록 말세를 이야기하고 있고 죄악이 관영해지고 어둠이 관영해지고 리워야단의 세력이 강해진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이 땅의 천국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작은 천국이라고 하면 이상합니다. 우리가 천국을 믿고 살기 때문에, 천국을 믿는 사람들이, 이 땅에서 그 믿음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고 신앙의 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은 십자가의 길이고 고난의 길이라고 이야기를 하지 여러분 가정 천국이 어디 있나요? 우리가 그 천국을 바라보고 살기 때문에 가정에서 평안하고 샬롬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많지만. 여러분 가정에 문제가 없어요? 인간사회에는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한국교회 자체가 어떤 유토피아를 자꾸 이야기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을 이야기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죽어서 가는 천국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실존적으로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너무 관념적입니다. 그게 북이스라엘에도 똑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만이 면류관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복이다 했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인데 어떻게 변화 됐냐면

 

- 교만한 면류관, 사마리아성_이사야28:1-4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은 화 있을진저 술에 빠진 자의 성 곧 영화로운 관 같이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세운 성이여 쇠잔해 가는 꽃 같으니 화 있을진저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_이사야28:1-4

 

1절. 이거는 역사적인 배경을 이해하시면 됩니다. 에브라임이 성을 지었는데 아주 기름진 골짜기 산꼭대기에 사마리아 성이라는 것을 지었습니다. 나중에 사마리아 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사마리아 성을 어떻게 지었냐면 면류관, 왕관 모양으로 지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면류관 모양으로 사마리아 성을 실제로 그렇게 지었습니다. 그래놓고 그 당시에 형성된 또 하나의 문화가 있는데 나라가 번창하고 번영하다 보니까 앗수르와 모압과 암몬, 애굽과 교류하면서 그들에게 생긴 것이 그들의 귀족, 정치인, 제사장, 종교지도자들이 머리에 신분을 표시하는 모자를 만들어서 쓰기 시작했습니다. 면류관입니다. 왕의 모자는 이렇고 제사장의 모자는 이렇고. 그러니까 모자만 봐도 저 사람은 신분이 뭐야, 저 사람은 국무총리이구나, 저 사람은 제사장이구나, 저 사람은 선지자구나 그런 것을 알 수 있게 문화가 형성된 시기입니다. 놀랍습니다. 그러니까 뭐냐면 인간이 하나님을 면류관 삼고 하나님을 복 삼아야 되는데 북이스라엘이 어떻게 됐냐면 앗수르와 애굽과 모압과 암몬과 교류하고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고 받아들이면서 그들의 문화가 이제 눈에 보이는 복이 되고 축복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죄라는 것은 강력합니다. 왜 죄가 강력하냐면 죄의 속성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속성 아시죠? 태양은 뜨겁습니다. 태양이 차갑지는 않습니다. 속성, 성질입니다. 그거는 그거야. 그러니까 죄는 속성이 있습니다. 죄의 속성은 뭐냐면 하나님에게서 인간을 멀어지게 만들고 하나님의 존재를 잊어버리게 만드는 속성이 있습니다. 죄는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인생에도 죄를 지을 때 이상하게 예배에 가기 싫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이럴 때 있었을 것입니다. 성경 읽기 싫고. 죄를 지을 때는 누구나 다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왜? 죄의 성질이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죄 이것을 보고 에브라임이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께서 교만한 면류관이라고 하셨습니다. 면류관은 하나님밖에 없는데 우리가 죽어서 가는 그 천국에 입성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로운 면류관, 우리에게 주시는 상급, 그것을 바라보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복 받는 백성으로 축복의 백성으로 살아야 되는데 진짜 세상의 면류관, 죄악을 통해서 받아들이기 시작하니까 하나님을 면류관 삼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면류관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또 하나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술에 빠진 자의 성. 술 취한 자들의 성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은 실제로 엄청난 곳이었습니다. 문화적으로도 대단한 성이었고 아름다운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뭐가 취했냐고 하냐면 술이 취했다고 합니다. 술 취한 자의 성은 영화로운 관 같이 보이지만 나중에는 쇠잔해가는 꽃 같다고 합니다. 시들시들 말라가는 꽃 같다는 것입니다. 

