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08월 28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 |
제 목 : | 교회를 위한 질서와 바른 신앙생활 |
본 문 : | 고린도전서 14:26-40 |
오승주 목사
- 성도 여러분, 어떻게 예배 드려야 할까요?_고린도전서14:26-32
26.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27.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28.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_고린도전서14:26-32
오늘 말씀을 여러분이 그냥 읽었을 때는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렇게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26절에 사도 바울이 뭐라고 시작하냐면 형제들아 어찌할까. 새번역에는 형제들아 우리의 예배를 어떻게 할까 이런 고민,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할까, 형제들아 어찌할까 이렇게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그 뒤에 이야기를 하냐면 너희가 모일 때 각각 찬송시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고 계시도 있고 방언도 있고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이 다 덕을 예배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각각 찬송시도 있고 말씀도 있고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이 다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조금 개념 정리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예배하는 곳이죠. 교회의 본질은 예배죠. 예배는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변화 받아서 그 삶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고 세상에 그 영광을 드러내어 많은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걸려있어야 합니다. 교회에 예배가 상실이 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상실이 되면 세상에 빛 노릇을 할 수 없고 세상에 소금 노릇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죄인들이 어디로 가야하는지 모르게 됩니다. 교회는 예배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곳에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하나님의 영광이 거기에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 예배다.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되죠?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머물러 계실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예배의 기본이고 본질이겠죠. 예배는 인간을 즐겁게 하고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이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서 인간이 변화되어서 드리는 게 예배죠.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쇼를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 예배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이렇게 예배를 드리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거기에 순종해서 예배를 드리면 됩니다. 오늘 아침 중보기도 시간에 묵상을 했죠. 하나님 보좌의 기초가 뭐라고 이야기를 했냐면 의와 공평이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좌의 기초가 의와 공평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죠? 하나님이 머물러 계시는 곳은 의와 공평 위에 머물러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무 곳에나 머물러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사람이 변화되어서 드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된 삶이 예배입니다. 그 삶을 드리기 때문에. 또 예배하면서 변화될 수도 있겠죠. 예배가 변화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합니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진리를 알아야 우리가 완전히 자유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자유를 많은 값싼 구원론자들은 방종으로 오해를 합니다. 복음 알면 마음대로 살아도 돼. 사이비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아니죠. 그 자유가 아닙니다. 진리를 진짜 알고 나니까 내가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거룩해져야 하는 거구나, 하나님을 예배해야 되는 거구나. 그게 진정한 자유죠. 하나님을 알고 나면 변화되어서 제자리를 찾는 것, 창조질서를 회복하는 것 그게 진정한 자유입니다. 제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나니까 뭐가 딱 생기냐면 책임감이 생겼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더 열심히 사역해야 되겠네. 그리고 아이가 없을 때는 제가 마음대로 돌아다녔습니다. 집에도 잘 안 들어가고.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니까 집에도 일찍 가고 아이와 같이 시간을 보내려고 일도 더 열심히 노력하고. 