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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2-01-09 주일예배

 

 

2022년 01월 09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하나님의 성실한 보상
본 문 : 이사야 61:1-11

 

 오승주 목사

 

Ⅰ. 우리 인생의 찰나의 순간

 

성경에 복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복은 히브리어로 바라크라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복음 할 때 복과 똑같은 것입니다. 히브리 사람들의 복의 개념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실 것이다 라는 것에 대해서 오해를 할 것 같습니다. 바라크의 단어의 뜻은 생명력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이 아니라 생명력. 이것이 무엇이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존재로 살아가는 모든 생명력을 말합니다. 복은 이런 것입니다. 새가 날아다니도록 하나님이 새를 창조하셨습니다. 새가 하늘을 날아다니는 모든 것. 먹이도 먹는 것, 잠도 자는 것. 이것이 다 생명력인 것입니다. 새의 존재로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모든 것이 생명력이고 그것이 새에게는 복인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이 말하는 복, 바라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모든 것이 복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재물도 복이고, 자녀도 복이고, 교회도 복이고 오래 사는 것도 복이고 모든 것이 다 복인 것입니다. 그런 복에 대한 개념을 히브리인들이 가지고 있는데 그 복이 다 어디에서 왔느냐? 하나님이 창조하신 존재대로 살아야 하니까 하나님과 함께 할 때 그 복이 회복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에게 복은 그 복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 공통어입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복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죽음을 향해서 가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저주입니다. 우리가 똑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만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우리는 생명을 위해서 구원을 위해서 가고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똑같이 살아가는 것 같지만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죄를 지은 인간을 떠나시면서 그 생명력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도 생명력이 어떤 형태로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사람이 부유함, 건강, 자식 많아지는 것, 오래 사는 것. 이런 것을 다 추구하면서 삽니다. 그 생명력이 육신적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 것들은 다 한시적인 생명력인 것입니다. 그건 헛된 복입니다. 그것을 쫒아서 살지만 하나님의 부재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런 한시적인 생명력을 성경에서는 저주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죄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똑같은 부유함인데 한시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그 부유함을 어떻게 얻냐면 남이 가난해지고 내가 부유해지고 내가 성공하기 위해서 남을 짓밟아야 내가 성공 할 수 있고. 이런 구조가 되어 버립니다. 이렇게 세상이 멸망 속에 있다 보니 그런 한시적인 생명력들이 타락한 모양으로 우리 주변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런 것들을 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헷갈리는 것입니다. 돈은 우리 모두 좋아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돈 이야기를 잘 못합니다. 굉장히 더럽고 악하고 이런 이미지가 돈에 있습니다. 그런데 돈 없으면 못 살고 돈을 제일 좋아합니다. 이런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인들은 유대인들은 이 돈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물질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야. 그런데 이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아야 해.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영광 돌리기 위해서 이 물질을 사용하고 잘 사용해야 해. 이 개념이 그들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복이 될 수 있다고 믿었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겠다는 흔들리지 않는 목적들이 인생에 오랫동안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역사가 짧고 연륜이 짧고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하는 하나님의 백성, 기독교인인지 말 할 수 있을까 없을까 판단하는 것은 우리가 빨리 뜨거워졌지만 빨리 식어버렸습니다. 빨리 식어버렸다는 것은 신앙의 전통, 아름다운 관습들이 우리에게 없으며 상황이나 환경에 따라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너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이것을 그들은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을 생명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그것이 구약의 바라크라는 단어의 뜻입니다. 제가 왜 복을 이야기하느냐. 우리의 인생은 찰나의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찰나의 순간. 우리가 굉장히 오래 사는 것 같고 지긋지긋한 인생 같고. 그런데 여러분 다 내일 돌아가신다. 모레 돌아가신다. 그러면 인생 꿈꾸는 것 같을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인생의 과거를 돌아보면 꿈꾼 것 같습니다. 찰나의 순간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죄로 인해 허우적거리고 살다가 금방 그 때를 마주합니다. 원망하고 미워하고 슬퍼하고 혹은 무엇인가로 인해 행복하고 즐거워하고 의기양양하고 희희낙락거리다가 그 때를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에 대한 갈급함을 알지 못한 채 그 때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인생은 찰나의 순간이니까. 그 때는 잠언의 지혜자들이 하는 이야기입니다.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찰나의 순간이 우리의 인생인데 그러면 성경에서 어떻게 살라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냐.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꾸 찾아오셔서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심지어 성경 전체의 주제가 예수 그리스도이고 예수님의 이름이 임마누엘인데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인데 성경은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내가 너와 함께 할 거야. 라는 메시지가 성경입니다.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Ⅱ. 하나님의 성실한 보상

