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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2-11-1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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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13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본 문 : 고린도후서 5:11-21

 

 오승주 목사

 

1.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_고린도후서5:11-13, 사도행전9:20-22, 13:16-43, 17:22-34, 19:8-10

 

신학자들이 고린도후서 5장부터 나타나는 주제에 붙인 제목이 화해의 사역이다 이렇게 붙여놨습니다. 화해의 사역. 사도 바울이 사역을 하는데 사역의 핵심 단어가 화해입니다. 화해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 화해를 하는 거잖아요. 후반절에 보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우리에게 주셨다. 화목이라는 단어가 조금 어렵습니다. 화목한 가정 이렇게 쓰는 단어인데. 신학자들은 화목이 아닌 화해라고 붙여놓았습니다. 이 화해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서로 분리가 되고 갈등이 생기고 오해가 되고. 인간은 하나님을 오해하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르고. 또 수많은 유혹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인식들이 자리 잡으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굉장히 많이 멀어졌습니다. 그것을 화해하는 사역이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저는 화해에 대해서 고민이 되었습니다. 제가 고린도후서를 마무리해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화해의 사역에 대한 자료들을 보면서 고민이 많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화해의 사역을 얼마나 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고 화해는 무엇일까 이런 고민들이 많이 됩니다. 미국에는 큰 교단들이 몇 군데 있습니다. 침례교, 루터교, 감리교 이런 곳이 큰 교단들인데 지난달 에 미국 감리교를 대표하는 총회장을 세웠는데 게이가 되었습니다. 감리교 안에서는 총회장을 세우면서 설교를 하는데 화해라는 단어를 붙여서 했습니다. 제가 엄청 갈등과 고민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그렇게 해석을 하나? 바울은 그 당시 동성애라든지 음란, 성적인 쾌락과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그런 성경의 본문들은 잘 보지 않고 주로 이제 연합하고 일치하는 쪽에 방향을 맞추는데 여러분 연합과 일치는 신앙고백이 같아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같지 않고 연합과 일치는 있을 수 없습니다. WCC처럼 모든 종교가 통합하고 연합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길이 진리요 생명이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믿는 우리인데 이런 신앙고백 안에서 일치가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가 연합하고 함께 사역하고 함께 선교지를 섬기는 사역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화해에 대해서 진짜 중요한 단서들을 서신서에서 찾아봐야할 것 같습니다. 제가 지난주부터 우리 교회 목회 방향을 나누고 있습니다. 1부예배 오시는 분들이 주로 오후까지 계시기가 힘드시니까 많이 돌아가시는데 11월 한 달 정도는 오후 훈련에 동참을 해주셨으면 하는 권면을 드립니다. 제가 개척 때부터 그리고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고 또 저는 어떤 중심을 가지고 어떤 목회 철학을 가지고 목회를 하고 있는지 계속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같은 경우에는  장로님, 권사님, 중직자 중심으로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려고 합니다. 제가 사실 직설적이지 못합니다. 제 성격이. 심지어 저희 아내나 아이들에게도 직설적으로 표현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엄청 답답해합니다. 그래서 늘 에둘러서 표현을 합니다. 저희 교역자들도 목사님 바로바로 이야기 해주세요 하는데 그게 진짜 안 고쳐집니다. 얼마나 힘드냐면 직설적으로 말하기 위한 전 단계가 정말 많이 필요합니다. 편지도 써야 되고. 이상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도 아니고 제 성품인데. 제가 에둘러서 이야기를 하면 저희 성도님들 중에는 목사님 왜 저런 표현을 하실까 저런 분이 아니신데 왜 저런 강한 어조로 이야기를 하실까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냥 목사님이 설교만 성경본문만 잘 설명해주고 설교만 잘해주면 좋겠다. 맞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려고 강해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그런데 여러분 성경 자체가 당시 교회들의 상황들, 성도들이 상황들, 정치적인 배경과 이단들, 타락한 세상과의 싸움들을 다 다루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못하다가는 목사의 설교를 제한해버릴 수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이 시대를 다 표현하고 다루는 것이 목사의 설교 안에 다 포함되어 있는 내용들입니다. 우리의 삶. 왜냐하면 저는 저희 교회 성도들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저희 교회 성도들을 하나님 앞으로, 천국에 입성하는 그 날까지 목회해야 할 책임감이 있습니다. 저는 외부의 공격으로부터 성도들을 보호해야 되고 어떤 그릇된 신학, 세상의 유혹, 마귀의 공격에 대해서도 보호를 해야 되겠지만 우리는 옳지 않은 신학과 신앙에서도 저는 저희 교회 성도들을 보호를 해야 합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서신서를 많이 썼을까요? 교회들에게. 다 그런 내용들입니다. 바울은 엄청나게 싸웠습니다. 목소리 높여가면서 자기 목 내놔가면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이런 서신서들의 말씀이 오늘날 우리가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지혜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거라고 믿습니다. 이런 지혜는 어디서 시작하죠? 앎에서 시작합니다. 지혜는 그냥 생기지 않습니다. 알아야 생기는 것이 지혜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영지주의, 마르키온과 같은 수많은 이단들이 형성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구분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는 아무 교리서도 없고 신학이 발전되지 않은 시절이기 때문에. 이게 이단인지 뭔지 구분을 못했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신앙고백서가 있잖아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든지, 소요리문답이라든지 또 우리에게는 정확하게 성경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벗어나면 이단이야 이렇게 성도들도 확인 할 수 있는 자료들이 있지만 그 당시에는 이단들을 판별하기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서신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이라든지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말씀을 주셔서 그 말씀을 기록하게 한 것이 신약성경입니다. 여러분 요한계시록이 왜 기록되었나요? 이단들 때문입니다. 이단들이 아니었으면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일도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바르게 아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알지 못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절대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앎이라는 것을 외면합니다. 외면하고 귀찮아, 알고 싶지 않아, 속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아. 