비혼주의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결혼 하지 마, 네 자유가 다 없어져. 결혼해서 아이 낳지마, 네 자유가 다 없어져. 그게 진정한 자유인가요? 그건 자유가 아니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아빠의 역할을 하는 것이 자유이고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자유입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자유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죄에서 벗어나서 죄와 싸우고 죽기까지 피 흘려 싸우고 진리를 지키는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도 바울이 어찌할까? 우리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할까? 이런 질문을 하고 있을 때 이런 고민들, 배경들을 가지고 이해를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예배가 무엇 때문에 어그러지고 무엇 때문에 불협화음이 생기냐? 사도 바울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론적으로 서론에 먼저 이야기를 하자나면 실력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실력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 그러니까 무대가 있으면 무대 위에 공연하는 사람들이 공연을 합니다. 뮤지컬을 한다, 연극을 한다, 영화배우들이 영화를 찍는다, 무대 위에 가수들이 올라가서 일을 한다. 그러면 무대 위에 공연하는 예술가들이 연습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올라서면 그 무대는 망치는 무대가 되겠죠. 그래서 예술가들이 무대 위에서 공연하고 나면 나 오늘 진짜 공연 잘했어 이렇게 말 안하죠. 성공한 무대를 뭐라고 표현하고 내려오죠? 무대 진짜 좋았어. 우리가 호흡이 진짜 잘 맞았어.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실력 있는 예술가나 뮤지션들이 항상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무대가 너무 좋았어. 그러니까 무대라는 것은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누구 한 사람이 연습을 하지 않고 실수가 있으면 무대는 좋지 않고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불협화음이 거기서 나오는 것입니다. 실력 없는 사람들이 목소리 때문에. 그래서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와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가스펠교회가 주일날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예배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고 하나님이 정말 임재하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려면 우리 일주일 동안의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무대를 오르기 위해 연습하는 삶. 그런데 그런 것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고 교회를 이루기 때문에 불협화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어려운 이야기 일 수 있지만 오늘 이 본문은 정말 저희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진짜 중요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반드시 깨달아야 되고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지금 많은 성도들이 주일예배, 금요예배, 수요예배, 이런 수많은 예배들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공예배라고 하죠? 이런 예배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전부 다 끝내려고 합니다. 위험하죠. 그러니까 우리의 신앙은 인생과 상관이 있을 수 없고 어떤 성장이나 성숙이나 변화나 거룩함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예배로 끝내버리기 때문에. 주일날 교회 가는 것으로 신앙을 끝내버리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예수님 믿는 것이 우리 인생과 상관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이 거룩해지거나 경건해지거나 성숙해지거나 변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예배로 끝내버리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보면 알죠? 주일에 드리는 예배 그것이 우리 삶에 영향을 주려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정말 그 말씀을 살아내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 그런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이 예배를 장악합니다. 교회를 장악합니다. 그러면 교회의 질서가 무너질 수밖에 없겠죠. 불협화음이 생기고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지 않게 되고 하나님이 떠나시기도 하고 촛대를 옮기시기도 하고. 그런 교회는 세상에 전혀 빛이 될 수 없고 소금이 될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가 없는 타락한 종교가 될 수밖에 없겠죠. 질서가 무너진다? 이 질서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죠? 우리가 이야기하는 목사, 부목사 질서 지켜 이건가요? 과연 이게 질서일까요? 당연히 우리는 지체이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 교회는 찬송시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고 예언도 있고 방언도 있고 통역함도 있고 이런 각자 자기 자리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각자 자기의 역할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서 그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로 인해서 예배가 무너지는 거죠.
