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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2-10-23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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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23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본 문 : 고린도후서 3:1-18

 

 오승주 목사

 

- 신앙생활도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것 있습니다_고린도후서3:1-5, 사사기2:1-10

 

우리가 다시 자천하기를 시작하겠느냐 우리가 어찌 어떤 사람처럼 추천서를 너희에게 부치거나 혹은 너희에게 받거나 할 필요가 있느냐_고린도후서3:1

 

여기서 자천하다는 것은 스스로 추천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뭘 요구하고 있냐면 계속해서 바울 사도의 어떤 신분, 바울의 사도됨의 증명을 계속 요구하고 있어서 바울이 그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고린도교회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나를 추천할만한 그런 것들을 내가 할 필요가 있냐? 너희가 내가 쓰는 편지의 이유이다. 너희 때문에 편지를 쓰는 거지, 내가 사도이기 때문에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다.  내가 어떤 권세와 권리를 가지고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고 그냥 너희가 내가 편지를 쓰는 이유이다. 다른 이유가 전혀 없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너희가 바른 길 가게 하기 위해서 편지를 쓰는 거지. 이 편지에 어떤 명분, 이 편지가 어떤 권위가 있냐 그런데 나는 관심이 없다 그렇게 바울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조금 어렵게 번역을 해놨지만 그런 내용입니다. 여기서 굉장히 중요한 것을 점검하고 가야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신앙이 변질되고 타락하는 거 별 거 아닙니다. 술 먹고 담배 피고 이런 것이 타락이 아니라 이 원래 본질을 상실하는 것이 타락입니다. 여러분 끝이 살짝 다른 것이 이단입니다. 99%가 똑같은데 1%가 달라서 이단이 되는 것 입니다. 원래는 이것 때문에 우리가 모였고 이것 때문에 서로 사랑하고 이것 때문에 서로 교제하는데 나중에는 교제가 더 중요해지고 모임이 더 중요해지고 이거는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게 변질되고 타락한 것입니다. 지금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는데 추천서가 왜 필요하고 어떤 권위가 왜 필요합니까? 사도됨을 증명할 필요가 있습니까? 교회가 자꾸 그렇게 가면 안 돼요. 우리 신앙이 자꾸 그런 부분을 놓치면 안 됩니다. 오늘 그것을 두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이 3장 전체의 본문입니다. 2-3절에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2.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먹으로 썼죠. 바울이 먹으로 썼잖아요. 그런데 먹으로 쓴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왜요? 뭐라고 이야기하죠?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_고린도후서3:2-3 

 

여러분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돌 판에 새겨서 주셨죠? 돌판에 새겨서 주신 것이 중요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돌판에 새긴 십계명이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은 없습니다. 찾을 수 없습니다. 그건 뭘 상징하죠? 돌 같은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질 때 우리가 변화되어지고 하나님의 영으로 새롭게 되어지고 그런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판에는 새기지 않고 돌판에 새긴 그 말씀을 우상시 여겼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빗대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그렇게 하고 있느냐? 여러분 하나님 말씀이 돌판에 새긴 것처럼 육신의 마음 판에 새겨진 것. 바울은 여기에 대해서 굉장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4-5절에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4.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향하여 이같은 확신이 있으니 이같은 확신이 뭐죠? 5절입니다. 5.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_고린도후서3:4-5

 

이게 확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 만족 때문에 너희에게 편지를 쓰고 내가 이렇게 감옥에 갇혀 있고 내가 이렇게 근심하고 걱정하는 것이 내 만족 때문에 하는 게 아니야. 박영선 목사님께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인격의 제자훈련 읽어보셨죠? 전도하는데 내 만족 때문에 하는 것은 그 영혼을 파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확신으로 하면 안 됩니다. 내가 오늘 몇 명 영접시켜야지, 내가 오늘 누구 전도해야지. 그러면 안 됩니다. 그것은 사람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침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내가 구원 받은 것이 너무 감사해서 오늘 만난 이웃에게 오늘 만난 사람에게 그 은혜, 사랑을 나눠주는 게 복음이고 전도하는 거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없습니다. 그래서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보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 편지로 너희가 어떻게 변화되고 어떻게 새롭게 되고 거기서 만족을 얻으려고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미 만족을 얻었다. 나는 이미 은혜를 받았다. 나는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다. 내가 너희에게 편지를 쓰는 것은 추천서를 써서 누구에게 증명을 받기 위해서 인정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 마음 판에 하나님 말씀이 새겨져서 너희도 하나님께 은혜 받고 살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사기는 여호수아와 연결된 시대입니다. 그런데 완전 다릅니다. 어떻게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마치 전반전에 이기고 있다가 후반전에 역전당하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그 이유에 대해서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 가나안 정복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순종했던 시절입니다. 거기에 토를 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정복하고 나서 여호수아 후손들에게 땅을 분배하고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될지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는데 그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이 땅의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며_사사기21:2

