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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2-11-27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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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27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우리가 받은 위로
본 문 : 고린도후서 7:1-16

 

 오승주 목사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_고린도후서7:1-3

 

오늘 말씀은 역사 같은 것입니다. 바울과 디도가 만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들, 교훈들을 찾아봐야 할 거 같습니다. 우리가 받은 위로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뭐라고 권면을 하나요?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지금 사도 바울이 우리의 영혼만 깨끗하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은 하나님의 자녀에게 끊임없이 요청을 반복하는 장면 중 하나입니다. 그게 뭐냐면 거룩한 삶으로 자꾸 우리를 요청을 하고 있고 초대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하나님이 거룩한 삶 안에 참 많은 것을 두셨다는 것입니다. 많은 축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부담이 됩니다. 우리는 거룩이라는 단어 듣기도 싫고 거룩한 삶, 경건 이런 단어가 너무 불편하고 이러지만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해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라는 것입니다. 거룩한 삶으로 계속 초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쓰인 더러운 것은 헬라어로 몰뤼스모스 라는 단어입니다. 제가 헬라어를 인용할 때는 단어의 의미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몰뤼스모스라는 더러운 것은 종교적 의미의 더러움을 뜻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궁창의 더러움, 화장실의 더러움이 아니라 종교적 의미의 더러움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우상숭배와 같은, 이교도 신을 섬기는 그 하나의 사건, 우상숭배 하는 하나의 사건, 그 사건으로 우리 몸과 영혼이 더러워질 수 있다, 영향을 받을 수 있다 라는 의미의 단어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일날 예배를 드림으로써 우리 일주일동안 삶의 하나님의 보호하심, 인도하심의 영향이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우리가 우상을 섬기는 그 찰나의 순간이 우리 몸과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교도 제사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고린도교회에 권면을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엄청난 성도들의 헌신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버리지 못한 것 중에 하나가 이교도 제사였습니다. 그러니까 우상숭배입니다. 그 말은 신앙의 대상을 온전히 하나님으로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녔지만 고린도교회 성도였지만 고린도교회 안에서 분파도 이루고 파벌 싸움도 하고 정치적인 관여도 하고 다 했지만 그들의 삶에 이교도 제사가 있었다는 말은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의 대상으로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더러운 것에서 너희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라는 이 말은 몰뤼스모스 라는 이 단어는 그 이교도 제사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이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데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냥 깨끗하게 살아 이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영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 육신과 영혼은 영향을 받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그냥 너희가 거룩하게 살아, 깨끗하게 살아 이 메시지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열매 맺는 삶으로, 하나님이 축복하신 삶으로 이끌어 가고 계시는데 우리가 이교도 제사를 끊임없이 우리 삶 속에서 드리고 있다면 우리가 몸과 마음에 그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거룩한 삶으로 갈 수 없습니다. 그냥 너희가 하나님의 백성이니까, 교회 다니니까 깨끗하게 살아야지. 장로, 권사, 목사니까 좀 깨끗하게 살아야 하는 거 아니야?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가 2절에 있습니다. 2절에 뭐라고 기록합니까?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종교적 의미의 성결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또 온전히 섬기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을 성결이라고 합니다. 제가 종교적이라는 단어를 붙이는데 우리가 헷갈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결, 거룩, 깨끗함을 이 세상의 도덕법을 가지고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신호를 잘 지켰다 이런 걸로.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훨씬 초월하는 의미입니다. 세상 법을 초월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두렵고 떨림으로 섬기는 성결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지금 바울이 우리를 영접하라고 하는데 이 우리는 바울 일행을 뜻하겠죠? 그러나 성경 전체에서 보면 하나님 말씀을, 주의 복음을, 십자가의 복음을 전해주고자 하는 모든 선지자, 제사장, 혹은 교회 목회자, 평신도를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고린도 성도들은 이교도 제사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영접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그걸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거기서 벗어나서 육과 영에서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는 말은 너희가 이 말을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말씀에 하나님이 너희 마음을 두드리고 계시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을 영접했으면 좋겠어. 하나님의 말씀을, 주의 복음을 받아들였으면 좋겠어. 우리를 받아들였으면 좋겠어 이런 의미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마음에 있어서.