- 교회를 위한 질서_고린도전서14:33-35
33.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34.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35.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_고린도전서14:33-35
오늘 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여자의 인권을 무시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 때문에 여자 목사도 안 주고 안수도 안 주고 이런 교단들이 있는데 해석하기에 따라 조금 다르겠지만 저는 오늘 본문은 창조 질서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교회 질서는 창조 질서를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질서가 있어야 파격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대가 있어야 예술이 있는 것입니다. 제작자가 있어야 무비스타도 있는 것입니다. 맞죠? 공장이 있어야 소비자들이 찾는 물건도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사도 바울이 여자는 잠잠해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죠? 여자는 교회에서 절대 말하지 말고 물어볼 거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에게 물어봐 이런 식으로 아주 강력한 이야기를 하고 있죠? 마치 고린도교회 여자들이 문제를 일으킨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디모데전서 2장 8절에서 15절에 비슷한 이야기를 디모데에게도 하고 있습니다.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_디모데전서2:8-15
이게 여자의 속박, 억울함, 압박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무대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여자가 열등하다 이게 아닙니다. 우리의 기본과 질서 위에 있어라 이런 메시지를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사도 바울은 남자들에게도 이야기를 합니다. 제발 싸우지 말고 분노하지 말고 다투지 말고 너희들이 실제로 해야 될 일을 해라.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으면서 무엇을 해야 되는지 바르게 알고 그것에 시간을 투자하고 제대로 신앙생활해라 이야기합니다. 여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가 교회에서 말하지 말고 너희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행해라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신약 그 당시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이 제한된 입장이 훨씬 많이 있습니다. 아이도 낳고 아이도 주로 키웁니다. 어쩌면 가장 억압된 자리에 있는 모습이 여자의 모습입니다. 물론 요즘은 아니지만 그 당시는 정말 심했습니다. 같이 남자와 예배도 드리지 못한 시절입니다. 사도 바울 시대에도. 그래서 여자가 예배 드리는 공간이 따로 있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교회를 무엇으로 상징하죠? 여자로 상징합니다. 가장 억압되어 있고 제한되어 있는 게 교회입니다. 세상에서.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세상과 다른 입장, 세상과 다른 삶. 지금 그런 말씀을 여자를 빗대어서 우리에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기도 낳아야 되고. 그래서 해산함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십니다. 교회보고 하시는 이야기입니다. 쓸데없는 이야기하지 말고 쓸데없이 다투거나 술 먹거나 이런 거 하지 말고 남자답게 똑바로 신앙생활하고 여자들은 조용히 정숙함으로 거룩함으로 사랑과 거룩함과 믿음으로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해산함입니다. 해산함은 생명을 잉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인인 우리는 무대를 바꾸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배우가 무대가 마음에 안 든다고 무대 바꿔주세요, 나 조건 바꿔주세요, 나 환경 바꿔주세요. 그러면 좋은 배우가 아니죠. 갑질하는 배우라고 하죠. 스탭들 마음에 안 들어. 그런데 진짜 좋은 배우는 무대, 조건, 환경이 아니라 자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배우가 좋은 배우죠. 무대를 바꾸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는 것입니다. 연습하고 싶지도 않고 내가 이 작품을 사랑하고 이 작품을 표현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나만 빛났으면 좋겠고 나만 잘 됐으면 좋겠고 나만 스타가 되면 좋겠고. 그런 배우들은 오래가지 못하죠.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여자들이 그 모든 일을 다 해내고, 그러니까 질서를 지키고 성숙하여 무대를 만들어서 예술을 하나님의 일을 펼치라는 것입니다. 교회 보고 너희가 질서를 지키고 거룩함으로 사랑으로 믿음으로 해산함으로 인해서 구원을 이루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무대를 다 주셨습니다. 