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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

2022-12-18 주일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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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8일 가스펠교회 주일예배
제 목 : 우리의 싸우는 무기
본 문 : 고린도후서10:1-18

 

 오승주 목사

 

- 사도바울의 글과 말_고린도후서10:10-11

 

중국에 가면 두 종류의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가 두 종류다. 단순히 우리처럼 침례교, 장로교가 아니라 국가 정부 공산당과 상관있는 3자교회가 있습니다. 3자 교회는 교회 건물도 지을 수 있고 공식적으로 예배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공산당이 검열을 합니다. 교회 안에는 주석의 사진도 걸려있습니다. 공산당이 인정하는 교회들이 있고 또 공산당과 상관없이 나는 공산당의 검열을 받지 않고 성경말씀을 믿고 따르겠다고 하는 교회가 있는데 가정 교회라고도 하고 흔히 이야기하는 지하교회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왜 가정교회라고 하냐면 이들은 공식적으로 모일 수 없으니 흩어져서 가정에서 모인다고 해서 가정 교회. 혹은 보이지 않는, 실제 지하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하세계에 있다고 해서 지하교회라고 합니다. 가정에서 모아야 들키지  않고 예수님에 대해서 들을 수 있고 양육 받을 수 있고 또 그들이 예배할 수 있기 때문에. 제가 지하교회에도 가보고 3자 교회에도 몇 번 가보았습니다. 3자 교회가 더 뜨거울까요? 가정교회가 더 뜨거울까요? 3자 교회는 실제로 박수도 치고 드럼도 치고 신디도 있고 우리처럼 예배 하지만 지하교회에는 그런 게 없습니다. 옆집에 들키면 안 되니까 소리 내지 않고 박수를 칩니다. 몸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열렬히 세게 치는지. 내가 느끼는 뜨거움은 전 세계 어느 교회에서도 중국의 가정교회에서보다 뜨거움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요즘 아프리카 남미에서 순복음교회가 엄청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난다고 해서 보면 예배를 2-3시간을 드리지만 중국의 가정교회만큼 뜨거움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로 중국에 설교를 1시간정도 준비해서 가는데 끝나고 가질 않습니다. 한국에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겨우 1시간 하고 가느냐. 2-3시간 꼼짝도 하지 않고 눈동자 흐트러짐 없이 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주로 가정교회 다 보니 그런 가정에서 모여 기도하고 양육 받고 전도하는데 이들이 모여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심하면 죽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저 사람들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구나.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모순된 이야기이지만 중국 공산당 정부가 누가가 진짜 하나님의 사람인지 분별해주는 것입니다. 제가 감히 그들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으로 공산당이 분별해 주고 있는 것인가요? 그들이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다라고 분별해 줄 수 있는 기준이 고난입니다. 그들이 모여서 발각되면 감옥에도 가고 처형도 당하는데 고난, 핍박이 두려우면 못 모입니다. 그들이 모여서 주의 복음을 위해서 전파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은 고난과 핍박이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 사람들이 진짜 믿음의 사람이구나. 분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C.S. 루이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평상시 삶으로는 절대 알 수 없다. 우리에게 고난이 왔을 때 위기가 올 때 우리의 신앙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핍박이 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지 교회에서 주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는지 그것은 핍박이 와야만 알 수 있다. 그것처럼 실제로 공산당 정부에서 지하교회, 가정교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분들의 신앙은 진짜 아닐까. 오늘 사도바울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스스로 사도가 되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이 고린도교회가 무엇이라고 비난하고 있는 장면이나요. 