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2절 하반 절에 보니까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지금 바울이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에 대해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복음을 살아냈지 않냐. 내가 너희에게 전한 이 복음을 나는 진실하게 전하고 싶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서 3절에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율법의 말씀을 전할 때 성도들을 정죄하려고 전하는 게 아니잖아요. 우리의 연약함을 다 아니까. 그런데 뭐라고 이야기 하나요?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바울의 신앙은 죽고 사는 신앙입니다.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사는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신앙이기 때문에. 그래서 거룩한 삶으로의 초대가 너희를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에 우리의 신앙,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너희 마음에도 가지고 함께 죽고 함께 살고자 함이라. 이것이 뭐예요? 교회, 신앙 공동체의 핵심적 사명입니다. 주님이 요한복음에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너희가 내게 붙어있으면. 이게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입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곳은 이 사명이 본질이 되는 곳입니다. 이게 핵심적인 신앙공동체의 사명입니다. 바울은 아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해준 이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너희 마음에 영접, 너희가 받아들여서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신앙생활 같이 하기를 원한다 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교회가 부단히 회복하며 가야할 사명이며 길입니다. 이것을 두고 사도 바울은 서로 돕고 섬기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양육하고 섬기고 발을 씻어주고. 이 모든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이것 때문인 것입니다. 얼마나 애써야 할지 모를 만큼 가난한 이웃을 돕고 병든 자를 섬기고 그들을 우리 마음에 영접하는 일들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마음에 영접하고 있었습니다. 마음에 담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현실적으로 이런 일이 쉽습니까?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우리 마음에 다른 게 채워져 있으면 이교도 제사를 드리고 있으면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혹시 다른 쪽에 신앙의 대상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사역들은 하찮은 사역이 되고 우리가 성도들,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은혜를 나눌 수 있는 사역들은 나와 상관없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에게는 교회가 귀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가 지금 많이 생각이 드는 것은 교회를 개척해서 정말 한참을 청년들과 한 부모 가정 자녀들을 찾아다니고. 기억이 납니다. 학용품도 사고. 가서 보니까 아이들 집이 너무 더러워서 청소도 해주고. 쌀도 사서 가져다주고. 아이들과 같이 양화진 선교사 묘역도 가고 축구 경기도 보러가고. 또 아이들 학업을 도와주려고 대학생들이 가서 학업도 도와주고. 이런 사역들이 개척초기에 진짜 많았습니다. 고아원에 가서 우리가 사역도 같이 하고. 그런데 지금 그런 게 다 희미해지고 사라지고. 코로나의 영향이 컸습니다. 그런데 그때 진짜 행복했습니다. 청년들과 그런 사역을 할 때. 그리고 우리가 중국, 네팔에 가서 봉사하고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다시 회복하길 원합니다. 권사님 가정에 가서 같이 기도모임을 하고 은혜를 나누고. 이런 시간들이 개척초기에 있었는데. 저도 어느 순간에 편리해진 것입니다. 심방도 줄고 사역도 줄고. 그런 봉사활동도 줄고. 안 해도 되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회개의 편지를 전하고 그 회신을 듣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게도냐에서 디도를 만나게 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 때문에 늘 괴로움 속에 있었습니다. 그게 나쁜 괴로움이 아니라 고린도교회가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성도들이 마음에 있었기 때문에 그게 늘 괴로웠던 것입니다. 저들이 변화되었으면 좋겠는데. 저들이 회개했으면 좋겠는데. 이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늘 괴로워서 디도를 보내고 디도의 편지를 받지 못하고 마게도냐로 건너 간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소식을 들고 있는 디도. 디도는 이미 한참 전부터 고린도교회 소식을 들고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정확한 날짜가 나오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몇 달이라고 합시다. 그 몇 달은 바울이 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을 한 것입니다. 요즘처럼 핸드폰이 있었거나 메일이 있었으면 연락을 했을 텐데. 직접 만나야 되는 시대니까. 여러분 그런 시대적인 상황들을 충분히 고려해야 성경 말씀이 은혜가 됩니다. 왜 디도를 만나서 그렇게 기쁠까? 왜 디도를 만나서 의문이 풀렸을까? 당연합니다. 디도가 모든 소식을 다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디도가 보고 들은 것 이전의 상태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괴로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변화되지 않았던, 여전히 이교도를 섬겼던 고린도교회. 여전히 분쟁과 분열을 가지고 있는 고린도교회. 그리고 드디어 디도를 만나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회개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게도냐에서 만난 위로_고린도후서7:4-11, 사도행전16:6-15, 18:1-11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육체가 편하지 못하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했다고 합니다. 밖으로는 다툼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이교도들과 이념과 사상과 싸웠습니다. 안으로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목회에 대한 두려움. 성도들에 대한 두려움. 우리가 하나님, 신앙에 대한 두려움들. 저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경에서 넘버원 전도자 하면 바울이잖아요. 그런데 바울도 밖으로 다툼이 있었고 안으로 두려움이 있었구나. 우리 모두가 다 그렇잖아요. 환난이 있었습니다. 육체가 편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위로를 받은 것은 회개한 성도들 때문입니다. 

