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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2-10-02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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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0월 02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주님의 위로
본 문 : 고린도후서 1:1-11

 오승주 목사

 

오늘부터 고린도후서를 나누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후서는 조금 많이 차이가 있습니다. 또 전혀 다른 서신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마 고린도전서의 느낌이 고린도후서에서는 전혀 느껴지지 않고 전혀 다른 형태의 말씀이 될 거 같습니다. 

 

1. 위로(파라칼레오)의 하나님_고린도후서1:1-4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_고린도후서1:1-4

 

먼저 이해할 것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후서가 1편, 2편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도 사실 두 번째 서신서입니다. 고린도에 보낸 첫 번째 서신서가 있고 두 번째 서신서가 바로 고린도전서고 또 고린도전서와 후서 사이에 세 번째 서신서가 있고 오늘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네 번째 서신서입니다. 지금 이게 무슨 말인지 헤깔릴 수 있는데 4개의 서신서 중에 2개의 서신서만 성경에 정경으로 채택되어 올라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첫 번째 서신서의 내용은 무엇이고 세 번째 서신서의 내용은 무엇인가 추정만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두 번째 서신서인 고린도전서는 여러분이 잘 아시다시피 디모데를 통해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다 소논문 같습니다. 은사는 이런 거야, 사랑은 이런 거야, 교회는 이런 거야, 지체는 이런 거야. 이런 답변을 약간 레포트 식으로 써서 조금 딱딱하게 정답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서론, 본론, 결론 이런 식으로 써서 기록된 것이 고린도전서입니다. 고린도후서를 읽어보면 전서와 전혀 다릅니다. 갑자기 바울의 괴로움, 고난. 딱 보면 뭘 이야기하냐면 바울이 자기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되게 합니다. 또 바울이 안 하던 자랑도 합니다.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실 지금 고린도전서 편지를 쓰고 나서 그 사이에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가 고린도전서를 받고 변화되면 좋은데 변화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외부에서 온 고린도 밖에서 온 거짓 선지자들, 거짓 교사들. 바울이 정확히 이야기했습니다. 거짓 사도들로 인해서 바울과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관계가 더 틀어졌습니다. 그게 고린도후서에 나와 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자꾸 자기가 사도임을, 자기가 이런 사역을 하고 있음을 고린도교회에게 자꾸 증명하려는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이게 바울이 나 이런 사람이야 이렇게 증명하는 그런 뉘앙스가 아닙니다. 사실 바울이 개척한 교회 아닙니까. 바울이 개척한 교회인데 고린도교회가 외부의 목회자들, 외부의 사도들로 인해서 바울에게 무엇을 요구하냐면 당신 능력 없는 사도 아니냐? 당신 무능한 사도 아니냐? 그리고 당신 진짜 사도 아니지 않냐? 이런 식으로 비아냥대고 또 그런 식으로 신뢰를 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개척한 교회가 얼마나 많아요? 바울을 지지하는 교회도 얼마나 많고. 고린도교회 하나쯤 포기하고 가도 될 거 같은데. 나중에 바울이 고린도지역을 넘어갈 때 얼마나 급하면 배를 타고 갑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안타까워하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장면입니다. 사실 고린도후서는 그런 배경을 가지고 고린도교회가 완전히 회복된 전제로  디모데와 함께 쓴 서신서고 이 서신서는 누가 들고 가죠? 디도라는 제자가 들고 갑니다. 디도가 이 편지를 들고 가서 또 고린도교회에서 사역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이 편지로 인해서 고린도교회가 완전히 회개하고 돌아서서 나중에 이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3개월을 고린도에 머물면서 교회가 완전히 회복되고 또 거기서 로마서를 쓰게 된다. 이게 고린도전서, 후서의 배경입니다. 