사도바울은 글만 잘 쓰지 실제로 보면 말도 어둡잖고 생긴 것도 이상하고 대머리에, 별 볼 일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바울의 로마서, 서신서를 보니 와 이렇게 보지만 역사적인 기록에 보니 사도바울이 말을 못했다고 합니다. 말주변이 없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우리는 사도바울에 대해서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얼마나 말주변이 없었으면 오늘 고린도교회에 거짓선지자들이 와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유혹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기다리는 사도바울이, 너희들에게 복음을 준 사도바울이 생각해봐라. 글이나 잘 쓰지 실제로 너희 앞에 와서 하는 말들이 어디 들을 법한 설교가 되냐. 라고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생긴 것이 대머리에 다가 볼품없습니다. 맨날 못 먹고 맨날 감옥에 있고 맨날 여행만 다니니 행색이 얼마나 볼품이 없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단한 교수다. 대단한 신학자다. 대단한 전도자다. 목사다. 이렇게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빛날 것 같고 완전히 멋들어지는 옷 입고 다닐 것 같지만 이사야 말씀을 보세요. 볼품없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볼 때 예수님은 볼품없는.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고 실제 예수님은 사역하는 내내 볼품이 없었습니다. 가난한 자들과 어울릴 정도로. 제가 설교를 준비하는데 양복을 입고 설교하는 것이 맞나.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실제로 바울은 행색이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사도바울은 스스로 사도가 되었다고 나는 사도라고. 사도라는 말은 예수님의 12제자를 이야기합니다. 사도시대 교부시대라고 하고. 사도 직속 제자들을 교부라고 합니다. 우리 스승은 예수님을 직접 봤어. 이를 사도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직접 보았나요? 못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봤지. 예수님의 실제를 봤을까? 안 봤을까? 논쟁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바울은 스스로 사도라고 합니다. 그 당시 분위기로 12제자 외에 스스로 사도라고 칭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짓선지자들은 사도바울의 외모와 말로 어떻게 저런 사람이 사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 말에 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다 넘어갔습니다. 거짓선지자의 말에 현혹 되었습니다. 제가 다닌 교회에서도 보통 교회에서 목소리 큰 사람이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목소리 작은 사람은 믿음이 없어서 지위를 가지지 않으냐. 그렇지 않습니다. 목소리가 작지만 믿음이 있는 분들은 그것을 섬기고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서 말하는 직분의 의미 안에는 고난 받는 종, 고난 받는 직분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고난 받는 것이 직분이다. 종은 목사, 장로님을 이야기할 때 종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앞에 수식어가 붙어야 합니다. 고난 받는 종. 종이라는 자체가 고난 받는 것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서대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장로, 권사, 안수집사. 교회가 위기가 왔을 때, 이 시대의 신앙에 직면한 핍박이 왔을 때에는 순서대로 고난을 받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서 역사 속에서 목회자가 순교자가 제일 많은 것입니다. 부인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장로님들, 권사님들이 순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직분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바울이 나는 사도다. 라고 이야기했을 때에 거짓 선지자들이 이야기한 직분을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지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난 받는 종이 되고 싶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를 위해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았다. 바울이 유일하게 자랑한 것이 무엇인가요. 내가 받은 고난을 자랑했습니다. 자기의 사도됨을 증명하고 변증하고 위해서 너희들이 나처럼 사도로 인정하지 않느냐. 나는 사도다. 나처럼 고난 많이 받는 사도들이 있느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말이 그의 편지들은 무게가 있고 힘이 있으나 그가 몸으로 대할 때는 약하고 그 말도 시원하지 않다 하니_고린도후서10:10’