 

가나안 땅 주민과 언약을 맺지 말아라 이렇게 이야기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 중 일부가 그들과 언약을 맺어버렸습니다. 무슨 언약을 맺었습니까? 우리는 사사기를 읽으면서 하나님 너무 잔인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가나안 족속을 다 죽여라, 그들의 문화와 우상을 다 철거해라 이렇게 말한 것에 대해서 너무 잔인한 거 아니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영혼들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들을 배려해서 한 것이 아닙니다. 사사기 2장에 뭐라고 기록하고 있죠? 그들을 노예 삼으려고. 그들을 종 삼으려고. 나중에는 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 사람들을 다 노예 삼았습니다. 그들의 편리와 이기심을 위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분노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결론은 어떻게 됐죠? 그런 사사로운 자기의 이기심, 감정 때문에 그들과 언약을 맺었는데 그게 나중에 어떤 결과가 초래할지 몰랐습니다. 어떤 결과를 초래했나요? 나중에 가나안 땅에 원래 그들이 섬기는 신들, 그 신으로부터 파생된 문화들이 이스라엘을 삼켜버렸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가 나타났습니다. 바알 신을 섬기고, 몰렉 신을 섬기고. 끔찍한 신들을 섬겼습니다.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신들을 섬기고. 전쟁 신을 섬기고 쾌락의 신을 섬기고 음란의 신을 섬기고. 가나안을 정복했던 이스라엘인데 완전히 역전이 되어버린 장면이 사사기입니다. 덴마크의 신학자인 키에르케고르는 1700-1800년대 사람입니다. 그 당시 덴마크는 국교회였는데 이 시기는 이미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나서 유럽 전역에 개신교가 자리를 잡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복음을 전하고 이런 시절입니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가 덴마크 교회에 엄청난 메시지를 던졌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엄청난 부흥을 맛보았는데 그런 덴마크 교회가 부패하고 변질되고. 그래서 뭐만 있냐면 목사들도 설교만 남아있고 성도들도 그 메시지만 붙잡고 사는 것입니다. 뭐가 없냐? 삶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걸 비판했습니다.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전할 것이 아니고 지금 복음이 필요한 것은 교회 안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교회 안에 복음이 필요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이 교회 안에 필요하다. 회개는 지금 불신자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필요한 거다. 오늘 날과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키에르케고르가 42세 때 죽었는데 장례도 치르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책과 사상들이 교회에 영향을 준다고. 지금도 키에르케고르를 좋게 보지 않습니다. 그 순결하고 깨끗한 신학자, 신앙인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키에르케고르를 신앙인으로 봅니까? 철학자로 봅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를 읽어보십시오. 얼마나 믿음이 신실했는지. 그가 교회를 위해서 얼마나 깨어 있으려고 노력했는지. 그가 던진 메시지가 덴마크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완전 도전이 되었습니다. 신앙은 메시지만이 아니다. 그 메시지를 삶으로 살아내는 것이 신앙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던진 메시지였습니다. 자꾸 여러분 교회가 타락하고 부패하면 뭐만 남죠? 메시지만 남습니다. 입에 말만 남습니다. 뭐가 사라지죠? 행함이 사라집니다. 야고보 사도가 이야기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여러분 제가 지금 율법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까? 제가 율법주의입니까? 제가 이렇게 설교했더니 저보고 율법주의라고 합니다. 썩어 문드러진 값싼 구원론자들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왜 강하게 이야기합니까? 틀렸기 때문에. 여러분 책임 없는 사랑이 사랑입니까? 나 너 사랑해 말은 하고 육체의 쾌락은 얻고 결혼은 안 하는 것이 사랑입니까? 그렇게 신앙생활 하시려면 그런 교회를 가시면 됩니다. 저는 그것은 참된 심앙의 본질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해놓고 내 삶은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 것.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않는 것 사랑이 아닙니다. 분명히 요한복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아버지를 사랑하느냐? 그럼 아버지의 계명을 지킬지어다. 그러니까 키에르케고르가 엄청난 핍박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나온 수많은 저서들. 여러분 시간되시면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들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신앙이 굉장히 많이 성숙해질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 되고 반드시 확인해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이 우리 마음 판, 육신의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내 마음 판에 새겨진다는 의미를 오늘 확인하고 가셔야 합니다. 