성도들은 흔들리고 무너질 수 있습니다. 또 삶도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타락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게 참 어렵습니다. 옛날에는 교회가 몇 개 없었으며 또 분명하게 사도들 그리고 정통성 이런 게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신약 성경이 없었습니다. 바울의 서신서 이러면 성경은 아닙니다. 그렇죠? 그 당시에는 모세의 책, 구약 성경 이런 것으로 신앙생활을 하던 때입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구약 성경을 인용하고 사용은 했지만 지금처럼 성경책으로 있는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사실 교회 안에 거짓 선지자가 들어오고 거짓 목회자들이 들어오고 얼마나 혼란스럽나요. 유튜브만 가도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아멘 하면서 설교를 듣는데 제가 보니까 이단인데? 사이비인데? 말씀이 너무 좋으니까 설교가 너무 좋으니까 그 사람이 뒤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모르고 그냥 아멘 하고 듣는 것입니다. 요즘은 그런 것을 분별할 능력이 없으니까. 그래서 지금은 하나님께서 그때보다 훨씬 좋은 기준, 정통을 주셨습니다. 그게 성경입니다. 여러분 성경 66권이 우리 손에 들려진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100년-150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지금 우리가 성경을 가까이 하고 읽으라고 권면하는 것은 신앙을 분별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러야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성도들도 지금 엄청 흔들리고 무너지고 삶이 완전히 타락해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영적으로는 교만하고. 그러니까 바울이 계속해서 신실한 제자들을 보내면서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 내용들이 오늘날 우리 손에 성경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후서 전체의 내용을 살펴보면 자기 마음속에 있는 고백들을 어떤 형식도 없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는 형식이 갖춰져 있습니다. 은사는 이런 거야 이런 식으로. 그런데 고린도후서는 대중이 없습니다. 그냥 속마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헬라어 중에 가장 어려운 헬라어를 많이 써놨습니다. 원래 우리도 사람과 대화할 때 마음 속 이야기를 하면 어려운 단어가 나오는 것처럼 고린도후서가 신약 성경 중에 가장 어려운 표현들이 많이 들어있는 성경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언어학자들은 신학자들은 고린도후서의 언어가 가장 어렵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번역이 굉장히 어려웠을 것입니다. 바울이 마음을 이야기하니까.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를 하냐면 내가 복음으로 변화된 내 마음, 내 심령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귀한지. 그래서 내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너희들도 진짜 만났으면 좋겠다고 간절한 호소를 하는 것이 고린도후서의 내용입니다. 결과적으로는 고린도교회가 다시 세워집니다. 바울이 얼마나 많이 애썼는지 알겠죠. 4번의 편지를 쓰고. 신실한 디모데, 디도와 같은 제자를 보내고. 성경을 읽다보면 재밌는 것들이 많습니다. 나중에 디도를 통해서 네 번째 서신인 고린도후서를 보냈는데 디도가 돌아오지 않습니다. 디도를 만나기로 했던 곳에 만나지를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전화기도 없고 메일도 없으니까. 어떤 약속된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하루만 늦게 가도 만날 수 없는 때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굉장히 낙심한 장면이 성경 곳곳에 있습니다. 내가 디도를 만나지 못해서. 그러니까 고린도교회가 타락하고 변질되어 있는 상태로 다른 지역으로 사역을 떠납니다. 디도를 나중에 만납니다. 고린도교회가 변화된 내용들 전해 듣고 바울이 기뻐하고 감사한 내용이 서신서 곳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바이블스쿨 때 이런 신학 강의라든지, 묵상에 대한 강의를 놓치지 않고 들으셔야 설교를 훨씬 더 풍성하게 들으실 수 있습니다. 그런 훈련을 받으셔야 합니다. 성경에 관한 훈련들. 우리가 성경을 읽는 훈련들, 방법들. 우리 삶에 묵상 할 수 있는 방법들을 들으셔야 아, 성경은 그냥 읽는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도, 가스펠교회도 이런 고난, 어려움을 당할 수 있겠죠? 사실 교회 전체적으로 그렇지는 않지만, 저희 교회도 성도들 개개인으로 살펴보면 이런 고난, 어려움들 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타락한 성도들이 있을 수도 있고 신앙이 흔들리고 무너져있는 성도들도 있을 수 있겠죠. 그런 성도들에게 오늘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자기 신앙고백, 간증, 자기 마음에 있는 호소들을 전달하는 내용입니다. 고린도후서를 설교하고 강해하는 동안 여러분에게 진짜 은혜가 있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위로하심,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발견되어져서 회복되는 축복들이 있기를 원합니다. 고난 이러면 두 가지 고난이 있습니다. 신자들에게는 두 가지 고난이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사람이 겪는 고난입니다. 육신적인 고난입니다. 그건 뭐죠? 그 시대의 질병이라든지 어떤 독재자 시대라면 그 독재자로 인해 겪는 어려움이라든지, 아니면 전쟁 중에 있다면 그 전쟁으로 오는 피폐한 삶, 황폐한 삶의 그런 고난이라든지.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겪는 고난입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고난을 겪게 됩니다. 여러분 나라가 건강하지 않으면 고난을 겪게 됩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해서 핵을 쓰니 안 쓰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우리가 우크라이나에 산다고 생각해보세요. 맨날 총 소리 들리죠, 폭탄이 언제 터질지 모르죠. 얼마나 불안하겠어요. 여러분 우리 민족도 전쟁의 역사를 겪어 와서 늘 그런 불안함이 있습니다. 그거 무시 못 합니다. 