 

- 머리에 기름을 붙다_이사야61:1-2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_이사야61:1-2

 

구약성경 곳곳에 당신의 영, 당신의 기름, 당신이 직접, 혹은 사자를 보내고 천사를 보내어 함께 하시려 하셨습니다.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고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하나님의 의도를 알고 읽어야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나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오셨습니다. 화목케 하려고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유는 중보자로 오셨으니까. 오늘 본문도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기름을 부으셨으니. 다 무엇을 말씀하고 계시나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성령은 신약에 와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믿고 나를 영접하면 너희가 천국에 있을 것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에게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겠다. 기도하고 기다려라. 그러면 성령을 보내 주겠다.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늘 보좌에 계신 예수님과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게 됩니다. 신학적으로 정확히.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믿고 살지만. 요한복음에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계시다고 고백하지만 정확히는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셨다는 의미는 더 이상 우리를 죄의 종노릇하도록 두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셨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주인삼아야 오실 수 있는 것인데 내 안에 죄가 주인 노릇하고 마귀가 주인 노릇하던 우리 인생을 성령이 내 안에 오셨다는 것은 더 이상 마귀와 죄의 종노릇하지 않겠다. 내가 너희를, 택한 나의 자녀를 더 이상 죄와 마귀에게 내어주지 않겠다. 그런 하나님의 의지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죄가 떠나게 되어 있고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런 갈등들이 반드시 있는 것입니다. 죄가 떠나는 과정. 성령에 내 안에 오시는 과정. 치열한 갈등들. 우리 안에 죄가 사라지고 삶이 변화되는데 신앙의 갈등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정말 우리 안에 오시면 자유함의 기쁨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오셔서 성령이 오셔서 내가 죄로부터 자유 해 진다. 자유라는 것은 아무렇게 사는 방종이 아니고 죄와 상관없는 자유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시려고 애굽에 400년 동안 이스라엘을 종노릇하게 하신 것이고 바벨론에 70년 동안 포로생활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자유함을 메시지로 주시기 위해서. 내가 너희에게 마귀의 종노릇하고 있는, 죄의 종노릇하고 있는 너희를 구원하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시는데. 그런 모든 것에서 너희를 자유케 하겠다는 메시지인 것입니다. 구약은 메시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셔서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해지면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그런데 여러분 죄 지어보시면 아시죠. 은밀한 죄를 지어보신 분들은 아시죠. 그것이 얼마나 불안하고 들킬까봐 걱정이 되고. 잠깐의 쾌락이 후회가 되고. 은밀하고 습관적으로 죄를 지으신 분들은 그렇지 않나요 찰나의 쾌락 때문에 죄를 짓는데 죄를 짓고 나면 늘 후회가 몰려옵니다. 그런데 또 짓습니다. 그 쾌락을 잊지 못해서 더 자극적인 죄를, 더 큰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래서 계속 더 하는 것입니다. 죄책감이 처음에 한두 번만 있지 나중에는 죄책감도 없습니다. 불륜 하는 사람들이 한 두 번은 죄책감 시달리고 미안하고 실수라고 하고 그런데 그 것이 계속 반복되어 떳떳합니다. 죄는 그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 죄에서 자유해지면 정말 떳떳해집니다. 정말 그 기쁨은 큽니다.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 기쁨을 경험한 사람은 그 기쁨을 모르는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영이 내게 오신 이유는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1절)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2절) 왜 보복의 날을 선포하는데 위로합니까.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려줘야 하나님의 백성들이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니 이 기쁨을 경험한 사람들은 성령이 임한 사람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진짜 감사하게 고등학교 때에 이 기쁨을 체험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 은혜를 받았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은혜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교회를 다닌지 1년 채 되지 않았고 아직 어린 고등학생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희 교회 청소년이나 초등학교 고학년, 중학생들이 은혜 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제가 받았기 때문에. 저는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은혜를 받으면 다른 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내 사이에 아무도 없습니다. 예배드리러 가는데 교회의 조건이나 상황들이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냥 하나님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너무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이 얼마나 큰지. 학교 가서 전도해야지 라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 마음은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매너리즘에 빠질 때 생기는 것이고 학교 가서 전도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냥 전도하는 것입니다. 너무 좋습니다. 옆의 친구에게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기쁨이 내 안에 있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교회 간지 얼마나 안 되서 복음 전하는 것을 잘 못하니까 그냥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가자. 나중에 복음을 잘 알게 되니까 복음을 설명하게 된 것이고. 전도의 방법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복음 메시지를 잘 전한다고 해서 이 사람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주님을 만나고 너무 기쁨이 커서 그 표현의 방식이 다르지만 하나님은 역사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가는 말이 왜 전도가 아니에요? 예수 믿자는 말 한 마디가 왜 전도가 아니란 말인가요? 복음 메시지를 신학자처럼 정리해서 전해야 하는가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쁨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정말 사랑하고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영혼이 나와 같다고 생각하니까 안타까워서 섬기고 도와주고. 그래서 제 삶도 변화되었습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말해야 하기 때문에 제 삶도 변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주님이 예배 때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기름 부어주시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에는 말주변이 없었습니다. 목사가 된 게 기적입니다. 그때는 얼마나 편지를 많이 썼는지 모릅니다. 제가 그때 막내누나랑 자취했는데 막내누나에게도 편지를 썼습니다. 교회가자고, 예수님 믿자고. 무슨 남자가 편지를 쓰냐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지만. 제가 공고 다녔으니까 반 학생이 다 남학생입니다. 저희 반 아이들에게 다 편지를 쓴 것 같습니다. 매일. 전도하고 싶은데 말을 못하니까 편지를 써서 책에 꽂아 놓으면 친구가 뭐냐고 옵니다. 그렇게 말을 시작했습니다. 

