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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2-11-06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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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 06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그날을 사모하고 있나요?
본 문 : 고린도후서 5:1-10

 

 오승주 목사

 

-우리가 여기에 있어 탄식하며_고린도후서5:1-3, 로마서8:18-24

 

신앙생활이나 우리가 지금 같이 교회를 세워가고 또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는데 있어서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이 올바른지 또 그 길을 가는 방식이 하나님 말씀, 성경적인지 잘 확인해봐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의 길라잡이, 기초가 되기 때문에 성경에서 하시는 말씀들, 단어들, 역사 이런 것들을 꼼꼼하게 잘 살펴봐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나 전 세계는 지금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대입니다. 정치가 양극화도 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도 극단적으로 사상, 이념에 빠져서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이런 대립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세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이 세상에서 혼란스럽지 않으려면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 미디어가 하는 이야기들을 잘 살펴보고 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게 뭐 틀리다 맞다 이것을 확인하고 가야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최소한 신앙인으로 그리스도인으로 올바른 삶을 산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그런 삶을 살아서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고 또 세상에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기도제목이기도 합니다. 오늘 고린도후서 5장 1-10절은 사후세계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돕는데 굉장히 많이 사용되는 본문입니다. 제가 어렵게 말했지만 주로 장례식에서 사용되는 본문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장례식에서 이 본문을 사용하여 설교한 적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다른 부분과 전혀 연결점 없이 사후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5장 1-10절만을 가지고 따로 사용하는데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죠? 자꾸 이 말씀이 원래의 본질, 말씀을 주신 이유들이 왜곡되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말씀들이 장례식에서 사용되다보면 사변화가 되고 원래 목회자가 장례식 때 하는 말씀이야 이렇게 되어 고착화가 되어버리면 원래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 삶에 주는 교훈들, 또 하나님의 뜻, 계획들을 찾기가 어렵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주 본문 4장 16절부터 5장 10절까지 통합된 단락을 형성합니다. 4장 16-18절이 없이 오늘 5장 10절까지의 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경을 보면 16절 ㅇ 되어 있고 5장이 나눠지지 않고 연결된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_고린도후서5:1

 

오늘 1절에 보니 장막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장막은 우리가 다 압니다. 장막 집이 무너지면 이것은 우리의 육신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4장 16절에 나오는 겉사람의 낡아짐을 이해를 해야 합니다. 우리 겉사람, 우리 육신의 낡아짐을 이해를 해야 되겠고 그리고 4장 17절의 진술도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_고린도후서 4:17

 