무대가 다릅니다. 오승주 목사의 무대가 다르고 여러분의 무대가 다릅니다. 우리는 무대를 바꾸고 싶어 하는데 무대가 쉽게 바뀝니까? 저도 그런 상상을 해봤습니다. 나도 부자 집에 태어났으면 어땠을까, 나도 우리 부모님이 금 수저, 다이아몬드 수저였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이 왜 안 들겠어요. 살면서 힘들 때마다. 그게 아니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대를 주셨고 인생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자기 작품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가장 위대한 작품은 자기 작품입니다. 남의 작품이 아무리 위대해도 내 작품이 아니잖아요. 자기 작품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가장 설명을 잘 한 것이 고린도후서에 나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5-10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_고린도후서4:5-10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여러분의 삶에 예수의 생명을 담는 것, 하나님의 빛이 여러분 마음에 비치는 것.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느낍니다. 세상이 매일 이길 거 같고 우리는 매일 질 거 같고. 이게 여성성이잖아요. 제가 여자는 아니어서 오늘 본문을 해석하는데 여자에 관련된 책도 보고 여성에 관련된 심리학 책도 들여다보고. 이해를 해보려고. 다행히 제가 누나가 6명이거든요. 어렸을 때 공기하고 놀고 고무줄 놀이하고 놀고. 생긴 것은 남성이지만 제 안에 여성성이 굉장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해가 조금은 되는 거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거 같기도 하고. 여자들은 남편을 섬겨야 하는 자리에 있잖아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제약이 있잖아요. 일단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는 것부터 내 마음대로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생명이 탄생합니다. 여러분 생명이 남자에게서 탄생합니까? 아닙니다. 여자에게서 탄생합니다. 생명을 만들어냅니다. 교회입니다. 완전 교회입니다.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생명을 탄생시키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래서 내가 정말 성경적으로 살면, 내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목적성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이제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소망, 소명, 사명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지금 교회들이 사명이라는 단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습니다. 플랑카드 걸어놓고 우리가 뭐 하자 이런 게 사명이라고 생각하는데 사명은 내가 성경적으로 살았을 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거룩해졌을 때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창조하신 목적성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명은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명은 목회자들이 우리 교회 이런 교회 됩시다 이렇게 집어넣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정말 예수를 만나고 거룩해졌을 때 내 안에 진짜 뜨겁게 생겨나는 은혜죠. 그래서 그 일에 올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에 내 인생을 투자하고 그 일을 섬기고. 신앙은 자기 인생에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 올인하는 것입니다. 마치 여자들이 해산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엄마들이 다 올인하잖아요. 자기 인생 다 포기하고 아이에게 올인하잖아요. 그렇게 꾸미고 다니는 여자들도 아이 낳을 때는 막 먹고 건강하게 낳으려고 화장도 안 하고 긴 머리도 자르고. 다 포기하더라고요. 그 어떤 엄마도 아이들을 위해서 다 포기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그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뭘 해야 하나? 실력을 갖춰야 합니다. 보통 실력이라고 하면 주인공이 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실력, 이 실력을 성경에서는 영성이라고 많이 표현을 하는데 우리의 믿음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그것은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대 위에서 여러 배우들이 여러 배역을 맡아 최선을 다할 때 참 좋은 공연이었어, 감동이었어, 좋은 무대였어 그렇잖아요. 그런 것처럼 내 역할을 잘 해내는 것이 실력입니다. 저는 착한 사람들도 많이 만나봤습니다. 그런데 착한데 실력 없으면 꼴보기 싫습니다. 미치고 환장합니다. 진짜 착한데 실력 없으면 얄밉습니다. 꼴보기 싫습니다. 말만 하고 행동이 없으면 정말 같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말만 많은 사라들, 말만 내세우는 사람들, 행동이 없는 사람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정말 공동체 안에서 어려움을 많이 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은 영성, 믿음은 삶이 동반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동반되는 동반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실력을 요구하냐? 