 

보라 주께 있는 강하고 힘 있는 자가 쏟아지는 우박 같이, 파괴하는 광풍 같이, 큰 물이 넘침 같이 손으로 그 면류관을 땅에 던지리니 에브라임의 술취한 자들의 교만한 면류관이 발에 밟힐 것이라_이사야28:2-3

 

면류관을 땅에 던진다고 합니다. 심지어 4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의 영화가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_이사야28:4

 

여러분 무화과는 무화과 열매가 아니라 무화과 꽃입니다. 꽃이 벌어지면 그때 먹어야 합니다. 안 먹으면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사과, 배처럼 저장을 하지 못합니다. 물론 익기 전에 따서 저장해서 팔기도 하던데 무화과는 벌어지면 꽃처럼 피면 바로 먹어야 합니다. 무화과가 꽃처럼 피면 바로 따서 먹어버린다고 합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가 질병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죽음을 연장해주셨습니다. 그 때 히스기야가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하는데 정치질 하고 이방국가들과 연맹을 해서 많은 부를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해주셨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했죠? 그 부를 이방나라들에게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면류관 삼아야 될 히스기야 왕이 이방나라들을 면류관 삼고 이방나라들에게 부를 자랑했을 때 그들이 와서 다 짓밟았습니다. 그들이 다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결국은 그들과 잘 살아보세 하고 손잡은 그들에게 배신당해서 사마리아 성은 쑥대밭이 되고 초토화 되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유대인들 교육 중에 하나가 그런 교육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무슨 교육을 하냐면 세상에 정답은 없다고 교육을 합니다. 우리나라 교육과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정답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주입식으로 교육을 하지만 유대인들은 너희가 사는 시대에 세상은 정답은 없어 이렇게 교육을 합니다. 우리는 의사가 최고직업이야 이렇게 이야기를 하지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왜? 너희 시대에는 의사가 최고 직업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자녀교육에는 철저하게 무슨 교육만 하죠? 모세오경 토라 교육만 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밖에 없어. 변하지 않는 것은 우리 민족 밖에 없어. 너희를 보호해주고 너희를 지켜주는 것은 우리의 신앙 밖에 없어. 이게 유대인 교육은 핵심입니다. 세상은 다 변해. 세상은 다 다를 뿐이야, 1,2등은 중요하지 않아, 너는 저 아이와 달라. 저 아이는 국어를 잘하지만 너는 수학을 잘 하잖아. 이게 유대인 교육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자살이 없습니다. 왜냐면 비교하지 않으니까. 유대인 교육에는 유대인 사회에는 비교라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처럼 비교하는 것이 없습니다. 비교해서 마음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왜? 협력하고 공동체적인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시는 아브라함을 통해서 주시는 언약이 있는데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을 면류관 삼고 하나님을 복 삼으면 그런 축복을 두고 세상의 앗수르가 번창할 때는 앗수르와 손을 잡고 애굽이 번창할 때는 애굽과 손을 잡고 모압과 암몬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들의 교만함, 오만함, 타락함을 면류관 삼았습니다. 결국 그들로 인해서 멸망했습니다.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그들은 무엇보다 술 취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역사적으로 자료를 찾아보니까 얼마나 나라가 좋았고 사마리아 성이 안정적이었냐면 너무 안정적이니까 사람들이 술 먹는 문화가 발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 나온 벽화, 자료들이 전부 귀족끼리 앉아서 아름다운 술잔을 만들어서 술 먹는 자료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그 말은 요즘 같이 힘들고 노동자들이 힘드니까 소주 한 잔씩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평화롭고 안정적이니까 술 먹는 문화가 귀족층에서 있는 것이 벽화 같은 것으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줘서 목숨을 연장 시켜준 그 사이에 그런 문화들이 발전했습니다. 실제로 술도 취했다는 말이고 또 하나는 그게 그냥 술 취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은유적으로도 해석을 해야 합니다. 앗수르의 교만함들, 애굽의 오만함들, 모압과 암몬의 그런 타락에 취해서 산 것입니다. 그들의 문화, 세상이 반짝반짝 돌아가는 것에 취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구별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성도니까 구별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존재입니다.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별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전혀 구별됨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그렇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많은 크리스천들이 교회들이 구별됨이 없습니다. 물론 교회 건물은 구별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교회를 화려하게 짓던지. 그러나 정말 하나님을 복으로 생각하고 면류관으로 생각해서 이 땅을 살아가는 그런 신앙인들이 많지 않기 때문에 세상의 썩을 면류관을 쫓고 있어서 구별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어쩌면 20-30년 전에 신앙생활 할 때 아무것도 없어서 배우지도 못한 분들이 세상에 훨씬 더 아름다운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지금은 교회가 다 있습니다. 지금 교육은 겉모양을 치장하는 교육에 신경 쓰다 보니까 우리 속사람이 변화되고 새로워지고 죄에서 멀어지려고 하고 바르고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구별됨이 전혀 없습니다. 거룩함이 없습니다. 교회가 거룩함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전도를 한다한들, 프로그램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메시지 정리를 잘해서 따박따박 논리적으로 전달한다한들 그들이 받지를 않습니다. 전도는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거룩해질 때. 우리가 하나님을 정말 알고 하나님을 복 삼고 하나님을 면류관 삼을 때. 사마리아 성은 에브라임은 하나님을 면류관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들의 마음과 영혼이 온통 세상 것으로 취해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취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가 뭔가요? 이사야 선지자를 보내서 말씀을 주시는데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아세요? 