말씀이 내 마음 판에 새겨지면 우리가 말하는 것, 행동하는 것, 우리의 의지, 우리의 선택 모든 것이 그 말씀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마음 판에 새겨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죄로 물든 우리의 본성에 영향을 받아서 말, 행동, 의지, 선택, 판단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시편 105편에도 요셉을 빗대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이 너희에게 응할 때까지. 말씀이 너희에게 응할 때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단련하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내용인지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저 사람은 되게 착한데, 저 사람 되게 선한데, 도덕적으로 문제없는데 무슨 말씀이 필요해?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와 세상이 말하는 도덕과는 결이 완전 다릅니다. 정말 착하게 살았는데 지옥 갑니다. 우리 시대 기준으로 봤을 때. 그래서 우리는 보통 판단이라는 것을 하고 선택이라고 우리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 판단과 선택을 하는 우리의 의지가 온전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지가 있습니다. 의지가 발동됩니다. 예를 들어서 저희 와이프에게 오늘 저녁 뭐 먹을 거야? 치킨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와이프는 그 순간에 제가 한 말 에 때문에 치킨과 짜장면 중에 하나를 먹어야 하는 의지가 발동됩니다. 무조건. 그 말을 들었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우리는 판단이라는 것을 해야 되고 선택이라는 것을 해야 되게 됩니다. 그게 우리의 의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뭔가를 했을 때 이 의지는 다른 무엇인가에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게 우리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한빈이가 이제 곧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집에 오면 자기가 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책도 읽어야 되고 수학도 조금 풀어야 되고 해야 될 것이 있는데 집에 오면 놀고 싶습니다. 제가 늘 이야기합니다. 한빈아 항상 오면 해야 될 일을 먼저 하면 뒤에 편하게 놀 수 있어. 그런데 마시멜로 이야기처럼 그런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아니야, 먼저 놀 거야 하고 먼저 놉니다. 먼저 놀면 나중에 해야 될 일을 할 때 짜증이 납니다. 그리고 이미 놀았기 때문에 피곤하고 자고 싶습니다. 피곤하고 짜증난 상태에서 그걸 하려고 짜증을 내니까 엄마한테 혼나고 그리고 혼나고 울면서 자.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또 해야 돼. 괴로운 인생이 계속 됩니다. 아이에게 뭐가 필요하죠? 교육이 필요합니다. 스케줄 관리가 필요합니다. 이걸 먼저 했을 때 뒤에 너는 자유로울 수 있어. 이걸 먼저 하면 너는 편할 수 있어. 이런 교육을 받지 않는 어른들이 많습니다. 무책임하고. 신앙도 똑같습니다. 뭐가 우선순위인지 내 삶에 뭘 해야 되는지 이런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극복해야 될 것이 있고 반드시 해야 될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성경에서는 이 말씀이 우리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으로 인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만족을 얻는 것이라고 바울은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만족. 신앙의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 상태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 말씀이 우리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마음 판에 새겨진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 깨닫는 것이 내 삶에 이해가 됐다는 표현입니다. 어?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지,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지, 하나님은 구원자지 맞아, 이게 아니라. 이게 깨달아져서 내가 위기를 겪을 때 내가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 저 좀 도와주세요 라고 고백하는 삶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깨달았다는 말은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행함이 뒷받침되는. 여러분 깨닫는 다는 표현을 삶에서 많이 쓰시잖아요? 진짜 많이 쓰시죠? 여러분 잘못하면 지금 우리가 굉장히 그릇된 지식, 어떤 사상, 이념에 영향을 받아서 많은 젊은이들이 유튜브 같은 거 보면서 많은 정보들을 가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깨닫는 것도 그런 정보를 가지고 있는 걸 깨닫는다고 이야기하는데 성경에서 깨닫는 것은 그런 깨달음이 아닙니다. 내가 체험하고 내 것이 돼서 그것을 행하는 것 까지가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죠? 저희 둘째가 세 살인데 제가 쉬는 날 어린이 대공원에 갔습니다. 같이 사자도 보고 호랑이도 보고. 그래서 제가 쉬는 날마다 아빠 사자, 호랑이. 노래를 부릅니다. 제가 괜히 갔나 싶을 정도로. 아빠 차 타고 호랑이 보러 가자, 사자 보러 가자. 말을 잘 못하니까 아침에 눈 뜨면 아빠 사자. 고고. 뭐죠? 완전히 마음 판에 새겨진 것입니다. 그걸 행동으로 직접 해봤기 때문에 좋다는 것을 압니다.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의지가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부분을 극복하지 못합니다. 