 

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디도가 이미 고린도교회를 방문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회개한 모습을 보고 디도가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그 위로가 뭐에요?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이제는 완전히 성령으로 말미암아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런 환난, 핍박, 밖으로 다투고 안으로 두려운 것에 대한 모든 피로가 사라질 정도로 기쁨을 얻고 위로를 얻었던 바울. 그러니까  하나님은 회개한 성도들로 인해서 기쁨을 얻으십니다. 여기서는 바울이 그런 표현을 쓰지만 사실 성경을 기록한 분은 하나님이시잖아요. 하나님 마음이 지금 사람들을 통해서 표현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뭐가 기쁘시냐? 회개한 성도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이 고린도교회가 세워진 역사를 보면 독특합니다. 사도행전 16장 6절에서부터 보면 뭐라고 기록하고 있죠?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11. 우리가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12.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13.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는데 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15.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_사도행전 16:6-15

 

바울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성령이 가로막습니다.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하니까 사도 바울이 여러 곳을 갔습니다. 이곳도 가고 저곳도 가고 그런데 계속해서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간 곳이 드로아입니다. 드로아에서 뭘 보죠? 그곳에서 환상을 봅니다. 하나님이 사도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십니다. 그 환상이 뭐였어요? 마게도냐에서 오라고 손짓하는 것입니다. 와서 복음 전해달라고. 그것을 우리가 드로아의 밤이다 이야기를 합니다. 기도회를 할 때 드로아의 밤 기도회를 하잖아요. 그래서 그러는 것입니다. 마게도냐에서 오라고 손짓을 해서 복음을 전해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바울은 마게도냐로 가려고 엄청 애를 씁니다. 마게도냐가 가기 쉽지 않았나봐요. 지리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엄청나게 노력해서 마게도냐에 갔는데 거기는 로마의 식민지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중 첫 성이 마게도냐입니다. 거기에 도착해서 누구를 만나죠? 루디아를 만납니다. 옷감 장사하는 루디아. 여자가 사업가였습니다. 그러니까 거기가 로마입니다. 유대 지역에서는 여자가 사업할 수 없습니다. 로마라는 증거입니다. 로마의 식민지라는 증거입니다. 루디아라는 여자를 만나 그 여자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온 가족이 세례를 받고 사도 바울이 거기에 머물면서 뭐가 세워지죠? 매일 같이 말씀을 듣고 양육 받아서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시스템과 행정이 아닙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을 전하고 그래서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아서 초대에는 교회가 그렇게 세워졌습니다. 

 

1.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2. 아굴라라 하는 본도에서 난 유대인 한 사람을 만나니 글라우디오가 모든 유대인을 명하여 로마에서 떠나라 한 고로 그가 그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이달리야로부터 새로 온지라 바울이 그들에게 가매 3.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5.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 6.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7. 거기서 옮겨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 유스도라 하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회당 옆이라 8. 또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주를 믿으며 수많은 고린도 사람도 듣고 믿어 세례를 받더라 9.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11. 일 년 육 개월을 머물며 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니라_사도행전 18:1-11

 