그러니까 질병이 돌아서 질병 때문에 내가 뭐 고통사고가 났다, 암에 걸렸다 이런 것만 해도 얼마나 고난이고 환난이에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에게는 그런 고난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삶을 헤쳐가고 또 극복해가고 넘어서기 위해서 그런 고난들을 다 감당하고 이겨내고 또 뚫고 지나가야 민족들이 살아남고. 그런 백성들이 또 어려움을 넘어서서 발전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저와 여러분에게는 또 하나의 고난이 있는데 그게 예수 믿는 사람의 고난이에요.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고난. 그게 뭐죠?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죄에서 건지셔서 천국 보좌, 하나님이 계신 당신의 나라에 우리를 입성시키시는 거잖아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육신을 입고 고난, 고통을 당하셔서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는 건데. 그런데 왜 예수 믿는 사람에게 고난이 있고, 왜 고통이 있어야 되냐? 당연하죠. 예수 믿는 다는 것은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했습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것을 육신적으로도 표현했습니다. 옛 육신을 벗어버리고 새 육신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뭐예요? 우리가 받는 고난, 고통은 죄를 짓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이제 그 죄에서 벗어나야 되니까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고 살다가 이제 천국을 바라보고 살아야 되니까 거기에 환난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거기에 고통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괴롭고 어려운 것입니다. 다윗이 기도하는 시편을 보면 그 괴로움들을 되게 많이 표현했죠.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힘들고 어려움을 지나서 보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있고 기쁨이 있고 감사가 있다고 늘 고백합니다. 여러분 신앙은 우리가 이 세상과 다른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그 고난이 없는 고통이 없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세상에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해도 고난, 고통이 있잖아요. 우리가 학교 교수만 되려고 해도, 돈 버는 사장님이 되려고 해도, 좋은 식당을 만들어서 장사를 잘 하려고만 해도 그냥 되나요? 운동선수가 메달을 따려고 해도 그냥 가만히 있으면 메달을 딸 수 있나요? 거기에 고통이 반드시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 즐거움이 없는 고통이 아니잖아요. 목적이 있고 방향이 있으니까. 사도 바울은 지금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위로라는 단어가 정말 많이 나옵니다. 이 위로라는 단어가 헬라어로 파라칼레오라는 단어입니다. 파라칼레오의 원 뜻이 무엇이냐면 곁에 불러서 다독거리다 이런 뜻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위로가 뭐냐면 하나님이 우리를 곁에 불러서 위로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곁에 두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잖아요. 저희 교회 성도님들 숫자가 많이 늘어서 한 명 한 명 다 심방을 다닐 수 없지만 그래도 병원에 가고 심방을 요청하면 가서 이야기 들어주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세 시간이고 같이 공감해주고. 여러분 위로는 그런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답을 몰라서 목사를 부르겠어요? 가서 메시지 잘 못합니다. 예배 잘 드리지 않습니다. 진짜 위로는 그런 거잖아요. 손 한 번 잡아주고. 인도에 영국 선교사님이 선교를 하러 가셨습니다. 인도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는데 원주민 중 한 가정이 아이들 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원주민들끼리 다툼이 많은데 전쟁 중에 아이 둘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빠는 괜찮은데 엄마가 멍하니 있었습니다. 저 엄마를 위로해주고 싶은데 위로를 해줄 수가 없고 복음을 전해주고 싶은데 복음을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은 내 마음을 몰라 이렇게 나오니까. 아이 둘을 잃었으니까. 선교사님이 그 소식을 듣고 원주민 엄마에게 찾아간 것입니다. 아이 둘을 잃어버리셨다면서요? 저기 하얀 옷을 입고 있는 이 여자 분도 아들 둘을 잃어버렸어요. 그러니까 그 원주민 엄마가 눈을 번쩍 뜨더니 그 부인에게 가서 어떻게 어려움을 이겨내고 그랬냐고. 그러더니 부인이 손을 꼭 잡고 저도 아이 둘을 잃어버렸는데 괜찮아요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왜요? 어떻게 괜찮아요? 나중에 아들들을 천국에서 만날 거거든요. 그래서 저는 슬프지만 그 소망을 가지고 인도에 왔어요. 그래서 그 부인이 원주민 부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양육하고. 나중에는 인도를 사역하는 아주 중요한 사역자가 됐습니다. 그 부인은 선교사님 아내였습니다. 선교사님이 아들 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그런 일들이 우리 일상에 얼마나 많겠어요.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그런 위로가 따르는 것입니다. 곁에 불러서 위로해주신다. 우리가 정말 이 위로를 받고 싶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고난당한다, 우리가 환난 당한다는 말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환난, 고난, 핍박, 박해 이게 뭔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정말 웃긴데 어떤 분은 자기가 계속 술 먹고 계속 나쁜 짓을 하는데 핍박 받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게 핍박 인가요? 그게 박해인가요? 성도가 환난을 당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울은 오늘 본문 5절에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 성도가 환난을 당하는 이유_고린도후서1:5-7, 히브리서12:1-13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_고린도후서1:5-6  