 

17. 너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으며 내 지식에 마음을 둘지어다 18. 이것을 네 속에 보존하며 네 입술 위에 함께 있게 함이 아름다우니라_잠언22:17-18

 

말씀을 왜 우리가 마음 판에 새겨야 하는지? 기독교 신앙에서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확신이 될 만한 어떤 지식, 체험을 가져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확신을 내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뭐라고 그러죠? 확신을 내가 갖는 것입니다. 그게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에 개인주의가 주는 그릇된 삶들 아닙니까. 그래서 진리를 경험해보지 못해서 판단력이 흐려지고 분별하지 못하고. 이게 죄인지 이게 진리인지. 이게 하나님 앞에 우리가 두려워해야 될 일인지 잘 모르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런 게 있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 저분 진짜 뜨겁게 하네? 저 사람 진짜 열심히 예수 믿네? 이랬는데 어느 날 갑자기 차갑게 식어버렸습니다. 차갑게 식어버리다 못해서 자기의 삶이 잘 안 되고 사업이 조금 망하고 이러니까 갑자기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 사업 좀 안 된다고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나요? 제가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은 애초부터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구나. 애초부터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구나. 여러분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베드로에 대해서 나옵니다. 여러분 아시죠?

 

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은 이러하니라 2.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3.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4.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5.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6. 이르시되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하시니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7.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거리가 불과 한 오십 칸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 든 그물을 끌고 와서 9.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시니 11.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물고기가 백쉰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12.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13.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14.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_요한복음21:1-18

 

베드로가 원래 누구였나요? 어부였습니다. 별 볼일 없는. 여러분 그 당시 어부는 정말 천민 중에 천민이고 정말 먹고 살기 힘든 직업이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가 늘 잘 잡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난하고.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내가 너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리라 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3년을 옆에 두셨습니다. 어느 정도로 옆에 두셨냐면 하나님 앞에 은밀하게 기도하러 갈 때도 베드로는 꼭 데리고 가셨습니다. 3년을. 화장실 갈 때 빼고는 거의 같이 자고 밥 먹고 예수님이 했던 모든 기적들, 그리스도로써 하신 공생애 사역들을 다 목격했던 베드로가 얼마나 인간이 연약한지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군중에 잡혀가니까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서 인간이 부인할 수 있잖아요? 순간 목숨이 위태로우니까 나 저 사람 몰라요. 이 부인이 아니라 완전한 부인을 했습니다. 그 증거가 뭐죠? 다시 어부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물고기 잡으러 돌아갔습니다. 예전의 삶으로.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찾아가셨습니다. 베드로가 깜짝 놀랍니다. 진짜 부활하셨군요. 그래서 베드로와 식사하시며 뭐를 질문하시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먹으면서 네 사랑하죠 이렇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두 번째 또 질문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사랑한다니까요. 세 번째 질문하십니다. 이 모든 사람들 중에 네가 나를 정말 사랑하느냐? 아마 베드로는 그때 울었을 것입니다. 말문이 막혔을 것입니다. 네 주님 제가 주님을 정말 사랑합니다. 무슨 말이에요? 이 예수님을 내가 체험하고 확인해서 내 마음 판에 새겨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뒤에 부인한 적이 있나요? 그가 사형 당할 때 예수님을 부인했나요? 목이 잘릴 때 부인했나요? 여러분 정말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시험 들지 않습니다. 사람 때문에 절대 시험 들지 않습니다. 어떻게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데 사람 때문에 시험듭니까? 환경 때문에 주저앉습니까? 회개는 할 수 있습니다. 실수 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좌절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의 풍족한 삶이 부러워서, 또 그들을 노예 삼고 그들과 언약을 맺어서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깁니다. 그래서 여호수아에게 전해들은 그 하나님의 말씀은 다 잊어버립니다. 왜? 새기지 않았기 때문에. 여호수아처럼 경험하거나 새긴 것이 아니라 그냥 너희 이렇게 살아, 자손들아 너희 그냥 이렇게 살아. 마음 판에 새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늘 6절부터는 뭐라고 합니까?