사도행전 18장으로 넘어가면 그래서 바울이 어디로 가냐면. 고린도 지역이라는 곳으로 갑니다. 마게도냐를 거쳐서. 여러분 제가 마게도냐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지역에서 누구를 만나죠? 아굴라를 만납니다. 고린도에서 아굴라를 만났습니다. 아굴라 아시죠? 바울이 아굴라를 만나서 뭐하죠? 아주 중요한 것을 기록해놨습니다. 천막 만드는 일, 텐트 만나는 일을 합니다. 왜냐하면 아굴라는 군수업자였습니다. 로마 군대에 천막을 만들어서 제공하는. 요즘으로 말하면 군수업자 갑부이겠죠. 그 일을 바울이 같이 합니다. 같이 해서 자기의 생업을 책임지면서 거기서 하나님이 그 일을 하고 있는데 고린도교회에 복음을 전했더니 복음을 잘 받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이 딱딱합니다. 이미 그 당시에도. 그래서 생업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다른 지역에 가서는 성도들이 바울의 생업을 책임졌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에서는 바울을 받아들이지 않고 영접하지 않으니까 생업을 책임져야 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주석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때 포기하려고 할 때 하나님의 영이 바울에게 나타납니다. 이곳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이곳에 고린도에 내가 택한 나의 백성이 많음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잠잠하지 말고 말하라. 이렇게 이야기를 해줍니다. 그래서 거기서 1년 6개월을 복음을 전하고 말씀사역을 합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네 통의 편지를 통해서 회개해서 다시 그 기쁜 곳을 만났던 곳이 마게도냐입니다. 마게도냐를 가지 않았으면 고린도에 갈 수 없었고. 그 환상이 없었으면. 또 어떻게 목회를 해서 세웠는지를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워진 교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환상과 하나님의 직접 인도하심과 그 뜨거움으로 세워진 교회. 정말 많은 사람들, 아굴라 라든지, 브리스길라 라든지, 루디아 라든지 정말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헌신과 자원으로 세워진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그런 고린도교회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는지. 정말 이 교회는 끝났구나, 이제 포기해야 되겠구나 했던 것이 고린도전서-후서입니다. 여러분 80명 밖에 안 되는 교회가 얼마나 사건 사고가 많은지. 고린도전서를 폭풍처럼 설교를 듣고 왔잖아요. 우리 마음이 심란할 만큼. 그럴 만큼 고린도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왜? 지리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런 자리에 있었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분명히 고린도교회에 선하신 뜻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온전히 회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고린도교회를 선택하셔서 이들을 사용하시려고 했는지 그 어려움들은 그들이 온전히 회개해서 거룩한 삶으로 하나님이 초대하시는 일에 응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환상을 통해 시작된, 처음부터 신실한 사람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 이 고린도교회가 말씀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여러분 말씀의 사람이 된다는 의미를 알고 계시잖아요. 어쩌면 지리적으로 가장 어려운 지역이었고 어쩌면 상황적으로 이교도나 이단들이 가장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도시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바닷가니까. 가장 어려운 사람들, 수준이 가장 떨어지는 사람들. 그곳을 향해 목회하고 섬기고 끊임없이 말씀을 통해 권면하고 성령의 역사를 구하는 기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마침내 고린도교회가 회개하도록 이끄십니다. 그 과정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교회의 회개 소식은 바울 일행에게 너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9절에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너희로 한 근심은 세상 근심과 다르다. 바울이회개의 소식을 듣고 그랬습니다. 내가 이전에 썼던 편지가 민망하다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무 너희들을 권면하고 충고해서 민망하다. 그런데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지금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계속 성도들에게 근심하게 했습니다. 무슨 근심이었어요? 이교도 제사 안 드려야 되는데, 편지 올 때마다 싫은 것입니다. 경건하게 살아야 되는데, 거룩하게 살아야 되는데, 예수님 믿어야 되는데, 성경 읽어야 되는데, 기도해야 되는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데. 지금 네 개의 서신서가 다 우리에게 근심이 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근심하기를 원합니다. 설교에 고민하고 믿음을 고민하고 신앙을 고민하고 삶을 고민하는 것이 어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아니겠습니까. 그 근심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에 이른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근심으로 인해서 회개에 이르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근심을 하고 있습니까? 세상 근심하고 있습니까?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거라고 합니다. 무슨 근심을 하라고 합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고 있나. 소망하고 있나. 내 영혼이 주님을 찾고 의지하고 있나.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성령의 역사를 소망하고 있나. 내 영혼이 주님을 찾고 의지하고 있나. 내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온전히 살고 있나. 이런 근심들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런 근심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그 위로가 무엇입니까? 디도를 통해서 전해들은 고린도교회의 회개의 소식입니다. 여러분 가족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그것처럼 우리에게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우리의 이웃이, 우리의 선교지가. 세상 이야기로 하면 우리가 네팔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학교가 세워지고 가스펠교회 이름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그런 게 기쁜가요? 저는 기쁘지 않습니다. 어제 바르디야에서 사진이 왔습니다. 사진을 보면 원래 있던 장소와 다릅니다. 물난리 겪고 원래 건물 주인이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얼마나 낙심이 되겠어요. 벽돌만 있는 건물인데도 집 주인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거기 수리한다고 나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한동안 장소 구한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새로운 장소를 구했는데 아이들이 더 온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보다 더 크네? 이 생각 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우리 주일학교보다 더 많이 모이네. 공부도 가르치고 주일에 예배도 드리고 말씀도 가르치는데 그냥 이게 기쁜 것입니다. 이 소식으로 우리는 기쁜 것입니다. 저게 무슨 행정, 시스템. 물론 그런 것이 갖춰지면 좋고 우리가 그런 선진국의 도움을 주려고 NGO를 하는 거지만, 우리의 것을 나누려고 하는 것이지만. 아이들이 예수님을 믿고 새 삶을 살고 소망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우리에게 기쁨이 아닌가요. 여기에 우리의 이름이 왜 드러나야 되고. 여기에 우리의 무엇도 드러나야 될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그런 구원의 소식, 구원에 이르는 회개의 소식을 듣기 위해서, 그런 위로를 받기 위해서 헌신을 해야 합니다. 왜 헌신해야 되냐? 그게 우리의 방향이고 신앙공동체인 교회의 목적이고 방향입니다. 그게 우리에게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근심거리이고. 그래서 무엇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될까? 이런 고민이 듭니다. 우리는 뭘 해야 될까? 바울이 진짜 이야기하는 것 11절에 보니까.