그냥 내 신앙생활만 잘 하면 되지 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절대 올바르게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뭐든지 그렇잖아요. 회사를 운영하는 분들, 작은 가게를 하시는 분들도 우리 가게가 왜 잘 안 되지? 우리 회사가 왜 문제가 있지? 귀찮아 나 그런 복잡한 일 하기 싫어, 나는 내 역할만 잘 할거야. 회사가 망해가고 있는데 내 역할만 잘 할 수 있나요? 알아야 합니다. 왜 망하는지, 왜 주변 회사들 경계에서 밀리는지 듣기 싫지만 피드백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칠 수 있고 갱신할 수 있고 도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이 고린도후서에 분명하게 그런 이야기들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면 맹목적인 신앙이 됩니다. 우리 인간은 모두 다 종교심이 있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면 그게 종교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그래서 종교를 마약, 아편과 같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릇된 신앙이 들어와버리면 대책이 없습니다. 이단들 보세요. 사이비들 보세요. 다 가져다 바치잖아요. 이유 없이, 알지도 못하고,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그게 무서운 것입니다. 무지함에서 오는 신앙생활의 결과는 무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길, 우리가 가야 할 길을 정확히 진단하면서 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신앙훈련을 받는 것이고 목회자들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이런 역사 속에서 자기를 성찰하는 시간들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저는 그래서 안식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공부를 하고 또 좋은 교계 어른들을 만나면서 목회를 돌아보면 가스펠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가야할지 끊임없이 바르게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 저는 지금 학교를 다니면서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눈이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정말 좋은 세미나를 참석하고 있고 복음주의 학술대회를 참석하고 있고.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가 무엇과 싸우고 있으며 무슨 논쟁 속에서 애쓰고 있는지를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 때마다 서신서를 통해서 그것을 살펴보고 있기 때문에 진지하게 말씀을 묵상을 하시기를 권면을 해드립니다. 제가 또 특별한 모임으로 말씀을 나눌 때는 구체적인 방향들이 꽤나 직설적으로 제시가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방향은 신앙의 방향으로 가야 올바르게 갈 수 있습니다. 신앙의 방향이 설정되는 것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노력입니다. 신앙의 방향을 설정하는 것이 예수를 믿으면서 해야 될 첫 번째 노력들입니다. 이런 말씀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교회 갔는데 누가 나를 전도했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를 전도한 사람을 보고 다 배우니까. 자기를 전도한 사람이 성실하게 섬기고 하나님을 진짜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도를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을 보고 배우니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방향이 거기서 다 설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좋아요? 여러분 나를 전도한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면 전도를 받은 사람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되구나, 하나님을 바라봐야 되는 거구나 이렇게 신앙의 방향이 설정이 되겠죠. 그런데 진짜 애석하게도 자기를 전도한 사람이 그런 그릇된 동기와 삶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신앙생활을 하는데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무엇이든지 방향이 올바르다는 것은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지혜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결정이나 지혜 이런 것도 중요하지만 방향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방향을 올바르게 가지고 있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그러나 방향이 틀리면 정말 답이 없습니다. 방향이 틀렸는데 거기에 결정이 무슨 의미가 있고 지혜가 무슨 의미가 있고. 방향이 틀려버렸는데 그 안에서의 노력들이 얼마나 헛되겠어요. 그래서 신앙이 우리에게 방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11절에서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어졌으니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여기서 주의 두려우심을 앎으로 사도 바울이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두려우심을 알고 계십니까? 주님을 안다는 것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긴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과 비유가 될까요? 아이들에게 비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아이스크림이 정말 맛있다는 것을 맛보는 순간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러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게 될 것입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주님을 안다면 주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섬긴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이 전제가 사도 바울의 모든 서신서에 깔려 있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알지 못하면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을 섬기지 않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을 섬기지 않는다는 말은 주님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두려우심을 아는 것 거기서부터 삶의 방향이 생겨납니다. 뭐죠? 죄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죄와 싸우려고 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알기 때문에 방향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모르면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삶의 뱡향이 거기에 생겨날 이유가 없습니다. 어디 그 뿐인가요? 내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서 내 삶을 가꾸고 준비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 삶의 방향들이 거기에서 생겨나겠죠. 주님을 알면 알수록. 그러나 여러분 그 방향이 뭐가 되죠? 예배가 되기도 하고 그 방향이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삶이 되기도 하고 그 방향이 죄와 멀어지려고 하는 어떤 애씀이기도 하고 그 방향이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아가는 기도의 삶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사람들을 권면하게 됩니다. 여러분 권면이 뭐에요? 내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신앙의 방향이 생겼을 때 우리 삶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권면이 된다고 사도 바울은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

