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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1-12-2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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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6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2부예배)
제 목 선지자 역할의 교회, 구원하려고 하시는 하나님
본 문 이사야 59:1-21

 

 오승주 목사

 

Ⅰ. 하나님의 의도(의지)

 

당시 이 앗수르의 포로가 되기도 하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기도 한 이유를 우리는 우상숭배라고 계속해서 성경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이유는 우상숭배가 맞는 거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성경 전체를 살펴보고 구약 전체를 설교하면서 느끼는 것은 이스라엘이 우상숭배 때문에 앗수르나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만은 아니겠다. 물론 직접적인 원인은 그것이지만 그 뒤에 하나님의 숨겨진 의도, 하나님의 의지가 있겠다 이렇게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뭐에 푹 빠져있었냐면 사실 세상에 빠져있었고 우상에 빠져있었다고 기록은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이 진짜 빠져있는 것은 선민사상이었습니다. 선민사상에 완전히 푹 빠져 있었습니다. 선민사상은 무슨 뜻이냐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민족은 우리야. 이게 선민사상입니다.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은 우리뿐이야. 이게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선민사상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유대인, 쥬시들은 지금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선민사상 때문에 이스라엘이 포로가 된 것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왜냐하면 선민사상은 약간 우월주의 같은 것입니다. 그게 엄청 팽배했었습니다. 그 선민사상이 잘 드러난 성경이 구약의 요나서 같은 것입니다. 요나서의 배경은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앗수르의 포로가 되던 시기입니다. 그래서 앗수르의 수도가 니느웨라는 곳인데 앗수르의 공격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고 이런 시기인데 요나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으로 두 번이나 찾아오셨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니느웨가 죄 때문에 곧 멸망할 것인데 니느웨가 죄 때문에 심판을 받을 건데 요나 선지자 네가 가서 그 심판이 오기 전에 회개하라고 말을 해줘라 이렇게 하나님이 요나에게 찾아오신 것입니다. 첫 번째, 두 번째 찾아오신 것입니다. 요나가 바로 콧방귀를 뀝니다. 하나님 지금 무슨 소리 하시냐고, 의로우신 하나님이 당연히 심판하셔야지. 저들이 우상을 섬기고 저들이 죄악을 섬겼으니까 당연히 심판 받는 게 하나님 아니시냐고 굉장히 신학적으로 하나님께 대변을 합니다. 우리도 가끔 그러잖아요. 전도사들이 가끔 저한테 와서 신학적으로 따질 때가 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어.. 이럴 때가 많습니다. 공부를 조금 더 하고 오지 이럴 때가 많습니다. 감히 하나님께 요나가. 인간이 하나님께. 가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라고 하는데 의로우신 하나님이 어떻게 저들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할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마음속에는 이런 것이 있을 것입니다. 원수의 나라, 앗수르, 우리를 침략하고 우리를 괴롭히고 우리를 포로로 끌고 갔던 원수의 나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가서 말씀을 전하라고? 전도하라고? 얼마나 당황했겠어요? 두 번째 말씀 때는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호와여 당신의 백성을 헤치는 그들에게 어찌 전도 후에 구원을 베푸려 하시나이까? 이렇게 따져 묻습니다. 그 명령을 완전 어깁니다. 그래서 요나 선지자가 재밌습니다. 니느웨 가라고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니느웨로 안 가고 어디로 가죠? 다시스라는 곳으로 갑니다. 니느웨의 정반대. 우리가 대구에 산다 이러면 서울로 가라는 거 부산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다시스는 그냥 땅으로 가는 반대가 아니라 바다, 물을 건너가야 하는 것입니다. 배를 타고 다시스를 향해서 도망치는 것입니다. 아예 반대로, 아예 더 멀리 가는 것입니다. 너무 재밌는 일이 벌어집니다. 거기서 풍랑을 만납니다. 풍랑을 만날 때도 요나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풍랑을 만나서 바다에 빠졌는데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킵니다. 그제서야 요나가 두려운 마음에 하나님 앞에 약간의 회개를 하는데 그 약간의 회개를 하는데 그 물고기 속에서 죽지 않고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 내었는데 니느웨입니다. 얼마나 웃기나요? 하나님이 돌고 돌아서 요나를 니느웨로 미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요나가 완전히 회개되지 않아서 선민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증거가 뭐냐면 니느웨 성에는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 심판이 임할 거라는 이야기를 하려면 최소 3-4일은 걸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나가 어떻게 했죠? 그냥 하루 한 나절, 그냥 대충. 야 하나님 너네 심판하신데, 회개 하려고 하고 마려면 말고 이렇게 하고 거둬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3박 4일 집회를 해야 되는데 너무 싫고 밉고 하기 싫어가지고 그냥 1시간 강의 대충 하고 오는 것처럼. 