 

아니 조금 말이 웃기지 않아요? 내가 환난을 당하고 내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고린도교회 성도인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기 위해서다. 그러면서 바울이 하는 말이 뭐냐면 내가 받는 고난이 너희가 위로를 받기 위함인데 너희도 그 위로를 가지고 뭐하기 위함이라? 고난을 통과했으면 좋겠다. 쉽게 말하면 내가 당하는 고난 고린도교회 성도들 너희도 당하면 좋겠다. 사실 이 환난, 고난에 대해서 신학자들이 말이 많습니다. 8절에 보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 대한민국 아시아가 아닙니다. 거기에 머물고 있는데 거기서 고난, 환난을 당했다. 또 9절에 보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신학자들이 이것에 대해서 잘못된 주석을 달았습니다. 어떤 주석이냐면 바울이 감옥에서 핍박을 당했나보다. 바울이 진짜 죽을 위기를 당했나보다. 그런데 그것은 완전 잘못된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지금 감옥에 없을뿐더러 바울이 감옥에 갔더라도 바울은 로마 시민권자라 함부로 몸에 손을 댈 수 없었습니다. 바울은 안전가옥에 있었습니다. 로마 병사들이 바울을 보호해주는 가옥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맹수들이 있는 경기장에서 사자를 만났다 이렇게 표현하는 신학자들이 있는데 다 잘못된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설교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지금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이 표현이 바울의 목숨이 위태로운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렇게 보는 것은 맞을 수 있습니다. 바울을 싫어하는 유대조직이 바울을 죽이려고 자객을 보낸 것은 맞습니다. 그거에 대해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면 일리는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바울의 배경을 보면 그 내용이 아닙니다. 바울이 사형 선고를 당했다, 내가 살 소망을 잃어버렸다 이 말은 자기가 예수님 믿고 스스로 그 길을 가고 있다는 표현 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내가 복음을 위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과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내가 스스로 사형선고를 택했고 내가 스스로 살 소망을 끊었다 이런 표현이 훨씬 맞는 표현입니다.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있나요? 내가 받은 고난, 너희도 받기를 원한다 이 말은 진짜 너희가 나처럼 예수님 믿기를 원한다. 너희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믿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 그러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아직 예수님으로 새롭게 거듭나지 않았고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체험하지 않았고 그래서 지금 너희들이 겪는 문제가 문제가 되는 거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가 나처럼 정말 예수님을 만난다면 너희에게 고난과 환난이 있을 것인데 그 고난과 환난과 함께 동시에 주님의 위로도 있을 것이다. 히브리서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5.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_히브리서12:1:-8 