우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방향이 생겼다면 사람들에게 권면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권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권면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후배 목사들이 그릇된 길로 가고 있을 때 권면을 하지 않으면 저는 나쁜 선배입니다. 제가 친하면 친할수록 아끼는 후배들에게는 권면을 합니다. 오목사야, 김목사야. 밥을 사줘가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돼. 믿음으로 목회해야 돼. 기도해야 돼. 하나님 말씀을 귀 담아 들어야 돼 라고 늘 권면을 할 것입니다. 권면을 안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삶 자체가 권면이 되고 그 권면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오늘 본문에 보니까 알리어졌기 때문에 하는 권면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면 하나님 앞에 알리어지게 됩니다. 그게 신앙 아닙니까? 그리고 너희 양심에도 알리어지기를 바라노라.  우리가 알리어졌기 때문에 우리 주변 사람들에게 권면을 해서 주변 사람들의 양심도 하나님께 알리어지기를 원한다. 오늘 11절에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요약본에 사도행전 9장, 13장, 17장, 19장을 넣어놨습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엄청난 지적 장벽들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떤 편견, 무지. 바울은 사도행전을 보면 그런 것들과 싸우기 위해서 논쟁도 하고 증언도 하고 때로는 복음의 정직한 선포를 하면서 그런 삶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그런 삶이 틀린 삶이라고 엄청난 노력을 한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부딪히는 벽이 정치적인 상황이냐? 아니면 가난과 질병이냐? 아닙니다. 지적인 장벽이었습니다. 무지함. 편견. 그 당시 수많은 교회 안과 밖에서 가진 편견과 무지 앞에 바울은 그들에게 신앙의 방향을 권면하기 위해서 엄청 싸웠습니다. 우리나라 초창기 때 정말 많은 선교사님들이 신앙을 전해주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100년-150년 전입니다. 조선 말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무지하고 더럽고 그랬나요? 탐관오리들이 완전히 장악하던 시절 아닙니까. 그래서 외국인 선교사들을 보고 예수쟁이라고. 예수님 믿으면 밥 먹여 주냐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뭘 해줄 수 있냐고 외면하고 핍박하고 그런 시절에 그 선교사들은 신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았던 것입니다. 특히 광주, 목포, 순천에서 주로 사역했던 유진 벨 선교사가 편지를 좋아해서 한국에 와 있는 동안 매일 자기 아버지, 장인어른, 어머니에게 편지를 쓴 기록이 있습니다. 제가 두꺼운 편지를 3주에 걸쳐서 읽었습니다. 편지를 읽는데 무슨 마음이 드냐면 유진 벨 선교사가 한국에 왔을 때가 25-26살 입니다. 우리 교회 25-26살 철 들었습니까? 무슨 철이 들었을까요? 25-26살에 조선 땅에 와서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아버지에게 쓴 편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 이들은 정말 무지하고 가난하고 병 들었고 그 뿐 아니라 배우지 못해서 탐관오리들에게 이용만 당하고 사는 사람들이에요. 이들에게는 신앙만이 정답이에요. 이들의 삶에서 탈출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 신앙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에요. 아버지 그래서 저는 이 곳에서 이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서 제 모든 것을 다 동원할 거예요. 이런 편지들입니다. 미국에서 그런 편지를 보고 미국 교회에서 선교사를 파송해주고 재정을 지원해주고. 그래서 광주에 세운 학교들, 여성교육기관들, 병원들. 여러분 우리가 지금 정말 좋은 인터넷 시대, 자료가 홍수처럼 범람하는 시대들을 산다고 지적 장벽이 없다고 말 할 수 있나요? 편견과 무지가 없다고 말할 수 있나요?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저는 요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만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조선 말기나 사도 바울 때보다 지금이 더 심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조선 말기에는 사람들이 순수하기라도 했죠. 지금은 가지고 있는 그릇된 정보가 너무 많아서 사상, 이념들이 너무 많이 들고 있어서 복음을 전하기가 힘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듣지도 않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니까 