이렇게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실력을 요구하죠? 복음을 전파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자랑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막 자랑하는데 받아들이는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럼 우리는 실력이 없는 것입니다. 그게 공해이고 소음이다. 한국교회가 소음이다. 한국교회가 공해다. 그러면 실력이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끼리 건물 짓고 우리끼리 많은 이야기를 해도 세상이 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은 막연하게 피상적으로 기도만 하지 마시고. 사실 기도만 해도 됩니다. 그런데 기도도 하지 않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꿈과 소망이 우리의 믿음이 실제가 아니면 기도를 할 수가 없고 원망, 불평, 매일 무대 바꿔 달라, 무대 바꿔 달라 그런 투정만 부리기 때문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지금 현실주의자가 없습니다. 현실주의자를 학문적으로 이야기하면 지성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지성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머리가 비어 있습니다. 아는 것 없고 가슴만 뜨겁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죠? 문제가 생기는 거죠.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한국교회에 스며들고 있는 값싼 구원론자들이나 신사도주의나 이런 부류들은, 자유주의 신학들은 한국교회를 전부 반지성주의로 만들어놨습니다. 감정적이고 기분 내키는대로 하고. 반지성주의가 얼마나 무섭냐면 진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명이 중요하지, 우리가 복음 전하는 게 중요하지, 지금 진리를 지키고 율법이 중요하냐, 교리가 중요하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막 부흥하고 역사를 일으키는데 나중에 다 무너집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가죠? 다 사이비로 갑니다. 여러분 진리가 없는데 어떻게 구원이 있을 수 있나요? 율법이 없는데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있을 수 있냐는 말입니다. 공의가 없는데 사랑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반지성주의를 너무나도 많이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은 교회 안의 가르침, 그러니까 교리나 교의나 신학들을 다 무시합니다. 신학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당장 자기들이 무언가를 해야 되고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여러분 역사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구속사의 주인공은 예수 그리스도지 교회나 목사나 혹은 성도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인공이 되려고 하다보니까 많은 이단들, 사이비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음 세대도 없고 또 부모 세대도 인정하지 않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냉정하게 무엇인지, 교회는 무엇을 해야 되는지,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그 무대 위에서 역할을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다하는 복음주의자들을 잘 살펴보면 활동을 잘 하지 않습니다. 전부 말만 많습니다. 뒤에서. 교회가 이렇다 저렇다 하면서 그 일을 바꾸려고 개혁하려고 올바르게 가려고 헌신하지 않는 것입니다. 전부다 뒤에서 교회는 이렇고 목사는 이렇고 교회는 저렇고. 얼마다 말이 많은지. 그러나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그게 믿음 좋다는 복음주의자들. 위험합니다. 잘못 믿고 있으면서도 신앙이 좋은 줄 착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지금 오늘 고린도교회 모습은 딱 그런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뭐냐면 바른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 바른 신앙생활_고린도전서14:36-40, 시편42:1-11
36.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또는 너희에게만 임한 것이냐 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은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하는 이 글이 주의 명령인 줄 알라 38. 만일 누구든지 알지 못하면 그는 알지 못한 자니라 39. 그런즉 내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사모하며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 40.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있게 하라_고린도전서14:36-40
