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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2-09-25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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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09월 25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산당을 제거하라
본 문 : 신명기 12:2-7

 

 최영익 목사

 

오늘 말씀을 증거 하기 전에 이스라엘의 오늘 말씀의 배경이 되는 간단한 역사를 말씀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아브라함 이후에 출애굽을 지나서 40년의 광야생활을 마치고 마침내 가나안에 들어갔던 이스라엘. 그런데 그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이제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왕으로 세우고 싶습니다. 라고 요구를 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겼던 이스라엘은 사사기 시대를 지나면서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기를 싫어했고 다른 민족들처럼 이방인들처럼 우리 맘대로 하고 싶어요. 하나님이 왕이 아니라 우리 마음대로 우리가 세운 왕으로 사람을 세우고 싶어요. 요구하게 되고 하나님이 그것을 내버려 두셔서 사울을 초대 왕으로 세워주십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는데 처음에는 겸손 한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본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반복되는 죄악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버려지게 됩니다. 사울이 범했던 죄악이 크게 3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사무엘상 13장에서 블레셋과 전투를 앞두고 제사장 사무엘이 오기도 전에 자기 마음대로 제사를 지냅니다. 당시에 왕과 제사장의 역할이 완벽하게 구분되어 있었는데 월권을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역을 한 것입니다. 불순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진노를 사게 됩니다. 15장에서는 하나님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기회를 주시는데 아말렉을 진멸하라. 그런데 아말렉을 진멸하지 않고 좋은 것은 내버려주고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만 진멸합니다. 역시 불순종합니다. 그 때 사무엘이 유명한 말을 합니다. 사무엘상 15장에서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 당신이 지금 하나님 앞에 불순종 했다.그러므로 하나님이 당신을 버려서 이제는 떠날 것이다. 그렇게 사울이 하나님께 버려지게 됩니다. 사울이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하나님께 버려지고 왕위를 잃어버릴 것 같으니까 28장에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자 하나님이 아닌 무당에 찾아가서 신점을 의탁하는 파렴치한 짓까지 하게 됩니다. 이런 죄악의 결말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고 이후에 다윗이라는 왕이 하나님께 다시 세워주시게 됩니다. 하나님께 세워주신 다윗. 정말 충성된 일꾼이었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길 다윗을 내 마음에 꼭 맞는 사람이다. 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실 정도로 성경에 기록될 정도로 다윗은 하나님께 충성된 일꾼이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충성되었냐면 이 다음부터 솔로몬 왕부터 이스라엘 왕의 기준은 다윗처럼 하나님을 따랐는가. 다윗처럼 하나님을 섬겼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로 길이 나뉘게 됩니다. 얼마나 나라를 번성 시켰냐. 얼마나 나라가 발전했냐. 는 상관없이 그가 다윗처럼 하나님을 섬겼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로 평가 기준이 나뉘게 됩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이 다윗을 신뢰하고 계셨고 이뻐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처럼 다윗을 이뻐하시고 기뻐하셨으니 축복을 받았을까요? 받지 않았을까요? 축복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역대상 11장 9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함께하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살펴봐야 할 것이 있는데 여러분, 다윗이 잘되고 번성하고 승승장구 할 수 있었던 것은 가는 곳마다 승리하고 전쟁을 이기고 그래서 통일 이스라엘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다윗이 잘나서 입니까? 능력이 있어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역대상 11장에 증거 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다윗이 승승장구하고 통일 이스라엘까지 이룰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우리가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잘해서 내가 잘나서 내가 기도를 많이 해서 내가 무엇을 해서 이만큼 왔다고 착각 할 때가 있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 가운데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이 우리가 함께 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잘나서 우리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승리할 수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보혈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내 의로 내 선행으로 노력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예수 보혈이 우리를 덮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 순종하였던 다윗. 하나님이 다윗을 기쁘게 보셨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다윗이 축복을 받았습니다. 안타까운 것이 무엇이냐면 다윗 이후에 누가 왕이 되나요?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갈리게 됩니다. 우리나라와 같이 남과 북으로 갈리게 됩니다. 솔로몬을 생각하면 안타깝지 않을 수가 없는데 솔로몬이 어떤 인물이었냐면 처음에는 하나님을 정말 신뢰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보면 꿈에서조차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나는 다 필요 없고 지혜만 주세요. 지혜만 구했던 왕이 솔로몬입니다. 그랬던 그 솔로몬이 이방민족과 혼인하게 되고 인본주의적 생각으로 타락하게 되고 음행을 범하게 되고 우상 숭배하라는 죄명으로 나라가 갈라지게 됩니다. 나라가 갈라지는데 여기까지 왔으면 남과 북으로 이스라엘이 갈리는 이유가 우상숭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갈라졌으면 그 다음부터는 정신을 차려야 합니까? 안 차려야 합니까? 정신 차려야 합니다. 그런데 남과 북으로 나뉜 다음 그 다음 왕들이 누구냐면 남 왕국에는 20명의 틍치자가 있었고 북 이스라엘에는 19명의 왕들이 세워집니다. 하나님 말씀을 안 들어서 나라가 갈라졌으면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39명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에 기록되기를 정직히 행했던 왕들은 8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39명 중에 단 8명만이 하나님 앞에 정직히 행했으며 나머지 왕들은 우상숭배의 범죄로 타락했습니다. 북이스라엘의 19명의 왕은 모두 다 우상숭배를 하였고 그나마 남 유다의 8명의 왕들만 하나님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이것도 성경을 보면 8명도 좋게 쳐서 8명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완전히 지키고자 했던 왕들은 그 중에도 2명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시원케 해드렸던 왕, 하나님 앞에 기쁨을 주었던 왕은 8명 중에서도 단 2명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2명이 히스기야와 요시야입니다. 