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우리가 거룩하려고 깨끗하려고 육과 영이 깨끗하려고 우리가 애쓰는 삶은 반드시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근심했기 때문에. 그러면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12절에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신앙생활을 해야 할까_고린도후서7:10-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엄청나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신학적으로 우리 교회가 붙잡고 가야할 교리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불의를 당하고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해 교회가 헌신하고 희생하고 근심해야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시편에 보면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심판의 말씀을 하십니다. 악인들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그것을 위해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뭘 위해서 살라고 다윗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고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엄청 중요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해야 될까. 영혼구원이 우리 신앙생활에 가장 아름다운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그 목적을 잃어버리면 방향도 길도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타락하거나 변질되거나 우리의 삶이 교만해지거나 오만하거나 낙심하는 경우는 그 본질적인 목적을 잃어버려서 그렇습니다. 목적만 목표만 거창하게 가지자 그 말이 아닙니다. 방향을 잃지 말자 이 말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둘러앉아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우리의 기도제목을 나누고, 우리의 삶을 나누고 마음을 나누고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고 기도해주기를 원합니다. 저는 일주일이면 주변에 좋은 분들과 꼭 그런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지만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 나는 목사야 껍데기로 난 목사야. 여러분 난 목사야 라는 단언 한 마디에 얼마나 많은 교만함과 오만함이 들어있는지 아십니까. 그럼 제가 누구를 만나면 목사니까 답을 주려고 하고, 설교를 하려고 하고. 성도들을 만나고 장로님을 만나도 장로님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제 속에 정답만 가지고 있고. 저는 그런 목사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제가 고뇌하고 근심하는 삶을 나누고 싶고, 우리가 근심하고 고뇌하는 삶을 나누면서 서로 하나님을 의지하게 만들어주고 싶고. 저도 의지를 해야 되니까요. 어떤 분들은 그런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오목사 너무 약점을 공개하지 마. 제 선배목사님들이. 왜 강단에서 자꾸 약점 이야기를 하냐는 것입니다. 목사는 흠이 없어야 돼. 그 성경을 잘못 해석한 거죠. 흠이 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흠이 없는 거지. 목사가 어떻게 흠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약점을 자꾸 공개하지 말라는 거예요. 사도 바울은 분명 자기 연약함을 고백했는데. 심지어 예수님도 공생애 사역을 하면서 인간됨, 연약함을 고백했는데. 주여 할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빼앗아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힘들고 어려우시니까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베드로를 데리고,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왜 기도하러 가셨을까요? 두려우니까요. 힘드니까요. 여러분 예수님이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다면 기도하러 갈 이유가 없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인데요. 왜 기도하러 가나요. 완벽하게 프로그램 짜여진 대로 움직이면 되지. 그러나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으로 우리에게 오셨기 때문에. 공생애 사역 동안 늘 기도하셨고, 늘 두려우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뿐입니다. 우리는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둘러앉아서 또 우리의 흩어지며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삶을 살아내야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는 연약하지만 그래도 신앙생활 한다는 자체가 그 자체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고백하는 삶이기 때문에. 그게 아니면 이 길을 갈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라 저와 여러분은 위로가 필요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가 말씀으로 기도할 때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고 위로를 주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주실 때 그 위로를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요즘 시대에 설교에 키포인트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유행입니다. 하도 그게 없으니까. 그걸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강조하다보면 무엇을 놓치나요. 우리가 사람이라는 것을 사람공동체라는 것을 많이 놓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7장을 읽으면서 바울의 인간성이 다 드러납니다. 디도를 만나므로. 그럼 디도를 만나기 전에는 기쁨이 없었다는 것, 위로가 없었다고 합니다. 우리도 사람인지라. 내 가족이 내 자녀가 예수님 믿고 변화되면 기분이 좋고 아닌가요? 맞잖아요. 우리도 사람인지라. 누군가가 회개하고 변화되고 그러나 우리의 관심이 거기에 있어야 그게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관심이 영혼구원에 없고 회개하는 일에 관심이 없는데 사람들이 회개한들 그게 우리에게 위로가 되겠냐는 것입니다. 네팔에 우리가 이렇게 투자해놓고 우리가 관심이 건물, 학교에 있으면 이 사람들이 어제 회개하고 은혜를 받고 세례를 주는 일에 우리는 기쁨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저는 고린도교회를 보면서 어떻게 하면 이런 일들이 우리 교회도 일어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우리가 코로나도 있고 상황도 어렵고, 젊은 분들은 다들 아이들 키운다고 시간 내기도 어렵고 쉽지 않은데. 그럼 못하는 것인가? 아니요. 고린도교회도 했습니다. 그 정도로 고린도교회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봤을 때 형편없는 교회입니다. 루디아든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협력해서 교회를 세웠지만 심지어 하나님이 이 고린도교회 때문에 바울에게 환상을 두 번이나 보여준 것이 사도행전에 2차례나 들어가 있지만 이 고린도교회의 그 이후의 행보는 실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린도교회를 하나님께서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우리 가스펠교회도 가능성이 있겠구나. 은혜가 임하면. 성령이 임하시면. 무엇보다 우리가 그 성령이 임하시도록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애쓰며. 우리의 관심이 영혼구원에 하나님이 서원하시는 영혼의 회개함에 있다면. 그래서 우리의 삶이 오늘 바울의 고백처럼 두려움과 떨림으로 주님을 바라보기 위해서 치열하게 살았다는 고백을 오늘 본문이 하고 있습니다. 그 치열한 고백 때문에 이 기쁨이 더 큰 것입니다. 이해되시죠? 내가 왜 타협하지 않고, 고난을 견디며 안과 밖으로 싸워서 이 십자가의 복음을 지켰냐. 고린도교회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그렇기 때문에 기쁨이 크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진짜 조금은 이해가 되거든요. 제가 목회를 하면서 어떤 제 이야기를 하자면 내가 이 길을 가야지. 사람들, 성도님이 이해 못해줄 때가 있지만 어느 순간에 이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되고 성도들이 가정, 복음의 역사가 일어나고 은혜를 받고 새사람이 되고 돌아온다면 그건 진짜 거기에 늘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견디고 참았기 때문에 기쁨이 배가 된다 바울은 지금 그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겁니다. 15-16절을 보니까 