바울은 겉사람의 낡아짐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겉사람의 낡아짐은 단지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 겉 육신이 늙어서 낡아진다 이런 표현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이런 표현일수도 있는데 지금 바울이 처한 상황은 극심한 핍박, 환난, 고난이 자기 육체에 고통을 안겨준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후자가 더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바울은 겉사람의 낡아짐에 굉장히 많은 관심을 많이 뒀습니다. 이 두 가지가 다 포함되어 있겠지만 단지 나이가 들어서 낡아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약간 반증하는 표현이긴 한데 바울은 지금처럼 어떤 사변화 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 성도들이 과연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몇 명이나 될까요? 거의 다 사변화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들이 이게 기독교신앙이야 하는 것들을 다 붙잡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사변화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한 변화를 주장했던 바울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바울이 바로 했던 것이 뭐에요? 유대 공동체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여러분 만약 사변화된 믿음이라면 유대 공동체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절대 못 나옵니다. 그 당시 유대 공동체는 엄청나게 관계가 좋았고 쉽게 나갈 수 없는 엄청난 조직체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경제, 문화, 명예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이 유대 공동체에서 나왔다는 것은 단지 목숨 걸고 고난, 핍박을 택했다 이런 정도가 아닙니다. 이 유대 공동체가 틀렸다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또 성경에서 하는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믿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다르게 살고 있는 유대 공동체에서 바울은 과감히 나왔습니다. 그것 때문에 유대 공동체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게 사변화 된 믿음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유대 공동체를 나와서 그리스도 공동체에 들어가기를 힘썼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는지 아세요? 왜냐하면 그리스도 공동체 주체가 되는 사람들은 전부 못 배우고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 공동체에서 바울은 리더였고 지도자였습니다. 유대 공동체에 비하면 이제 막 형성된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 이제 막 시작된 초대 교회의 공동체 안에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존심도 내려놔야 되고 수준도 맞지 않았고. 그런데 심지어 바울이 거기 들어가서 뭐라고 표현하냐면 나는 사도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거기 가서 리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얼마나 어려웠는지 바울이 그 어려움에 대해서 서신서 곳곳에 그런 표현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것을 너무 기쁘게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섬기는데 얼마나 열심히 섬겼는지 여러분 아시죠? 헌금을 가져다가 예루살렘에 교회에 가져다준다던지. 또 각 교회 지도자를 세우는 문제에 대해서 자기의 지식과 경험들을 다 동원한다든지. 그런 일들이 되게 많았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공동체의 사도야 라고 말하면 유대 공동체에서는 완전히 난리 나는 것입니다. 쟤 완전 배신자야. 그런데 굳이. 내면적으로 숨어서 신앙생활해도 되잖아요? 