 

‘5.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6.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_열왕기하18:5-6’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_열왕기하23:25’

 

하나님이 선택한 나라인 이스라엘에서 단 2명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단 말입니까. 나라를 이끌어가는 왕들이 정신 차리지 못하고 나라가 갈린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있지 않으니 단 2명 외에는 하나님을 시원케 해드리지 못했으니 나라가 온전할까요? 망할까요? 어떻게 될까요? 망하겠죠. 이 나라는 존재가치가 없어진 것입니다. 19명 중에 8명이면 20% 밖에 안 되는데 그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정말 따랐던 왕은 2명밖에 없으면 5%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이방 민족도 아니고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들이 그 정도면 존재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결국에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하게 됩니다. 19명이 모두 범죄 했기 때문에 먼저 망한 것입니다. 남 유다는 그나마 하나님을 따르고자 하는 왕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동일한 우상숭배로 인해 결국에는 586년에 예수살렘 성전이 무너지면서 멸망당하게 됩니다. 여기에서 질문하나만 하겠습니다. 아까 그나마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자 했던 왕이 8명, 그 중에서도 진짜 따랐던 왕은 2명. 6명도 2명이 있는데 성경은 분명히 6명도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정직히 행하였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구지 이 2명만 이런 왕이 없었다고 칭찬하고 계실까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이것도 성경에 있는데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2명에게는 있고 6명에는 없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6명의 왕들을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이들은 정직히 행했어. 그러나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어. 그러나 히스기야와 요시야는 산당까지 완벽히 제거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렸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또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목사님, 그것이 그렇게 큰 것인가요? 하나님의 말씀을 정직히 행했다면서요? 그런데 산당을 제거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해드리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큰 것입니까? 라는 질문을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산당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산당은 이스라엘이 당시에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에 이방인들이 산 위에 만들어놓은 우상숭배 제단이었습니다. 옛날에 우상숭배자들은 하늘과 가까울수록 자신들이 섬기는 신과 가까워질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인지 아시지요? 그래서 산당입니다. 산 위에 제단을 세워놓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산 위에 가면 하늘과 가까워지니까 더 우리의 말을 잘 들어줄 거야. 우리가 섬기는 신과 가까워질 거야. 이렇게 자기들의 생각으로 산꼭대기 위에 제단을 세워놓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해가 되나요? 참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이것이 당시의 이방인들의 문화였고 풍습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산꼭대기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를 만나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만약 그들의 생각이 옳다면 지금 우리가 어디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나요? 우리는 하나님과 멀어져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하에서 드리지만 아까 찬양을 하면서 느낀 것인데 하나님의 임재가 뜨겁게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우리의 중심에 있는 것이지 우리의 마음과 뜻이 다할 때 있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고백하고 찾을 때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만나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당시의 우상숭배자들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헛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력과 의가 필요했습니다. 내가 열심히 산에 올라야지. 내가 열심히 무언가 해야지. 해야지. 해야지. 그래서 산꼭대기에 산당을 지어서 자기들끼리 예배를 드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구지 우상숭배자들의 어리석은 신앙, 높은 곳으로 올라야 신과 가깝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찾으면 만날 수 있는데 그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풍습이 과거에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나라들에 신앙의 현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정복할 때 이런 더러운 신앙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 그들의 생각과 문화를 따라가지 말라. 그래서 완벽하게 산당을 제거하라. 라는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리석은 모습을 따라하다 보면 이스라엘 역시 신앙이 타락할 수 있고 변질될 수 있으니까. 처음부터 제거해버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5장과 갈라디아서 5장에 동일하게 증거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진다.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했던 것이 나중에 크게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우리의 눈을 사로잡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지 못하게 애초에 산당을 제거해서 그들의 문화와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해주셨다는 것입니다. 