바른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똑바로. 올바르게. 여러분 올바르게 신앙생활 한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말씀대로, 율법대로. 하나님이 주신대로 예배드리라는 거예요. 우리 뜻대로 우리가 변형시켜서 우리 시대에 맞게, 우리 마음대로 예수 믿지 말고 말씀대로 하나님이 드리라고 한 대로, 하나님이 허락하신대로 하나님이 이렇게 하라고 정해주신대로 예배드리고 그렇게 신앙생활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바르게 해야 됩니다. 그게 진리죠. 그게 율법입니다. 그게 복음입니다. 그것을 벗어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교회 이야기도 있겠지만 개인 신앙생활 이야기도 할 수 있겠죠. 제가 교회를 오래 다니지 않았지만 여러 교회를 가서 강의를 하고 또 섬기고 이렇게 하다보면 교회 안에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막 성령충만합니다. 진짜 성령충만한지 모르겠는데 본인이 성령충만하다니까. 전도도 하고 교회에서 막 일하다가 왜 나를 알아주지 않아요? 그런 분들의 끝은 대다수가 그렇더라고요. 왜 나를 알아주지 않아요? 왜 목사님은 나를 알아주지 않아요? 왜 나를 이번에 장로에서 탈락시켰어요? 특히 여자들. 삐져가지고. 과연 그게 성령충만이었을까?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죠? 그런 분들 대다수가 뜨거웠던 신앙이 확 식어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교회도 다니지 않습니다. 저는 진짜 많이 봤습니다. 신앙을 교리로 진리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막 감정이 뜨거워가지고. 그런 분들이 교회 물의를 많이 일으킵니다. 내 제자니, 내 메시지만 들어야 되니, 내 이야기만 들어야 되니, 나만 성령충만하니. 여러분 교회 안에 그런 무리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들은 특별한 모임이니. 특별한 존재이니. 그러면 다른 성도들은 특별하지 않나요? 맞나요? 하나님은 우리를 연습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에게 무대를 주셨기 때문에. 그 무대에 서서 공연할 수 있도록 연습을 시키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번 생은 망했어 이런 말하잖아요. 요즘 젊은이들이 자주 입 밖에 내는 게 이번 생은 망했어, 그러면 다음 생이 있나요? 어찌 그게 그리스도인의 입에서 나올 말입니까? 다윗이 그랬습니까? 바울이 그랬습니까? 핍박 속에서 죽을 것 같은 환경 속에서 감옥 속에서 바울이 이번 생은 망했어,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이번 생은 망했어,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멋지게 쓰임 받았어야 하는데 내가 왜 감옥에 있어, 이번 생은 망했어 이랬나요? 다윗이 광야에서 이번 생은 망했어, 내가 지금 미친 놈처럼 살아야 되고 배고프고 저 사람들에게 오해받고 수모 당하고 이번 생은 망했어 다윗이 그랬나요? 그런 열등감에 빠져서 이상한 말이나 하고 다니는 고린도교회 여자들.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여자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열등감에 빠져가지고 그런 환경과 상황에 빠져가지고 불평이나 원망이나 하는 그런 교회가 되지 말고 자기 자리를 찾아서 원래의 것을 찾아서 연습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실 때를 위해서. 준비하고 있으라는 거예요. 신앙은 그런 연습들이 쌓여서 실력이 되는 거고. 그 실력이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고 걸려 있는 무대가 되는 것이고 공연이 되는 것입니다. 오목사님 그래도 이왕 하는 목회 좀 사람들이 알아주게 번들어지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 인생이 구속사에, 하나님이 이뤄가시는 구속사에 쓰임 받을 수 있다면. 우리 다음 세대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신앙생활을 하는 일에 가스펠교회가 쓰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는 거죠. 시편 42편을 보실까요? 시편 42편은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말씀이죠.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제가 1-4절만 읽어볼까요.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 3. 사람들이 종일 내게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오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감사의 소리를 내며 그들을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_시편42:1-5
여러분 그냥 시편만 읽으면 무슨 내용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 열심히 하라는 말인지, 낙심하지 말고 예수님 잘 믿으라는 말인지. 그 말이 아닙니다. 고라 자손이 어떤 자손입니까? 고라 자손은 모세에게 반역할 때. 그러니까 모세의 사촌이 고라입니다. 고라가 광야에서 르우벤의 자손인 다단, 아비람, 온과 무리를 짓고 어떻게 했죠? 모세에게 완전히 반역을 했습니다. 그게 250명입니다. 250명을 동원해서 모세의 지도권에 도전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하나님이 땅을 가르셔서 그 250명을 완전히 매장시키셔서 죽이셨습니다. 민수기 16장, 26장에 나옵니다. 그래서 산 채로 땅에 묻혀서 하나님이 죽인 민족이 고라 자손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했던 죄입니다. 평생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이스라엘이 고라 자손을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손가락질 했겠죠. 너네 조상은 이러면서, 모세에게 반역한 조상이라고, 하나님이 땅을 갈라지게 해서 불태워 죽인 저주 받은 민족이고. 그런 고라 자손 중 고라의 세 아들이 죽지 않았는데 살아남아서 뭐했죠? 한 명은 성전 문지기가 되었고 한 명은 찬송하는 자가 되었고 한 명은 성전에서 빵을 굽는 요리사가 되었습니다. 