 

바울의 설교가 시원했을 것 같잖아요. 진짜 위로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번 주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바울이 얼마나 설교를 못했는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말이 시원하지 않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말씀을 묵상하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진짜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저 분은 참 은혜스럽게 생겼다. 교회에서 말합니다. 진짜 잘못된 표현법입니다. 저 사람은 진짜 말 잘하네. 저 목사님 말 잘하네. 은혜롭다. 말 잘하는 것과 은혜롭다는 같은 수식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교회가 그런 식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 모든 교단에서 정죄한 태극기 집회하면서 앞에 나왔던 목회자. 저 그 분이 하도 궁금해서 그 분 부흥 집회한 것을 찾아보았습니다. 말을 얼마나 잘하는지. 그러나 제가 느낄 때에 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저 깜짝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님 당장 내 앞에 오라고 그래! 그런 말 하는 사람을 목회자라고 따르는 성도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함부로 말하는데 성도들이나 자기가 섬겨야하는 성도들한테는 얼마나 함부로 말하겠습니까. 그러니 김집사 이리와! 오장로 이리와! 이렇게 할 것입니다. 그런 목사를 섬기지 마세요. 말이 상스러운 목사를 섬기면 안 됩니다. 절대로. 신앙을 떠나서 인격이 갖춰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다가 말았습니다. 듣을 수가 없었습니다. 확인하고 싶어서 들었는데 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역사, 하나님의 역사. 그런 외모로, 말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은 그 목사님의 육성 설교는 듣지 않았지만 그의 설교 원고를 보고 있는데. 이 설교를 듣고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다고? 도대체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설교 원고를 써서 요즘으로 따지만 성도들 한명도 안 남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졸았을까. 지루했을까. 그리고 그 당시의 설교 강단은 이런 식이 아닙니다. 목회가 저 위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도들과 높낮이 차이가. 저 같은 사람의 키 3-4배였습니다. 내려다  보며 설교하는 것입니다. 마이크도 없이 3시간씩. 설교를 3시간씩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설교를 3-4시간씩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부흥을 허락하시니까 사람들이 회개하고 술을 끊고 담배를 끊고 주 앞에 돌아오고. 미국에서요. 보스턴 커넥팅커 라고 하는데 그 성령의 바람이 줄기를 따고 보스턴에서 필라델피아까지 흘러가는데 난리가 났습니다. 설교를 들으려고 몇 시간씩 운전해서 가서. 그런데 제가 아무리 봐도 이상했습니다. 이런 설교에 역사할까?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말주변이 없었습니다. 어눌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어떤 주석에서 바울이 말을 너무 못해서 어눌하다고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바울처럼 많은 교회를 세우고 많은 영혼을 구원한 사람이 있었나요? 없으니까 바울만큼 교회를 많이 세우고 전도한 사람이 없으니 바울을 넘버원으로 칩니다. 성경 다음으로 예수님 다음으로 개인에 대해서 많이 쓰인 책은 바울 밖에 없습니다. 바울에 관한 자료들이 압도적입니다. 얼마나 바울에 관한 신학 책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런 바울이 그냥 교회만 많이 세웠나요? 고난도 엄청 당했습니다. 바울처럼 고난당하고 예수님 이상으로 고난당한 종이었습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습니까. 얼마나 예수님을 따라가려고 애썼나요? 그런 바울이 스스로 사도라고 확신하는 것.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난 말 못해. 난 생긴 것도 이렇게 생겼어. 하나님이 나 같은 걸 쓰실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너무 좋고 너무 강력하고 우리 민족을 살리고 내 자녀들을 살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내가 말주변이 없고 내 외모가 볼품없지만 너무 담대하고 확신 있게 그가 글로. 그가 제일 잘하는 것이 글쓰기였으니 이 글로 복음을 얼마나 많이 전했습니까. 우리는 그런 것이 많습니다. 나는 이게 안 되고 저것이 안 되고. 그러나 알 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드러내는 것. 말이 안 되면 글로. 글이 안 되면 뭐든지. 오늘 본문에 포인트는 글을 써라. 말을 잘 해라. 이 말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가슴에 마음에 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 확신, 은혜가 얼마나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어디 가서 저 가스펠 교회 목사에요. 