 

  •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살라_이사야61:3-6, 사도행전18:5-11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4.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5.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6.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_이사야61:3-6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제사장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재 대신 화관을 주고 슬픔 대신 기쁨을 주고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주신다고 합니다. 이것이 제사장의 자격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슬픔 대신 기쁨이 생깁니다. 근심 대신 찬송이 나옵니다. 쓸모없이 다 타버린 재 대신 화관, 꽃으로 만든 화관.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당신의 자녀 삼아 주시고 백성 삼아주신 그런 자격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그래서 오래 황폐했던 곳을 다시 쌓고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합니까? 성전 건축하라는 말입니까? 정확히 말하면 맞습니다. 그런데 이 성전이 건물 개념이 아니라 사람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사람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무너진 사람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주저앉은 사람들 다시 일으켜 세우라는 것입니다. 무너진 삶을 어떻게 회복 할 수 있을까? 무너져서 주저앉은, 실패한 인생을 어떻게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김창옥 교수님 강의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저는 종종 듣습니다. 성경도 있고 목사고 말씀의 위로를 받지만 가끔 그 분 강의를 들으면 힘이 나고 위로가 됩니다. 살아온 스토리가 비슷한 면이 있습니다. 공감을 많이 해주십니다. 엄청 위로가 됩니다. 그런 강의를 들은 분들은 다 마음을 살립니다. 그 사람의 능력은 마음을 일으켜 세우는 것 같습니다. 강의일 뿐인데 그 강의가 사람들을 공감하고 배려하고 이해하고.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살리니 사람들이 다 회복하고 일어서는 간증들, 스토리들을 들어보니 능력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다. 집사님이라고 합니다. 사실 마음을 고쳐먹고 일어나면 어떤 사람이라도 다 일어설 수 있습니다. 저는 사람은 마음가짐에 따라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옛 말에 틀린 말이 없습니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 우리의 역사가 그렇습니다. 그 위기 때에, 제가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IMF가 왔을 때 전 국민이 금 모으기 운동을 했습니다. 해외 외신들이 무슨 이런 나라가 있냐. 나라가 빚이 많아서 부도 위기에 놓이니까 사람들이 자기의 금을 내놓았습니다. 이런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나라의 저력 아닙니까. 금을 내서 아니라 그런 따뜻한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서로 비난하고 싸우고. 누구의 일인가요? 마귀의 역사가 아닙니까. 우리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좌절하게 하고 희망을 빼앗아 가고 소망을 뺏어가고. 이것은 마귀의 일입니다. 우리 젊은이들에게서 소망을 가져가는 것이 마귀의 일이지 그게 어찌 하나님의 일입니까? 제가 왜 책을 왜 여러분들에게 추천을 하냐면 부담스럽다는 것을 알지만 읽어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교회들을 어떻게 세워 가시고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을 통해서 부흥하게 하시는지. 이런 환경 속에서 이런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시는 것들을 제가 책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책을 보면서 나도 일어나야겠다. 나도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되겠구나. 나도 교호에 와서 예배당에 와서 엎드려 기도해야겠구나. 이 목사님도 기도해서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어려움과 고비들을 넘어서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았는데 나도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고 싶구나. 이런 마음들이 책을 보면서 들었습니다. 이런 것을 보지 않으면 내 삶, 내 환경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금방 주저앉고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환경을 쳐다보면 낙심 할 것이 투성이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온 국민이 어지럽고 힘든 기사를 보고 있으면 낙심 할 것이 투성이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믿음의 책을 보면서 희망을 찾고 소망을 찾고 엎드려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시는 소망이 무엇인지. 그래서 신앙이 연약한 분들은 자기에게 좋지 않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해 주시는 분들을 만나지 마세요. 그런 의미에서는 친구도 잘 사귀어야 합니다. 좋은 사람, 믿음 있는 사람, 소망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하세요. 부정적이고 너 같은 사람은 안 돼. 이런 사람을 멀리 하세요. 우리가 신앙이 자라서 그런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교제를 해야 할 수 있지만 우리의 신앙이 죽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의 영혼과 마음이 주저앉으면 안 됩니다. 죄가 우리를 그렇게 만듭니다. 그렇게 사람들을 살리는 사람, 여호와의 제사장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봉사자라.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하나님의 편에서 우리를 세웠고 그들은 이방인들은 가난하고 병든 자들은 당신은 하나님의 봉사자구나 라고 본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보고 제사장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제사장으로 세웠지만 밖에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봉사자로 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고통당하는 자들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여 그들에게 기쁨이 회복된다면 그들의 삶이 회복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간다면 그것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제사장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영을 부어주시고 우리 머리에 기름을 부어주신다는 것입니다.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_사도행전18:5-11

 