요나가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 이 회개를 지금 왜 너희한테 말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너희를 심판 하실 건지, 너희가 회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제대로 설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하려면 하고 마려면 말고 대충 던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박 넝쿨 사건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공생애 사역하신 것이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입니다. 읽어보면서 여러분 어떤 것을 느끼시죠? 예수님이 찾아가고 같이 밥 먹고 사역하러 가신 곳은 전부 바리새인, 유대인들이 가지 않은 곳입니다. 유대인들이 더럽고 추악스럽고 깨끗하지 않다고 하는 사마리아 땅에 예수님은 가셨고 남편이 다섯이 되는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셔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 유대인들이 예배드리는 성전에 예배만 드리고 왔다갔다만 했지 그 베데스다 연못 앞에 38년 동안 병자로 있었던 환자에게 유대인들은 가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그 38년 된 병자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성적으로 간음했다고 돌로 죽이려고 했던 그 여인을 보호하셨고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나사로에게 유대인들은 아무도 관심이 없지만 예수님은 그 죽은 나사로에게 찾아가셨습니다. 우리나라 백성들을 등쳐먹어서 돈 벌어먹는다고 했던 세리와 함께 식사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다 상징이 있습니다. 다 유대인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는. 쟤네들은 더럽고 우리는 깨끗해, 쟤네들은 하나님이 저주하셨고 우리는 하나님이 축복하고 계셔라고 생각하는 그런 선민사상과 반대되는 곳으로 예수님은 다 찾아가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아시죠?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 유대인 교회. 초대교회라고 알고 있는 예루살렘 교회. 여러분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놀라운 일이 벌어졌냐면 하루에 3,000명씩 예수님을 믿고 교회로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3,000명이 하루에 예수님 믿고 교회에 돌아오면 우리교회는 난리 납니다. 그렇게 오면 안 됩니다. 좌석이 없습니다. 몇 번 예배를 드려야 하나요? 한 20부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한 주에 새가족이 한 명만 와도 너무 기쁘고 신나고 이러는데 3,000명, 5,000명씩 예루살렘 교회가 얼마나 요즘 말로 말하면 부흥하고 급성장을 했는지. 그런데 그 예루살렘 교회를 하나님이 쓰시지 않고 버렸습니다. 이유는 뭐에요? 예루살렘 교회가 독특한 면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라든지 많은 사도들 중에서 하나님이 문을 여셔서 고넬료와 같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예루살렘 교회에 보고를 했더니 지금으로 말하면 당회 같은 행정조직에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왜 허락 없이 복음을 전했냐는 것입니다. 왜 허락 없이 이방인에게 세례를 베풀었냐는 것입니다. 저는 그 성경을 보면서 선민사상이 엄청나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루살렘 교회를 등지셨습니다. 그리고 선택한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15장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 은혜로 말미암아 이방인을 위해서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일꾼 삼으셨다. 그러니까 바울은 정확히 하나님의 의도를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의도, 하나님의 의지를 안거죠. 여러분 하나님의 의도는 뭐에요? 하나님의 의도는 무신론자, 즉 이방인입니다. 구약, 신약 통틀어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하나님의 의도는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오늘본문 하반 절에 보면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하나님 당신이 열심으로 옷을 입겠다고 하십니다. 겉옷을. 열심의 옷을 입겠다고 하십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계획 세워놓고 가만히 앉아서 계획대로 되나보자, 짜여진 대로 내가 계획 세워 놓은대로 이루어지나 보자 이게 아니고 하나님이 인간 세계에 개입하셔서 일하신다고 하십니다. 열심을 내서. 성경이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일하고 계시는데 그 일하시는 목적이 무엇이냐 이방인인 것입니다. 즉 저와 여러분은 육신적으로 이방인입니다. 우리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때문에. 하나님의 열심 때문에. 우리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국 교회를 보고 저와 여러분을 봤을 때 우리도 어느 순간 선민사상이, 우리도 어느 순간 우월주의가 우리 안에 있지 않나요? 하나님의 의지는 하나님이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 믿지 못하는 무신론자들에게 있다는 사실을 성경은 우리에게 계속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해서 포로로 끌려간 게 아니고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선민사상, 우월감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는 부패함, 고인물이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그것을 확인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1-8절은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치는 장면입니다. 