 

- 영의 직분, 의의 직분을 위하여_고린도후서3:6-11

 

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그렇죠? 십계명도 율법도 영광이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 안 믿어도 영광스럽게 살잖아요.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 때문에도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무슨 말입니까? 8절 보세요. 

8. 하물며 영의 직분은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9절에 

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우리가 누군가를 정죄하는 그 직분도 영광이 있을텐데 의의 직분은 누군가를 살리는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판에 새겨져서 하나님으로부터 만족을 얻게 되면 우리는 영의 직분, 의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냥 우리가 성경을 가까이해서 하나님 말씀을 달달달 외우고 말씀대로 살아도 그 율법대로 살아도 영광이 있을 것인데 우리 삶에 뭔가 열매가 있을 것인데 그 말씀이 우리 마음 판에 새겨지면 그 정도가 아니라 영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은 살리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 의는 살리는 거죠? 그러니까 말씀이 우리를 살리게 되는 것은 이 말씀이 우리 마음 판에 새겨질 때 이해가 되고 깨달아질 때. 이 말씀을 살아내고 그 말씀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깨달음이 있을 때까지.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정말 깨달았다면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의 이유를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의 존재를 정말 깨달았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 청소년들이 지혜가 있으면 나 좋은 대학교에 가면 내 인생이 성공할 수 있어. 이거 깨달음이잖아요? 그렇죠? 나 서울대학교 가면 어렵지 않게 살 수 있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고 좋은 일을 많이 하며 살 수 있어. 이게 깨달음인데 그 모든 것을 전국의 초중고생들이 다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깨달은 것인가요? 아닙니다. 왜?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누구는 깨달은 거죠? 서울대 갈 수 있을 만큼 공부를 하는 사람이 진짜 깨달은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이야기하는 논제입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하나님 말씀을 깨달았다고 하는데 아무 행함이 없다? 성경도 읽지 않고 우상, 쾌락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죄와 싸우지 않는 것은 그것은 깨달은 것이 아니다라고 키에르케고르는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100% 지지하는 것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일꾼 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새 언약의 일꾼이 되기를 원하느냐? 네가 정말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를 원하느냐? 네가 정말 영의 직분, 의의 직분을 감당했으면 좋겠는데. 돌에 쓰여 있는 율법은 구약성경, 모세오경 아닙니까? 십계명이죠. 그게 사람을 죽이나요? 죽어야 삽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굉장히 이중적인 의미로 쓴 것입니다. 돌에 새긴 말씀은 필요 없고 우리 영으로 받은 마음 판에 새긴 말씀이 중요해 이건가요? 아닙니다. 이 두 가지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돌에 새겨진 말씀이, 종이에 새겨진 성경 말씀이 우리 마음 판에 새겨질 때 그게 뭐가 되죠? 살리는 의의 직분을 감당하게 되는 거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중요한데 이게 우리 마음 판에 새겨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난 여름 내내 바이블스쿨 때 묵상에 대해서 공부한 것입니다. 우리가 왜 성경을 읽어야 하나요? 왜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 이걸 깨닫게 해달라고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고 기도해야 되죠? 왜 교회에서는 설교시간에 주일예배 때마다 강해설교를 계속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기쁨, 감사함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그렇죠? 감사함으로 전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게 좋으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우리 이런 찬양도 하잖아요.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하나님. 그런데 정말 성령께서는 나와 함께 하시고 내 안에 내주하시고 인도하시겠다고 성경은 약속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예수님이 나의 구원자가 되시고 성령이 내 안에 함께 하셔서 오는 그 기쁨, 감사가 우리 삶에는 없죠? 왜 거기에 대한 확신이 없죠? 왜 그럴까요? 왜 요즘 시대는 그런 게 없어지고 있죠?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0-11절 보니까.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_고린도후서3:10