 

여러분 사도 바울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징계가 없는 아들이 아들이냐? 징계가 없는 아들이 진짜 아들이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끄러움을 참으시고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고난당해서 너희들을 아들들 삼아주셨는데, 너희에게 반드시 징계가 있고 꾸지람이 있을 것이다. 왜요? 그게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10. 그들은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 11.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12.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13.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_히브리서12:10-13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은 우리를 징계해서 끝장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진노와 징계는 다릅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거룩함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그래서 우리가 그 징계를 통해서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도록. 어그러진 모든 것들을 고침 받게 하시려고 우리를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 구원 받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는 반드시 뭐가 있죠? 친 자식이 되려면 반드시 과정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짜 구원 받은 백성은 교회 등록해서 다니는 것이 아니고 주일에 기독교인이다 해서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고 종교가 뭐에요? 하면 나 기독교인에요 이런 것을 쓰는 것이 아니고 이런 고난, 이런 징계를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고난은 뭐에요? 바울이 이야기하는 고난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새 사람이 되면 죄를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삶입니다. 은혜 받기 위해 우리 삶을 조정하는 삶입니다. 내 편리한대로 살면서 은혜 받을 수 없어요. 내가 하고 싶은 삶을 살면서 신앙생활 할 수 없습니다. 내 마음대로 살면서. 우리 아이들이 그렇잖아요. 한빈이가 그럽니다. 아빠, 나는 왜 하루 종일 놀고 하루 종일 티비 보고 싶고 아이스크림만 먹고 살고 싶은데 왜 그렇게 못 살아? 아주 심오한 철학적인 질문입니다. 왜 공부해야 되고, 왜 밥은 이렇게 먹어야 되고, 왜 아이스크림은 하루에 한 개 이상 먹으면 안 되고, 티비는 왜 하루종일 못 봐? 그 나이에는 아주 심오한 질문입니다. 설명해주셨습니다. 네가 만약에 그렇게 살면 바보가 되고 거지가 되고. 내 자식이 아니고 그런 거지 뭐. 저도 철학적으로 심오하게 답변을 해줬습니다.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그래서 부모님이 혼내면 어린 마음에 당시에는 마음에 상처도 되고 아빠가 밉고 엄마가 밉고 이럽니다. 그렇지만 커서 알잖아요. 그런 부모가 좋은 부모라는 것을. 하나님도 똑같습니다. 우리를 사생아로 두고 싶지 않으신 것입니다. 사생아는 천국에 가지 못하는 백성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구원에 관해서 깊고 두껍게 가지고 가야 합니다. 무겁게 가지고 가야 합니다. 주일날 교회 가면 나 천국 갈 수 있어. 아니요, 절대 못 갑니다. 이 고난, 징계를 통과하지 않고 절대 구원 받지 못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고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내가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 않는데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죠?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이런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 속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곁에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그래서 보내신 분이 성령입니다. 성령의 영어 이름이 뭐죠? 위로자이십니다. 성령은 위로자입니다. 우리 옆에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우리가 고난을 지나가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지할 때마다,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할 때마다 성령께서 우리를 옆에서 위로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육체를 입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오해와 고난, 모욕을 당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강력한 구원자, 정복자, 왕을 원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데 예수님은 연약해보였습니다.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그것에 실망한 군중들은 전부 예수님을 외면하고. 그러니 바울이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을까요. 사실 오늘 바울도 그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개척한 교회인데  성도들이 신분을 요구합니다. 당신 진짜 사도 맞아? 당신 왜 이렇게 연약해? 왜 이렇게 힘이 없어? 이런 식으로 바울을 엄청 비아냥댔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자기가 개척한 교회인데도. 그래서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당한 고난, 너희도 당했으면 좋겠고, 내가 받은 위로, 너희도 받았으면 좋겠고. 그래서 그거에 대해서 고린도후서에 하나하나 설명을 하는데 바울의 그 마음에 진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복음을 경험한 그 간증들을 하는 내용들이 고린도후서의 내용입니다. 사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포기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명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자존심이 바닥을 쳐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뭐에요?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1장 9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_고린도후서1:8-11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_고린도후서1:9 