 

Ⅱ. 선지자 역할의 교회

 

- 선지자의 외침_이사야59:1-8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3. 이는 너희 손이 피에, 너희 손가락이 죄악에 더러워졌으며 너희 입술은 거짓을 말하며 너희 혀는 악독을 냄이라 4. 공의대로 소송하는 자도 없고 진실하게 판결하는 자도 없으며 허망한 것을 의뢰하며 거짓을 말하며 악행을 잉태하여 죄악을 낳으며 5. 독사의 알을 품으며 거미줄을 짜나니 그 알을 먹는 자는 죽을 것이요 그 알이 밟힌즉 터져서 독사가 나올 것이니라 6.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 7.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생각은 악한 생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있으며 8.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이 행하는 곳에는 정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_이사야59:1-8

 

3절. 손가락까지 죄로 더러워졌다고 합니다. 자기들은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죄악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갈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선지자가 외치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왜 포로로 끌려가는지에 대해서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뭐라고 외치냐? 하나님은 너희를 구원하실 분인데 그런데 너희가 왜 구원을 받지 못하냐?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죄악이 너희와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 죄가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고 있다.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지금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외침, 선지자가 지금 외치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가 죄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데 그러니 당장 그 행위에서 그 악한 생각에서 그 파멸의 길에서 나오라는 것입니다. 선지자가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외침이 바로 오늘날 교회가 감당해야 될 사명인 것입니다. 이 외침이. 그런데 왜 이런 선지자적인 외침이 사라졌을까? 무엇 때문일까? 여러분 왜 교회가 선지자적인 위치가 사라졌을까? 외침이 없어졌을까? 선지자적인 외침이 사라진 이유는 놀랍게도 선민사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여러분 잘 들어보세요. 선민사상은 우리를 고인물로 만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생명의 생수를 주셨을 때는 그것을 가지고 품고 간직하고 소유하고 있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흘러 보내라고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물이 콸콸콸 쏟아지는 시냇물에 댐을 만들어서 물을 가두면 어떻게 되죠? 썩습니다. 물이 흘러가지 않으면 물은 썩습니다. 거기에 이끼도 생기고 더러운 오물들도 모이게 됩니다. 그래서 고인물이 되면 나중에 썩게 됩니다. 물이 흘러가지 않으면 100% 썩게 되어 있습니다. 밖으로 흘려보내지 않으면 물은 새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 고인 물에 새 물을 조금 집어넣으면 혼탁함이 약간 묽어지겠지만 그래도 썩은 물이 되는 것입니다. 고여 있으면 새 물이 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게 선민사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데 은혜를 흘려보내지 않으니까 고인물이 된 것입니다. 썩어버린 물들, 고인 물들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새 물을 기대하지 않아서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우상을 찾는 것입니다. 썩은 물은 새 물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오염된 물에는 거기에 적합한 것들이 삽니다. 그렇죠? 이끼가 생기고 더러운 물에 살만한 수중식물들이 삽니다. 깨끗한 물에 사는 식물들은 거기에 살 수가 없습니다. 이 선민사상 때문에 이스라엘이 우상을 결과적으로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왜? 흘려보내지 않으니까 더 이상 하나님의 은혜가 새롭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교회가 선지자적인 외침이 없기 때문에 고인물이 되고 고인물은 전통도 만들어내고 교리도 만들어내고 수많은 교회 안에 온갖 것들을 만들어냈지만 다 썩어버리는 것입니다. 내보내지 않으면.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의도,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그 의지에 교회는 반할 수밖에 없겠죠. 요나 선지자처럼. 이 선지자적인 외침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잠깐 죄악을 자백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게 9-15절입니다. 정말 멋진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 죄악을 자백하는 백성들_이사야59:9-15

 