바울이 실라와 디모데 동역자입니다. 팀이 구성되어 엄청 담대하게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오히려 바울을 대적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옷을 털면서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지어다. 나는 너희에게 복음을 전했다 하고 이방인에게 가기로 한 것입니다. 이방인에게 갔는데 이방인에게 간 곳이 고린도라는 성입니다 고린도는 항구도시로 엄청 음란하고 영적으로 지저분한 도시였습니다. 거기에 누가 있냐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디도 유스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집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갔는데 그 집은 마침 회당 옆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모여서 성경 읽고 기도하는 회당 옆에 그 집에 회당장이 와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것도 혼자 믿은 것이 아니라 온 집안이 와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니 이 소식이 다 펴졌습니다. 수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밤에 환상 중에 바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서 두려워하지 말고 복음을 전해라. 이 성 중에 백성이 많다고 하셨냐면 바울이 가진 두려움이 뭐냐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믿었어요? 회당장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안 그대로 자기를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지 않고는 밥도 먹지 않는 사람들이 쫒아 다니는 판에 회당장이 유대인의 대장이 예수님을 믿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때부터 걱정이 되는 것입니다. 뭐라고 예화를 들게 없을 정도입니다. 옆에 불교 주지스님이 가스펠교회 오셔서 예수님 믿는 그런 것입니다. 안 그래도 핍박하는데. 그런 것으로 비교가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상황은. 바울이 살짝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지켜줄게. 함께 할게. 너를 대적하는 자 너를 해하지 못하게 해줄게. 네가 할 일은 이 성에 내 백성이 많기 때문에 복음을 담대히 전해. 그래서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가르쳤습니다. 디도 유스도라는 집에서 말입니다. 그것이 나중에 고린도 교회가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 예비 되어 있어도 말해주는 사람이 없고 말씀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맞죠? 갈급한 사람이 우리 주변에 있는데 예수님을 소개해 주지 않으면 예수님을 못 믿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누군가를 통해서 예수님을 전하게 하시겠지만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라는 것이 있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이 있지만 우리의 입장에서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배우고 은혜를 받아서 우리가 교회를 세우고 신앙을 세우고 가정을 세워서 뭐하려는 것인가. 자랑하려고? 우리 예수님 믿었더니 잘 살고 있잖아. 우리 예수님 믿고 평안하고 남들 보기에 화목해 보이잖아. 아닙니다. 그러면 고인 물이 되는 것입니다. 썩은 물이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제사장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 전해야 합니다. 복음 전하는 일에 우리의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복음 전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세우는 것입니다. 올림픽의 메달을 따기 위해서 영광을 얻기 위해서 4년 동안 입에 단내가 나도록 훈련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왜 거룩하게 만들어야 하고 왜 교회를 세워야 하며 우리의 삶이 왜 변화해야 하는지. 복음 전하기 위해서. 그 목적은 뚜렷합니다.  교회가 작년과 재작년에 코로나로 어려웠습니다. 어렵다는 표현이 조금 이상하지만. 사실 어렵지 않았습니다. 전 개인적으로 진짜 은혜의 때였습니다. 코로나가 우리의 은혜를 가로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물론 표면적으로 어려웠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이 저에게 그런 마음을 많이 주셨습니다. 기도 할 때마다. 사실 저를 아시는 분들은 오승주라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지식, 배경, 살아왔던 신앙의 경험들로는 제가 제일 기도하는 것. 하나님 제 수준으로 제 경험으로 목회하지 않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그래서 클로리라는 청년 예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무신론자들을 위한 예배입니다. 지난  주에 청년예배의 이름이 정해졌습니다. 35개 공모가 왔고 그 날 예배를 참석한 분들이 투표해서 이름을 정했습니다. 클로리는 close와 re의 합성어입니다. 오늘 오후 예배 때 이름을 저의 새가족 청년이 지어서 설명한 것인데.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가 단절이 되었는데 re, 다시 가까워지다. 하나님과 다시 가까워지다 라는 의미의 클로리. 발음은 글로리라고 비슷합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같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영광입니다. 복음 전하는 길로 이 예배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우리 주변의 무신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고. 여기에 오늘부터 중직자 기도회가 시작이 됩니다. 많은 분들이 중직자 기도회라고 하면 가서 중직자들이 기도하는 모임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개념으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이 중직자 기도회도 청년들의 클로리처럼 플랫폼입니다. 우리 장로님, 권사님들이 여기에서 기도하고 청년들이 와서 기도 부탁하고 중직자 기도회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이웃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고 후대를 키울 수 있는 오너쉽이 있는 공동체를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 뜨거운 기도가 있고 부족하지만 연약하지만 할 수 없는 상황들이지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믿음의 도전을 해보고 싶습니다. 기도제목입니다. 제 친구 중에 오재경 목사님이 있는데 포항의 충진교회에 작년 초에 담임으로 갔습니다. 제가 그 친구 교회에서 장로님, 권사님들이 어떤 사역을 하시는지 물어봤더니 장로님, 권사님들이 소수는 교회 행정을 하고, 교사도 하고, 성가대도 하고 그런 일들을 하지만 오랫동안 그 교회의 전통 중에 하나가 남전도회, 여전도회가 하는 것이 이웃의 가난한 자와 고아원 이런 곳을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하여 봉사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정말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독거노인들에게 물품을 사서 전달한다던지. 한 달에 한 번씩 그런 봉사활동들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으로 남전도회, 여전도회 이름으로 우리로 말하면 중직자 기도회 이름으로 사역들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에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이 교회가 정말 좋은 일을 한다고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는 사람들은 대다수 그런 이미지를 가지고 예수님 믿으러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엄청 보람됩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가난한 자를 찾아가고 병든 자를 위로해주고 손잡고 복음 전하고 기도해주는 사역은.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부터 그런 사역은 없어지고 고차원적인 전도만 하려고 합니다. 굉장히 수준 높은 전도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심방 가셨습니다. 늘 병든 자와 식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전략을 짜셨나요? 이 지역에 가서 이렇게 전도해야지. 아닙니다. 그냥 가셨습니다. 그냥 가서 손 한 번 잡아 주신 것입니다. 가서 위로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니 계획이 있으셨겠지만 표면적으로 볼 때 발걸음 닿는 대로. 그의 발걸음은 늘 병자들을 향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 진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목적이라면 우리의 삶은 가치 있고 아름다워질 것입니다. 그것을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 찰나의 인생이 끝나버릴 것입니다. 큰 무언가를 해야지, 대단한 것을 해야지. 그러다가 찰나의 순간이 지나 갈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세요. 지금 여러분 주변을 돌아보세요.