여러분 요즘 그런 그리스도인들 얼마나 많아요. 내가 예수님 믿는다고 말하면 직장에서나 사회적으로 손해를 보고 창피를 당할 것 같으니까 나는 마음으로만 잘 믿으면 되지. 내 중심으로만 장로고 권사고 목사라고 말하면 되지. 내가 중심만 깨끗하면 되지 이런 신앙이 얼마나 많나요.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예수 믿는 것, 내가 예수님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는 삶을 완전히 오픈했습니다. 그가 무시하고 핍박하고 아무것도 아닌 그 그룹에 들어가서 스스로 사도가 되고 그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헌신하는 자리의 밑바닥에 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굉장합니다. 그래서 그냥 내면적으로 누구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복음 누리다가 천국 가면 되지 이런 게 아니라 그는 믿음을 행함으로 말미암아 핍박과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천국에 대한 확신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성경에 밝았고 내세관이 분명했다고 말할 수 도 있겠지만 사실 그게 아닙니다. 바울에게 왜 천국에 대한 확신이 생겼죠? 그가 다메섹에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여러분 엄청나게 강력했습니다. 예수님이 다메섹에서 핍박자 사울을 만나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바울은 더 이상 자기의 모든 지식을 자랑할 이유가 사라졌습니다. 그가 경건하게 살았던 모든 삶도 주님 앞에서는 한낱 부끄러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여러분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체험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바울은 구약의 모든 내용이 예수님을 만난 이후로 다 이해가 되고 깨달아졌습니다. 영적인 세계, 천국, 이 땅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지, 왜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는지, 구약의 역사가 왜 그랬는지, 십계명이 무슨 의미인지.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모든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진짜 중요한 문장입니다. 탄식하며. 이 내용은 영원한 집에 가고자하는 마음이 탄식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 천국에 대한 사모함이 어느 정도였냐면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이 탄식이 될 정도입니다. 가야 되는데. 이것을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요? 저희 아들이 진짜 가고 싶은 곳이 키즈 카페입니다. 친구들과 키즈 카페를 가기로 했는데 감기에 걸렸습니다. 한빈아 너 키즈 카페 못 가. 안 돼, 가야 돼. 나 키즈 카페 꼭 가야 돼. 탄식입니다. 못 가. 감기 옮겨서 안 돼. 너 열나서 안 돼. 가고 싶단 말이야. 뭐죠? 탄식입니다. 바울이 그 탄식을 하는 것입니다. 안타까울 정도로 주님의 나라를 흠모하고 사모한 것입니다. 그가 소아시아 지역을 다니면서 1-3차 전도여행을 다니면서 천국에 대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나는 목사니까 복음 전해야 돼. 이런 내용이었을까요? 나는 전도사니까 복음 전해야 돼. 나 권사고 장로니까 내가 그래도 복음은 전해야 돼. 이런 내용이었을까요? 아닙니다. 완전 다른 개념입니다. 그런데 그 탄식으로 뭘 했냐면 2절 하반절을 보세요.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 문장을 이해하셔야 오늘 본문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사모하라. 이 말씀을 설명해주는 것이 로마서 8장 18절에서 24절입니다. 로마서 8장을 보지 않고는 우리 처소로 덧입는다는 것을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로마서 8장 18절부터 24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우리의 육체는 다 썩어지고 마귀의 종노릇해야 됩니다. 그런데 거기서 해방 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_로마서 8:18-22