9.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에 행하므로 10. 우리가 맹인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11.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정의를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12. 이는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언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니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13.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속였으며 우리 하나님을 따르는 데에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낳으니 14. 정의가 뒤로 물리침이 되고 공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나타나지 못하는도다 15.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를 살피시고 그 정의가 없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_이사야59:9-15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백입니다.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는 장면입니다. 선지자의 외침은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말은 선지자의 외침이 밖에 이방인을 살리는 기능을 하지만 밖에 무신론자를 살리는 기능을 하지만 이 외침은 이스라엘 백성을 정화시키는 능력도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새롭게 하는 능력이기도 합니다. 물을 흘려보내야 역설적으로 새 물이 와서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깨끗한 하수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이해가 되십니까? 흘려보내야 우리도 새 물이 오면 우리가 깨끗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새롭게 하는 능력은 우리가 외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교회가 선지자적인 위치에 자리에 가야지만 교회는 깨끗하고 건강한 공동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으려면 우리는 흘려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야 합니다. 제가 고등학생 때 예수님 믿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전도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도를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잖아요. 진짜 용기내서 이야기했습니다. 짝꿍에게. 야 이번 주에 우리 교회 가볼래? 이게 전도였는데 나중에 은혜를 너무 받아서 교회 가자라고 하는 것은 양에 차지 않아서 우리 교회는 어떤 교회이고 또 내 안에 계신 예수님, 내가 예수님 믿어서 어떻게 되었는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스스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뭐가 부끄러웠냐면 내가 수업시간에 수업집중해서 듣지 않고 떠들고 까불었던것들. 그리고 제 성적, 내 말. 교회 다닌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언행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내 이기심, 나밖에 모르는 이기심들. 이런 것들이 제가 제 친구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는 그 순간에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습니다. 아, 이해가시죠? 그래서 나는 이런 부분들을 고쳐야겠구나, 이런 부분들을 바꿔야 되겠구나. 그래서 기도제목이었습니다. 주님, 제 삶이 메시지가 되게 해달라고. 고등학교 때.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어려운 친구들도 도왔고 혹시 억울한 일을 당해도 내 이기심 때문에 표현하지 않았고. 여러분 그런 것들이 우리 안에 새로워지는 이유는 내가 누군가에게 외치는 자리에 가야지만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도 외쳐야 되지만 결과적으로 교회가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가 있으려면 우리는 밖으로 내 보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자백합니다. 여러분 외치는 자가 있어야 죄를 자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가 외쳐주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겠어요. 여러분 어둠만 있는 곳에 빛이 없으면 어둠은 자기들이 어둠인줄 모릅니다. 자기들이 캄캄한 줄 모릅니다. 원래 그런 줄 아니까. 그런데 거기에다 빛을 비추면 우와, 빛이 있었네? 어둠이 빛을 처음 본 것입니다. 저렇게 밝았네. 빛을 비추니까 캄캄했을 때 몰랐었던 더러운 것들이 우리 안에 오물들이. 여러분 집에 가셔서 오늘 밤에 한 번 테스트해보세요. 집에 있는 소파를 다 들어 올려보세요. 거기 안이 얼마나 더러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실 거예요. 캄캄한 곳은 항상 그렇게 고인물처럼 썩고 더러워집니다. 그것을 드러내야 합니다. 무엇으로요? 선지자의 외침으로. 우리는 이런 자백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왜 회개하는 교회여야 되냐? 우리가 밖으로 흘려보낼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을 점검하고 회개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고인물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은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회개하는 거 보셨습니까? 절대 회개를 안 합니다. 왜? 자기들은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자기들은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와 하나님의 마음. 아버지 하나님의 그 선하신 뜻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마치 요나처럼. 끝내 요나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2021년도가 5일 남았습니다. 돌아오는 금요일이 송구영신예배이니까. 보통 사람들은 이 시기에 다 술 먹고 파티하고 지나갑니다. 그걸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리더들의 삶은 이 시기에 항상 한 해를 점검합니다. 내가 일 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우리는 크리스천이잖아요. 신앙생활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잖아요. 우리가 연초에 하나님께 결단하고 하나님이 주신 소망들, 또 크고 작은 목적들을 가지고 신앙생활 했잖아요. 올 한해 우리가 얼마만큼 해냈는지 점검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고 그리고 우리의 부족한 부분들을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또 2022년도에는 어떻게 살아갈까? 우리가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여러분 많은 분들이 신앙생활에는 목적이 없어도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목적이 세상 사람들과 회사와 기업들과 목적이 다를 뿐이지 신앙생활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저는 매년 한 해를 시작하기 전에 올해는 책을 몇 권 읽을까, 기도는 어떻게 할까, 운동은 어떻게 하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기 위해서 내 몸도 건강해야 되는데 나는 2022년도에는 어떤 삶을 살지 이런 계획들을 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목적이 없는 삶은 발전이라는 게 없습니다. 우리가 실수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우리 인간은 실수할 수 있고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와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걸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한 목적들을 가지고 또 소망을 가지고 살아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연말에 환경 때문에, 우리가 그랬나 상황이 그런걸, 코로나 때문에 상황이 그런걸, 환경이 그런 걸, 정치인들이 그런 걸 어떻게 하라고 그냥 술 마시고 지나가면 그 인생은 정말 그렇게 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환경은 똑같이 어렵습니다. 환경이 안 어려운 사람 있나요? 중요한 것은 내 마음가짐 아닌가요. 우리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환경이 어렵다고 해서 우리도 같이 어렵고 환경이 불평한다고 해서 우리도 같이 불평하고. 그건 아니죠. 정치가 그렇고 코로나가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찌하지 못하는 것들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의도가 있고 의지가 있으십니다. 열심히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일에 계획을 가지고 가야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외침. 하나님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자백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언약을 세우시는데 그게 16절부터 나옵니다. 선지자의 외침을 듣고 회개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언약을 세우십니다.

 

- 하나님이 세우신 언약_이사야59:16-21

 

16.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17.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18.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19. 서쪽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두려워하겠고 해 돋는 쪽에서 그의 영광을 두려워할 것은 여호와께서 그 기운에 몰려 급히 흐르는 강물 같이 오실 것임이로다 20.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_이사야59:16-21

16절. 처음부터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우리는 사람이 있었을텐데 라고 생각합니다. 느헤미야도 있고 에스라도 있고 믿음의 사람이 있었는데 이렇게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죠?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가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그리고 뒤에 뭐라고 기록하고 있죠?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공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공의를 갑옷으로 삼으시며 구원을 자기의 머리에 써서 투구로 삼으시며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시며 왜 보복을 속옷으로 삼으셨을까요? 속옷으로 감추신거죠. 열심을 입어 겉옷으로 삼으시고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원수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하나님께서 지금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공의대로.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하나님이 19절에 흐르는 강물처럼 급하게 오신다고 중재자로 이 땅에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공의를 입으시고 의를 입으시고 구원의 투구를 쓰시고 열심히라는 겉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시겠다는데 어디로 오시냐면 시온에 임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시온이 어디인가요? 언약궤가 나온 곳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는 곳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예배이고 교회이고 성전입니다. 시온에 임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두 번째 야곱의 자손 가운데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죄에서 떠나는 사람. 그런 자에게 21절에 보니까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_이사야59:21