 

무슨 말이죠? 우리가 이 땅에서 받은 영광이 영광이긴 한데 진짜 큰 영광, 하나님이 하늘에서, 천국에서 베풀어주실 그 상급. 천국에 그 영광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받는 영광이 다 없어질 것이다. 내가 사도로서 받는 영광, 내가 교회를 몇 개를 세웠다, 편지를 이렇게 쓰고 이런 사역을 했다. 이런 영광은 너희들이 아무리 큰 영광을 이야기해줘도 나는 천국에서 하늘에서 받는 영광에 비하면 그 영광은 사라지는 영광들이다. 큰 빛 앞에 작은 빛들은 사라집니다. 촛불이 형광등 앞에 빛이 있나요? 그러면서 11절에 이야기합니다.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_고린도후서3:10-11

 

12절에

 

-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_고린도후서3:12-18, 요한복음21:1-18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_고린도후서3:12 

 

이 소망이 뭐에요?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큰 영광은 뭘까요? 그러니까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큰 영광,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큰 영광을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들은 무슨 영광에 취해있죠? 내가 더 잘났다. 내가 가진 지식이 더 뛰어나다. 나에게는 이런 은사가 있다. 이거에 빠져 있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사도바울이 큰 영광 앞에 그 영광도 필요한데, 너희들의 사역도 나쁘지 않은데. 너희가 큰 영광을 맛보지 못하고 이 같은 소망이 아직 없구나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이같이 소망이 있으면 담대히 말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비유를 듭니다. 수건 비유를 듭니다. 당시에 예수님 믿는 교회들, 유대인들 전통에 수건을 쓰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도 가톨릭은 수건을 쓰고 있는 곳이 많습니다. 여자들이 얼굴을 가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얼굴을 왜 가리고 있죠? 그런데 이것이 수건을 벗냐, 쓰냐의 논쟁으로 가면 되나요? 지금 그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금 사도바울이 이야기합니다. 그 수건이 마음을 덮었다고 합니다. 그 수건이 뭐라고 마음을 덮나요? 이 수건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요? 오기로 하는 신앙생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오기로, 내 의지로 내가 이거 지켜야지. 전통인데 내가 이거 꼭 해내고 말테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심 없습니다. 내가 장로로써 여태 해온 게 있는데. 권사로서, 목사로서. 내가 해오던 게 있는데. 이런 오기, 고집, 아집. 그러니까 지금 하나님이 말씀을 주셔도 그 말씀이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겁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여러분 신앙은 믿음으로 해야 하는데 오기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중에는 원망, 불평 이런 것만 남습니다. 오기로 했는데요. 내가 이렇게 살았는데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삶을 주시나요? 이런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그 구원이 감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고린도교회 성도가 지금 여전히 뭐가 없는 거죠? 지금 교회에 뭐가 없나요? 우리 신앙에 뭐가 없나요? 천국에 대한 소망, 하나님 영광에 대한 소망이 없으니까 은혜가 없습니다. 은혜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 은혜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에 은혜가 다 사라졌습니다. 수건을 써도 되고 안 써도 되는데 그것을 따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에서 배운 방식들로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합니다. 덴마크 교회를 보면서 키에르케고르는 한탄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사랑하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해서 살아야 하는데 교회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주일날 예배는 드리는데 주일에 교회를 가는데 그 삶은 계속해서 세상과 타협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중적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판단했냐면 사람들이 고난을 기뻐하지 않고 고난 중에 감사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는가? 라고 그의 저서에 썼습니다. 왜 고난이 왔을 때 기뻐하지 않을까? 하나님의 연단에 대해서 감사하지 않을까? 그것은 저 사람들이 진짜 은혜 받는 게 아니구나 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에 대해서 덴마크 국교회가 키에르케고르를 잡아 죽일 듯이 핍박했습니다. 듣기 싫으니까요. 타락한 교회 지도자들이 목회자들이 키에르케고르를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그의 친척이 그 교회 지도자였는데 그 친척이 키에르케고르가 죽었을 때 장례식도 치루지 않았습니다. 성도들에게 영향을 줄까 봐요. 예수님은 나의 구원자라고 하는데 실상은 그렇게 살지 않으니까 예수님은 구원 받지 않은 것입니다. 구원을 안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 구원 받은 사람은 구원 받은 것처럼 살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입니다. 맞잖아요. 거기에 무슨 논리가 필요하고 설명이 필요하나요. 한빈이는 오승주목사의 아들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는 제가 아빠인줄 이해하고 깨닫고 이런 것이 아니라 그냥 아빠인 것입니다. 그냥 사는 것입니다. 오승주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어야지, 우리 아빠가 오승주 목사야 믿어볼까? 이런 것이 아닙니다. 같이 살면서 체험되고 마음 판에 새겨졌습니다. 이 양반은 나를 절대 떠나지 않네, 평생 내 옆에 있네. 태어났을 때 그렇게 느꼈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서 유아기를 거치면서 이제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17절에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나요?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_고린도후서3:17