 

뭘 탄식하고 무슨 고통을 겪고 있다는 말인가요?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될 것 이 말입니다.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_로마서 8:13-24

 

로마서에 보면 그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몸에 속량으로 해석되는 양자 될 것을 기다리고 탄식한다고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양자가 될 것을. 그 말은 뭐에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과 개념이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내가 양자가 될 것을. 양자는 무슨 말이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아들, 딸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양자됨의 은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게 구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양자삼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덧 입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오면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는다는 표현을 써 놨습니다. 덧입는다는 것은 무슨 표현이에요?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것을 벗고 새 옷을 입는다는 것인가요? 물론 그렇게 바울이 쓰기도 했지만 덧입는다는 것은 위에 입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양자됨과 처소로 덧입기를 이 같은 의미로 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 번뜩이는 생각이나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재치, 대학 교수가 똑똑해서 목사님 설교를 잘 이해하는 것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처소. 처소는 뭐에요? 하나님 나라의 집이죠. 우리 육신을 집으로 표현했습니다. 장막집. 하나님 나라에서 오는 집. 뭐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는 표현을 써놓은 것입니다. 바울은 예순미을 만난 이후에 양자가 되려고 얼마나 탄식했는지, 천국의 옷을 입으려고 얼마나 사모했는지 우리는 알 수 있겠죠. 그래서 우리가 천국을 사모한다는 것은 천국에 입성하고자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양자가 되려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으려고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뭐에요? 그리스도인의 성화. 우리가 거룩해지려고 하는 거룩한 새로운 본성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겟죠. 그런데 오늘 3-4절에 보니까 또 한 번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_고린도후서 5:3-4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_고린도후서5:4-7, 빌립보서3:21, 요한복음20:29

 

엄청 중요한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습니다. 벗고자 함이 아니고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벗고자 함은 육체 없는 영혼이라는 벗음이겠죠. 왜 이런 이야기를 했냐면 이 당시에 고린도교회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미쳤던 이단이 있는데 그게 바로 영지주의입니다. 이 영지주의를 염두해 두고 이 글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영지주의자적 사고방식은 이렇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영혼의 해방을 구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여러분 이게 굉장히 있어 보이잖아요. 육체는 쓸모없는 것이고 육체의 감옥으로부터 내 영혼이 해방되는 것을 구원이라고 가르치는 것이 영지주의자적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육체는 안 된다. 육체는 변화될 수 없다. 육체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수 없다. 맞나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신데 우리 육체를 못 변화시키시나요? 성경에 분명히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육체도 완전히 부활하게 됩니다. 완전체로. 그게 우리가 가져야 할 말세 때의 종말론적인 믿음입니다. 그런데 영지주의자들은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영혼만 깨끗하면 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게 지금도 구원파라는 이단으로 영지주의자적 사고방식이 한국교회에 들어와 있습니다. 여러분 대한민국 교회에 구원파라는 이단 말고 정통교회에도 이런 사상들이 쫙 깔려있습니다. 수많은 목회자들이 이 사고방식, 이 신학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합니다. 제가 여러분 말씀드렸죠. 저희 교단 어떤 목사님이 주일에 설교를 하는데 제가 들을 때 설교 내용이 이상합니다. 원고를 살펴보는데 신천지 교리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 준비를 안 하고 그냥 인터넷에서 본문 쳐서 쫙 나오는 설교를 가져다 한 거죠. 그게 신천지 것인지 확인을 안 했겠죠. 이렇게 엉터리입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할까요? 그 교리를 구분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런 것들이 우리 안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게 타락하고 변질되는 것이 뭐죠? 육체는 죄 지어도 괜찮은 것입니다. 내 영혼만 깨끗하면 돼. 내 마음만 깨끗하면 돼. 내 중심만 깨끗하면 돼. 맞나요? 우리 몸은 자꾸 음란하고 나쁜데 가서 범죄하고 그러는데 주일에 교회 와서는 주님 내 영혼을 구원해달라고, 내 영혼만 깨끗하게 해달라고 이런 신앙생활이 맞나요? 바울은 이렇게 사변화된 신앙, 영지주의적 사고방식, 이단에 미혹된 신앙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 영혼, 삶이 주 앞에 하나님 앞에 온전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을 지금 고린도교회에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을 벗는 것이 아니고 이 육신까지도 살리신, 이 육신까지도 회복시키시고 변화시키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입니다. 덧입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도 귀하게 여기십니다. 어찌 하나님이 당신의 독생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피 값으로 내어주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나는 네 영혼만 구원할게, 네 마음만 구원할게.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로다. 이 고백이 얼마나 중요한 고백인가요. 벗은 자들로. 영지주의자들은 우리 육신을 벗고 우리 영혼만 하나님 앞에 간다는 이런 그릇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바울은 반대로 이야기합니다. 나는 벗은 자들로 하나님 앞에서 발견되지 않고 싶어. 내 육신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내 삶이 변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님 앞에 가고 싶지 않다 라고 설명할 수 있겠죠. 얼마나 많은 교회와 신자들이 내 삶이 변화되지 않은 채, 값싼 구원론, 그릇된 복음, 값싼 복음 이런 것을 듣고 예수님 영접하고 나 하나님 자녀 됐어 하고 그의 삶은 그대로 변화 없이 죄악 속에, 세상 속에 있는 상태로. 그런데 장례식 치를 때만 그래도 집사라고 장로라고 찬송가 틀어두고 설교하고 하는데 얼마나 불편한지. 한 번도 신앙생활 해보려고 애쓰지 않는 상태에서. 많은 의구심이 듭니다. 그게 과연 바른 신앙인가.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고.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나는 벗은 상태로 가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자가 되어,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발견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금 사도 바울은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갈망하는 것은 육체적 실존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히 하늘의 몸을 입게 되는 것을 갈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가 많겠지만 빌립보서 3장 21절에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_빌립보서 3:21