 

고난의 본질은 하나님만 의뢰하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에 반드시 고난을 통과해야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는 죄인인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떤 존재로 만드시냐면 우리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우리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옛 사람과 새 사람의 차이는 그것뿐입니다. 우리는 어떤 도덕적인 기준을 가지고 옛 사람, 새사람을 평가하는데 그것은 시대가 다 다르고 역사가 다르기 때문에 도덕적인 평가는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유럽에 가면 물이 다 석회수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이 만들어 먹는 것이 뭐에요? 맥주입니다. 거기는 생수가 맥주 값보다 비쌉니다. 우리나라에서 술 먹지 말라는 말과 유럽, 미국에서 술 먹지 말라는 말이 억양과 뉘앙스 이런 것이 다 다릅니다. 우리나라처럼 1차, 2차, 3차라는 문화도 없습니다. 맥주 한 잔, 와인 한 잔 놓고 3-4시간씩 이야기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취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술 취하지 말라고 이야기했겠지만. 우리는 술이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술을 경계하도록 설교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맞게. 그런 거지 그게 본질은 아닙니다. 진리는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옛 사람과 새 사람이 변화되었다는 것은 오늘 바울이 정확히 이야기했습니다.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우리를 의지하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이 우리가 스스로 사형선고를 받은, 스스로 고난을 통과하고 징계를 받은 그 본질, 그 이유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만 의지하는 인생이라뇨? 하나님만 의지하는 인생이라뇨? 얼마나 감사하고 축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입니까.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산다. 하나님만 정말로 전적으로 의지하고 산다. 그게 모든 크리스천의 꿈이고 비전 아닌가요. 우리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산다. 그게 건강한 교회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의 삶 아닙니까? 고난을 통과해서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그게 바로 축복된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게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신 당신의 축복입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사람이 천국에 입성하는 것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이 하나님이라고 믿는 사람이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복음으로 인해서 고난을 받아서 소망도 없고 사형선고를 받은 거 같아도 결국 진짜 소망이 생기고 우리는 죽었지만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처럼 나는 죽고 예수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형선고를 그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는 죽었다. 나는 완전히 죽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거야. 그 자랑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지. 우리가 그렇게 살면 하나님이 위로해주실 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에 보니까 우리를 건져주신다고 합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려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면 우리 인생을 붙잡아 주신다고 합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이라는 것이 뭘까요?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위해서 진짜 고난 받는 거, 나중에 사도 바울의 간증에 나오지만. 우리가 복음 전하다가 당하는 핍박도 있겠죠, 진짜로 그런 게 있습니다. 선교지에 가서 복음 전하다가 죽은 선교사님들도 많으니까. 그렇지만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 뉘앙스가 아니고 내 죄로 인한 고난인 것입니다. 여러분 이거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죄를 짓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해서 죄를 짓고 또 예수님을 만났지만 아직 새신자이기 때문에 아직 연약해서 짓는 죄로 인한 고난, 고통. 그런데 내가 복음 때문에 그 삶을 멀리하고 새 사람이 되려고 하는 그 고난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당해야지. 