 

쉽게 이야기하면 오승주 위에 있는 나의 영, 하나님의 영, 오승주 입에 있는 나의 말. 영과 말. 성령과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말, 그것을 영원토록 네 입과 네 후손의 입과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 떠나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런 일을 누구에게 주시냐면 중재자로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임할 때 시온에 임하고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영과 당신이 우리의 입에 주신 말, 메시지를 후손에 후손에 전달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언약은 뭐에요? 내가 너희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했고 선지자를 통해서. 그리고 너희가 죄를 자백했습니다. 죄는 자백했는데 해결할 사람이 없네. 그래서 내가 그거 해결해주러 갈게. 너희 죄 문제 해결해주러 갈게. 그 분이 바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런데 보세요. 이 구속자 예수님이 누구에게 임하냐? 죄과를 떠난 자에게 임하십니다. 여러분 분명하게 알아야 해요. 여러분 이건 신학적으로도 여러분 개념을 정리하고 계셔야 됩니다. 우리 삶에 죄가 그대로 있는데 예수님은 임하지 않습니다. 물론 로마서에 죄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고 했는데 그것은 다른 표현입니다. 나중에 로마서를 설명할 기회가 있을 거예요. 죄와 거룩하신 하나님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은 같이 계시지 않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계시면 죄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예수님을 모실 때 내적인 갈등이 신앙의 갈등이라는 게 생기는 거예요. 예전처럼 쉽게 술 마시기도 어렵고 거짓말하기도 어렵고. 그런 것을 할 때마다 내가 이기적으로 남을 미워하는 것도 쉽게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랑이시고 용서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신 것에 대해서 잘못된 이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상담을 종종합니다. 주로 저한테 상담을 하러 오면 분명히 문제가 있어서 상담하러 오는데 그 상담의 처음 저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다 자기자랑으로 시작합니다. 저는 그게 되게 웃겼습니다. 일단 자기변호부터 시작합니다. 목사님 사실 제가 예배도 잘 드리고요. 신앙생활도 열심히 했는데요, 제가 하나님 진짜 많이 사랑하고 좋아하는데요. 네. 본론은요? 제가 이럽니다. 본론을 빨리 말해주세요? 본론은 뭐가 잘. 왜 제 삶은 이렇고 저렇고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냐면 예수님을 그 삶에는 모시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 많은 삶에는 예수님을 모시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쾌락이 있고 거기에는 자기만족, 자기 유익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예수님 모시면 그것들을 잃어버릴까봐 모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우리 이런 거 있잖아요? 회사 사장님이 이 회사를 누구에게 물려주고 싶어. 경영수업을 받아. 아들 중이나 누구에게나 물려줄 수 있잖아요? 경영수업을 받아. 네가 이런 이런 절차를 밟아서 오너쉽을 배워야 해. 그냥 물려주면 이 회사를 말아먹고 망하게 할 거니까 이거를 배우기 위해서 밑바닥부터 차근차근 경영수업을 받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너무 신나니깐 네, 알겠습니다 했는데 경영수업을 안 받는 것처럼 그럼 물려줄 수 없습니다. 만약에 물려준다고 하면 회사는 망하게 될 것입니다. 회사를 하나 운영하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똑같습니다. 저는 많은 교역자들이 그런 수업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뭔가를 물려주려고 합니다. 운동을 배워도 그렇습니다. 레슨 선생님이 스승이 제자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고 싶은데 이 제자는 가르쳐주고 싶은 그 기술만 습득하려고 하지 그 기술이 습득되는 삶은 준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르쳐주어도 소용이 없고 가르쳐준다한들 이해도 안 되는.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태권도를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년 해서 한 4년 정도 했습니다. 좀 시골에 살았기 때문에 태권도를 많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학교대표로 군대회가서 메달도 따고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태권도를 좀 오랫동안 4년 가까이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태권도를 하면 처음에 가면 기초만 배웁니다. 발을 찢고, 기본 발차기, 정신교육도 엄청 듣습니다. 지루합니다. 나는 빨리 기술도 배우고 싶은데. 놀라운 사실 알려드릴까요? 그런 기초를 저는 빨리 끝내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태권도 선수할 때도 운동하러 가면 처음 흰 띠였을 때 했던 기초를 계속합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깐 국가대표도 그 기초를 계속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그 기초와 기본이 튼튼해야 기술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사범님이 하는 이야기가 이해 자체가 안 됩니다. 그 기초적인 삶이 갖추어 있지 않으면요. 신앙도 똑같은 것입니다. 죄가 우리 삶에 있으면 예수님이 오신다 한들 이해가 안 됩니다. 왜 오셨는지 회개가 안 되는데요. 예수님 필요가 없다는데요. 예수님이 누구에게 임하는가? 우리가 죄를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삶을 바꿔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아무리 믿어도 바리새인처럼 세상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면 주님은 함께하지 않으십니다. 선민사상에 완전 사로 잡혀가지고 저작거리에서 기도하고 헌금을 하고 아무리 종교생활을 열심히 잘 완벽하게 퍼펙트하게 규모 있게 한다한들 예수님이 왜 죄인과 식사하고 예수님이 왜 사마리아 땅에 가서 남편이 5명이나 되는 여인과 시간을 보내는지 바리새인은 너무 화가 나는 것입니다. 너무 화가 났습니다. 예수님이 왜 38년 된 병자에게 시간을. 우리와 함께 잘 먹고 우리와 함께 왕궁을 이루면 좋겠는데. 저 버러지 같은 이방인들과 같이 밥을 먹는지 바리새인들은 너무너무 화가 나는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교회가 그러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오늘 예수님을 우리가 모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예수님이 내 안에 와계시고 함께 동행 한다는 이 말을 이해 못하면 여러분 구원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인지 이해하고 넘어가셔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예수님 구속자가 임하실 때 우리에게 오실 때 그래서 우리에게 외침이 필요하고 자백,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로마서 15:13-21에 사도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Ⅲ. 구원하려고 하시는 하나님_이사야59:21, 로마서15:13-2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과 세운 나의 언약이 이러하니 곧 네 위에 있는 나의 영과 네 입에 둔 나의 말이 이제부터 영원하도록 네 입에서와 네 후손의 입에서와 네 후손의 후손의 입에서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_이사야59:21