 

하나님께서 우리의 낮은 몸을 그냥 버려두지 않고 낮은 몸을 지옥에 내버려두지 않고 세상에 쓰레기처럼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_요한복음 20:29

 

요한복음에도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었다면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이 변화되려고 애쓰는 삶이어야 된다. 5절 보세요.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우리가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을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그것에 대한 증거로. 보증 아시죠? 우리가 보증금을 건다고 그러잖아요.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덧입었을 때 오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보증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죠?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_고린도후서 5:6-7

 

우리가 육체 속에 있기 때문에 주와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천국 보좌에 계시고 영적인 존재이고 아직 죽지 않아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하고 있지 않은 상태인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 때에는. 그래서 주와 따로 있는 줄 아노니. 그래서 우리가 보지 않고 요한복음 20장 29절처럼 보지 않고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 말씀으로 말씀을 따라서 천국이 있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실존은 아니니까. 우리가 지금 천국에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 이야기를 사도 바울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그날을 사모하고 있나요?_고린도후서5:8-10,사도행전18:12-17,로마서14:8-12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차라리 몸을 떠나서 죽고 천국에 가서 함께 있고 싶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9절 보세요.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힘쓰다, 애쓰다. 애쓰는 삶, 힘쓰는 삶. 뭘 힘써야 되고 뭘 애써야 될까? 바울은 왜 애쓰며 살았을까요? 소망이 있기 때문에,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이것을 사모하는데 9절에 보니까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이게 사실 우리가 우리의 죽음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소망은 빨리 천국에 입성하는 건데 빨리 천국에 가고 싶은데. 그런데 그것은 우리의 선택도 아니고 우리의 결정도 아니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한정되어 있지만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모르고. 주님이 부르실 때 기쁘게 갈 수 있기를 우리가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우리가 결정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자기 목숨을 내어 던지는 분들도 자기 목숨을 자기가 어떻게 하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 목숨을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논리적으로 따지면 자기 목숨을 자기 뜻대로 한 것이 아니잖아요. 바울은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정할 수 있어. 우리가 결단할 수 있는 게 있어. 그게 뭐예요?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거야.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거야. 우리가 다짐할 수 있는 거야. 그것은 우리의 선택이야. 하나님이 우리에게 의지를 주셨고 의지로 선택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할 수 있잖아. 우리가 죽는 것은 우리 마음대로 못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우리가 결정할 수 있잖아. 그래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나는 몸으로 떠나든지 아니든지 언제나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결심하는 것입니다. 이 결심이 우리 삶에 가치관을 만들고 우리 삶에 방식을 만들어냅니다. 그렇죠? 모든 인간은 결심, 결단, 결정 이런 것들이 그 삶에 가치관을 만들어내고 방식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저희 아버지가 술을 좋아하셔서 저는 술을 먹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신앙과 상관없습니다. 제 믿음과 상관없습니다. 그냥 어렸을 때 나는 술을 절대 입에 대지 않아야지 결심을 한 것입니다. 그게 제 삶에 방식이 되고 제 삶에 가치관이 된 것입니다. 제 별명이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천연기념물입니다. 술을 한번 안 먹은 사람이에요. 저는 소주 맛을 모릅니다. 입에 대본 적이 없습니다. 무슨 맛, 느낌인지도 모릅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와인은 입에 대본 적 있습니다. 그래서 와인은 무슨 맛인지 알겠어요. 가끔 생각이 납니다. 저는 와인은 좋은 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진짜 소주 이런 것은 입에 대본 적이 없습니다. 무슨 맛인지 아예 모릅니다. 그러니 그게 제 삶의 방식, 결정입니다. 그러면 제 삶은 술 먹는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좋아하게 되고 운동을 좋아하게 되고, 술 취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결정, 결심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나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자기 인생을 그렇게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날을 사모하는. 주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그날을 사모하는 바울은 이땅에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그 결심은 그로 하여금 더욱 삶을 점검하고 절제하고 아껴 교회를 세우고 주의 복음을 위해 힘쓰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다. 이렇게 결정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바울은 그 결심이 주님을 진짜 기쁘시게 하는 삶으로 인생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오늘 마지막 절에 보니까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_고린도후서 5:8-10

 

이 심판대는 사도행전 18장 12-17절에 보면 나옵니다.

 

12.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유대인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여 법정으로 데리고 가서 13. 말하되 이 사람이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사람들을 권한다 하거늘 14. 바울이 입을 열고자 할 때에 갈리오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너희 유대인들아 만일 이것이 무슨 부정한 일이나 불량한 행동이었으면 내가 너희 말을 들어 주는 것이 옳거니와 15. 만일 문제가 언어와 명칭과 너희 법에 관한 것이면 너희가 스스로 처리하라 나는 이러한 일에 재판장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고 16. 그들을 법정에서 쫓아내니 17. 모든 사람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법정 앞에서 때리되 갈리오가 이 일을 상관하지 아니하니라_사도행전 18:12-17

 

바울이 그 당시 고린도지역에 유대공동체가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그래서 총독 갈리오 앞에 서게 됩니다. 그래서 갈리오 앞에 섰는데 그냥 선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심판대 앞에 끌려 나왔습니다. 그 당시에는 총리가 죽여라고 하면 목 잘려서 죽이기도 하고 목을 매달려서 죽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고대 영화 많이 보셨죠. 그게 심판대입니다. 그 당시 강력한 정치세력이었던 유대인들에 의해서 심판대 앞에 나와 끌려 나옵니다. 그 말은 바울은 이미 심판대가 얼마나 두렵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 경험 때문에 우리가 죽고 나서 진짜 심판대가 어떤 의미인지를 지금 바울은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심판을 받는 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두고 로마서 14장 8-12절에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삶을 정돈하고 살아야 될 필요가 있다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자세히 보시면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8-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이 말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가장 큰 죄가 형제를 업신여기는 죄라는 것입니다. 형제를 비판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그리스도인의 죄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1-12절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회개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12. 이러므로 우리 각 사람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_로마서 14:8-12

 