이렇게 말하고 다닐 때에는 그럴 정도의 삶이 뒷받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위해 고난을 당할 수도 있고 성도들을 위해 목숨도 내 놓을 수 있을 만큼. 그 정도는 되어야 가스펠 교회 담임목사지.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다음 주에 저희 교회 어떤 성도님이 병원심방을 요청했습니다. 제가 코로나 3년 전 이후로 병원심방이 처음인데 코로나 검사도 받아야 합니다. 요즘에 그냥 병원에 못 갑니다. 그런데 흔쾌히 당연히 스케줄 조정해서 병원에 위독한 성도가 있다고 해서 거긴 가야겠다. 제가 코로나 검사도 받고 가야겠다. 당연한 것입니다. 목회자라면 어디라도 성도가 요청하면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장례식도 우리 교회 성도 아니니까 장례는 제가.. 그런 나쁜 목회자 어디 있습니까. 친척 중에 누구라도. 예수님을 안 믿더라도. 우리 교회에 등록했든 하지 않았든. 어떤 집은 작년에 갔던 어떤 장례식은 아무도 장례를 치려줄 수 없는 것입니다. 집도 가난하고 사정도 있고. 목사님 혹시 장례 좀 치려줄 수 있나요? 얼마든지요. 그래야 어디 가서 가스펠교회 목사라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안 그러겠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이 비하하는 말, 그들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바울이 말 못한다. 외모가 문제 있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육신적이었는지. 얼마나 악한 영들은 그런 것으로 현혹하는지. 그러나 바울의 글은 힘이 있었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썼기 때문에 바울이 그냥 지식으로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쓴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교제와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커서 그 감동으로 썼기 때문에 바울의 서신서가 성경이 되어서 우리 손에 들려지는 것입니다. 계산해서 이 편지를 저 사람들에게 쓰면 저 사람들이 어떻게 해줄까. 이런 동기를 가지고 쓴 것이 아니라. 그의 글과 행동이 같았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진실 되게 사역했는지 얼마나 진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성령의 감동으로 살 수 있고 어떻게 하면 그 삶이 글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반대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우리의 달란트로 통해서 은혜가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글을 잘 쓰면 글로 드러나고 삶이 반듯하면 삶으로 드러나고 사역을 잘하면 사역으로 드러내고 누구라도 크고 작은 달란트를 하나님께 부여를 받았는데 모두는.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달란트를 모두가 부여 받았는데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면은 그 달란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만 그런가요? 그래서 진짜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당장 돈을 많이 번다. 저 사람이 성공했다. 저 사람이 잘 나간다. 그래서 저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가 싶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이유는 저 사람의 믿음이 진짜인가. 한결 같은가. 하나님을 정말 섬기고 경외하고 있는가. 바울이 오늘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상태가 회개하고 돌아왔기 때문에 이제는 설명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전에 그랬지. 그러면서. 그래서 다시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이기는 무기가 무엇이야. 우리가 이 핍박과 고난 속에서 승리할 수 있는 무기가 무엇인가. 결국 되어지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후회하셔도 되돌아가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았던 삶입니다. 그 믿음이 진짜인가. 하나님이 정말 우리를 평가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평가했을 때 우리가 진짜 믿음으로 살았나. 그 진실한 믿음의 사실적인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육신을 따라 행하는 자들, 그들이 생각하는 것, 육신이 행하는 것.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한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 우리의 싸우는 무기_고린도후서10:3-9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만일 사람이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줄을 믿을진대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 같이 우리도 그러한 줄을 자기 속으로 다시 생각할 것이라_고린도후서10:7’