 

13.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 15. 그러나 내가 너희로 다시 생각나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썼노니 16.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 17.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자랑하는 것이 있거니와 18.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하게 하기 위하여 나를 통하여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그 일은 말과 행위로 19. 표적과 기사의 능력으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20.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21. 기록된 바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함과 같으니라_로마서15:13-21

 

13절. 한 단어, 한 단어를 잘 보셔야 합니다. 바울이 소망의 하나님이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으로 충만. 충만이라는 것은 영어로 full,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빈 공간이 없다는 단어가 충만입니다. 물 컵에 물을 부으면 빈 공간이 없습니다.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기쁨과 평강을 우리 마음을 가득 차고 있으면 뭐가 생기냐면 하나님이 소망을 주신다고 합니다. 그 소망이 뭔지 14절부터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4절. 왜 선함이 가득하고 지식이 차고 서로 권하는 자라고 이야기 하냐면 로마교회를 향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그 당시로 말하면 서울에 있는 교회입니다. 서울 사람들이 똑똑하잖아요. 로마가 얼마나 발전했나요. 로마의 문맹, 기술, 문화 최고입니다. 그래서 로마교회 성도들이 스스로 선한 것입니다. 자기 기준으로 선하고 지식이 가득차서 서로 권면할 정도로 목회자도 필요 없고 선지자도 필요 없고, 우리끼리 교회를 잘 세울 수 있어 라고 말하는 뉘앙스입니다. 그런 로마 교회에 사도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하나요?

15-17절. 지금 바울이 뭘 자랑하고 있냐면.