우리가 살았던 삶을 하나님 앞에 다 이야기해야 되는 때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영지주의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요즘 영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목회자들 설교를 듣자면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만 있으면 된다는 식으로 설교를 합니다. 우리의 삶은, 육체는 복음에 합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설교를 하고 이해합니다. 성도들도 그렇게 이해합니다. 타락한 교회, 타락한 목회자, 타락한 성도들, 직분을 감당하지 않고 온전한 주일을 보내지 않고 그리스도의 삶을 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두렵지 않으세요? 저는 두렵습니다. 제가 매일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살지 않은 삶에 대한 두려움이 저는 있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물론 우리는 연약합니다. 우린 다 부족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일에 힘쓰라, 애쓰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오랫동안 교제했던 가정이 있습니다. 이 가정이 얼마 전에 교회를 옮겨서 영국 교회를 갔습니다. 저에게 편지도 오고 연락도 주고받고 있습니다. 영국 교회 이러면 우리는 다 타락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있고 소망도 없고 이런 생각을 하잖아요. 그런데 그 영국교회에 얼마나 하나님이 뜨겁게 은혜를 부어주시는지. 아이들만 400명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 영국교회가 성전건축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유럽에서 성전건축을 할 이유가 있나요. 그런데 성전건축을 하고 또 성전건축을 하고 나면 장애인 학교를 세우려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말씀드립니다. 얼마나 예배 때마다 뜨겁게 찬양하고 결단하고, 결심하고 그리고 삶으로 돌아가면 말씀에 순종해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들이 우리가 본받고 비슷하게 가야 될 방향이 아닌가. 요즘 마치 가짜 뉴스를 접한 사람들이 그게 사실인 것처럼 살아가는 대중들의 삶을 보면서 우리도 잘못하면 영지주의자들의 영향을 받은. 아 우리 삶은 복음에 합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우리의 육체는 복음에 합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고 수많은 타락 속에 있는. 우리는 그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속에 있다가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 뜨거움을 잃어버리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그 뜨거움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의 뜨거움이 올바른 그릇 안에 있어야 되고 올바른 길 위에 있어야 되고 올바른 방향 속에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우리가 목회자분들 계시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지 아세요? 목회를 어떤 형식이나 남들에게 보여지는 어떤 것으로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인지. 과연 우리가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리가 믿음을 고백할 수 있는 길인지. 우리가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어서 우리의 믿음을 지켜서 주님, 믿음을 지켰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길인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실체입니다. 살아계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 그래서 우리가 이 험한 세상에서 거룩하게 살고자 애쓰는 것은 말씀으로 우리를 이끄시고 성령께서 우리가 기도할 때 힘주시고 가르쳐주시며 위로해주시는 것. 그런 실체가 없이 우리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변화 되어서 관념만 가지고 지식만 가지고 절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고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기도 없이 신앙생활을 어떻게 승리할 수 있습니까? 성령의 역사 없이 우리가 어떻게 올바른 믿음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헌신과 봉사 없이 직분을 감당하지 않고 어떻게 상식적으로 우리 자녀들에게 건강한 교회를 물려줄 수 있습니까. 이기심에 가득한 이 시대 많은 크리스천들이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 기도하지만 우리 후대와 다음 세대와 이 나라와 민족에 빛과 소금이 되는 교회를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그 공동체 일원으로 사도방루처럼 헌신하고 희생 없이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야고보 사도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 전체에 깔린 기독교 신앙에 핵심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그 날을 사모한다면 주 앞에 서는 날을 우리가 정말 사모한다면. 우리는 다시 기도하는 자리로 말씀에 순종하는 자리로 가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최소한 우리의 양심이 거리낌 없이. 그래서 우리는 늘 연약하기 때문에 결심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중요한 단어가 결심 그리고 애쓰다, 힘쓰다 표현입니다. 사도바울은 계속 그런 표현들을 씁니다. 우리는 늘 결단해야 하고 애써야 됩니다. 애쓰지 않고 열매가 있을 수 있나요. 노력하지 않고 부부관계가 좋아질 수 있나요. 노력하지 않고 부모 자식 간에 관계가 좋아질 수 있나요. 노력하지 않고 우리 삶이 반듯하고 멋지고 아름다울 수 있나요. 점검하고 다듬고 고쳐가야 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신앙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 결심이 다시금 우리에게 필요한 때입니다. 지금 우리는 다시 가슴이 뛰어야 합니다. 그 가슴 뛰는 은혜가 우리에게 다시 있어야 하는데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진짜 예수 그리스도 옷 입기를 사모하라. 우리가 정말 우리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교회,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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