 

너희는 외모만 보는도다. 너희는 육신만 생각하는도다. 그러면 이야기합니다. 

 

‘3.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4.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5.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6.너희의 복종이 온전하게 될 때에 모든 복종하지 않는 것을 벌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있노라_고린도후서10:3-6’

 

지금 우리의 무기는 어떠한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 아는 것을, 하나님 대적하는 것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경험했습니다. 바울이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바울처럼 똑똑한 사람, 바울처럼 훌륭한 가문, 바울처럼 돈 많은 사람, 바울처럼 뛰어난 사람이 그 시대에 없었습니다. 독보적이었습니다. 역대 하나님의 사람들 중에 바울처럼 수준 높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인물들 중에 예수님은 세례요한이 최고다. 라고 이야기했지만 세례 요한의 담대한 믿음을 이야기한 것이고 똑똑하기를 따지면 얼마나 실력이 뛰어난지. 로마서 해석이 되나요? 그의 서신서가 우리의 수준으로 해석이 되나요? 해석 안 됩니다. 그 정도로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무기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생각했던 모든 이론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굴복했습니다. 자기가 생각했던 모든 것들을 그리스도 앞에 굴복시켰습니다. 그 말은 바울이 예수님 앞에 완전히. 자기의 모든 가진 것이 배설물이 되었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가 체험된, 발견된, 경험한 바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고린도교회가 육신적으로 모든 일을 하다 보니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희가 진짜 그리스도에게 속했는지. 그리스도에 속한 것 같이 다시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주일학교 사역을 할 때 도움 받았던 미국 주일학교 역사 속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역자 중에 하워드G.핸드릭스 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그 분이 시카고의 큰 교회에 주일학교사역자로 부임해서 갔습니다. 가자마자 그 교회에 유명한 천재아이가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똑똑했냐면 성경 600구절을 암송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제가 정확히 암기하고 있는 것은 20구절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 암송대회에 나가면 무조건 1등을 휩쓸었다고 합니다. 주일학교 사역자로 오다보니 교회 목사님이 이 아이가 믿음도 좋고 성경구절 600개를 외우고 있다고 인사시키려 왔습니다. 하워드 핸드릭스 목사님은 그래요. 하고 말겠지요. 당연히 그런 것에 현혹되는 분이 아니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 교회에서는 늘 헌금을 하면 헌금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누군가 도둑질을 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지갑에서 돈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 문제가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그것을 나중에 범인을 잡게 되었는데 그 천재아이가 놀랍게도 범인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불러다가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너는 성경암송을 그렇게 많이 하는데 출애굽기 20장 16절도 모르니? 그 아이가 고개 숙이고 있다가 성경 구절 나오니 고개를 들고 목사님, 16절이 아니라 15절이에요. 목사님이 안타까워서 너는 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 못했구나.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어? 하니 그 아이가 하는 말이 들킨 것이요. 어쩌면 이것이 우리의 요즘 시대의 신앙생활을 대변해주는 이야기 같지 않으세요?  많은 분들이 착각하는 것이 교회 안에서 사역을 잘하거나 교회 밖에서 성공을 하거나 그것이 우리의 무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그것으로 부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도 전도 많이 했습니다. 저 좀 유명했습니다. 해외에서 강사로도 많이 불러주셨고. 제가 전도를 많이 하고 강사로 많이 다닐 때 혼자 있을 때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제가 혼자 있을 때 죄를 많이 짓는 것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제가 죄를 처음에 지었을 때 처음에는 죄책감이 조금 있었습니다. 남들 다 하더라구요. 그리고 사람들이 제가 혼자 있을 때 죄 짓는 것을 모르잖아요. 사람들은 제가 사역 잘하고 강의 잘하고 전도 많이 하니 사람들이 전도 잘 한다. 강의 잘 한다. 그것이 전 줄 알았습니다. 그 때 제 삶을 너무 후회합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분들이 그랬습니다. 메시지만 좋으면 되지. 설교만 좋으면 되지. 맞아요? 섞어버린 것입니다. 부패한 것입니다. 신앙이 다. 그것이 타락한 신앙입니다. 메시지만 좋고 목사님의 삶이 뒤에서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나요? 그런 목사를 섬길 것입니까. 그런 목사를 담임목사로 모시고 목회하고 싶습니까. 제가 뒤에서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으시나요? 그러면 이단 되고 사이비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 못 받는 것입니다. 성경을 잘못 보고 있습니다. 오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렇습니다. 말도 못하는 것이. 거짓 선지자들이. 사도바울이 이제 와서 거짓선지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너희들을 위해서 고난을 받았냐. 거짓 선지자들이 너희들을 위해서 핍박을 받았냐.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거짓 선지자들이 무엇을 했냐. 그들이 진짜 사도냐.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목사님이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지세요. 라고 이야기하지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지 마세요. 이렇게 설교하는 목사가 있나요?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가 그렇게 설교했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착각, 감정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구원의 확신을 삶으로 가지라는 것입니다. 경건으로 가지라는 것입니다. 예배로 가지라는 것입니다. 뜨겁게 하나님을 섬기고 두려워하는 것으로 가지라는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을. 관념으로 지식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진짜 중요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얼마나 그 시대에 미국의 성도들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그 당시 미국교회에 값싼 구원론자들이, 세속한 교회들이 많았습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뒤에서는 술 먹고 담배피고 불륜 저지르고 하니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이 그랬습니다.