18-19절. 지금 로마교회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요? 말과 행위, 표적과 기사의 능력, 성령의 능력 모든 것이 다 동원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 내 마음에 간절함, 내 열심이 다 포함된 것입니다. 그것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편만이라는 말은 형평성에 맞게, 가는 곳마다. 특별히 어느 한 곳에 복음을 많이 전한 것이 아니고 모두에게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 편만하다는 뜻입니다. 왜 이걸 로마교회에 이야기하고 있어요? 너희가 잘못하면 예루살렘 교회처럼 썩은 물, 고인물이 될까봐 걱정해서 바울이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로마 교회가 스스로 선하고 지혜가 가득하고 우리 교회가 부흥하고 있으니깐 혹 그럴까봐 걱정되어서 쓰는 편지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이걸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하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일에 열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의도와 상관없이 우리가 신앙생활 한다? 있을 수 없습니다. 만왕의 왕이신 주인께서 당신의 의도를 가지고 계시는데 우리는 다른 일을 하고 있다? 여러분 교회가 그렇잖아요. 제가 그래도 이 교회의 리더십이 있으니까 제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런 의도를 가지고 제가 교역자들과 회의를 가지고 소통을 하지만 우리 교역자들이 저의 의도와 다른 일을 하고 있다면 저는 되게 힘들 것입니다. 맞지 않잖아요. 우리도 마치 그런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걸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도바울 입장에서 소망의 하나님인 것입니다. 소망이 뭐냐? 우리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이냐? 차를 바꾸는 거냐? 집을 바꾸는 거냐? 물론 그런 소망도 인간에게 있어야 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소망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이방인들 아무쪼록 한 영혼이라도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서 바울은 내가 비천에도 처할 줄 알고 풍부에도 처할 줄 알고. 나 괜찮다는 것입니다. 내 자존심 따위 필요 없다 이것입니다. 왜 자존심이 필요 없겠어요. 왜 기분이 안 나쁘겠어요. 그런데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이 충만하기 때문에 바울이 나 괜찮아. 나 모든 사람에게 편만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어 라고 간증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로 나는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일꾼이 되어 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척 8년 동안 교회에 참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교회는 우리 성도님들이 많이 오셔가지고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을 하고 있지만 개척 8년 만에 처음으로 제가 그동안은 아무것도 어떤 프로그램이나 어떤 제 의지를 드러낸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2022년부터 무신론자들을 위한 예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 무신론자를 위한 예배를 시작하고 싶어서 예배 스케줄을 다 조정했습니다. 오후예배도 없앴고요. 여러분 이제 오전예배 오셔야 합니다. 오후에는 그 무신론자들을 위한 예배는 무신론자들이 방향입니다. 우리 성도들을 위한 예배이고 그 시도를 우리 청년, 대학생들과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경배하고 찬양하는 것이 예배지만 또 하나는 밖으로 흘려보내는 예배가 있어야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무신론자들이 와서 궁금한 것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교회는 어떤 곳인지. 이런 질문도 못하는 교회 분위기잖아요. 믿어! 그냥 잔말 말고 믿으면 돼. 아니요. 그 예배를 시작하면서 동시에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과 함께 중직자 기도모임을 가지려고 합니다. 이 중직자 기도모임도 처음입니다. 교회 개척하고 처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어른들과. 왜냐하면 이 중직자들이 기도배경과 서포터 없이 무신론자들을 위한 예배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교회는 위로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해야 함과 동시에 우리가 밖으로 흘려보내는 예배. 그래서 저는 비브릿지라든지 우리가 많은 선교라든지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섬기며 왔지만 이제는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섬기면서 왔지만 이제 서울 강남에 수많은 젊은이들,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한 수많은 지식인들을 향해서 교회가 그릇을 준비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초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배 드려야 합니다. 맞아요. 그런데 그 기초에 살이 붙어야 되고 기술이 개발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합니다. 여러분 팀 켈러 목사님이 뉴욕의 리디머 장로교회를 세워 가시는데 수많은 청년들이 교회로 유입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볼 때 좀 아이러니 했습니다. 아니, 교회가 똑바로 제대로 일하는 것도 아닌 거 같고. 또 목사님 설교가 신학자이시기 때문에 재밌거나 청년들이 좋아하는 설교가 아니었습니다. 흔히 말하는 열린 예배를 드린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막 수천 명의 청년들이 팀 켈러 목사님을 열광하고 그 교회로 유입되어서 새로운 삶을 살고 변화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그 청년들이 가 있는 직장마다 성경공부들이 열려지고 이런 일들이 벌어졌는데.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전함과 동시에 예배드림과 동시에 이면에 어른들과 한 것이 무엇이냐면 청년들 창업지원센터를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 목사님이 교회에서 창업지원세터를 만들었습니다. 의미가 있습니다. 무슨 교회에서 창업지원센터를 만드냐?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겠지만 팀 켈러 목사님이 생각한 것입니다. 이 뉴욕에 재능 많은 청년들이 예수님을 믿고 마음껏 비전을 펼쳐 보일 수 있도록 어른들이 펀드를 만들고 우리 청년들이 마음껏 자기 일을 할 수 있도록 서포트 해보자. 그러면서 이 청년들에게 부탁한 것입니다. 너희가 이 지원을 받아서 마음껏 세상에서 너희 재능들을 펼쳐 보이는데 그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이방인, 무신론자를 전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너희가 그런 일들을 할 때 항상 너희의 직장에는 성경공부가 있어야 되고 기도모임이 있어야 되고 너희 삶의 중심에는 예배가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런 청년들을 완전히 살리기 위한. 그 밑에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그 고리타분한 설교, 예배 속에 수많은 청년들이 몰려든 것입니다. 그런 청년들이 지원을 받아서 성장했습니다. 그 성장한 분들이 다시 펀드하고 다시 후배들을 돕고 지금 그런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교회를 개척하고 시티 투 시티라는 운동을 통해서 수많은 개척교회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다 어떤 마음이에요? 그 목회자의 마음. 무신론자를 위한 마음. 