 

이 자유는 무슨 자유인가요? Freedom인가요? 아닙니다. 이 자유는 무슨 자유인가요? 세상이 이야기하는 아무렇게 살 수 있고, 내 맘대로 사는 자유인가요? 그 자유가 아닙니다. 이 자유는 내가 회개할 수 있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고 내가 내 삶을 변화시켜서 가꾸어서 주와 함께 살아가도록 바꿀 수 있는 죄에서 자유하다는 의미입니다. 이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엄청난 책임과 의무가 있는 자유입니다. 진정한 자유, 선진국의 자유는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법을 지키고, 공동체가 주는 질서를 지키는 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여기서 내 마음대로 살 것이고 사람도 죽이고 물건 빼앗고 신호등 어기고 교통사고 내도 감옥에 가지 않는 것을 자유라고 합니까? 그것은 절대로 자유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책임과 의무가 동반된 자유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 영접하면 당신 모든 문제 해결돼. 그거 불법입니다. 아주 나쁜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고 새 삶이 되어야 하나님 뜻대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응답 받아서 자식들도 잘되고 사업도 잘 될 거고. 뭐도 잘 될 거고. 여러분 그건 기독교 복음, 십자가 복음이 아닙니다. 교회가 타락했다는 증거 일뿐입니다. 그게 변질된 복음입니다. 어떻게 그게 복음입니까. 그것은 가깝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부모 자식 간에 제가 돈 많이 벌어야 한빈이 아빠입니까? 돈 많이 벌 때도 한빈이 아빠고 돈 못 벌 때도 한빈이 아빠입니다. 제가 화낼 때도 한빈이 아빠고 제가 기뻐서 한빈이를 사랑할 때도 한빈이 아빠입니다. 한빈이 아빠의 모습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늘 가식적으로 제가 늘 한빈이에게 잘 보이려고 매일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매일 게임을 둘이서 하고 그러면 한빈이는 어린 시절이 너무 행복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한빈이에게 진짜 아빠가 아닌 것입니다. 삯꾼 목사고 거짓 신인 것입니다. 진짜 한빈이를 사랑하는 진짜 아빠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타락하거나 목회자, 성도들이 변질되는 이유는 은혜가 없어서 그렇습니다. 은혜가 무엇인가요? 하나님 말씀이 우리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것입니다. 그 영이 주님의 영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게 우리를 자유케한다고 합니다. 그 은혜가 자유입니다. 은혜를 받았을 때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전에는 어떻게 되나요? 죄에 억매여서 사는 것입니다. 죄가 유혹하면 괴롭고 힘들고 마지못해 죄에 빠져들고. 주님 오늘도 연약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이렇게 살지만 은혜가 우리 안에 있잖아요? 말씀이 우리 안에 있잖아요? 그러면 유혹을 이길 수 있고. 나 유혹 아무것도 아닌데. 그거 필요 없는데. 나 승리할 수 있는데. 그것을 자유라고 하는 것입니다. 완전 승리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가 있으니라. 저는 예전에 은혜 받았다 하면 제가 찬양 좀 하다가 제가 감정적이니까 눈물도 나면 은혜 받았는줄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권사님처럼 기도하면서 눈물 나는데 눈물 안 흘리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감정은 감정이니까 그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설교를 들을 때 번뜩이는 깨달음이 저는 은혜라고 옛날에는 생각했습니다. 완전 무지했던 것입니다. 제가 교회사를 공부하고 신학책을 공부하고 성경을 수도 없이 읽으면서 확인한 바는 그런 것들은 쉽게 소멸되더라고요. 시험 들어서 소멸되고 자존심 상해서 소멸되고 죄에 물 들어서 소멸되고 다 사라집니다. 그것은 은혜가 아니구나. 그것은 내가 원하니까 내가 자극적인 것을 좋아하니까 그랬던 거구나. 그런데 진짜 은혜는 무엇이냐면 자유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우리를 자유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게 이해가 되시나요? 하나님의 영이 임한 곳에 완전히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영이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도 사람들도 목회자들도 돈 때문에 시험 들고, 자존심 때문에 관두고. 