 

‘51.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52.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깨뜨리며 산당을 다 헐고_민수기31:51-53’

 

하나님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부터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만약에 내 말대로 행하여서 가나안에 들어가면 우상들 다 부셔 버리고 산당을 제거해라. 그것들 그냥 두면 너희가 변질되니 다 없애버려라. 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스라엘에게 산당을 제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의 헛된 우상과 풍습을 따르지 말고 오직 하나님 말씀만 따르라는 강력한 명령이었습니다. 그럼 이스라엘은 산당을 제거해야 할까요? 하지 말아야 할까요? 산당을 제거해야겠죠. 그러면 그 당시에 이방인들은 산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산당이 없으면 이스라엘은 당시에 어디에서 예배를 드렸을까요? 다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정복하기 전에 40년을 광야에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광야에서 신앙의 훈련을 받은 것이 무엇이었나요? 하나님만이 왕이시다. 하나님만이 구원이시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시다. 이것을 철저히 훈련받았습니다. 이방인들이 섬기던 헛된 것들, 사람의 손으로 만든 나무나 돌 따위가 아니라 하나님만이 온 세상의  창조주이심을 훈련받았던 것입니다. 광야의 훈련 40년을 지낼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방민족과 구별된 예배의 단을 세우라고 말씀을 주십니다. 이방인들이 산당을 지어서 멋대로 우상숭배를 한다면 너희는 내가 예배할 수 있는 단을 줄게. 그 단이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임한 곳.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 곳. 성막을 중심으로 성막에서만 예배하고 이동하면서 이스라엘은 비로소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 공동체로 세워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방인들에게는 산당이 존재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성막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성막이 존재하는데 산당이 필요 있습니까? 없습니까? 필요 없습니다. 이방인들의 풍습을 따르는 산당은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산당은 구지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지 않아도 없애야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산당 폐기해라. 너희에게는 성막이 있다. 너희는 나만 바라보아라. 40년 동안 훈련을 받았는데 이제는 나만 바라볼 때도 되지 않았니. 이방인들을 따라가지 말아라. 그래서 산당을 제거하라고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산당 제거를 말씀하시면서 가나안에 들어가서 너희가 지킬 것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오늘 말씀입니다.

 

‘2.너희가 쫓아낼 민족들이 그들의 신들을 섬기는 곳은 높은 산이든지 작은 산이든지 푸른 나무 아래든지를 막론하고 그 모든 곳을 너희가 마땅히 파멸하며 3.그 제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 4.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 5.오직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계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 6.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7.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_신명기12:2-7‘

 