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가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님에 관해서 논문을 쓰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참된 신앙의 표지가 될 수 없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구원의 확신을 이렇게 확인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구원을 확인하고 있는가. 항상 감사와 찬송으로 구원의 확신을 고백하고 있는가. 그리고 구원의 확신이 나에게 늘 어떤 환경과 위기에서 은혜를 주고 있는가. 맞는 말입니다. 진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어떤 환경과 상황 상관없이 감사와 찬송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구원입니다. 내가 핍박이 와도 고난이 와도 나는 구원 받은 것이 너무 감사해. 이것이 진짜 구원 받은 사람입니다. 천국을 소유했는데 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환경이 그것을 막을 수 있나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구원의 확신은 삶으로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진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에 속했다는 것. 그것이 우리가 싸우는 무기가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사업하는 분들 많으시죠. 청년들도 많습니다. 저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의 단을 쌓으셔야 합니다. 우리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에게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성공과 여러분의 미래가 정말 하나님의 은혜 속에 있기를 원한다면 기도의 단을 쌓으셔야 합니다. 지금은 세상은 최고조로 우리에게 육신적인 것을 강조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세상의 이론, 세상의 뉴스, 언론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얼마나 강력합니까. 우리 아이들에게. 하다못해 크리스마스요? 목사 아들 오한빈도 산타 클로스가 먼저 나옵니다. 다행히 주일학교에서 특송 준비한다고 흥얼거리는 정도이지. 안 나옵니다. 얼마나 문화가 강력한지. 얼마나 세상의 문화가 강력한지. 교회에서 예수님이 오심을 축하하고 파티하고 즐거워해야하는데. 요즘 클럽에서 예수님 오심을 축복하고 파티하고. 메리 크리스마스. 술잔 들고 있습니다. 다 빼앗겼습니다. 크리스마스 앞두고 교회처럼 분위기가 축 쳐져 있는 시대가 있습니까. 저는 새벽 찬양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길거리 찬양도 회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장로님, 권사님들이 모든 노력을 다해서 가장 화려하게 성탄 장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 아이들은 눈으로 부딪히는 체험으로 예수님이 오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설교가 아닙니다.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교회가 다 빼앗겼습니다. 교회가 제일 잠잠합니다. 예수님이 다음 주에 오신다는데. 제일 한가해. 밖에 난리입니다. 그 정도로 최고조로 우리에게 육신적인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정도로 살아간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에게. 우리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당장 눈에 보이는 결과가 중요하겠지만 저는 하나님의 손길, 하나님이 당신의 때에 부어주신 은혜를 사모합니다. 그 은혜가 진짜여야 합니다. 제가 아무리 23-24년도에 우리 교회가 몇 명이 되자. 성전을 건축하자. 사역에 이런 열매를 맺자. 교역자들 모여서 회의를 아무리 해도 아무리 준비해도 준비가 헛되다는 것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 노력해도 그것이 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 자녀들처럼. 마치 자녀들을 위해서 계획도 세우고 학원도 보내고 하지만 자녀가 내 맘대로 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이 많은데 몇 년째 고민이 됩니다. 왜 고민이 되는지 아시나요? 사실 청년 사역이 많이 고민이 됩니다. 청년들이랑 같이 울어주고 웃어주고 같이 기도하고 전도하고 해야 하는데. 그런 청년들이 중직자가 되고 엄마 아빠가 됩니다. 그런데 그런 경험이 없이. 젊은 날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과 그렇지 않는 사람이 어른이 되면 완전히 달라집니다. 청년 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헌신한 사람은 상황과 환경을 이겨내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황과 환경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육신적으로 되는 것입니다. 젊을 때에 성령을 체험하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결혼해서도 늘 마음에 품고 삽니다. 아기를 낳아 키우면서도 일을 하면서도 늘 마음에 언젠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거야. 다시 하나님의 일을 할 거야. 그래서 상황과 환경에 매몰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경험이 없는 청년들.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 청년들에게 뭐하고 있는 아시나요? 직장생활은 이렇게 해라. 전문사역은 이렇게 해라. 결혼생활은 이렇게 해라. 맞아요. 이런 이야기들을 교회가 해주어야 합니다. 필요합니다. 그런데 진짜 필요한 것이 그런 것일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성령의 역사를 체험시켜주지 않으니까. 그런 교역자도 없고 어른들도 없고. 제가 모 교회에서 대학 청년부를 맡아서 사역할 때 청년들에게 금요예배에 나와서 기도하자고. 어떤 청년이 그랬습니다. 목사님, 금요예배 때에 목사님들도 안 계시고 교역자들도 없고 장로님들도 안 계시는데 왜 우리가 가서 해야 하나요? 진짜 뼈 때리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 저도 제가 설교하지 않으면 금요예배를 안 갔습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바빠서 안 갔지만 안 바쁠 때에도 안 갔습니다. 바빠서 다른 일이 있어서 안 갔지만 집에 있는데 가끔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가야하는데 그런데 안 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얼마나 타락했는지 모릅니다. 제가 제 삶을 다 말해주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지금 우리 청년들에게 육신적인 사역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두렵지 않으세요? 저 진짜 두렵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영어도 잘하고 수학도 잘해요. 미래가 창창합니다. 서울에 와서 보니 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두렵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하나님이 떠날까봐. 은혜 못 받을까봐. 예수님 모르고 커서 살아갈까봐. 어찌 우리가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있나요? 어찌 우리가 모여서 기도의 단을 쌓지 않을 수 있나요?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나요? 