 

- 술 취한 자들의 옹알이(말씀을 비웃는 에브라임)_이스라엘28:7-11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_이사야28:7-11

 

그리하여도 이들은 포도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_이사야28:7

 

옆 걸음을 왜 치겠어요? 포도주로 술 취해서.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진짜 충격적인 것이 나옵니다. 8절. 제사장과 선지자도 독주로 말미암아 옆 걸음 치며 포도주에 빠지며 독주로 말미암아 비틀거리며. 제사장과 선지자는 누구에요? 종교 지도자들이에요. 지금으로 말하면 목사, 성직자들입니다.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일반 정치인들과 타락한 귀족들과 똑같이 독주로 옆 걸음 치고 술 취했습니다. 7절 하반절. 비틀거리며 환상을 잘못 풀며 재판할 때에 실수하나니. 여러분 아시겠죠? 북이스라엘의 상태를 아시겠죠? 하나님이 주신 환상을 잘못 푸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못 푸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푸는 것입니다. 심지어 재판도 실수한다고 합니다. 누가 고스란히 당하죠? 백성들이 당합니다. 백성들은 환상을 제대로 풀어주지 않으니깐 그릇된 길로 갑니다. 재판도 제대로 해주지 않으니깐 엉망진창이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모든 상에는 토한 것, 더러운 것이 가득하고 깨끗한 곳이 없도다_이사야28:8

 

이게 밥상인데 비유적인 것입니다. 밥상에는 진수성찬, 진미성찬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밥상 위에 토한 것, 더러운 게 있다고 하나요? 그들이 지금 토하고 더러운 것을 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그래서 밥상 위에 먹는 것이 깨끗한 것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속이 어떻게 됐냐? 마음속이 어떻게 됐냐? 

 

그들이 이르기를 그가 누구에게 지식을 가르치며 누구에게 도를 전하여 깨닫게 하려는가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 하려는가_이사야28:9

 

제사장, 선지자들이 이사야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젖 떨어져 품을 떠난 자들에게는 어린 아이입니다. 이제 너희가 어린 아이처럼 우리에게 말씀을 전하느냐? 비꼬는 것입니다. 