아니요.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내가 새 사람이 되는 고난입니다. 여러분 이게 이해가 되십니까? 제일 쉬운 표현은 자식입니다. 한빈아, 네가 공부는 왜 하냐? 아빠를 위해서 하냐? 엄마를 위해서 하냐? 맞아요, 엄마, 아빠도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엄마, 아빠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인생 똑바로 살라고. 자기 인생 휘둘리지 말고 살라고. 지혜가 있고 지식이 있고. 자기 인생 세상에서 제대로 살라고 공부하는 거잖아요.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한 고난 이러면 마치 하나님, 내가 복음 전하다가 고난당했는데.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그거처럼 교만한 말이 어디 있는지. 여러분 그런 간증을 주의하세요. 내가 교회에 헌신을 얼마나 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축복을 주셨는데. 위험한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거는 정말 예수님으로 거듭난 사람의 간증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내가 복음을 위해서 헌신했는데. 그래서 하나님이 축복을 주셨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있어요? 우리가 진짜 복음을 고난을 당했나요? 우리 그럴 능력이 있나요? 아니잖아요. 복음을 위한 고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변화되는 거 아닙니까? 내가 죄에서 벗어나서 은혜의 사람이 되고 예배자가 되고 하나님 의지하는 사람이 되는 거 아닙니까? 그 일에 하나님 앞에 무슨 자랑할 것이 있습니까? 무슨 세상에 간증 할 것이 있습니까? 그게 복음을 위한 고난이라는 이중적 표현을 사도 바울이 쓰는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은사 받은 게 이렇고, 교회 위치는 이렇고, 내가 이렇게 사역을 해서 이런 열매를 맺었는데 이러고 있으니까. 너희가 진짜 예수 그리스도로 변화됐냐? 새 사람 됐냐?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의 그릇된 삶에서 오는 고난들, 그거 하나님 앞에 나와 무릎 꿇고 회개하면 하나님이 위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려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진짜 회개하고 정말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해서 무릎 꿇고 기도하시고 예배에 나오시고 예배  드리면 거기에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그런 행위가 없으면 위로를 맛 볼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열심히 다녀도 회개 없이는 기쁨이 없습니다. 어떤 분이 저에게 메시지가 왔습니다. 목사님, 회개를 너무 많이 강조하시는 거 아닙니까? 성도들이 눌리겠습니다. 네? 그럼 예수님 안 믿어야죠, 성경을 읽어보세요. 성경을 읽으면 눌려요 안 눌려요? 성경 자체가 회개의 책입니다. 죄에서 회개하라는 건데 그게 왜 눌릴 일이에요? 감사할 일이지. 너를 거기서 건져줄테니까 깨달으라는 건데 예수님 의지해서 벗어나라는 건데 그게 무슨 눌릴 일인가요? 목사가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회개를 너무 많이 말하면 성도들이 눌린다고 합니다. 그게 신학의 무서움입니다. 값싼 구원론자들, 세속신학자들. 회개라는 단어를 안 씁니다. 아예 안 씁니다. 치리도 없습니다. 나중에 고린도후서에 나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왜 너희 안에 범죄한 사람을 치리하지 않느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왜? 그 사람 때문에 교회가 완전히 풍비박살 났으니까. 그것은 나중에 다루겠지만. 그 정도로 우리 안에 있는 죄를 끄집어내야 합니다. 그 죄 하나가 우리 전 삶에 영향을 주고 물들게 하고. 어떻게 우리가 회개를 하지 않고 살 수 있어요? 회개는 예수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무릎 꿇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나를 아십니다. 내 모든 삶이 주님이 만지시도록 내어드리는 것. 그게 예배이고 회개입니다. 그리고 그게 우리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고 거룩하게 하시려고 정말 복음에 합당하게 하시려고 고난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징계를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그 징계가, 그 고난이 우리의 삶에 있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에게도 고난이 있고 징계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나중에 간증할 수 있기를. 바울처럼. 이 고난 때문에 내가 죽은 자 가운데서 나를 살리신 하나님만 의지하게 됐어. 하나님만 바라보게 됐어.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말씀에 순종해서 사는 삶을 살게 됐어. 하나님의 위로가 느껴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그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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