진짜 죄송하지만 주의 영이 임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마음 판에 새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을 사랑합니다. 베드로처럼 고백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정말 사랑하면 십자가에 주님이 죽으시는데 내가 부인할 수 있을까요? 그 뒤로는 베드로가 절대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알고 보니 은혜는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행동과 판단, 의지를 거기에 영향을 받는 것이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전부인가요? 네, 전부입니다. 기독교 신앙에 한 단어로 이야기하면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은혜를 사모하면 저는 성령께서 그 사람에게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저는 믿습니다. 은혜를 사모한다는 것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은혜를 왜 사모해야 하나요? 우리가 왜 거룩하려고 은혜 받은 사람으로 살려고 애쓰고 노력하죠? 그것이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말씀이 내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경건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마음 판에 새겨진다는 것이 조금 이해가 되시죠? 그래서 여러분 삶에 이 말씀을 내 마음 판에 새길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아, 목사님 사업한다고 제가 삶이 너무 바빠서 성경 읽을 시간이 없네요. 네, 계속 바쁘게 사시다가 지옥가시면 되겠네요. 계속 바쁘게 사시다가 말씀이 주는 자유함을 맛보지 못하시고 죄에 종노릇하시다가 인생 끝나면 되겠네요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렇게 말은 못하지만. 여러분 타락한 시대의 징조가 뭐죠? 갈수록 우선순위가 바뀌고 삶에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고 은혜 받는 시간들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목사님 우리 교회는 모여서 전도하러 안 가냐고. 네, 저도 가고 싶은데 성도들이 너무 흩어져서 살고 있어서 인천, 천안, 김포, 남양주에서 오시고 그러다보니 저희가 모여서 하기 쉽지 않네요. 이렇게 표면적인 답변을 했더니. 그 분의 질문이 그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다른 교회들은 모여서 전도 하고 그러는데 우리 교회도 다른 교회처럼 모여서 전도도 해야 부흥도 하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제가 언제 당신보고 교회 부흥을 걱정하라고 했는지. 얼마나 교회 부흥을 사모하시는지 그러면 개인의 삶에서 전도하시면 되죠. 아니 그래도 모여서. 맞아요, 모여서 전도하면 좋죠. 제가 그걸 나무라는 것이 아니고 그건 때가 되면 그렇게 하겠죠. 그래서 제가 그분에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집에 가셔서 자녀들과 남편과 또 직장에서 주변 분들에게 그런 삶을 살고 계시냐고. 그걸 못하니까 모여서 전도하러 가자고 하는 거죠. 로마서에 보니까 은혜가 있는 곳에 죄도 있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은혜와 죄가 같이 있을 수 있나요? 그 말이 아닙니다. 로마서는 어려운 말입니다. 은혜가 있는 곳에 죄가 있다고 그러나요. 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자기 모습들이 다 드러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래서 죄가 드러나서 뭐하는 것인가요? 주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죄가 드러나기 때문에 주님만 의지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게 은혜입니다. 회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회개하지 않고 살 수 있나요? 죄가 드러나는데. 은혜가 있어서 그것은 축복입니다. 그걸 아름다운 신앙생활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변화되어서 내 가정, 삶에서 하나님의 영의 직분을 감당하고 의에 직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고, 진리를 지키고 믿음을 지켜서 사는 것입니다. 그게 신앙생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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