 

대저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되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는구나 하는도다_이사야28:10

 

10절.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이것은 히브리 문학을 이해해야 합니다. ‘차블라차브 차블라차브 카블라카브 카블라카브 제에르 샴 제에르 샴’ 이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면 히브리문학에서 비꼬는 것입니다. 저 사람을 비꼴 때 저 사람이 했던 말을 내가 가지고 와서 옹알옹알 거리면서 비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주은전도사님보고 주은아 인사 좀 잘하고 다녀 이랬더니 주은이가 저한테 옹알거리는 거죠. 자기나 인사를 잘하지 나보고 인사 잘하래. 이런 것입니다. 술 취해가지고. 우리를 어린아이로 보느냐? 완전 술에 취했습니다. 그런 선지자와 제사장들에게 거기에 대고 이사야가 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그가 이 백성에게 말씀하시리라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_이사야28:11-12

 

말씀이 너희 안식일 것이다. 이것이 너희의 상쾌함이다. 제발 그 답답한 삶에서 벗어나서 상쾌함 속으로 와라 이 말입니다. 그러나 듣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사야가 이렇게 설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_이사야28:13 

 

이렇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경계에 경계를 교훈에 교훈을 이 말씀은 무엇이냐면 유대인들이 어린 자녀들에게 가르치는 교육법 중에 하나입니다. 반복적으로. 여러분 아이들이 커서 우리가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잔소리 교육처럼 반복적으로 교육을 받아서 혹시 커서 무슨 일이 잘못 되었을 때 혹시 오늘 말씀처럼 뭐가 걸렸을 때 혹시 넘어졌을 때 붙잡힌 무언가가 있게 하기 위해서. 지금 이사야는 북이스라엘, 에브라임에게 가서 하나님 말씀을 그런 식으로 전해주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더듬는 입술과 다른 방언으로. 어떻게든지 북이스라엘에 이 말씀이 전달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의 제사장, 선지자들은 옹알이를 하고 비꼬는 것입니다. 왜요? 술에 취해버렸습니다. 세상 문화에 취했습니다. 이방의 것으로 이미 취해버렸습니다. 그들의 먹는 것은 다 토한 것입니다. 더러운 것을 먹고 있는 것입니다. 더러운 것을 좋다고 먹고 있을 것입니다. 왜? 앗수르의 문화를 먹었으니까. 애굽의 문화를 먹었으니까. 모압과 암몬의 것들을 먹었으니까. 그들의 정치, 경제를 먹었으니까. 우리가 그렇잖아요. 저는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을 여기서 진짜 많이 찾습니다. 저의 모습도 많이 찾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책을 주셨습니다. 한국교회 성도들 중에 성경을 매일 읽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요? 이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분들이 몇 분이나 될까요? 그런 분들은 있어요. 나 성경 일독했어, 이독했어. 이러려고 읽는 분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진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가 하나님 뜻대로 살기 위해서 들여다보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아마 대부분 많은 분들이 조롱하고 지금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저는 요 근래 그 소리를 진짜 많이 들었습니다. 오목사는 젊은 줄 알았는데 목회 하는 게 무슨 7-80년대 목회하고 있네. 저보고 그러시더라고요. 얼마 전에도 가서 어른들이 그런 소리를 하셨습니다. 요즘은 줌 시대가 올 거라면서 비대면시대가 올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세요. 제가 그 앞에서는 웃고 말았지만 성경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우리가 비대면으로 어쩔 수 없이 예배를 드리지만 성경은 말세의 때에 모이기를 폐하는 자들을 경계하라고 하였습니다. 예배는 모여서 드리는 겁니다. 두 손들고 찬양하고 경배하고 공동체 예배를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마치 온라인 예배로 계속 드려야 될 것처럼. 우리는 지금 바이러스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미래 시대가 세상이, 기업들은 그렇게 하니, 다른 단체들은 그렇게 하니. 그것과 우리는 상관이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쫓아가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체되어 있는 것 같고 우리가 저들보다 뒤쳐져 있는 것 같지만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항상 계시는 분이시고 세상이 아무리 빨리 가도 저들의 끝은 죽음, 심판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술 취해서 사니까 하나님 말씀을 받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에브라임은 말씀을 옹알이 수준으로 말씀을 그렇게 받아들이니 그들의 인생도 옹알이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Ⅲ. 에브라임이 놓친 면류관