 

오직 우리로 말미암아 자랑할 기회를 너희에게 주어 마음으로 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에게 대답하게 하려 하는 것이라 

 

여러분 우리 신앙의 방향은 다른 영혼들에게 우리가 믿는 예수님, 그로 인한 우리의 삶들을 자랑할 기회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으로 자랑하지 않고 외모로 자랑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신앙의 방향, 신앙의 방향을 권면할 수 있는. 하나님은 그런 축복들을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축복들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신앙의 방향이 설정되는 이유는 오늘 14절에 보니까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죠?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_사도행전 9:20-22

 

16. 바울이 일어나 손짓하며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된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여 내사 18. 광야에서 약 사십 년간 그들의 소행을 참으시고 19. 가나안 땅 일곱 족속을 멸하사 그 땅을 기업으로 주시기까지 약 사백오십 년간이라 20. 그 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더니 21.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22.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23.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24. 그가 오시기에 앞서 요한이 먼저 회개의 세례를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전파하니라 25. 요한이 그 달려갈 길을 마칠 때에 말하되 너희가 나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있으니 나는 그 발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26. 형제들아 아브라함의 후손과 너희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이 구원의 말씀을 우리에게 보내셨거늘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그들 관리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 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28. 죽일 죄를 하나도 찾지 못하였으나 빌라도에게 죽여 달라 하였으니 29. 성경에 그를 가리켜 기록한 말씀을 다 응하게 한 것이라 후에 나무에서 내려다가 무덤에 두었으나 30.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신지라 31.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 날 보이셨으니 그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의 증인이라 32. 우리도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너희에게 전파하노니 33.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사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 함이라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와 같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너를 낳았다 하셨고 34.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사 다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실 것을 가르쳐 이르시되 내가 다윗의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너희에게 주리라 하셨으며 35. 또 다른 시편에 일렀으되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셨느니라 36. 다윗은 당시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섬기다가 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으되 37. 하나님께서 살리신 이는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였나니 38.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40. 그런즉 너희는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41. 일렀으되 보라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멸망하라 내가 너희 때를 당하여 한 일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너희에게 일러줄지라도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 하였느니라 하니라 42.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하더라 43. 회당의 모임이 흩어진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따르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_사도행전 13:16-43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_사도행전 17:22-34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_사도행전 19:8-10