그냥 그 마음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가 청년들 창업지원센터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고 그냥 그 하나님의 마음을 목사님이 가진 것입니다. 뉴욕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 청년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멋지게 살 수 있는 청년들인데 왜 이렇게 살고 있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 그래서 그 마음을 어른들에게 이야기하고 사업가들에게 이야기하고 우리 청년들을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앞에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같이 고민하고. 제가 개척을 처음 시작할 때 제 선배, 친구들이 어떤 교회 할 거야 이렇게 많이 물어봤습니다. 또 제가 부교역자로 광주에 있었잖아요. 저희 박성진 목사님이 제가 개척한다고 하니까 2년 뜯어 말리다가 확정이 되어서 간다고 하니까 오목사 어떤 교회 할 거야? 물어보셨습니다. 제가 그 답변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제가 무슨 교회를 할 거라고 대답할 것 같으세요? 제가 거짓 없는 교회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깐 웃으시더라고요. 거짓 없는 교회를 한다고 하니깐 웃으시더라고요. 제가 아마 농담하는 줄 아셨을 거 같습니다. 할 말 없으니깐 그냥 거짓 없는 교회라고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뭐라고 답변해야할지 제 머릿속에 있는 교회를 설명을 못해서 거짓 없는 교회라고 답변을 하긴 했지만 저는 이런 마음이 있습니다. 담임목사는 전도사든 성도든 직원이든 새가족이든 누구든 똑같은 모습으로 주님을 최선을 다해서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일에 거짓이 없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금방 거짓이 생깁니다. 선민사상이 금방 들어옵니다. 나는 목사니까. 금방 생깁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게 오픈되지 않으면. 그 일에 진실함이 없으면 우리 교회는 하나님의 기름 부으심이 예수님이 오실 수가 없겠죠. 예수님이 오시지 않으면 공동체가 무슨 힘이 있을까요? 교회는 부흥하고 사회적으로 좋은 일은 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의도에는 쓰임 받을 수 없겠죠. 진실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일에 우리 모두는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는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달란트, 어떤 사람은 이런 성격. 장점과 단점이 사람마다 다 있습니다. 그 달란트로 그 진실하게 주님을 사랑하는 거짓 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 속에서 주신 달란트로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무엇이면 부족하면 부족한 모습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그리고 채워주고 보살펴주고 아껴줄 수 있는 그런 교회를 원했습니다. 그걸 플랑카드로 써서 붙일 수 없잖아요. 그런 교회는 설명이 어렵잖아요. 그렇다고 거짓 없는 교회 이렇게 쓸 수도 없고요. 저는 그런 교회를 위해서 엄청 노력했습니다. 제 치부를 다 드러내고 싶었고 제 연약함을 여러분에게 다 공개했습니다. 힘들 때 여러분에게 도움도 구했습니다. 저는 목사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성실하게 일하는 목사가 되려고 했습니다. 우리 교역자들 다 알거에요. 금요일에 교회 대청소합니다. 저도 빗자루 들고 밀걸레질도 똑같이 합니다. 가끔 전도사님들이 목사님 설교준비하고 올라가 계세요 우리끼리 할게요 이렇게 할 때가 있지만 거의 대부분 같이 합니다. 왜냐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목사나 전도사나 간사나 똑같습니다. 거기에 일에 크기만 있을 뿐이지 거기에 목사니까 밀걸레 들면 안 돼, 교회는 이런 게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역자들 보면 다른 선배들이 오면 오목사가 너희 이런 거 시키냐? 계속 이야기를 합니다. 전도사님들이 주차도 해주고 차도 끓어주고 하니까 오목사가 너무 빡세게 시키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부탁하는 것이고 또 알아서 합니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는 조금 모습이 부족해보이기는 합니다. 질서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그러나 우리 안에 그 사랑,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고. 이 친구의 장점이 있고 나에게 단점이 있다면 반대로 나에게 장점이 이 친구에게 단점이 있을 수 있잖아요. 교회는 그게 같이 가는 것입니다. 서로 거짓 없이 하나님을 사랑할 때 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도와주려면 도움도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손을 내밀려면 누군가가 내민 손을 잡을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런 진실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가공된 것들에 익숙합니다. 극장식 교회에 열광합니다. 그래서 다 대리만족하는 신앙생활에 길들여져 가고 있습니다. 성탄절 날 큰 뮤지컬하고 앞에서 목사님들이 내가 뭐 이런 은혜를 받았다하면 아멘하고 가지만 저는 그게 너무 안타깝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나에게 오셔야 됩니다. 회개는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모셔야 되는 것이지 목사님이 모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예배드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예배를 잘 드리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내 작은 삶이라도 그렇게 살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일을 했데. 아무 상관없는 것입니다. 주님이 정말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공동체. 스스로 우리가 예수님을 모시면서. 예수님을 모시면 우리는 변화되잖아요. 변화되어져 가는 속에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져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기쁨과 평강이 생기기 때문에, 구속자가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 입에 말이 생기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후대에 후대에 후손에 후손에 까지 그것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놀라운 축복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이런 축복을 받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의도, 마음이 이방인에게 있다. 무신론자에게 있다. 이 의도를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우리는 어떤 신앙생활을 해야 되고 어떤 신앙공동체를 형성해 가야하는지. 그러기 위해 주님이 우리하고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또 그게 가식과 거짓이 아니라 진짜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삶이기를 여러분 축복합니다. 정말 그 일에 애쓰셔야 합니다. 그 일을 노력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왜냐하면 악한 마귀가 그 일을 못하게 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다면 우리는 죄로 가까이 갈 수 없습니다. 죄에서 멀어집니다. 악독에서 멀어지고 흉악에서 멀어지고 음란과 부패에서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선과 가까워지고 예수님은 가난하고 병든 자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가난한 자, 병든 자와 함께하는 곳으로 가까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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