 

- 복음을 전하는 것에 하나님의 성실한 ‘보상’_이사야61:7-9

 

7. 너희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그들의 땅에서 갑절이나 얻고 영원한 기쁨이 있으리라 8. 무릇 나 여호와는 정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라 9. 그들의 자손을 뭇 나라 가운데에, 그들의 후손을 만민 가운데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_이사야61:7-9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보상을 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은 인과응보와 다릅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산다면 하나님은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몫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심지어 이 복이 자녀와 후손에게 전달되어서 사람들이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이런 보상이 누구에게 주어지냐면 복음을 진짜 전하는 사람에게. 왜 이런 복이 우리에게 없죠? 복음을 진짜 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봉사자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며 눈물로 기도하며 용기를 내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의 삶을 준비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여호와께 복 받은 자이라.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이렇게 축복하신다고 합니다. 저는 이 복을 믿습니다. 수치 대신에 보상을 배로 주신다고 합니다. 이 말은 수치도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수치를 안 당하고 복음을 전할 수 있나요?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면서 능욕을 안 당하고 전할 수 있나요? 그런 리스크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나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세력이 있고 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면서 당하는 수치심이 반드시 있습니다. 오늘 바울이 그랬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했는데 그들이 대적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복음 전하다가 얼마나 능욕을 당하셨나요. 그런데 보상이 있다고 합니다. 그것을 갚아 주시겠다고 합니다. 저는 그것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진짜 복음 전하기 위한 공부, 기도, 가정, 목회. 우리의 모든 삶들이 다 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는 일 때문에 배가 되는 것입니다. 가치가 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워지고 멋져지고 심지어 우리의 단점도 아름다워지고 우리의 연약함도 하나님은 사용하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우리가 천국에 입성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금을 주신다고 합니다. 직접 하나님이 친히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신다고 합니다. 이 땅에 살면서 예수님을 믿으면서 복음 전하면서 당했던 우리의 수치, 복음 전하다가 당하는 굴욕감. 다 직접 하나님이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우리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시고 수고했다 나의 아들, 수고했다 나의 종. 위로해 주신다고 합니다. 그 보상을 기대하고 신앙생활을 하셔야 합니다. 그 보상 없이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주님이 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정말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까. 정말 복음을 전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에 보상을 해주십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엄청 위대한 삶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에는 엄청 고귀하고 값진 인생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복음을 전하는 삶이 하나님 편에서 볼 때 얼마나 귀할까요? 우리가 그냥 내 친구들, 가족들, 그릇된 삶을 사는 것도 공부 좀 해. 바르게 살아. 그렇게 인도하는 일만 해도 멋진 일입니다. 그런데 그들을 믿음의 삶을 살도록 주위에서 건짐 받아서 하나님과 화목해서 천국가게 만드는 복음 전하는 삶이 얼마나 가치 있겠습니까. 그 영혼들이 천국에 갔을 때 얼마나 우리에게 고맙겠어요. 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Ⅲ. 구원의 옷으로, 공의의 겉옷으로 단장하라_이사야61:10-11

 

10.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을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을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11.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_이사야61:10-11

 