 

- 말씀에 옹알이 수준이면 그 인생도 옹알이 수준_이사야28:12-13

 

전에 그들에게 이르시기를 이것이 너희 안식이요 이것이 너희 상쾌함이니 너희는 곤비한 자에게 안식을 주라 하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경계에 경계를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며 교훈에 교훈을 더하고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 하사 그들이 가다가 뒤로 넘어져 부러지며 걸리며 붙잡히게 하시리라_이사야28:12-13 

 

그래서 무엇을 놓쳤습니까? 면류관을 놓쳤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통해 주셨던 너희는 복이 될지라. 다 놓친 것입니다.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포도열매가 될 것이다. 다 놓친 것입니다. 말씀에 대해 옹알이 수준이기 때문에 인생도 옹알이 수준이 되는 것입니다. 유대인 속담에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은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모르는 것과 같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진짜 많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다 표현합니다. 우리는 다 집어 넣어줍니다. 교사, 부모님들이 자기만족으로 메시지를 합니다. 그렇죠? 그러면 아이들이 다 듣고 적으면 속이 시원하지만 아이들은 하나도 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유대인 교육은 그런 교육이 없습니다. 질문하고 토의하고 의논합니다. 여러분 새신자가 교회 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질문이 뭐냐면 하나님이 안 믿어져요, 그게 제일 좋은 질문입니다. 당연합니다. 천국이 있다는 것이 안 믿어져요. 교회는 그런 것을 듣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우리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실제적, 실존적으로 아는 분이 없습니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말하지 못합니다. 왜? 왜 그렇죠? 신앙생활을 북이스라엘처럼 겉모양으로 다른 데서 면류관을 찾고 복을 찾기 때문에. 본질, 하나님. 이것을 다 놓쳐버렸습니다. 저는 철저하게 이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저희 교회는 앞으로 이 부분을 회복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교회가 영향을 준다는 것은 여기에 세상에 영향을 주는 교회라고 플래카드를 걸어놓는다고 영향을 주지 않습니다. 아무리 교회에 많이 걸어놓아 보세요. 아무리 주보에 그런 목적으로 많이 기록해보세요. 하나님이 이 교회 임재 하셔야 되고 하나님이 이 교회에 영광을 걸어놓으셔야 되고, 하나님이 이 교회에 부흥을 부어주셔야 세상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마음이 닫혀있는데 우리가 아무리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뭐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온전히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신앙의 유산은 하나님을 사랑했던 인생입니다. 부모의 신앙을 다 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성경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아이들이 보고 있습니다. 그게 유산이지 아이들이 성경 읽었어 안 읽었어? 오늘 메시지 뭐 들었어? 사실은 이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시간도 필요하지만. 그래서 에브라임이 말씀에 대해서 옹알이 수준으로 있다 보니까 면류관을 다 놓친 것입니다. 그것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면류관은 무엇입니까? 에브라임이 놓친 면류관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 영광이 함께 할 때 너는 복이 되고 너희는 복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아야 되고 성도가 우리 삶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하나님만이 우리의 복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이것이 우리 삶에 회복되어야 합니다. 되찾아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술 취한 옹알이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오늘 119편 말씀으로 몇 가지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 에브라임이 놓친 면류관, 우리가 되찾을 면류관_시편119:1-2, 49-56, 67-72, 97-98, 105, 130, 147-148, 174-176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_시편119:1-2

 

행위가 온전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어떤 행위를 성경에서 이야기를 하냐면 말씀을 따라 행하는 행함을 이야기합니다. 그게 뭐가 있다고요? 복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복이신데 말씀을 따라가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과해야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믿을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교회를 와서 백날, 천 날 메시지 듣고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도 신앙이 자라지 않는 이유는 말씀을 따라서 다시 말해 성경, 율법을 따라서 성경이 내 속에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은 메시지를 듣는 것이 아닙니다. 목사의 설교가 1번이 아닙니다. 어쩌면 성경을 읽는 것이 1번입니다. 뭐가 중요한지 저도 모르겠지만 목사도 성경 없이 어떻게 설교를 합니까. 그래서 성도들이 성경을 읽는 것은 목사에게도 중요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으면 목사는 함부로 설교를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다 알고 있는데 제가 제 마음대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이 성경을 안 읽으면 목사도 그것을 악용해서 주제설교를 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하고 교회가 다 같이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책임도 있습니다. 제가 이상한 설교를 하면. 그래서 행위에 온전하라고 합니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_시편119:49-56