얼마나 그 조상의 죄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뒤집으려고 어떻게 신앙생활했는지 그게 지금 시편 42편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막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찾았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찬송하고 성가대에서 성전 문지기 하고 빵 굽는 요리사를 했는데 사람들이 그 사람들하고 같이 어울렸을까요? 그런데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자기 민족의 평가를 뒤바꿀려고 얼마나 하나님을 섬겼는지. 그 고라자손의 시편이 42편, 44편에서 49편, 84편에서 85편, 87-88편, 한 두 편이 아닙니다. 그 말은 무슨 말이에요? 고라 자손들을 축복하셨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선지자 사무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시인 헤만, 고라자손들이 역대상 6장 33절에서 38절에 나와 있습니다. 엄청 중요한 것입니다. 얼마나 연습을 해서 자기 자리에서 얼마나 다시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되찾으려고 얼마나 하나님께 그 신앙을 다시 회복하려고 노력했는지 나와 있는게 오늘 시편 42편의 고라 자손들입니다. 저주 받은 민족이, 손가락질 당한 민족이, 어쩌면 끝났다고 했던 족속이. 하나님께 다시 돌아와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은 저와 여러분의 인생 아닌가요? 우리가 원래부터 신앙생활 잘 했던 사람들인가요? 원래부터 우리가 복음을 알고, 원래부터 우리가 교만하고 오만할 정도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셨던 사람들인가요? 우리 다 죄인 아니었나요? 신앙의 회복, 교회의 회복. 쉽지 않겠죠. 그런데 우리는 그 길을 가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신앙생활만이 우리가 다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고 바른 신앙만이 우리가 다시 하나님 나라에 복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뭐해야 되냐? 오늘 시편 42편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 사도 바울이 멋있는 말을 했죠? 품위 있고 질서를 지키라고 이야기 합니다. 품위 있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덕이 되게 하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여러 편 설교하고 싶을 정도로 묵상이 깊이 됩니다. 품위 있고 질서 있다는 말이 무슨 말일까? 여러분 우리의 예배를 생각해보세요. 예배 구성원들을 생각해보시고.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예배인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인지. 우리가 성가대를 만들고 뛰어난 찬양팀을 세우고 남들 보기에 멋진 뮤지션을 세워서 목소리를 가지고 예배를 드린다 한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삶이 아니라면 계속해서 거짓말을 하고 죄를 짓고 세상 신을 쫓고 있다면 그 예배는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것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을 평가하지 않으신다니까요. 그래서 오래 걸려도 더디 가더라도 올바른 길로 가야 되고 하나하나 우리의 신앙을 말씀으로 점검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맞는지 분별하면서 가야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 우리 생에 끝나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우리 생에 끝나지 않습니다. 제가 죽는다고 가스펠교회가 끝나거나 제가 죽고 한빈이 윤빈이 신앙생활 안 하면 될까요? 끔찍한 일이잖아요. 그러기 때문에 올바르게 정직하게 진실 되게 가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래서 현혹되지 마세요. 유튜브에 인기 있는 목사들이 사역하고 설교하는데 전부 다 신사도주의라든지, 값싼 구원론자들이 대다수 그런 분들입니다. 이단보다 그런 분들이 더 위험합니다. 이단은 이단이라고 우리가 알기라도 하지. 그래서 제가 교회 이름도 밝히고 하잖아요. 그런 교회들은 위험한 교회들입니다. 목사의 설교가 아주 잘못 되었습니다. 제가 설교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전혀 성경적이지가 않습니다. 그렇게 신앙을 가르쳐버리면 이 생이 끝나는 것입니다. 마치 신천지 같더라고요. 집 팔고, 직장 때려치고 와서 헌신해라. 그게 맞는 설교입니까? 성경이 그렇게 우리에게 신앙을 가르칩니까? 집에서 밥도 하지 말고 애도 낳지 말고 가정교육도 하지 말고 교회 와서 일만 해라. 그게 신앙입니까? 여러분 그것은 신앙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세대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리를, 우리의 무대를 찾아가서 거기서 연습하고 갈고 닦아서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고 우리 이웃에게 정말 내 안에 계신 예수를 기쁨과 감사함으로 전할 수 있는 실력을 우리는 갖춰야 합니다.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모여서 드리는 예배. 이 예배가 능력이 있고 힘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 말씀사경회 때 저희 청년 한 분이 저한테 오더니 목사님은 왜 방이 따로 없냐고 했습니다. 보통 수련회 가면 목회자 방이 따로 있으니까. 저한테 설교 준비하는데 안 힘드셨냐고 물어봤습니다. 저희 방에 14명이 잤습니다. 앉을 때가 없었습니다. 저는 차에서 옷을 갈아입고 씻는 것은 1층 화장실에서 씻고. 둘째날은 텐트에서 한빈이랑 자고 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제 머리 보셨죠. 머리도 안 감아서 머리가 떠 있는 상태에서 설교하고 그랬는데. 