하나님께서 두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것이다. 첫 번째는 산당을 제거해라. 그리고 나서 신당 제거하고 나서 이방인처럼 하지 말고 내가 말하는 처소에서만 예배를 드려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는 우리 마음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편의대로 내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는 나를 위해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배는 하나님 말씀 그대로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택한 처소에서만 드려라. 그 택한 처소가 어디였나요? 출애굽동안은 성막이었고 성막이 실로로 바뀌고 나중에는 솔로몬이 예루살렘 성전을 세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는 어디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할까요? 성전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방인의 풍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예배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야 함이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풍습을 따르면서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당시에 이스라엘의 상황과 지리적 현실을 고려하면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은 유다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예배드리기가 쉽습니다. 반대로 멀리 있는 사람들은 어렵습니다. 예배드리려면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몇 날 며칠을 걸어야 했습니다. 이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목사님, 멀리 있는 사람들은 몇 달을 걸어야 할 수 있는데 그래서 산당을 둔 것이 아닐까요? 마음이 중요하잖아요. 지쳐서 몇 달을 걸어가 예배를 드리려고 하면 지쳐서 예배를 제대로 드릴 수 있겠습니까? 마음이 중요하니까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산당을 둔 것이 아닐까요?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이 틀립니다. 왜일까요? 예배는 내 편의를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입니까? 그러면 내 생각과 내 편의를 따라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까? 말씀을 따라야 되겠지요. 불편한데. 가기 힘든데. 제대로 드리자. 중심이 중요하잖아. 이것은 말은 그럴듯한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작부터가 하나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고 시작부터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예배가 아니라 나만을 위한 쇼, 나만을 위한 예배, 자기만족을 위한 예배에 불과한 것입니다 산당 예배의 본질이 이것이었습니다. 말은 그럴듯합니다. 중심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알고 보면 결국 나 편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내가 멀리가면 힘드니까. 내가 멀리 가면 어려우니까. 지치니까. 그런데 뭔가는 해야겠어. 유대인이고 이스라엘 민족이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니까. 무엇인가 보여줘야겠어. 그러니까 산당에서라도 제사를 지내면서 하나님을 믿는 척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나는 이만큼 하고 있다. 나는 이만큼 예배드리고 있다. 나는 이만큼 하나님 섬기고 있다. 스스로 자기만족하며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지만 이것도 말만 그럴 뿐 산당에서의 예배는 자기 힘든 것을 감추기 위한 자기 합리화밖에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 받으실 수 있겠습니까. 산당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철저한 자기중심적인 예배에 불과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신앙.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아니라 자기 의를 높이기 위한 쇼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당 제사의 본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연약함, 악한 죄 성을 아시기 때문에 산당을 처음부터 제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 나중에는 이렇게 된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은 말할 것도 없고 북이스라엘을 먼저 설명 드리면 북이스라엘은 솔로몬 이후에 나라가 나뉘었는데 여로보암이 초대 왕으로 가는데 예루살렘이 남유다에 있었습니다. 그러면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려면 남유다로 가야 합니다. 북이스라엘 왕이었던 여로보암이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백성이, 내 나라 사람들이 남유다에 가서 예배드리다가 마음이 빼앗겨서 남 유다에 정착하면 내 나라의 힘이 약해지지 않을까. 내 왕권이 약해지지 않을까. 걱정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왕권이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여로보암이 우리도 예루살렘과 같은 제단을 만들자고 해서 금송아지 제단을 세웁니다.  북이스라엘은 초대 왕부터 그 짓을 했으니 그 다음 왕부터는 그 곳에서 제사한 것입니다. 예배가 아니라 그냥 우상 숭배한 것입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우상 숭배하니 먼저 망해버리고 맙니다. 그러면 남 유다는 예루살렘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러면 남 유다만이라도 다윗의 자손들이 왕으로 세워졌던 남 유다만이라도 제대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데 이들 조차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통치자 중에 8명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고 2명만 산당을 제거한 것이 히스기야와 요시야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아서 망한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내 편의대로 내 뜻대로 예배를 드리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것입니다. 방금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그들 자신은 당시에는 자신들이 무언가 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만족했을 것입니다. 우리 이만큼 드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시한 심판으로 멸망을 시켜버립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려 버립니다. 그렇게 북이스라엘, 남 유다 다 멸망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진짜 안타까운 것은 이스라엘을 한 번 보세요. 솔로몬 이후에 우상숭배를 하다가 나라가 갈렸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우상숭배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하다가 모두가 멸망당했습니다. 이만큼 하나님께 혼이 났으면 정신차여야 되겠죠. 그러나 예수님 오실 때까지 정신 차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도 예루살렘의 성전을 보면.  다시 성전이 세워지고 예수님이 오셔서 예배의 모습을 보니까  여전히 과거와 다름없는 예배를 똑같이 드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3.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_요한복음2:13-14’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어떻게 예배를 드리나 보러 가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유대인들, 예배를 드리려고 예루살렘까지 왔습니다. 혼이 난 것을 기억하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예배를 드리고자 예배자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장사하고 있었습니다. 이것 역시도 쇼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런 예배가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도 편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오늘 말씀에도 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택하신 처소에서 예배를 드려라. 그리고 처소에 가서 예배를 드릴 때 흠 없는 제물을 준비해서 가져가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가까운 곳이면 상관없지만 멀리서부터 제물을 가지고 가려면 힘들겠죠. 부산에서 여기까지 소를 끌고 온다고 생각해보세요. 힘들겠죠. 그리고 출발할 때는 흠 없는 제물이었는데 걸어 오다보면 흠이 생깁니다. 그래서 편의를 위해서 성전 근처에서 예물을 준비해 라고 처음에 봐줬던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존재가 다들 아시다시피 어떻게 됩니까? 그대로 갑니까?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 처음에는 호의로 그렇게 했지만 변질되고 나중에는 서로간의 이익을 위해서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흠 없는 제물을 사다가 손해가 나면 안 되니까, 그리고 파는 사람들은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장사 현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제사장들의 타락과 관련되어있었습니다. 당시에 제물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에 흠 없는 제물을 조심해서 가져갔는데 제사장들이 안 받아준 것입니다. 그러면 제물을 준비해야하니 사야합니다. 타락과 물질들이 연결이 되면서 예배자들도 가서 사자라고 타락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니 편의를 봐줄 필요가 있습니까? 없겠지요. 그래서 처음부터 산당도 제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고 예배도 예루살렘에 어떻게 가야 하나요? 처음부터 준비해서 가야하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질되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편의가 아니라 말씀 그대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신명기에 무엇이라고 증거하냐면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인간의 욕심과 편의가 변질되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힘들어도 어려워도 예배자들은 말씀대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의 편의상의 이유로 그러하지 않았다가 또 다시 망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은 만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나 이 만큼 멀리서 걸어왔는데 예배드리려고 이것 나 인정해주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면서 자기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떻게 하십니까? 그들 스스로 만족하는 쇼에 불과한 예배에 대해서 예수님이 이렇게 하십니다.