 

말씀이 우리의 고난 중에 위로가 됩니다. 말씀은 예수님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영혼을 살립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의 소유. 말씀을 지킨 신앙을 이야기합니다. 유대인들은 맨날 포로 되고 집 없이 살았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재산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그것만 가르칩니다. 너희들 나라 잃어버릴 수도 있어, 너희들 인생에 고난이 찾아올 수도 있어, 금은보화 다 빼앗길 수도 있어. 그러나 빼앗기지 않을 것이 있어. 그게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야. 그게 재산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보세요. 그 내용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노래가 되고 소유물이 되어야 하는데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_시편119:67-72 

 

여기서 그릇 행하다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도덕적인 잘못이 아닙니다. 고난당하고 나서 깨닫고 나서 그릇 행하던 삶에서 돌아오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두 가지 밖에 없는 것입니다. 술 좀 끊어, 담배 좀 끊어, 도박 좀 그만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도박을 하지 않아도 술을 먹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지 않으면 똑같은 죄인인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술 취한 것입니다. 세상 문화에 취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서 적당한 견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어떤 삶을 사냐?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사는 겁니다.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_시편119:70

 

우리 마음이 살져서 기름덩이 같아서 말씀이 들어오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볼 것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가. 여러분 마음에 살이 찐 것입니다. 술이 취해 가지고, 세상의 것으로 가득가득 차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기름덩이 같다고 합니다. 그래서 뭐라고 합니까?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_시편119:71-72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세요. 금은보다 좋은 것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말씀이 금과 은, 세상 보화보다 좋아야 되는 것이 맞습니다. 마음이 기름덩이가 되도록 그냥 두지 마십시오. 강퍅하고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 상태로 두지 마십시오. 뭐에 대해서요? 말씀에 대해서요.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리나이다 주의 계명들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들이 나를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_시편119:97-98

 

기름덩이가 걷히고 말씀을 받으면 이 법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 당시에는 성경책, 핸드폰이 없으니까 말씀을 랍비, 부모님에게 전해 듣습니다. 그 말씀을 늘 읊조리는 것입니다. 왜요? 암송해서 살아야 되니까요. 성경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없으니까. 어떻게 나와 말씀이 함께하나요? 읊조리고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교육법이 된 것입니다. 암송하고 읽고 또 읽고 물어보고 깨닫고 그리고 그 말씀이 자기 삶에 주인이 되도록. 내일 바이블스쿨에 그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토라, 탈무드, 쉐마 이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_시편119:105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_시편119:130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어려움이 있고 문제가 있을 때 이 성경을 열면 말씀을 오픈하면 내게 빛이 비치어 우둔한 내가 깨닫게 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성경을 읽지 않으면 하루를 내 생각으로 살아야 됩니다. 그러나 아침에 성경을 읽고 살면 말씀으로 하루를 살 수 있습니다. 내 감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기분 나쁜 상태에서, 기분 좋은 상태에서. 기분이 좋으면 좋은 거고 나쁘면 나쁜 것입니다. 그러나 하루에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면 말씀으로 하루를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입니다.