 

2.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_고린도후서5:14-15, 갈라디아서1:10, 사도행전26:25, 빌립보서1:23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_고린도후서 5:14-15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신앙의 방향이 설정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에게 강권하셔서 이 자리에 계시는 줄 믿습니다. 저는 제가 신앙생활을 되게 잘하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열심히 믿어가지고 저희 가정도 복음화되고 제가 목회도 하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제가 새벽마다 밤마다 기도할 때마다 그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하나님의 은혜 없이 또 하나님이 강권해주시지 않고 제가 0.00001%라도 제가 한 것이 아무 것도 없더라고요. 우리의 공로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부 다 하나님 은혜입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제가 행동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제 성품과 다르게 공부할 수 있고 목회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 있는 시간도 제가 확보할 수 있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저는 이기적으로 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죄악 속에서 허우적대면서 살 것 같습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대신 죽은 그 사랑. 그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났잖아요. 그런데 오늘 바울은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났는데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되냐? 우리를 죽지 않고 살아나게 하신 이를 위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의 방향입니다. 갈라디아서 1장 10절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_갈라디아서 1:10

 

여러분 우리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았는데 바울이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기쁘게 하면 방향이 틀어지거든요. 목회도 신앙도 우리 인생도 사람을 기쁘게 하는 순간 인생의 방향이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결코 평안과 안식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면 결국 사람들까지도 권면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 바울의 논리이고 그 논리가 100% 맞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자, 내 아내, 남편을 기쁘게 해주자. 맞습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갑니까? 부모형제든 누구든 사람을 기쁘게 하면서 사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바르게 하려고 해도 우리 자체가 연약하기 때문에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나서는 이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살겠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사는 종 된 삶이 결국 사람들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야 합니다. 거기에 교회의 능력이 생겨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지금 현대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않죠. 사람들을 신경씁니다. 성도들을 신경 씁니다. 서비스 업체처럼. 그런데 교회의 능력은 점점 사라집니다. 우리 힘의 원천이 어디 있습니까?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_사도행전 26:25

 

이게 무슨 말이에요? 당시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그리고 로마의 관리인, 총독의 법정 앞에 세운 것입니다. 베스도라는 사람이 볼 때 바울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세상 법적으로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베스도가 뭐라고 하죠? 신앙생활을 너무 열심히 이야기해서 미친 거 같다. 그러니 바울이 베스도에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각하여 저는 미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 바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리가 죄에서 건짐 받는 것입니다. 베스도 입장에서는 미친 말 하는 정도로 생각했는데 미친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 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미친 말 같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게 미친 말 같습니까? 당신 예수 믿어야 구원 받을 수 있다, 지옥에서 벗어나고 죄에서 벗어나고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 이게 미친 말입니까? 바울은 스스로 자기가 미친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_빌립보서 1:23

 

바울이 둘 사이에 끼었다고 표현을 하고 있는데 바울은 당장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살고 싶은 마음을 표현할 정도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하고 산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둘 사이에 끼였다.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 끼였다.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으면 수많은 문제들 사이에 끼어있습니다. 가정 문제, 자녀 문제. 여러분 우리 인생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들이 주변에 도사리고 있습니까.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짐이 가벼워지면 좋겠는데 더 짐이 무거워지잖아요.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짐이 가벼워지면 좋겠는데 더 무거워지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에게 네 짐을 내게 맡겨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바울이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나 천국에 가고 싶지만 그래도 너희 속에 있는 것은, 너희 사이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해서 너희에게 이 믿음 길, 신앙의 길을 전해주기 위함이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고백하는 이유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자기를 강권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은 맛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기 위해서 새벽마다 다윗도 새벽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이렇게 이야기했죠. 왜냐하면 다윗은 장수였기 때문에 평일 낮에 기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늘 전쟁 속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에 다윗이 새벽에 기도했던 것은 장수였기 때문에 새벽에 기도한 것입니다. 다 전쟁하고 있는데 혼자 가서 기도할 수는 없잖아요. 남들이 다 자고 있을 때 새벽에 일어나서 하나님을 의존하고 결단하고 결심하고. 우리에게는 이런 결단하고 결심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저는 원래 목회자가 저와 잘 맞지 않습니다. 오목사 천상 목사야 이런  사람들이 있는데 아닙니다. 저는 매일 놀고 싶습니다. 매일 운동하러 가고 싶고. 매일 맛있는 거 먹고 싶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해서. 여러분 저도 교회 와서 기도하기 싫습니다. 얼마나 외로운지 아세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해서. 저도 인터넷에서 설교 베껴서 설교하면 좋겠습니다. 고달픕니다. 괴로워죽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해서. 그 이야기인 것입니다. 16절 보세요.