 

‘15.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_요한복음2:15-16’

 

예수님이 화냈습니다. 성전에서 다 엎어버렸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는 곳이고 하나님께 전심으로 예배를 드리는 곳이지 인간의 만족과 편의를 위한 곳이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서는 과거 산당과 같은 헛된 모습이 반복되고 있었고 예수님은 크게 혼을 내셨습니다. 예수님께 한 번 혼이 나고 끝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처럼 또 하나님의 심판을 받습니다. 나라는 로마에 의해 멸망당해 없어졌고 예루살렘 성전 역시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잘못된 예배, 자기중심적인 신앙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오고 말았습니다. 과거에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이 예배를 똑바로 드리지 않았다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후에 예수님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전히 쇼에 불과한 예배를 드리고 있다가 예수님께 혼이 나고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성전까지 파괴되었습니다. 그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지금,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지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과거 산당에서처럼 예루살렘에서처럼 지금 예배는 내 중심적으로 내 만족만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착각하면서 스스로 난 이만큼 하고 있지. 섬기고 있지. 만족하고 있지 않습니까? 코로나를 지나면서 당연해 진 것이 온라인 예배입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 중에 걱정되는 것이 있는데 과연 주일을 제대로 섬기는 예배자들이 얼마나 되는지 저는 걱정이 됩니다. 확실한 것은 코로나 후에 이제는 꼭 교회에 가지 않아도 마음과 중심이 중요하지 하면서 집에서 예배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이것은 변질되기 시작하면 우리가 오늘 보았던 산당 제사와 비슷하게 흘러갈 수 있습니다. 말만 그럴듯하게 할 뿐 온라인이 편하기 때문에 내 편의와 만족만을 위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되지만 본질은 내 몸이 편한 예배를 드리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 편의와 만족만을 위한 신앙. 오늘 보았던 산당에서의 우상숭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저 보이기 위해서 마지못해 성전에서의 희생제물을 샀던 예배자들과 다를바 없다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온라인예배가 잘 못되었습니다. 온라인예배를 드리지 마세요. 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 아내와 자녀도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제가 이 자리에 있으니까.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서 말씀했듯이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만나주시고 언제 어디서나 무엇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을 예배 할 수 있습니다. 이 땅 어디든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지 않는 곳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배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예배이어야 합니다. 내 만족이 우선이라면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이 아니라 내 만족이, 내 생각이, 내 편의가 우선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처소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처소가 어디입니까? 교회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유일한 처소가 있는데 그곳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_요한복음14:6’

 

예수님이 아니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만 우리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복습하면서 봅시다. 제가 중요한 것을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처소가 있고 그 처소에 갈 때 우리가 직접 제물을 직접가지고 가야합니다. 오늘 날 우리를 보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처소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제물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까? 로마서12장에 이렇게 증거 합니다. 

 

‘1.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_로마서12:1-2’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예수님 안에서 예배를 드려라. 예수님 안으로 갈 때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가지고 가라. 세상을 따르지 말라. 세상에서 편의를 따르고 편의를 제공하고 너의 생각대로 하지 말라. 말씀을 쫒아가서 오직 분별하여 하나님 영광만을 위해 예배를 드려라. 이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세상의 편의와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안에서 모든 힘을 다해 뜻을 다해 몸을 다해 나 자신을 제물로 삼아 전심으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라는 것입니다. 이리저리 끼워 맞추며 말씀을 이용해서 신앙에 합리화를 시킨다면 이스라엘 같이 쇼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런 쇼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받지 않는 것에서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온전한 예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온전한 예배가 무엇입니까?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예배입니다. 말씀대로 예수님으로만 드리는 예배입니다. 말씀대로 내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런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이 기뻐 받아주시고 다윗에게 칭찬을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도 너희는 내 마음에 꼭 맞는 자다. 라고 칭찬을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내 만족과 합리화를 위해 말씀을 이용하여 드리는 산당 제사 쇼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섬기는 그 영적예배로 영광을 돌리시는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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