그러면 복음 전하는 삶을 위해서 우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하나님이 무엇을 준비해주셨는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사장의 모습으로 3가지를 축복하시고 요구하시는 것인데. 첫 번째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라고 합니다.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일까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나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즐거워하라는 것이 은혜입니다. 은혜 받으라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제사장의 존재의 이유는 은혜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바울의 가치관은 은혜였습니다. 제가 우리의 삶과 유대인의 삶을 비교하려고 자꾸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역사, 하나님 백성의 삶을 우리에게 모범으로 주셨기 때문에 유대인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시편의 저자들이 늘 새벽에 깨어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은혜를 구하는 장면들이 계속 나옵니다. 다윗이 언제 하나님 앞에 가서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고 은혜를 받았는지 아시나요? 새벽에. 왜 새벽이냐면 다윗이 새벽마다 하나님을 바라보았나보다. 이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큰 강대국의 왕이었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큰 나라의 대통령이었단 말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대통령이나 기업 총수나 그런 사업들을 해보시고 한 조직의 리더를 해보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얼마나 바쁘다는 것을. 아마 분 단위로 스케줄을 짜서 움직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성공자는 여유가 더 많을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책임이 많을수록 더 분주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잠도 얼마 못 주무실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냥 대통령도 아니고 전쟁해야 하고 백성들 관리해야 하고 재판까지 했습니다. 다윗이 하루하루가 진짜 바빴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광야에서 주님을 만났던 은혜를 잊지 못합니다. 그 광야에서 송이 꿀보다 단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했던 순간들,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오셔서 죄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는 자유 함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새벽에. 기록에 의하면 새벽 3시, 4시에 매일 하나님 앞에 엎드려 주의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했던 다윗. 그것은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고 묵상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은혜를 자기 인생의 0순위로. 그 말은 환경이 기도할 시간이 없다. 은혜 받을 시간이 없다. 그 핑계가 통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너무 바빠. 너무 분주해. 목사님, 제가 얼마나 투 잡, 쓰리 잡을 뛰면서 얼마나 바쁜지 아시나요? 기도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은혜 받을 시간이 어디 있어요? 라고 말하시면 그것은 하나님이 떠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버리신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금 유대인들을 볼까요? 유대인들 세계적인 기업가들, 세계적인 대학교수, 금융인들, 법학자들 전부 유대인들입니다. 얼마나 하루 일과가 바쁜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성경을 읽고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매일같이 묵상 할 수 있냐. 유대인들은 시나고개라는 회당을 자기 지역에 만듭니다. 왜냐하면 교회까지 갈 시간이 없으니까 자기 지역에 사는 유대인들끼리 돈을 모아서 회당을 만들어놓고 작은 기도처를 만들어 놓고 두루마리 성경들을 비치해놓습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에 회당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점심시간에 밥 먹고 커피 마시면서 상사들 욕하고 정치 이야기하다가 한 시간이 다 갑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전문가들이 회사 근처 회당을 만들어놓고 점심 때 회당에 가서 성경을 읽고 있습니다. 평생을 읽었는데 또 읽고 있습니다. 다 알고 다 외웠을텐데 또 읽고 있습니다. 그러면 점심은 어떻게 먹느냐. 회당 입구에 조그마한 빵 같은 것, 우리로 말하면 삼각 김밥 같은 것을 비치해 놓은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밥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에게 밥은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성대하게 합니다. 