 

15.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늘 신뢰했었는데 이제 그 신뢰한 것으로 인해서 디도의 소식을 듣고 기뻐했다는 그 말입니다. 다른 것으로 신뢰했나요? 아니요.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어떤 가능성을 봤죠? 하나님이 세운 교회이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회개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봤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언젠가 회개할 거나, 언젠가 저들의 영혼이 구원받게 될 거다. 언젠가 저들이 이교도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다 버리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그 자리로 나오게 될 거라는 그런 기대를 가지고 바울은 근심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지니까 너무 좋은 것입니다.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 동안 했던 고생들이 다 위로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한 영혼을 위해서 기도할 때가 있잖아요. 남편을 위해서 아내를 위해서 믿지 않는 부모, 형제, 자녀를 위해서 기도할 때 얼마나 힘들어요. 포기하고 싶습니다. 에이, 이정도 기도했으면 됐지. 대다수가 포기하는데 그러지 마세요. 그들이 주 앞에 돌아왔을 때 그 기쁨, 위로는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그 일이 가장 중요하다면 저와 여러분에게도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닐까요.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이런 위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냥 위로가 아니라 모든 과정을 통해서 결국 온전한 신앙, 온전한 교회로 세워지는 위로. 영원히 구원함에 이르는 회개로 주 앞에 온전히 우리 삶이 세워지는 그런 위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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