내추럴했죠. 저도 강단에 설 때는 목사지만 수련회이기 때문에 한빈이, 윤빈이를 말씀 준비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양육하고 돌봐야하죠. 물론 주변에서 아이들 돌보는 것을 도와줘서 설교 준비하는 것을 더 성실하게 했지만. 제 역할을 해야 되는 거잖아요. 성도들을 섬기고 또 장로님들이 고기도 구워주시고 섬기는 모습 보니까 되게 좋더라고요. 그게 맞아요. 새신자들을 양육하고. 돌보고. 교회는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서 인격이 변화되어야 교회는 진짜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가 성장하는 것이 일 번 일까요? 아닙니다. 교회는 진리가 일 번입니다. 진리가 무너지면 성장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사조들이 뭔가요? 그 진리가 필요 없다는 것이고 율법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만 하면 되지.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주인공이 되어서 해야 될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서 교리, 성경공부, 가르침, 찬송, 예배규범, 예배모범 다 무시하잖아요. 성도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예배를 만듭니다.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좋아하는 것을 제공해줄까 하면서 설교를 합니다. 주제설교를. 훈계도 없고, 교훈도 없고 회개도 없는 교회들. 여러분 지금 성경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아시겠죠? 여자여 입을 다물라 이 말이 아니라 우리의 할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할 일을 하고 우리의 해야 될 일을 하고 그 속에서 뭐하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영광이 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머물러 있는. 그리스도인의 품위와 질서가 무엇일까요? 그게 우리의 실력이고 영성입니다. 실력이 뭐에요?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내 안에 모시고 사는 삶입니다. 그게 실력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들의 실력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은 엄청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내 삶에 머물러 있게 한다는 것은. 그래서 보좌의 기초가 뭐라고요? 의와 공평함이에요.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은 우리가 거룩할 때 함께하시는 거잖아요. 그 삶을 부단히 노력하고 연습해야 됩니다. 예수님을 몸에 짊어지고 사는 삶. 그 때 뭐한다고요? 해산함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잖아요. 해산함으로. 생명은 그 때 탄생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진짜 우리가 저 불신자 예수 믿게 하고 싶은데. 사실 저 사람을 정말 사랑해서 예수 믿게 하고 싶으면 전도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 그 사람이 죽을 때까지나 내가 죽을 때까지 계속 그 사람을 섬기겠죠. 그런데 요즘 전도는 어떻죠? 메시지해보고 튕긴다? 아 하나님 계획 아닌가봐? 그것은 전도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전도입니까. 그게 무슨 사랑입니까. 전도는 포기가 없어야 합니다. 그래서 전도는 내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완전히 변화되는 것입니다. 내가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고라 자손이 오늘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을 다시 자기들 삶에 회복시키는 것, 다시 예배를 회복하기 위해서, 떠났던 하나님의 영광을 되 찾아오기 위해서 오늘 고라 자손 내가 주님을 찾기에 갈급합니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습니다. 우리보고 사람들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고 조롱하지만 그래도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송하겠습니다. 여러분 그 역사가 뒤바뀐 것이 얼마나 오랜 세월이 걸렸을까요. 우리 그거 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 역사를 뒤바꿔야 되는 것이 교회가 회복하는 것이고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게 예배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뒤바꿔야 됩니다. 교회를 떠난 청년들이 다시 교회로 돌아오고. 다시 불신자들이 진짜 교회는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곳이야,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은 달라 이것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시 고라 자손처럼 하나님을 찾아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으로 진리로 다시 가르침을 받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인격이 빚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는 거 그게 신앙생활이다. 바른 신앙생활. 그것은 교회의 질서가 자연스럽게 회복이 되겠죠. 여러분 우리 모두가 다 바른 신앙생활을 한다면 교회는 당연히 공동체는 질서가 회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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