굉장히 식사 자리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했을 때 우리가 진짜 기도할 시간이 없나. 성경 읽을 시간이 없나. 여러분, 은혜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는 안 됩니다. 목사님이 하루에 3장만 성경을 읽으면 된다고 했어. 그래서 어떤 분들은 하루 3장 읽고 덮어버리십니다. 나는 은혜를 더 받아야해. 나는 영적으로 더 어려워. 힘들어. 그러면 10장도 읽고 20장도 읽으셔야 합니다. 왜 어떤 틀에 박혀 버리냐는 것입니다. 은혜는 틀에 박히면 안 됩니다. 내가 진짜 은혜 받고 싶은데 1부 예배 한 번 참석하고 남들 가니까 나도 가야지가 아니라 정말 은혜를 더 받고 싶고 말씀이 무슨 말인지 한 마디라도 더 듣고 싶으면 1부 예배도 드리고 2부 예배도 드리고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목사님도 찾아가고. 장로님도 찾아가서 오늘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알려주세요. 그것이 정상 아닌가요? 은혜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남들과 비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 사람이 이렇게 받으니까 나도 이렇게 받아야지 가 아닙니다. 여러분, 부부 관계를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옆집 와이프가 남편한테 이렇게 해주니까 너도 나한테 이렇게 해줘, 이런 것인가요? 아닙니다. 사랑하니까 내 수준으로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는 것이지. 남과 비교하는 것은 부부관계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 내 수준으로 사랑하는 거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제사장이 가져야 할 자세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에게 구원의 옷을 입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 옷은 평상복입니다. 우리가 평상시에 입고 다니는 옷. 뭘 뜻하죠? 우리의 삶을 뜻합니다. 구원이 삶이 되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삶이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에서도 다 구원의 옷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복음 전하라는 것입니다. 복음 전하라는 표현보다 더 강력한 것이 구원이 삶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메시지를 말로 하는 것보다 정확한 것은 누가 보던지 보지 않던지 늘 구원의 감사와 감격으로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내 안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삶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공의의 겉옷을 더하신다고 합니다. 겉옷은 외투입니다. 외투가 공의라는 것입니다. 우리 외투에 대해서 배웠죠? 구약의 외투는 신분을 뜻합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 보니 예수님은 우리의 외투가 되어 주신다고 합니다. 공의가 되어 주신다고 합니다. 공의가 외투라는 것입니다. 공의는 무엇인가요? 공의라는 단어를 법, 형평성으로 이해가 되지만 성경에서 공의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얻고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가난한 자를 섬기는 것. 그것이 성경적 공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명령하십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밭에서 곡식을 다 따지 말고 고아와 과부들을 위해서 남겨놓으라고. 그것이 공의입니다. 공의는 사랑입니다. 그것을 법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 공의의 옷을 제사장들에게 입혀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공의의 옷이 없으면 외투를 벗으면 우리의 삶은 복음인 것입니다. 옷 속의 우리의 마음은 은혜인 것입니다. 이것이 제사장 인 것입니다. 지금 이것을 정확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자의 삶은 아름답고 정의로우며 지혜롭고 사랑스러워야 합니다. 그 옷을 입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니 매력 있는 삶, 멋진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매력은 주님이 우리의 겉 옷이 되시고 공의가 되시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공의롭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하나님과 함께 하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기 때문에 인간이 공의로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직분이 아닙니다. 목사, 사회적 지위, 신앙연륜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공의로우신데 그 분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삶이 하나님의 발걸음으로 하나님의 마음으로 공의를 베풀면서 사는 삶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11절에 땅이 싹을 낸다고 합니다.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 같이 주 여호와께서 공의와 찬송을 모든 나라 앞에 솟아나게 하시리라_이사야61:11