 

3.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_고린도후서5:16-21, 로마서8:18-25, 갈라디아서5:15-2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그리스도 사랑의 강권을 받은 사람은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그 사람의 육신으로 교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우리는 육신을 따라 알았죠.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여기서 자기는 하나님이십니다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절이 진짜 중요합니다.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하나님이 어디 안에 계신다고요? 이런 구절은 처음 보시사. 우리 보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나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여러분 이제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사람을 알면 안 되고 비록 육신 때문에 주님을 만났지만 이제는 신앙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신앙의 방향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을 평가할 수 있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하는 것입니다. 새신자들은 육신 때문에 교회를 다니고 육신 때문에 기도하고 육신 때문에 주님을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복음을 붙잡지만 이제 그 사랑이 강권한 사람은 그들과 똑같이 육신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달라야죠. 교회가 세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야 되고 교회가 이웃들을 보는 시야가 달라야 합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뒷말하고 육신에 따라서 사람이 굽신거리고 또 배제하고. 여러분 교회는 절대 그래서 안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는 다 똑같은 형제고 자매입니다. 그런데 신앙의 방향이 무엇이냐? 그런즉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되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실 우리가 신앙의 방향을 가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똑같은 삶을 사는데 교회만 다니면 되지 그냥 예수님 믿고 천국만 가면 되지 무슨 삶의 방향이, 신앙의 방향이 필요하냐?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이 진짜 많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절대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새로운 피조물이 오해가 많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새로운 피조물은 죄 속에 있는 우리를 변화시켜서 화목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된다는 것의 정의는 무엇이냐면 나 거룩해졌어, 나 교회 열심히 다녀 이게 아니고 그 전에는 죄를 짓던 삶이 이제는 벗어나서 새롭다는 말은 우리 손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 손에 들려졌다는 것은 이 말씀으로 세상을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주의 복음을 전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 땅의 모든 종교가 다 좋은 역할을 합니다. 그 중 어떤 종교는 새로움에 대한 해석을 너무 너무 잘못되게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로워진다는 표현은 기존의 삶을 다 무시하고 폐기하고 없애고 새로워진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덧입는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을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전라북도 고창군 춘산리 41번지에 태어난 제 삶이 무슨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게 있어요? 아니요. 어떤 목사님들은 그런 게 싫으니까 다 팽개치고 예수 믿고 나니까 다 쓰레기 같아 하고 다 버리고 새 삶을 살겠다는 의미를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신천지들은 집에서 나와, 부모 형제 다 버려 라고 이야기하잖아요. 새로운 공동체에서 살아 이러면서. 자신의 삶을 떠나서 새로운 삶을 살라고 강요하는 종교들. 가스라이팅 시킵니다. 다 떠나서 어디로 가야 됩니까? 여러분 신천지 같은 곳에 가서 살면 새로운 삶인가요? 아닙니다. 우리에게 말씀을 주셔서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에서 내 인생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준 생명 안에서. 성경이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삶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나주셨기 때문에 그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에, 화해를 했기 때문에. 화해라는 단어를 감히 인간이 쓸 수 있겠나 싶지만 이해하기 쉽게 하나님과 우리가 화해를 한 것입니다. 하나님도 화해를 했기 때문에 모든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 전가시켜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피 흘리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우리 자유네? 막 살면 되겠네? 아닙니다.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닙니다. 새로운 삶이 아닙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아닙니다. 죄를 잡고 있던 우리 손에 죄를 빼앗아 가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다 표현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죄인으로 살았던 우리가 죄를 해결 받음으로 자유롭게 막 사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거룩한 백성 삼으셔서 우리 속에 우리의 삶에 말씀을 부탁하신 것. 