 

내가 날이 밝기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_시편119:147-148

 

무슨 말인가요? 날이 밝기 전에. 말씀을 읊조리고 묵상하려고 새벽녘에. 이 말은 새벽에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시간을 확보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부지런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남들처럼 10시간 일하면 우리도 10시간 일해야 똑같은 보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잠을 한 시간 줄여야 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10시간 일해서 10만원 받을 것을 9시간 일해서 9만원 받고 한 시간 말씀 읽어라. 물론 알아요. 하루 벌어서 하루 먹는. 저도 개척해서 힘들었습니다. 개척교회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렵잖아요. 그러면 이런 것도 있습니다. 개척교회 때는 사람들 막 만나고 전도하고 사람을 채워야 하니까요. 근데 그게 안 됩니다. 왜? 설교준비를 해야 합니다. 전 설교준비는 완전 물리적인 시간으로 합니다. 25시간. 어제는 누구 장례식이 있어서 토요일에 지방을 갔다 왔습니다. 밤을 샜습니다. 꼬박 샜습니다. 왜 물리적이냐. 설교준비가 빨리 끝나도 그 시간을 지킵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조용한 시간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의 시간이 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제 설교가 영향이 간다는 것을 믿고 알기 때문에.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복이라면, 하나님이 정말 우리의 면류관이라면 여러분이 천국이 있다는 것을 실존적으로 믿는다면 그게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두렵습니다. 외톨이가 될 것 같고, 저 사람들과 어울려야 되고, 저 유행을 따라가야지 될 것 같습니다. 되게 외롭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사랑하고 사모했는지 새벽에 눈을 떴다고 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_시편119:174-176 

 

왜 이 말씀을 이렇게 즐거워하고 사랑하게 되냐면. 이 말씀이 나를 구원하는 유일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살 수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다른 것으로는 우리 영혼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는 우리 인생을 올바르게 살 수 없습니다. 에브라임은 앗수르와 모압과 암몬, 애굽의 부유함, 쾌락 그들이 교만함, 오만함, 그들이 즐기는 모든 문화들을 복 삼았고 면류관을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이방나라들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성도 화려하게 짓고 그들과 동맹을 맺고 그들의 문화를 취하고 배우며 살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에브라임은 점차 빛을 잃었습니다. 쇠잔해가는 꽃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브라임 사람들이 뭐라고 이야기를 했냐면. 이사야보고 따져 물었습니다. 우리 지금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우리 봐라. 우리 안에 창고 봐라. 금은보화가 얼마나 많은지.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고 있는지 와서 봐라. 남유다 너희가 와서 나에게 말씀을 전해? 같잖네. 이게 북이스라엘의 태도였어요. 너희들이나 잘 먹고 잘살아. 가난에 빠진 것이 나에게 말씀을 전해? 이사야 보고 이렇게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옷 벗고, 맨발로 다니고 이랬으니 얼마나 같잖을까요. 그게 인간의 어리석음입니다. 심판이 있는 줄도 모르고 내세가 있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우리 인생을 다 셈하고 계신다는 사실도 모르고 악한 일을 그냥 스스럼없이 저지릅니다. 그런데 놀랍게 선지자, 제사장, 목회자들이 그랬습니다. 저는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입성했을 때 하나님의 면류관을 받고 싶고 상급을 받고 싶지. 이 땅에서 잘 되고 이 땅에서 부유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앞으로 저희 교회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그런 것과 구별하고 단절되게 갈 것입니다. 행정적으로도 목회적으로도.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서 얻는 이득을 포기하고 손해 본다고 할지언정 하나님을 복 삼고 하나님을 면류관 삼고 저희 교회는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시 이 면류관을 되찾아야 합니다. 교회가 다시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아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광이시라는 신본주의 신앙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다시 하나님만이 우리의 복이시라는 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시 우리와 함께하시도록 보이지 않는 우리 일상에서 우리 인생 중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동행하신다는 것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 방법이 무엇인가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베이직,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너무 프로그램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릴 만큼. 성도들이 너무 많은 교회 사역들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안 읽고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밥하랴, 청소하랴. 안 하셔도 됩니다. 직원들이 하면 됩니다. 물론 밥하고 청소하면서 은혜 받는 분들도 있지만 사실은 그게 우리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엇을 안 하나요? 하나님을 모릅니다. 실컷 봉사하고 실컷 헌신했는데 하나님을 몰라. 하나님이 그 사람보고 너희가 누구냐. 바리새인보고 그랬습니다. 율법을 얼마나 잘 지켰는데도 너희가 누구냐. 하나님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술 취해 살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자기만족을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바라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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