 

상상해 보세요. 황폐한 땅에 황무지 땅에 싹이 난다고 합니다. 누구 때문에? 제사장 때문에. 저와 여러분 때문에. 세상이 악합니다. 정치든 경제든 갑갑합니다. 압니다. 그것이 원래 세상입니다. 그 세상은 백 년 전에도 천 년 전에도 그랬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세상은 갑갑하고 어려웠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 세상을 비난하고 비판하고 낙심하고 사는 건가요? 아니요. 시대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제사장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봉사자로 사는 것입니다. 싹이 틔우도록. 황폐하고 무너진 곳을 일으켜 세우도록. 무너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일으켜 세우도록 복된 소식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걸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일어날 때마다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우리에게 부어주세요. 우리에게 기름 부어 주세요. 성령이 우리 안에 와주세요. 그런 마음이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고 복음을 전하고 싶고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살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내 자녀, 내 가정, 내 교회가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연약하니까. 그래서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 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저는 2022년도에 우리가 정말 은혜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은혜 받는 일에 주저하지 마시고 은혜 받는 일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시고 하나님께 은혜 받는 일에 삶을 조정하시고 은혜가 없으면 우리의 찰나의 인생이 후회뿐이 없을 것입니다. 금방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구원을 받고 싶지 않습니다. 너 뭐하다가 왔어? 이럴까봐 두렵습니다.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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