 

- 내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_고린도후서10:13-18, 히브리서3:12-19 

 

‘13.그러나 우리는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그 범위의 한계를 따라 하노니 곧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 14.우리가 너희에게 미치지 못할 자로서 스스로 지나쳐 나아간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너희에게까지 이른 것이라_고린도전서10:13-14’

 

지금 사도바울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냐면 너희가 나에 대해서 말을 잘 한다. 못한다. 글을 잘 쓴다. 그런 것에 관심 없어.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길 원해. 이것이 나의 진심이야. 그래서 사도직분을 감당할거야. 고난도 능히 받을 수 있고 내가 너희들에게 그리스도 복음을 전하는 일에 고난을 받는다면 직분 감당할 거야.

 

‘성경에 일렀으되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하였으니_히브리서3:15’

 

‘이로 보건대 그들이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_히브리서3:19’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마음이 완악해지고 그들이 믿지 않아서 들어가지 못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다른 이유가 있다고 목회자들이 설교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천국에 못가는 것입니다 천국을 안 믿는데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나요?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다. 우리의 구원자다. 라고 믿지 않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나요? 하나님이 우리의 생사화복의 주관자라고 믿지 않는데 어떻게 그 분께 나아가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그 분께 나아가 기도를 안 한다는 것은 믿지 않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데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겠어요.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제가 지난주 공동의회 때 저의 교회 이전문제, 교단문제를 나눴습니다. 교회 이전해야 하나 말아야 고민하고 있는데 화요일에 전화가 왔습니다. 내 년부터 주차장을 쓸 수 없습니다. 다들 걱정하는데 저는 속으로 하나님이 등 떠미시는구나. 100% 등 떠미시는 거잖아요. 무슨 이유든 간에. 1년을 어떻게 살아야하나 고민도 많이 했지만.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저의 교회 청년들 보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아니라 너 그 정도로 기도하고 그 정도로 미지근하게 목회해서 청년들을 살릴 수 있겠어. 어떻게 성도들의 가정을 살릴 수 있겠어. 그렇게 미지근하게 신앙생활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쓰임 받을 수 있겠어. 어떻게 우리가 다시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가정이 살아나고 우리 자녀들이 다시 주님을 찾고 우리 아이들이 수련회를 가고 하나님께 헌신하고. 주어진 달란트를 최선을 다해 공부해서 사회 곳곳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것. 그 것. 그 정도로 기도해서 그런 일이 벌어질 것 같아? 하나님이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 맞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자랑하려면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안에서 자랑해. 너에게 주어진 범위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도록. 이 말은, 이 편지의 원문의 뜻은 사도 바울이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고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일으켜 세우시는데 죽음과 저주에서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건지셔서 예수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일에 나는 사도로 쓰임 받았어. 지금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 말 못해. 맞아. 나 볼품없어. 맞아. 그런데 나 뜨겁게 기도했어. 나 목숨 걸고 편지 보냈고 너희에게 찾아가려고 노력했어. 그러니 너희는 거짓선지자들에게 놀아나고 있었지. 이제 다 지나서.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싸우는 무기가 무엇인가요? 우리가 이 험한 시대에 온갖 사상과 이념이 최고조에 달한 시대에 우리가 진짜 싸워야 하는 무기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능력 아닌가요? 모든 견고난 진을 파하는 능력. 그리스도에 속해서 하나님 능력을 의지하는 것. 이것이 우리가 진짜 회복해야 될. 저는 교회사적으로 증명할 것입니다. 진짜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던 시대에 하나님이 사용하셨구나. 우리 자녀들이 우리 다음 세대들이 이 부흥을 경험하게 해 주고 싶습니다. 우리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요? 기도의 단을 쌓아야 하지 않을까요? 성령의 역사를 감화와 감동으로. 나는 못해. 나는 이것이 안 되고 저것이 안 되고. 이것이 아니라 바울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 말 못해. 생긴 게 이래. 가 아니었습니다. 나 글 쓸 수 있어. 나 감옥에 있지만 글 쓸 수 있어 내 환경은 어렵지만 글 써서 보낼 수 있어. 어떻게 해서든지 간에 자기가 마음에 담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애썼다는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교회에, 저와 여러분에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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