이게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새로운 삶, 새로운 피조물. 우리 삶을 화목하게 하는 말씀. 우리 삶은 그대로인 것입니다. 갑갑한 가정도 그대로이고 답답한 내 삶도 그대로이고. 그러나 말씀이 우리 손에 있기 때문에 방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거지 같은 우리 가정 이게 아니라. 말씀이 우리  손에 있기 때문에 방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어. 남편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겠어. 내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우리 가정에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복음의 확산이 일어났으면 좋겠어 라고 생각하고 그 말씀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의 나침판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이나 갈라디아서에서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우리 안에 이전 것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완전히 새 것이 임하지 않았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여전히 죄인이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내 속에 아직도 죄의 모습이 있어서 나를 괴롭힌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삶의 방향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예수 믿으면 점프해서 목적지에 도달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을 복음화하는데 과정 없이 복음화 할 수 있습니까? 내 남편을 구원하는데 과정없이 내 남편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데 교회 다니면서 목사님 오셔서 말씀도 주시고 기도도 하고 내가 헌신 좀 하면 내 남편이 갑자기 변화되어 있을 거 같고. 우리 가정이 갑자기 복음화 되어 있을 것 같고. 세상이 갑자기 화목해지고 신앙이 갑자기 충만해질 거 같고.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구약의 전쟁으로 표현해주셨습니다. 여러분 전쟁에서 하나님이 도우셔서 승리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고달파요. 우리가 이사 한 번 가는데도 계속 짐을 싸고 있습니다. 이사 해보셨죠? 이사 좀 안 했으면 좋겠다. 하루 이사하는 것도 힘든데 수십만 군대를 대동해서 차가 없는 시대에 전쟁을 치룬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 과정이 고달팠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눈물을 흘리고. 그런데 그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죄와 싸우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 그런 과정들이 필요하다고 가르쳐주고 있고 사도 바울은 그 표현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내 마음은 주님을 너무 사랑하지만 내 육신이 약해서 이런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다 삶의 방향에서 오는 메시지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부터 보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9절부터 보니까 육체의 일은 무엇인가요?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그러면 성령의 열매는 무엇인가요? 22절부터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우리를 어디로 안내하고 있나요? 성령의 열매인가요? 아니면 술 취함과 방탕함과 분냄, 이단, 시기, 질투, 원수 맺는 것, 우상숭배 인가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강권하여서 신앙이 우리 안에 들어왔다면 우리는 방향이 생겨나는 것이 정상입니다. 나 예수님 어떻게 믿어야 되지? 가스펠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되지? 방향이 생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목적이 생겨나는 것이 당연합니다. 여러분 주변에 신앙의 방향을 가진 어른들이 있다면 축복받은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항상 주님을 향해서 가는 분들, 항상 화목하게 하시는 하나님 말씀으로 사시는 분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고 날마다 애쓰며 사는 분들. 우리도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고 그런 방향을 가진 되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권면하는 그런 축복된 삶이 되기를 늘 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신앙의 방향들을 두고 매일 실천하면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이번 주 특별히 새벽집회가 있습니다. 1년에 딱 10일 하는데 봄에 5일 가을에 5일 나눠서 합니다. 새벽집회를 특별히 하는 이유는 훈련 차원에서 하는 것입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면 참 좋구나. 글고 평상시에도 내가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면 참 좋구나. 혼자의 힘으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의지적으로 교회 공동체가 새벽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또 특별한 집회니까 우리가 어디 놀러 가더라고 새벽에 일어나 짐 싸듯이 그런 마음으로. 이럴 때 문제들, 어려움들, 극복해야 될 삶의 모습들, 죄의 모습들. 수많은 기도 제목을 정해서 내가 새벽을 꺠우리로다 그런 마음으로 새벽집회에 함께 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방향을 찾는 것입니다. 오늘 중요한 것은 신앙의 방향. 신앙의 방향이 우리 삶의 방향을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신앙의 방향이 생겨나기를 축복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여러분을 강권해서 여러분의 삶에 신앙이라는 것이 방향이 되기를. 그랬을 때 우리의 삶은 날로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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